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season2. 12. 집행부(1)
season 2
12. 집행부(1)
기찬은 갑작스러운 호출기의 진동에 인상을 구겼다.
‘니미.’
머리털이 쭈뼛 설만큼의 쾌락을 만끽한 후, 복수의 시작을 느껴 만감이 교차하던 중이었다.
전생의 어둡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이생의 찬란한 빛이 눈앞에 번지는 것 같은 희열과 함께 전율이 일었다.
그 여흥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는데, 아주 심하게 방해받은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기찬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번호를 확인했고, 굳었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아. 감독님.”
제주도의 오명환 감독이었다.
기찬은 곧장 침대에서 빠져나와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 기찬아. 나 오늘 서울 올라가는데, 잠깐 보자.
그렇게 시작된 메시지는 비행기 출발, 도착 시간과 방문 목적까지를 언급하고 끝났다.
“모시러 오라는 소리네. 으이그. 그나저나….”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가만 시간을 어림하고 장소 등도 가늠했다.
“오전 10시 도착이면 시간은 여유 있고…. 그런데, 대한체육회면,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 회관에 있잖아?”
문득, 집이 수원이라는 게 의외로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평소 고민하고 있던 계획 하나를 앞당길 필요성을 절감했다.
‘독립할 때가 됐어.’
빨리 서울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일을 만들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더욱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의 독립은 곤란했다.
이제 막 엄마와의 관계를 새롭게 텄는데, 다시 물거품을 만들 수는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
일단 독립이나 이사 문제는 천천히 생각할 문제로,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오명환 감독의 일정을 가져와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했다.
‘지난번 제주도 갔을 때 했던 말들….’
당시의 대화를 하나하나 자세히 재생했다.
그러자 쉽게 결론이 나왔다.
‘오명환도 은거에서 벗어나 다시 행보를 시작했다.’
1995년, 1년 후 있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둔 이 시점에 그가 움직인다는 건, 대한민국 복싱계에 지각변동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체육계 전반의 세대교체 신호탄이 될 것이다.
미래를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오명환. 나중에 문체부 장관까지 오르는 인물이니, 잘 활용해야겠지.’
아직 속단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뭔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휴우.
“2학년, 올 한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어.”
* * *
몇 개월 만에 다시 은사를 만난 기찬은 여전히 그에게 충직하고 깍듯했다.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태도가 호의를 받는 사람의 무의식에 긍정적 판단 근거로 쌓이고 선의로 각인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한국 복싱의 전설 중 한 명인 오명환과 특수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기찬의 계획 일부였다.
“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시간 맞춰 잘 왔다. 고마워.”
오명환이 차 문을 열어주는 기찬의 어깨를 툭 치며 밝게 웃었다.
그 표정에서 진심 어린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세 싸움에서 밀려 복싱계에서 공식 은퇴한 그였다.
권력을 잃고 나니, 평소 친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멀어지고 좋은 시절을 함께 나누던 이들은 등을 돌렸다.
한마디로 끈 떨어진 연 취급 받던 그에게 기찬 같은 제자가 있다는 게 인생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오명환으로서는 무척 고무적이었고, 고마웠고,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단, 한 가지가 아쉬웠다.
‘이런 놈이 계속 복싱을 해야 했는데….’
기찬이 이제 더 이상 복싱 선수가 아니라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와 복싱이라는 끈으로 계속 이어져 있다면, 온전히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특히 기찬이처럼 피지컬, 타고난 운동신경, 거기다 겸손과 노력까지 겸비한 선수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심지어 서울대 의대에 입학할 만큼 머리까지 비상해 앞으로 제가 하려는 일을 함께 도모할,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였다.
그는 단순한 장기말이 아니다.
‘수족처럼 부리면 딱 좋은데.’
하지만 이제 와서 아쉬워한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격이었다.
“감독님. 그럼, 일정 끝나고 숙소 가실 때 또 연락 주세요. 학교 갔다가 숙소에 들를게요.”
오명환의 미련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기찬이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그제야 감독도 아쉬운 마음을 거둬들였다.
“그래. 그만 가 봐. 그리고, 숙소에는 올 필요 없어. 바쁜데 뭘 자꾸 봐.”
“에이.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서운합니다. 선약이나 일정이 있으신 게 아니면, 들를게요.”
넌지시 애교를 섞어 말하던 기찬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감독님 좋아하시는 발랜타인 21년 산 들고 가겠습니다.”
그 말에, 그런 기찬의 모습에 감독은 기분이 확 좋아졌다.
“하하. 그래, 와라. 선약 있어도 취소해야겠다.”
단지 취향 저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찬의 태도가 볼 수록, 겪을수록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찬은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금방 시동이 걸리고, 차가 멀어졌다.
옛 제자가 사라진 곳을 아련히 바라보던 오명환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쩝.
“나이 몇 살 더 먹더니, 딴 사람이 됐어.”
벌써 10년 전 일이었다.
당시 경기 체고 복싱 감독이던 오명환은 매년 인근 중학교를 순회하며 복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공식적으로는 체험학습 행사였지만, 사실 좋은 인재를 미리 찾기 위한 그만의 스카우트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중학생이 된 기찬을 알게 됐고, 그때 그의 운동신경과 복싱 재능을 보고 발탁해 키웠다.
3년을 꼬박 지도해 기찬을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경기 체고에 진학시켰다.
이제 그를 본격적으로 담금질 해 아시아 최고를 넘어 WBC 챔피언을 만들겠다는 꿈을 꿨다.
하지만, 기찬이 고 2가 되던 해, 그는 복싱협회 이사로 추대받아 체육 행정에 발을 들이게 됐다.
평소 포부가 크고 야심이 있던 그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명환은 자리를 옮긴 후에도 자신이 모으고 키운 미래 복싱 재목들은 신경 써서 챙겼다.
한체대나 용인체대 등, 인맥을 활용해 조기에 그들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마음 편히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다들 각종 대회에서 성과를 내고 두각을 나타냈다.
그중 단연 돋보였던 건 역시 기찬이었다.
추억을 곱씹듯 당시를 떠올리던 오명환은 겨우 기찬의 차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땐 정말 붙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말야.”
정말 그랬다.
지독히 내성적이라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말고는 대화라는 걸 나눠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감독인 자신에게만 그런게 아니라 인간관계 자체가 그랬다.
그가 기억하는 기찬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자발적 왕따처럼 지냈다.
그러니, 지금의 기찬은 오명환에게 아주 낯설었다.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도 그런 기찬의 변화 때문에 많이 놀랐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흐음. 아닌가. 단지 나이 먹어서가 아니라, 진짜 적성을 찾아서일 수도….”
서울대 의대생.
체고, 체대 출신의 복싱 유망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길을 지나고 있는 기찬을 보며, 그는 문득 자신이 기찬에게 혹시 잘못한 게 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복싱할 땐 성격도 표정도 전부 회색빛이던 아이가 복싱을 그만둔 지금은 저렇게 밝고 행복해 보이니 드는 생각이었다.
‘훈련이 좀, 아니, 많이 혹독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기찬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운동을 한다는 애들은 전부 겪는 일이었다.
절대 가학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엄연히 훈련의 일환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오명환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속으로 하던 자기합리화를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저쪽에서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아이고, 형님, 아침부터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후배이자, 체육협회에 먼저 입성해 활동하고 있던 추영호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어, 오랜만이다.”
그는 비즈니스를 위한 웃는 낯을 얼굴에 덮어쓰고 그만 기찬에 대한 상념을 지웠다.
* * *
기찬은 차에서 내려 강의실을 향해 걸으며 오명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당연히 그를 활용할 방법이 주된 것이었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 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맛있었던 디저트가 떠오르듯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사모님은 같이 안 오셨네.”
오명환의 부인이자 잠깐 몸담았던 한체대 선배인 조윤정이 생각났다.
정확하게는 그녀와의 섹스가 전부 떠올랐고, 마른침이 고였다.
스읍, 꿀꺽.
체조선수 출신 특유의 유연한 몸과 쫙 벌어지던 두 다리.
기찬에게 매달려 앙앙대던 콧소리.
보기와 달리 꽤 풍만했던 젖가슴과 앙증맞은 젖꼭지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허리를 흔들어 박아댈 때마다 탱탱볼처럼 탄력 넘치던 엉덩이가 인상적이었다.
기찬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엄마와의 새벽 섹스의 여훈이 가시지 않은 것 같은데, 또 섹스 생각이라니.
아침 댓바람부터 성욕에 매몰되는 게 싫어 생각을 달리했다.
‘미친, 딴생각하자.’
엄마와 본격적으로 섹스를 시작한 후, 저도 모르게 욕정에 이성을 잃고 눈이 머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해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지금만 해도 조윤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지가 바지를 뚫을 기세로 쭉 뻗었다.
‘염라의 축복은, 내가 잘못 관리하는 순간 염라의 저주가 된다.’
기찬은 다시 한번 자기 절제를 다짐했다.
“성기찬! 빨리 와! 선배들이 너 찾아!”
기찬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저만치에서 박혜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기찬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