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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외전 18화


외전 18화 랑시스 남부에 위치한 사르데냐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피네롤로를 두고 랑시스와 수십 년 동안이나 싸우고 있었다. 마엘은 피네롤로를 두고 반복되는 이 전투를 종식하고 동맹을 맺는 대가로 자신과 왕녀의 혼인을 제안했다. 그리고 지참금으로는 피네롤로의 영구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마찬가지로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사르데냐 왕국은 이 혼인에 긍정적인 서한을 보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양측 국가 간의 교섭이었다. 왕국의 왕세자와 공주의 혼인이니만큼, 피네롤로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지참금과 유사시의 왕위 상속 문제로 교섭은 몇 달에 걸쳐 계속되었다. 마침내 결혼계약서에 양 국가의 직인이 찍혔을 때는 어느덧 초겨울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겨울이 온다고 해도 사시사철 온화한 프랑의 날씨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를 태우고 왕국에서 출발한 마차는 수월하게 국경을 넘었다. 결혼식은 랑시스의 궁전에서 실로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었다. 결혼식에서 신부는 금색 바탕에 수백 개의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드레스 또한 왕세자비의 지참금에 속하는 현물이었다. 나라의 경사로 인해 랑시스의 전쟁과 소요는 종식되었고, 결혼식을 앞두고 랑시스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사르데냐 왕국의 왕족들을 포함한 각 나라의 귀빈과 사절들이 찾아와 앞다투어 선물을 건네기 바빴다. 개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자는 그 어떤 일에도 궁정에 발걸음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스카디 대공이었다. 스카디공작령에 형식적으로 초대장을 보내긴 했었지만, 설마 대공이 정말로 초청에 응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엘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뻤다. 마엘이 왕세자의 자리에 올라 국왕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긴 했지만, 그에게는 모친이 메트레상티트르라는, 정통성에 크나큰 흠을 지니고 있었다. 귀족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겉으로는 마엘을 공경하는 척하면서도, 여전히 왕세자에게 은근히 무례하게 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데다 때론 아직도 그를 은근히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도 있었다. 때문에 왕세자에게는 이와 같은 자들을 견제해 줄 더 큰 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바로 왕세자의 결혼식에 북부를 다스리는 대귀족인 스카디 대공이 응답한 것이다. 대공의 움직임은 마엘의 권위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데 그가 대체 왜 결혼식에 참석한 걸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궁에 도착한 스카디 대공은 마엘에게 알현을 청해 왔다. 마엘 또한 소문으로만 듣던 대공의 실물이 궁금하던 참이라 알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야만족의 피가 짙게 흘러 덩치가 곰 같고 몸에는 털이 나 있다던데⋯⋯.' 마엘은 그가 물 대신 피를 마시고 적의 시신을 먹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원래부터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대면했을 때에는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놀랄 만큼 체격이 큰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보다도 대공은 예상을 뛰어넘는 미남자였다. 마엘이 보기에 그는 전혀 짐승 같지 않았다. “스카디 대공, 뜻밖의 귀한 발걸음을 해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오. 선물 또한 아름다운 물건이오. 아내가 참 좋아하겠군.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선물은 보석이 아니라 그대의 방문이오. 나는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그대가 정말로 참석해 줄 것이라 생각지 못했소.” “향후 왕위에 오르시어 저의 주군이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신하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함이 마땅하지요. 왕세자 전하의 결혼식에 잊지 않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심지어 스카디 대공은 적당한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마엘이 장갑 낀 손을 내밀자 목이 뻣뻣하기로 소문난 대공은 고개를 깊이 숙여 입을 맞추었다. “변함없는 그대의 충성과 헌신에 감사하오. 그래서,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오?” 마엘은 은근슬쩍 그의 진의를 떠보았다. 스카디 대공이 단순히 미래의 권력자인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프랑까지 왔을 리는 없었다. “내 국왕 폐하께 남은 유일한 아들이긴 하나, 메트레상티트르의 자식이란 이유로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이가 많소. 병이나 우환 핑계를 대면서 말이오. 그렇기에 더더욱 랑시스의 대귀족인 그대가 자리를 빛내러 와 주어 고마울 따름이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궁정에서 열었던 그 어떤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없지 않았소? 아버지는 그대를 궁정에 끌어들이려 갖은 애를 썼지만 실패하셨지. 그런데 내 결혼식에는 참석해 주다니⋯⋯. 이제까지의 관습을 깰 만큼 우리가 친분이나 우정을 쌓은 적도 없지 않소? 물론, 내가 이전에 실례를 무릅쓰고 내 가정교사를 그대에게 맡긴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오.” 마엘의 질문을 들은 대공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반응을 보니 마엘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대체 스카디의 대공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게 무엇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기로 알려진 그가 이토록 긴장감을 숨기지도 못하는 것인가? “나는 그대와 친구가 되고 싶소. 그러니, 내게 원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알겠습니다, 왕세자 전하. 실은 이 경사에 기대어 전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왕세자 전하, 저는 덫에 빠졌습니다.” “덫에 빠졌다고? 무슨 덫을 말하는 것이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덫입니다.” 사랑? 그 단어에 마엘은 정말로 놀랐다. 일순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 사랑? 이 남자가 지금 사랑이라고 말한 것인가? 대공이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거니와 그와 사랑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진지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사랑을 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저에겐 있습니다. 안고 있어도 원하게 되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자비를 베푸시어 저와 그 여자가 혼인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당혹스러움이 한차례 물러간 뒤, 마엘은 우선 그 말속에 거짓이 묻어 있지 않은지 살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입을 열면 거짓말만 하는 왕궁에서 살아남은 존재였다. 하지만 발드르에게서는 딱히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심 같았다. 게다가 고작 제게 이런 거짓말을 하자고 먼 북부에서 프랑까지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판단하고 나자 마엘은 발드르를 사랑에 빠지게 한 상대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 여자가 누구요? 공녀요, 공주요?” 이 남자를 사로잡은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다. “공녀도 공주도 아닙니다. 제 영지에 있는 사람으로 작위는 있으나 가문이 영세하여 지금은 여염집 규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남자가 아닌가? 아무래도 발드르는 자신의 영지민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대라면 훨씬 더 좋은 신붓감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의외로군.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보다 더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강력한 상대와 동맹을 맺거나 곳간을 채울 수도 있는 기회를 그르친다는 생각이 들진 않소?” “그 모든 기회보다도 그 사람이 제게는 가장 절실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 말에 마엘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스카디 대공이 지금까지 미혼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내 아버지께서 그대와 내 이복누이를 혼인시켜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 말이 맞습니다. 제가 그 혼인을 거절했기에 폐하께서는 제 혼인 자체를 금하셨지요.” 그의 말대로, 아버지는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대공에게 시집보내기를 원했었다. “그럼 내 누이와 혼인하지 않으려 한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오?” “⋯⋯.” 그는 대답을 삼갔지만, 반응을 보니 역시나 그런 듯했다. '아하.' 마엘은 이제야 대공이 왜 지난날 공주와의 혼인을 거절했는지 이해되었다. 눈앞의 이자는 왕의 명령에도 불복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엘은 눈앞의 스카디 대공을 방금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결혼은 그나 자신 같은 고귀한 자들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장사였다. 그런데, 대공을 사로잡은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어도 그 기회를 포기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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