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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화


36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야심한 밤이 되었다. '이렇게 한 해가 갔다고?' 불꽃놀이도, 마엘 도련님도 없이 한 해가 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 나는 벌써 이곳에서 두 번째 해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공작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상태로. ❖ ❖ ❖ 다음 해, 아나에겐 춤 선생님이 생겼다. 아나의 춤 선생님은 선대 국왕 폐하가 만든 전문 무용 교육 기관인 왕립 무용 아카데미 출신 무용수이자 교사였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평민이었지만 교사직에서 은퇴한 이후 귀족들의 스승이 되어 춤을 가르쳐 왔다고 했다. 아나가 선생님께 첫 수업을 받기 전 만찬에서 그는 내게 이렇게만 말했다. '그대가 요청한 수업이니 참관한 뒤 그 내용을 내게 알려 주시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나의 춤 수업은 점심 식사 후 시작되었는데 장소는 공부방이 아닌 다른 방이었다. 방의 형태는 춤 선생이 특별히 요청했다고 하는데, 아나와 함께 방으로 향하니 과연, 방의 삼면이 거울로 가득 차 있었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커다란 악기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춤 연습을 위한 음악가인 듯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자세가 꼿꼿한 여자는 춤 선생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아나 아가씨. 그리고⋯⋯?” “아나 아가씨의 가정 교사인 잔느 드 툴루즈입니다.” “안녕하세요, 잔느 드 툴루즈 양. 저는 카밀라 벨입니다. 그냥 카밀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저는 왕립 무용 아카데미에서 다섯 해 동안 수석 무용수로 일하며 궁정에서 열리는 여러 무도회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은퇴한 후에도 무용 아카데미에서 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귀족 자제분들이 무도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도록 돕고 있지요.” 그녀는 반백 머리를 한 나이 든 여인이었지만 평생 무용을 수련해 온 사람답게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자세가 곧고, 어깨는 직각이었으며 서 있기만 해도 몸의 직선이 두드러졌다. 그 직선은 수십 년에 걸쳐 깎아 온 것일 터였다. “귀족들이 춤을 추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락? 여흥? 그뿐이라면 저 같은 평민을 춤 선생으로 두고 많은 돈을 줘 가며 힘들고 지루한 무용 연습을 할 리 없죠.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전문 무용수의 공연을 보면 그만이니까요. 궁정에서 춤이란 자신과 타인의 교양과 수준을 겨루는 척도가 될 뿐 아니라 무언의 구애 행위기도 합니다.” 그녀가 마치 무대 위에 선 단독 무용수처럼 위엄 있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아가씨들과 같은 미혼 여성은 특히, 무용 실력을 갈고닦아야 합니다. 기사가 언제 벌어질지 모를 전투를 위해 검술을 수련하고 농부가 봄의 쟁기질을 위해 겨우내 농기구를 손질하듯이요. 저는 여러분과 같은 귀족 아가씨 들에게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방법뿐 아니라 무도회에 참석해 지켜야 하는 궁정 예절 등을 알려 드려 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춤을 가르쳐 드린 분 중 구애를 받지 못한 분은 ‘아무도' 없으셨습니다. 제아무리 몸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녀는 두 눈을 광을 낸 은식기처럼 번쩍이며 ‘아무도'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렇군.' 그녀의 말과 몸, 태도 모두가 신뢰가 갔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작이 대단히 좋은 춤 선생님을 이곳에 초빙 해 왔다고, 남 일을 바라보듯 생각했다. 실제로 그때까지는 남 일이었다. “1년 안에 제가 아가씨 두 분께 궁정에서 유행하는 최신 무용과 무도회 예절의 정수를 주입해 드리지요.” 그런데 무용 선생이 '아가씨 두 분'이라고 나와 아나를 지칭하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가씨 두 분이라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엔 음악가와 무용 선생 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나와 나밖에 없었다. '잘못 들었나?' “두 분이 오늘부터 배울 무용은 파티와 무도회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는 미뉴에트입니다. 4분의 3박자의 리듬에 맞춰 느릿하게 추는 춤으로 발걸음을 작고, 정교하게 움직이면서 고급스럽게 추는 것이 중요하지요. 자, 오늘은 미뉴에트에 쓰이는 기본 발걸음을 배우고 또 몸에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카밀라는 음악가에게 신호를 주었고, 음악가는 첼로를 켜 나갔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그녀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정교하고 작은 발걸음을 선보였다. 4분의 3박자 패턴에 맞춰, 왼발과 오른발이 이리저리 사뿐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마치 몸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보고 있는데 발걸음을 멈춘 그녀가 말했다. “그럼 자, 잔느 양부터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지금 저 말인가요?” 선생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설마 하고 흘려들은 말이 진짜였음을 알아차렸다. “아니요! 저는 아가씨가 아니라 이곳의 가정 교사입니다. 무도회에 참석할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니 춤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카밀라 씨는 여기 이분, 아나 아가씨만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저는 이미 공작님께 아가씨 두 명분의 1년 치 수업료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두 분 외에 다른 아가씨가 계신가요?” 선생이 딱 잘라 말했다. “⋯⋯.” 없었다. 그제야 나는 함정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그대가 요청한 수업이니 참관한 뒤 그 내용을 내게 알려 주시오.' 이 남자는 내게 이제 뜀걸음, 승마에 이어 무용까지 가르치려는 것이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쯤 되면 체력 증진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지나가는 새끼 고양이도 알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대체 뭘 시키려 들까? 검술?'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다니 정말 좋아요!” 얼이 빠져 우두커니 서 있는데 내 속도 모르고 아나가 좋아라 하며 내 팔에 매달렸다. 그렇게 참가하게 된 첫 수업 시간, 나는 오른발과 왼발을 동시에 각각 움직일 수 없는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시! 하나! 둘! 셋! 넷! 발 보지 않고 고개 듭니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춤 선생은 손뼉을 쫙쫙 부딪쳐 가며 나를 독려했다. 그녀의 독려에도 나는 줄이 엉킨 목각 인형처럼 움직였고, 스텝은 계속 엉키기만 했다. 발을 앞으로 내고 오른발을 왼발에 스치듯이 하며 앞으로 쳐들고 올린 발끝을 바닥에 찍은 뒤 이번엔 반대로 다시 반복한다. '머리로는 되는 동작이 왜 몸으론 안 될까?' 동작 자체는 분명 느릿한데 이상할 정도로 반복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몸치일 뿐만 아니라 박치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음악이 멈췄다. “자, 여기까지!” 춤 선생이 말했다. “우선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자, 방금 전 잔느 양은 미뉴에트를 추면서 하지 말아야 할 모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잔느 양은 바닥에 앉아 쉬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세요. 그럼 아나 아가씨, 앞으로 나와 보시겠어요?” 기분 나쁜 말일 법도 한데 모두 진실이라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선생이 이 저주받은 스텝을 끝내게 해 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벽 구석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주저앉는데 뭔가가 가슴께로 뚝 하고 떨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드레스에 검은 얼룩이 져 있었다. 턱에서 떨어진 땀이었다. '왜지? 내가 대체 왜 이런 짓을?' 다음은 아나의 차례였다. 춤을 추기 전까지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던 아나는 막상 음악이 시작되고 나자 작고 앙증 맞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두 손이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박수를 치는 카밀라 씨의 표정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렇지! 잘한다! 잘하고 있어요! 아름다워요! 우아해요!” 아나의 스텝 밟기가 끝난 뒤에도 카밀라는 한참이나 아나를 칭찬했다. “대단해요! 잠깐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출 수 있다니! 이 춤의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군요! 그리고 보세요, 이 균형 잡힌 몸매! 아나 양에겐 재능이 있어요! 사교계의 꽃이 될 재능이!” “그런데 선생님, 사교계의 꽃이 뭐예요?” 쭈그려 앉은 내게 다가온 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에게만 쓰는 말인데 사교계의 유명 인사를 뜻해요.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를 빛내 주고 누구나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 사람이죠. 귀족들은 궁정 안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롱이라 불리는 토론 모임이나 연극, 음악회, 전시회 등을 개최하는데, 만약 사교계의 꽃인 사람이 참석하지 않으면 격이 낮은 모임으로까지 여겨진답니다. 물론 사교계의 꽃도 직접 주최자 자격으로 살롱을 개최하고요.” “선생님은 살롱에 가 보셨어요?” “저는⋯⋯.” “자, 사담은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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