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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season2. 7. 2학년 과대(4)


season 2 7. 2학년 과대(4) 문밖의 소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잠잠해졌고, 곧 문이 열렸다. “미안, 늦었어.” 갈색 니트에 짙은 색 청바지를 입고, 여전히 길쭉하고 예쁜 재영이 들어왔다. “어서 와. 오느라고 고생했어.” 기찬이 반갑게 맞으며 가볍게 포옹했고, 이후 재영은 멀뚱히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던 혜수를 와락 안았다. “오랜만이다, 혜수야!” 혜수는 어색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반갑기는 한데, 재영이를 꼭 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팔을 둘렀다. “어, 으, 응. 오랜만이야.” 혜수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나이에 낯가림이라니.’ 아주 단짝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학교에서 말 편하게 트고 지낸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다들 서울 강남 출신끼리 삼삼오오 패거리 지어 몰려다녔어도, 기찬과 재영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이 CC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사귀기 전부터 그 둘은 무리 짓지 않은 다른 친구들과 유대관계가 좋았다. 그런 친군데, 지금 보니 너무 어색해 몸 둘 바를 몰랐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영이가 톱스타가 됐기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작 재영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연예인 되기 전보다 더 친근했고, 더 살갑고 다정했다. 본인 말로는 1학년 때의 여유로움이 가끔 그립다고 했다. 이제 겨우 연예계 데뷔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리고 그때 친구들과 더 열심히 친해지고 더 열심히 놀걸 그랬다는 후회도 든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혜수는 재영과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아니겠니.” 어찌 보면, 재영이는 대학 1학년만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사회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치열한 경쟁이다. 하물며 바닥 좁은 연예계야 오죽할까.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혜수지만, 그런 상식적인 수준의 이해만으로도 재영의 고충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 화려해 보이는 연예인이지만, 정말 외롭고 힘들겠다.’ 어느새 재영과의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 세 사람은 맛있는 음식과 수다를 곁들이며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혜수는 저도 모르게 기찬과 재영을 관찰하듯 살피게 됐다. 보면 볼 수록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조금 더 뻗어가더니, 그들의 이별이 무척 아쉽다는 마음이 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바로 현타가 왔다. ‘남의 이별인데 내가 왜…. 나도 참 주책이다.’ 하지만 한번 든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 내내 계속 그 둘을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이별한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왜 헤어졌을까? 이렇게 사이가 좋은데.’ 혜수를 포함한 누구도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그동안 소문과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두 사람 집안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서 더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정리했다더라, 가요제 대상 수상 후 상금이나 수익 등 금전적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더라, 재영이가 다른 남자 스타와 눈이 맞았다더라, 제법 그럴듯한 소문들이 난무했다. 그중 여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기찬이 재영이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놓아준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게 아닐까?’하는 추측이고 자기들끼리의 공감 놀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넓게 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진실처럼 굳어졌다. - 재영이랑 기찬이가 하는 말을 누가 들었데. 원래 ‘카더라’ 통신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확인 안 된 소문들이 진실로 둔갑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학우들 사이에서 기찬은 처음부터 외계인 같은 존재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각종 미담이 쌓이다 못해 없던 일까지 덧붙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주 만화 속 남주처럼 입에 오르내렸다. 문득, 혜수의 눈에는 기찬의 미소가 낯설었고, 괜히 마음 한 곳이 저릿함을 느꼈다. 슬픔, 고독, 외로움, 쓸쓸함…. 밝게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마치 피에로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물론 그건 혜수 본인의 기분이고 뇌피셜이었지만, 어쩐지 그것이 기찬의 진심처럼 느껴졌다. 혜수는 태생적으로 공감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동화책을 보며 그렇게 울었다. 주인공의 고난과 슬픔이 마치 제 것인양 가슴 미어져 울고 또 울었다. 그런 그녀의 공감력이 엉뚱하게도 지금 기찬에 대한 연민을 만들어냈다. ‘안타까워라.’ 혜수는 괜히 마음이 짠했다. 그건 여성의 모성 본능 같은 것이었고, 그 감정은 기찬에 대한 울타리(그러니까, 남자에 대한 경계심 같은 것)를 무너뜨렸다. ‘안아주고 싶어.’ 무의식의 저편에서 마음이 건넨 소리였다.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다독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런 마음을 인식한 혜수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대체 무슨 생각을…. 나 미쳤나 봐!’ * * *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고, 덩달아 식사 시간도 함께 길어졌다. ‘아니, 둘이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다고….’ 재영과 혜수의 수다 삼매경에 기찬은 속으로 하품을 삼켰다. 애초에 기찬은 혜수의 일상이든 재영의 일상이든, 다 아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더 지루했다. “기찬아, 너 과대면, 앞으로 회사 못 나오는 거 아냐?” 결국 기찬이 과대가 됐다는 얘기까지 도달했다. “걱정 마. 나, 성기찬이야.” 그 한마디면 됐다. 재영은 말없이 미소 짓는 것으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고, 재영도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라면, 완벽하게 잘 해낼 거야.’ 어느새 기찬을 아는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각인 된 것이다. 기찬은 마침 자신에게 질문이 들어온 걸 기회 삼아 자리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영아. 너 내일 음악 방송 녹화에 라디오 생방에, 저녁에는 부산 일정까지 있다며. 그만 들어가 봐야지?” 그러자 재영이 풀죽은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안 그래도 이제 일어나려고 했어.” 그녀는 입을 비죽 내밀고는 기찬을 책망했다. “가만 보면, 네가 내 매니저보다 더해. 치이.” 그러고는 혜술를 돌아보며 표정을 순식간에 바꿨다. “우리, 다음에 또 저녁 같이 먹자.” “물론이지. 너 시간 괜찮을 때, 언제든 불러 줘.”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마주 웃었다. ‘휴우. 드디어 끝났다.’ 레스토랑을 나온 세 사람은 주차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재영이 차에 오르기 전, 기찬에게 넌지시 말했다. “얘기 들었어. 다음 주부터 네가 내 매니저 해준다고.” 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응. 저분은 임시 매니저라며. 너 정도 되는 스타한테 말이 되냐.” 그 말에 재영이 풉, 하고 웃었다. “너, 설마 매니저 일도 할 줄 아는 거야?” 아무리 지금 매니저가 임시 고용인이라지만, 생초보인 기찬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기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속으로 웃음을 삼켜야 했다. ‘내가 전생에 네 매니저도 했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기가 막힌 인연 아닌가, 싶었다. ‘그땐 나도 상황상 악이 받쳐 어른스럽지 못했고, 너도 지금처럼 순수하지 않았고.’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랐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반드시 잘 할 거라고 다짐했다. ‘널 진짜 스타로 만들어 줄게.’ 내 영원한 돈줄. 내 영원한 좃집. 내 영원한 사랑. 속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새어나오는 웃음까지 막지는 못했다. 피식. ‘이거, 나 완전 악당 같은데?’ 그 미소를 본 재영이 물었다. “왜? 무슨 생각에 웃는 건데?” 기찬은 능숙하게 받았다. “너랑 당분간 함께 다닐 거 생각하니까, 좋아서.” “치이. 그게 뭐야.” 재영이 웃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믿든 말든, 일단 사탕발림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그래서 그녀는 기분 좋은 얼굴로 기찬에게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 “어쨌거나, 잘 부탁해. 그리고 고마워. 나 요즘 너무 즐거워. 나도 몰랐던 내 적성을 알게 돼 버렸지 뭐야.” 연예인 생활이 만족스럽다는 말이었다. 조금 전 혜수와 수다 떨며 푸념을 늘어놓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둘 다 진심이라는 걸, 기찬은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하지만, 항상 즐겁고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거, 잊지 마. 마음 단단히 먹고, 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알지?”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찬을 가만 포옹했다. 그러고는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재영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기찬과 혜수도 차에 탔다. 그때까지 혜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그녀는 기찬과 재영을 보며 또다시 혼자만의 상념에 빠졌었다. 두 사람 이별의 의미를 계속 곱씹고 있었다. ‘어차피 삶은 비즈니스야.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더 큰 행복을 품을 수 있다면, 때론 지독하게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게 맞아.’ 그 짧은 사이, 혜수는 기찬이나 재영이 자신과 달리 이미 어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대답이 없어?” 갑자기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온 기찬의 목소리에 혜수가 깜짝 놀랐다. “어? 어, 아니….” 운전석에 앉아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찬의 눈빛에, 혜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잘생겼어.’ 그냥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녁 내내 가슴을 때리던 연민과 하나가 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2차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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