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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175화 강화, 강화, 강화.


"진짜야? 이거 정말…." ​ 임지유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끊겼다. 말꼬리를 잡아줄 힘조차 성대에 남아있지 않았다. ​ "저도 믿기 어렵습니다." ​ 최고관리인의 대답은 평소의 정돈된 어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 특유의, 마른 발성이었다. ​ "이건 실로 기적이군요. 아니——" ​ 관리인은 강화실 안쪽,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남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저었다. ​ "이 분께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것조차 누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임지유는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폐 안의 공기가 통째로 돌로 치환된 것만 같았다. ​ 들이쉬어도 산소가 혈관까지 닿지 않는 느낌. 관자놀이 안쪽에서 맥박이 쿵쿵 울리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 ​ 관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갑옷이 가슴팍 위에 얹어진 듯한 압박.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공포라면 차라리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너머에 있는 감정이었다. 세상의 법칙이 눈앞에서 구부러지는 것을 목격한 자만이 느끼는, 종류 자체가 다른 무게. ​ 둘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허벅지가 무거워진 것도 아닌데, 한 발을 떼는 데 의식적인 힘이 필요했다. ​ 처음의 반응은 경악이었다. 입이 벌어지고, 동공이 풀리고, 어깨가 굳는 그 원초적 반사. ​ 다음은 경외. 무릎이 미세하게 꺾이고, 심장 박동이 반 박자 느려지는 그것. 마치 신전 앞에 선 것처럼 몸이 스스로 자세를 낮추려 드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분이 돌아왔다. 관리인은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억눌렀다. 손톱이 손바닥에 반달 자국을 새길 만큼 꽉. 그리고는 태블릿 패드를 들어올려, 방금 강화가 완료된 아이템의 정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 김남주가 지나간 자리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 관리직 상주 인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패드 화면을 두 손으로 붙들고, 누군가는 이전 데이터와 변경된 수치를 소리 내어 대조했다. ​ "내구성 수정합니다!", "인챈트 슬롯 추가 확인!", 목소리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강화가 끝난 아이템 위로 잔광이 실처럼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을, 그들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길드 아이템 아카이브를 갱신했다. ​ 마치 전장의 선봉이 지나간 뒤, 보급부대가 밀려드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 "세상에……." ​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식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의 흉곽에서 동시에 짜여 나온 소리였다. ​ 어느새 남주는 C구역의 마지막 아이템 강화를 끝낸 후, 주인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다리를 꼬지도, 팔짱을 끼지도 않았다. 그저 앉아서, 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목련 길드원들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주변이 폭풍이라면, 그는 폭풍의 눈이었다. 미레가 어느 틈에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남주의 왼쪽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딱 맞게 걸치고, 작은 등을 남주의 가슴팍에 기댄 자세. 누가 시킨 것도, 허락을 구한 것도 아닌 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안착이었다. ​ 남주의 무릎은 이번에도 미레 전용 의자의 역할을 정확히 수행해냈다. ​ 야니는 남주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 명을 받은 것인지, 혹은 스스로의 판단인지. 강화실의 구석구석을, 드나드는 관리인원들의 손짓을, 그리고 문 너머 복도의 어둠까지. ​ 작은 체구로 주변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훑는 모습은 경비견이라기보다는 올빼미에 가까웠다. B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은 닫혀 있었다. 남주는 그 문을 부수는 선택 대신, 그들을 닥달하지 않았다. ​ 의자에 앉은 채, 미레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듯 한 번 쓸어넘기고는, 차분히 기다렸다. ​ 임지유는 그 배려를 고스란히 받아안았다. 돌아서서 최고관리인에게 걸어가 보고를 받아들었다. ​ "참모님……이것 보십시오." ​ 관리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평소 단단하기로 이름 높은 그의 성대가 가느다란 실처럼 떨리고 있었다. ​ "……." ​ 지유는 말없이 건네받은 태블릿 패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비플레이어인 그녀를 위해 관리인이 가져온 것이었다. 화면 위에는 방금 강화를 마친 아이템의 상세 설명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 [파카차리(C) +50] 구부러진 칼 끝은 어디로 향할지 모릅니다. 내구성 +45 절삭력 +40 -인챈트 1.예측 불가(LV.MAX) 공격 궤적이 미세하게 왜곡되어 상대의 회피 예측을 무력화합니다. 2.밀림의 이빨(LV.MAX) 식물형·자연계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식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3.궤도 적응(LV.MAX) 사용자 동작에 따라 칼날의 곡률이 순간적으로 변화합니다. 4.야생 본능(LV.MAX) 위험 상황에서 사용자의 반응 속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 "정말 미친 수준입니다." ​ 관리인의 음성이 한 톤 올라갔다. 억누르려는 의지와 분출되려는 감정이 성대 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 "미치고 미쳤습니다. 제 특성상 플레이어 옥션의 소식을 자주 접하는지라, 그 동향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 말이 빨라졌다. 숨표 없이 이어 붙이는 문장. 그의 두 눈이 충혈되기 시작한 것을 지유는 놓치지 않았다. ​ "천천히 숨 쉬고." "네, 감사합니다. 후우——." ​ 관리인은 목을 뒤로 젖혔다. 천장의 환풍구에서 내려오는 냉기를 직격으로 맞으려는 듯, 노출된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반갑게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 내쉴 때는 달랐다. 속에서 불타는 것 같은 열기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뜨겁고, 건조하고, 끈적한 숨이었다. 그래봤자 금세 폐는 다시 열로 가득 차올랐지만. ​ "이건 정말……미친 수준으로 강화되었습니다." ​ 세 번째로 같은 단어를 내뱉으면서도 관리인은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쳤다' 외에는 이 상황을 담을 그릇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 지유는 관리인의 처음 보는 면모에, 자신마저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속을 끝없이 꾹 눌렀다. 배꼽 아래 단전 즈음을 꽉 조이듯 힘을 주고, 떨리려는 턱을 이를 맞물어 잠갔다. ​ '침착해. 지금 흔들리면 안 돼.' "성배를 제외한." ​ 관리인은 바싹 말라오는 목구멍을 헛기침으로 축였다. 칼칼한 소리가 공기를 긁고 지나간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 "무구에 붙은 최대강화는 23강이었습니다." ​ 숫자를 말할 때, 관리인의 눈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기억의 서가에서 정확한 기록을 꺼내오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 "마의 20강을 뛰어넘는다는 행위 자체가 정말 미친 행위였죠." ​ 목소리가 한결 가라앉았다. 흥분이 걷히고, 그 자리에 업계에 몸담은 자의 경험칙이 자리를 잡았다. ​ "10강까지만 해도 명품으로 취급됩니다. 시장에서 그 값어치를 매기는 이들이 줄을 서는 수준. 하물며 15강까지 드는 강화석은 어떻고요?" ​ 관리인의 시선이 멀어졌다. 지유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이 방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 "……작년 가을이었습니다. 흑야길드가 21강에 도전했죠." ​ 말투가 바뀌었다. 보고가 아니라 증언이었다. ​ "강화석만 40억 어치를 태웠습니다. 길드 보유 자산의 절반이었죠. 성공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습니다. 빛이 났으니까요. 강화대 위에서 아이템이 빛을 뿜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환호했다고 합니다." ​ 잠시, 관리인의 입이 멈췄다. ​ "터졌습니다." ​ 단 두 글자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 "빛이 꺼지면서 아이템이 재가 됐고, 먹여넣은 강화석 전부가 허공으로 증발했습니다. 길드장이 강화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한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흑야길드는——지금은 이름만 남아있죠." ​ 관리인의 시선이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유리 너머, 의자에 앉아 있는 남주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 "그것이 실패해 터진다면, 그 자는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 년을, 때로는 수십 년을 쌓아올린 탑이 손가락 하나 튕김에 무너지는 겁니다." ​ 관리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블릿을 쥔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 "그런데 저 분은." ​ 말을 잇지 못했다. 이을 필요도 없었다. 23강이 한계인 세계에서, 50강을. 60강을. 70강을. 실패 한 번 없이. ​ 임지유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다. 팔을 휘두르는 플레이어들보다 그 이면의 경제를, 정치를, 역학을 거시적으로 조망해 온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 하지만 다시 한번 확인되는 그 과정에서——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참으려 해도 올라왔다. 근육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경련했다. ​ "파카차리검 하나만으로도." ​ 관리인의 시선이 유리 너머, 의자에 앉아 있는 남주를 스쳤다. ​ "저는 당장에 던전 공략의 선봉에 설 수도 있을 겁니다." ​ 지유는 대답 대신 패드를 아래로 스크롤했다. 손가락 끝이 화면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빼곡히 올라오는 목록들이 시야를 채웠다. ​ [녹슨 도살자 +67] ​ 손끝이 멈췄다. 심장이 반 박자 건너뛰었다. ​ [쥐잡이 단검 +71] ​ '70강이라니——!' ​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면 속 숫자를 두 번, 세 번 되읽었다. ​ '성배 수치보다 더 높잖아?' ​ [이름 없는 병사의 창 +58] ​ 손가락이 또 움직였다. 멈출 수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스크롤 한 번에 세계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 '이 아이템들을 가치로 따질 수 있을까?' ​ [하수구 왕의 홀 +63] ​ '따질 수 있겠지. 숫자는 모든 것을 따진다.' ​ [깨진 거울 조각 +45] ​ '엄밀하게 따진다면……' ​ 지유의 손끝이 패드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었다. ​ [사막의 혀(C) +55] [비파선(C) +48] ​ '최소 100억부터 시작일 아이템들이야.' ​ 스크롤이 계속됐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 '아니.' ​ [밤꽃 가시(C) +52] [동전 던지기(C) +60] ​ '이건 100억도 우습게 넘을 거야.' ​ [망자의 첫 번째 이(C) +44] [뒤틀린 해시계(C) +39] ​ '최소 300억.' ​ [고래뼈 작살(C) +57] ​ 손가락이 멈췄다. 패드를 쥔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화면 위의 글자들이 수면 위 반영처럼 일렁거렸다. 아니, 떨리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자신의 손이었다. ​ '미쳤어.' ​ 임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이로 새어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 '정말로. 이건 미쳤다라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어.' ​ 안광이 끊임없이 반짝였다. 형광등 아래에서 보석이 빛나듯, 그녀의 눈동자 표면 위로 욕심과 경외와 전율이 번갈아 일렁이고 있었다. ​ "이 아이템 하나로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말해줄래?" ​ 지유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그 밑에는 강철이 깔려 있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바삐 놀리는 플레이어들보다도 그 사정을 거시적으로 보아왔기에 잘 알고 있음에도. ​ 최고관리인 역시 임지유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다. 확인이다. 그리고 정리다. ​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능성의 나열을, 타인의 입을 빌려 순서대로 세우고 싶은 것이다. ​ 관리인은 실사용에 대해 입을 열었다. ​ "우선 기도사제분께 쥐어진다면." ​ 한 호흡 쉬었다. ​ "단숨에 전투사제로 승격하실 겁니다." "그리고." "전투사제님께 들린다면 필드를 넘어선——비욘드. 그 미지의 구역까지 탐사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탐사 구역 확장이라면." "맞습니다." "성유물 탐험가." ​ 지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꼬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쪽으로 올라갔다. ​ "대 개척시대가 열리겠군요." ​ 관리인은 자신의 딸뻘 되는 지유에게 속답을 이으면서, 뒷말을 삼켰다. 목구멍 너머로 넘긴 문장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하지만 관리인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패드 목록의 중간 어딘가. 스크롤 사이에 끼어 있는, 비어 있는 칸 세 줄. ​ 아이템 번호는 있었다. 등록 일자도. 그러나 이름란과 상세 정보란은 공백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데이터를 통째로 도려낸 것처럼. 번호 옆에는 작은 태그 하나만이 붙어 있었다. ​ [이관 처리 — 사유: 외부 협의] ​ 관리인의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그 세 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 길드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 안에 자신과 임지유가 모두 들어있다는 것도. ​ 0.5초. 시선이 유리 너머 남주를 스치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의 그 짧은 간극 속에. ​ '악귀 같은 놈들과의 마찰도 피할 수 없을 테죠.' ​ 지유의 눈도 같은 세 칸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패드를 쥔 손에 힘이 한 번 더 들어갔을 뿐이었다. ​ ​ ​ * * * ​ ​ ​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끝났나. ​ 지유와 관리인이 다가오는 기척에 미레가 무릎에서 내려갔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이미 두 발을 바닥에 착지시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 무릎 위가 허전해졌다. 미레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그게 공기 속으로 빠르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 "응. 이제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자. B구역은 얼마나 있어?" "정확히 228개입니다." "확 줄었네." "맞습니다. D급이 3,921개, C급이 1,490개인 것과 비교하자면 현저히 확보한 아이템의 수가 적죠." "그만큼 가치 있는 거니까." 내가 말을 끊고 관리인을 봤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게 다가 아니지?" "맞습니다. 빌려간 아이템들은 인포탈에 있을 겁니다." ​ 빌려간 것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손에 들려 필드 어딘가를 누비고 있을 아이템들. 그것들도 내 손을 거치면 지금 C구역에서 벌어진 일이 똑같이 재현될 것이다. ​ '그 아이템들도 다 강화해주고 넘어가고 싶은데.' ​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지금 말하면 일정이 꼬인다. 이건 급한 게 아니다. ​ 그런데. ​ 아까 지유가 보던 패드 화면이 눈에 걸렸었다. 스크롤하는 와중에 슬쩍 비친 것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목록 중간에 빈 칸이 있었다. ​ 이름도 없고 설명도 없는, 비어 있는 줄. 등록 번호만 덜렁 남은. ​ 빌려간 거라면 '대여 중'이라고 뜨는 게 정상이다. 지워진 거라면 번호 자체가 없어야 정상이고. ​ '번호는 있는데 내용이 없다?' ​ 그건 빌려간 것도, 지워진 것도 아니다. 빼앗긴 거다. 아니면 내줄 수밖에 없었거나. ​ '…….' ​ 생각의 끝에 매달린 이름 하나를 떠올리려다가,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꺼내면 분위기가 변한다. 지유도, 관리인도 지금 기분 좋은 긴장 상태에 있다. ​ 그걸 깰 필요는 없다. ​ '나중에 시은이에게 물어봐야겠어. 인포탈 아이템 회수 건이랑 같이.' ​ 다만. 인포탈에 있는 아이템들까지 내가 강화한다? ​ 그 소문이 밖으로 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백목련이 보유한 무기의 평균 강화 수치가 한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로 뛰었다는 소식은, 아군에겐 사기가 되겠지만 그 반대편에 선 놈들에겐 칼끝이 된다. ​ 가만히 앉아서 칼이 자기 목에 다가오는 걸 지켜볼 놈들은 아니다. ​ '이건……시은이랑 지유가 판단할 영역이긴 한데.' ​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어야 할 문제다. ​ 관리인의 동공이 커진 게 보였다. 시선의 끝을 따라가보니, B구역으로 이어지는 문의 개방장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 눈 속에 뭐가 있는지는 굳이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대. 그리고 기대 너머의 두려움. C구역에서 벌어진 일의 스케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B구역에선 대체 뭐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전율. ​ "그래. A구역까지 가야지." ​ 내 말에 관리인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 "문 열겠습니다. B구역 개방 승인 바란다." ​ 잠시의 정적. 관리인의 오른쪽 귀에 꽂힌 인이어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은 보였다. 입술이 한 번 다물어졌다 열렸다. ​ 쉬이이이——. ​ 두터운 강철문의 윗쪽에서 가스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밀폐되어 있던 틈새로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C구역과는 밀도가 달랐다. 코끝에 와닿는 냉기 속에 미세하게 섞인 금속 냄새. ​ B구역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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