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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season2. 6. 2학년 과대(3)


season 2 6. 2학년 과대(3) 기찬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결국 조교가 결정을 내렸다. “또 다른 추천도 없고, 반대도 없으면, 기찬이가 2학년 과대다.” 기찬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하지만 최창섭 앞에서 그런 불만을 내색해서는 안 되기에, 감정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추천해 보기로 했다. “선배님.” 최창섭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기찬과 눈을 맞추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기찬은 그 표정에서 그가 자신의 반발이나 이의제기 등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런.’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결국 너도 똑같은 놈이구나’, 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순발력을 발휘해 반전을 꾀하기로 했다. “과대, 제가 맡겠습니다. 말씀드리려고 했던 건, 전임 행정부가 전부 부재인 걸 감안해서 인수인계 등은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예상을 벗어난 기찬의 말에 최창섭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의실 모두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최창섭이 놀라워 한 건 의외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기찬, 너 재수했다고 했지?” “네. 한체대 입학했다가 바로 자퇴하고 재수했습니다.” “74년생, 호랑이띠 맞지?” “네, 지금 스물한 살 맞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문 끝에 그는 잠시 기찬을 응시했다. 기찬은 그런 최창섭의 시선이 처음으로 부담스러웠다. 어떤 의문 때문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다행히 별문제는 아니었다. “군대를 갔다 온 것도 아니고, 대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냐?” 기찬은 속으로 안도하며 편하게 대답했다. “아, 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체고, 체대 출신이잖습니까. 아무래도 말투가 조금 군대식 같을 텐데, 물이 아직 덜 빠진 것 같습니다.” 기찬의 대답은 아주 설득력있었다. 그래서 최창섭뿐 아니라 속으로 선배와 같은 생각을 했던 동기들도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그의 말에 수긍했다. “아, 그렇구나. 그렇지. 보통 체대 애들이 군기를 잡기는 하더라.” 하지만 기찬은 속으로 다른 말을 했다. ‘내가 볼 땐 의대도 다르지 않아 보이던데 뭘.’ 잠깐 기찬과 조교 선배가 당장 급한 일에 관해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계획서가 다 돌았다. “기찬인 강의 끝나고 바로 행정실로 가서 미연이 찾아. 3학년 정미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가서 아까 말씀하신 내용들 전달받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수고 좀 하고.” 최창섭은 그 말을 끝으로 쿨하게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그러자 쥐 죽은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 강의실 안에 숨통이 트였다. 후우우. 와아아아. 그중 유세현은 거의 영혼이라도 털린 것처럼 축 처졌다. 하지만 곧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기찬을 돌아보더니,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대, 축하해.” 그 말에 모두의 이목이 기찬에게 쏠렸다. ‘후우. 그래. 내가 방심했다. 인정.’ 기찬은 지금의 이 기분을 잘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이야 아직 학생이고, 이 정도 리스크는 피해 축에도 들지 못하기에 애교로 봐도 된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 점점 복잡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서, 지금과 같은 빈틈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전생자라도 신이 아닌 이상 실수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대충 넘겨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바로 지금처럼. ‘오늘의 방심은 아주 좋은 예방주사고, 교훈이 됐다. 고맙다, 유세현.’ 기찬은 속내를 완벽히 감추고 밝게 웃었다. “어, 그래. 덕분에 과대도 다 해 보고, 고맙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높여 모두에게도 과대로서 첫인사를 건넸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본의 아니게 내가 2학년 과대를 맡게 됐다.” 다분히 유세현의 추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대가 됐다는 의미를 실었다. 그리고 뒤이어 핵심을 전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앞으로 이것저것 협조 구할 일이 많을 거고, 해달라는 것도 많을 거야. 잘 좀 따라줘. 부탁한다.” 그 말 그대로, 모두 기찬이 어쩔 수 없이 총대 매게 됐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기찬의 부탁 말이 부채감으로 느껴졌다.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반발심이 들지 않는 이유였다. 기찬은 그런 심리적인 약점을 일부러 건드린 것이다. ‘앞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과대 일을 수월하게 하려면, 모두를 수족으로 만들어야 해.’ 기찬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차피 닥친 일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먼저 학생회 구성부터.’ 의과대 총학생회의 산하 조직이자 일부가 되는 2학년 집행부를 구성해야 한다. 자신이 수장이 됐으니, 구성원 임명은 전적으로 기찬의 권한이다. 훗. 기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나름의 계획을 세우다 보니,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 것이다. ‘이 기회에 마음껏 사심을 채우는 것도 좋겠어.’ 그는 저만치 앞자리에서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박혜수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 * * “와, 이런 데는 많이 비쌀 것 같은데.” 혜수는 압구정동의 고급 식당에 들어서며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주차장에서부터 TV에서나 보던 정치인 몇을 보고 난 뒤라 더 그랬다. “괜찮아. 오늘 저녁은 톱스타가 사는 거니까, 우린 맛있게 얻어먹으면 돼.” 기찬이 그런 그녀를 웃으며 안심시켰고, 둘은 곧장 예약된 룸으로 갔다. “제이님 곧 도착하신다고, 먼저 식사 시작하시라는 연락 받았습니다.” ‘제이’는 재영이의 활동명이었고, 전담 서버의 안내와 함께 애피타이저가 식탁 위에 놓였다. “전복죽이네. 맛있겠다. 먹자.” 기찬이 어리둥절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혜수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런 기찬을 보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이런 데 자주 와봤나 보다.” 능숙한 태도를 보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기찬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네 말대로 여기 비싸. 자주는커녕 나도 처음 와본다. 솔직히 재영이 때문에 온 거지, 중국집이나 피자집이 편해.”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얘도 의외로 소시민이야.’ 사실 혜수뿐 아니라 학우들 모두 기찬에 대한 선입견 내지는 편견이 있었다. 서울대 최고 학부라는 의과대에 수석 입학한 아이. 키도 크고 잘생기고 몸도 좋아 보는 사람이 어떤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먼저 말 걸기가 너무 어려운 아이. 입학하자마자 비싼 중형차를 타고 다니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아이. 그게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의 첫인상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를 어느 명망 있는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도련님 정도로 생각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믿기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단연 그의 출신이었다. - 체고 졸업 후 한체대 입학, 그리고 자퇴. -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부동산 하는 평범한 집안. 처음 그 소문을 접한 학우들은 전부 거짓 소문이라며 믿지 않았다. 이미 구축된 기찬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부 사실이었고, 동기고 선배고, 대부분이 기찬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다. 물론 기찬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정말 그와 무관하게 저들끼리 기대하고 저들끼리 실망한, 그런 모양새였다. 그래서 이때 기찬을 대하는 태도가 세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대하기 어렵기만 하던 그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부류다. 1학년 과대였던 허동훈과 그 무리가 대표적이었다. 또 하나는, 은근히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가 무관심으로 돌아선 이들이다. 뭔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것 없다니까 굳이 그와 친해질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학우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오히려 기찬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 박혜수와 총무였던 장근식 등 소수가 그랬지만, 오히려 실력이나 인성 면에서는 가장 실속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기찬은 그런 학우들의 제멋대로인 실망과 편견을 보기 좋게 부숴버렸다. 계기는, 학부를 넘어 학교 전체가 주목하는 재영이를 제 여자로 만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학기 내내 과외며 공부며 운동이며, 누가 봐도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제 할 일에 매진하는 모습에 오히려 숙연했다. 기찬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가 삶에 임하는 진심을 느끼게 됐다. 저마다의 입장에서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동기부여가 됐다. 사람은 누구나 저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익이 되면 긍정, 손해가 되면 부정으로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찬은 모두에게 ‘긍정’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기찬에 대해 식었던 관심을 처음 이상으로 돌려놓았다. 또한 그의 여러 능력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던 의식적 반감을 깨끗하게 상쇄했다. 그러고도 기찬에 대해 애써 무심하던 나머지 사람들도 최소한 겉으로는 그를 환영하게 만든 것은 역시 가요제 수상이었다. 물론 어딜 가나 안티는 존재하는 법. 신기하기도, 놀랍기도, 부럽기도 한 그의 독특한 행보에 소문과 추측, 억측들이 들러붙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1년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가 살아낸 지난 1년이 감히 흉내도 내기 힘들 만큼 성실했기에, 누구도 그를 시샘하거나 그의 성과를 평가절하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저 축하만 있을 뿐이었다. ‘하긴, 생긴 것부터가 워낙 잘나서 적응은 안 되지만, 동기 중 가장 인간적이기는 했어.’ 혜수는 기찬을 보며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이,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팬이에요! 사인 좀 해주세요!” “꺅, 어떡해!” “와, 실물이 훨씬 예쁘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물러서 주세요.”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 기찬의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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