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7화
16.
이 와중에도 결혼 준비로 분주하다는 사실이 이질적이었다. 보반과 예식을 치를 교회는 입구부터 색색의 꽃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사샤는 디디에와 성당의 입구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남의 일인 듯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이군요. 사샤 양.”
“네.”
“여러모로 심란하시겠습니다.”
심란하다라. 모르겠다. 보고 있으면 심란하기보다는 믿기지가 않는달까. 현실감도 없었다. 이 와중에 결혼이라니. 그것도 보반과.
“신부님은 실감이 나나요? 제가 이 자리에서 보반 의원과 결혼한다는 것이요.”
“아니요.”
그는 웃었다.
“저는 이 모든 일이 꿈이길 바라고 있답니다.”
“저도 그래요.”
사샤가 그를 따라 웃었다.
“죽기 전에 도로시 양이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요.”
지난밤에 대해 들은 디디에가 불현듯 물었다. 사샤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중적으로 들렸어요. 디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도 들렸고 내게 죽여 달라 비는 것처럼도 들렸고, 어쩌면 그가 저를 죽이러 온다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덴버 대령은 신자가 아니라 저와 그다지 접점은 없습니다만, 듣기로 대단한 다혈질에 성미도 급하지만 유쾌하고 매우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디다. 도로시 양을 무척 아꼈다니 이번 일로 상당히 분노했을 거고요.”
“디터는 어떻게 될까요?”
“쫓겨나겠죠. 의무 병동에서 인정과 신뢰를 쌓은 장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있으니 아마 소장이 돌아온다면 군복도 벗어야 할 겁니다.”
“결국, 요한이 돌아와야 모든 게 결론 나겠군요.”
“사샤 양.”
디디에는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네. 신부님.”
“아직도…… 아직 윌렌도르프 소장에 대해 같은 감정입니까? 그에게 집착하고 의지하고 있다고 했었죠.”
갑자기 묻자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멋쩍게 웃었다. 쑥스러운 듯, 어려운 듯 애써 미소로 그것을 지우려는 것 같았다.
“네. 그렇게 말했었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은…….”
그녀는 제 복부에 두 손을 얹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넘쳐흐르는 뜨거움을 토하지 않으려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지금은 그를 사랑해요.”
“……사샤.”
디디에는 탄식하는 목소리였다.
“증오, 집착. 알아요. 신부님 말씀처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사랑이에요. 아무리 애써도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증오로도, 집착으로도, 그 어떤 말로도 부족했다. 그를 지칭하는 모든 단어는 불행을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사랑이었다. 지독해서 더 강렬한 사랑. 생애 처음으로 가진 불꽃은 그녀를 녹이고 타오르게 하고 또 종국에는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리라는 사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멈추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사샤. 윌렌도르프 소장은 매우 훌륭한 군인입니다.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인도자이지요. 하지만 그는 매우 잔인한 사람입니다.”
“알아요. 내가 잘못되었다는 거.”
“아니요.”
디디에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
“그는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가 디터에게 한 짓을 봐요. 물론 디터 소령이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맹목적일 정도로 충성스러운 심복이었어요. 그런 그가 어떻게 되었나를 봐요. 당신은 이 모든 거짓과 불행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사샤. 요한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아요.”
사샤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이 끝이 어디인가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디디에는 처연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울 것 같았다. 사샤. 가엾은 아이.
“난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요. 사샤. 당신을 이 어둠에서 구원하기 위해 신이 내게 당신을 보낸 겁니다. 나는 샤엔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당신은 지키고 싶어요.”
“이미 그렇게 하고 계세요. 신부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행했을 거예요.”
“사샤.”
“저에겐 큰 위로가 되었어요. 정말이에요. 언젠가 꼭 어머니의 묘지에 함께 가 주세요. 언젠가는요.”
마치 유언 같았다. 곧 결혼을 올릴 신부가 아니라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는 불안한 영혼 같았다. 아니, 사샤. 그 모습을 잠자코 두고 볼 수 없다. 검은 카펫을 밟고 죽음에게로 행진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디디에는 결연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당신을 이곳에서 꼭 탈출시킬 거예요. 거부한다면 억지로라도 끌어내겠어요.”
그녀를 대신해 지옥 불 위를 걸어야 한다면 디디에는 걸을 수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 고통과 수모를 견뎌야 한다면 기꺼이 견딜 수 있었다. 디디에에게 사샤는 신이 내려 주신 마지막 과업 같은 존재였다. 운명이 돌고 돌아 이제야 구원을 얻을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사샤는 웃으며 신부의 주름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사샤는 디디에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이제 돌시를 보러 가야겠어요. 해가 지기 전에요.”
그러고 보니 타리프가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디디에는 회중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팔을 내밀었다.
“제가 바래다 드리죠. 사샤 양.”
사샤는 그가 내민 팔에 팔짱을 끼었다. 디디에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 가을 낙엽 아래 걷노라니 마치 그곳이 버진 로드 같았다. 사샤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긴 실크 길을 걷는 신부가 된 것 같았다.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은. 이토록 아련하고, 따듯하고 애틋한 심정이리라.
디디에의 말대로 그녀가 이곳에 있는 한 영원히 불행 속에 요한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새 이 불행에 익숙해지고 길들어져 행복에 대한 모든 열망과 소망을 포기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요한을 사랑하노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한히 반복되어 온 불행 속에도 풀잎처럼 돋아난 것들이 있었다.
타리프, 디디에, 돌시. 이름 모를 병사가 수줍게 내민 꽃이나, 그 안에 담긴 진심 같은 것. 천 가지의 불행 속에서도 그 작은 것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렇게 살겠노라 변명하고 싶었다. 거대한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은 꿈꾸어 본 적 없으니, 고통 속에서도 새싹처럼 돋아나는 애정에 기대어 그것을 갈구하며 살면 안 되겠느냐고 보채 보고 싶었다.
나는 누굴 위해 행복을 찾아가야 하느냐고. 나는 무엇을 위해 어머니의 땅을, 당신을, 요한을 떠나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땅에 홀로 서야 하느냐고.
***
오늘따라 마구간이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방목장에 나와 말들을 지키고 있을 타리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마구를 한 두세 마리의 말들만 울타리 안을 돌며 풀을 찾아 뜯을 뿐이었다.
“마방을 치우고 있나 봐요. 안 보이는 것을 보니.”
사샤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같이 가죠. 타리프에게 인사도 할 겸.”
디디에가 제 앞으로 걸으라고 정중히 손짓했다. 사샤는 웃으며 그와 나란히 걸었다.
“시간이 많다면 사샤 양의 승마 실력도 보고 싶은데 말이죠.”
“그저 말 위에 타 있기만 하면 되는걸요.”
“그것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어찌나 허리가 아픈지, 늙은이는 그저 마차나 타는 게 제일이지요.”
디디에의 말에 사샤가 작게 키득거렸다. 발밑으로 풀이 바스락거리다가 이내 마른 흙이 밟혔다. 사샤는 기다란 마구간의 입구에 섰다. 바닥은 깨끗했고 마른 건초의 지푸라기가 조금씩 흘려 있었다.
말들이 푸르르 투레질을 했고 몇몇은 발을 굴렀다. 사샤는 머리를 흔들며 발을 구르는 것이 불안함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급작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타리프.”
사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구간 안에 메아리치는데도 대답의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반쯤 열려 있는 마방의 문을 주시했다. 말이 방목되어 빈 곳이었다. 사샤는 디디에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끼는 듯 보였다. 안심시키려 그녀는 웃었다.
“일을 하고 있어서 잘 안 들리나 봐요. 여기 계세요. 제가 불러올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바쁜 듯하니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사샤는 디디에의 만류를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조바심이 섞인 사샤의 발걸음이 마구간에 울렸다. 그녀는 어중간하게 열린 마방의 문을 잡고 조심스레 밀었다. 끼익, 녹슨 격자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었다.
디디에는 잠자코 마구간의 입구에 서서 사샤와 타리프를 기다렸다. 그녀가 마방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타리프를 그 안에서 발견한 것 같았다. 다 치우지 못한 마방을 청소하느라 분주하리라. 그러나 갑작스레 사샤가 뒤로 주춤 물러서더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디디에!”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달아나요!!”
사샤가 손을 내저었다. 디디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사샤의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뒤로 문이 더 활짝 열렸다. 사샤가 치맛단을 잡았다.
“디디에!!”
아마도 그를 향해 뛰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계속 손을 내저었다. 디디에! 사샤가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우악스레 끌어당겼다. 사샤는 ‘악’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붙잡고 뒤로 쓰러졌다. 상체는 차마 다 쓰러지지 못하고 사내의 손 아래에서 머리카락과 함께 좌우로 움직였다. 디디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내는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반쯤 풀린 눈은 꼭 미치광이의 그것과 같았다. 디디에가 벼락처럼 그 사내의 이름을 외쳤다.
“디터!”
사내의 발밑으로 자욱한 선혈이 흘러나왔다. 누구의 것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디디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신부님.”
희번덕거리는 눈과는 달리 목소리는 한없이 연약하고 조용했다. 목자에게 순종하는 어린양인 듯.
디디에는 그에게 향했다. 목회자로서, 신의 대리인으로서 제 앞에서 그가 벌이는 짓을 두고 볼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당장 사샤 양을 놔줘! 당장!”
“신부님…….”
디디에는 고개를 돌려 마방 안을 확인했다. 그곳에 엎드린 타리프의 시체가 있었다. 그는 선한 이였다. 선하고 성실한 이였다. 누구보다 귀한 신의 자녀였다. 동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 요새를 누구보다 사랑하던 인자한 이였다.
디디에는 디터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분노로 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관자놀이에 비죽 힘줄이 솟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런 짓을!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어떻게 요새 안에서! 이런 짓을 해! 어떻게 내 구역 안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자녀를 죽일 수 있나!”
이곳은 요새다. 성역이다. 사고로 죽는 이는 있어도, 군법에 따라 처형을 당하는 이는 있어도 살인이나 강도, 강간은 없는 곳이었다. 피로 죗값을 치르는 일이 있어도 희생당하는 일은 없는 곳이었다. 누구나, 어느 누구나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고 신께 고해를 하고 마음의 평안과 신의 가호를 받은 뒤에 죽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 마구간은 디디에의 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곳이다. 이것은 마치 성전의 앞마당에서 사람을 해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죄 없는 이가, 죄로 물든 이에게 까닭 없이 귀한 목숨을 빼앗겼다. 그것을 디디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 그 두 손에 무고한 이들의 피를 묻히고 그래도 자네가 신을 믿노라 말할 수 있는가! 자네는 악이야! 지옥 불을 짊어지고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럽고 추잡한 악인이야!”
디디에의 비난이 계속되자 디터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하얀 그의 얼굴이 더 하얗게 바래는 것 같았다. 디터는 떨리는 손으로 디디에에게 맞은 왼쪽 뺨을 매만졌다. 그러나 다른 손은 여전히 힘껏 사샤의 머리채를 쥔 채 놓아줄 줄을 몰랐다.
“당장 놓아줘! 당장 사샤를 놓아줘!”
“나는 최선을 다했어…….”
디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나는 늘 최선을 다했어. 나는 늘…….”
“디터!”
디디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디터는 폭발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질렀다.
“그런데 왜! 왜 나를 비난하는 거야! 대체 왜! 이깟 네르아의 돼지 같은 년이 뭐길래!”
그러더니 디터는 사샤의 머리채를 놓고 이번에는 디디에의 목을 졸랐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디디에가 뒷걸음질 쳤다. 디터가 그것을 쫓으며 더욱 강하게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압박했다.
“내 몸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나를 때리고! 나를 모욕했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충성뿐인데! 당신도! 요한도! 모두 다! 나를 배신했어!”
“디디에!”
신부는 사내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흙바닥은 그의 검은 사제복으로 짓이겨졌고 디터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타 그의 목젖을 눌렀다.
“나는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어! 나는 신실한 신자였어! 당신에게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만데! 교회에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만데! 나처럼 물질적으로 헌신한 신도가 어디 있다고! 내가 악인이면 넌 뭐야!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게 뭐가 나빠! 군인이 사람을 죽이는 게 뭐가 나빠! 죽이기 위해 군인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나라가 만들었지! 당신이 그토록 섬기는 신이 만들었지! 그런데도, 당신들은! 날 모욕하고 배신하고 내게 수모를 줬지! 어째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늘 최선을 다했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그를 놔줘! 디터! 놔줘!”
사샤가 디터의 손을 때리고 잡아당겼다.
“저리 가! 더러운 걸레 같은 년!”
그가 소리 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디터의 주먹이 사샤의 턱을 비껴 쳤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가녀린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게 다 저년 때문이지. 그래. 다 저년 때문이야. 저년 때문에 신의고, 믿음이고, 전우고, 모든 걸 다 배신하지! 모든 걸 다!”
디터가 노신부의 머리를 발로 으깨 버릴 듯이 밟았다. 콱콱 그의 머리가 바닥 위에 짓이겨지고 푹푹 충돌했다.
“그러니까 잘못한 거야! 저년에게 놀아난 멍청한 병신들은 모두 다 잘못한 거야! 너도 잘못한 거야! 너도! 이 빌어먹을 돼지 같은 새끼! 네르아의 창녀랑 놀아난 더러운 돼지 새끼! 이 돼지 새끼야!”
디디에의 얼굴은 어느새 피투성이로 변했다. 그의 발길질에 맞춰 신음하며 몸을 비틀던 동작이 서서히 미미해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노신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것이다.
사샤는 바닥을 기었다. 총. 총이 필요해. 총. 그것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디디에를 살릴 수 있어.
근신 중인 디터는 무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군법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아직 디터는 다른 이의 것을 훔치지는 못한 듯했다. 있었다면 보는 즉시 죽였으리라. 사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눈앞이 어질하고 현기증이 났지만, 사샤는 바닥을 딛고 일어서 뛰었다. 디터를 죽여야 해. 오로지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구간의 끝으로 달려 기둥을 돌았다. 낡은 보관함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열쇠를 찾고 어쩔 시간도 없었다. 사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쇠 지렛대를 하나 발견했다. 손에 잡히는 단단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상관없었다. 사샤는 그것을 쥐고 보관함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우지끈, 우지끈, 보관함의 문짝이 지렛대에 찍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어느 정도 흠집이 나자 사샤는 지렛대를 던져 버리고 발로 콱콱 나무판자를 찍어 눌렀다. 마침내 균열이 간 판자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사샤는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뜯어냈다. 그녀는 권총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보관함의 바닥을 손으로 집어 보다가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을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 권총이었다. 그립이 잡혔다. 사샤는 그것을 꼭 쥐고 손을 빼냈다. 그립이 나무로 되어 있는 제법 총신이 긴 리볼버였다. 총알을 확인해야 했다. 사샤는 총의 이곳저곳을 만졌다. 그러자 약실이 밀렸다. 모두 비어 있었다. 사샤는 다시 보관함을 더듬어 닥치는 대로 꺼냈다. 리볼버의 총알이 든 상자가 딸려 나왔다. 사샤는 다섯 개의 약실 안에 총알을 모두 끼워 넣었다. 손이 떨려 제대로 끼워지지도 않았다. 빨리! 빨리! 빨리!
총알이 가득한 약실을 제자리로 밀자 철컥, 쇠끼리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사샤는 몸을 일으키며 해머를 내렸다. 그러나 채 몸을 일으키기 전에 무언가에 충돌하여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반대편에서 쏜 공처럼 그녀의 뺨을 강타한 후 삽시간에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갔다.
“느려도 너무 느려. 네르아의 계집.”
사샤는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바닥에 입에서 나온 피가 흩어졌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신음이 새어 나갔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 멀리, 바닥에 누운 디디에의 사지가 보였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디디에……. 울컥 눈물이 터졌다. 안돼요. 디디에 신부님. 안 돼요. 부디 그를 구해주세요. 누가…… 부디…….
“제발 신부님을 살려줘…….”
제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줘, 제발. 사샤는 바닥을 기며 그에게 빌었다.
“디터 제발……. 신부님을……. 당신은 신자잖아. 제발 그를…….”
디터는 콧방귀를 뀌었다. 웃음소리는 히스테릭했다.
“그래. 그렇게 눈물을 흘려서 모두를 홀렸지. 요한도, 디디에 신부님도! 타리프도! 요새의 온갖 사내란 사내들은 모두 다 말이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이깟 계집에게 넘어간 그 모든 사내들. 그리고 이런 더러운 계집 때문에 모욕적인 대우를 받는 자신의 처지도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넌 그날 죽었어야 했어. 네년을 생포하는 대신 보반의 사무실에서 죽였어야 했어! 그게 아니면 벙커에서! 그게 아니면 안뜰에서!”
그는 저 좋을 대로 소리를 질러 놓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호흡을 골랐다. 천둥 같은 분노를 한숨 삼키고 그는 한층 차분해진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어 비웃었다.
“옛날 생각이 나네. 사샤. 네가 지하 벙커에서 빠져나왔을 때 말이야.”
허억, 허억, 사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을 굴러 엉망이 된 드레스와 부어오른 그녀의 뺨, 터진 입술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디디에는 말을 이어 갔다.
“그년 이름이 뭐였지? 벨이던가?”
“…….”
“내가 머리를 날려 버린 그년 말이야!”
사샤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디터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바닥에 엎어져 저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그녀의 꼴이 퍽이나 우스운 듯했다. 그것은 그의 부아를 치밀게 하는 대신, 자신의 우월함과 전능함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래! 벨! 그년이 벨이었지! 하하! 그래! 그년 말이야! 네 대신 뒈진 그년!”
그러더니 갑작스레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모든 걸 다 바로 잡을 거야. 네년부터 죽이고서 말이야!”
디터가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마방의 문짝이 날아오며 디터의 몸을 강타했다. 탕! 하고 허공으로 총알이 날아갔다. 히히힝-돌시의 울음소리가 뒤를 이어 고막을 울렸다.
“돌시!”
뒷발로 문을 걷어차고 돌시가 흥분한 듯 머리를 흔들었다. 백색 갈기가 물결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총은 허공으로 날아가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큰 충격에 디터가 바닥에 누워 신음했다. 돌시는 밖으로 나와 사샤의 앞에 서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금방이라도 달릴 듯 머리를 흔드는 투레질이 무슨 뜻인지 사샤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급한 대로 돌시의 갈기를 붙잡고 힘껏 뛰어 그녀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바짝 그 위에 엎드려 목 끈을 힘껏 붙잡았다. 돌시는 그녀를 태우고 총알처럼 앞으로 뛰어나갔다. 닫힌 문은 머리로 들이받았다. 사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속력과 힘에 못 이겨 잠금쇠가 부서졌고 돌시는 그대로 내달렸다.
“사샤!”
뒤에서 디터가 분노가 뒤섞인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사샤는 목 끈을 더 바짝 쥐었다. 달려. 돌시. 더 빠르게.
디터가 씩씩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에서 떨어져 나간 권총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명치에 불이 붙은 듯 아팠다. 갈비뼈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모르핀의 효과가 지속되고 있었고, 망가진 제 육신과 정신에 비하면 바늘에 찔린 것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과 헌신의 말로에 비하면 충분히 가려지고도 남았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억울함과 자신의 희생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사샤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머릿속에 수백 번, 수천 번 그동안 제가 군과 나라와 요한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던 일이 스쳐 지났다.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리사욕 한 번 채워 본 적이 없었다. 늘 희생해 왔다. 고결한 삶을 추구했다. 나라를 위해. 군을 위해. 그리고 요한을 위해!
“빌어먹을 짐승 년들 같으니!”
그는 바닥을 뒤지는 것을 관두고 손상된 보관함으로 향했다. 발을 들어 몇 번 콱콱 차니,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짝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는 라이플을 챙겨 들었다. 총알을 끼우고 초원을 달리고 있는 백마를 향해 정조준 했다.
탕!
방아쇠를 당기니 그 힘으로 총구가 들리며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탕!
다음 번 격발에 마침내 말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히히힝! 울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말과 함께 여자가 앞으로 쓰러져 초원을 굴렀다.
쿨럭! 사샤는 기침을 하며 바닥을 기었다. 앞으로 꼬꾸라지며 받은 충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콜록! 사샤는 한 번 더 기침을 하고 몸을 돌려 돌시를 보았다. 언제나 꼿꼿하게 서 있던 암말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돌…….”
돌시.
말이 푸르르 소리를 냈다.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붉은 것이 번졌다. 안 돼, 돌시. 안 돼. 안 돼.
탕! 디터가 한 발을 더 쏘았다. 바닥에 총알이 박히고, 그로 인해 튄 모레와 풀잎이 사샤의 뺨을 때렸다. 사샤는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탕! 한 발을 더 쏘았을 때, 총알은 암말의 엉덩이에 박혔다. 돌시가 소리 높여 울었다.
“그만! 그만해! 그만!”
제발 그만해! 이제 그만해. 더는 돌시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폐부가 찢기는 듯이 고통스럽다. 이제 충분해. 그만해. 제발. 더는 돌시를 아프게 하지 말아줘.
무슨 일인지, 돌시가 천천히 머리를 땅에 뉘었다. 더 이상 울거나 일어나려 버둥거리지도 않았다. 뭔가가 달랐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돌시. 안 돼 돌시.
사샤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암말을 향해 허겁지겁 기어갔다. 손끝에 간신히 암말의 주둥이가 닿았다. 그녀의 콧김이 느껴졌다. 평온하고 따듯했다. 안 돼, 지금 포기하면 안 돼. 그러지 마.
“가자. 돌시. 가자……. 나랑…….”
달아나자. 그러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너와 나 둘이서 떠나자. 너는 아름다운 갈기를 흔들고, 나는 네 온기를 느끼며 계속해서 달리자.
“제발…….”
다 잃을 순 없어. 너를 잃을 수는 없어. 내가 너를 사랑한 탓으로. 네가 나를 사랑한 대가로 너를 이렇게 만들 순 없어. 타리프처럼, 디디에 신부님처럼……. 너를 이렇게 빼앗길 순 없어.
돌시가 머리를 앞뒤로 꺼덕거렸다. 제 머리를 잡은 사샤의 손을 밀어내는 듯했다.
“싫어!”
사샤가 도리질 치며 울었다.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갈 거야!”
탕! 디터가 한 발 더 쏘았다. 이제는 조준을 하지도 않고 쏘기 시작했다. 토끼몰이를 하듯 느긋하게 그녀를 사지로 몰고 있었다. 총이 돌시의 뒤 관절을 관통했다. 돌시는 짧게 고개를 들고 울더니 다시 머리를 뉘었다. 사샤는 몸을 움츠렸다가 말굴레를 잡고 당겼다.
“돌시! 일어나! 같이 가! 같이 가자니까!”
암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투레질도 히힝 하고 울지도 않았다. 따듯한 콧김을 뿜으며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사샤는 ‘흑’ 하고 그녀의 따듯한 볼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부탁해. 돌시 같이 가. 제발. 같이 가자…….”
이럴 거라면 너에게 다가가지 말걸. 마구간에는 얼씬도 하지 말걸. 너에게도. 타리프에게도. 디디에 신부님에게도.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무언가를 바란 탓이야. 온기를. 따듯한 대화를. 보호를. 위안을. 사랑을. 내가 살자고, 모두를 죽였어. 모두를.
돌시가 다시 투레질을 했다. 사샤의 보챔에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앞발을 굴렀다. 그러나 몸부림이 계속될수록 커져 가는 것은 고통뿐, 암말은 조금도 일어서지 못했다. 히힝, 히히힝.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였다. 아아. 들을 수 없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사샤는 돌시의 얼굴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그만해! 그만해 돌시! 미안해! 그만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너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외로움만을 생각하였다. 네 아픔은 감히 헤아리지 못하고 괜한 어리광을 부렸다. 돌시. 나의 사랑스러운 암말. 미안해. 나는 네게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
“잘 생각했어! 사샤! 도망가 봤자 너는 독 안에 든 쥐라고!”
디터가 멀리서 고함을 쳤다. 돌시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가 자기에게서 멀어지기를 종용했다. 암말이 말했다. 도망가. 멀리 도망가. 사샤는 암말의 볼을 쓰다듬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빛나는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는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보석처럼 빛났다. 그녀의 영혼은 그 어떤 생명보다 맑았다. 아름다웠다. 천국이 존재한다면 오로지 이 암말만이 다다를 수 있으리라. 사샤는 그녀의 콧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미안해, 돌시.”
너를 사랑해서 미안해. 나는 너의 몫까지 나를 저주하리라. 너의 몫까지 나를 증오하여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그러므로 지금 나는 너에게서 등을 돌린다. 디터의 손에 순순히 죽지 않겠어. 그것이 운명이라 하여도 굴종하듯 그에게 무릎을 꿇은 채 죽음을 기다리지 않겠어. 네 몫까지. 돌시. 그리고 디디에의 몫까지, 타리프의 몫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운명을 거스르려 발악해보겠어. 비록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반항이라 하여도 그것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반항이리라. 사샤는 몸을 돌려 숲을 향해 뛰었다. 왕의 사냥터.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른다는 곳을 향해.
“사샤!”
디터가 고함쳤다. 그는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라이플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빈 방아쇠만 부질없이 당겨졌다.
“젠장!”
그는 욕을 지껄이며 미리 소지해 둔 총알 클립을 찾아 끼웠다. 그러나 다시 라이플을 조준했을 때는 사샤는 더 이상 조준할 수 없는 먼 곳까지 달아난 뒤였다.
디터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라이플을 어깨에 걸었다.
“사샤!”
사샤, 이 망할 계집!
디터는 사샤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 사샤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넌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내가 잡지 않아도 넌 길을 잃고 굶어 죽거나, 산짐승의 먹이가 될 테니까!”
희미하던 것이 이젠 완전히 시야에서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디터는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뜀박질도 멈춘 채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아도 버석하게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고요할 뿐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네년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니까! 내가 아니라도 넌 죽는다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야! 아주 천천히 고통을 느끼며 죽겠지! 늑대들이 네 내장을 파먹을 때는 나처럼 자비도 베풀지 않겠지. 듣고 있어!? 듣고 있냔 말이야! 빌어먹을 더러운 계집애!!”
약이 바짝 올랐는지 종국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질렀다.
“네년을 찾으면 사지를 갈가리 찢어 죽이겠어! 도망가려면 가 보라고! 너는 내 적수가 안 돼! 알아!? 넌 내 적수가 안 된다고!”
사샤는 나무 기둥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디터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 부딪혀 사샤의 귓가에 잔상을 남기며 부서졌다. 끔찍했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멈추고, 곧 죽을 것 같았다.
“모두가 네년의 농간에 속아 넘어갔지만 말이야! 내겐 통하지 않아! 왜인지 알아, 사샤!? 그건 내가 월등히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내가 너무나 뛰어나서 모두 날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멸하는 거야! 모두가 말이야! 빌어먹을, 모두가!”
적어도 요한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들과 달랐다. 저처럼. 그래서 디터는 기꺼이 요한을 섬겼다. 그를 신처럼 추앙했다. 하늘 아래 그 같은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저뿐이라 생각했다. 그는 특별했고 그의 특별함은 자신을 통해 빛났다. 요한이 다이아라면 그것을 갈고 닦아 빛을 내는 것은 바로 디터, 자신이었다. 그는 디터의 유일한 보석이었다. 그가 빛나면 자신도 빛났다. 왜냐하면 우린, 같은 부류였으니까. 당신의 특별함을 오로지 나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나를 이해하는 것처럼 당신을 이해했지.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지. 이 네르아의 계집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샤 로랑이 대관절 무엇이건대, 요한은 그녀에게만 특별한 눈빛을 하는가. 왜 그토록 무른가. 어째서 그토록 즐거운 눈빛을 하는가. 어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으로 좇는가. 왜 눈이 마주치면 찰나의 순간 입을 다물고 그것을 음미하는가. 마치 무엇인가 통하는 듯이.
그것은 내게는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던 내게는 한 번도 준 적이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아는데. 나는 당신과 같은데도. 나도 당신과 같이 우월하고 특별한데도. 왜 나는 벌레 보듯 하고, 그녀는 아름다운 나비를 보는 듯 하는가.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 굴종하는 것은 나이고, 당신을 죽도록 증오하고 더러운 욕을 배설하는 것은 그녀이건만. 그녀가 입으로 뱉어 내는 것은 빛나는 금화이고, 내가 당신에게 고하는 찬양의 언사는 가축의 분변인 듯 대하는가. 그녀가 오기 전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적어도 당신은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를 그토록 깔보지는 않았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사샤 로랑.”
그리하여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네가 가져간 모든 것은 본디 내 것이었다. 그러니 몇 날 며칠이 지난대도 나는 너를 ?아, 너의 배를 가르고 네가 주워 먹은 모든 것을, 내 것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내 임무이고 권리이다.
디터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무 기둥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지만 겁에 질린 탓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냈다.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론가 뛰어야 했다. 그녀는 좌우를 살피며 어디로 뛰어야 할지 가늠했다. 디터의 목소리는 왼편에서 들렸으니 반대편인 오른쪽으로 뛰면 될 것 같았다. 사샤는 호흡을 고르고 오른쪽 숲을 향해 몸을 던졌다.
“컥!”
그러나 나무 기둥을 벗어나기 무섭게 크고 단단한 손이 옭아매듯 사샤의 목울대를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얕은 네 잔꾀는 진작에 다 읽혔지. 사샤 로랑. 내가 너 같은 얼뜨기인 줄 알아?”
상대는 군인이었다. 그것도 적을 고문하고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장교. 애초에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발각되자마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넋이 나갔다. 디터는 사샤의 목을 쥐고 나무 기둥에 짓눌렀다. 컥, 컥, 이마와 눈동자에 핏줄이 붉어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느새 발끝이 허공에 들렸다. 사샤는 무의미하게 두 발을 버둥거렸다.
“내가 말했지. 네년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고 말이야.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디터는 그녀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사샤의 몸이 꺾인 나뭇가지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등, 옆구리, 어깨. 머리. 그는 닥치는 대로 차고 밟았다. 사샤는 본능적으로 몸을 말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네까짓 게 뭔데! 뭔데! 돼지 같은 년! 더러운 창년!”
사샤는 바닥을 기었다.
“그래! 기어 봐! 벌레처럼 기어 보라지! 이게 원래 네년의 위치야! 더러운 벌레처럼 진흙 속을 뒹구는 게 바로 너란 말이야!”
디터가 흥분을 못 이겨 악을 지르자 사샤는 그의 오른발 바짓단을 붙잡았다. 디터의 왼발에 밟히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두 손으로 감쌌다. 곧 살려 달라고 구걸할 태세였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기 직전인 듯했다.
“이제 와 목숨이라도 구걸하려고? 벌레처럼 기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라도 해 보려고?”
이제 와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다니 여간 멍청한 계집이 아니다! 디터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사샤는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허벅지에 매어 놓은 단도를 꺼내어 있는 힘껏 디터의 아킬레스건을 그어 버렸다. 이를 문 사샤의 잇새에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었다. 손상된 아킬레스건에서 튄 피가 사샤의 볼에 묻었다.
“으아아아아악! 내 발…… 내 발!”
디터는 무릎을 대고 주저앉아 손으로 피가 솟구쳐 오르는 제 아킬레스건을 쥐었다. 사샤는 총 맞은 짐승처럼 울부짖은 디터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이 개 같은 년이!”
디터가 손을 뻗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이거 놔!”
사샤는 그를 떼어 내려 발을 굴렀다.
“어딜 도망가! 빌어먹을 개…….”
사샤가 단도를 들어 그의 손등을 찔렀다. 푹, 하고 칼날이 손등에 박혔다
“아악!”
디터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미 이성을 잃은 사샤는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 발을 놓을 때까지 계속해서 단도를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손목에, 팔뚝에 단도가 사정없이 꽂혔다. 종국에는 손가락을 지탱하는 힘줄이 단도에 꿰뚫렸다. 디터는 결국 그녀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디터는 덜덜 떨며 제 어깨에서 흘러내린 라이플을 집었다. 넝마가 되어 버린 시뻘건 손으로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사샤를 향해 조준하려 했다. 그러나 사샤가 더 빨랐다. 사샤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단도로 그의 목을 그어 버렸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번개처럼 빨랐다. 사샤 자신도 그토록 스스로가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몰랐다. 디터가 ‘컥’ 소리를 내며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사샤의 안면을 적셨다. 사람의 피는 뜨거웠다. 상기된 뺨에도 그 열기가 느껴졌다. 사샤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피가 닿지 않는 곳까지 뒷걸음질 쳤다. 얼마 후 디터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사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살기는 움직이지 않게 된 때로부터 한참이고 가시지 않았다.
허억. 허억. 허억…….
숲은 고요했다. 디터는 움직이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오로지 저 자신이 내뿜는 호흡과 피부를 적시는 피의 뜨거움만이 그녀의 감각을 고동치게 했다.
“…… 디터……?”
사샤가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발로 툭툭 그의 어깨를 쳐 보았다. 축 처진 사지는 돼지의 비계처럼 흔들렸다. 명백히 죽은 자의 몸이었다.
이제……. 이젠 어쩌지. 어떻게 하지. 사샤는 제 손을 내려 보았다. 핏물과 보석이 박힌 단도가 제 손 안에 엉겨 있었다. 그녀는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본 듯 그것을 털어 냈다. 치맛단에 손을 쓰윽쓰윽 닦았다. 붉은색으로 물든 손은 여전히 쉽게 그 색을 지우지 못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손이, 입술이, 심장이, 온몸이 떨렸다.
죽였어. 디터를 죽였어. 그를 죽였어. 드디어 죽였어!
희열이 솟구쳤다. 그러다 두려움에 몸서리가 났다.
죽인 거야. 사람을…… 죽였어. 사람을 죽였어. 어쩌지. 어떻게 하지. 이제 어쩌면 좋지. 제가,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아아. 하나님. 제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아요. 아아…… 아니, 내가 죽인 건 사람이 아니야! 그는 디터야! 난 복수를 했어! 소원을 이룬 거야! 내가 이룬 것은 정의야! 디디에를 대신해서, 타리프를 대신해서! 벨을 대신해서! 난 그를 단죄한 거야! 신을 대신해 내가 그를 단죄했어! 그는 죽어 마땅해! 아니!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것은 달라지지 않아. 죄를 지었어요. 전 지옥으로 가겠죠. 너무 끔찍해. 난 끔찍한 죄를 저질렀어. 아니야…… 아니……. 아니야…….
머릿속이 텅 비었다. 아무것도 그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사샤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희열과 두려움이, 기쁨과 공포가 번갈아 그녀를 몰아쳤다.
달아나. 달아나, 사샤. 달아나야 해. 이곳에서 도망가야 해. 그래. 그러자. 그래야 돼. 사샤는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지? 몰라.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사샤는 아무렇게나 발을 내디뎠다. 하늘이, 나무가, 구름이,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몸이 비틀댔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빈혈이 났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사물이 흐릿하고 모든 게 두 개, 세 개씩 보였다. 호흡이 가쁘고 눈앞의 풍경이 노랬다가 흐렸다가 다시 노래졌다.
사샤.
요한.
사샤!
요한.
“사샤!”
이명 같은 목소리가 마침내 현실로 들렸다. 어디쯤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지? 어디였더라? 어디서 부르는 거지?
“사샤!”
그녀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흐릿한 시선이 명료해졌다. 요한이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헛것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요한이 손을 내밀었다. 시린 가죽장갑이 그녀의 뺨을 붙들었다. 그의 숨소리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사샤는 눈을 들었다. 그의 투명한 벽안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야. 현실이야. 실제야.
그의 두 손으로 사샤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가녀린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봐. 따듯해. 요한이야.
요한이 그녀를 품에 안고 꽉 붙들었다. 여린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내, 내가…… 디터를…….”
사샤가 그의 품 안에서 웅얼거렸다.
“디터를…… 죽였어. 목을, 목을 그었어. 내가 목을 그었어. 피가, 피가 났어. 피가…….”
피가 아주 많이 났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했어. 내가 죽을까 봐 먼저 그를 죽였어. 나 잘한 거지? 그렇지? 그렇지, 요한?
요한이 그녀를 품에서 떨어뜨리고 콧등에, 뺨에, 입가에 뒤집어쓴 붉은 물감 같은 것을 손으로 닦아 냈다. 너는 전사가 아니야. 사샤. 피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떤 이는 피를 뒤집어쓰면 고귀하고 황홀한 전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핏물에 젖은 민들레 꽃씨 같았다. 어울리지 않았다. 무게에 짓눌려 날 수 없는 가련한 존재로만 보였다.
“요한. 내가…… 내가……. 죽였어. 타리프도. 디디에 신부님도. 내가.”
“알아. 알아들었어. 그러니까 그만해.”
“…….”
사샤는 뭍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멍하게 고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요한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샤는 그를 따라가며 휘청거렸다. 요한은 그녀를 저가 타고 온 말로 이끌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요한?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가 디터를 죽였어. 내가 사람을 죽였어.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였어. 그래서 내가 사람을 죽였어.
“정신 차려! 사샤!”
요한이 고함을 질렀다. 사샤는 움찔 떨며 그를 보았다.
“지금 넋 놓을 때가 아니야. 그런 건 요새로 돌아간 다음에 하도록 해! 알겠어?”
“…….”
사샤는 고개를 발작적으로 끄덕였다. 요한은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려 말의 안장에 앉혔다. 그러고는 뒤따라 오르지 않고 말고삐를 잡고 끌었다. 따그닥따그닥, 말이 그가 이끄는 대로 발굽 소리를 내며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엎드려 있는 디터의 시체가 보였다. 요한이 말을 세워 놓고 그에게 다가가 몸을 반대로 뒤집고 라이플과 총알 클립을 빼앗아 제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다시 말의 고삐를 잡고 걸었다.
죽어 나동그라진 디터의 시체에는 아무런 볼일이 없어 보였다. 일말의 아쉬움도, 미련도, 혹은 분노도 없는 듯했다. 요한을 향한 디터의 맹목적인 사랑의 결말이었다. 지독한 대가지만 그렇기에 디터에게 어울렸다. 그의 오만함과, 지나친 자기 연민, 그리고 착각에 딱 어울리는 결말.
그들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무척이나 쉽게 숲을 빠져나왔다. 요한이 왕의 사냥터에 대해서 다 꿰고 있다는 타리프의 말은 진실인 것 같았다. 타리프가 떠오른다. 언제나 겸손하던 노인의 말투와 생명이 떠난 그의 차가운 모습도. 그리고 디디에…… 그리고…….
마구간으로 향하는 들판 한가운데 아직 돌시가 있었다.
“돌시!”
사샤가 금방이라도 말에서 뛰어내릴 듯했다. 그러나 요한이 고삐를 그리로 끌었다. 사샤를 태운 암갈색 말이 천사같이 새하얀 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피에 젖은 암말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요한이 그녀에게 다가가 다리를 매만지고 몸을 굽혀 그녀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돌시.”
요한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돌시는 제 주인의 손길을 음미하며 푸르르 소리를 냈다. 그는 콧등을 긁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돌시. 나의 다정한 아가씨.”
암말이 다시 푸르르 소리를 내었다. 저를 향한 주인의 애정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말고삐를 잡고 돌시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었다.
“요한?”
사샤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한. 왜 그대로 두고 오는 거야? 왜 그녀를 거기 두고 가는 거야? 의문으로 사샤가 요한과 돌시의 멀어지는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별안간 요한이 걸음을 멈추고 소총을 장전했다. 사샤는 그의 총구가 향하는 곳을 보았다.
“…….”
사샤가 입도 뻥긋하기 전에 돌시의 이마에 총알이 박혔다. 말의 머리가 뒤로 밀렸다가 반작용으로 앞으로 쏟아지며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요한의 암말이며, 또 사샤의 암말이기도 했던 돌시는 일말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죽었다. 요한은 라이플을 어깨에 메고 다시 말고삐를 끌었다. 사샤는 고개를 떨궜다. 놀랐고, 충격적이었고, 또 그 이후에는 아팠다.
그것은 그가 암말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구원은 죽음이고, 사랑은 그 결말로 향하는 길고 지난한 길인지도 모른다.
아아.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요한. 당신의 얼굴에 늘 어둠이 가득했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