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외전 3화
외전 3화
“나는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아나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아졌다.
“그런데 음⋯⋯ 나는 아나의 선생님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아나는 의아한 듯 머리를 갸웃갸웃 기울였다.
“공작님께서는 저를⋯⋯ 가정교사를 계속해 달라고 설득한 게 아니라. 음.”
폴린느 부인 때와는 달리 아나를 앞에 두고 보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무릎 위에 둔 두 손끝만 만지작 거렸다.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기, 음, 아나,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줘요. 나는 그동안, 여기 있던 동안 공작님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
내 말에 아나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없이 입을 벌렸다. 정말이지⋯⋯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나의 표정을 봤을 때부터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나. 그렇다고 해도 아나의 가정교사로 있을 때에는 하늘에 맹세코, 공작 님과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을 뿐이에요. 어쨌든⋯⋯ 우리는 아무 일 없었고.”
“⋯⋯.”
들으면서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주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내가 더듬더듬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여전히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아나가 물었다.
“왜요?”
“예?”
“왜 아무 일이 없으셨어요?”
그 말에 나는 머리를 몽둥이로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나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있었다.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아무 일이 없었던 거예요?”
“어? 예? 어⋯⋯.”
“서로 사랑하면, 그냥 그대로 연애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공작님을 사랑하셨으면서 여길 왜 떠나셨어요?”
이제는 내가 할 말이 없어질 차례였다.
“⋯⋯.”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입이 백 개라 하더라도 나는 결코 아나에게 사건의 진상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내게 정부가 되어 줄 것을 원했다는 것을. 애초에 아나는 정부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 어, 아나, 나는 여기⋯⋯ 음, 죗값을 치르러 왔어요. 물론 누명이었지만, 죄인의 몸으로 어떻게 공작님과 마음이 같다고 그, 사랑을 할 수 있겠어요. 설령 죄인으로 여기 오지 않았다 해도 제 가문은 공작님에 비해 지체가 낮았어요. 그래서 저는 공작님과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
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보통 공작님처럼 지체 높은 분들은⋯⋯ 공주님이나 공녀님같이 지체 높은 분들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시게 됩니다.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요. 왜, 지금까지 읽었던 동화책에서도 왕자님은 공주님과 결혼했지요? 공주님은 또 왕자님과 결혼하고요. 그런데 저는 그에 비해⋯⋯.”
“선생님도 공주님처럼 예뻐요! 상냥하시고요!”
아나가 내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렇게 말해 주어 정말 고마워요, 아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주어 고마웠다. 아나의 반응에 나는 이제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어쨌든 그래도 제가 공주님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작님과 제 마음이 같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던 사이 제 유배령이 풀렸고 저는 가족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이곳과 제가 사는 프랑은 아주 아주 멀기 때문에 저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작님이 저희 집에 찾아오셨어요. 청혼하시러요.”
“⋯⋯.”
아나는 다시 말없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와⋯⋯ 결혼하고 싶으시다고.”
거기서 나는 말을 멈췄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말문이 턱 하고 막혀서였다.
'아나가 나를 어떻게 보아 줄까.'
폴린느 부인에게 털어놓을 때보다 훨씬 더 가슴이 떨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예전보다 훨씬 더 특별한 관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족, 나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공작님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에 비해 제가 드릴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아니, 드릴 수 있는 건 마음 하나밖에 없지요. 공작님의 청혼을 받아들인 건 어쩌면⋯⋯ 제 욕심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게 욕심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었어요. 떠날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곳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지만, 사실 아무 것도 괜찮지 않았답니다. 공작님을 다시 보고 나서야 그걸 알았어요.”
“⋯⋯.”
'내 아내가 되어 주시오.'
'나와 함께 다시 돌아갑시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는 행운을 누리라고?'
말하다 보니 다시금 그가 우리 집에 찾아와 청혼하면서 했던 말들이 떠올라, 나는 가슴속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래서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나, 나는⋯⋯ 이곳에 가정교사가 아니라 공작님의 아내로서 살러 온 거예요. 그리고 아나의⋯⋯ 양어머니로서도.”
아나는 내가 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어쩌면 다시 마음의 벽을 세울지도 모르고 무너뜨리는 데에 한참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싫은가요?”
내가 물은 뒤에야 아나가 입을 열었는데 나는 뜻밖의 말에 정말 놀랐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뜻밖에 돌아온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욕심을 부린 건 선생님이 아니라 공작님이에요, 선생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요. 제가 만약 공작님이었어도 선생님께 청혼했을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 자신감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나는 왈칵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공작님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이해가 가요. 그런데 선생님은⋯⋯ 공작님을 왜 좋아하게 되셨어요?”
나는 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나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공작님의 어느 면을요?”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정한 점이⋯⋯ 좋았어요.”
“네? 다정하다고요? 공작님이?”
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아나, 공작님은 다정해요. 그야 처음에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처음에 여기 왔을 때 공작님은 이방인인 내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어요. 일자리도 주셨고 체력을 키우라며 브륄도 주셨죠. 그 밖에도 자잘한 것까지 세심하게 살펴봐 주셨어요. 작게는 겨울에 입을 외투의 가죽하며⋯⋯ 지나가듯이 할아버지의 서재에 대해 한 말을 듣고 그분의 책을 구해다 주기도 했지요. 그건 그분의 마음씨가 다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이었어요. 그리고 그분의 다정함이 아니면 저는 벌써 얼어 죽었겠지요. 아니면 외로워 죽었거나요.”
“⋯⋯.”
“아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공작님께서 이곳에 데려와 주셨죠? 미혼인데도 아나를 양녀로 삼아 주셨고요.
죄인으로 여기 온 내가 이곳의 가정교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공작님께서 아나 양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힘써 찾았기 때문이에요. 그런 게 다 다정함이지요. 아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니깐요.”
그 말을 듣고서야 아나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은 사랑을 주는 법에 서투르지만, 알고 보면 참 다정하세요. 자신 또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조금 문제이지만⋯⋯ 그래서 사람의 오해를 많이 사게 될 테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공작님을 좋아하게 된 다른, 어쩌면 가장 큰 이유를 밝히며 나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공작님은, 잘생기셨어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으리라.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아나의 얼굴은 다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가요⋯⋯?”
“왜요⋯⋯? 잘생기지 않았나요?”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가 훨씬 더 잘생겼는걸요? 공작님 정도는⋯⋯ 평범하죠?”
“아, 그렇군요⋯⋯. 평범⋯⋯.”
'공작님이 평범하다고⋯⋯.'
문득,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