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34화
34화
“그래, 무엇이든 배워서 나쁠 건 없겠지. 춤 선생을 찾아보도록 하겠소.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소?”
“저, 제가 혹시 앞으로 아가씨께 더 집중해서 가르칠 만한 과목이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특정 외국어라든가, 다른 나라나 왕조의 역사라든가 제가 특별히 더 신경 쓸 부분이 있을까 하여⋯⋯.”
공작이 일개 가정 교사인 내게 아나의 혼약 상대를 알려 줄 리는 없었다. 정보가 새어 나가면 비슷한 나이대의 처녀가 있는 귀족 가문에서 그 혼약을 훼방 놓거나 혼약자를 가로채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혹시나 내가 외부에 정보를 흘릴지도 모른다고 경계해 내 편지를 유심히 읽던 공작이 떠올랐다. 엄청나게 무익하고 재미없었을 텐데도 그는 내 편지를 열심히 읽었었다.
'하지만 나만 알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아나가 누구와 혼인할지 궁금했다. 누구인지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진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었다.
“⋯⋯.”
하지만 내 말에 공작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에서 흘러나올 말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집은 것은 술잔이었다. 그 독한 술을 그는 물처럼 아무 안색의 변화 없이 들이켰다.
“글쎄.”
“⋯⋯.”
“나는 그대의 수업에 만족하오.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 하시오.”
“예⋯⋯.”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 대답에 나는 살짝 실망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아나의 혼약 날은 수업을 서두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았는지도 몰랐다.
'그렇구나.'
그 말에 희망의 등불이 다시 켜진 듯했다.
“⋯⋯아나의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지.”
“예.”
“그런데 심심하지 않소?”
“예?”
'제가 드린 말씀이 지루하셨나요?'
나는 방금 전까지 쉬지 않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한 말인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공작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그대 이야기도 해 보겠소?”
“예?”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 그대 말고 나와 식사하는 사람이 또 있소?”
“⋯⋯.”
없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얘기를 해 보라 하는데 내가 궁정 광대도 아니고, 사람을 즐겁게 할 만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어⋯⋯.”
그가 한 말 때문에 나는 갑자기 허허벌판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제가⋯⋯ 그, 말재간이 없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합니다, 각하.”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지 않았소.”
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대 이야기를 해 보라는 거지.”
“제 이야기요⋯⋯.”
그가 뭘 원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아무 말이나 괜찮소.”
“아무 말이나⋯⋯ 말씀이십니까?”
“음.”
'아무 말? 아무 말?'
모르겠다. 나에 대한 무슨 얘기를 해도 그가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여기서 매일 내가 하는 게 먹고 수업하고 자는 것뿐인데⋯⋯. 내 삶 중에 궁금해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고, 궁정, 궁정에 있을 때 일어난 스캔들 같은 걸 얘기해야 하나?'
드레스 아래로 식은땀이 솟아 척척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만 느껴졌다. 내 침묵이 한참 길어지자 공작이 물었다.
“음, 특별히 좋아하는⋯⋯ 보석이 있소?”
이게 무슨 소리야?
'보석? 보석이라고?'
질문이 내게 청천벽력으로 들렸다.
“예? 보석이요? 보석⋯⋯. 보석 말씀이십니까. 제가 보석에 대한 식견을 갖추지 못해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보석은 참 아름답지요. 유사시 화폐로도 쓸 수 있고요.”
“나는 그대가 좋아하는 보석이 뭐냐고 물었소.”
“예, 제가 좋아하는 보석은⋯⋯.”
뭘까? 보석 이름도 모른다,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식견이 부족해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간 궁정에서 보아 왔던 화려한 보석들 중 내 마음을 빼앗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반짝이는 것들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감히 바라보는 것을 피해 왔다. 혹여나 원하기라도 하는 순간 그건 내게 고통이 될 것이므로.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아직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보석이 없습니다.”
“전에 페리도트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오지 않았소?”
“페리도트요? 아, 그건 유배 오기 전 도련님께서 주셨던 패물입니다.”
“마엘 공자를 말하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유배 가는 제가 걱정이 되셨겠지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좋아하는 꽃은?”
“예?”
“꽃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꽃은, 꽃은⋯⋯ 붓꽃을 좋아합니다. 제비꽃도 좋고 라벤더도 좋아합니다. 이곳에도 라벤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저희 가문의 영지에는 라벤더 군락을 이룬 언덕이 있었지요. 여름이 되면 라벤더가 만개하여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을 했습니다. 꽃 자체는 특별하게 아름답지 않아도 군락이 되면 그 모습이 장관이었지요. 저는 그곳을 산책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보라색 꽃을 좋아하는군. 보라색을 좋아하오?”
“제가요? 보라색을요?”
“그렇지 않소?”
“예, 예,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다 보라색 꽃이네요.”
그러고 보니 다 보랏빛이 아닌가?
'내가 보라색 꽃을 좋아했구나?'
나도 모르는 발견이었다.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
“예?”
“좋아하는 음식은 뭐지?”
“⋯⋯.”
“생선과 고기 중 뭘 더 좋아하시오?”
“저, 저는 내륙에서 자라 생선 요리는 여기서 처음 접해 보았는데⋯⋯.”
“그래서?”
“생선 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같다?”
“그런데 고기 요리도 맛있고⋯⋯. 다 좋아합니다.”
“다 좋다는 건 틀린 말이오.”
“예?”
“모두 다 좋아한다는 건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요. 잘 생각해 보시오. 그대가 무엇을 더 좋아 하는지.”
허를 찌르는 이야기이긴 한데, 이게 고기와 생선 요리 중 뭘 더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나올 만한 말인가?
“어⋯⋯ 고기 요리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고기 요리가 더 좋다면 개중엔 무엇을 가장 좋아하오?”
“글쎄요, 그렇게까지 깊게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성인이 된 이후 일을 시작했고 대부분의 식사는 고용된 곳에서 제공해 주셨던 터라⋯⋯.”
“집에서는 어떤 것들을 즐겨 먹었소?”
가세가 기운 이후로 굶지는 않았지만 질 좋은 고기를 덩어리째로 먹는 일은 도통 없었고, 주로 스튜와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그때그때 먹었다.
내가 말을 하기 망설이자 다행히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좋아하는 동물은 있소?”
“동물이요? 말, 저는 요즘 말이 가장 좋습니다. 예전엔 무서웠는데 브륄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나도 말을 좋아하오. 내 애마의 이름은 슬레이프니르요. 스카디에 내려오는 설화에 나오는 가장 빠르고 날쌘 말이지.”
“그렇군요!”
“개는 어떻소? 개도 좋아하오?”
“예! 좋아합니다!”
“길러 본 적 있소?”
“예전에⋯⋯.”
쏟아지는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대답하기 급급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식사가 너무 길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독주를 마셔야 하지 않았을까? 헛소리를 하더라도 말은 술술 나왔을 테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엎드려 쓰러졌다. 너무 많은 말을 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엉망이었다는 건 확실했다.
'어떻게 이렇게 말주변이 없을 수도 있나?'
오늘의 대화 후반부는 정말 끔찍하고 엉망진창이었다. 분명 스카디 공작도 중간에 내게 말을 해 보라 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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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운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은 내심 오늘의 식사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잔느 드 툴루즈의 영지에 라벤더밭이 있었다는 것, 라벤더 향을 좋아한다는 것, 그 밖에도 보라색 꽃들을 좋아한다는 것, 제비꽃, 붓꽃, 라일락... 그러고 보니 그녀와 보라색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사실 무슨 색인들 어울리지 않겠는가.
보라색 꽃을 좋아한다면 보라색 보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카디령에는 대륙 최대의 자수정 광산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많은 광산들도 스카디령에 있었다. 금광과 은광, 철광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