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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화


25화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공작 각하께서 서 계셨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멈추지가 않았다. 아니, 멈추면 죽기는 하는데, 너무 놀랐고 무섭고 두근거려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가, 가가.” “가가?” “공작 각하! 공작 각하!” “난 두 명이 아니니 한 번만 말하시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가다듬으려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여긴 공작님의 서재고 불청객은 나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나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을 주워 탁탁 털어 제자리에 꽂은 뒤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편히⋯⋯.” “앉으시오.” “예.” 그 말에 곧장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지위의 격차도 격차지만 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내가 앉은 의자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림이 좀 이상해졌다. 위계에 따르자면 그가 앉고 내가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몸은 좀 어떻소?” “살펴 주신 덕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여기엔 무얼 하러 왔소?” “그게 교재로 쓸 게 있나 하여⋯⋯.”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심해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짧은 대화로 나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입에 발린 말보다는 진실을 듣는 게 공작이 원하는 바임을. “그래서?” 공작은 되물었다. “예?” “방금 전에 읽던 책은 재미있었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느라 방금 전 읽었던 책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내가 꽂아 둔 책을 다시 뽑아 일순 표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원래 관심사가 많은 편이오?” “저는 그냥 잡히는 대로 읽는 편입니다.” “겸손하군. 그런데 수도에는 책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즐길 거리가 많을 텐데, 왜 책 읽는 데 재미를 들였소?” “⋯⋯.” “책을 읽으려면 훈련이 좀 필요하지. 그런데 그곳엔 교류회도 있고 시 낭송회나 미술 전람회, 무도회도 있지 않소. 그대의 고용주는 방타두르 공작 부인이었고 그대도 궁정 사람이었으니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았을 텐데?” 그 말엔 뭐라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에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매일 넘쳐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주체가 되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허드렛일을 도맡는 하녀들 같은 존재였다. “제가 독서를 취미로 가진 건 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제 조부께서 크고 근사한 서재를 가지고 계셨어요. 이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요. 그리고 궁정의 사교 생활은⋯⋯ 저와는 잘 맞지 않았고요.” “그렇게 보이오.” 그가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사교계를 즐기기엔 너무 촌스러워 보인단 뜻일까? “어쩌면 그래서 그대가 오히려 이곳의 생활에 더 빨리 적응한 것인지 모르지. 내 생각에 그대는 반년 만에 아주 잘 적응한 것 같은데. 나는 좀 놀랐소. 그곳보다 여기는 춥고⋯⋯ 재미없지 않소?” 그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한 손으로는 책장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째서인지 살짝 시선을 비꼈다. “저는 이곳도 좋습니다. 다행히 아가씨도 저를 좋아해 주시고, 제가 적응을 잘 한 것은 모두 공작님의 배려 덕분이지요.”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아나는 그대를 좋아하오. 그대가 잘못되었다면 아나 또한 몸과 마음이 성치는 않았을 것이오. 부모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나 또한 그대 덕에 이곳에 잘 적응한 것 같소. 몰라볼 정도로 숙녀다워졌더군.” “감사합니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오?” “그렇습니다.” 다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나가 물에 빠졌을 때 부러진 나무를 가져올 기지는 어떻게 발휘했소? 그대도 추웠을 텐데 옷은 어떻게 다 벗어 줬고.” “운이 좋았을 뿐이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누구나 일이 닥치기 전엔 자신이 그럴 만한 용기와 지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일이 닥쳤을 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소.” 나는 공작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일이 좋게 풀렸기에 망정이지 내가 제대로 대처했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좀, 내 예상을 벗어나는군. 다른 귀족 여자들보다 강단이 있소.” 그는 책 한 권을 꺼내 만지작거리다 다시 꽂으며 물었다. “주어진 처지에 불평이 없는 것은 천성이오? 살면서 단련된 것이오?” “살면서 단련되었겠지요, 모든 게 말입니다. 저 그런데, 여기 앉으시겠습니까? 제가 일어나 있겠습니다.” “거기 그대로 계시오. 그대는 환자가 아니오?” 그쯤에서 이 이상한 구도를 바꾸어 보려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 책들은 조부와 부친께서 모은 것이오. 새 책도 있지만 중고 서적상에게 사들인 책들도 꽤 있소. 겨울이 되면 별달리 할 일이 없어 책을 읽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나는 그 때문에 책 읽는 법과 즐거움을 깨쳤소.” “⋯⋯.” “우린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소. 그리고 그대의 눈동자도 때론 녹색이지. 햇빛에 비칠 때.” 나는 그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에게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 스카디 공작이 물었다. '제가요? 공작님과요?' 내 눈동자는 녹색이라기보단 갈색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리고 공작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더 많았다. '으음⋯⋯?'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나는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전에도 나는 눈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다. 하지만 뭔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 이 저택에 쭉 있을 작정이오.” '그렇구나.' 공작은 지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다시 그의 두 눈으로 시선을 향하자 나를 곁눈질하던 그는 초록 눈을 다른 곳, 저 샹들리에 위로 돌렸다. 나도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얼음 결정 같은 크리스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번엔 아예 고개를 반대편 책장으로 홱, 하고 돌렸다. 그러고는 책을 찾으려는 듯이 책등을 훑었다. 나도 그곳을 바라보았다. 책장에 꽂힌 방대한 양의 책은 주제별로 꽂혀 있었는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요리 분야였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나야겠다.' 이곳은 그의 개인 공간이었고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 얼른 자리를 비켜 줘야겠다 싶어 나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쥐고 몸을 들썩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럼 저는 이만⋯⋯.” “왜 나를 보러 오지 않으시오?” “예?” 하지만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 그의 말이 나를 도로 의자에 앉혔다. “내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소?” “제가요?” “내가 말하지 않았소? 원하는 게 생각나면 찾아오라고.” '뭘?' 그제야 나는 공작 각하께서 내게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준다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군. 얼마나 더 고민해 볼 작정이오?” “내일⋯⋯까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좋소.” 말하는 동시에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뭘 원한다고 하지? 난 원하는 게 없는데.' 내가 공작에게 무엇을 원해야 너무 주제넘지 않으면서도 하찮게는 느껴지지 않을까? “그럼 내일 식사나 하겠소?” “예?” “식사를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 보지.” 그렇게 고민할 시간은 만찬 시간 전까지로 전해졌다. “예,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던 때였다. “아, 참.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폴린느 부인의 제안은 왜 거절했소?” “예?” 나는 이제 스스로가 '예?' 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뻐꾸기처럼 느껴졌다. “폴린느 부인이 방을 바꿔 주겠다고 한 걸 거절했다던데. 왜요?” “예? 아. 예. 어⋯⋯.” 나는 대답을 어물거렸다. 공작 각하께선 어째서 저택의 가정부와 가정 교사가 한 사소한 대화 내용까지 다 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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