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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172화 Arrivederci! Buon viaggio.


다음 나들이는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 그동안은 함부로 나갈 수 없었기에 꼼짝없이 숙소 안에서 지내야 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로마의 하늘만 바라보며 보낸 나날들. ​ 간간이 들려오는 거리의 웅성거림, 어디선가 흘러오는 아코디언 선율, 저녁이면 붉게 물드는 지붕들. ​ 그것들이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했다. ​문 앞까지 찾아온 그가 말했다. ​ “콜로세움으로 정해졌습니다.” “오.” ​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본 명소였다. ​ 미레가 내 어깨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을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예전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때를 떠올려보자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손끝까지 감정이 전해지는 그런 웃음. ​ 마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 시은과 샌은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에, 방에서 맨몸운동을 하고 있는 야니에게 말했다. ​ “다녀올테니까 얌전히 있어.” ​ 야니가 고개를 깊게 숙여 정수리를 보이며 말했다. ​ “네.” ​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안에선 오직 미레만이 웃고 있었다. ​ 나머진 절대적인 근무로 생각하고 있는지 몸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 “미스터 킴.” ​ 로비를 지나 입구로 나가자 그들이 준비한 밴에 탑승한 채 이동했다. ​ 창가로 사람들이 보였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노인, 손을 잡고 골목을 걷는 연인, 가판대 앞에서 과일을 고르는 주부. 사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일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 “너희들 중에.” ​ 내 말에 침묵이 돌았다. ​ “우리 때문에 사는 것이니, 응당 우리에게 감사해야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있어?” “……우월의식은 금기사항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괴물의 자리를 꿰찰순 없습니다.” ​ 그런가. ​ 도착한 곳에 내리자 햇빛이 눈을 강타했다. 이탈리아의 태양은 한국과 달랐다. 더 날카롭고, 더 뜨거웠다. 공기 중에 먼지와 오래된 돌 냄새가 섞여 있었다. ​ 나도 선글라스 하나 받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 “이쪽으로.” ​ 길드원들의 안내를 받아 입장했다. ​ 하얀 재질에 금박이 수려하게 놓인 카드가 있었는데 그것을 꺼내 보이자 안내원이 우리를 인솔해 긴 줄을 건너뛰었다. ​ 줄에 서 있던 관광객들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VIP 입장이었다. ​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미레가 숨을 멈췄다. ​ “와, 넓어요. 바헬무토 공작가에서 봤던거보다 한 10배는 큰데요?” “그러네.” ​ 2천 년 전 5만 명의 관중이 함성을 질렀던 원형경기장. 무너진 벽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거대한 타원형의 공간을 가로질렀다. ​ 발밑의 돌바닥은 수천만 발걸음에 닳아 매끄러웠다. ​ “80년에 완공됐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하고 티투스 황제가 완성했죠.” ​ 마르코가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희미하게 울렸다. ​ 하지만 원래의 붕괴와는 다른 상처들이 보였다. ​ 외벽 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염에 탄 흔적이었다. ​ 시간의 풍화와는 다른, 더 날것 그대로의 상처. ​ “둠스데이 때…….” ​ 마르코가 말끝을 흐렸다. ​ “괴물들이 여기까지 왔었어?” “네. 콜로세움을 거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다행히 막아냈지만…….” ​ 미레가 검게 그을린 벽을 만졌다.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손끝에 까만 그을음이 묻어났다. ​ 이어지는 설명에 미레와 대화를 나눴다. ​ “여기서 검투사들이 싸웠대.” “검투사?” ​ 미레가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 “전사들이야. 목숨을 걸고.”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나 전쟁 포로였습니다. 하지만 자유민 중에도 명예를 위해 자원하는 이들이 있었죠.” ​ 마르코가 덧붙였다. 미레가 난간에 기대어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바람이 하늘색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한 올 한 올이 햇살에 반짝였다. ​ “여기서 죽은 사람들…… 많았겠다. 비슷해. 마계나, 여기나.” “수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 미레의 손이 난간을 꽉 쥐었다. 2천 년 전의 피와 함성, 그리고 며칠 전의 괴물과 처절함. 이 경기장은 그 모든 것을 품고도 여전히 서 있었다. ​ 점심은 근처 트라토리아에서 먹었다. ​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식당. 천장엔 마른 허브 다발이 매달려 있었고, 벽엔 빛바랜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나무 테이블은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반들했다. ​ 카르보나라가 나왔다. ​ 구안찰레와 계란 노른자, 페코리노 치즈가 어우러진 크림빛 파스타.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진짜 카르보나라엔 크림이 안 들어갑니다. 계란 노른자와 치즈만으로 농도를 내죠.” ​ 마르코가 설명했다. 포크로 면을 감아 입에 넣었다. 노른자의 고소함이 먼저 혀를 감쌌다. ​ 그 뒤를 이어 구안찰레의 짭조름한 감칠맛, 페코리노 치즈의 날카로운 풍미가 차례로 밀려왔다. ​ 후추가 톡톡 박혀 혀끝을 자극했다. ​ 미레는 포크질이 서툴렀다. ​ 면이 자꾸 풀려 접시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맛있게 먹었다. 볼에 소스가 묻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을 반달처럼 휘며 씹고 또 씹었다. ​ 그 모습을 보자니 웃음지어졌다. ​ 내 여자친구는 너무 귀엽다. ​ 숙소로 돌아온 뒤, 또다시 긴 기다림이 시작됐다. ​ 창밖의 풍경만 달라졌을 뿐 일주일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 미레는 전에 갔던 장소들을 되새기며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렸다. 콜로세움의 아치, 그을린 벽, 햇살이 쏟아지던 경기장. 서툰 선이었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다. ​ “콜로세움?” “응. 나름의 추모식이야.” ​ 그러고 보니 미레는 마계에서 나를 위해 레시피를 적은 노트를 지니고 있었다. ​ 무언가를 적고, 기억하는 건 미레의 습관이리라.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다음 일정이 정해졌다. 장소는 트레비 분수. 그의 설명은 친절했다. ​ 바로크 조각의 정수라. 해신 넵튠이 조개껍데기 전차 위에 서 있었다. ​ 바다 괴물들이 전차를 끌고, 트리톤들이 나팔을 불었다. ​ 물이 암석 사이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리가 우렁찼다. 물보라가 공기 중에 흩어지며 서늘한 안개를 만들었다. ​ “1762년에 완성됐습니다. 니콜라 살비가 설계했죠.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입니다.” ​ 마르코가 설명했다. 관광객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어.” ​ 분수 왼쪽 조각상 하나가 목이 잘려 있었다. ​ 새로 붙인 흔적이 보였지만 색이 달랐다. 오래된 대리석의 아이보리빛과 새 돌의 하얀빛이 어색하게 맞붙어 있었다. ​ “저것도…….” “네. 둠스데이 때.” ​ 마르코가 한숨을 쉬었다. ​ “복원하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 이어서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비는 전통에 대해 설명해 줬다. ​ 미레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정말로?” “크큭.” ​ 잔혹한 진실을 말해주는 대신, 동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 물론 미레도 실제로 이뤄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 미레에게 동전을 쥐어줬다. 작은 손바닥 위에 놓인 구리빛 동전. ​ 마르코가 몸소 시범을 보였다. ​ 등을 돌리고 어깨 너머로 던지라고 알려줬다. ​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고 하죠.” ​ 미레가 분수를 등지고 섰다. 눈을 꼭 감았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언가 빌고 있는 모양이었다. ​ 오래도록. ​ 첨벙. 동전이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수천 개의 동전 사이로. ​ “뭘 빌었어?” ​ 미레가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란다. 볼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수줍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 저녁은 분수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창가 자리였다. 조명에 비친 트레비 분수가 낮과는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물줄기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살팀보카 알라 로마나. ​ “입안으로 뛰어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맛있다는 거죠.” ​ 마르코가 설명했다. ​ 송아지 고기 위에 프로슈토와 세이지를 얹어 화이트 와인에 조린 요리. 나이프를 대자 고기가 부드럽게 갈라졌다. 버터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세이지의 은은한 허브향이 뒤를 이었다. 와인에 졸인 소스가 고기의 육즙과 어우러져 깊은 맛을 냈다. ​ 미레는 고기를 한 점 베어 물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 입안으로 뛰어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 다음 주는 귀국이었다. 그 마지막을 장식할 장소는 바로 바티칸. ​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봤다. 미켈란젤로가 4년에 걸쳐 그린 걸작. ​ 아담의 창조. ​ 신과 인간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 성당 안은 고요했다. 수백 명의 관광객이 있었지만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 여겼습니다. 그림은 싫어했죠. 하지만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순 없었습니다.” ​ 마르코가 속삭였다. 성당 안에선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 “싫어하면서도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들었어?” “그렇습니다. 억지로 시작했지만, 결국 최고의 작품을 남겼죠.” “저게 신이야?” ​ 미레가 속삭였다.고개를 한껏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이 하얗게 드러났다. ​ “인간들이 믿는 신이래.” “신…….” ​ 미레가 천장화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눈이 반짝였다. 습기가 맺힌 것인지 빛이 머금어진 것인지. ​ “예뻐.” “그래?” “응. 색이 예뻐. 마계엔 이런 색 없었어.” ​ 부드러운 분홍, 하늘색, 살구색. 마계의 어둡고 강렬한 색채와는 달랐을 것이다. 검붉은 하늘, 재빛 대지, 피와 불의 색. 그곳에서 살아온 미레에게 이 파스텔빛 세계는 어떻게 보일까. ​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나와 근처에서 수플리를 먹었다. 튀긴 리소토 볼 안에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 있었다. ​ 겉은 바삭하고 속은 뜨거웠다. ​ “로마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입니다. 전화기란 뜻의 ‘수플리 알 텔레포노’라고도 하죠. 치즈가 전화선처럼 늘어나서요.” ​ 미레가 한입 베어 물자 치즈가 길게 늘어났다. 끊어지지 않고 30센티는 족히 늘어났다. 미레가 신기해하며 잡아당겼다. 늘어나는 치즈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길드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 마지막 날. ​ 로마를 떠나기 전날 저녁. ​ 테베레 강변의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야외 테라스 자리였다. 노을이 강물 위로 황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 산탄젤로 성이 보였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실루엣. ​ 와인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느슨해졌을 때, 마르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말 하세요.” “혹시…… 성 유물 탐험가가 맞으십니까? 진영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성 유물 탐험가가 마침내 성 유물을 발굴해 돌아왔다고.” ​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포크를 든 손, 잔을 기울이던 손, 모든 것이 멈췄다. 잠시 고민했다. 숨길 이유가 있나. 오히려 그들에게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 “맞아.” ​ 마르코의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혹시…… 몇 개나……정말로?” “3개.” ​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길드원들의 눈이 커졌다. 동공이 흔들렸다. ​ “3개……!” “응.” “세, 셋이나…….” ​ 그들의 얼굴이 경외로 물들었다. 마치 구원자를 보는 듯한. 아니, 예수를 마주한 신도 같은 눈빛이었다. ​ 와인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저희가…… 저희가 모시고 있는 분이…….” ​ 지오반니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굵은 체구의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 “여신진영에 희망이…….” ​ 마르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돌바닥을 긁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따라 일어났다. ​ 그리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90도로. 깊이. ​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 그 자세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지오반니의 어깨가 떨렸다.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 “끝이…… 끝이 보이는 겁니까.”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 “10년입니다. 10년 동안…… 매일 누군가 죽었습니다. 동료가, 친구가, 가족이. 언제 내 차례가 올지 모른 채 싸웠습니다.” ​ 마르코가 뒤를 이었다.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 “제 아들이 올해 여섯 살입니다. 그 아이가…… 괴물 없는 세상에서 자랄 수 있는 겁니까.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 목소리가 떨렸다. 강인해 보이던 남자의 눈가로 물기가 번졌다. ​ “제 아내는 둠스데이 때 다리를 잃었습니다.” ​ 지오반니가 말했다. ​ “매일 밤 기도합니다. 제발 이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고. 딸아이가 안전한 거리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빛이 있었다. 절망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빛. ​ “당신 덕분에…… 저희도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이 살인게임이 끝나는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 레스토랑의 다른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 그들의 진심은 느껴졌다. 무겁게. 절절하게. ​ 10년이라는 시간.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을까. ​ 얼마나 많은 밤을 공포 속에서 보냈을까.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사치였을지. ​ “고개 들어. 같이 먹고 마시자.” ​ 잔을 들었다. 그들도 잔을 들었다. 눈가가 젖은 채로. 하지만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짓는, 진짜 웃음이었다. ​ “가족들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야지.” ​ 내 말에 그들의 눈물이 터졌다. 참았던 것들이 쏟아지듯. 노을 아래에서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맑고 높은 소리가 테베레 강 위로 퍼져나갔다. 수년간의 어둠 끝에 찾아온, 빛의 약속 같은 소리였다. ​ 야니는 한달 내내 방에 박혀 있었다. 한번 들여다봤더니 창문을 열어젖힌 채 맨몸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큰 가슴이 팔이나 바닥에 닿여 부드럽게 뭉개지고 몰캉거렸다. ​ 푸시업. 한 손으로. 등에 역기 대신 가구를 올려놓은 채. ​ 무거운 협탁이 등 위에서 덜거덕거렸다. ​ “589, 590, 591…….” ​ 야니가 숫자를 세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바닥에 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수축했다. ​ 핏줄이 돋아났다. ​ 이어서 스쿼트. 크런치. 버피. 특유의 루틴이었다. ​ 문을 조용히 닫았다. ​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 로마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들, 판테온의 돔, 캄포 데 피오리 시장의 활기. 좁은 골목에서 베스파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고, 어딘가에서 항상 커피 볶는 냄새가 났다. ​ 미레와 손을 잡고 자갈길을 걸었다. 불규칙한 돌바닥에 발이 걸려 미레가 휘청거릴 때마다 손을 꽉 잡아줬다. ​ 저녁노을에 물든 테베레 강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붉은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하루가 저물어갔다. ​ 곳곳에 둠스데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복원된 조각상들, 새로 쌓은 벽돌들, 검게 그을린 자국들. ​ 하지만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 상처 위에 새 살이 돋아나듯, 도시는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2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 길드원들은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지켜봐 줬다. ​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되, 시선에 걸리지도 않았다. ​ 감사했다. ​ 그리고 마침내 시은에게서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 “준비됐어?” “응.” ​ 포탈로 돌아가면 순식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대륙을 건너는 일.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 그렇기에 상식적인 행동으로 비행기에 탑승해 같이 귀국하는 길을 택했다. 열두 시간의 비행. 마지막 여운을 위한 시간. ​ 창밖으로 로마가 멀어져 갔다. 테라코타빛 지붕들이 점점 작아졌다. 테베레 강이 가느다란 실처럼 보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점이 되어 사라졌다. ​ 미레가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내 옷깃에 흩어졌다. 긴 속눈썹이 볼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잠든 얼굴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 마계에서의 날들, 피와 포효로 가득했던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느껴졌다. 따스한 숨결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어깨에 실린 무게가 가벼웠다. ​ 너무 가벼워서, 문득 걱정이 됐다. ​ 창문 너머로 구름이 흘러갔다. 새하얀 구름 바다 위를 날았다. ​ 통로 건너편에선 야니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의 넓은 좌석이었지만 그 덩치를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깨가 좌석 밖으로 삐져나왔고, 다리는 아무리 펴도 앞좌석에 닿았다. ​ 결국 무릎을 구부린 채 창밖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해 보였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 ​ 앞쪽 좌석에선 시은이 안경을 쓴 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얇은 테 안경이 기내 조명에 반짝였다. 옆자리의 샌과 나지막이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오갔다. 아마 귀국 후 일정이겠지. 저들에게 휴식 따윈 없었다. 한 달 동안 우리가 로마를 누비는 사이에도, 저들은 쉬지 않았을 것이다. ​ 미레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몸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담요를 끌어올려 어깨를 덮어줬다. ​ 한 달간의 휴식이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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