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49화 - 복순의 몸 [1]
복순은 미술학원에서 만난 친구였다. 고2 때 충무로 전학 온 그녀는 갑자기 진로를 미술로 정했다. 공부 머리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그림 소질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미술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별종 취급을 하고 심지어 가족까지 특이한 존재로 보지만, 실상 미술학원에 모여든 친구들 상당수는 복순과 비슷한 케이스였다.
“오랜만이네...”
“그렇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히히...”
실없이 웃는 헤픈 웃음도 여전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학원 친구의 가슴에 시선이 머무르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정신이 들었다.
“뭔데? 니 왜 글케 쳐다보는데...”
그렇다. 육감적인 복순의 몸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살갗을 태운 것 같은 검은 피부와 긴 다리가 남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젤 사이로 복순의 엉덩이를 몇 번이나 훔쳐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교복 위로 불룩 솟아오른 그녀의 엉덩이... 또래의 여학생보다 발육이 좋았을 뿐 아니라 의복으론 감출 수 없는 성적 매력이 타고났다.
“아... 너 얼굴 이뻐졌다.”
엉겁결에 나온 소리였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복순은 타고난 몸매 때문에 오히려 미모가 빛을 보지 못한 경우였으니까.
“뭐라카노! 놀리지 마라...”
“아이다, 니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다.”
여고생 복순의 몸매는 우리 학교까지 소문이 났고, 미술학원 앞까지 찾아오는 남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순에게 호감을 느꼈던 수놈들은 대부분 문제를 일으키는 질이 좋지 못한 종자들이었다. 나 역시 두 번인가 선배들의 쪽지를 복순에게 전달해 준 적이 있었으니 그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니 지금 어데 가는데?”
“집.”
“집? 어데고?”
“남익동... 너는?”
“난 조기 언덕배기 위. 경천동이다.”
“그렇구나. 반대 방향이네...”
화젯거리도 바닥났고 그녀도 내게 아쉬울 것이 없으니 이제 서로 서먹한 시간을 정리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우리 다음에 또 보자. 오늘 반가웠고.”
“응 그래. 니도 학교 잘 댕기고, 고향 내려오면 연락하그라.”
“그래, 알겠어.”
지금의 복순은 귀엽고 상냥하지만, 몇 년 전 그녀의 첫인상은 차갑고 냉정했다. 주변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고, 학원에서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하이고... 이런 데서 너를 만나고...”
석별의 인사가 길어지고 있다. 그녀는 아주 잠깐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망설이는가 싶더니.
“니 밥은 묵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해서 다른 핑계를 대지 못했다. 거절하지 못할 따뜻하고 강력한 말투였다.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학창시절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어쨌거나 차갑다고 생각했던 복순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인정이 많고 친절했다. 누구에게나 밝은 웃음으로 대하던 착하고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러나 복순의 몸 때문에... 남자들이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불행해졌다. 그 당시에도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미술학원 강사와 시장통 건물에서 동거한다는 몹쓸 소문이 나버렸다. 디자인 구성을 가르치던 강사는 어릴 적 사고로 다리를 저는 못생기고 뚱뚱한 남자였는데 성격만큼은 다정다감했다.
소문 때문인지 강사는 얼마지 않아 충무를 떠났고, 복순도 미술학원을 나갔다. 그녀가 떠나던 날 복순의 미술도구와 짐을 택시까지 날라줬던 기억이 난다.
“푸훕.”
“니 웃나? 지금 내보고 웃은 기제?”
“아냐...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싱거븐 녀석...”
그녀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단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면 다른 남자들처럼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아까 그분은 남자친구야?”
인파로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자 나는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 셈.”
쌤이라고 한건지 셈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복순에게 탐탁지 않은 주제였나보다.
“니 학교 어데 다니는데?”
“H 대학교.”
“조소과?”
“응”
“우와! 서울대 아가 내 친구가 되뿔었네!”
“뭐 정말 이린기 다 있노. 서울대 아니라고!”
“안다 나도. 서울대만큼 유명한 학교 맞자네.”
“에휴...”
그녀는 못 본 사이 얼굴이 조금 변한 것 같았지만 이목구비가 자리를 잡아 더욱 또렷하고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볼륨감 있게 튀어나온 가슴과 엉덩이 역시 그대로였다.
“그런데 너 어데 가는데?”
“니 매운탕 좋아하잖아.”
나를 광도 시장까지 끌고 간 복순은 작은 회 한 접시와 매운탕용 잡고기를 구입했다.
“매번 혼자 오더니 오늘은 신랑을 데려왔네.”
내가 벌써 그렇게 보일 나이인가. 시장통 아주머니의 엄한 소리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밥 먹자고 한 거 아니었어?”
“맞아. 매운탕.”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묵직하게 쳐진 비닐봉지를 흔들며 힘차게 언덕길을 오르는 복순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 왔다. 퍼뜩 들어와라.”
언덕 초입에 지어진 신식 원룸 건물이었다.
“너 집이야?”
“글치.”
“혼자 산다고?”
“아냐, 여긴 오빠 집.”
“아...”
난처하지만 무르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서울에도 이런 집들이 많지? 몸만 들어가면 되니까 얼마나 편해?”
“응, 그렇지.”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다 왔어.”
“그래, 헉헉...”
제법 공간을 넓게 뺀 원룸이었다. 요리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만한 사이즈의 싱크대와 대형 냉장고가 놓여있고, 다리 한 개짜리 식탁이 거실과 주방을 구분 짓는 경계였다. 간이 벽으로 공간을 구분해놓은 침실도 있어 신혼집으로 쓰기에 적당해 보였다.
“왜 삐대고 있노?”
얼떨결에 들어왔지만 실수한 기분이다. 고등학교때 친구라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여자와 빈집에서 단둘이라니... 오해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안 잡아먹는다! 앉으라고!”
불편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복순이 의자를 권했다. 나는 식탁을 두고 마주 본 의자 중 한 개에 가방을 걸고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니 덥나? 에어컨 틀어줄까?”
“아냐, 됐어.”
“자슥, 편하게 앉으라니까...”
“그런데 복순아... 나 저기...”
실례가 되더라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힐 것 같았다.
“대영아... 오빠야는 금요일 밤에 온다.”
“응?”
“그랬다가 일요일 서울로 올라가. 오늘처럼.”
“직장이 서울이시구나.”
“무슨 연구직이라는데 나는 잘 모른다.”
“그래...”
나를 불편한 의자에 가둬놓고 복순은 잔뜩 들뜬 사람 모양으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불순한 상상을 했던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사실 매운탕은 간단한 음식아이가? 그냥 끓이기만 하면 되자네. 회는 냉장고에 잠깐 넣어줄래? 아니다 냉장고 안을 보여주긴 그러니까 그냥 앉아 있어. 우리 이제 어른이니까 반주 한 잔 해야지?”
복순은 매운탕거리가 담긴 볼 넓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쑥갓을 손질했다. 칼질하면서도 습관처럼 썰어둔 무나 당근을 계속 입으로 가져갔고 그러면서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영아 이리 와봐.”
넓게 설계된 주방이라곤 하지만 두 사람이 서 있기엔 좁아 보이는 원룸 구조였다.
“아냐, 됐어. 나 간 잘 못 본다.”
“뭐라노? 이거 넘치는지 봐달라고.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그래. 알았다.”
“시간 많이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셔. 점심만 먹고 퍼뜩 가.”
“당연하지.”
그러나 복순이 갈아입고 나온 옷은 길이가 짧고 신축성이 좋은 홈드레스였다. 때 타는 것이 걱정될 정도로 반투명에 가까운 흔치 않은 디자인인 데다 그녀의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피부색까지 드러내 보였다.
“내가 엉덩이 때문에 바지가 불편하잖니.”
치맛단 밑으로 검고 탄력 있는 복순의 허벅지가 비쳤다.
“다 끓었다. 이제 먹자.”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위아래로 하얀색 속옷이 그대로 비치는 반투명에 가까운 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앞에 두고 나는 연신 매운탕에 수저를 가져갔다.
“우와... 덥다.”
“얼큰하제?”
냉방도 없이 더운 날. 매운탕과 반주가 들어가자 몸이 뜨끈해졌다. 작은 식탁을 마주하고 소주 한 병과 댓 병 짜리 맥주를 함께 마셨다. 고개를 밑으로 처박고 밥만 뜨던 나는 낮술 탓을 하며 웃옷을 벗고 말았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우린 더없는 유대와 친근감을 느꼈고, 대화는 다시 몸매 쪽으로 흘러갔다.
“바지 싫다면서 낮엔 왜 입었어?”
“오빠야가 싫어한다.”
“치마 입는 걸 싫어한다고? 왜서?”
“그냥 뭐...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달라붙은 옷은 그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음탕한 인상을 풍기게 마련이니까.
“요즘 운동하니?”
“전혀. 내는 운동 싫어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원래 근육질의 몸으로 태어난 모양이다. 단거리 선수의 허벅지처럼 결이 있고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근육들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살 안 찌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뭔소리고? 왜 그런데?”
“허벅지.”
“허벅지? 내 허벅지가 어째서?”
복순은 가뜩이나 짧은 치마를 걷어 보이며 자신의 기초 대사량을 책임지고 있는 허벅지를 내려다본다. 다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하얀 팬티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글치? 남자 허벅지 같긴 하다.”
“아냐 아냐. 건강해 보이고 딱 좋아.”
“만져 볼래?”
농담인 줄 알지만, 심장이 쿵쿵거리면 뛰기 시작했다.
“아냐. 사양할게.”
우린 위험해 보였다.
“어릴 땐 혼혈이라고 놀림 받았어. 운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데 근육은 많고... 신기하지?”
복순의 피부가 술 때문에 검붉게 보였다. 드레스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속옷의 라인은 벗은 몸을 보는 것만큼 아찔한 광경이었다.
“너 그러지 말고 샤워할래? 땀 너무 흘린다.”
“그, 그럴까?”
회접시와 매운탕 냄비가 비워져 갈 때쯤 댓 병 술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밖은 어둑해졌는데 취기보단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반라 몸 때문에 열이 올랐다.
“잠깐 기다려.”
복순은 내 어깨를 짚으며 욕실로 들어가더니, 욕조에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하라더니...’
“물 받아놨어. 들어가.”
“고맙다.”
화장실 안엔 어울리지 않는 좁은 욕조가 있었다.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없었고 웅크려야 몸이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욕조였다. 뜨거운 물 속에 담긴 몸은 노곤해졌고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