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3화
23화
그나저나 아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끙끙 앓기만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입가에 뭔가를 흘려 넣어 주었다. 시큼하고 따스했다.
나는 눈을 들어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방을 돌봐 주는 하녀 아이였다.
“아나는?”
목에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는 괜찮습니다. 푹 쉬세요.”
들려오는 말에 나는 안심했다. 따스한 음료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 나가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기절했다.
기절하면서 나는 계속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뭔가에 쫓기고 있기도 했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헉, 헉,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깼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추워, 무서워⋯⋯. 이러다가 죽는 걸까?'
오한이 사라지지 않는 동시에 몸에 열이 올랐다. 난롯가에 누워 나는 떨면서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때마다 아이가 나를 일으켜 따스한 음료를 마시게 하고 땀을 닦은 뒤에 젖은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몇 번이나 그러기를 반복했을까. 일어나니 캄캄한 밤이었다. 목이 말랐고 배도 고팠다.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눈을 떠 보니 난롯불도 꺼진 듯했다. 나는 엎드려서 하녀 아이를 불렀다.
“자넷, 자넷, 거기 있니?”
없으면 그대로 잠들려 했다. 일어나 부지깽이로 불씨를 살릴 힘도, 물을 찾을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눈을 감은 채 인기척을 느꼈고 나는 그게 하녀 아이인 줄 알았다. 그녀 말고 지금까지 내 방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는 누워서 한숨을 흘렸다.
“난롯불 좀⋯⋯ 피워 줄래? 물도 좀 주렴.”
이윽고 불이 지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체온을 재듯 축축한 이마에 올려지는 손도 느껴졌다. 손은 건조하고 단단했다. 그리고 컸다. 내 이마를 가리고도 모자라 감싸 쥘 정도로.
'자넷의 손이 이렇게 컸나?'
아프니 감각까지 뒤죽박죽된 모양이다. 아무튼 손바닥은 차가워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아⋯⋯.”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들썩거렸다. 손바닥이 좀 더 오래 머물러 주길 바랐지만 금방 떨어져서 아쉽기까지 했다. 숨을 들이쉬며 누워 있는데, 그 누군가가 내 등과 침대 시트 사이에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등에 닿는 손도컸다. 등 또한 온전치 못했는지 불편한 감각을 느끼며, 나는 입에 흘려 넣어지는 물을 마셨다. 달고 시원했다.
“한 잔 더 주련?”
그러다 눈을 뜬 나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
내 앞에서 잔에 물을 따르고 있는 것은 스카디 공작이었다. 바짝 얼어붙어 그만 바라보고 있는데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자, 드시오.”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일단 잔을 받아 물을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열이 내렸군. 다행이오. 그대는 사흘 내내 누워 있었소.”
“의사가 조금만 더 바깥에 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더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시오?”
하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의 감각은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공작 각하.”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제지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공작이 아나를 위험에 빠뜨린 일로 내게 불같이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를 보는 초록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너무 화가 나 오히려 냉정해진 것일까?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저는 오늘부로⋯⋯ 가정 교사직을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모아 쥔 채 말했다.
“그만두다니? 왜?”
“학생을 위험에 빠뜨렸으니까요. 모두 제 책임입니다. 이제 저를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보내셔도 좋습니다. 어떤 벌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 내 잘못이었다.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듣더니 스카디 공작은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치 내 의도를 짐작하듯이. 예전이라면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군. 정말로 황무지를 개간하러 가도 좋다고? 그게 무슨 일인지는 아시오?”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니까요. 제가⋯⋯ 아가씨를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말렸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싸다. 보호자가 되어 아이를 죽을 위험에 빠뜨리다니. 더군다나 그 아이는 공작의 외동딸이었다. 어지간한 잘못이어야 두려워하며 용서를 구하지,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그저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기 전에 아나의 상태가 궁금했다.
“아나는 괜찮은가요?”
“아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공작저의 따님을 마치 내 동생이라도 되는 듯 불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나는 그대보다 훨씬 더 빨리 회복했소.”
그렇구나, 다행이었다. 나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얼음이 깨진 물속에서 내게 손을 뻗던 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품 안에서 노래를 부르던 너무도 가냘픈 목소리도. 만일 아나를 잃었다면 내게 그보다 더 큰 형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무슨 벌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시오?”
그가 심문하듯 물었다.
“내가 무슨 벌을 내릴 줄 알고? 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소? 나는 돌에게도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오.”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벌을 받아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이야 했지만 겁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공작이 무슨 의도로 나를 몰아붙이려는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사자 굴에 떨어진 게 이런 느낌일까. 호흡이 가빠졌다. 떨리는 숨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예.”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나는 그대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대가 만약 아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호 수에서 아나의 시신을 건져 올렸어야 했을 거요.”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그대가 가지 말라 했어도 아나는 호수에 갔겠지. 혼자서 말이오. 그리고 아이의 놀이 상대를 해 주는 것은 그대 일이 아니오. 보모의 일이지. 업무에 태만한 보모는 해고되었소. 그대가 사경을 헤매고 있던 동안.”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나는 경직되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벌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감사라니?
“아나에게 들은 바로는 그대의 대처는 훌륭했소. 프랑에서는 얼음이 깨져 사람이 빠지는 사고 같은 건 없었을 텐 데,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이방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게 행동했더군. 아나 옆에 있던 게 그대 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어서도 형님을 뵐 낯이 없었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다음 말을 하기 전 잠시 틈을 두었다.
“깨어나 줘서 고맙소. 그대가 죽을까 봐 걱정했소.”
그리고 다시 빠르게 덧붙였다.
“자, 이제 아나도 걱정을 덜겠군. 내게 좋은 일을 해 주었으니 나도 그대에게 좋은 일을 하나 해 주겠소. 원하는 것 을 말하면 내 하나 들어줄 테니, 쾌차하면 나를 찾아오시오. 그리고.”
그리고 공작은 잠시 또 틈을 두었다.
“몸이 나으면 식사라도 합시다.”
순간, 몸을 옥죄었던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아나는 멀쩡했고 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다. 목에 걸려 있던 죄책감도 사르르 풀려 내려갔다. 나를 괴롭 히고 있었던 모든 압박감이 일시에 해갈된 동시에 갑자기 몰려온 감정에 복받쳐 주룩 눈물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 모습을 가렸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 이러면 못 본 척 알아서 자리를 떠 주는 것이 예의 아닐까? 그러나 대신 공작은 예의 투박한 손으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시오.”
그 말이 무슨 명령 같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어 두 눈을 꾹꾹 눌렀다.
“내가 울 만한 말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그냥 눈물이⋯⋯ 납니다.”
그렇다. 그냥 눈물이 났다.
'정말, 끔찍해.'
죄책감과 중압감이 물러가자 수치스러움이 다시 몰려왔다. 왜 공작에겐 이런 모습만 보여 주게 되는 걸까?
'너무 더럽고 냄새나고 머리도 떡지고⋯⋯.'
토하고, 며칠 안 씻은 모습이나 보여 주고, 사과나 줍다 걸리고.
'어디까지 추락해야 하는 걸까. 초라하고 부끄러워.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어.'
나는 손수건을 돌려주며 사과했다.
“너무 자주 추태를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추태?”
손수건을 받아 들던 그가 이상한 말을 들은 양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