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단편야설

한 편 완결 소설

성인소설 목록

최신 단편

야설 읽기
밍키넷 소설
토스트 메세지 나오는곳
텔레그램 공식채널

밍키넷 공식보증업체

11화 11화


10. 도로시는 그날의 치욕을 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하찮은 이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요한이란 것에 더욱 충격이 컸다. “네가 해 줄 것이 있어. 도로시.” 요한이 푹신한 사무용 가죽 의자를 좌우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가 부르는 것이 저의 이름인지, 암말의 이름인지 그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차마 요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제 발끝을 쳐다보았다. “네.” “사샤의 들러리가 되어 주어야겠어.” 도로시는 고개를 휙 쳐들었다. 요한의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소리를 그녀는 입술을 말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햇살에 그의 모습이 새하얗게 바래 있었다. 백기 같은 그 모습이 어쩐지 오싹했다. 그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나면 빛날수록 더 그랬다. “생각해 보니 신부의 들러리가 하나도 없더군. 그래서야 좋은 결혼사진이 나오지 않겠지.” “……왜 하필…….” 왜 하필 저인가. 요새에는 여군들도 많고, 여종들도 많다.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들러리가 있을 터였다. 자신이 아니라. “글쎄, 이유라면 네가 가장 그 여자에 대해 잘 알잖아. 몸소 돌보아 왔고.” 아니. 사실 그 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사샤를 회복시켜 놓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래서 도로시는 그녀의 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혈압이나 체온 같은 몸의 컨디션에 대해서는 늘 신경 쓰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해서는 궁금해한 적이 없고, 그래서 그 여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사샤 로랑은 가끔은 연약해 보이고 가끔은 미쳐 보이고, 또 언제나 처절해 보였다. 그래서 사실 늘 거북했다. 포로라는 점을 빼고도 별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었다. “제 임무는 사샤 양의 몸을 회복시킨 이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지.” 요한은 책상 위로 값비싼 만년필을 또르르,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임무가 생겼고.” “…….” 도로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떻든 사실 요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찮은 쪽이었다. 그러나 그는 펜을 계속 굴리며 낯빛이 굳은 도로시를 응시했다. 침묵의 틈새로 긴장감이 물렸다. 도로시는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거부…… 거부하고자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요한이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거부할 권리가 없지. 도로시 소위.” 그의 말이 맞았다. 상명하복은 군대의 기본이었다. 거부할 수도 없었고 그런 티를 내서도 안 되었다. 조건 없는 복종만이 이곳의 절대적인 규율이다. 하지만 이대로 임무를 받아들이고 물러가기에는 억울한 것이 많았다. 특히 지난 재즈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소장님.” 그러니 이것만은 물어보아야 했다. “소장님은 저에게 사샤 로랑을 돌본 대가로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재즈 공연을 요청 드렸고 소장님은 네피란에서 가장 잘나가는 재즈 가수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저를 위한 보상이었던 것, 맞습니까?” 요한은 여전히 만년필을 굴리고 있었다. 굴러가는 만년필을 골몰하는 눈동자는 도로시를 쳐다보지 않았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게 어때. 도로시?” “그 자리에 왜…….” 그곳에 왜 사샤 로랑을 데려왔는가. 왜 그녀를 보호하고 저를 모욕했는가. 왜 모두가 나를 비웃게 두었는가. 그 자리가 자신을 위한 보상의 자리였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치고 올라오는 말들이 치기 어린 투정으로 보일까 도로시는 쉽게 내뱉지 못했다. 입안에서 잘근잘근 씹으며 좀 더 근사한 어휘를 생각하는 동안 요한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구르던 펜이 그의 손가락에 눌려 멈추었다. “너는 재즈 공연이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네피란에서 제일가는 밴드를 데려오겠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밴드를 데려왔고 그러면 너는 얌전히 입을 닫고 들었으면 되는 일이었어.” “그것은 정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군. 소위. 내가 너에게 그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어야 했나? 예를 들면 공화당 의원의 약혼녀를 모욕하는 네 장단에 같이 맞춰 주어야 했던가?” “…….” 그녀를 보반의 약혼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샤 로랑은 포로다. 그저 포로였다. 그것이 요한과 자신의 대척점이었다. “난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경멸하지. 네가 조금만 더 현명하게 굴었다면 나는 어쩌면 네 장단을 맞춰 줄 수도 있었을 거야. 어쩌면 날 매우 즐겁게 해 줬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너는 암말보다도 멍청했어. 그 자리에서 사샤 로랑을 모욕하는 건 바로 나를 모욕하는 거야. 왜냐하면 그 자리에 사샤 로랑과 보반을 초대한 건 바로 나였으니까.” 도로시는 고개를 떨궜다. 제 발끝을 쳐다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로시는 그가 사내로서 사샤의 편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억을 곱씹었다. 사샤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어땠던가. 그녀에게 와인을 권할 때의 말투는 또 어땠던가. 그것이 오해였던가. 아니 그때는 너무도 명확했다. 사샤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명백하게 남자의 것이었다. 아니, 아니던가. 그가 어떤 눈빛을 했더라. 명료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흐릿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지금 사샤 로랑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야. 나는 네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죄송…… 죄송합니다.” “내가 너처럼 모자란 사람을 요새에 계속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것도 장교로 말이야.” “죄송합니다! 소장님!” 도로시는 냉큼 허리를 굽혔다.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깊숙이. “군복을 벗고 요새를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해. 대화는 끝났어.” 도로시는 그에게 경례하고 서둘러 집무실에서 나왔다. 정말이지 숨 막히는 남자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란 자는. 그녀는 참았던 숨을 간신히 토해 내며 제 가슴을 쓸어 내렸다. *** 사샤는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당근을 가지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결혼을 위해 요새에 머무는 처지가 되었고, 그리하여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다니는 일을 관둘 수 있었다. 성의 밤과 낮의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성의 밤은 어두운 만큼 깊고 암울한 빛을 띠었다면 성의 낮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또한 웅장했다. 마구간으로 향하는 목초지에는 이름 모를 들풀들이 가득했다. 백발이 성성한 마구간 지기는 나무로 둘레가 쳐져 있는 넓은 들판에 몇몇 말을 풀어 두었다. 녀석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질 좋은 건초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갈색 종마의 털을 빗겨 주다가 다가오는 사샤를 발견했다. “뉘시오?” “아, 저…… 돌시를 보러 왔어요.” “아~” 노인은 가늘게 떴던 눈을 활짝 펴며 대번 그녀를 알아보았다. “로랑 양이시군요. 들은 기억이 납니다. 신문에서도 뵀습죠. 어이쿠. 실물이 훨씬 미인이십니다 그려~” 그는 모자를 벗고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구간지기 타리프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3대째 일하고 있습죠.” “저는 사샤 로랑이라고 해요. 돌시에게 당근을 좀 주려고…….” 사샤가 어색하게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타리프는 빙긋 웃었다. “고 녀석이 기다리던 게 아무래도 아가씨인가 보네요.” “돌시가요?” “예. 녀석의 표정만 봐도 알죠. 소장님이 다녀가시고 난 뒤에도 시무룩하니, 꼭 누굴 기다리는 것 같더라고요.” “…….” 설마. 나일 리가. “돌시는 마구간 안에 있습니다. 오늘 종일 기운이 없어 했죠. 따라오세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종마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고 솔을 양철통 안에 집어넣었다. 사샤는 마구간으로 이동하는 타리프의 뒤를 따랐다. “요한…… 그러니까, 소장님은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네. 자주 오시죠. 요새에 머무시는 동안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르세요. 시간이 되면 꼭 돌시를 데리고 산책하러 가시고요. 당신의 암말을 정말 아끼시거든요.” 그래. 그렇게 아끼다가 수틀리면 머리를 잘라 버리겠지. 타리프는 친절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는 이곳만큼 북적이는 곳도 없었답니다. 관리하는 말만 해도 수천 마리는 되었었죠.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참 많았고요. 그런데 지금은 스무여 마리가 전부예요. 이제는 네 발 달린 자동차가 말을 대신하고 있으니, 자리와 식량만 축내는 군마들을 누가 유지하려 하겠어요. 동료들도 다 떠나가고, 그나마도 소장님 덕분에 이 정도 규모라도 유지하며 제가 밥벌이를 하는 것이지요.” “소장님 덕분이라니요?” “남아 있는 말들은 모두 소장님의 것이랍니다. 한차례 전염병이 돌아 가축들이 죽어 나간 이후, 필요 없는 군마들을 모두 폐사 처분하라는 것을 소장님이 사들여 살아남았지요. 몇몇 말들은 팔기도 하고요. 죽이는 것보다야 새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 나으니까요.” “……” “기본적으로 소장님은 모든 말들을 다 아끼십니다. 물론 그중 돌시를 가장 좋아하시지요. 돌시는 이곳 종마로부터 얻은 새끼가 아니거든요. 전쟁 중에 잡아 온 야생마였지요. 여간해도 길이 들지 않아 죽이려던 것을 소장님이 길들이셨죠. 다들 포기하고 죽이려던 것을요. 아마 소장님이 아녔으면 녀석은 벌써 저세상에 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거죠?” “그럼요. 소장님이 그분밖에 더 있답니까?” “…….” 타리프가 말하는 자가 자신이 아는 바로 그 ‘요한’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믿기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타리프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그는 동물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위인인 듯 느껴졌다. 실상은 재미로 저에게 독을 먹이고, 게임으로 서로를 쏘는 상황을 방치하고, 제 욕망을 위해 인형처럼 사람을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는 이중인격자가 아니라면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비로운 주인, 누군가에게는 동물을 사랑하는 애호가, 또 누군가에겐 잔인한 미치광이, 또 다른 누군가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할 것이다. “제 조부님부터 이곳의 마구간을 지켰답니다. 저로서는 이것이 가업인 셈이죠. 아들놈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이 녀석이 네피란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도 돈을 벌 수 있다며 떠났지 뭡니까. 손주 놈에게라도 물려주면 좋겠는데 과연 그때까지 이곳이 유지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 변하는 속도를 보면 너무 빨라 무서울 지경이니까요. 요즘 젊은이 중에 누가 마구간에서 말이나 지키며 살고 싶어 합니까. 번듯한 옷을 입고 돈을 벌고 싶어 하지요. 그래도 우리 때에는 무엇을 하더라도 제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는 돌시의 앞에 섰다. 푸르르 투레질하는 녀석의 숨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구나. 누가 왔는지 좀 보려무나. 돌시.” 암말이 슬쩍 마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도로 머리를 숨겼다. 타리프가 그녀의 머리를 두드리며 웃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랍니다. 낯도 많이 가리죠. 그래도 보아하니 아가씨를 기다린 것이 틀림없군요. 보세요. 꼬리가 바짝 올라가 있잖아요. 기분이 매우 좋다는 뜻이랍니다.” “…….” 사샤가 마방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돌시가 따그닥 발소리를 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제법 그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녕. 돌시.” 인사를 하자 그녀가 푸르르, 다시 콧김을 뿜었다. 사샤는 움츠러들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타리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자꾸 겁을 먹는 것 같으니 녀석이 더 아가씨를 놀리는 겁니다. 본인이 더 서열이 높은 줄 알면 곤란하니까요.” 그 말에 사샤가 굽혔던 어깨를 폈다. 바구니를 뒤져 당근을 꺼내려 하니 타리프가 그녀를 만류했다. “당근도 너무 많이 주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러지 말고 돌시를 데리고 나가 보는 게 어떨까요? 작은 방목장에 풀어 놓고 아가씨에게 다가올 때만 당근을 주도록 해 보시죠.”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되고말고요.” 타리프는 기꺼운 목소리로 말하고 마방으로 들어가 돌시의 말굴레에 말고삐를 매었다. 그는 돌시를 어르며 방목장으로 향했고 사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말의 뒤에는 서 있지 말라는 말에 냉큼 타리프의 옆에 붙었다. 돌시는 계속해서 사샤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에 흥미를 보였다. 고개를 무심결에 그리로 돌리다가 몇 번이고 타리프의 제지를 당했다. 타리프는 작은 방목장으로 향했다. 대여섯 마리의 말이 들어가고도 넉넉할 만큼 큰 바로 옆 방목장과는 달리 서너 마리의 말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비좁은 곳이었다. 타리프는 그곳에서 돌시의 말고삐를 풀고 사샤에게 펜스 위에 앉아 있으라고 조언했다. 사샤는 그의 말대로 펜스 위에 앉아 방목장을 빙빙 돌기 시작하는 돌시를 관찰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백색의 말 갈퀴가 흔들렸다. 사샤는 그녀의 윤기 나는 모습을 쳐다보다 요한이 그녀를 탔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백마를 탄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보통 새하얀 색이라 하면 으레 순수하거나 깨끗하거나 고귀한 것을 떠올린다. 요한을 만나기 전까지 백색은 사샤에게 헌신과 청결의 상징이었다. 새하얀 병실. 새하얀 침구, 새하얀 앞치마, 새하얀 붕대……. 그러나 지금은 그것은 타락과 퇴폐의 상징이다. 요한이 그 상징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랬는데 특히나 그의 머리색이 그랬다. 사샤는 살면서 한 번도 그토록 백색이 타락한 자와 잘 어울릴거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어느새 돌시가 거리를 좁혀 왔다. “너 정말 새침데기로구나.” 다가왔으면서도 안 다가온 척 몸을 돌리는 태도란. 동물이라고는 사실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밖에 모른다. 고양이는 늘 도도하고, 강아지는 늘 발랄하고, 사샤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동물이라 해도 또 각자마다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말이라니, 말이란 그저 마차를 끌거나 사람을 태우고 경주를 하거나, 잡지나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존재였지 이렇게 가까이에 있게 될 줄 몰랐다. 게다가 설마 말이 각자 고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개중 하필이면 경계심 많고 낯을 많이 가리는 말을 만나 밀고 당기기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사샤는 당근 하나를 바구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자. 먹어.” 그러나 돌시는 쉽사리 당근을 가져가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돌리고 투레질만 할 뿐이었다. “아닌 척하긴. 어차피 너 이거 먹으러 온 거 다 알아. 어서.” 돌시가 고개를 돌리고 당근을 낚아챘다. 커다란 입에 당근을 단번에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사샤는 턱을 괴고 돌시가 맛있게 당근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넌 이렇게 사는 거 만족해? 요한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종일 마방이나 방목장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 말이야.” 돌시가 또다시 코를 킁킁거렸다. 사샤는 냉큼 당근 하나를 더 내주었다. “너랑 이름이 똑같은 장교가 있다는 거 알아? 금발에 아주 예쁘게 생겼고 또, 조금 심술궂어. 그런 여자인 줄 몰랐는데 말이야. 또,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한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마도.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사샤는 기계적으로 당근 하나를 더 집어 내밀었다. 돌시는 사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당근만 가져다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나 나나 비슷한 신세야. 우린 둘 다 방에 갇혀 있고 허락된 공간만 다녀야 하고 또 요한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잖아. 사실 네가 내 신세보다 나을지도 몰라. 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있는 거잖아. 난 아니거든.” 사실은 요한을 증오한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심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시가 지난번처럼 발길질할까 두려워 사샤는 뒷말을 삼켰다. 이제는 말의 눈치까지 보는 신세라니. 사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가 너보다 서열이 낮은 게 맞는 거 같다. 넌 내 눈치는 안 보잖아.” 당근을 다 삼킨 돌시가 킁킁, 사샤의 발 냄새를 맡았다. 이제야 조금 마음을 주는 것일까, 사샤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돌시의 콧등을 만졌다. “나랑 도망갈래?” 사샤가 그녀의 콧등을 쓰다듬으며 멍하게 말했다. “넌 원래 야생마였다며? 굴레를 벗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돌시가 방심한 틈을 타 사샤의 바구니를 툭 쳤다. 놓친 바구니가 땅에 쳐박히며 당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동안 사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히히힝, 돌시가 소리 내 울었다. 웃는 것 같았다. “너!” 사샤는 펜스에서 내려와 돌시를 향해 콱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돌시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당근을 우적우적 씹으며 경쾌하게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사샤는 돌시의 등을 쳤다. 매섭게 내리쳤지만 제 손만 얼얼할 뿐 돌시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소롭다는 듯 투레질만 했다. “얄미운 자식!” “누가 얄미운 자식이야?” 성이 풀리지 않아 돌시를 향해 꽥 소리를 지르는데 신경질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돌시는 당근을 물고 반대편으로 움직였고 사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디터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이 물린 소리를 냈다. “널 찾으러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잖아.” “…….” 벨이 죽은 이후, 디터와 단둘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그림자처럼 요한의 뒤에 서 있었고 저와 눈을 마주친 적도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인 듯. 그래. 그는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잊은 적이 없다. 한 번도 그가 한 짓을 잊은 적이 없다. 그를 향한 증오를. 분노를. 그리고 공포를. 사샤는 제 가슴에 감추어 놓은 단도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 그의 목을 찌르면 어떨까, 아니 이미 단도를 꺼내는 순간, 그에게 제압당할 것이다. 좀 더 적은 움직임으로 꺼낼 수 있는 곳으로 단도를 옮겼어야 했다. 가령. 허벅지나, 허리춤 같은 곳으로 말이다. “그 더러운 시궁창에서 빨리 나와.” 짜증이 난 디터가 목청을 높였다. 타리프가 헐레벌떡 달려와 모자를 벗었다. “오셨습니까. 소령님. 이곳은 어떻게…….” “너에겐 볼일 없어! 이 여자를 찾으러 왔지. 이 빌어먹을 말똥 냄새!” 디터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매로 제 코를 틀어막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러면서도 계속 욕을 내뱉었고 타리프는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제가 도와 드리죠. 아가씨.” 그러고는 펜스를 넘으려는 사샤의 손을 잡아 그녀를 도왔다. 사샤는 펜스 밖으로 나와 그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걸어.” 한 치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디터는 사샤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사샤는 타리프와 이렇다 할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쫓기듯 앞으로 걸었다. 디터는 마치 겁을 먹은 양을 몰듯 사샤를 앞으로 몰며 비난을 씹어 뱉었다. 화가 나고, 분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네 발에 묻은 그 더러운 오물을 좀 봐. 네르아 계집.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미개하기 짝이 없어.” “…….” 사샤는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여기저기서 떠받들어 주니 네년이 정말 귀부인이라도 되는 줄 알지? 역겨운 년이 대가리에 든 것도 없이.” 사샤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화가 나서 걸을 수가 없었다. 입술이 짓씹히다 못해 살점이 뜯어져 나갈 것 같았다. “걸어.” 디터가 뒤에서 명령했다. 그러나 사샤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디터가 그녀를 밀었다. “걸으란 말이야!” 사샤는 바닥으로 엎어졌고 디터는 악을 썼다. “이젠 말귀도 못 알아먹어!?” “…….” 이 개자식. 이가 갈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너무나 단순하고 맹렬한 감정이었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를 죽이면 죄책감도 없을 것 같았다. 후회도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 후련하고 행복할 것 같았다. 디터가 명령했다. “일어나.” 당장이라도 가슴에서 단도를 꺼내고 싶었다. 꺼내서 그의 목을 찌르고 싶었다. 그러나 기다리다 못한 디터가 그녀의 팔뚝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일어나 걸어.”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를 아무리 사리물어도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갔다. 디터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잘 들어. 네르아 계집. 네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네년은 포로일 뿐이야. 언제든 수틀리면 죽일 수 있는 포로. 언제든 필요 없어지면 네년도 그 계집년처럼 머리에 구멍이 나 죽을 거란 말이야.” “…….” “뭘 노려봐. 네년이 노려보면 어찌할 건데? 여기저기서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 내가 널 어찌 못 할 것 같지?” 디터는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사샤는 다시 바닥에 처박혔고 다음 순간 그의 군홧발이 사샤의 배를 걷어찼다. “윽!” 순간 고통과 함께 숨이 멎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관자놀이에 힘줄이 섰다. 격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디터가 그녀의 복부를 몇 번이고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네년의 그 반반한 얼굴만 멀쩡하면 된단 말이야!” 꺽꺽, 사샤의 숨이 넘어갔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그녀는 살기 위해 기었다. 디터는 연신 계속된 발길질 덕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격앙된 숨을 고르며 바닥을 뒹구는 사샤를 내려 보았다. “내가 널 사람 취급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적어도 나는 널 제대로 대우해 줄 거야. 네년이 포로란 사실을 잊지 않도록 몇 번이고 일깨워 주겠어.” “…….” 사샤는 간신히 숨을 토하고 흐르는 침과 콧물을 차례로 닦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디터는 다시 일어나라고 짧게 명령했고 사샤는 천천히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옷이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지자 이상하게도 마음은 맑아졌다. 선명하고 분명하고 그리하여 깨끗하였다. 그를 죽이리라. 누구보다 먼저 그를 죽이리라. 차오르는 분노로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사샤는 그것을 냉정하게 삼켰다.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폭발시켜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한이 말했다. 증오를 숨기라고. 그리하여 완벽하게 복수하라고. 사샤는 그 말을 따를 작정이었다. 어느 날 디터의 등에 칼을 꽂으리라, 그의 목을 그어 붉게 터져 오르는 선혈을 보리라. 그의 피가 바닥에 꽃잎처럼 흩날리는 것을 보리라. 그래서 사샤는 그를 뒤에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날 그가 저에게 뒤를 보일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발길질을 당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샤는 방에 들어섰을 때 어째서 디터가 자신을 찾았는지 알았다. 요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요한은 창가에 앉아 있다가 사샤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않고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연거푸 바닥에 넘어지고 기어 원피스도 머리도 엉망진창이었다. 우습게도 사샤는 디터에게 두들겨 맞은 제 처지를 그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사샤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했다. 볼이 가볍게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당당해 보이기 위해 사샤는 어금니를 고집스럽게 꾹 물었다. 잠시 후 요한이 반들거리는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 “혼인하기 전에 신부 수업을 받아야 해. 원래는 한 달 정도가 걸리는데…….” 요한의 시선이 진흙과 건초가 묻은 사샤의 신발에 머물렀다가 다시 올라왔다. “양해를 구해서 열흘만 받기로 했어. 이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칙이니 정오에 성당으로 가도록 해. 최근에 여기저기서 신흥 종교가 나타나는 바람에 신부님이 꽤나 예민하시거든. 가는 길은 매번 디터가 동행할 거야.” “…….” 아. 이제야 디터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디터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발가벗겨 때리고, 고문하고, 욕하던 여자를 매일 성당에 데려갔다가 데려오는 샤프롱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제아무리 짓고 까불어도 결국은 요한의 개. 디터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래서 매번 그렇게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거야? 신부님께 잘 보이려고?” 사샤는 요한의 군모 옆에 놓인 양장 책을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요한은 그것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일종의위장술이지. 신실한 신자들은 단지 같은 신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선하다고 믿거든.” “꼼꼼하네. 군인이 안 되었으면 유명한 사기꾼이 됐겠어.” 그녀는 빈정거렸다. 그러나 요한의 눈이 멎은 곳은 사샤의 쪽이 아니라 디터의 쪽이었다. 차갑고 냉한 눈으로 한동안 디터를 보다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겠어. 바다로 도망간 사이비 주교 놈을 잡아야 해서 말이야.” “당신이 그런 일도 해?” “물론이지. 그놈이 국경을 넘기 전에 잡지 못하면 꽤 일이 복잡해지거든.” “…….” 요한은 군모를 갖추어 쓰고 옆구리에 성경책을 낀 채 다가와 사샤의 머리 위에 매달린 낙엽 하나를 뗐다. 바닥에 나뒹굴어 마르고, 바스러진 낙엽. “아무쪼록 넘어지지 않게 잘 보고 다녀. 그러다가 코라도 부러지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자.” 그는 성경책을 내밀었다. “공부에 필요할 테니까.” 사샤는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받지 않으려는 것을 그는 억지로 사샤의 손에 쥐여 주고 방에서 나갔다. 디터가 곧 그의 뒤를 따르는 소리가 났다. 딸깍. 문이 닫혔다. 그렇게 나서서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요한이 제 부하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디터.” “네.” 디터가 재빨리 다가가서 몸을 숙였다. “사샤 로랑에 대한 네 적대는 너무 노골적이야.” “……죄송합니다, 소장님.” “앞으로 감추는 법을 익히도록 해. 네 행동 하나하나가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한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디터는 그를 따라 걸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지 못해 그는 내내 요한의 뒷굽을 바라보며 걸었다.   사샤는 성경을 침대에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섰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산비탈을 너덧 번은 뒹군 꼬락서니였다. 머리에는 그가 떼어 낸 낙엽 말고도 이런저런 지푸라기가 붙어 있었다. 사샤는 손으로 그것들을 털어 냈다. 방문을 잠그고 엉망으로 망가진 원피스는 더 입고 있을 의미가 없어 모두 벗어 버렸다. 어깨와 가슴께가 울긋불긋하게 부어 있었다. 디터가 만들어 놓은 상처들이었다. 사샤는 브래지어 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방을 뒤져 오래전 도로시가 챙겨 가지 않은 붕대 한 개를 찾아냈다. 실크 파자마를 걷어 올리자 얇은 나일론 스타킹 밴드와 가터벨트가 드러났다. 사샤는 스타킹을 끌어 내린 뒤 딱 손을 내렸을 때 닿는 지점에 붕대를 감았다. 그러고는 그 안에 단도를 넣었다. 단도는 리넨 붕대에 단단하게 고정됐다. 사샤는 손으로 그것을 몇 번 두드려 본 뒤 다시 스타킹을 끌어 올려 가터벨트에 맸다. 이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고야 말았다. ***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사샤는 번쩍 눈을 떴다. 똑똑똑. 또 한 번의 조급한 노크 소리. 사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 나자 디터가 남겨 놓은 몸 이곳저곳이 비명이 나올 만큼 아팠다. 격통은 아까보다 훨씬 심해졌다. 똑똑똑. 사샤는 침대에서 일어나 실크 가운을 찾았다. 그것을 몸에 두르려다가 거울에 비친 저의 전신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가 버렸다. 아까는 붉었던 상처들이 퍼런 피멍으로 변해 버렸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사샤는 재빨리 가운을 걸치고 허리끈을 꽉 동여맸다. 문밖에서 참지 못하고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더 조급하고 성난 노크였다. 똑똑똑! “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도로시가 콱,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은 잠그지 말아요.” 그녀의 말투가 차갑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사샤는 도로시의 냉랭한 얼굴을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열려고 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 “옷 벗어요.” 도로시는 저가 가지고 온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명령했다. “네?” 사샤는 그것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총상은 이미 다 나았다. 그것은 도로시도 잘 알고 있다. 더는 간병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좋아서 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어서 벗어.” “…….” 제 몸에는 디터가 새로 남긴 보기 흉한 상처들이 있다. 벨이 쏜 총상과는 다르다. 이것은 명백한 학대의 흔적이다. 그것을 이 여자에게 보여도 되는가. 보이고 나서도 수치스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녀는 더 이상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저 차가운 말투와 표정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도로시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실크 가운을 잡아 내렸다. 가느다란 파자마 끈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외에는 팔뚝까지 온통 멍투성이였다. 그것을 보는 도로시의 얼굴이 기괴했다. 그녀는 한숨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짧은 숨을 토했다. 구둣발에 얼마나 채인 건지 짐작이 갔다. 저를 이곳에 보낸 것도 디터였다. 행여나 새신부의 몸에 새겨진 제 구둣발 자국을 볼까 봐 입이 무겁고, 사샤의 방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은 자를 고른 것이다. 사실 도로시는 다시는 사샤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간호 장교의 책임이니, 의무니, 그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보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왔다. 그것이 디터의 명령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사샤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아무리 날고 기려고 해 보았자 그 처지가 어디쯤인지 결국 두들겨 맞고도 앓는 소리 한 번 못 하는 포로라는 사실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재즈 공연이 있던 그날부터, 요새에서는 사샤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매번 신문과 잡지에는 보반 의원과 그녀의 약혼녀에 대해 대서특필되었고, 특히나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미모의 피앙세에 대해서는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매체 안의 그녀는 모든 남자의 판타지였다. 아름답고 청초한 외모, 싱그러운 젊음,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불같은 야심이 그녀를 성녀와 요부가 공존하는 현대 여성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도로시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안다. 그녀는 성녀도 아니고 요부도 아니다. 반반한 얼굴을 가진 그저 그런 계집. 야심도, 야망도 없이 매일 구둣발에 차이고 밟히는 전쟁 포로. 요새 내의 젊은 군인들이 사샤에 대해 찬양하며 그녀에게 품고 있는 색정적인 욕망을 지껄이는 것을 보면서 도로시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 숨통이 조일 지경이었다. 그 여자가 사실은 몇 달 전, 요새의 안뜰에서 울부짖던 그 지저분하고 해골처럼 야위었던 빨간 머리의 계집이라고. 그러나 할 수 없다. 모든 이가 그렇듯 그녀 역시 요한이 두려웠다. 그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왜 너는 하필 그의 비호를 받아서. 왜 하필 요한은 너를 택해서. 너보다 나은 여자가 널리고 널렸는데, 네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도로시는 그날 홀에서 사샤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저를 바라보던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포로나, 환자나, 부하를 보는 눈이 아니라. 분명히. 분명히 달랐어. 저도 모르게 사샤의 어깨를 쥔 도로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피멍이 든 곳에 그녀의 손톱이 파고들자, 사샤는 참지 못하고 도로시의 손을 쳐냈다. “아파요!” 그다지 커다란 비명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파서 터져 나오는 아주 작은 탄식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도로시의 격앙된 감정을 분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작은 저항마저도 그녀의 이성을 끊어 버린 것이다. 도로시는 손을 들어 사샤의 뺨을 갈기었다. 짝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조용히 해.” “…….” 조용히 해. 포로 년 주제에. 짝! 다음 순간 도로시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사샤가 지지 않고 같은 대우로 상응한 것이다. 처음엔 놀랐다. 그리고 그다음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의 목을 비틀어 버리리라, 도로시는 그렇게 마음먹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목에 닿은 날카로운 칼날에 다시 멈추었다. 사샤가 어느새 단도를 빼 들어 그녀의 목젖 바로 앞에 가져다 댄 것이다. 아. 역시. 이쪽이 좋아. 허벅지에 묶어두니 확실히 가슴에서 꺼낼 때보다 훨씬 은밀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단번에 그리고 꽤 빠르게 상대방의 목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도로시에겐 무기가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온찜질을 할 수 있는 수건과 더운물, 그리고 멍이 잘 빠지도록 도와주는 연고 정도였다. 시험해보기 딱 좋은 상대다. 도로시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노기가 띤 눈빛은 여전했다. “이러면 네가 무서울 줄 알아? 디터에게 곤죽이 될 때까지 처맞은 주제에.” “디터는 죽일 수 없어. 너무 강해서. 그런데 당신은 죽일 수 있어. 약하거든.” “…….” “그것뿐이야.” 디터나 요한은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달려들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요한을 이기게 된다면 디터는 이길 수 있겠지. 디터를 이기게 된다면 어쩌면, 요한을 이길 수 있겠지. 그러나 신체적으로 체력적으로 그들을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머리를 쓰지 않으면, 좀 더 섬세하지 않으면, 신중하지 않으면 그들을 평생 죽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여자는 다르다. 이 여자는 저처럼 연약하고. 요한이나 디터처럼 키가 크지도, 단단하지도, 또 빠르지도 않다. 또 그처럼 강하지도 않다. 디터에게 맞은 수준에 비하면 도로시의 것은 솜방망이다. 요한에 비하면 이것은 너무 무방비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평생 다른 이의 몸에 붕대나 감아 온 여자가 무엇을 알겠나. 과거의 자신처럼 그녀도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이제 그러한 과거의 자신과는 너무나 멀어졌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생존이었다. 당하지 않기 위해, 먹히지 않기 위해, 참고, 버티고, 숨기고, 상처 입고, 일어서고. 그것의 반복이었다. 이것의 끝은 아마도 죽음뿐이리라. 도로시는 제 목젖을 날카롭게 찌르는 칼날에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말했다. “날 죽이면 너도 살아남지 못할걸?”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모르겠어. 지금의 나는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당신을 대신할 사람은 많잖아. 당신은 수많은 간호 장교 중 하나고 보반의 약혼녀 사샤 로랑, 선전용 포로 사샤 로랑은 나 하나뿐인걸.” “…….” 까득, 까득, 도로시의 이가 갈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몸이 떨렸다. 이마에 비죽 핏대가 올랐다. “네가 뒈졌으면 좋겠어.” “…….” “디터 소령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서 걸레처럼 뒈졌으면 좋겠어.” “…….” “그 뒈진 년처럼 너도 머리통에 구멍…… 악!” 사샤가 칼끝에 더 힘을 주자, 도로시는 파고드는 느낌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사샤가 그녀를 밀었다. 늘씬한 도로시의 몸이 털썩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제 목울대를 쥐었다. 희미하게 선혈이 배어 나왔다. 침을 삼키고 숨을 쉬는 데는 이상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피부가 조금 찢어진 정도의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사샤는 단도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처음으로 좋은 경험을 했어. 가지고 온 것은 두고 나가. 그리고 앞으론 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어.” 도로시는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이고 사샤를 노려보았다. 당장 그녀를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칼을 지니고 있었다. 포로년 주제에. 감히 저런 것을. 도로시는 제 목을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사샤를 한 번 더 죽일 듯 노려보더니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샤는 다시 허벅지에 단도를 맸다. 단도를 꺼내는 연습을 좀 더 해야겠어. 칼날을 좀 더 날카롭게 갈 수 있을까. 단번에 좀 더 깊은 상처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때마침 들어와 준 도로시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들어오면 그땐 좀 더 깊은 상처를 내줄 것이다. 그 이후엔 어쩌면 요한이나 디터를 상대로 위험한 상처를 낼 수 있을지도 몰라. 사샤는 테이블 위에 도로시가 두고 간 물건들을 살폈다. 더운물과 수건, 연고. 그녀는 가운을 풀었다. 밟히고 채인 멍 자국을 이리저리 살피다 얇은 파자마와 브래지어도 풀었다. 살갗이 드러날수록 가녀린 그녀의 몸은 더욱 넝마 같았다. 그러나 사샤의 표정은 담담하였다. 그것이 당연하듯이, 아니 마치 그래야만 하듯이. 그녀는 연고를 집어 들고 말없이 멍 자국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표정이 멍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하면 언젠가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듯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객센터 Sup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