48화 48화 - 성철과 혜영의 비밀
“준열이 어머니가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네에?”
준열 선배가 고막을 다쳤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얘기였다.
“걱정하지마, 준열이가 입원한 건 아버님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니고... 그분이 아시면 난리가 나거든.”
“...”
“준열 어머님 좋은 분이야. 그리고 술 먹고 장난치다 실수한 거라고 내가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나를 대하는 성철의 태도나 말투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천 교수님 작업실에서 당했던 일은 까맣게 잊은 것일까.
“차 남문에 세워놨다. 지금 바로 갈 수 있지?”
“네.”
그렇게 성철의 차를 타고 우린 목동병원으로 향했다. 일산 작업실에서 혜영누나가 운전하던 바로 그 자동차였다.
자신의 친구와 약혼녀가 바람피운 사실을, 그것도 지난밤 알게 된 사람치고 성철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어 큰일을 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남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식... 싱겁기는...”
난 성철이 미리 준비한 통조림 바구니를 들고 준열의 입원실로 향했다. 성철의 말대로 병실엔 준열 선배와 형의 어머니가 계셨다. 마음 같아선 그길로 병원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난 문턱을 넘자마자 인사도 없이 두서없는 사과를 했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어머니는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학생 이름이 대영이에요?”
“네, 어머니 맞습니다.”
떨리던 목소리가 그녀의 온화한 표정을 보고서야 진정되었다.
“우리 준열이는 아직도 철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은 무슨... 그래도 학생 얼굴을 봐서 마음이 놓여요.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와 앉아요. 성철이도 들어와.”
그녀는 무슨 이유로 아들을 때렸는지 묻질 않는다. 차라리 따지거나 소리를 질렀다면 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노랗게 익은 참외 두 개가 하얀 접시에 담길 때까지 우리는 모두 말이 없었다. 눈길조차 마주치기 어려웠는지 준열 선배는 그때까지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참외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준열인 손님 왔는데 일어나 봐야지.”
그제야 준열을 얼굴을 들고 우리를 봤지만, 우린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는 어색한 사이였다.
“고, 고맙다. 문병 와줘서...”
귀를 다치면 말투까지 어눌해지는 건가. 표정과 시선 처리가 걸음마 하는 아기처럼 능숙하지 못했다.
고향은 어디인지, 군대는 언제 갈 생각인지. 준열의 어머님은 나에 대해 몇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하셨다. 이미 그녀는 내가 지방 출신의 유학생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님, 이제 차 막힐 시간이라... 저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적당한 시간에 성철이 나를 도왔다.
“어머 그런가? 내가 대영 학생 시간을 빼앗았네.”
“아닙니다. 어머님.”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준열인 몸조리 잘하고 있어.”
“그래, 고맙다. 대영이도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하고.”
준열이 밖으로 따라 나오며 사과를 한다. 준열이 내게 사과를 하다니 시트콤 같은 하루다.
“내일 퇴원이야?”
“아니, 부기 빠질 때까진 병원에 숨어 있으려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성철은 준열과 한동안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성철은 준열 선배와 혜영누나의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성철 형의 차에 올라타는 순간 긴장이 풀려서인지 막혔던 혈이 통한 것처럼 긴 숨을 쉬었다.
“휴우우...”
“어때? 생각보단 좋은 분이지?”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었다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 학교로 출발한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황했지만 창밖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성철은 모를 거로 생각했다.
“너 우냐?”
<훌쩍>
“아뇨...”
말과 달리 나도 모르게 팔로 눈물을 훔쳤다.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못 본 척 해야 했는데 미안해요. 형...’
마음속으로 몇 번씩 되뇌었다.
“울지 마라.”
“....”
“군대 올해 간다고?”
병원에서 준열의 어머님께 그렇게 말했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혜영이랑 면회 갈게.”
그의 말투에서 결혼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준열하고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아버님들끼리 육사 때부터 친구 사이였거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도 고향이 통영이야. 살아본 적 없는 고향이지만 네가 동향 사람이란 얘기 듣고 눈여겨보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 사투리는 전혀 안 쓰시네요?”
정확히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단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었다.
“실은 사투리 별로 안 좋아해.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니까 가끔 쓸 뿐.”
“네?”
“태어나기만 한 고향이라니까. 서울 산 지 20년 됐지. 어릴 땐 아버지 따라 여기저기 다녔고.”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사투리를 썼다는 뜻이니까. 점점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마초 같던 경상도 남자가 갑자기 서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준열이가 처음부터 저랬던 건 아니야.”
“....”
“원래는 준열이 아버님 진급이 더 빨랐지. 해외 파견도 동기 중에 가장 먼저 다녀오셨고...”
진안끼리도 가까웠던 둘의 사이가 벌어진 건 진급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진 거야.”
“사건이요?”
“줄을 잘못 섰다고 표현하면 내가 너무 개자식인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결론은 준열 아버님이 진짜 군인이고 애국자셨어. 우리 아버지는 신군부시절 입신을 위해 불의를 참은 비겁자고.”
그제야 어렴풋하게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난 아직 준열에게 미안하다.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화가 많이 났지만, 그래도 준열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야. 인생 대부분을 그 녀석과 함께 보냈으니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가 내년부터 출강한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들어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철이 ‘피식’ 웃었다.
“소문 빠르네.”
방금 성철은 부모의 후광을 입었다는 루머를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모교에 출강하는 게 내 목표인 건 맞아. 그런데...”
‘그런데?’
“일단 내년은 아니야. 내후년도 어려울 테고... 나까지 아버지처럼 반칙을 쓸 수는 없잖아?”
“아... 선배님...”
“네가 왜 화났는지 알아. 그런데 혜영인 나한테 과분한 여자야. 나도 앞으로 좋은 남자가 되려고 노력할 생각이고.”
나는 그제야 그가 꽤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세를 지긴 했는데, 그걸 떠나서 너한테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성철 형은 남문 앞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차 문을 닫고 인사를 하는데 조수석의 창이 내려오고, 그가 몸을 기울여 나를 쳐다본다.
“대영아, 어른이 되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올 때가 있다.”
“선배님...”
“담부턴 형이라고 불러. 우리 자주 보자!”
땀으로 축축해진 운동화 속에서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씩씩하게 버티던 감정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형!’
* * *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반소매를 입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흐릿해진 계절감에도 여름이 온 것이다.
나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고, 감정의 요동 없이 무난하고 무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수연의 마음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전만큼 그녀가 애틋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나 하림 또는 수연의 아버지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혜영누나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난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틈틈이 즐거운 겨를조차 없는 무덤덤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수연은 나를 답답해하면서도 그녀의 성격답게 재촉하거나 닦달하지 않았다. 서로 멀어져가는 상황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1학기 종강 날 아침. 나는 실기실 대신 터미널에 있었다.
맨 처음 의도는 바람을 쐬는 것이었다. 어릴 적 엄마와 살았던 강원도에 가보고 싶어 작은 배낭에 속옷과 양말 하나를 챙겼다.
터미널까지 온 김에 수연의 집까지 걸을까 생각했지만, 하림과 수연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이내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고속버스터미널엔 영서행 버스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뒤에 손님 기다리는데 좀 비켜줄래요?”
“잠시, 잠시만요.”
역시 떠오르는 목적지는 한 곳뿐이었다.
“충무 한 장 주세요.”
“통영이요?”
“아, 죄송합니다. 통영 맞습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기다리는 사람 한 명 없는 고향이지만, 수연과 흐린 기분으로 어색한 작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버스에서 깊은 잠을 잤다.
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충무터미널이었다.
여전히 승하차장의 구분이 없는 낡은 구조의 옛 건물 모습 그대로였다. 짐이랄 것도 없는 작은 가방을 메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익숙한 친구의 옆얼굴이 앞을 스쳐 갔다.
그녀는 여행용 가방을 든 남자를 배웅하고 있었는데, 둘은 연인 사이로 보기엔 이질감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남자의 나이로 봐선 부부로 보는 것이 더 어울렸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녀와 내가 작년까지 제법 친했던 친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남녀란 친구일지라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그런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던 나는 잠시 기다렸다. 나의 등장으로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둘의 애틋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남자는 올라탄 서울행 버스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복순!”
잊기도 쉽지 않은, 그녀의 이름이다.
“어마! 깜짝이야!”
입안에 물었던 사탕을 놓칠 뻔했던 그녀는 표정을 추스르더니 바로 내 팔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뭐야뭐야, 윤대영. 네가 왜 여깄어어?”
눈에 익은 그녀의 익숙한 몸짓에 옛 생각이 떠올랐다.
“너 아직 충무에 살아? 그런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아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붙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야, 한 가지씩 물어봐.”
“호호호호, 그랬나. 엄청 반갑다.”
“그래,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복순은 여전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탄력 있는 몸매, 그리고 알 수 없는 색기가 흐르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