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5화
35화
발드르가 그중 최고로 치는 것은 무기를 생산해 내는 철광산이었지만, 갑자기 그간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수정 광산이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와 귀와 목, 두 손목을 자수정으로 장식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간 발드르는 보석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색이 다른 돌일 뿐인데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가 감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된 순간 그는 깨달았다. 어떤 것은 그저 빛나고 아름다운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마치 그녀의 빛나는 눈처럼.
잔느는 독한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그는 그것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과 개를 좋아했다. 자신처럼. 생선 요리보다는 고기 요리를 좋아했다. 그것도 자신과 같았다.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잔느와 자신 사이에 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태어난 날은 언제요?'
'아, 태어난 날 말씀이십니까? 그게⋯⋯.'
무엇보다도 잔느는 봄의 한중간에 태어났다. 발드르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운명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우연일 리 없다고. 이전까지 자신의 탄생일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서도 말이다.
그는 그동안 탄생일이란 것도 하찮게 생각했다. 자신이 세상에 난 것을 축하할 이유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데 잔느가 봄에 태어났다는 정보엔 왜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일까?
성공적인 만찬에서 아쉬웠던 것은 시간뿐이었다. 발드르가 식사 전 요리사와 음식을 내오는 하인에게 음식 내오는 시간을 늦추라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찬은 너무 일찍 끝났다.
침대에 누운 그의 마음에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았다. 가능하다면 내일도 함께 식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의심하지 않을까? 이 식사 자리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다음 만찬에서는 뭘 싫어하는지 물어보아야겠다.'
방금 전 식사가 끝난 참인데 그는 벌써 다음 주에 있을 만찬이 기다려졌다.
❖ ❖ ❖
왕궁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2주가 가장 화려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밤 열리는 무도회의 규모는 더 커지고, 사람들은 낮에도 밤에도 술에 취해 들떴다. 전야 행사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신년 무도회 자정에 커다란 불꽃을 하늘로 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왕궁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을 불꽃으로 장식하기 위해 수백 발의 폭죽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폭죽을 쏘아 올린 뒤에는 남은 화약 냄새가 왕궁 전체에 진동하고 귀는 폭죽 소리로 먹먹했다. 밤하늘은 솜씨 좋은 여인이 수놓은 작품처럼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찼다.
왕궁의 하늘 위로 퍼져 나가는 불꽃을 보기 위해 왕궁 밖에도 매년 인파들이 몰렸다.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평민들은 전날 아침부터 서둘렀고, 왕궁 근처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부유층은 편안하게 자신의 집 안뜰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많은 인파에 매년 사람들이 깔려 죽기도 했지만, 그조차 행사의 일부로 여겨졌다.
나는 왕실 가정 교사가 되기 전엔 굳이 불꽃놀이를 찾아보지 않았지만, 마엘 도련님의 교육을 맡아 왕실에서 살게 된 후엔 방 발코니에서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은 과연, 아침부터 자리를 다투고 어쩌면 목숨까지도 걸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워요, 선생님.'
그리고 그때 내 옆에는 마엘 도련님이 있었다.
'내년에도 이 광경을 선생님과 함께 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마엘 도련님과 함께 새해를 보냈다.
'잘 지내고 계실까?'
떠들썩한 프랑과 달리 이곳에서 새해 전야란 별다른 행사가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브륄을 타고, 오전에 아나와 수업을 한 뒤 오후에는 책을 좀 읽으며 보냈다.
마침 그날이 공작님과의 만찬 날이라 함께 식사를 했고, 그 자리에서 공작님은 나와 여동생의 관계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여동생에 대해 말했다. 한참이나 안과의 추억을 말하다 보니 그리움이 왈칵 흘러나와 동요하는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내게도 형이 있었소, 아나의 친부 말이오. 이름은 윌이었지.”
내 말을 다 들은 스카디 공작은, 내심 궁금하긴 했으나 내가 그간 묻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나도 형과 나이 터울이 좀 있소. 그래서 어릴 땐 형이 한없이 크고 대단해 보였지. 형은 나를 살짝 귀찮아하긴 했지만 내가 많이 어렸을 땐 그대가 동생을 생각하듯 귀여워하기도 했소. 어릴 적에 우리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소. 늘 형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던 기억밖에 없으니. 하지만 커 가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했소. 원래 세상만사가 날씨 같은 것 아니겠소. 해가 비치나 싶었다가도 흐리고 비바람이 치는.”
그의 형, 아나의 아버지에 대해서였다.
“형과 멀어진 것은 형이 청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소.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은 어머니를 닮았던 것 같소. 감정이 좀⋯⋯ 풍부했지. 그런데 그걸 이해할 만한 사람은 애석하게도 이 저택엔 없었소.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도움이 되었을까? 글쎄, 모를 일이군. 나는 형과 멀어진 게 섭섭했지만, 내가 섭섭하다고 뭘 할 수 있었겠소?”
“⋯⋯.”
“공부하고 무예를 수련하는 시간 외에 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파고들었소. 책은 적적함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었지. 읽다 보면 그걸 이해했든 이해하지 않았든 시간이 갔으니 말이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형은 어른이 되었지. 그리고 성년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은⋯⋯ 이곳을 떠났소. 작위를 포함한 모든 걸 버리고.”
그의 말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간 아나가 실은 그의 친딸이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런데 정말 공작에게 형은 존재했고, 아나는 형의 딸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모두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소. 한순간에 형이 짊어지고 있던 책임과 의무가 내게 쏟아졌지. 그걸 짊어지느라 나는 형을 아주 한참 동안 잊었소. 아주 우연히 형을 발견했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은 뒤였지. 내가 찾은 건 형의 시신이었고, 살아 있는 건 형의 딸뿐이었소.”
“⋯⋯.”
“아마 우리 사이가 그대와 그대 동생 사이처럼 애틋하고 다정했다면 형이 나를 두고 떠나지 않았거나, 내가 형을 좀 더 일찍 찾았을까? 모를 일이오.”
공작님의 말을 듣는데, 내가 무슨 말을 얹을 수 있었을까? 그 모든 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내가 감히 그렇게 말해야 했을까?
“⋯⋯.”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는 권력자고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인데, 죄인 신분인 나는 감히 그가 가엽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 위로 아나 나이대의 아이가 겹쳐 보였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부드러운 눈길과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서재 구석에 박혀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책을 읽으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남자아이. 만약 그 아이가 내 학생이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아이를 꽉 끌어안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멈칫거렸다.
“술에 취했나. 내가 재미없는 말을 했군. 그대 자매간의 우애가 좋아 보기가 좋소. 내 생각에⋯⋯ 그대는 다정한 사람 같소.”
“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빈말은 하지 않소. 그대가 아나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지. 나는 그대가 아나의 가정 교사가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오. 그대에겐⋯⋯ 그대에게는 썩 좋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말이오.”
“ ⋯⋯.”
“그러나 모든 게 날씨 같은 것 아니겠소? 흐리고 비바람이 치다가도 버티고 견디다 보면 언젠간 날이 개기 마련이지.”
식사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공작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태도나 행동에서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의 대화로 그에 대해 잘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무척이나 주제넘게도.
'많이 외로웠겠구나. 그에게는 봄이나 여름, 가을도 어쩌면 겨울과 같았겠구나. 책을 읽는 것 외엔 도저히 무료함을 해소할 길이 없는.'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말이다.
'그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걸까?'
나는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넓은 영지와 많은 돈, 그것으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누리지 않고, 무도회를 열어 우아한 귀부인들과 어린 사슴 같은 영애들을 만나지도 않고, 그리고 불꽃놀이, 그 밖의 다른 여흥을 즐기는 일도 없이 그는 대체 무엇에 재미와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많이 심심했을 것 같아. 이 저택에서,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