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24화
24화
“추태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만 편히 쉬시오.”
그리고 그는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짧은 대화에 나는 몹시 지쳤다. 나는 공작이 나가자마자 다시 쓰러져 잠들었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식사와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의 목욕이었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 체력 단련을 꽤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나는 몸이 흐들흐들했다.
그날엔 세 사람이 찾아왔다. 제일 처음은 아나였다.
“선생님!”
문을 열고 들어온 아나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보자마자 그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달려들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선생님을 죽을 뻔하게 만들었어요.”
아나는 나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나는 아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렇지 않다고, 그건 사고였고 내 책임이었다고 반복해서 말해 주었다. 나는 아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엄지로 닦으며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그녀가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아나도 내게서 어딘가 이상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서로가 건강한 것을 확인한 우리는 다시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아나가 잘못되었더라면 나는 깨진 얼음물 속에서 '나를 버릴 건가요?'라고 묻는 듯하던 초록빛 눈동자를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아나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거기에 앉아 한참을 종알거리다 갔다.
“선생님, 내일 또 와도 되나요?”
“물론 되지, 아나.”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올게요!”
아나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던 차라 아나의 병문안은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두 번째로는 의사가 방문했다. 의사는 내 몸 상태에 대해 묻고는 끓인 물을 많이 마시고 휴식을 충분히 취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세 번째로는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폴린느 부인이 등장했다.
“몸은 어때요, 잔느 양?”
“살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 야위었군요, 당연하지. 그간 아무것도 먹은 게 없잖아요.”
부인은 침대로 와 내 두 손을 쥐고 손이 너무 앙상하다며, 이제부터 나의 식사의 영양에 특별히 신경을 쓰겠다고 말했다.
“저는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있습니다, 폴린느 부인.”
“그런데 이 방은 따뜻하지 않군요. 외풍이 많이 들고 벽난로 불도 시원치 않은 게 연통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네요. 괜찮다면 방을 옮겨 드릴까요?”
'음?'
그 말에 나는 의아했다. 내 방을 지정한 건 폴린느 부인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 와 방을 바꾸기엔 지낸 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부인의 권유를 사양했다. 처음엔 좀 좁다 싶었지만 지내다 보니 아늑하기도 했고 살면서 불어난 짐을 옮기는 것도 일이었다.
“부인,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몸도 안 좋은데 이렇게 추운 곳에 머무는 건 안 될 일이죠. 제 방과 같은 층에 이곳과 크기가 비슷한 다른 방이 비어 있답니다. 해도 잘 드는 곳에 큰 창이 났고, 벽난로도 이보다 훨씬 큰 데다 가구도 모두 새것이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부인, 저는 이 방에 이미 정이 들었습니다.”
“정이야 또 붙이면 되죠. 여기 오래 계실 것 아닌가요?”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부인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부인을 만난 김에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가 언제부터 다시 아가씨의 수업을 하면 될까요?”
아직 침대에 앉아 손님을 맞이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리 못 해도 이틀 정도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어머나, 듣지 못했나요?”
폴린느 부인은 오히려 반문했다.
“공작님께선 잔느 양에게 이미 2주간의 휴가를 주셨답니다.”
휴가? 그것도 2주나? 그 말에 나는 놀랐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쉴 필요는 없어요, 부인. 제 생각에는 한 사흘 뒤에 수업을 하면 어떨까요?”
“잔느 양은 아직 젊어서 모르겠지만 한번 상한 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공작님께서 모처럼 주신 휴가니 사양 말고 푹 쉬도록 해요.”
이윽고 폴린느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언제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혼자가 되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2주라니?'
내가 유배자 신분이 아니고 집이 가까웠다면 가족들을 만나러 가도 될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수업도 없이 대체 뭘 해야 할까?
첫 병문안 이후 아나는 매일 아침 식사 후 찾아와 점심 식사 직전까지 종알거리다 갔다. 듣기에 보모가 해고당했다고 하니 후임자를 찾는 동안 심심할 것이다. 보모가 있던 중에도 아나와 놀아 주었는지 의문이지만.
'이참에 하자, 수업.'
아나도 수업을 싫어하지 않았다. 공부방에서 하는 게 아닐 뿐이지 오전 시간에 나는 아나와 함께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으며 보냈다.
하지만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다. 밖에는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고 산책도 할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끓인 물을 세 주전자쯤 마시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한 잔만 더 마시면 토할 것 같아.'
방에만 있으면 하녀 아이가 와 계속 차와 기름진 음식을 권했다. 폴린느 부인이 시킨 일 같은데 거절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받아먹으니 오히려 속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브륄을 타는 것은 어떨까? 이제 몸도 좀 나아졌으니까.'
하지만 다음 날 나는 브륄을 보러 갔다 마사에서 쫓겨났다.
“공작님께서 아가씨께는 말을 내어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시면, ‘말을 타는 게 아니라 침대에 누워 쉬는 게 요양이다.'라고 전하라고.”
마부의 변은 이러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는 저택의 그 많은 고용인, 사병 하나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다루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지독한 통제광인 것일까?
아무튼 브륄도 타지 못하게 된 내게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 말이다.
'이것도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그전에도 간간이 책을 가져다 방에서 읽었지만, 이제 서재와 방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나는 서재에서 살기 시작했다.
서재엔 먹고 자기만 하며 읽어도 몇백 년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고, 군데군데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안락한 소파도 놓여 있었다. 나는 점심 식사 후부터 다음 저녁 식사 전까지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서재에 앉아 책만 읽자니, 무척 이상하게도 나는 이 서재를 가진 스카디 공작이 부러워졌다. 언제든지 이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또 이 서재에 자신이 원하는 책을 더할 수도 있는 이곳의 주인이.
'부러워? 그건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야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
왕궁의 서재를 보았을 땐 전혀 부럽지 않았는데 공작의 서재는 부러워하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알 수 없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서재를 가질 수 없는 걸 알면서.'
내 처지에 이런 서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죽었다 깨나도 떠오르지 않을 터였다.
어릴 때는 언젠가 이런 서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원하는 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될 수 있었다. 책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책 속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었고, 나는 그걸 탐험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집 안에 모험의 세계가 열려 있는데 내가 왜 다른 것을 원하겠는가? 나는 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길 좋아하는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 책을 팔아 치우게 되면서 나의 모험도 끝났다. 그 시절의 어린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미래의 내가 유배자가 되어 스카디령에 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역시 많이 실망할까. 지금 만 권의 책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속 한구석에 어두움이 드리워 있는 것은 이 책이 내 것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더 이상 책에 몰입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 버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턱, 하고 어깨에 곰 앞발 같은 것이 얹혔다.
“흐어어억!”
책을 읽던 나는 펄쩍 뛰어오르다 못해 앞으로 엎어졌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 떨어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