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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화


33화 아나. 사실 그 화제 말고는 달리 가정 교사와 매일 저녁을 함께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 ❖ ❖ '매주 금요일마다 함께 만찬을 하며 아나의 교육 문제를 상의하겠다고?' 갑자기 불러 찾아갔더니만 공작님께 이상한 말을 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아나와 매주 만찬을 함께하시는 편이 낫지 않나?' 아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안 후 공작은 교육을 완전히 내게 일임했다. 나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듯이. 그런데 갑자기 매주 아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를 받길 원하고 또 교육의 진행 방향에 대해 듣고 싶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설마⋯⋯.' 복도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나에게 혼약 상대라도 정해진 것일까?' 아나는 아직 시골 소녀 티를 벗지 못했지만 신분은 공작가의 공녀였다. 양녀라고는 할지라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공작이 그 뒷배였다. '왕실에선 태어나자마자 약식으로 약혼을 맺는 경우도 있으니⋯⋯.' 어리긴 하지만 약혼 상대가 얼마든지 정해질 수 있는 나이였다. 만약 혼인이 얼마 남지 않았고 또 혼약 상대가 타국 사람이라면 그 나라에 대한 집중 과외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 나라의 언어라든가 역사라든가, 왕실 예절이라 든가⋯⋯. '지금 아나와 혼약을 할 만한 상대가 누가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아나의 약혼 상대가 될 만한 귀공자들을 꼽아 보았다. 아나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타국까지 범위를 넓혀 보아도 아나의 상대가 될 만한 후보자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떠오르는 상대들이 나는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딱 한 명. '마엘 도련님 정도라면 아가씨 상대로도 괜찮지. 나이 차도 적당하고.' 내 옛 제자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나는 랑시스 공주와의 혼인을 꺼리던 그의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왕실과 맺어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점찍은 아나의 혼약 상대는 대체 누구일까? 국내라면 바로 옆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키텐 공국의 후계자? 국내가 아니라면 신흥 강국인 에스파트의 다섯 왕자들 중 하나? 아니면 호엔레른 가문? 설마 천년의 적이라고 불리는 브로뉴 왕국 쪽은 아니겠지? '아무튼⋯⋯ 혼약 상대가 정해졌다 해도 금방 떠나시진 않을 거야. 아직 어리시니까.' 하지만 유배지에서 가정 교사를 하는 처지인 내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인 국제 정세를 어떻게 알겠는가? 예상보다 빠르게 아나와 이별할지도 모른다. 자작 가문의 아가씨가 혼인하게 되면서 그녀와 자연스럽게 헤어졌던 것처럼. '그렇구나. 아나가 혼인하면 다시는 못 보게 되겠구나. 다른 학생과도 그랬던 것처럼⋯⋯.' 아나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나는 우울해졌다. 갑작스럽게 가정 교사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나가 사라지면 정말 많이 쓸쓸할 거야.' 아나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제 나는⋯⋯.' 나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보니 창밖에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되나?' 곧 만찬 시간이었다. '더 이상 이 저택에선 살 수 없겠지? 공작가에서 일할 수 없게 된 유배자는 어디로 가게 되나? 스카디 공작이 내게 다른 직업을 얻어 줄까? 그런 호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아나의 가정 교사가 아니게 되면?' 식사 시간까지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아나가 할 수 있게 된 것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래도 공작이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 줄까? 이제 아무 가치도 없는데?' 아나는 이제 랑시스어로 쓰인 책은 어려운 것도 곧잘 읽을 수 있고, 랑시스의 역사와 그에 얽힌 다른 강대국들의 역사도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 역사의 경우엔 세부 사항은 보충이 필요했지만 이만해도 대화할 때 수치를 겪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 같은 경우엔 들을 수 있고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만일 혼약 상대가 이미 정해졌을 경우, 혼인하기 전까지 갈고 다듬으면 랑시스어를 공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나는 확신했다. '아나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아나가 궁정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아나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깨달았다. '춤!' 나는 아나에게 춤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춤추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 가도 무도회는 있을 텐데.' 아나가 만약 공작저나 한 왕실의 안주인이 된다면 언젠가는 사교를 위한 연회를 개최해야 할 테고, 춤을 잘 추지는 못하더라도 적당히는 출 줄 알아야 할 텐데.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에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왜 이걸 놓쳤을까? 우선은 공작님께 춤 선생님을 따로 고용해 달라고 하자. 하프 연주도 연주지만 큰 가문이나 왕실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춤 실력이 필요한데, 춤은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느는 게 아니니까.' 마침내 만찬 시간이 되었다. 춤 외에 아나에게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고민하느라 좀 늦었다. 나는 살짝 헉헉대며 자리에 앉았다. 식전주가 술잔에 따라졌는데 입을 대 보니 역시, 이번에도 놀랄 만큼 도수가 높았다. '안 돼! 더 이상 실수할 순 없어!' 나는 황급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저⋯⋯ 제게는 이 술이 조금 독해서⋯⋯ 혹시 이보다 조금 덜 독한 술이 있을까요, 각하.” 아나의 교육을 논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저번과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다. 스카디 공작은 내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곤 자신의 잔에 따라진 술을 들이켰다. 그의 생각이 잠시 표정에 드러났다. '겨우 이 정도로?' “그렇다면 주스는 어떻소?” “감사합니다!” 잔이 치워지고 톡 쏘는 맛이 나는 사과주스가 제공되었다. 진작 이럴걸, 훨씬 나았다. 나는 목이 말라 주스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으음⋯⋯?' 사실 좀 의아했다. 앉자마자 아나의 현 상태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오늘 공작님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식사를 하다 문득 뜨거운 느낌에 고개를 들어 보면 급하게 시선을 피하는 그의 초록 눈을 마주칠 뿐이다. '뭘까?' 예전에 그의 시선은 화살 같았다. 조금의 수줍음도 없이 나를 꿰뚫었고 그 시선을 마주하면 그 화살에 관통이라도 당한 듯이 통증을 느끼며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였다. 그는 내 시선에 화상이라도 입을 듯이 굴었다. “⋯⋯공작 각하?” 고작 내 시선이 뭐라고? 의아함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제가 아가씨의 교육 진행 상황에 대해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하시오.” 허락을 받은 나는 아나의 교육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하면서 나는 씁쓸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기쁨은 그간 나를 잘 따라와 준 아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고, 슬픔은 그런 아나를 곧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각하, 제가 아가씨의 교양을 끌어올려 드릴 수는 있지만, 춤을 가르쳐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따로 춤 선생을 고용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프랑에는 현재 궁정에서 유행하는 춤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나에게 춤이 필요하오?” “그럼요! 무도회는 단순히 춤을 추는 장소를 제공할 뿐 아니라 평소라면 잘 섞이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고 정치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사교의 장을 만들어 주지요. 그리고 또 춤을 배우면 신체의 선이 아름다워지고 힘을 들이지 않아도 평소에도 우아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랑의 귀족 아가씨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용과 승마 교습을 받으신답니다!” 나는 춤을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귀족 아가씨에겐 무엇보다도 꼭! 춤 실력이 필요하니 아나 아가씨께 춤을 가르치신 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근처 또래 귀족 자제분들을 모셔 작은 무도회를 열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가씨가 친구도 사귀고 앞으로 경험할 파티에서 잘 적응하실 수 있게끔요!” 먼저 여러 작은 무도회들을 경험해 봐야 큰 무대에서도 떨지 않을 게 아닌가? 내 말에 공작이 물었다. “그대는 아나에게 춤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소?” ⋯⋯그 말에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잘 알지도 못하고 제가 궁정을 떠나온 후에도 유행이 몇 번은 바뀌었을 터라⋯⋯.” 내 말에 스카디 공작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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