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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판단은 빠르게.


천계. ​ 분명히 존재하나, 천마대전 이후 존재가 지워지고 있는 곳. ​ 허나! ​ 전쟁의 상처로 남은 절절한 복수심만이 홀로 얇은 양초처럼 불타 은은하게 마계를 비추게 하는 곳. ​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마왕가에서 철저하게 통제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다. ​ 그렇다면. 자력으로 찾아내면 되는 거 아닌가. ​ 서족이 이끄는 아스테라 서족정보부는 그때부터 얇은 꼬리를 휘날리기 바빴다. ​ 칠대죄의 영지에 속한 성들의 서고를 철저하게 뒤졌다. ​ 먼지 쌓인 고문서들, 반쯤 삭아버린 양피지들, 피로 쓰인 계약서들. ​ 그 모든 것을 샅샅이 훑었다. ​ 결과는 참담했다. ​ “보고서입니다.” ​ 무릎을 꿇은 채 건넨 보고서를 건네받은 아스테라는 눈을 찌푸렸다. ​ 노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잔잔한 분노에 일렁였다. ​ “후보지가 많습니다.” “몇개나?” “100개입니다.” “……그럼 다 들러보도록 하지.” ​ 참모 레이더에게 행정을 맡긴 채, 아스테라는 홀로 성을 빠져나왔다. ​ 검은 시스루 드레스가 바람에 나부꼈다. ​ 비단결 같은 천 사이로 창백한 피부가 은은히 비쳤다. ​ 화려하되 위협적인. 마치 독을 품은 꽃 같은 차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낡은 망토를 걸쳤다. ​ 눈에 띄어선 안 됐다. ​ 마왕가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었다. ​ 마침내 추려진 100개의 후보지. 99번의 실패. ​ 황량한 사막, 독기 가득한 늪, 용암이 흐르는 협곡. ​ 아스테라는 대륙 곳곳을 홀로 누볐다. 동행은 없었다. 비밀스러운 여정에 증인은 필요 없었다. 발바닥이 닳고, 드레스 자락이 찢어졌다. ​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 그 끝에 마대륙의 남부에 도달했을 때. ​ 공기가 달랐다. 무겁고, 차갑고, 오래된 냄새가 났다. 수천 년의 세월이 응축된 듯한 기운이 피부를 훑었다. ​ 아스테라의 노란 눈이 가늘어졌다. ​ “아스테라 총군주죠?” ​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형체가 없었다. 그림자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 ​ 아스테라는 자신의 정체를 긍정하기보단, 상대의 정체를 가늠했다. ​ “넌?” “마왕님을 보필하는 그림자의 사도 네로벨입니다.” ​ 그림자가 굽이치며 형상을 갖추었다. 검은 장막을 두른 듯한 실루엣.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눈만은 붉게 빛났다. ​ ‘마왕성이라. 이곳이군.’ ​ 오히려 이곳이 맞다는 반증이 됐다는 생각에 아스테라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지기도 잠시. ​ 사도가 이곳에 있단 사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하기로 했다. ​ 판단은 빠르게. ​ 아스테라의 연격과 네로벨의 그림자에서 생 없는 육체들이 튀어나온 것은 동시였다. ​ ​ * * * ​ ​ ​ “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면 오지 않는게 이상하겠군요.” ​ 네로벨의 병사 대부분이 아스테라의 권능 앞에 절단되었을 때였다. 바닥에 흩어진 육편들이 검은 연기처럼 소멸해가고 있었다. ​ 아스테라의 금발이 피바람에 흩날렸다. 검은 드레스에 핏방울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 “온다고?” “마물왕이라고 아십니까?” “들어본 적 있다.” “저랑 같이 피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린 서로 등질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제가 당신의 상관이기도 하죠.” “……오히려 잘된 것 아닌가?” “무슨 말이십니까?” 네로벨의 눈가가 찌푸려지며 답을 요구했다. ​ “우리 둘이서 마물왕을 토벌하면 되는거 아닌가. 결국 마물이잖나.” “아하하하하. 거기까지 밖에 모르시는 군요?” ​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조롱이 아니었다. 연민에 가까웠다. ​ “웃지마라.” “크흐흐, 알겠어요. 저는 물러갈게요. 알아서 잘 해보세요.” ​ 네로벨이 자신의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형체가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 ‘마왕성은 이미 내가 천계통로를 찾고 있단 것을 알고있었다. 저 사도가 성에 복귀하면 견제는 더 심해질터. 무조건 뚫어야해.’ ​ 완전히 사라질 때쯤 그림자에서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가 남았다. ​ “마물왕은 두렵지 않아요. 그 뒤에 오는 존재가 문제지.” ‘그 뒤?’ ​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그림자에서 시야를 돌렸을 때. 땅이 울렸다. ​ 쿵. 쿵. 쿵. ​ 묵직한 발걸음. 대지가 신음했다. 먼지가 일었다. ​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형체가 몸을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 “뭘.” “하는.” “거냐.” ​ 소름끼치는 음성. ​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머리에 달린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 어깨에서, 복부에서, 심지어 종아리에서. 무작위로 박혀 있는 수십 개의 입 중 어느 것에서 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 입들이 제각각 벌어지며 음절을 토해냈다. ​ 어떤 입은 침을 흘렸고, 어떤 입은 이빨이 없었다. ​ “들어.” “가지.” “못한다.” “특히.” “넌.” ​ 사람의 형체이되, 심히 비틀려 있는. ​ 눈과 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붙어 있는 건 없었고 심지어 그마저도 뭉개진 듯 보였다. ​ 눈알들이 온몸에 박혀 있었다. ​ 팔꿈치에, 무릎에, 등에. ​ 그것들이 일제히 데굴거리며 아스테라를 향했다. ​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을 때 놈의 공격이 이미 근접했다 자신의 몸으로 회수된 걸 알았다. ​ 아스테라의 손목이 지끈거렸다. ​ ‘빠르군. 그리고 묵직해.’ ​ 공격을 막아내자 놈의 데굴거리는 수십개의 눈알이 내게로 집중됐다. “이곳은.” “너가.” “다니는.”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건가.’ ​ 이번엔 아스테라가 상대의 정체를 가늠했다. ​ “네가 마물왕이겠군.” “나.” “그래.”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지.” ​ 마물왕은 긍정했다. 허나 행동은 부정했다. ​ “난 이곳을 지나가야할 이유가 있다.” “그게.” “어떤.” “이유던.” “불가하다.” “네놈의.” “영지로.” “돌아가라.” “아스테라.” ​ 마물왕의 입에선 정확하게 아스테라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었고 살려주는 이유까지 친절히 설명하고 있었다. ​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절로 질끈 물려졌다. ​ 네로벨, 마물왕. 그 둘이 끈질기게 막고있는 문. ​ 아스테라가 유일하게 저 문만 넘으면 천계로 갈 수있는 방법이었다. 100개의 선택지의 그 끝에서야 찾아낸 정답. ​ 아스테라의 머릿속엔 이제 단 하나의 목적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그래. 저 놈을 죽이면. 꺽어버리면 될 일이야.’ ​ 놈의 급소로 보이는 부근으로 포탈을 소환해 연격을 날렸다. ​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노란 눈동자가 살기로 물들었다. ​ 무식하게 큰 덩치처럼 맞을 줄 알았건만 단 하나의 연격도 맞지 않았다. 오히려 신속하게 회피하는 몸놀림에 아스테라는 점점 더 열받기 시작했다. ​ “경고는.” “끝.” “칠대죄영지는.” “다시 나뉘리라.” ​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마물왕은 자유로운 관절을 사용해 아스테라를 압박했다. ​ 인간의 뼈대로는 불가능한 각도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팔이 180도로 꺾이고, 목이 뒤로 돌아가고, 다리가 반대로 접혔다. ​ 서로가 서로의 속도에 적응했다고 생각할 때 마물왕은 자신의 신체를 비틀어가며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 빠득, 빠그극- ​ 뼈가 부러지는 소리, 살이 찢어지는 소리,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되는 소리. ​ 그것을 보며 이전에 읽었던 보고서가 떠올려졌다. ​ -탐식의 군주 벨제부브. 비장의 수로 진화 혹은 변신이라고 불릴만한 능력을 사용했음. ​ 금발이 좌우로 휘날렸다가 정돈됐다. ​‘해봤자 결국 마물.’ ​ 마물왕은 세 번의 변신을 거듭했지만 결국 땅에 고꾸라져 피를 토하는 신세가 됐다. ​ 차라리 마정석이라도 순순히 심장 부근 제자리에 있었다면. ​ 더 빨리 끝냈겠지만 체내에서 마정석을 자유롭게 이동시키며 전투를 질질 끌었다. ​ 아스테라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번쩍였다. ​ ‘시간을 끌어?’ ​ 하지만 그것도 끝. ​ 마물왕의 전신에서 유일하게 고속재생이 이루어진 부분이 아스테라의 눈에 포착됐다. ​ “그곳이군.” ​ 황금빛 오라를 머금은 손. ​ ‘다왔어. 다왔어! 아버지, 기필코 미카엘년의 목숨을을 끊고 심장을 씹어먹고 바치겠습니다.’ ​ 빠르게 쏘아지고ㅡ ​ 턱. ​ “강하네. 야누스를 쓰러트려?” ​ 아스테라는 기척도 없이 팔목을 꽉 잡은 손을 인지했을 때 공포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 심장이 얼어붙은 듯이. ​ 재빨리 떨쳐내려 했으나 그 팔은 태산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아스테라.” “이거 놔!” ​ 새로운 방해꾼이 또 등장하자 아스테라는 이성을 잃을 뻔 했다. ​ “저 문이 뭔진 알고 온거지?” “놔.” “대답해. 문지기를 쓰러트렸으면 말해.” “알아.” ​ 손목을 포기해 몸을 비틀어 놈의 목을 노렸지만 이 또한 허무하게 막혔다. ​ 마물왕을 쓰러뜨린 포탈난격. 권능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런, 젠장.’ ​ 아스테라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김남주가 아스테라에게 준 축복은 멈추지 않았다. 마력의 흡수율을 비약적으로 높여줬다. 백년 단위를 가진다는 마정석의 진화도약을 크게 단축시켰다. 더불어 권능을 크게 강화시켜주는 왕관까지. ​ 그럼에도. ​ 금발, 허무한 눈빛, 눈가의 주름. 이름 모를 사내에게 철저한 약자가 됐다는 사실에 아스테라는 충격을 받았다. 노란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 ‘어떻게?’ “아. 약자멸시? 포탈생성? 포탈가르기? 스킬좀 그만 써줄래?” ​ 그 자는 아스테라의 기술명까지 정확하게 읊으면서 헛웃음 지었다. ​ “내 앞에서 허락을 맞지 않으면 그런건 쓸 수 없어. 다 봉인이야. 봉인.” “뭐? 넌 누구지?” “나?” ​ 허무한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 안에 수천 년의 피로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 “넌 여기있으면 안되는데. 분명 수도 아스테라에서 세력을 키워 마왕에게 도전했어야 했는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비틀어진거지?” “대답이나해.” “날서네. 뭐 알아. 네 아비의 원수가 저 문 너머에 있으니까. 공감해. 나라도 그럴꺼야.” “대답하라했어.” “내 이름말이지. 그래.” ​ 눈가의 주름들이 더욱 깊어졌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었다. ​ 체념에 가까웠다. ​ “팔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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