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화
09.
사샤는 버릇처럼 단검을 쥐었다.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늘 그것을 꺼내 들고 거대한 가상의 적을 그리며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를 상상하고는 했다. 도로시는 사샤의 팔을 살펴보며 그녀가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단검을 곁눈질했다.
“그러다가 단검을 손에 쥐고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이 안에는 온통 칼과 총에 민감한 군인들뿐이니까.”
“네.”
도로시는 사샤의 흉터 부위를 알코올로 닦아 내고 연고를 발라 네모나게 거즈와 반창고를 덧대었다.
“흉터는 남겠지만 상처는 이제 거의 다 아물었어요. 다음 주 정도면 거즈도 필요 없을 거예요”
도로시가 치료 도구를 들고 침대에서 내려가자 사샤가 블라우스를 추슬렀다. 여자는 다 쓴 알코올 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치료 도구를 가지런히 챙기며 말했다.
“이제 더는 간병인이 필요하지 않으니 해가 지고 나면 요새 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상관없어요.”
“혼자요?”
“네. 윌렌도르프 소장님이 허락하셨어요. 다만 낮에는 방 밖으로 나와서는 안 돼요. 감시병이 문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사샤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어디라도 상관없나요?”
“네.”
“오늘부터요?”
오늘부터? 도로시는 미간을 구기고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도요.”
사샤는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요한과 첫 수업을 한 이후 꼭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혹시, 당근을 구할 수 있나요?”
“당근이요?”
도로시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네. 당근이요.”
그녀는 식자재 창고에서 신선한 당근 몇 개를 가져왔다. 사샤는 단검으로 당근의 잎사귀를 자르고 물에 깨끗이 씻어 말이 먹기 알맞은 크기로 그것을 토막 냈다.
도로시는 마구간을 가겠다는 사샤에게 진담 반 농담 반 그녀에게 이제 닭의 목을 꺾는 것에는 질렸냐고 물었다. 사실 그녀는 사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뭐에 홀린 듯이 닭장을 드나드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녀가 수탉의 목을 비트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하였을 때는 몹시 놀랐다. 그러나 요한은 보고를 들은 후 그것을 용인했고 그렇기에 그녀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탉의 목을 비틀었을 때 사샤는 울었을 것이다. 도로시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처음으로 목을 꺾고는 비틀대며 닭장에서 나와 곧장 구역질을 하며 배 속을 게워 냈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닭장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제대로 닭의 목을 비틀지도 못했으면서 매번 지옥으로 향하는 자처럼 그녀는 울며 그곳에 들어섰다. 참으로 지독했다. 두려움과 분노와 처절함이 뒤섞인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스러울 정도였다.
도로시는 그녀가 닭에게 무엇을 투영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샤는 끝내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뜨거운 생명을 앗아 가고 난 이후의 그 싸늘함을 그녀는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그 살육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아마 그것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목장에서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마구간은 그 규모가 제법 컸다. 말 우리에는 여러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모두 칸막이로 분리하여 사적인 영역을 보장해 주었다.
사샤는 돌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마구간에 있는 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털도 그랬고 우아한 생김새 또한 다른 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안녕. 돌시.”
사샤가 인사하자 돌시가 킁킁 냄새를 맡고는 흥분한 듯 뒷발을 굴렀다. 그녀가 가지고 온 당근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사샤는 바구니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자.”
돌시의 길고 아름다운 얼굴이 서서히 사샤에게로 다가왔다. 사샤는 숨을 멈추었다. 돌시가 자신을 들이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돌시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에서 당근을 낚아채 갔다.
“넌 정말 예쁘구나. 여기 있는 말들 중에 아마 네가 제일 예쁠 거야. 그렇지? 넌 요한의 말이잖아.”
돌시가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자. 여기 있어. 내가 아주 많이 가져왔어.”
사샤는 얼른 당근을 하나 더 주었다.
“다 네 거야. 모두 다 너 주려고 가지고 온 거야.”
돌시가 귀를 움직였다. 사샤에게는 그것이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다.
“나는 사실 말을 무서워해. 어릴 때 말에 치일 뻔한 적이 있거든. 그리고 그땐 말이 엄청 커 보였어. 당연하지.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았으니까.”
사샤는 당근을 하나 더 주며 아주 살짝 그녀의 콧등을 매만졌다. 당근이 있어서인지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 돌시. 어떻게 하면 너랑 친해질 수 있을까?”
돌시의 귀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가 약하게 투레질을 했다. 사샤는 당근을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너도 들었지? 요한이 자신의 개와 말을 죽였던 이야기.”
돌시는 묵묵히 당근을 씹었다. 그녀의 귀는 계속 쫑긋거렸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돼. 그는 아주 잔인한 살인마거든.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그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잖아. 그렇지? 나는 너를 돕고 싶어. 돌시. 내가 너를 도와줄게.”
사샤는 당근을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돌시가 킁킁 손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당근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빈손인 것을 알면 콱 물어 버릴지도 모른다. 손끝이 파르르르 떨렸다.
“내가 너를 만져도 되겠니?”
푸르르, 돌시가 투레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샤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돌시가 뒷발을 굴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꼬리가 양옆으로 철썩였고 하얀 몸이 움찔거렸다. 사샤는 겁이 나 더 뒤로 물러섰다.
쿵!
돌시가 앞발로 굳게 잠긴 철문을 쳤다. 사샤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바람에 바구니를 놓쳤다. 투르르, 당근이 바닥을 굴렀다.
쿵! 그녀가 철문을 한 번 더 찼다.
“난 널 도우려는 거야!”
쿵!
쿵!
돌시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난폭하게 발을 찰 뿐이었다. 결국 사샤는 우리를 뛰쳐나왔다.
쿵, 쿵 돌시가 계속해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며 돌시의 흥분에 동요한 다른 말들도 발을 구르며 투레질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여기저기서 쿵, 쿵, 말들이 철문을 차고 있었다. 사샤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겨우 마구간을 빠져나왔을 때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느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구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더러운 흙바닥, 하루에도 수십 번 말들이 드나들었을 모래 바닥에 사샤는 털썩 주저앉아 설움에 눈물을 터트렸다.
외로웠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너무나 갇혀 있었다. 마음이 가슴속에만 가득해 터질 듯이 아팠다. 누군가에게는, 아니 어딘가에는 이것을 나누고 싶었다. 아레사 수녀님의 무릎에 기대어 기도를 올릴 때가 너무나 까마득했다. 바비의 연약하고 보드라운 이마를 쓸어 넘기며 그 온기를 느끼던 때가 대체 언제던가.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웠다. 그저 마음을 놓고 어루만질 수 있는 상대라도 필요했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야 좋았다. 사람은 너무나 어렵다. 사람의 온기는 따듯하지만 가시가 있었다. 반드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렸다. 그래서 돌시를 택했다. 요한에게 헌신한다는 그 짐승이 필요했다. 그에게서 그 짐승을 빼앗고 싶었다. 그가 상실감을 느낄 만한 자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그러나 저같이 하찮은 계집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그의 자존심에 생채기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돌시를 원했다. 가진 것을 빼앗고 싶었다. 그렇게 빼앗아서 그녀를 가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이기고 싶었다. 달콤한 승리를 누려 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그래야 이 뜨거움이, 이 증오가 조금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이 아픔이 아주 조금은 무뎌질 것만 같았다. 그래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울음을 토하다가 그녀는 몸을 털며 일어났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치마에 묻은 흙을 마저 털었다. 놀라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마구간에 오일 램프를 두고 왔다. 아주 잠시 그것을 그대로 두고 가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밤새 불타다가 꺼지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푸라기에 옮겨 붙어 불이 날까. 불이 나면 요새의 말들은 모두 타 죽겠지. 아니 불이 더 커져서 요새를 다 삼켜 버리면 어때. 그렇게 모두 다 죽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사샤는 도리질을 했다. 그건 옳지 않아. 동물은 죄가 없어. 게다가 성은 너무 커서 겨우 오일 램프 하나로 성을 불사르기엔 불가능했다. 차라리 들판을 모두 태우면 태울까. 그마저도 비가 잦은 빅토리아에서는 들불로 번지기 전에 빗물에 식을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사샤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마구간을 터덜터덜 걸어 오일 램프가 환한 돌시의 앞에 섰다. 발에 당근 하나가 밟혔다. 사샤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돌시가 투레질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넌 자존심도 없어?”
사샤가 돌시를 노려보며 당근을 등 뒤로 숨겼다.
“먹을 것만 좋다는 거야?”
쿵!
돌시가 발길질을 했다. 놀란 사샤의 몸이 퍼뜩 뛰어올랐지만 그녀는 한 발 더 물러서며 이를 사리물었다.
“당근만 주면 아무나 다 좋다는 거야? 당근만 주면 널 만져도 되고 당근 없이는 널 만질 수 없다는 거야?”
쿵! 돌시가 다시 발을 굴렀다. 사샤는 더 뒤로 물러섰다.
“네가 겁을 주니까 내가 더 도망가잖아!”
돌시가 꼬리를 사납게 흔들며 목을 아래로 숙였다. 그 상태로 제자리에서 빙빙 돌더니 쾅! 뒷발로 문을 찼다.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때보다 커다란 굉음이 났다. 사샤는 비명을 질렀다. 돌시가 히히힝 소리를 내며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만해!”
사샤가 겁을 먹고 소리 질렀다.
쾅! 돌시가 한 번 더 문을 찼다. 사샤는 다시 도망쳤다. 뒤에서 돌시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쾅! 쾅! 철문을 치는 발소리도 계속해서 굉음을 냈다. 사샤는 다시 정신없이 뛰었다. 돌시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더 자극해 화만 돋웠을 뿐이다.
사샤는 그대로 쏜살같이 뛰어 제 침실로 들어갔다. 오일 램프를 끄고 이불 속으로 재빠르게 기어들어 갔다. 공포에 얼어붙은 심신은 포근한 이불 안에서도 쉽게 녹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고 컨디션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도로시가 아침을 챙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곧 얼마 전 치수를 재어 간 재단사가 그의 보조와 함께 드레스를 하나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주 새하얗고 아주 화려하며, 아주 끔찍한 웨딩 드레스였다.
***
요한은 보반과 사샤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신문을 들고 왔다. 그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데 사샤는 자신이 입은 웨딩드레스보다 그 사진이 더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2주 후에 결혼식을 올릴 거야.”
“…….”
“드레스가 아주 잘 맞는군.”
벨 라인에 공들여 수놓은 레이스가 쇄골에서부터 손목까지 타이트하게 감기는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풍성한 치마와 몸에 꼭 맞는 튜브톱은 화려했고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노출되는 피부 없이 감아 준 레이스 튤은 고상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사샤의 하얀 피부와 갈색 머리, 그리고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사샤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 아마 당분간 모든 예비 신부들이 그녀의 사진을 들고 다니리라 요한은 확신했다.
“읽어 볼래?”
요한이 그녀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샤는 고개를 돌리고 거부했다. 재단사는 마지막으로 드레스의 라인을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싫어.”
“좋아, 내가 읽어 주지.”
요한은 목을 가다듬고 신문에 적힌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로버트 보반과 그의 정부, 마침내 결혼하다.”
헤드라인부터 마음에 안 들어 사샤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요한은 계속 읽어 내려갔다.
“‘공화당 재선 의원 로버트 보반 의원이 마침내 자신의 옆자리에 그의 정부를 앉힐 수 있게 되었다. 상대는 한때 그의 비서로 일한 사샤 로랑, 사진 참고, 이라는 스무 살의 처녀이며, 그녀가 어떻게 해서 보반 의원의 비서가 되었는지는 확신할 만한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그녀가 10대 시절부터 보반 의원과 밀월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성인이 된 직후 보반 의원의 비서 자리를 차지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풍문에 의하면 사샤 로랑은 보반 의원의 정부, 그의 비서 자리에도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그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결국 보반 부인을 버리도록 보반을 유혹하였으며 그는 완전히 로랑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둘의 결혼식은 돌아오는 금요일이며 장소는 빅토리아 영지 내의 성당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보반 의원의 재혼에 따라 그동안 보반 부부의 불임이 과연 보반 부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보반 의원에 의한 것인지 그 추이가 주목되는 바이다’.”
“그만해!”
사샤는 더 듣지 못하겠는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재단사가 옷을 매만지고 있어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못했다.
“‘올해 보반은 마흔네 살 생일을 앞두고 있으며, 사샤 로랑의 생년월일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가 건강하고 매혹적인 신체를 지닌 스무 살의 처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한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신문을 접었다.
“보반 의원에게는 사생아가 없어. 발정기가 온 수캐처럼 온 동네에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녔는데도 말이야.”
“…….”
사샤가 계속해서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자 요한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냥 참고하라는 거야. 그가 씨가 없다는 것을.”
“그게 무슨 뜻이야?”
“뭐가?”
“방금 한 말.”
“아무런 뜻도 없어.”
“그가 씨가 있건 없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요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샤는 그의 뜻을 유추하고는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웨딩 베일을 집어 던졌다.
“그럴 일 없어! 그 새끼랑 자는 일은 없다고!”
사샤가 이성을 잃고 악을 썼다.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죠.”
그 말을 듣고 재단사와 그의 조수가 방을 나갔다. 텅 빈 방 안에 문이 닫히고 요한과 단둘이 남을 때까지 사샤는 그 자리에 서서 요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분노로 손이 벌벌벌 떨렸다. 그녀는 이를 씹으며 당장이라도 웨딩드레스를 다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다.
“그와 자라고 하지 않았어. 다만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뒀을 뿐이야.”
사샤는 그에게 다가갔다. 새하얀 실크 장갑을 벗어 그에게 집어 던지고 곧바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요동쳤다.
“사샤.”
요한이 아픔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금니가 얼얼했다.
“왜 이러는지 알려 줄래?”
사샤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요한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표정이 없었고 눈빛도 차가웠다. 얼음 같았다. 감정이 없었다. 석상 같았다. 돌 같았다. 아니 그냥 무생물 같았다. 눈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너무나 투명하고 공허했다.
“너같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하고 사악하고 끔찍한 사람은 처음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묻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그걸 몰라? 네가 내게 어떤 모욕을 주었는지 정말 몰라?”
“……보반과 몸을 섞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사샤가 그에게 붙들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게 안 되니 다른 손을 올렸다. 요한은 그 손도 붙잡았다.
“그는 여러 여자와 몸을 섞었어. 그중엔 너보다 어린 애도 있어. 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지. 그는 네가 딱 돌보기 알맞은 자야. 늙고 아프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
“그래서!”
“나는 네가 보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 사샤. 여자는 방금 키스한 남자라도 뺨을 때리고 뺨을 때린 남자라도 곧 키스를 하거든. 그 변덕스러운 감정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어. 넌 벨에게도 금방 마음을 열었잖아. 벨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넌 아마 그에게 사랑을 느꼈을 거야. 안 그래?”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
사샤가 이 물린 소리를 내었다. 요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진심으로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넌 그 이후 한 번도 벨을 찾지 않는군.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만해.”
“어디에 묻혔는지 가 보고 싶지는 않아?”
“그만해!!”
사샤는 비명을 지르고 자리에 무너졌다. 잔인해.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처음이야. 이렇게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사람은 처음이야. 갑갑해. 가슴이 아프다. 죽을 것처럼 아프다. 터질 것처럼 괴롭다. 질렸어. 정말이지 당신에게 질렸어.
요한은 욱신거리는 뺨을 한 번 쓸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이제 완전히 회복된 듯했다.
“너는 보반과 다른 방을 쓸 거야. 일주일에 한두 번, 그와 밖에 나가 사이좋은 부부 연기를 해야겠지만, 안심해. 사샤. 네가 원하지 않는 한 네가 두려워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사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를. 도저히,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자를.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자를 보기 위해서.
“대체 그 안에는 뭐가 들었어? 네가 심장이 뛰기는 해? 네가 사람은 맞아?”
“어떻게 생각해?”
거의 자포자기한 질문에 요한은 되물었다.
“내가 심장이 있는 것 같아? 내가 사람인 것 같아?”
“…….”
“내 눈엔 망가진 여자가 보여. 그녀는 멍청하고 항상 도돌이표지.”
“…….”
“참 쉽게도 무너지는군.”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이제 그 안에 혼자 남은 것은 오로지 사샤뿐이었다. 멍청이에 도돌이표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여자. 사샤는 그제야 그가 자신을 시험해 본 것임을 알았다. 그것이 두 번째 수업이었음을 말이다.
일부러 자극한 거다. 감정적으로 무너지도록 아주 조금씩 갉아먹은 거다. 눈을 뒤집으며 화를 낼 때까지. 사샤는 그가 두고 간 신문을 집어 들어 기사를 읽었다. 보반의 불임에 관한 기사는 한 줄도 없었다. 눈앞에서 뻔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완벽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신문을 다시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단 한 줄도 의심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패배였다. 너무나도 완벽하여 분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
그날 저녁, 요새는 분주했다. 네피란에서 가장 잘나가는 재즈 가수가 자신의 밴드를 데리고 온 것이다. 도로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원피스를 꺼내 입고 자신의 영롱한 피부에 잘 어울리는 진주 귀걸이를 했다. 가슴골에 향수를 뿌리고 붉은 립스틱으로 무장을 한 뒤 그녀는 곧바로 ‘홀’로 향했다.
홀 안은 이미 많은 군인들로 북적였다. 크고 우아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화려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술잔에 저마다 선호하는 술을 가득 담은 채 공연을 기다렸다. 뭇 사내들의 시선이 홀로 들어서는 도로시에게로 향했다.
안녕, 도로시. 안녕, 자기. 오늘 근사하네. 이곳저곳에서 감탄하고 유혹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각또각, 그녀의 새하얀 구두 굽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홀의 대리석 바닥에 울렸다.
“소장님.”
그녀는 약속한 자리 앞에 서서 요한을 향해 인사했다. 도로시보다 계급이 낮은 군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관을 맞이했다. 턱을 괸 채 양주잔을 빙빙 돌리던 요한은 흘깃 시선만 올려 저를 부르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도로시.”
“여기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지.”
요한이 미소로 허락했고 도로시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내 중 하나가 그녀의 의자를 매너 있게 당겨 주었다.
“술은 뭘로 하겠어? 와인? 위스키? 맥주?”
“와인으로 하겠습니다.”
요한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와인잔을 가져다주었다. 모두 목에 군번줄을 매고 있었으나 사복이어서 계급이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일일이 관등성명을 확인하는 것도 자리에 맞지 않았다. 도로시는 그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요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디터 소령님이 안 보이시네요.”
“그치는 음악을 별로 즐기지 않거든.”
음악뿐이랴. 연극도, 영화도, 공연도, 미술도 즐기지 않았다. 그는 독서도 즐기지 않았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탐독하는 것이라고는 도첸의 사상과 국가론, 그 외에는 군의 규율집뿐이었다. 요한의 말은 디터가 이 공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의 옆, 빈자리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소란하던 장내가 갑작스레 침묵에 잠겼다. 기묘할 정도로 순식간에 잦아든 정적이었다. 도로시는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프레도 보반과 함께 들어선 여자. 그녀는 금욕적인 하얀 폴라티에 도발적인 붉은색 펜슬스커트 차림이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렸고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은 단아했으며 군중을 돌아보는 녹색 눈동자는 에메랄드빛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그녀는 보반의 약혼녀였으며, 요한의 포로였고 또 도로시의 환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장내의 모든 사내의 마음을 앗아 간 비너스였다.
모자를 쓴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벗었다. 술잔을 들고 있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놓거나, 혹은 놓쳤다.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두가 그를 따라 일어났고 그녀는 보반이 이끄는 대로 테이블을 가로질러 곧장 요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커다란 홀이 그토록 삽시간에 텅 빈 것처럼 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샤는 저를 주목하는 시선에 얼어붙었다. 보반이 끌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한 발짝도 떼지 못했을 거다. 그녀는 도로시처럼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누군가의 시선도 받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었고 더욱이 지난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혹시나, 누군가가 자신을 안뜰에 서 있던 그 지저분한 붉은 머리 여자라는 것을 눈치챌까 두렵기까지 했다.
“보반 의원님.”
요한이 격식을 차려 보반에게 인사하고 곧바로 사샤를 쳐다보았다.
“사샤 양.”
“…….”
사샤는 그의 인사에 미간을 구겼다. 집어치워, 요한. 너는 한 번도 내게 그런 식으로 격식을 차린 적이 없잖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다. 사샤는 그것을 삼키려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믿을 리가 없어. 아무리 밤 도깨비처럼 어둠 속에 숨어 다녔다 해도 아무리 살을 찌우고 머리색을 바꾸었다고 해도, 이런 연극에 속을 리가 없어. 분명 누군가는 알아볼 거야. 이런 터무니없는 연극에 속지 않을 거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그녀의 믿음과는 달랐다. 그녀를 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을 증명했다. 피비린내에 흥분한 짐승 같던 군인들의 눈은 그녀를 향해 호감과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한 듯이.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샤 양.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우십니다.”
테이블의 누군가 용기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청년은 순진하고 무구한 눈동자를 빛내며 얼굴을 붉혔다. 그뿐만 아니라 사샤의 눈빛이 닿는 어느 남자나 그와 같은 얼굴을 했다.
“사샤. 이쪽으로.”
보반이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요한의 바로 옆자리였다. 사샤는 얼떨떨하게 그곳에 앉았다. 요한이 그 후 착석했고 곧 그를 따라 모든 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보반이 사샤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네피란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밴드라고 하더군요.”
“네. 아마도요.”
마침 사용인이 보반과 사샤의 잔을 가지고 와 병을 보여 주며 말했다.
“1885년산 바우어 와인입니다.”
“바우어 와인이라면…….”
보반이 깜짝 놀라며 뒷말을 삼켰다. 요한은 제 입술을 만지며 사샤에게 물었다.
“와인을 좋아하시는지요?”
“아니요.”
사샤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불손한 태도에도 상관하지 않고 요한은 사용인에게서 와인을 가지고 와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코르크 마개를 따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오래전 이곳이 도첸의 빅토리아가 아닌 네르아였을 때, 이 성에 살던 마지막 왕족이 주문했던 와인 컬렉션 중 하나죠.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는 이곳 지하 깊숙한 곳에 나무 박스째 보관되어 있었답니다.”
퐁, 경쾌한 소리를 내며 코르크 마개가 열렸다. 요한은 먼저 사샤의 잔을 채웠다. 그녀를 보는 눈빛이 부드럽고 유쾌했다.
“약소하지만 결혼 선물입니다. 사샤 양.”
사샤에게 그것은 도발의 의미로 읽혔다. 그녀를 대놓고 깔보고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그것은 유혹으로 들렸다. 그것도 배불뚝이 늙은 약혼자가 있는 아름답고 앳된 젊은 처녀를 향한 배덕한 유혹. 사샤와 요한의 관계를 아는 도로시에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은 그녀를 위한 자리였다. 자신이 요한에게 부탁해 마련한 자리이니 적어도 이 자리에서의 주인공은 저여야만 했다. 다른 사람에겐 아닐지라도 요한만은 그래야 마땅했다.
그가 이 자리에 사샤와 보반을 초대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선전을 위해 이용해 먹기 위한 연극이라 해도 설마 그녀를 이곳에, 그것도 이런 식으로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도로시에게 있어 사샤란 그저 요새에 붙잡힌 포로 중 하나일 뿐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경멸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을지언정 한 번도 사샤를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자리에 들어오는 순간 주인공은 그녀였다. 요한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자리 같았고, 자신은 그저 그 테이블에 놓인 장식용 꽃과 다름없는 들러리가 된 것 같았다.
“정말 귀한 술이군요.”
보반이 황홀한 눈으로 제 잔에 담기는 뭉근한 핏빛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샤의 눈은 차디찼다.
“맛보시죠. 풍미가 아주 깊습니다.”
“…….”
요한이 그녀에게 잔을 밀어 주며 권했다. 선뜻 잔을 들지 못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보반은 킁킁 코로 냄새를 한 번 맡아 보더니 입속 가득 와인을 넣고 그 향과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음처럼 콧소리를 흘리고 감탄했다.
“정말 좋군요. 사샤. 먹어 봐. 정말 맛이 좋다네.”
“…….”
보반의 권유에 사샤는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더니 냄새를 한 번 맡고 입술을 적실 만큼만 살짝 댔다가 곧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낯선 환경을 경계했다. 낯선 환경에서 찾아오는 낯선 음식은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지내 온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당신은 새의 모이만큼 먹는군요.”
누군가 키득대며 농담했다. 주변의 남자들이 모두 조금씩 키득거렸다. 그들은 그저 호기심과 유쾌함뿐이었다.
“와인은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저런, 보반 의원님이 한 번도 사 드린 적이 없던가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사내 한 명이 끼어들어 물었다.
“…….”
사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듣기로 사샤 양의 술버릇이 아주 고약하다고 하던데, 맞나요? 의원님?”
도로시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미소와 눈빛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요한과는 전혀 달랐다. 요한의 그것은 등골이 오싹하게 다가왔으나 도로시의 것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찔러 댔다.
“아…… 그것은…….”
보반이 더듬거렸다. 도로시는 사샤 로랑이 얼마나 순진한 여자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절하고 또 간절하게 제 손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기를, 그게 아니라면 자기 자신이라도 죽일 수 있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녀는 닭의 목도 제대로 비틀지 못했다. 죄악감에 못 이겨 구역질을 하던 여자다. 울며불며 몸을 떨던 여자다. 자유를 주었더니 결국 하는 일이라고는 당근을 들고 마구간을 찾아가는 일이다.
사샤는 닭장 안의 닭 같은 존재였다. 발버둥 쳐 보았자 그녀는 요한이 기르는 가축과 다름이 없는 신세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요한이 그녀를 번듯하게 꾸며 놓아도 그것은 분명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샤는 요한에게 가축과 같은 가치만 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했다. 분명히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도로시는 그렇게 믿었다.
“술에 취하면 옷을 벗는 습벽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병사들은 다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헛기침을 해야 하는지. 보반도, 사샤도 당황했다. 무어라 대꾸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은 누구보다도 저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욕을 당해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물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세간에 그 둘은 불륜. 아둔한 남자와 그를 갉아먹는 창녀 같은 어린 여자일 뿐 아닌가. 염치를 아는 자라면 마땅히 명예가 더러워지는 일이었고 또,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랑 같은 습벽이 있군요.”
요한이 끼어들었다. 그는 양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다소 느슨한 태도로 말했다.
“나도 술에 취하면 옷을 벗거든요.”
“거짓말 마세요! 소장님! 소장님이 술에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사내 하나가 깔깔거리며 손사래 쳤다. 이제야 군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왁자지껄 다른 이들이 끼어들었다.
“난 본 적이 있어. 소장님이 술에 취해서 성벽을 타는 거 말이야!”
테이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술과 금지된 장난에 관해서는 모두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난 술에 취해서 성벽을 타는 것보다 내 암말을 타는 걸 더 좋아해.”
그가 응수했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홀딱 벗고 나타나면 암말이 흥분해서 콧김을 뿜지.”
“맙소사! 소장님!”
다들 웃으며 탄식을 흘렸다. 요한도 뭇 사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낄낄거렸고 사샤와 보반만이 그 분위기에 함께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얼굴을 붉혀야 하는지 모를 뿐이었다.
“내 암말을 본 적이 있지 않나요? 사샤 양?”
“……네. 있어요. 돌시…….”
도로시가 먹던 맥주를 뿜었다. 병사 중 하나가 흥분해 물었다.
“그 암말의 이름이 돌시였어요?”
“소위님! 이건 정말 대단한 우연인데요!”
“…….”
사샤는 왜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웃는지 처음에는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후 사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듬더듬 물었다.
“……혹시 이름이 도로시인가요?”
도로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붉게 달아오른 도로시의 얼굴을 요한은 흥미롭게 지켜보며 쐐기를 박았다.
“그게, 내가 자네의 이름을 아주 잘 기억하는 이유지. 도로시 소위.”
“…….”
사샤는 이제 그녀의 이름을 안다. 장교의 이름은 도로시였다. 요한의 암말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샤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보았다. 붉어진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자못 유쾌했다.
“공연이 시작하는군요.”
그가 양주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쳐다보지 않아도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샤를 향해 하는 것이다. 그녀를 보지 않고도 그녀의 시선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사샤의 시선을 무대로 이끌었다.
스팽글이 잔뜩 달린 화려한 의상을 입은 재즈 가수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군인들이 손뼉을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길게 찢어진 보라색 치맛단 사이로 윤기 나는 허벅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자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던지고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묵직한 첼로 베이스 소리를 시작으로 끈적한 음악이 흘렀다.
사샤는 음악을 잘 알지 못했다. 음악을 알고 느끼기에는 사는 것이 너무 고되었다. 그녀는 그 대신 새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에서 위안을 찾곤 했다. 사샤에게는 그것이 곧 음악이었다. 그러나 가슴을 둥둥 울리는 베이스 소리, 간지럽히는 듯 매끄럽게 구르는 드럼 소리, 촉촉한 피아노와 그보다 한층 더 젖어 드는 여자의 깊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 본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게 음악이구나. 라디오를 타고 나오는 정제되고 잡음이 섞여 귓가에 스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날것이 되어 심장을 뛰게 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요한의 옷깃을 쥐었다.
등 쪽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를 쳐다보던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사샤가 테이블 아래, 그의 블레이저 뒤 단을 움켜쥐고 있었다. 넋이 빠진 얼굴에, 벅찬 듯 몰아쉬는 숨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어린아이 같았다. 벌어진 사샤의 입에서 단 향이 났다. 필시 바우어의 포도 향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바로 했다. 재즈 싱어는 그를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요한은 답례로 양주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여자가 윙크를 했다. 요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닳고 닳은 남자는 닳고 닳은 여자의 유혹을 능란히 받아 냈다. 그리고 그러는 내내 아이처럼 제 옷깃을 잡고 있는 사샤의 손길은 모른 척 놔두었다. 그녀가 스스로 놓을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
공연이 끝난 후 가수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요한의 테이블로 왔다. 화장도 의상도 갈아입지 않고 다가와 그녀는 씽긋 웃으며 물었다.
“공연은 마음에 드셨나요?”
“그럼. 아주 좋았죠.”
요한은 대충 대답하고 테이블의 사람들을 차례대로 그녀와 인사를 시켜 주었다.
“이분은 네피란에서 모셔 온 가수 진 페터 양, 이쪽은 보반 의원과 그의 약혼녀인 사샤 양.”
“어머, 안녕하세요. 기사를 통해 접했답니다. 결혼 정말 축하드려요.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라니,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쪽은 로들러 일병, 라이언, 짐, 그리고 이쪽은 내 암말과 이름이 같은 도로시 소위.”
사람들이 키득댔다. 진은 테이블에 도는 저열한 분위기를 파악하고선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나. 그것참 영광스럽겠다고 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사내들이 숨을 죽여 킬킬거렸다. 질 낮은 희롱거리가 된 것을 더는 참지 못하고 도로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은 곧 울음이 터질 듯 울상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녀가 사라지자 사내들은 너무 심했다며 서로를 질책하면서도 킬킬거렸다. 도로시가 모욕당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녀가 사샤를 모욕하려 했기 때문에. 사샤는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모욕하는데 왜 요한이 나서서 그녀를 모욕하는가.
사샤는 눈을 굴리며 생각을 쥐어짜다가 요한을 올려 보았다. 그는 느긋하게 양주를 마시다가 사샤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딱 사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되갚아 주기는 이렇게 하는 거야. 사샤.”
“…….”
그리고 그는 윙크했다.
이것은 수업의 일종일까? 그는 어떻게 응수하는지에 대해 몸소 시범을 보인 것일까? 아니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보반 의원의 약혼녀라는 역할에 맞게 예의를 차려 저를 모욕하려는 부하 직원을 혼낸 것일까? 사샤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둘이 있을 땐 신나게 놀려 대다가 남들이 있으니 같은 편인 척하는 것도 아닐 터였다. 그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이유는 그저 ‘재미있어서’였다. 그러니까 연유를 파악하고 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 가장 쉬웠다. 어쩐지 목이 타 사샤는 와인을 한 모금 꿀꺽 마셨다. 단 포도의 향과 쓴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보반은 진에게 군침을 흘렸다. 처지를 가리지 않는 호색한의 본능은 자리도 가리질 않았다. 그의 눈은 진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순도 높은 와인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곡선에 취한 것인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든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나저나 보반 의원님은 정말 행운아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이라니, 대체 어떤 점이 사샤 양의 마음을 끌었을까요?”
진은 익숙하게 요한의 무릎 위에 앉으며 물었다. 내친김에 요한의 양주잔까지 집어 들었다.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를 무릎에 앉힌 모습은 익숙한 듯 능숙해 보였다. 그녀의 팔이 요한의 목에 감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사샤에게 몰렸고 그녀는 보반을 쳐다보았다. 입만 뻐끔대는 것이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사샤는 어색하게 와인 잔이 긴 목을 매만졌다.
“글쎄요.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네요.”
“그냥 무작정 사랑에 빠졌단 이야긴가요? 어머, 로맨틱해라.”
꿈보다 해몽인 반응이었다. 진은 감탄하며 미소 지었다.
“여기서 결혼한다니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이곳의 성당은 정말이지 아름답기로 유명하거든요. 네피란에도 웅장하고 근사한 성당이 많지만 이곳만큼 아름답지는 않거든요. 사샤 양이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을지 너무 기대돼요. 하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라면 뭘 입든 다 어울리겠지만요. 안 그런가요? 소장님?”
둘은 아는 사이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이일까? 친밀한 말투와 스킨십을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그들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요한은 누구나 가까운 듯 또 멀게 대한다. 형체 없는 연기를 잡으려 드는 것처럼 그의 생각과 감정에는 형체가 없었다. 그러니 선뜻 둘이 친밀한 사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는 것이다.
연기처럼 형체가 없는 자라니. 사샤는 자신의 생각을 곱씹었다. 그보다 더 은밀하고 근사한 수식어가 어디에 있는가. 맨 처음 국경을 건너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지금 요한이 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이토록 허무하게 잡혀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올리고 마음에도 없는 선전을 위해 인형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문뜩 요한을 도발하고 싶었다. 그가 어쩌지 못하는 수를 놓고 싶었다.
“사실 웨딩드레스는 별로 관심 없어요. 어차피 하얀색 원피스일 뿐인걸요. 어쨌든 장소를 빌려주신 것에 대해선 정말 감사드리고 싶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저와 버진로드를 걸어 주시는 것도요.”
어차피 모든 것은 거짓이 아닌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거짓을 이야기하면 된다. 설사 그것을 요한이 부정한다 해도 또 어쩔 텐가. 보반의 미친 아내가 되면 그뿐이다.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손해를 보는 이가 있다면 이 모든 각본을 몸소 쓰신 요한뿐이다.
“소장님이 버진로드를요?”
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피로연에서 신부와 춤도 추셔야겠네요. 아버지 대신이요.”
정말이지,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요한이 신부와 버진로드를 걷는 것도 그랬지만 피로연에 아버지를 대신해 춤을 추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보반과 역할이 바뀌어야 맞았다. 보반이야말로 신부와 버진로드를 걷고, 피로연의 마지막 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맞았다. 아버지 대신에 말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사람들이 피식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요한은 곤란함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테이블의 느긋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사샤 양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거든요. 특히 친오빠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만 포탄에 맞아 사지가 찢겨 죽고 말았죠.”
요한은 진실에 거짓을 더했다. 아니 진실에 과장을 더한 건가. 어찌 되었건 제 오빠를 잔인하게 죽인 그의 입은 사샤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샤의 도발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황된 것이라면 요한의 도발은 진실에 가까워 더 약이 오르게 한다.
“저런.”
사람들이 탄식했다. 특히 진은 아주 슬픈 얼굴을 하며 사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정말 유감이에요. 사샤 양. 특히 오빠에겐 도첸인 모두가 큰 빚을 졌어요. 사샤 양은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진이 묻자 군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특히나 격앙되어 보이는 이가 잔을 들며 외쳤다.
“그를 위해 건배합시다!”
“사샤 양의 결혼과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도요!”
진이 덩달아 잔을 들며 외쳤다. 마지막으로 요한이 덧붙였다.
“존 로랑을 위해.”
“…….”
사람들은 잔을 부딪쳤다. 보반의 독촉에 사샤도 덩달아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건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러면 오빠가 정말로 포탄에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 사샤는 잔에 입도 대지 못했다. 다만 관자놀이에 닿는 요한의 시선에 저 혼자 분통을 터트릴 뿐이었다.
공연은 끝났고 밴드도 완전히 무대에서 내려갔다. 진은 요한의 무릎에서 몇 마디 담소를 더 한 후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네피란에서 내일 또 공연이 있거든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진이 생긋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페터 양? 기차역으로 가신다면, 제게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겠습니까?”
보반이 개처럼 헐떡이며 물었다. 진은 제 도톰한 입술을 매만지며 우울한 얼굴을 했다.
“저런.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 밴드도 같이 이동해야 해서요. 보반 의원님의 리무진은 너무 작을 것 같군요.”
보반은 다른 밴드를 태울 생각은 없었다. 제 옆자리에 오로지 진 페터만을 태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진은 여지를 주지 않고 거절했다. 도무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여서 보반도 예의 바르게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아주 잘 다루었다. 사내라면 무조건 목석처럼 구는 사샤와는 전혀 달랐다. 요한의 무릎에 앉은 것도 그저 팬서비스 차원의 행위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요한의 침실에 숨어들어 갈지 어떻게 알겠는가. 또 그렇다고 해도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샤는 왜 자신이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저가 경멸스러웠다. 원래 증오란 감정은 집착을 키우는 것이라고 납득해 보려 해도 자신에 대한 경멸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늦은 밤, 보반이 복도를 거닐며 넌지시 말했다.
“2주 후면 결혼이네.”
사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게 그를 따라 걷고만 있었다. 보반의 팔에 손을 얹고서도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사샤는 보반을 배웅하기 위해 걷고 있었음을 곧 기억해 냈다. 눈동자가 기민하게 좌우를 살폈다. 그들을 에스코트하는 몇몇의 군인이 앞에 있었고 뒤에는 요한이 있었다. 진이 여보란 듯 그의 팔에 밀착한 채였다. 둘은 그들만의 이야기로 즐거워 보였다.
기분이 상했다. 그가 즐거운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싫었다. 저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그가 즐거운 것이 화가 났다. 저의 심기는 마음껏 어지럽혀 놓고 그는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어 보이는 것에도 분통이 터졌다. 왜 나는 그에게 대적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질 못하나. 그에게 있어 저의 존재란 네피란에서 온 저 재즈 가수보다 못한 듯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에겐 진심으로 격식을 차리는 것 같았다. 저를 대할 때처럼 가식적으로 예의를 차리는 대신 말이다.
“사샤.”
보반이 그녀를 불렀다.
“내 이야기 듣고 있나?”
그가 뭐라고 했지? 아. 그래. 2주 후에 결혼이라고. 맞아. 그 이야기를 했어.
“네. 듣고 있어요.”
“그 이후의 이야기는 혹시 들었는가? 결혼식 이후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자네는 나보다 요한과 접촉할 기회가 많을 텐데.”
“아니요.”
“그렇군. 그렇다면,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물어볼 수 있겠나? 내가 묻기엔 영 꺼림칙해서 말이야.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네. 노력해 볼게요.”
“고맙네. 고마워. 일주일에 두 번 나는 이곳에 방문할 수 있다네. 그러니 그때까지 부탁하네. 요새 영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이렇게 살다간 조만간 제 명에 못 살지 싶어.”
어차피 우리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해. 우린 포로잖아. 사샤는 터져 나오는 비소를 삼켰다. 보반은 요한을 두려워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렇다면 사샤 자신은 요한을 두려워할까?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녀는 요한이 두렵지 않았다. 그가 소름 끼치게 무서운 남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보반이 그를 무서워하는 것과는 달랐다.
사샤는 그를 증오했다. 증오하기에 무서움이 없었다. 그 자리는 괴로움이 차지했다. 그리고 어떤 뜨거운 굶주림. 해소되지 못하는 갈증이 존재했다. 그것이 사샤로 하여금 그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가 웃는 것이 싫고 그가 행복한 것이 싫고 그가 다정한 것이 싫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단단한 것이 싫었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싫었다. 그가 인간다운 것이 싫었다. 그래. 그가 인간인 것이 싫었다. 그는 늘 무서워야만 했다. 괴물처럼 끔찍하고 잔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사샤가 바라는 그의 모습이었다. 보반에게 그렇듯 그는 사샤에게도 무서워야 했다. 오줌을 지릴 만큼, 벌벌 떨 만큼 무서워야 했다. 그래서 그가 웃을 때, 숨을 쉴 때, 농담을 할 때, 사람들과 어울릴 때 그녀는 절망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녀는 고통에 죽어 갔다. 둘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가 웃을 때 사샤는 울어야 했다. 사샤가 웃을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가 울 때뿐이리라.
사용인이 보반의 차를 아치 앞으로 가져왔다. 그는 감정 없이 사샤의 뺨에 키스했다. 그것을 받는 사샤 역시 형식적이었다. 그나마 어두운 달빛이 무감각한 두 남녀의 얼굴을 가려 주어 다행이었다. 그에 비해 진은 달빛에도 눈부신 미소를 날리며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는 요한에게 했듯이 사샤와도 양 뺨을 맞대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네피란으로 놀러 와요 사샤. 꼭이요. 내가 네피란에서 제일가는 재즈 클럽을 모시고 갈게요.”
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활짝 웃었다. 빛이 났다. 행복해 보였다. 저는 그늘에 있는데 그녀는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손을 맞잡아도, 포옹해도 그 빛은 사샤에게 스며들지 않았다. 그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유리 막에 갇힌 이처럼 마주 보아도, 맞대어도 그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세상의 것이었다.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었다. 네르아를 떠난 이후 늘 그랬다. 그녀는 따듯한 날에도 서늘함을 느꼈다. 심장에 닿는 시린 바람은 계절과 시간에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늘 추웠고 늘 결핍되어 있었다. 사샤는 그것이 환경보다는 심성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불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면에 그런 환희나 열정이 없었다. 인생을 뜨겁게 해 줄 발화점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고단하고 짐 같은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보반을 배웅하고 사샤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
가만, 그런데 방까지 어떻게 갔더라? 뒷문에서 방까지 가는 길은 익혀 뒀지만, 정문에서 방으로 가는 길은 아직 익히지 못했다. 요새의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두 번 왕복한다고 해서 기억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와.”
요한이 그녀를 스쳐 가며 말했다.
“…….”
“혼자 못 찾잖아. 바래다줄게.”
그는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었다. 사샤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갈수록 인파가 적어졌다. 종국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 수 있어.”
이제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계단을 마저 올라 복도의 끝에 가면 곧바로 사샤의 방이었다. 오래전 장교의 1인 병실로 쓰이던 곳.
요한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사샤가 그로부터 서너 계단 떨어져 멈추고 그를 올려 보았다. 아주 짧은 정적이 일었다. 먼저 깬 것은 사샤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묻고 싶던 것부터 물었다.
“도로시에겐 왜 그랬어?”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본을 보여 주려고 그랬지. 네가 멍청하게 앉아 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어.”
“그래서 내게 버진로드를 걷는 징벌을 내린 건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도로시의 얼굴에 술이라도 끼얹기를 바랐나 보지?”
“아니.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랬지. 그냥 그 잘난 얼굴에 금이라도 가려나 싶어서.”
요한은 뒷짐을 진 채 웃었다. 그는 더 높고, 더 크고, 더 견고하고, 더 신비해 보였다. 사샤는 그를 자극하는 데 실패했다. 완벽한 거짓으로는 그를 자극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이제 한 수 배웠다. 거짓은 언제나 진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사샤는 그를 자극할 수 없었고, 그는 사샤를 자극할 수 있었다. 매우 성공적으로 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당신의 실체는 뭘까. 당신이 지금껏 한 이야기 중 어느 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진실일까. 사샤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조차 눈앞이 아찔했다.
“옆구리는 좀 어때?”
“…….”
“그러고 보니 내가 찔렀잖아.”
“도로시가 정성 들여 꾀매 줬지. 며칠간 열이 났고 상처 부위가 욱신대서 진통제를 먹었고.”
“…….”
“그 정도면 만족이 될까?”
요한이 계단을 한 걸음 내려왔다 시선이 한 칸 아래로 낮아졌다. 그의 푸른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앝은지, 아니면 깊은지. 그러나 사샤의 눈동자는 아주 읽기 쉬웠다. 그녀의 눈동자는 늘 일렁였다. 춤을 추듯이. 고통에, 괴로움에, 슬픔에, 증오에. 그는 말한다.
“참으로 일찍도 물어봐 주는군.”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 설마 살이 찢어졌을 줄 몰랐어.”
“근육도 찢어졌어. 몸을 움직일 땐 아직도 아프다고.”
그래서 그녀는 대답했다.
“그럼 아픈 척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조금은 기뻐했을 것 아냐.”
내 고통이 곧 너의 기쁨이라고. 요한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적어도 그녀는 일관된 여자였다. 앞에서는 웃다가 뒤에 가서 칼날을 가는 여자도, 앞에서는 울다가 뒤에 가서 웃는 여자도 아니었다.
“보반이 결혼식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해. 궁금해 죽겠는데 당신이 무서워서 입도 뻥긋 못 하겠나 봐.”
“그런데?”
그의 한쪽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뭔가가 언짢은 것이다…….
“결혼 이후의 계획을 알고 싶어. 그 이후에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신혼여행을 가겠지.”
“…….”
“그 이후엔 신혼집에서 알콩달콩 잘 살겠지.”
사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실질적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묻는 거야! 매스컴에 나오는 이야기들 말고! 정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묻는 거라고!”
“너와 보반은, 신혼여행을 갈 거야. 정말로. 그 이후에 신혼집으로 들어갈 거야. 정말로.”
“거짓말.”
“…….”
그녀는 얼굴을 더 구겼다. 계단 난간을 부여잡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힘을 주어 손끝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았다.
“연극이라고 했잖아. 매스컴에 쓰일 선전 도구라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왜 그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해!”
“가능한 사실에 근접해야 하니까. 그래야 사람들이 알고서도 모르는 듯 속고, 모르면서도 아는 듯 속을 것 아니야.”
“…….”
“곧 울 것 같은 얼굴이네. 사샤.”
사샤는 그의 뺨을 갈기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후려치기 전에 그에게 잡혀 질질 끌려갔다. 사샤는 계단을 돌아 벽으로 밀렸다. 쿵. 어깻죽지가 단단한 시멘트에 부딪혔다. 얼얼한 충격이 척추를 울렸다. ‘윽’ 하는 신음이 절로 났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건 말이야. 네가 아직도 분노한다는 거야. 몇 번이나 찬물을 맞아도 끓어오르는 그 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야?”
“너 때문이잖아. 너! 너 때문에! 네가……!”
사샤는 이성을 잃고 소리 질렀다. 텅 빈 복도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요한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
그는 주변을 살폈다. 장교의 병동에 공식적으로 입원한 이는 없지만 아무도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남몰래 빈방을 찾아다닐 만한 젊은이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사샤는 도리질을 하며 계속 웅얼거렸다. 그의 손에 막혀 나오지도 않는 비명을 그녀는 끝까지 질러 댔다.
“우우우! 우웁! 우우우우웁!”
네가 내 눈앞에 보여서! 네가 날 자극해서! 네가 하는 그 모든 말들! 네 표정들! 그게 끊임없이 나를 화나게 하잖아! 증오하게 하고 그래서 폭발하게 하잖아!
“오늘 사람들이 네게서 눈을 못 떼더군.”
요한이 분노에 찬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손으로 막아 비틀린 입술을 보지 못해서인지 눈은 슬픈 빛을 띠었다. 뜨겁고 처연한 색이었다. 요한의 눈가가 푸르르 작게 경련했다. 모르겠어. 사샤. 왜 갑자기 갈비뼈 사이가 찌르르한지. 울컥 치미는 무언가가 있었다. 골반을 타고 등줄기로 치밀어 올라 등을 저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요한은 그 정체를 몰랐다. 그저 아주 기묘한 느낌. 오싹하고 피부가 떨리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넌 아주 좋은 도구가 될 거야. 그리고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너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사샤는 도리질을 했다.
“이왕이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
그녀가 다시 웅얼거렸다. 타오르는 눈빛을 보니 욕설이나 그 비슷한 것을 내뱉는 것 같았다.
“아쉽군. 나는 네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데 말이야.”
“…….”
“늘 이렇게 핀이 뽑힌 수류탄처럼 굴면 결국 손해 보는 건 너야. 모두가 널 위험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건 네 복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이만큼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때도 된 거 아닌가?”
굴복을 하느냐, 아니면 굴복을 시키느냐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 안에서 정말 그가 바라는 것은 사샤가 현명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멍청해져서 저에게 쓸모 있는 자가 되는 것일까. 사샤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요한이란 자가 독인지, 약인지, 득인지, 실인지. 증오를 부추기고 도발하는 그는 사샤를 죽음으로 이끄는 망자의 길잡이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삶에 대한 애착을 지펴 그 영혼을 갉아먹으려는 악마의 하수인인지 말이다.
요한이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사샤는 숨을 몰아쉬었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타고 뜨거운 입김이 번졌다. 증오가 뒤덮인 흥분한 숨소리. 경련하는 어깨. 요한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은 물러서지 못했다. 그는 문뜩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당신이 있어 줘야겠어.”
사샤의 조용한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사위를 둘러보던 요한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멈추고 말았다.
“신혼여행이든, 신혼집이든 나는 당신이 있어야겠어.”
“……잘못 들으면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는 진지한 톤으로 농을 던졌다. 그러나 사샤는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매일매일 그 얼굴을 보며 다짐해야겠어. 당신을 죽이겠다고. 매일. 매시간, 당신을 증오해야겠어.”
“…….”
마치 숨 쉬는 것같이. 요한의 눈가가 다시 잘게 경련했다. 그래. 너는 나를 숨 쉬듯 증오하려고 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끈일 테니.
“보반과 단둘이 있게 된다면 혀를 깨물고 죽겠어. 당신이 준 단도로 내 목을 찌를 거야.”
“보반과 단둘이 있을 일은 없어. 그 집엔 사용인들이 있을 테고 사용인들은 모두 내 수하들일 테니.”
유모, 가정부, 정원사. 잡부, 운전기사 누가 되었든 모두가 요한의 끄나풀로 채워질 것이다. 그녀는 24시간 감시당하며 먹고, 자고, 씻고 옷을 입을 것이다. 단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삶에서도 그리고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 주위가 너무 어두워. 망할 달빛조차 들지를 않아. 그리고 너에겐 달콤한 증오의 향기가 나.
“하지만, 한번 고려해 보지.”
“…….”
요한은 이도 저도 아닌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뚜벅뚜벅 그의 군홧발이 계단을 동그랗게 울렸다. 사샤는 벽에 기댄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막혔다가 간신히 트인 것처럼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슬픈데 이상하게 웃고 싶었다. 아픈데 이상하게 즐거웠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정체 모를 것은 너무나 거대했다. 사샤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 숨이 가빠지는지 왜 슬프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는지 그녀는 몰랐다.
그녀는 웃는 듯이 울었다. 또한 우는 듯이 울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두려웠다. 온몸이 떨릴 만큼 무섭고 또 아팠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불꽃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파도 같은 것. 아니면 아주 빠르게 차오르는 바닷물 같은 것. 사샤는 침수되어 가고 있었다. 붉고, 시린 것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