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외전 19화
외전 19화
'정말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군. 이것도 야만인들의 습성이라는 건가?'
마엘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딸을 대공가로 보내어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 하길 원했다. 그러나 마엘에겐 의붓누이가 되는 공주들이 설령 대공에게 시집간다 한들 그의 편이 되어 줄 것인가?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오히려 스카디 대공의 힘을 이용해 자신에게 대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그를 친구로 만들고 싶다. 랑시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그를⋯⋯. 더군다나 대공이 힘없는 여인과 혼인한다면 내게는 좋은 일 아닌가?'
강대한 귀족 가문 간의 혼인은 사실 왕족의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귀족의 세력이 더 강화되지 않는 일이라면 마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어쨌든 부럽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만한 희생을 불사하다니.'
생각을 마친 마엘은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기에 그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나라고 왜 사랑하는 이의 머리에 왕비의 관을 씌워 주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그때 마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그와 결혼식을 치르게 될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가 아니라 잔느의 얼굴이었다.
“왕관의 권위는 의무에서 나오는 법이지. 내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소. 내 나라, 랑시스의 일이오.”
마엘은 그 얼굴을 애써 지워 내며 대공에게 말했다.
“그대는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예, 전하.”
“망설이지도 않는군, 그대의 확신이 부러워. 좋소, 결혼을 허락할 테니 그대가 혼인으로 마땅히 얻었어야 할 것보다 사랑이 가치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마엘은 훗날, 제 입으로 뱉은 그 말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전하, 제가 가져온 청원서에 서명해 주십시오.”
마엘이 말을 마치자마자 대공은 무엇인가를 꺼냈다. 흘깃 보니 그것은 결혼 청원서였다. 청원서의 종이는 반으로 접혀 있었고, 자신이 볼 수 있는 부분에는 사인을 해야 할 공간이 드러나 보였다. 마엘은 청원서를 펼쳐 읽는 대신 구석에 있는 시종을 불러 펜과 잉크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시종이 사인 도구를 가져오자마자 펜에 잉크를 듬뿍 묻혀 청원서에 사인했다.
대공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물러갔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일들이 무척 바쁘게 진행되었기에 그는 곧 대공과의 만남을 잊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오늘 처음 얼굴을 본 소녀에게 직접 왕세자비의 관을 씌워 주었고 사제의 주례에 따라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마엘은 소녀의 외모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식을 치른 뒤 연회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그 끝을 장식한 것은 왕궁의 불꽃놀이였다.
마치 신년 행사를 방불케 하는 밤하늘의 불꽃들이 찬란했다.
'그녀도 어디선가 이 불꽃을 바라보고 있겠지?'
마엘은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의 곁에서 문득 잔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매년 그녀와 함께 발코니에서 이 광경을 보았었는데⋯⋯.'
한번 잔느에 대한 생각이 들자 마엘은 갑자기 미친 듯이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다. 다시 보고 싶어.'
어서 이 왕궁으로 데려와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마다 듣고, 보고 싶을 때마다 맘껏 보고 싶었다.
'내 결혼 소식이 분명 그녀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메트레상티트르가 되어 달라 하더니 갑자기 결혼을 해 버린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을까? 차라리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질투는 곧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제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내일 당장 사람을 보내서 해명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정부가 아닌 조언자라도 좋으니, 지금부터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하자.'
왕비와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마엘은 사람을 시켜 마차를 보냈다. 선물과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도 함께 들려 보냈다. 마엘은 편지에 자신이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와 혼인한 이유에 대해 소상히 썼다. 왕세자가 된 자신의 결혼은 장차 나라의 장래가 걸린 중대한 국사이며, 이 모든 것은 군주의 의무와 책임 때문이라고. 여전히 자신의 심장은 그녀의 것이라는 고백이 깃든 이야기도 적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진심이었고, 잔느도 이 편지를 읽는다면 분명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여자 중 가장 다정하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아침에 보낸 마차는 저녁이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엘은 점점 초조해졌다. 혹시나 왕궁에 오지 않겠다고 시종과 실랑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왕세자비와 산책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오로지 잔느를 태운 마차가 왕궁으로 언제 돌아올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마차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러나 마차 안은 비어 있었고, 그에게 알현을 청한 시종의 낯빛은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불안함을 견디지 못한 마엘은 애를 태우며 시종에게 물었다.
“왜 마차가 비어 있지? 오지 않겠다고 하더냐? 내 서신을 읽고도?”
“저, 그것이 아니오라⋯⋯ 전하.”
그리고 이어진 시종의 다음 말에 마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분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잔느 드 툴루즈 양이 살던 집으로 가 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소문을 해 보니 툴루즈가 사람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모양이었습니다.”
“떠났다면 어디로? 어디로 간 것이냐?”
“거기까지는 아직⋯⋯.”
마엘은 시종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고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진 시종을 죽기 직전까지 짓밟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걷어차도 마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잔느가 사라지다니.
그녀는 대체 어딜 갔을까? 이사를 했다면 어디로 종적을 감춘 것일까?
날개가 달리지 않고서야 하늘로 솟아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후, 마엘은 프랑 전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엘은 그녀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잔느는 없었다.
실마리는 아주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 잔느가 지냈던 집 옆 호숫가에 살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었다. 그들이 종적을 감추기 며칠 전 아주 화려한 사륜마차가 집 앞에 머물렀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제보한 사람은 창문을 열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이라 마차에 새겨진 문장까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잔느를 데려간 자의 범위를 좁히기엔 충분했다. 프랑에서 그만한 마차를 끌 수 있는 자들이 몇 부유한 상인과 귀족 외에 또 있을까.
마엘은 프랑에 있는 모든 사륜마차를 조사했다. 마침내 마차가 스카디 가문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는 마엘이 혼인한 지 벌써 두 달의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마엘은 허탈해 숨을 내뱉었다.
'스카디 가문이라고?'
그랬다.
'스카디?'
잔느와 잔느의 식구들을 데려간 마차는 스카디 가문의 것이었다. 그제야 마엘은 머릿속에서 모든 그림의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결혼식 때 왕궁에 방문한 스카디 대공의 청원까지 포함해서.
'나는 그대와 친구가 되고 싶소. 그러니, 내게 원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왕세자 전하, 저는 덫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덫입니다.'
'그 여자가 누구요? 공녀요, 공주요?'
'공녀도 공주도 아닙니다. 작위는 있으나 가문이 영세하여 지금은 여염집 규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그럼 내 누이와 혼인하지 않으려 한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오?'
'⋯⋯.'
설마, 스카디 대공의 결혼 상대가. 여염집 규수나 마찬가지라던 그 여자가 잔느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결혼 청원서에⋯⋯ 제 손으로 직접 서명을 했다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마엘은 재차 헛숨을 흘렸다.
스카디 공작령은 북부의 험지인지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프랑에서는 그곳의 사정을 알기 어려웠다. 물론 스카디 공작령도 마찬가지였다.
마엘은 뒤늦게 스카디로 서신을 들려 사람을 보냈다. 잔느 드 툴루즈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니 다시 프랑으로 돌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전령은 며칠 뒤 대공의 서신을 갖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마엘은 서신을 받자마자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 내듯이 봉인을 뜯어 안의 내용물을 펼쳐 보았다. 서신에는 채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간략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세자 전하, 지난날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로 말미암아 잔느 드 툴루즈 양은 잔느 드 스카디 공작 부인이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조촐하게 진행했던 터라 전하를 초청하지 못하였음을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