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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화


54화 사면령을 전달만 하면 될 것을 왜 왕궁에서 사람이 와 나를 마차로 모셔 가는 것인지, 그리고 그 마차를 왜 일면식도 없는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신 것인지. “국왕 폐하께서는 상을 치르신 뒤 마엘 공자님을 왕세자로 책봉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엘 도련님께서 '왕세자 전하'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되어⋯⋯ 왕세자 전하께서는 잔느 양과 재회할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물론 가족분들과 해후할 시간이 먼저 필요하겠지요. 금일은 집으로 모셔 드리고, 이후 다시 모시도록 하지요.” 그리고 나는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니 그간 꿈을 꾼 것 같았다. 너무도 기나긴 꿈을. '그곳에서 내가 겪은 일들이 과연 현실이었을까?' 마차에 실려 있는 짐을 마부가 3층짜리 연립 주택의 현관까지 들어 주었다. 나는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 집의 문앞에 이르렀다. 나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그토록 다시 오고 싶었는데 머뭇거린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계속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가문이 기운 뒤에도 우리 집에 남아 일하던 하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낯익은 얼굴은 나를 보더니 놀라움에 가득 찼다. “잔느 아가씨!” 하녀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문밖에 내가 있으리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마님! 마님! 아가씨가 오셨어요!” 하녀의 외침에 곧 집 안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어머니와 동생과 해후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나를 보자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드디어 가족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미친 듯이 좋을 줄 알았던 나는 사실 좀 멍했다. 아직도 이 상황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렇겠지? 한참 뒤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식탁에 앉아 따라 주는 차를 마시며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그곳에는 병이 돌지 않았니?” 어머니와 동생은 궁정을 휩쓴 역병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없는 동안 프랑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역병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어. 다행히 신의 도우심으로 우리 가족은 병이 비껴갔지만⋯⋯. 아, 세상에, 거리마다 시신이 쌓였는데 아무도 그걸 치우려 들지 않았지. 그 광경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우리는 차라리 네가 유배를 당해 이 도시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겼단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열흘 동안 마차를 탄 피로가 몰려왔다. “병에 걸리진 않았어도 우린 굶어 죽을 처지에 처했었어, 언니. 돈이 있는데도 말이야.” 나는 말을 듣다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마차 안에서 그렇게나 많이 잤는데 아무리 해도 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피로에 절어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니와 동생은 그쯤에서 말을 멈추고 내게 쉴 것을 권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잠을 잤다. 길고 긴 잠을. 일어나고 나니 그곳은 더 이상 공작저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나와 동생과 어머니는 그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이 계속해서 대화했다. 정보가 해일처럼 쏟아졌고 나는 그간 둘에게 있었던 많은 일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동생이 직업을 구하게 된 일이었다. “네가 소설을 쓴다고?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벌어?” “왜? 할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든 게 언니뿐인 줄 알았어?” 안 드 툴루즈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언니가 가정 교사 일을 할 때부터 조금씩 습작을 하고 있었어. 소설이 완성되면 어머니가 내 글을 읽고 고칠 곳을 알려 주셨고, 소설을 다 고치고 나면 출판사에 투고하길 반복했지. 언니, 내 소설 제법 인기 있어. 전에 언니가 들려준 궁정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거든. 물론 그것만으로는 평생 먹고살 수 없고, 더 써야 하겠지만.” 안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언니, 이제 더 이상 언니 혼자서 아등바등할 필요 없어. 우리 어릴 때처럼 호화스럽게 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있잖아, 이제 언니는 언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 언니 돈을 우리 말고 언니에게 쓰면서.” 나는 그만 말문을 잃어버렸다. 늘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동생이 갑자기 눈앞에서 쑥, 하고 커져 버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성으로 반짝이는 동생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혹시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니?” “결혼?” 동생은 코웃음을 쳤다. “결혼이라니? 나는 언니와 달리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결혼이 아니라 바로 이거야.” 안은 소설로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작은 단독 주택을 사 어머니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내가 떠난 사이 동생은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구나. 나는 동생을 경탄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소설을 나도 좀 읽어 볼 수 있을까?” “그럼! 나도 언니가 내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해. 언니가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잖아.” 동생은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이후 나는 산책과 식사를 제외하고는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동생의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보지 않은 것을 본 듯이 글을 썼을까?' 동생의 소설은 왜 인기를 끌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내 동생에게도 무형의 유산을 물려주셨구나.' 그러나 책을 읽는 중에도 문득문득 글줄과 글줄 사이를 비집고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나보다 그를 더 많이 떠올리다니, 아나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니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렇게나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그에게서도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만큼 멀어졌으면 그를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 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을 텐데도.' 나는 자주 그를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책을 읽는 것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도 소용이 없구나.'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고백한 뒤에 잠시 짐을 내려놓은 듯이 홀가분하고 후련해졌다고 느낀 것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유배에 가 있을 때 나는 자주 어머니와 동생이 보고 싶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프랑으로 와 가족의 품에 안기니 어찌 된 영문인지,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웠다. '마치 내 영혼의 일부를 그곳에 남겨 두고 온 것만 같아.'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지?' 과연 시간이 해결해 줄 감정일까? 시간이 흘러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 ❖ ❖ 프랑의 집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 다시 시종이 집을 방문했다. 시종은 내게 초대장을 건네주었는데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신 것이었다. 그리고 시종이 가져온 것은 초대장만이 아니었다. 시종은 많은 양의 흰 붓꽃 화분과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든 하인도 데리고 왔다.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커다란 선물 상자를 받아 들며 감사를 표하는 새 화분을 든 하인들이 집 안으로 착착 들어와 꽃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온 집안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붓꽃으로 가득 찼다. 칼 모양을 닮은 꽃을 피우는 흰 붓꽃은 왕가의 문장으로 쓰이기 때문에 오로지 왕궁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고, 그 희귀함과 상징으로 인해 왕실의 하사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붓꽃 개개의 향기 자체는 포근했지만 과장을 조금 섞어 발 디딜 틈 없이 집 안에 가득 차자 폭력적일 만큼 농도 짙게 변했다. 실용적인 성격인 동생이 창을 열며 투덜거렸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꽃집이 되어 버렸어. 이걸 대체 어떻게 처리해? 선물을 주고 싶으셨다면 먹을 걸로 주시면 좀 좋아. 그런데 그 상자는 뭐야, 언니?” 내가 받아 든 상자는 두 개였다. 크기에 비해 무게는 무엇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어머니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상자를 차례로 열어 보았다. 가장 큰 첫 번째 상자의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자 얇은 종이에 싸인 드레스와 장갑, 구두가 나왔다. 모든 게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예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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