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53화
53화
“무슨 일이니?”
하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왜? 지금은 수업 중인데.”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궁! 왕궁에서 사람이 와서 아가씨를 찾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데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를? 왜? 무슨 이유로?”
처음에 든 생각은 혹 공주 전하께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주 전하가 왕궁으로 돌아간 뒤 프랑에 있는 가족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었다.
“일단 가 보십시오!”
아이의 채근에 나는 일단 아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하녀를 따라나섰다. 현관에 이르자 과연 궁정의 시종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잔느 드 툴루즈 양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국왕 폐하의 교서를 가져왔습니다.”
“잔느 드 툴루즈 양의 방면을 위한 교서입니다. 그대는 사면되었고 금일부로 유배형은 해제되었습니다.”
그 말뜻을 이해한 순간 두 다리에서 힘이 풀려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믿을 수 없어 하며 시종을 바라보았더니, 젊은 시종은 내가 들은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툴루즈 양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약 없는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결국 오열이 터져 나왔다. 나는 주저앉은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짐을 꾸리시지요. 왕세자 전하께서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왕세자 전하? 마차? 내게 왜?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지만, 정신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웠던 곳에,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이제 자유였고 더 이상 죄인도 아니었다.
“일어나세요, 아가씨.”
한참 뒤 하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공부방을 찾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셨어요, 선생님?”
나는 아나의 옆자리에 앉아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내가 집으로 간다는 말에 아나는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선생님께 좋은 일인 거죠?”
그러고는 섭섭하고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언제 가시는 건가요?”
나는 마차가 왔다고 지금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아나는 깜짝 놀라 내게 둘렀던 두 팔을 풀었다.
“지금 당장이요? 선생님⋯⋯ 그럼 다시 와 주실 수도 있나요? 늦게라도요? 저를 보러 다시 와 주실 거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은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먼 곳을? 혼자서? 호위병이나 마차 없이?
불가능한 일 같았다. 내 얼굴을 보고 자신이 한 질문의 대답을 알아챈 아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아나의 울음에 나도 다시 울음이 터졌다. 둘 다 지금 이 순간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도.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선생님.”
아나가 울면서 말했다.
물론, 나도 아나가 많이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아나를 정말 좋아했다. 아나가 없었다면 이곳에서의 생활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울었다.
작별을 끝내고 방을 나오자 폴린느 부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느 양, 정말 축하해요! 사면이 되었다면서요! 스카디에서 반평생을 지냈지만 유배 온 사람 중에 사면이 된 사람은 처음 보네요.”
그리고 나는 공작님께서 나와 독대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고 폴린느 부인의 뒤를 따라나서며, 그를 볼 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만남이 될 독대였다.
'아나처럼 끌어안고 울 수는 없겠지. 그도 그러기를 바라진 않을 테고.'
집무실로 들어가자 공작은 창문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어, 나는 아나와 달리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차가 왔더군. 방금 전에 소식을 들었소.”
“그렇습니다.”
“축하하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모아 쥔 두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와도 이제 끝이었다, 영영.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유배지인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있을 순 없을까?'
나는 고개를 저어 이상한 생각을 털어 냈다.
“먼 길이 될 테지. 마차가 있어 다행이오.”
그는 말했다.
“마차 뒤에 브륄을 묶어 데려가시오.”
조금도 나를 붙잡을 생각이 없는 말투였다.
'브륄.'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윽고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브륄은 이곳에 있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제 거처에는 마구간이 없으니까요.”
브륄을 데려가고는 싶었지만 키울 수 있는 환경은 되지 못한다. 브륄도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터였다.
“그런가? 그럼 내가 다시 그 말을 사는 것으로 하지. 폴린느 부인에게 말해 요깃거리를 준비해 두도록 하겠소. 그럼 이만 채비하러 가시오.”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뭔가⋯⋯ 허무했다. 나는 대체 뭘 기대했을까?
'가지 말라고? 좀 더 여기 있어 달라고?'
우습기도 하지?
나는 짐을 챙기다 모피 외투와 방한용품을 두고 잠시 머뭇거렸다. 프랑은 따스한 곳이라 가져가 봤자 짐이었다.
'두고 가거나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짐도 줄일 수 있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부피 큰 짐을 트렁크에 챙겨 넣었다.
'가는 길이 추울 수도 있잖아. 이불 대용으로 써도 되고.'
모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야 하나?'
잠시 든 생각에 나는 고개를 다시 한번 도리질 쳤다. 그가 나를 잡지도 않았는데, 여기 계속 머무른다는 건 말이되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면이 아닌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매일 밤 간절히 이곳에서 벗어나 가족들이 있는 프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마부에게 트렁크를 맡기고 말 네 필이 끄는 마차에 오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허망함이었다.
'끝이구나.'
시작이 갑작스러웠듯이, 끝도 갑작스러웠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어쩐지 졸음이 밀려왔다. 어젯밤 충분히 잠을 청했는데 무슨 일일까.
마차에 몇 번이나 머리를 부딪쳐 가면서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마치 그곳에서는 잠을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나는 마차가 멈출 때 잠시 눈을 떴다 다시 졸기를 반복했다.
마차가 수도로 접어들자 그동안 말을 잃은 듯이 맞은편 자리에 묵묵히 앉아 있던 시종이 물었다.
“집으로 모셔 드릴까요?”
그 질문에 오히려 내가 더 어리둥절했다. 그제야 나는 시종에게 물을 질문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왜 왕세자 전하께서 제게 마차를 보내셨죠? 그리고 저는 왜 사면이 된 거고요? 제 누명이 벗겨진 건가요?”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시종 복장을 한 젊은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잔느 양께서 사면된 이유는 적사병 때문입니다.”
“적사병이요?”
“예, 얼마 전 궁정에 적사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그 때문에 왕실에 큰 조사가 여럿 있었고, 국왕 폐하의 만수무강과 목숨을 잃은 많은 분들을 추도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진 것이지요.”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적사병은 처음에는 단순한 발열과 근육통으로 시작하지만 며칠 후에는 온몸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이고,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며 죽고 마는 끔찍한 전염병이었다.
“가장 처음에 발병한 분은 국왕 폐하셨습니다. 이후 애를 썼으나 병은 급속히 궁정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셨지만⋯⋯.”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아꼈다.
“왕비 전하와 왕세자 전하를 비롯한 왕비 전하의 두 아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
심한 충격을 받은 나는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메웠다.
“변고로 인해 왕궁에는 폐하의 뒤를 이어 왕위를 받을 계승자가 단 한 분 남으셨습니다.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아드님이신 마엘 공자님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이해되지 않고 엉키어 있던 의문들이 실타래 풀리듯 스르륵 풀려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