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외전 20화
외전 20화
마엘은 서신을 갈기갈기 찢으며 살아생전 처음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마엘은 처절하게 외쳤다. 그러나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지언정 마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청원서에 직접 서명을 남긴 것도, 청원서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은 것도 자신이 아닌가.
'대체 언제부터?'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유배 생활 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남는다. 대공은 잔느의 유배령이 풀리고 난 뒤 대체 왜 그녀를 곱게 프랑으로 돌려보냈는가? 그리고 잔느는 대체 왜 프랑으로 돌아온 것인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불현듯 마엘은 진실을 깨달았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저보다 훨씬 좋은 분을 아내로 맞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분을 아내로서 존중하고, 온전한 사랑을 주십시오.'
예전에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던 잔느가 그저 메트레상티트르라는 자리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그 자리를 거절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엘은 분노에 가득 차 다시 스카디 공작령으로 마차와 서신을 보냈다.
대공, 그대는 나를 모독하고 속였소.
내가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다는 말이오?
내가 그대의 영지로 내 여인을 유배 보냈을 적 보낸 편지를 그대도 읽지 않았소?
더불어 이 혼인은 무효요.
그대의 주군은 아직 국왕 폐하시고, 국왕 폐하께서는 그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소.
이제라도 모든 걸 되돌려 놓는다면, 나는 아직 그대를 용서할 용의가 있소.
우리의 우정을 위해 지금이라도 잔느를 돌려주시오.
그리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그대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잊겠소.
하지만 마차에 탄 시종은 잔느 대신 대공의 서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와 잔느 드 스카디 공작 부인은 랑시스의 결혼법에 단 하나도 저촉되지 않는 방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나이다.
저와 제 아내의 혼인은 신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신이 묶어 주신 것을 어찌 인간이 풀 수 있겠나이까?
더불어 제 혼인은 랑시스의 국익에도, 주군인 국왕 폐하께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며, 랑시스에 대한 저의 충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현재 국정을 왕세자 전하께 위임하신바, 왕세자 전하께 결혼 허가를 받았으나 그것이 정히 무효라 주장하신다면 현 국왕 폐하께서 병석에서 일어나신 뒤 즉시 직접 알현하여 새로이 허가를 받도록 하겠나이다.
뻔뻔한 답변이 적신 서신이었다. 마엘은 시야가 붉게 물들 정도로 분노했다.
'감히⋯⋯.'
마엘은 랑시스의 섭정이자 왕세자였다. 랑시스의 모든 땅은 그의 것이었고 귀족들의 영지는 어디까지나 각 귀족들에게 잠시 하사한 것뿐이었다.
'감히 내게 대적하다니.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야 마땅하다.'
마엘은 당장이라도 대공의 영지를 회수하고 대공을 죽여 자신을 모독하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잔느는 물론이고 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나 왕세자로서의 이성적인 사고가 그를 가로막았다.
'⋯⋯명분이 없지 않은가.'
랑시스의 모든 영지는 왕의 소유였기에, 원칙적으로는 귀족에게 하사했더라도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명분이 필요했다. 귀족에게서 영지를 빼앗을 합리적인 명분이.
스카디 대공은 지금까지 영지를 하사받은 대가로 북부의 방패로서 제 역할을 다했고, 세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때 바쳤으며 그의 가문은 대대로 왕실에 충성을 바쳐 왔다. 시작은 야만족이었다 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그에겐 랑시스의 왕실과 귀족들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대공의 영지를 압류한다고?
그건 오히려 스카디 대공에게 반역의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공을 적대할 마음이 들자 ‘오히려 잠들어 있는 사자는 스카디 대공 쪽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불현듯 마엘을 사로잡았다.
스카디 대공은 전투에 잔뼈가 굵은 지휘관이었으며 랑시스에서 가장 많은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병들은 모두 전쟁 경험이 풍부했고 대공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했다. 그에 비해 왕의 군대는 어떠한가? 랑시스의 근위병들은 전투보다는 호위에 특화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성실하게 훈련을 받기는 했으나 한 번도 목숨을 내걸고 전장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
'선조께서 야만족에게 영지를 하사한 이유도 그 야만족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대 국왕께서는 수도까지 정복당할 뻔하고 난 뒤 영지와 작위로 야만족을 길들이기로 마음먹었지. 그런데 내가 그 야만족의 후손과 싸우겠다고? 혹시 이 일로 간신히 개가 된 늑대를 다시 늑대로 돌려놓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 군대가 격돌한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그렇다 해서 스카디 대공에 대적하기 위해 다른 귀족들에게서 군사를 징발할 수도 없었다.
역시나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누가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같은 귀족을 치기 위해 왕에게 자신의 아까운 군사를 내어 주겠는가? 그것도 단지 대공의 부인을 빼앗기 위해서가 이유의 전부라면 더더욱 지지받기 힘들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공을 친다면 다음 표적은 자신이 되지 않을까? 귀족들은 그렇게 판단할 터였다.
'다음은 내 부인, 내 재산, 내 땅뙈기를 빼앗기 위해 왕이 나를 치지 않을까?'라고. 그것은 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심을 와해시키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외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나서 내전을 벌여?'
더군다나 섭정에 오른 뒤 그는 랑시스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갖은 애를 써 왔다. 타국의 공주와 결혼까지도 불사했다. 그런데 고작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내전을 벌인다고? 만약 그런 짓을 벌인다면⋯⋯ 마엘은 훗날 후손들에게 어떻게 평가될지를 생각해 보았다.
'바보왕, 서자왕, 색마, 그런 멸칭이나 붙겠지. 아니, 아예 내 대에 랑시스가 망할지도 모른다.'
마엘이 평화를 위해 사절을 보내고, 결혼까지 하며 노력해 온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될 것은 자명했고, 스카디가 와 내전을 벌인다면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타 국가들이 옳다구나 하고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다.
“⋯⋯.”
활화산의 용암처럼 넘쳐흐르던 그의 분노도 점차 식어 갔다. 마엘은 냉정하게 머릿속 양팔 저울 한편에는 잔느를, 다른 한편에는 랑시스의 왕관을 올려 보았다. 저울은 아주 당연히도 왕관 쪽으로 기울었다. 마엘은 그녀를 너무도 원했지만 랑시스의 왕관은 그의 생존과도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갈망해 왔던 모든 것. 마엘은 그것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엘은 결국 제 손에 쥔 걸 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왕관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발드르와 그의 차이점이었다.
❖ ❖ ❖
몇 달 후 발드르는 인편으로부터 왕세자의 서신을 받았다.
그대의 말대로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하겠소? 엎질러진 우유 때문에 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 나는 여인 한 명으로 인해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신뢰와 믿음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관대한 마음으로 그대의 혼인을 허하겠소. 첫아들을 낳는다면 왕궁으로 드시오, 아내와 함께. 내가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리다.
대부란 발드르가 죽을 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친자식처럼 돌봐줄 의무를 가진 존재를 뜻하는 단어였다. 서신을 읽은 발드르는 미소 지었다. 물론 그는 서신의 내용을 한 단어도 믿지 않았다. 왕세자는 그를 영원히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가 만약 자신을 보호할 군대 없이 프랑으로 발걸음을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죽인 뒤 잔느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왕세자 또한 발드르가 이 서신의 내용을 전혀 믿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 서신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대로 그가 어쩌겠는가? 모든 것이 엎질러진 우유인 것을.
2년 뒤 발드르는 잔느에게서 첫아이를 보았다. 그녀의 외형을 똑 닮은 건강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들을 보았음에도 발드르는 스카디령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이후 국왕이 된 마엘이 발드르를 수차례 바깥으로 끌어내려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드르가 한 일은 국왕에게 그저 아이의 몸이 허약하여 낫는 대로 가족과 함께 왕궁에 들겠다는 서신을 띄운 것뿐이었다.
그리고 발드르는 행복하게 살았다. 잔느와 그녀가 낳은 아들딸들, 아나, 잔느의 가족과 함께, 스카디령 안에서.
<삭풍이 불어오면> 외전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