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56)
469.
동기 애들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고 의젓한 모습을 보면서....
특히나 같이 듣는 수업에서 조장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호감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배워가게 되었다.
처음...
손을 잡고....
처음으로 키스라는 것을 해보고....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속에서....
밤새 통화하면서 같이 날을 새우기도 하는....
마침내....
처음 오빠와 밤을 보내면서....
나도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모르던 나를 깨우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 속에서....
한사람에게 이렇게 푹 빠져도 될까...
조금은 무서울 정도로....
점점 더 그와의 시간에 익숙해져 갔다.
우태 오빠 없이는 이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꼭 잡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었다.
그것이....
삐걱거리며 흔들릴 때....
오빠가 군대에 가버렸다.
나만 홀로 이 세상에 남아버렸다.
그리고....
박.성.태.
그 사람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기억하기도 싫은 밤을 보내고....
해가 뜨기도 전 새벽에 술이 깬 뒤....
서둘러 옷을 입고 집으로 도망쳤다.
모텔 방안에서 그와 실랑이가 있었지만....
앙칼지게 소리치고 발악을 하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거의 반....
미쳤던 것 같다.
집으로 들어와서...
엄마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내 방에 있었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이....
마구 요동을 치며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면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가 이불 속에 숨어 흐느끼게도 하고....
온통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집 안에서 너무 티를 내며 있을 수도 없었다.
간밤의 일을....
누구도....
가족 중 어떤 이에게도....
눈치 채게 할 수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특히나....
막내한테도....
이런 사실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하루....
그렇게 마음 속에 삭히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최대한 멀쩡한 모습으로....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애썼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하루 학교를 가지 않은 것으로도....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으니....
무조건 집에서는 나가야 했다.
아니...
학교에 가서....
평상시처럼 수업을 듣고....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나래와 소미....
어제 학교 빠진 것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에....
그냥 몸이 안 좋았다고 둘러댔지만....
이미 여기저기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며....
내 안에서 무언가가 어긋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박성태 그 사람과 학교 안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것도....
공강 시간에.
**************
#20. 돌풍이 부는 날 둘.
살면서 나는....
후회라는 것을....
얼마나 하면서 살아 왔을까.
아니, 앞으로 살면서....
또 얼마나...
하게 될까?
소심한 사람은...
말싸움을 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에 와서야 그때 했어야 하는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고 했었다.
어쩌면 그 말은....
바로 나한테 해당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누군가와 감정이 부딪치고 상하고...
모난 소리를 하느니...
그냥 나 혼자....
기분 나쁘면 되는 일이었다.
또....
그렇게 싸운다고 해서....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태 오빠하고는....
마음이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우태 오빠도...
남한테 모난 소리를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냥...
자신이 씩 웃고 넘기면 되는 것을...
왜 남한테 뭐라고 해야 하냐며....
바보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랬다...
그는...
나도....
그래서....
그런 우태 오빠가 좋았다.
**************
박성태.
그도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입 꼬리가 얇아지면서 길어졌다.
위로 말리며 그림자가 깊게 고였다.
그건....
마치 먹이를 본 하이에나 같았다.
아니, 정말....
하이에나처럼 다가 왔다.
아니다...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걸었나?
모르겠다.
어찌 됐든....
너무도 빨리...
내 앞에 나타났다.
뒷걸음질 몇 발 물러서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눈앞에 있었다.
" 민희야 하하~ 안녕! "
나는 얼어붙어서....
뒷덜미가 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는데....
박성태는 밝은 미소와 손 인사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정말...
그날....
그날 밤....
나에게 못쓸 짓을 한 남자의 얼굴일까...
싶을 정도로....
환한 표정과 몸짓으로....
내 앞에 섰다.
저 남자가...
내 몸 위에서 헉헉 거리며...
짐승처럼 소리를 내던 그...
그 남자가 맞는 걸까.
고작....
조작 이틀 전이었다.
지금도 난....
그 시간 속에서 멈춰져 있는데....
그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평상시보다 더욱 해맑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온몸에 소름이 싸하게 흐르며....
체온이 영하까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팔에...
손등에.....
잔털까지 모두 다 바싹 서서는....
정전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 우리.... 잠시 얘기 좀 할까? "
박성태의 손이 내 손목으로 다가왔다.
난 손을 뒤로 빼며 다시 물러섰다.
그리고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 할 말 없어여! "
작고 낮은 목소리.
그 속에서도 갈라지며....
호흡에 막혀서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 이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하자. "
눈동자.
박성태 그 남자의 눈동자가....
바로 내 코앞에 있는 듯 싶었다.
번들거리는 눈빛.
순간 뱃 속이 꼬이며....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비위가 뒤집히고 머리가 쭈삣거렸다.
" 하...할...말 없다구여. 제발... 저리 가여. "
" 아아~ 민희야~~~~!!! 우리 어제 일 때문에 그런 거잖아~~~~~~~~~!!!! 제발.... 제발 얘기 좀 하자! 엉?! "
갑자기 커진 그의 목소리!!!!
순간 움찔하며 절로 몸에서 힘이 빠졌다.
휘청이며 하마터면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남들이 들었을까봐....
아니, 들을까봐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 머.. 머하는 거예요? 무슨 짓이에요? "
박성태 그는 씨익 웃으면서 다시 평상시 말하는 톤으로 돌아왔다.
" 자꾸... 니가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잖아. 그럼 여기서 얘기할까? 좀 더 크게 말을 나눠야겠네. 안 그래? 서.민.희 후.배.님? "
그랬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이미 하이에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작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 알았어여. 알았으니까... 들어가서 얘기해여. "
우선 학교 강의장 쪽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감추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그가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기가 흐르며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싶었다.
현기증....
난 손을 꽉 쥐며 속으로 되뇌였다.
민희....
서민희....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정신...
치려.
**************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리 겁을 먹어야 하는 건지....
왜 옴짝달싹 못하고...
그의 말에 끌려가야 하는지.....
분명....
잘못한 것은 박성태....
그 사람인데....
왜 내가 이렇게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보이는 빈 강의장으로 들어갔다.
대강의장.
마치 옛날 극장 같은 그곳에 나 혼자 있었다.
그래도....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대로 있다간 저 남자가 이끄는 대로....
엄한 곳에 끌려 갈 것 같아서....
급히 들어온 곳이 이 곳이었다.
" 이야... 여기는 좀. "
박성태가 히쭉거리면서 따라 들어왔다.
난....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걸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박성태가 내 쪽으로 오는 것을 보며 급하게 소리쳤다.
히지만....
여전히 내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 가까이 오지 말아여! 거...거기서 말하세요. 대체... 멀 얘기하자는 거에요? "
그는 올라오다가 피식 웃고는....
자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여전히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 왜.... 그렇게 예민해서 그래? "
기가 막혔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가....
숨소리가 절로 커져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박성태는 내 눈을 마주 보는 듯 하더니...
슬쩍 시선을 돌리며 다시 피식 웃었다.
" 아.. 장난도 못 치겠네.... 하하.... "
장난...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장난이라고.....?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
다리...
아니, 몸은 감출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박성태는 어느덧 다시 일어나서는....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한걸음....
또 한걸음.
"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잖아. 우리 좋은 시간도 보내놓고.... "
" 조...좋은 시간이여? "
눈동자가 커지는 느낌.
그리고..
그 사이로....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습한 기운이 되고....
금방이라도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박성태...
이 남자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손을 움켜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때 들리는...
박성태의 목소리.
"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작아지고....
나긋나긋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얼어붙은 내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시가 잔뜩 돋아나....
몸을 움츠리고 상대를 노려보게 만들었다.
위험에 직면한....
동물처럼....
짐승처럼....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