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55화
55화
동생과 어머니는 상자에서 나온 하사품을 보고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연 상자에서는 더 할 말을 잃게 하는 물건이 나왔다. 상자를 들여다본 동생은 한참 말이 없다 이윽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동생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표정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분과 무슨 관계야?' 하는 질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오해야.”
오해를 받을 만도 했다.
“자신 때문에 유배를 당했으니 죄책감이 심하셨을 테지. 그 시간을 내게 보상해 주고 싶으셨을 거고. 그래도 너무 과하셨어. 이건⋯⋯ 돌려보내야겠어.”
상자 안에는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머리 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팔찌와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아름다움은 둘째 치고 너무도 과했다. 이건 무슨 공주님이나 할 만한 장신구지 않은가. 이것이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잘 생각했다. 이건 우리 처지에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닌 듯하구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와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왜 주신다는 걸 안 받아! 선물이잖아! 언니가 유배지에서 한 고생을 생각해 봐. 이건 당연한 보상이야!”
아니, 유배지에서 한 고생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이 선물은 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그다지 고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초대장에 적힌 날짜는 며칠 후였다. 그 며칠 후 왕실에서 보낸 화려한 마차와 시종이 왔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손질하는 것은 동생이 도와주었다. 만약 착용해 보았다가 혹시라도 그 영롱함에 욕심이 날까 봐 왕세자 전하께서 보낸 장신구는 한 번도 걸지 않고 상자에 보관해 두었다.
나는 상자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시종이 마차에 오르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다시 온 왕궁은 여전히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으나 전과 달리 음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예전이라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을 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종은 나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안내했다.
금박으로 뒤덮인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있던 마엘 도련님께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호사스러운 방의 풍경도. 달라진 방을 보고 나는 그분이 새삼 왕세자가 되셨다는 것을 의식했다.
“선생님!”
왕세자 전하께서는 시종과 하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내게 달려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나는 못 본 새 그가 훌쩍 자라 버렸음을 느꼈다. 내가 유배당할 적에 마엘 도련님의 키와 내 키는 엇비슷했다. 그런데 겨우 1년 새 이게 무슨 일인가, 전하의 턱이 내 머리칼 위에 있었다.
'전하의 품이 이토록 넓었던가?'
크고 단단하고 너른 품에 나는 당황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는데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한참이나 왕세자 전하에게 끌어안겨 있다가,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조심스럽게 품에서 빠져나왔다. 왕세자 전하는 나를 바라보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제 선물은 안 하고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전하. 이런 물건을 집 안에 두었다 강도를 당할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까.”
내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왕세자 전하께서는 선물을 받아 들고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이미 대단한 사람인걸요.”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드레스는 받아 주시겠지요? 무척 잘 어울리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전하.”
드레스도 섬세한 레이스와 자디잔 진주가 달린 값비싼 공예품이었지만, 이조차 받지 않으면 선물을 준 왕세자 전하께 실례가 될 것이다. 왕세자 전하는 내게 우아한 다리를 가진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앉으세요, 선생님, 그간 얼마나 고초가 크셨습니까? 제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잘 지냈습니다.”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그곳에서 제 편지는 받으셨는지요.”
나는 자리에 앉았다. 왕세자 전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시종들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케이크와 각종 디저트들이 호화스러웠다. 나는 새삼 또 내가 왕궁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내게 그간 왕궁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해 주셨다.
나는 곧장 유배형을 받아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몰랐지만, 당시 그의 방에 불온서적이 발견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실각되고 왕궁에서 쫓겨났다. 방타두르 부인과 마엘 도련님 또한 거처를 왕궁 밖의 저택으로 옮겨야 했다.
“별궁 중에서도 가장 외진 방이었습니다. 유폐나 다름없었지요.”
하지만 재앙이 돌고 돌아 축복이 된다고 하던가, 왕궁에 역병이 돌 때 둘은 왕궁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서 이미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마를 피할 수 있었다. 역병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왕족들이었다. 국왕 폐하를 비롯하여 왕비와 왕세자 외에도 왕자와 공주들이 차례로 병석에 누웠다. 이중 왕비와 왕세자는 목숨을 잃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느 공주 전하 말씀이십니까?”
“제가 유배 중에 영지를 방문하셨던⋯⋯.”
“아, 그분은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분께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좋은 일인 줄 모르겠다니요?”
왕세자 전하께서는 그분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들려주셨다. 그분이 왕궁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병이 퍼졌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지만 온몸에 번진 수포가 흉터로 변해 아름다운 얼굴에 얽은 자국이 가득 번졌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잃은 와중에 외모까지 흉측하게 변한 공주 전하께서는 슬픔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상을 치른 뒤 자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아직도 그분의 천사 같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행운이었지요.”
사람이 많이 죽은 일을 행운이라고 말하는 왕세자 전하의 태도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1년 전 저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곁을 떠났고 모든 게 암담해 보였지요. 이대로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어머니와 저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길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를 외면했다고 생각한 행운의 여신은 사실 불행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 저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러면서 왕세자 전하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역병이 돌던 그날 왕궁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생님과 저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겠지요? 병으로 인해 정적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 국왕 폐하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는 저밖에 남지 않았지요. 그리고 아버님께선 병마를 물리치긴 했지만 이미 너무 노쇠하셨습니다. 곧 제가 국정을 이어받게 될 텐데, 그러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왕세자 전하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 곁에서, 저의 평생의 조언자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두 손을 잡힌 채 그의 두 눈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가 비쳤다. 나는 왕세자 전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저는 언제나 왕세자 전하의 다정한 조언자입니다.”
일단 나는 그의 말을 계속 가정 교사로서 곁에 있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왕세자 전하가 되셨으니 저보다는 좀 더 뛰어난 고견을 가진 사람을 곁에 두셔야지요. 국정 운영을 하게 되신다면 더더욱 그에 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어 가르침을 받고 조언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일개 가정 교사일 뿐, 학자나 정치가가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하를 바라보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학생이 그대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가, 단순히 그대를 손위 누이처럼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그러나 전에 누군가가 말했다. 정확히는 공작 각하께서. 혹시 마엘 공자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냐고. 미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젓는데 왕세자 전하께서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