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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화


08. 그녀의 이름은 도로시였다. 간호 장교로서 ‘요새’의 장교 병동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최근에는 ‘사샤 로랑’이란 여자의 총상과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녀는 사샤가 도첸군에게 붙잡힌 포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외 그녀의 출신이나, 사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요한이 그녀에게 업무적으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국익을 위해 그 여자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사샤가 완전히 회복했다고 생각하나?” 도로시는 요한의 집무실 가운데 서서 경직된 자세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네. 총상도 거의 회복했고 영양 상태도 더없이 좋습니다. 다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불안정해 보입니다.” “좋아. 내가 원하던 바야.” 요한은 흡족한 듯 제 입술을 매만졌다. “일주일 정도 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해 줘. 아마 끊임없이 자해하려 들 거야.” “네.” “그 예쁜 얼굴에 행여나 상처가 남으면 안 되지.” 도로시는 처음에 사샤를 보았을 때부터 아름다운 여자임을 눈치챘다. 근육과 지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해골 같은 몰골을 했을 때에도 도로시는 사샤가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빗자루처럼 엉킨 엉겅퀴 같은 붉은 머리를 했을 때에도 짧게 자른 갈색 머리를 했을 때에도 그녀가 미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조만간 네 임무는 끝이 날 거야.” “네.” “그전에 각서를 한 장 받아야겠어.” 요한은 책상 위로 서류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사샤 로랑에 대해 그동안 듣고 본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야. 그럴 수 있겠나?” “네.” “서명해.” 요한이 만년필을 내주었다. 도로시는 책상으로 다가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고 거침없이 서명을 했다. “조만간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거야.” “보상이요?” “그래. 특별한 임무를 마친 후에는 늘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치르는 것이 요새의 법칙이지.” 요한은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도로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미소에 넋을 잃었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아서도 안 되는 사람인데 말이다. 도로시는 그동안 사샤의 간호와 치료, 그리고 감시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해 왔다. 비록 그것이 요새 내의 고급 장교만을 간병하던 자신의 커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도 도로시는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요한의 지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욱이 그것은 의심해서도 안 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도로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애국심으로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첸은 군인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나라였고 군인이 되어 나라에 봉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그리하여 도로시뿐만 아니라 도첸의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 가장 안정적이고 누구보다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거기에 보태어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도로시는 자신이 꽤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첸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는 금발에 벽안을 가진 날씬하고 관능적인 여자였다. 근무를 할 때면 제복과 군모에 그 미모를 숨겨 놓았지만 밤이 되어 탈복을 했을 때에, 그녀는 요새 내의 그 어떤 군인의 시선도 사로잡을 여인으로 탈바꿈하고는 했다. 특히 그녀의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리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면 그녀는 관능적인 장미꽃처럼 요새 내의 모든 남자를 홀리는 향기를 지닌 여인이 되고는 했다. 그러니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요새 내의 군인이든 아니면 요새 외의 남자든, 학벌과 집안이 좋은 그 어떤 남자라도 골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슬슬 결혼 적령기였고 군을 제대해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할 때였다. 군 생활을 더 지속할 이유는 사실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도로시는 눈앞의 남자에 대해 골몰했다. 요새 안의 여군들은 모두 요한을 흠모했다. 그것은 나비가 꽃을 좋아하듯, 벌이 꿀을 좋아하듯, 요새 내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요한은 그 안에서 최상위 권력자였고 또한 포식자였다. 남자들도 흠모하는 그를 여자들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불문율처럼 여군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로는 요한은 절대로 단 한 명의 여자가 차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한 여자에게 정착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한 여자에게 정절을 지키는 남자도 아니었다. 그는 모든 남자와, 또 모든 여자와 어울렸고 또 모든 남자와, 또 모든 여자와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요새 내에서는 누군가가 요한과 하룻밤을 지냈다거나, 그의 무릎에 앉았다거나, 그와 키스를 해 보았다는 소문이 나돌기는 했으나 그것이 정확히 누구의 입에서 나온 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모두 다 풍문이었다. 사실 그는 남색을 즐기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여색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 역시 확인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로시는 그가 궁금했다. 실제로 그가 어떤 자인지 궁금했다. 모든 이가 흠모하고 모두가 그의 곁을 맴돌지만 요한이 마음을 내주고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은 디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요새 내의 군인들에게는 관대했다.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같았고 또 귀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닐 터였다. 그중 몇몇은 진실이지 않을까. 도로시는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보상’을 주겠다고 한 순간 도로시는 마침내 자신의 그 호기심에 답을 얻을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요한이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었다. 미스터리에 쌓인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혹시 그 보상을 제가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는지요?” “그럼. 물론이지.” 요한은 흔쾌히 대답했다. “재즈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원하는 가수는 있나?” “아니요. 딱히 원하는 가수는 없지만 유명한 이면 좋겠습니다.” “네피란에서 제일가는 재즈 싱어와 밴드를 불러와 주지.” 요한은 예술과 문학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음악과 연극을 즐겼고, 영화 산업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투자를 했다. 여유가 될 때마다 요새 내로 가수와 연기자를 불러 공연을 했고 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 나갔다. 또한 알아주는 독서광이었는데 무엇을 잡든 그 자리에서 끝 페이지까지 읽었다. 도로시는 그가 왜 매일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그가 성경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그가 끝까지 읽지 못하는 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소장님. 저, 가능하다면…….” 그는 잔인한 동시에 관대했고 저급한 동시에 우아했다. 피범벅이 되어 의무실에 들어왔다가도 그다음 순간에는 우아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고상한 클래식을 귀 기울여 듣고는 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배기는 존재이겠는가. 도로시는 조금 더 욕심을 내었다. 이왕이면, 조금 더 큰 욕망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소장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공연을 보는 영광도 함께 주시겠습니까?” 요새 내의 그 어떤 군인도 도로시가 자신의 무릎에 올라앉는 걸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복해야 할 마지막 무릎이 그의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니 아주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에 앉아 보고 싶었다. 그 짜릿한 쾌감을 맛본다면 이 군 생활에 미련도,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인생의 그다음 스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오후가 되자 그의 집무실에 서신이 도착했다. 질기고 두꺼운 봉투에 단단히 쌓여 있는 배달 우편은 주소도, 받는 이의 이름도, 보내는 이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요한은 우편물을 뜯었다. 몇 장의 서류 뭉치. 그는 가장 첫 장 위에 올려진 작은 메모지부터 살폈다.   [군자금 부족, 세수 마련 시급. 점령지에 추가 과세를 추진 중.]   그는 빼곡한 숫자가 나열된 나머지 문서를 살폈다. 도첸은 그동안 점령지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고 병력을 키웠다. 점령지가 늘어날수록 세금은 늘어났고 거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풍족한 자금은 결국엔 국가를 지나 도첸을 이끌어 가는 소수의 주머니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불려 먹고 나누어 먹고 쪼개 먹다가 전쟁이 끝나자 그들의 번영도 끝났다. 더는 과거처럼 지배할 영토가 늘어나지 않는데도, 나누고 쪼개 먹어야 할 권력의 개들은 한계를 모르고 더욱 늘어났다. 따르릉. 요한의 책상 위에서 전화가 울렸다. 세 번을 울리고 끊어진 전화는 곧이어 다시 울었다. 요한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우편물은 보았나? “네. 더 허리띠를 졸라맬 예정인가 보군요.”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버틸 수는 없어. 우리가 원하는 건 그가 어디선가 자금을 끌고 오는 거야. “그 자금은 ‘레드본’에서 나오는 것일 테죠?” ―이것은 전진을 위한 초석이 될 거야. 그러니 그가 국제 은행에 차용증을 쓰고 군자금을 빌리도록 설득해. “도첸이 과연 그 이자를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것으로 인한 연쇄작용이야. 그래야 다음 수를 둘 수 있어. 사내는 제 말만 하고 전화를 툭 끊었다. 곧 똑똑똑, 디터가 문을 두드렸다. “소장님. 서기장님께서 급하게 네피란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잘됐군. 차를 준비시켜.” “네.” 네피란에 방문한 김에 도로시의 보상도 해결하면 될 터였다. 디터를 내보낸 후 요한은 철제 쓰레기통 안에 문서를 집어넣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얇은 종이는 빠르게 타들어 가 아주 소량의 재 가루만 남긴 채 증발했다. 요한은 레인 코트를 챙겨 입고 방에서 나섰다.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불씨가 아주 천천히 죽어 갔다. *** 요한이 다녀간 다음 날부터 사샤는 간호사가 처방해 주는 약을 먹었다. 안정제와 수면제, 그 외에 무엇이 얼마나 더 첨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약을 먹고 나면 몸이 무겁고 졸리며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사샤는 그것이 마약의 일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교는 처방한 약 중 마약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신경을 무디게 만드는 향정신성 물질이 소량 첨가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사샤는 그녀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해 낼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하루하루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는 점이었다. 머리를 손질하고 목욕을 하고 모자와 드레스를 맞추는 시간 이외에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만 잤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그 이후에는 몹시 당황스럽게도 약이 듣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정신이 명료했으며,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지도 않았다. 간호 장교는 그녀에게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네피란으로 떠났던 요한이 요새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날, 결혼식 날이 정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둘의 결혼 기사에 쓰일 사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보반은 늙고 야윈 모습으로 요한과 함께 사샤의 방문을 두드렸다. 모든 것은 요한이 네피란에서 돌아온 후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었다. 사샤는 요한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보반을 보았다. 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예의 바르게 베레모를 벗으며 보반이 말했다. “에, 엘가. 아니…… 사, 사샤 양. 오, 오랜만이오.” 한때 뱀처럼 능글맞던 보반의 얼굴에 그때 같은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요한은 보반을 사샤의 곁에 세우고 자신은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벽난로 앞으로 향했다. 연극 무대 뒤편의 연출가처럼 그는 카메라를 든 병사의 뒤에 서서 관망하듯 사샤와 보반을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디터가 문지기처럼 지키고 섰다. 디터는 따분하고 지루한 낯빛을 했다. 보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동안, 그동안 잘 지냈는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요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웃어야지, 보반.” 요한의 말에 보반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 맺히고 있었다. “당신의 피앙세에게 다정한 입맞춤이라도 해 주지 그래.” “…….” 보반이 재빠르게 사샤에게 다가왔다. 그의 검은 수염이 간지럽게 그녀의 볼을 긁었다. 사샤는 눈을 질끈 감았고 입가에 그의 주름진 입술이 닿았다. 찰칵!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역겹고 끔찍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제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요한이 그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약혼녀가 별로 좋아하질 않는군.”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보반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갑게 굳은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부…… 부탁이네. 사샤 양. 제발 웃어 주게. 제발…….” “…….” 사샤는 당황했다. 보반이 이토록 겁에 질려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보반.” 요한이 그를 불렀다. 보반이 또 움찔 몸을 떨었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부…… 부탁이네.” 작게 속삭이고 사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사샤가 눈을 감고 그에게 얼굴을 내민 것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다른 이의 처지를 살피는 것은 그녀의 본능이었다. 오랫동안 직업으로 가져온 헌신이라는 이름의 저주이기도 했으며 타고난 성품이기도 했다. 보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를 돼지보다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려움에 떠는 그를 외면하는 것을 본능이 거부했다. 죽어 가는 자를 살려야 했던 것처럼, 그게 아니면 병자가 편안한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그 옆에 머물며 헌신했던 것처럼 사샤는 결국 보반을 위해 요한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꽤 그림이 되는군. 이제 좀 고상한 사진을 찍어 보지.” 요한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디터가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을 창가 앞으로 끌어왔다. 사샤가 앉을 의자도 하나 끌어와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은 다음 사샤를 그곳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약지에 커다란 다이아 반지를 끼웠다. 오로지 그것만이 모든 것이 가짜인 이 순간에 진실로 빛이 났다. 보반은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린 채 그녀의 뒤에 비스듬히 섰다. “웃어.” 요한이 하얀 이를 씩 드러내며 명령했다. 보반은 그를 따라 활짝 웃었다. 그러나 사샤는 웃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연기 따위는 하지 못한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요한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을 수 없다. 아니 누구도 그처럼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요한은 악마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였다. 그에겐 도덕심도, 양심도, 타인을 향한 배려나, 공감도 없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오로지 영혼을 판 대가로 얻은 아이 같은 미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전부임을 알면서도 사샤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잔인하고 찬란한 본성에서. 요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진한 미소는 사라졌고 교만하고 차가운 눈빛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을 넘기는 것처럼 쉬웠다. 영혼이 없는 자는 손쉽게 가면을 바꾸어 썼다. 공허한 눈빛에 아무것도 담지 않고도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사샤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하나도 두렵지가 않았다. 치미는 증오에 눈이 멀어 버린 것 같았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을 끓게 하는 것은 오로지 뜨거운 분노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잔인한 욕망뿐. “긴장한 신부도 나쁘진 않지.” 요한은 사샤를 웃게 하는 것을 단념했다. 이미 다정하게 입 맞추는 사진을 찍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 듯했다. 그는 곧 방 안의 모두에게 명령했다. “좋아. 다들 잠시 쉬도록 해.” 충실한 요새의 군인들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사진사도 나갔고, 디터도 보반을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요한도 그 뒤를 따랐다. “요한.” 그러는 것을 사샤가 불러 세웠다. 열린 방문으로 막 빠져나갔던 요한의 등이 슬며시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한 발 더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쳐 줘.” “…….” 사샤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얼굴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좋아.” 곧 흔쾌히 말했다. “기꺼이 알려 주지.” 그로부터 그를 죽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만들어 낸 연극 무대라면, 그 위에서 춤을 추어야 하는 사람이 저라면, 그렇다면 똑같이 미친년이 되어 줄 테다. 그와 어울리는 광기의 무대에서 사방으로 곡예하는 광인이 되어 주리라. 그리고 마침내 나는 너를 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말겠어. 가장 처참하게 죽이고 말 거야. 그러니 당신이 알려 줘. 당신을 죽이는 법을. 당신을 따라 나도 미치광이가 될 테니까. *** 점심을 먹고 나서 사샤는 보반과 정원을 걸었다. 사진사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둘의 사진을 찍기 바빴고 디터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감시했다. 언제고 총을 꺼낼 수 있도록 한 손은 늘 허리춤에 올린 채였다. 그리고 요한은 행방이 묘연했다. 사샤는 산책을 하는 내내 그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고 보반은 제 처지를 하소연하기 바빴다. 다정하게 걷는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결백을 호소하였으나 사샤는 그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체 요한은 어딜 간 걸까. “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나는 국가를 위해 일해 왔는데, 어쩌다가, 어쩌다가 내가 반역자라는 모함을 뒤집어썼는지 말이야.” “…….” “나는, 물론, 자네가 연합국에서 보낸 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매번 그래 왔으니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그러니까 내가 비서를 뽑는 일이, 나는 국가의 일 중 하나인 줄 알았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는 연합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이 많거든.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만약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이 일에 동의하지 않았을 거야.” “…….” “아주 조금이라도 의심을 해 보았어야 하는 건데 말일세. 그러면 내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집사람과 이혼을 하고 자네와 재혼을 연기할 일도 없었겠지. 물론 나는 집사람을 사랑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도첸의 보수주의자들은 절대로, 절대로 이혼하지 않네. 자네를, 자네를 곤란하게 하는 일도 없었겠지. 나는 아직도 내가 왜 반역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혹시 자네는 뭔가 아는 것이 있나? 아주 조금이라도 말일세. 뭔가 아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내게 알려 주겠나?” “…….” “사샤 양.” 정원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사샤가 흠칫 놀라 보반을 보았다. “네?” “부디 아주 조금이라도 좋네. 내게 이야기해 줄 만한 것이 있다면…….” 그에게 이야기해 줄 만한 것이라. 묻고 싶은 것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요한에게 최초로 들었던 이후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문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나요?” 보반은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췄다가 이내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뭐?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엘가. 아니 사, 사샤! 절대로 아니야.” “내가 폭탄을 실어 나르는 쥐새끼였나요?” “아니야. 아니라네. 절대로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전임 비서는 어떻게 됐죠?” 보반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여직원들은 모두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그러나 파랗게 질린 보반의 얼굴을 보자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사샤. 내 이야기를 들어 봐. 자네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지 간에 그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네. 나는 자네를 절대로 죽이려고 한 적이 없어. 절대로. 정말이야. 신께 맹세컨대 내가 하는 말은 사실이라네.” 보반이 다급하게 사샤의 손을 잡았다.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가 요란했다. “사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해야 하네.” 그의 손은 거칠었다. 양복 소매 깃 안으로 드러난 피부의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멍든 상처투성이였다. “내가, 내가 과거에 자네를 불쾌하게 했거나, 혹은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면 부디 모두 잊어 주게. 아니 부디 용서해 주게. 난 내 결백을 밝혀야겠어. 살아서 내 결백을 밝히고 다시…… 다시 내 자리를 되찾아야겠어. 그러니 부디, 부디 사샤 양.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 아니.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어. 설사 내가 당신을 믿는다 해도 내가 당신을 도울 방법은 없어. 당신을 살릴 방법도, 당신의 결백을 밝힐 방법 역시 없어. 우리는 그저 이렇게 소모되고 버려질 거야. 당신은 결백을 밝힐 수 없고 신임을 얻을 수도 없어. 그저 우리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요한의 손에 놀아나다가 우린 모두 개죽음을 당할 거야. 당신도. 나도. 그러나 단지 그 한순간, 1분, 1초의 생을 연장하는 것이 보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째서 사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이다음에 희망이 있을 거란 꿈은 대체 어떻게 꿀 수 있는 거지? 그런 건 없다. 내가 잘 알아. 이곳에 그런 것은 없어. 요한은 그런 것을 품도록 두지 않아. 요한은 현재를,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사샤는 눈을 들어 화려한 정원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디터도, 사진사도, 자신도, 보반도, 누구도 웃지 않았다.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살인을, 누군가는 죽음을, 누군가는 이 순간의 끝을, 그리고 누군가는 출구가 없는 도피를 꿈꾼다. 푸르고, 부드럽고, 화려한 풍광 안에는 사실, 모든 게 핏빛이었다. 디터는 손목시계를 살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저도 더 이상 이 따분한 그림을 지켜볼 인내력이 없었다. 그는 열렬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보반의 어깨를 잡아끌며 말했다. “이제 쇼 타임은 끝났어. 보반.” “사샤 양. 내 말을 잊지 말아 주게. 부디 꼭, 잊지 말아 주게.” 보반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디터에게 끌려갔다. 사샤는 보반이 쏟아 낸 말들을 곱씹었다. 도와 달라던 간절한 부탁도. 그러나 그중 무엇도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었다. 그저 다음번에 다시 만날 때 그가 부디 무사하기를 빌 뿐이었다. 보반이 사라진 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가 사샤는 제 앞으로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보고 몸을 돌렸다. 요한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백금발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새하얀 백마였다. 잘 정리된 새하얀 털이 말의 단단한 근육질을 타고 눈부시게 흘러내렸다. 어디에 가 있었나 했더니 백마를 타고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절대로 어울려서는 안 되는 그림이건만, 그는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은 화려하고 또한 찬란했다. “혹시 말을 탈 줄 아나? 사샤양?” “…….” 사샤는 도리질을 했고 요한은 말고삐를 당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말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사샤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 때 마차를 끄는 말에 밟힐 뻔한 적이 있었다. 마부는 작은 체구의 비렁뱅이를 발견하지 못했고 말들은 그녀의 앞에서 앞발을 들어 올렸었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겁을 먹고 웅크렸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마부가 그녀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미 그녀를 저만치 비켜 가고 있었다. 그 후로 사샤는 말을 싫어했다. 말은 너무나 컸고 또 너무나 단단했고 너무 야만적으로 보였다. 요한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 “잡아.” 그러나 사샤는 더 뒷걸음질 칠 뿐, 요한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가 말에서 훌쩍 내리며 구시렁댔다. “하여간 참 손이 많이 가.” 그는 사샤의 허리를 훌쩍 들어 말 위에 올렸다. 그 바람에 사샤는 ‘악’ 하고 흉한 비명을 질렀다. 본인이 질러 놓고도 본인이 놀랄 정도로 무방비한 소리였다. 요한이 작게 웃는 것이 보였다. 민망함에 볼이 붉게 탔다. 말 위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눈앞이 아찔해져서 비틀거리는데 요한이 뒤따라 말에 올라탔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사샤의 어깨가 닿았다. “균형을 잡아. 잘못하면 말에서 떨어질지 모르니까.” 요한의 당부를 머릿속에 되뇌기도 전에 그는 말고삐를 쥐고 발을 굴러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은 푸르르 한 번 숨을 뱉더니 이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샤는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자 요한이 ‘아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비명과 웃음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가락으로 얽혔고 사샤는 허우적거리다가 끝내 요한의 허리를 붙잡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말에서 떨어져 말의 발굽에 밟히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정말로 간절하게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덧 말이 속도를 줄였다. 딸각딸각, 말발굽 소리 간격이 점점 느리고 일정해졌다. 사샤는 간신히 요한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착한 곳은 마치 돌무덤 같았다. 오래전에 지어진 무언가가 허물어져 풀과 나무줄기에 뒤얽혀 있었다. 요한이 설명했다. “오래된 원형 극장이라 하더군. 왕을 위해 정원사가 공들여 설계한 곳이라고 하던데 지금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 사샤가 퍼뜩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얼굴이 시뻘겠다. “걱정 마. 내 허리를 안은 여자가 당신이 처음은 아니니까.” 그가 사악하게 웃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무서워서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더 치욕적일 것 같아 사샤는 속으로 항변을 삼켰다. 요한은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두 손을 뻗었다. “자. 내려.” “…….” 거부하고 싶다. 내리면서 발로 그의 얼굴을 뭉갤 수 있다면 힘껏 뭉개고 그를 밟고 뛰어내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요한은 기다리기 지쳤는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끌어 내렸다. 그의 얼굴을 밟아 버리고 싶다는 바람과는 달리 사샤의 발은 깃털처럼 육지에 안착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나 보다. 요한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24시간 화만 내며 살 수는 없거든.” “…….” “그건 너무나 소모적이지. 그러니 그 감정에 너무 몰입하려고 하지 마. 괴로움만 늘어날 뿐이야.” 그의 말이 사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정곡을 찔려서 너무나 아팠다. 사샤는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 바람에 요한이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나도 알아! 숨을 쉬는 것처럼 계속해서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감정을 키워야 했다. 그것은 사샤에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자존심이었고 도덕심이었으며 그녀가 살아가며 가져야 할 단 한 가지뿐인 감정이어야 했다. “당신을 증오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요한은 제 허리춤에서 리볼버 권총을 꺼내며 대꾸했다. “증오는 조용히 타오를수록 강해지는 거야. 가면 뒤에서 키워야만 제 힘을 발휘하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그것을 아주 잘 숨겨야 할 거야. 상대가 방심할 때까지. 자.” 그는 총을 돌려 그녀에게 내밀었다. “날 죽이는 법을 알려 달랬지?” “…….” “날 쏴 봐.”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만큼 그는 가까이에 있었다. 쏴 보라고? 당신을? 여기서? 사샤는 냉큼 그에게서 권총을 받아 들었다. 아는 대로 잠금쇠를 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은 다음 재빠르게 그의 이마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날 쉽게 생각하지 마. 내가 아무리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거리에서 당신의 머리통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어. 총구는 정확하게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방아쇠를 감은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끼릭, 총알이 걸리는 느낌이 났다. 쏴! 지금이야! 그러나 채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녀의 손목이 뒤틀렸다. “악!”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제 손목을 감싸고 나니 차가운 총구가 제 이마에 닿았다. 요한이 그녀의 손목을 꺾고 순식간에 총을 갈취해 간 것이다. “자. 이젠 어떻게 할 거야?” “…….” 리볼버에는 총알이 들어 있다. 오래전 빈 방아쇠를 당길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다……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해.” 불안한 장담이었다. 요한은 놀리듯 되물었다. “오. 그래?” 요한이 한 발 다가왔다. 사샤는 이마에 닿은 총구에 밀려서 뒷걸음질 쳤다. 날 죽이지 못해. 날 선전용으로 쓰기 위해 지금껏 보살펴 왔어. 보반과 결혼시키기 위해. 그리고 오늘 사진을 찍었어. 그는 나와 보반을 결혼시킨댔어. 대중들이 내게 질릴 때까지 난 죽을 수도 없댔어. 그러니까 날 죽일 수 없어. “당신을 죽이는 법을 알려 준댔잖아!” “그래. 그래서 알려 주는 거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 거야. 사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았다. 굳센 믿음이 사라졌다. 정말 쏘려나 봐! 사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탕.” 그러나 요한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입으로 총소리를 흉내 냈다. “자. 넌 이제 죽었어.” 그는 총을 총집에 집어넣으며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사샤는 번쩍 눈을 떴다.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나 아무리 그에게 덤벼들어도 그의 머리털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치욕에 그녀는 제 입술을 짓씹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번째 규칙이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실수 없이 단 한 번에 죽일 것. 안 그러면 네가 죽을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규칙은.” 그는 주머니에서 손잡이에 보석이 세공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언제나 방어를 위한 무기를 숨겨 두라는 거야. 자.” 요한이 휙 그녀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것을 사샤가 두 손으로 간신히 받아 들었다. “특별 주문한 거야. 작고 가볍고 네 손에 꼭 맞을걸.” 정말 그랬다. 단검은 정말로 작고 가벼웠고 사샤의 손에 매우 잘 맞았다. “가능하면 몸에 지니고 있어. 남들 손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에.” 그는 그렇게 조언하고는 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수업은 끝났어. 다음번엔 좀 더 머리를 굴려서 오는 게 좋을 거야.” 사샤는 멍하게 제 손에 쥔 작고 아름답고 날카로운 단검을 바라보았다. 핏빛의 노을이 단검의 잘 벼린 칼날 위에 선명하게 비쳤다. 한 번도 그 핏빛을 매혹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뜨겁고 비릿한 향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선연한 색이 늘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 색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샤는 문뜩 허기가 졌다. 그 피비린 향이, 그 뜨거움이, 그 선연한 색이 그녀를 주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요한에게 다가갔다. 말의 안장을 정비하며 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한 걸음씩. “이제 곧 어둠이 질 거야. 더 늦기 전에 돌아가…….” 사샤의 칼날이 요한의 허리를 쑤셨다. 불이 덴 듯한 화끈한 감각. 우두둑하고 제복과 살점을 칼날이 뜯고 들어가는 느낌. 요한은 미간을 구겼다. 통증을 참으려 눈을 찡그린 채 그는 제 허리에 박힌 칼의 위치를 더듬었다. 사샤는 그의 허리를 찔러 놓고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요한은 한숨을 쉬었다. “사샤.” 그러고는 어금니를 물고 허리에서 칼날을 빼냈다. 그것은 단번에 매우 쉽게 뽑혔다. 그는 제 피가 묻은 단도를 든 채 사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침착하게 빛났다. 그것은 굶주린 절망과 증오의 빛깔이었다. 환희와 꼭 닮아 있었다. “말했지.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한 번에 죽이라고.” “…….” “이 단도는 칼날이 너무 짧아서 사람이 죽을 만큼 깊게 안 들어가.” 사샤의 얼굴에서 환희의 색이 걷혔다. 이제 남은 것은 완전한 공포의 빛깔뿐이었다. “하려거든 내 목을 벴어야지.” “…….” 요한이 저벅저벅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미소가 걷힌 그는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냉정한 빛을 띠었다. “너보다 키가 크고 체구가 좋은 상대라면 이렇게 하는 거야.” 요한은 손날로 순식간에 사샤의 목젖을 때렸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고꾸라졌다. 숨을, 숨을 전혀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을 부여잡았다. 토할 것처럼 입을 잔뜩 벌렸으나 나오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과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요한은 사샤의 멱살을 잡아 똑바로 눕히고 그녀의 코앞에 칼날을 들이댔다. 요한의 피가 칼끝을 타고 사샤의 콧등 위에 떨어졌다. “잘 알아들었어? 사샤 로랑?” “콜록!” 마침내 사샤가 기침을 뱉어 냈다. 꺼억꺼억 숨넘어가는 소리가 거칠었다. 침과 눈물과 콧물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렸다. 그래도 마침내 숨을 쉬었다. 사샤는 절박하게 호흡했다. 간신히 살아났다. 요한은 그녀의 멱살을 놓았다. 조금이라도 더 산소를 빨아들이기 위해 경련하듯 바닥을 구르는 사샤의 앞에 단도를 던져 주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사샤가 호흡을 고르고 고통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샤는 그가 저에게 알려 주는 것이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사실은,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욕구를 짓밟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를 죽이기에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나약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하려고 ‘방법을 알려 주겠다’라는 미끼를 던진 것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사샤는 벌써부터 절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그를 죽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나약한지 벌써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괴물처럼 서 있다. 아니 정말로 피를 흘리는 것인지 어쩌는 것인지, 과연 아픔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가면을 쓰라고 충고했다. 분노를 숨긴 채 상대방이 방심할 때를 파고들어 단 한 번에 죽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나는 강해지고 싶어. 정말로 강해지고 싶어. 죽을 수 없다면 그러면 누구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어. 그러다가 저 남자처럼 미쳐 버린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냥 미쳐 버리고 싶어. 사샤는 지저분해진 얼굴을 소매로 닦아 내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푸르게 질렸던 혈색이 생생한 붉은빛을 띠었다. 그녀는 단도를 집었다. 또다시 요한에게, 저 거목 같은 남자에게 달려드는 대신 그녀는 그것을 제 가슴속에 숨겼다. 심장이 울리는 자리에 차가운 칼날이 느껴졌다. 맨 먼저 디터를 죽일 거야.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온 손톱을 뽑고, 물에 처넣고,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패다가 그놈의 머리통에 구멍을 낼 거야. 그리고 그다음은 요한. 당신을 죽일 거야. 당신을 죽이고 그 시체 위에서 웃으면서 춤을 출 거야. 그 후에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갈 거야. 수억 갈래로 찢어져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요한, 당신을 죽인 후에 나는 지옥으로 가겠어. 그렇게 이 고통에서 구원받겠어. 요한은 말을 살피고 있었고 사샤는 그를 향해 걸었다. 침을 넘길 때마다 목젖이 아팠다. 아직도 호흡하기가 버거웠다. 사샤는 한 손으로 목을 쥐고 한 손으로는 제 치맛단을 잡은 채 처음으로 요한의 코앞까지 자신의 의지로 다가갔다. 그는 백마의 콧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콧등을 만지는 손은 빗질을 하는 듯 정성스러웠다. 그녀는 성치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수업은 언제야?” 말이 투레질을 했다. 사샤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말이 내는 소리가 괴물의 울음처럼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시간 같은 건 없어. 이건 죽음과 생존에 관한 탐구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수업은 언제나 예고 없이 시작되고 예고 없이 끝날 거다. 마음을 놓는 순간, 긴장을 푸는 순간, 혹은 믿는 순간, 아니면 평화가 도래하는 순간. 요한은 사샤에게 그 순간들을 인생에서 완전히 제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현듯 수업은 시작되었다가, 또 불현듯 끝날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사샤가 알 수 없는 순간이 될 터였다. “왜 내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는 거야?” 사샤갸 물었다. 요한은 여전히 말의 콧등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네가 가르쳐 달랬잖아.” “거부할 수 있잖아. 싫다고. 내게는 득이 되어도 당신에게는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 “이왕 체스를 둔다면 내가 가진 체스 말이 폰이나 룩보다는 킹이나 퀸인 게 낫잖아. 이유라면 그게 이유지.” “난 당신의 졸개가 아니야. 난 언제나 당신의 적이고 언젠가 당신을 죽일 거야.” 그는 픽 웃으며 눈알을 굴렸다.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워, 사샤. 넌 지금 내 체스 판에 들어와 있고 그게 이 순간 너의 위치야. 암살자는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죽이겠다고 경고하지 않아. 조용히 체스 판에서 내려가 상대의 뒤통수에 구멍을 내지.” “…….” “그러니 지금의 널 내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사샤는 할 말을 잃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하찮고 연약할 뿐. 제아무리 가진 분노와 증오가 크다고 해도 그것을 표출할 능력도 자격도 없었다. 제 처지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요한이 그녀를 말에 올려 주기 위해 허리를 잡았을 때 그 손을 쳐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부끄러웠고 화가 났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헛된 자존심으로 지켜보려. “나 혼자 타 보겠어.” “좋을 대로.” 요한은 선뜻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사샤는 말안장을 잡고 발걸이에 발을 올렸다. 그러나 백마는 투레질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사샤는 비틀거리다가 다시 말 안장을 잡았다. 이번에는 더 크게 투레질하며 뒤로 물러났다. 놈은 흥분한 듯 보였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갈퀴도 따라 흔들렸다. 그녀는 영문을 몰랐다. 말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사샤는 요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돌시는 현명한 아가씨거든.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에겐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지.” “…….” 그는 말고삐를 잡고 놈의 뺨을 몇 번 두드린 다음 사샤의 허리를 잡아 안장 위로 올렸다. 돌시는 얌전하게 서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투레질도 하지 않았다. “이게 두 번째 규칙이야. 사샤. 필요하다면 네가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어.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러면 너는 아주 뜨거운 신뢰와 헌신을 얻게 될 거야.” 요한이 사샤의 뒤에 올랐다. 좁은 안장 위에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요한이 발을 굴렀다. 돌시는 그의 요구에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사샤는 두 손으로 말안장을 꼭 잡고 그녀의 리듬에 제 몸을 맞추려 노력하며 물었다. “이 말은 당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어?” “아니. 돌시가 나를 사랑하지.” “…….” “사랑한다고 믿은 이후에는 그것을 갈구하게 되는 거야. 뜨거운 신뢰의 다음은 헌신이지. 돌시는 내게 현신해. 내게 길들었거든.” “좋겠네. 암말에게 아주 뜨겁게 사랑받아서.” 사샤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뭉개 주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었다. 요한은 작게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첫 말은 엘프라는 하얀색 암말이었는데 정말 빨랐어. 그리고 우리는 아주 잘 통했지. 어느 날인가 친구와 내기 경주를 하다가 엘프가 넘어진 적이 있어. 미처 바닥에 있던 나무뿌리를 보지 못했던 거지. 엘프와 나는 같이 굴렀어. 나는 흙투성이에 다리뼈가 어긋났고 내기에서 졌지. 그날 저녁 나는 엘프의 머리를 잘랐어.” “…….” “내가 처음으로 키우던 개는 검고 아주 잘생긴 로트 바일러였는데 매우 혈기왕성한 놈이었지. 틈만 나면 사람이고 개고 가리지 않고 올라타려고 했거든. 아버지는 놈을 아주 끔찍하게 아끼셨어. 당신과 닮았거든. 성격이나, 하는 짓이나. 그래서 나는 한밤중에 몰래 아버지의 창고에서 해머를 꺼내 놈의 두개골을 박살 냈어. 마당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아버지의 해머에는 놈의 뇌수와 피가 잔뜩 묻었지. 나는 그것을 아버지의 창고에 다시 걸어 놨어. 피가 뚝뚝 흐르는 대로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나긋나긋했다. 말의 느긋한 리듬에 맞춰 평화롭고 부드러워 그 내용을 모른다면 마치 아이의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라고 착각할 듯했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잔인했고 그는 짐승을 살육한 이야기를 감정 없이 서술하고 있었다. 요한은 미친놈이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더욱 뼈저리게 깨닫는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마음은 온통 검은빛일 것이다. 어떤 빛깔도 낼 수 없고 어떤 색과도 섞일 수가 없는 그 어둡고 아득한 색 말이다. “나는 신뢰나, 헌신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아. 그렇지만 그 단어가 불러오는 마법은 아주 좋아해. 그 광경을 보는 건 무척 재미있거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그는 어디까지나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한 번도 체스 판에 올라가 보지 않은 이처럼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그의 강함은 감정의 결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또 사샤가 앞으로 강해지기 위해 지녀야 할 덕목이기도 했다. 메말라 가야 한다.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세상. 요한은 세상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기 전에 스스로 미쳐 버린 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샤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에게 이끌려 미쳐 가야만 했다. 살기 위해. 그래서 죽이기 위해.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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