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88)
502.
찬물로 씻고 나니 처음에 추운 듯 싶다가...
어느새 수건으로 물기를 닦을 때에는 몸에서 열이 나는 듯 느껴졌다.
하긴....
낮아진 체온을 높이느라....
급히 몸에서 열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대충 물기를 말리고 다시 옷을 입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내내 신었던 양말을 다시 신는 것을 좀 그래서....
맨발로 욕실을 나섰는데....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침대 위에 있는 민희였다.
아까 보던 방송을 이미 끝났는지....
무슨 가요 프로그램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민희가 채널을 돌린 것인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티비에서 무엇을 하는 건....
이미 우태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쯤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등지고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민희 만이....
그의 눈에 가득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살짝 입을 벌린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잠들어 있는 민희의 모습.
하루 종일 괜찮다며 눈을 홀기는 그녀였지만....
운전을 하며 내내 억지로 참아왔던 것이 분명했다.
고집쟁이....
정말 넌....
우태는 조심스레 다가가서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눕혔다.
깨지 않을까...
조심조심 눕혔는데.....
흐응 거리는 소리를 짧게 내고는....
다행스럽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편하게 눕히자마자 얼른 티비를 끄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시트를 가슴 위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 우태는 베개만 하나 챙겨서 아래 바닥으로 내려왔다.
불을 끄자 완전히 캄캄한 어둠으로 바뀌었다.
작은 조명마저 꺼버리고....
창문마저 닫혀 있는 그곳은 마치 깊은 동굴과도 같았다.
맨 바닥에 누웠는데 딱딱하지만 그래도 크게 불편할 것은 없었다.
거기에.....
비록 덮을 것은 없었지만....
난방을 세게 틀었는지 바닥이 워낙 따듯해서 춥지도 않았다.
마치...
민희와 첫 경험을 가졌던 그 모텔처럼.....
훈훈한 열기가 올라와서....
침대보다 오히려 바닥이 더 따듯한 듯 싶었다.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음만 간간히 들리는 가운데....
정적만이 가득한 방 안.
너무 조용하다 보니....
저 멀리 침대 위 민희의 숨소리도....
똑똑히 들려왔다.
쌕....쌕.....
쌔액....
쌕.....쌕......
고른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꾸만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다.
그 옛날....
그 시절.
" 오빠.... 침대로 올라와서 잘래.....? "
" 오빠 그러지 말고 올라와..... "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하던 민희의 목소리.
그리고 우태는....
자신의 흑심을 그대로 말했다.
" 나... 올라가면.... 늑대로 변할지 모른다? "
하지만....
민희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 그래도... 올라와... 오빠..... "
어쩌면 민희는 그날 처음부터 각오를 했을지 모른다.
우태와....
깊은 관계를 맺어도 괜찮다고.
그럼...
오늘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나와....
밤을 함께 보낼 작정이었을까?
민희의 말에 의하면 구례까지 가서 밤을 보내고....
새벽같이 지리산에 올라 일출을 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건....
처음부터 오늘 밤....
우태와 함께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는....
얘기기도 했다.
어쩌면....
방을 두개 잡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순간 아까 욕실에서 자신이 했던 생각이 떠오르며...
우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민희는 따로따로 자려고 했을 수도 있는데....
혼자만 괜히 김칫국 후루룩 마시는 듯 싶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 왜 여기 방을 잡을 땐.....
순간 절로 시선이 민희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 침대가 거대한 벽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저 위에 들리는 숨소리는 아까와 똑같이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모든 의문의 답을 가진 당사자는 저렇게 깊게 잠에 들어있는데....
피곤에 몸이 녹아나는 듯 싶으면서도 홀로 자지 못하는 자신이 더욱....
심란할 뿐이었다.
우태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침대 반대편으로 다시 몸을 돌아누워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베개를 매만지고는....
그 아래 한 팔을 집어넣고....
최대한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지금까지 오지 않던 잠이....
금방 우태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번 뒤로 돌아간 시계는....
또 다른 기억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가장 외롭고 마음이 허전했던 시간.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빈 집에 홀로 있었던 그 시간.....
난데없이 찾아와서....
현관문 앞에 서있던 민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옷....
정장 차림....
하얀 레이스 장신의 깃이 그 어떤 하얀 색보다 눈부셨던....
곱디고운 민희의 얼굴.
짙은 속눈썹....
검고 맑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서....
그 안에 우태 자신이 보이는 듯 싶었다.
" 울 오빠... 이제 혼자라니.... 이 세상에 혼자라니.... 어떡해.... 울 오빠... 어쩌면 좋아..... "
" 울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오빠아...... "
울부짖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던....
그날의 기억.
키스를 하는 동안에도...
입술에 짭짤한 맛이 감돌았던 시간.
그게....
민희와의 마지막 사랑을 나누었던 날이었다.
" 하아..... 후우우....... "
어느새 다시 떠진 눈.
우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방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검은 공간 속에서도 짙고 옅은 차이로 무언가 보이는 듯 싶었다.
모로 누웠던 자세를 다시 고쳐서 바로 눕고는....
팔짱을 끼어 베개 아래로 두 손을 모두 넣었다.
손바닥 위 베개를 거쳐서 올라간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오른쪽에 있는 침대가 다시 높은 담처럼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들리는 민희의 숨소리....
아까보단 조금 잦아진 듯 싶지만.....
그래도 규칙적으로 들리는 간격이 조금 더 길어진 듯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차라리 민희가 깨어 있었으면 도란도란 얘기하다가....
우태도 잠들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또 다시 한숨이 얕게 흘러나왔다.
자자....
어서 잠에 드는 거 말곤....
할 것도 없잖아.....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눈을 감긴 했지만....
미간 사이 긴장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곤두선 신경 속에 이 밤이 무지 길게만 흘러갈 듯한 예감이 밀려오며.....
입 안이 말라오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일어나서 물이라도 마시면....
오던 잠도 깰까 봐 발가락만 꼼지락 거릴 뿐....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우태의 한숨이 다시 흘러나오고.....
쌔액....
쌕.... 쌔액.......
무심한 민희의 숨소리만이.....
작게 방 안을 채웠다.
**************
" 헉! "
순간 우태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어두운 방안.
하지만 어젯밤 보았던....
캄캄한 암흑의 공간이 아닌.....
어둡긴 하지만 여린 빛이 그래도 사물을 구별할 수 있도록....
잔잔하게 깔려서 이미 해가 떴음을 짐작케 하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리고....
고개가 절로 왼쪽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달까.
무엇이 끌리는 듯...
자연스럽게 돌린 고개가 향한 곳에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민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지마자 인사를 건넸다.
" 오빠... 일어났어? "
반갑다는 듯....
더욱 환하게 배시시 웃는 그녀.
대체 언제....
언제 잠들었던 거지?
우태는 간밤 잠들지 못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데 언제 이렇게 자버렸는지...
그것도 깊게 잠들어서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점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순간 드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헛.... 지금 몇 시야? "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는 그의 몸 위에는....
하얀 침대 시트가 덮여 있었다.
민희는 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 아직 아침이야.... 좀 더 자도 돼. 오빠... 누워... 아니... 침대에서 조금 더 잘래? "
부드럽게 권하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우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온몸의 신경을 깨웠다.
" 괘..괜찮아. 지금 몇 시야? 핸..드폰 어딨지? "
모텔에 딱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시계였다.
여기 호텔(?) 또한 시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민희는 자신이 앉아있었던 소파 위 탁상으로 되돌아가서는....
우태의 핸드폰을 들어다 내밀었다.
" 9시 50분? 51분이네. 여기.... 오빠 핸드폰. "
사실 핸드폰을 찾은 이유가 시간을 알기 위해서 였는데....
민희가 보기도 전에 말해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핸드폰 액정 위에는 9시 51분이라고 숫자가 떠있었다.
" 하아.. 이런.... 미안.... 민희 넌 언제 일어났어? "
벌써 보니 그녀는 화장까지 단정하게 하고는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물론 민희가 진한 화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눈썹도 그렇고 크림을 바른 것만으로도 생얼과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매무새를 가다듬고 옷까지 입은 뒤에도....
티비는 켜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우태가 깨지 않도록....
그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민희는 쑥스러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되었어. 오빠가 너무 곤하게 자서.... 깨우기 싫더라. "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아서 눈을 감고 했었던 여러 생각들 중....
민희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에 요기할 것이랑 미리 준비해 둬야지....
생각했던 것이 모두 홀랑 날아가 버렸다.
우태는 미안함에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 깨우지 그랬어.... 미안해라.... 아니... 민희 너..... 좀 더 자지.... 피곤했을 텐데. "
" 아니야. 어제 언제 잤는지도 모르고 잤잖아. 그래서 그런지 완전... 곤히 잤더니 저절로 눈이 떠지더라. 훗.... 완전 개운해! "
팔을 양쪽 다 올리고는 역기를 들어 올리듯....
몇 번이고 흔들어대는 민희의 모습이 정말 활력 넘쳐 보이긴 했다.
우태는 잔잔한 미소로 옅은 한숨을 감추었다.
" 그럼 다행이고... "
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미치며 그것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