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6화
15.
대리석으로 만든 라울의 커다란 책상 위에는 도첸과 그를 상징하는 심벌이 섬세하게 세공된 황금색 탁상 장식이 놓여 있었다. 라울은 불안한 손으로 신문을 내던졌다. 신문의 1면에는 말라오에 도착한 요한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카렐에게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도첸의 서기장이 대체 누구란 말이야! 이래서야 도첸의 서기장은 나 라울이 아니라 윌렌도르프인 것 같잖아!”
공허할 정도로 커다랗고 화려한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카렐은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신경 쇠약과 맞물려 라울의 편집증도 함께 도졌다. 그의 광증을 달래 주는 것은 오로지 아편뿐이었다. 결국 요한이 말라오까지 날아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환호하게 된 것도 결국은 라울 때문이었다. 그는 이 커다란 자신만의 왕궁에 틀어박혀 화려한 금장과 대리석 장식에 둘러싸여 망상에만 젖어 있을 뿐, 바닥난 도첸의 재정이나, 사방에서 밀려드는 군사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라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다. 도시의 이곳저곳에 벙커를 짓고, 자신만을 위한 비행기와 대공포와 대공 차량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경호만을 위한 제국 보안부를 만들어 자신이 가는 길목에 100m마다 병사를 한 명씩 세워 두고는 했다.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해 밀림을 만들고 그 안에 비행기, 탱크, 대포, 격납고를 저장해 두는 것도 모자라 만약을 대비해 2m 두께의 시멘트 아래에 묻어 두는 것이 라울의 주요 정책이었다.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것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카렐은 그런 라울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라울을 신봉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광증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종마를 들이듯, 제 측근들은 족보를 따져 혈통을 중심으로 뽑는 라울의 규칙에서 카렐은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는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로 요한처럼 라울이 좋아하는 백금발에 벽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혈통이 좋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요한을 만나 도첸의 주요 관리가 되었다. 우연히 주점에서 만난 갈 곳 없는 젊은이에게 소파를 내어 준 것뿐인데 그는 요한의 은인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맞지 않는 자리, 과한 부와 권력은 그에게 아주 약간의 달콤함과 거대한 불안을 선사했다. 아름답고 어딘가 망가져 있던, 보헤미안 같던 청년은 정갈한 제복 아래 이제는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어 버렸고, 한때 거대한 제국을 이룩할 거라며 야망에 불타던 시대의 영웅은 종전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더는 진심을 다해 마음을 주고 믿을 만한 이가 남아 있지 않다.
“그놈을 죽이겠어! 반역죄다! 반역으로 죽이겠어!”
라울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요한을 죽일 수 없다. 요한에게 위협받는 것은 그의 자리이나, 그 외의 것들에게 위협받는 것은 소중해 마지않는 그의 목숨이었다.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연합국에서 라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라울이 살아 있는 것이, 라울이 죽은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없는 라울은 그림자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것을 라울도 안다. 다만 마약이 떨어져 광증이 도지면 발작처럼 요한을 원망할 뿐이다. 언젠가 그 광증에 내몰려 요한을 처단하는 때에 그도 함께 몰락할 터였다.
카렐은 라울에게 된서리를 맞고 나오자마자 통신병에게 말라오에 있는 요한에게 전화선을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통신병이 카렐에게 전화기를 주었다.
“대장님, 연결했습니다.”
카렐은 서둘러 수화기를 잡았다.
“요한.”
―대장님.
요한의 목소리는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차분했다.
“대체 어디쯤이야! 서기장님이 자네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시네!”
―그러시겠죠. 가는 길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느라 좀 지체되고 있지만요.
“약은 구했나?”
―네.
“채굴과 개발권은?”
―결렬됐습니다.
카렐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 개발과, 그 운송 수단을 움직일 연료가 곧 바닥날 터였다. 석탄과 석유 채굴의 보장 없이는 도첸에서 개발하고, 또 사들인 무기는 모두 골동품에 불과했다. 이 사실이 연합군으로 넘어간다면 도첸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연합군과 우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어요. 적어도 수천억의 현금을 쥐여 주지 않는 이상, 그들은 석탄을 내놓지 않을 겁니다.
역시 국제 은행에서 돈을 차용하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도첸의 법은 대부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만일 군이 국제 은행에 돈을 빌린다면 정부가 법을 어기는 셈이 된다. 국민들의 반발과 분노를 살 것이 뻔했다. 여차하면 그동안 나라에 불만을 품었던 자들에게 폭동을 일으킬 빌미를 주고 만다.
“라울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차라리 말라오와 전면전을 하려 들 걸세.”
―자원이 없는 한 그것도 불가능하지요. 서기장님이 정신을 차리면 조만간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도 도첸의 안녕을 위해 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하려 할 테니까요.
“언제쯤 도착하겠나?”
―당신과 전화를 끊으면 쉬지 않고 달려갈 겁니다. 적어도 모레에는 빅토리아로 돌아가야 해서요. 보반의 베스트맨이 되어야 하거든요.
카렐은 보반 의원의 돼지 같은 덩치와 비열한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의 방식은 늘 존중하지만 말이야, 요한. 보반 그 작자는 얼간이야. 조만간 아예 치워 버리는 편이 좋을 거네.”
그토록 비루하고 탐욕스러운 인상을 주는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머리에 든 것도 없이 비계만 잔뜩 껴서 개처럼 짧고 볼품없는 꼬리나 흔드는 인간 말이다. 카렐은 어째서 그런 보반을 살려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역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몰랐다고 말하는 그의 결백을 믿지도 않을 터였다. 충직하지도 그렇다고 이용해 먹기도 좋은 인간이 아닌데도 요한은 그를 살려 두고 체제의 선전을 위해 써먹겠다고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다. 명심하죠. 대장님.
요한의 정중한 인사를 듣고 카렐은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화로웠으나 눈앞에 닥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카렐은 어쩐지 앞으로 영영 평화로운 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
타리프는 안장을 얻은 돌시의 위에 사샤가 오르는 것을 도운 후 말했다.
“말고삐를 단단히 쥐십시오. 사샤 양.”
사샤는 그의 말에 따라 돌시의 등에 늘어져 있는 고삐를 쥐었다.
“너무 힘껏 당기시면 안 됩니다. 이제 천천히 돌아보죠.”
타리프가 돌시의 엉덩이를 치며 ‘쉿쉿’ 소리를 냈다. 그러자 돌시가 느리게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샤는 오래전, 요한과 함께 돌시의 안장에 앉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무슨 정신으로 그토록 빨리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말에서 떨어져 발에 채이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손에 잡히는 것들을 붙잡고 늘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요한과 함께 다 부서진 야외극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샤는 처음으로 사람을 찔렀다.
그때의 어지러운 감정과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괴로움과 뜨거움에 몸부림치던 자신을, 요한의 살을 파고들어 가던 단도를. 그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좁았던 안장에 둘이서 나란히 몸을 붙이고 있었을 때 너도 나처럼 뜨거웠던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까.
“녀석의 걸음걸이가 가벼운 걸 보니 무척 기분이 좋은가 봐요.”
타리프가 돌시를 앞으로 인도하며 말했다. 사샤는 정신을 차리고 리듬에 맞춰 흩날리는 돌시의 말갈기를 쳐다보았다. 솜털처럼 가볍고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녀는 손으로 그녀의 갈기를 몇 번 쓸었다. 돌시의 몸은 부드럽게 움직였고 안장은 무척이나 편했다. 조금 더 속도를 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빨리 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발을 굴러 돌시의 가슴을 차면 됩니다.”
타리프는 자신이 쥐고 있던 보조 고삐를 풀고 웃어 보였다.
“돌시가 사샤 양을 공주님 모시듯 모시니 저는 뒤로 물러나 있겠습니다. 멈추고 싶으면 고삐를 뒤로 당기시면 됩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말 머리를 당기시면 돌시가 그쪽으로 갈 겁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리프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돌시의 옆구리를 살짝 찼다. 그러자 돌시의 걸음걸이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처럼 조금 빨라졌다.
사샤는 돌시의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말고삐를 당기거나 방향을 틀거나 하지도 않았다. 돌시는 방목장의 울타리를 따라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돌시에게 그 어떤 명령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오직 이 암말만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이 흘러 섞이듯 사샤는 돌시의 감정을 공유했다. 진실로 자신을 아끼는 마음, 그것으로 보호받는 듯한 느낌은 오로지 돌시에게서만 받을 수 있었다. 요한을 태우고 늘 끝도 없는 벌판을 달리던 그녀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망아지처럼 조심스럽고도 차분하게 걷는 것은 오로지 사샤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울타리를 뛰어넘어 빽빽하게 들어찬 조경수 사이로 힘껏 내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사샤도 그녀의 등을 붙잡고 같이 울타리를 넘어 먼 곳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렇게 돌시와 함께 방목장을 몇 바퀴 돌다가 사샤는 그녀의 목을 쓰다듬고 내렸다. 타리프가 양동이를 들고 다가왔다. 사샤는 돌시의 콧등을 쓰다듬으며 사과 하나를 그녀의 입에 물려 주었다.
“말을 아주 잘 타십니다.”
타리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샤도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런가요?”
“처음치고는 정말 익숙하세요.”
사실 처음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사샤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다시 빙그레 웃어 보이고 다른 것을 물었다.
“저 주엽 나무가 빼곡한 곳은 모두 숲인가요?”
타리프는 사샤가 쳐다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랫동안 왕족의 사냥터로 이용했던 곳이지요. 숲이 넓고 울창해 길을 잃기에 십상이에요. 전쟁 때는 꽤 요긴하게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요한 소장님은 숲의 끝에는 바다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빅토리아 강줄기가 이어진다고요.”
“요한은 숲을 잘 아나요?”
“그럼요. 소장님께서는 이 성의 모든 곳을 다 줄줄이 꾀고 계시죠. 군인들도 가끔 토끼나 꿩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조난당하고는 하는데 매번 요한 소장님만이 그들을 찾아오고는 하시죠.”
사샤는 숲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돌시가 사과를 보채자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타리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경고했다.
“아무튼, 너무 깊으니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사샤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그녀는 돌시의 털을 정성스레 빗질해 주고 직접 마방으로 암말을 끌고 갔다. 돌시는 그녀를 잘 따랐다. 굳이 줄을 잡아끌지 않아도 돌시는 그림자처럼 사샤의 뒤를 따르다가 툭툭 그녀의 엉덩이를 치며 장난을 걸기도 했다.
“내일 또 올게.”
사샤는 타리프가 말고삐를 빼고 안장을 벗겨 벽에 거는 동안에 돌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은 좀 더 달려 보자. 언젠가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푸르르, 암말이 투레질했다. 사샤는 그녀의 볼을 한 번 어루만지고 마방 문을 닫았다. 타리프는 그녀가 돌시와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가시죠. 아가씨. 성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
사샤는 타리프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요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오래된 전설이나 실제 왕이 살았을 때 이곳이 어떠했는지 같은 것을 타리프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사샤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오래전 엄마나 아빠가 머리맡에서 해 주던 옛 동화 같았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네르아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타리프가 말하길 네르아의 무관들이 훈련을 받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아끼던 짐승을 잡아 도축하는 일이라 했다. 막 알에서 부화해서부터 커다란 수탉이나 암탉이 된 닭, 거위, 어미 배에서 태어나 일일이 젖을 먹이고 잠자리를 봐 준 돼지나 소, 말 같은 것들. 때로는 전우를 가장한 적을 망설이지 않고 죽이기 위한 첫 번째 훈련이었다. 사샤는 저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닭의 모가지도 제대로 비틀지 못해 울고 토하던 날들 말이다. 만일 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곧 죽어도 무관은 되지 못했을 터였다. 절대로 애지중지 키우던 가축을 죽이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아. 다 왔네요.”
사샤가 여기저기 가축의 울타리가 쳐져 있는 성채의 뒷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사용인들이 쓰는 뒷문인데요. 아가씨.”
“괜찮아요. 뒷문으로 들어가는 게 더 쉽거든요.”
“하지만…….”
타리프는 영 찝찝한 듯 말꼬리를 우물거렸다. 아마 저의 진짜 신분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사실 가진 것 없이 국경을 넘어온 첩자이자 포로라는 것을 알면 어째서 그녀가 사용인들이 쓰는 낡은 뒷문이 더 편하다는 것인지 그도 알게 될 터였다. 이미 수없이 드나들었던 문이라는 것도 납득할 터였다.
“조심히 가세요. 타리프 씨.”
“예. 사샤 양. 또 뵙겠습니다.”
타리프가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사샤는 외투를 여미며 버석한 낙엽 더미 위를 걸었다. 소와 돼지의 분뇨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일꾼들은 젖을 짜고 돼지 풀을 쑤고 축사를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쯤 누군가 남루한 뒷문을 벌컥 열고 성안에서 뛰쳐나왔다. 뭔가에 쫓기듯 성벽을 따라 뛰더니 곧 얼마 가지 못해 허리를 푹 숙이고 새하얀 토사물을 게워 냈다.
“…….”
사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낯익은 실루엣을 가늠했다. 얼핏 보면 사용인과 같아 보이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지만 틀어 올린 머리며,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는 분명 장교의 것이었다. 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입술을 닦고 고개를 쳐들다가 여자는 사샤와 눈이 맞았다. 그러고는 완전히 얼어 버리고 말았다.
도로시.
“…….”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사샤는 한때 소아 병동의 간호사였다. 그전에는 야전 병동에서 다친 군인들을 치료했다. 사샤는 그동안 몇 번이나 이 같은 모습을 보았다. 상처를 입은 장교나, 젊고 건장한 군인과 눈이 맞아 배를 부여잡고 뒷문으로 드나들며 구역질을 하던 간호사들을 말이다.
사샤가 다가가자 도로시는 현기증이 나는지 벽을 짚었다. 사샤는 앞치마에 가려진 그녀의 배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도로시가 황급히 제 배를 두 손으로 가렸다. 입덧할 정도라면 임신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벌써 임신한 태가 날 리는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긴 했지만,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는 친근한 사이도 아니니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로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봐.”
사샤는 걸음을 멈추었다.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도로시가 몇 번이고 입을 뻐끔거렸다.
“못 본 척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려고 했다. 굳이 불러 세우지 않아도 말이다.
“지울 거니까. 곧.”
아이를 지운다고? 그 말이 사샤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이를 지우는 것은 불법이었다.
“어떻게?”
“해 주겠다는 사람을 찾았어. 돈만 가져오면 언제든 가능하댔어.”
“의사야?”
“…….”
도로시는 입을 닫았다. 의사가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는 의사 대신 창녀촌에서 일하는 허가받지 않은 산파를 찾았다. 멀쩡한 아이를 낳는 것보다 아이를 죽여 끄집어내는 일을 주로 하는 산파였다. 높은 금액을 받고 그들은 아이를 죽인다. 모든 게 다 불법이고 위험했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그로 인해 산모도 너무 쉽게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실력이 아주 좋댔어. 웬만한 의사보다 더 경력이 많고…….”
“아이를 지우고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가는 여자를 나는 지금껏 못 봤어.”
“…….”
“한 번도 못 봤어.”
정말이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둘 중 하나는 심한 후유증을 앓았고 또 하나는 죽었다. 아이를 지우고 멀쩡한 여자도 있다고는 했다. 몇 번이고 지우고도 멀쩡히 살아 여전히 남자를 받는 창부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샤는 보지 못했다. 그저 뜬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죽어 가는 여자는, 죽은 여자는 직접 보았다. 실낱같은 목숨을 간신히 연명하다가 바람만 불면 허무하게 꺼지는 모습을 말이다.
“남자는 알아?”
“…….”
도로시의 시선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설핏 그녀의 어깨가 두려움으로 떨리는 것 같았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그러면서 그녀가 앙칼지게 대꾸했다. 시선을 외면한 채 헛되이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오래전, 도첸이 네르아였을 때에는 처녀가 아이를 밴 채 결혼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한 생명을 품고 하는 결혼을 축복으로 여겼다. 색색이 예쁜 꽃과 풀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맨발로 구름처럼 폭신한 목화를 밟았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동네의 처녀와 아이들이 신부의 둥근 배 위에 색색의 그림을 그렸다. 축복과 순산의 의미였다. 네르아는 예로부터 아이들이 귀하다고 했다. 신문물이 들어오고 새로운 신앙이 들어와 교회를 세워도 생명에 대한 네르아의 가치는 대를 이어 지켜지고는 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배는 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야전 병동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샤는 여전히 어째서 생명이 불길함과 더러움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한 기억은 그토록 오래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지배했다. 만일 이곳이 도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도로시는 아이를 가진 일로 이토록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몸조심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순간 도로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불쾌하거나 치욕스러워서가 아니라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누군가 알아주었을 때 복받치는 감정 탓이었다. 사샤는 혹시라도 그녀가 저의 앞에서 눈물을 터트리기 전에 자리를 떴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늦은 오후에는 보반과 함께 차를 마셨다. 그는 커피와 함께 나온 푸딩을 한 스푼 떠먹고는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냈다.
“푸딩이 아주 일품이야. 그거 알아, 사샤? 이 푸딩은 멀리 타히티의 고급 바닐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이 안에서 푸딩을 먹을 수 있는 자는 요한 이외에 우리가 유일해. 그만큼 귀한 손님이란 이야기지.”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대단히 낙천적인 자세를 취했다. 방첩부에 잡혀 고문받았던 과거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은 물론 결혼을 비롯해 모든 것은 연극일 뿐인데 그는 그 역할에 완전히 심취한 듯 보였다.
“사샤. 좀 더 웃어 보게. 결혼을 앞둔 신부의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서 되겠어? 그래서야 내 체면이 서질 않잖아.”
그는 멍청이였다. 사샤는 그렇게 확신하며 들었던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속이 좋지 않아요.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사샤가 일어나자 보반은 포크를 쭉쭉 빨다가 성급하게 따라 일어났다.
“괜찮은가? 내가 방까지 데려다주겠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알아서 올라갈게요.”
“그럴 텐가? 그럼. 난 좀 더 티타임을 즐기다 가지.”
보반은 안도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사샤는 티 룸에서 빠져나와 응접실을 지나쳐 막 계단으로 올랐다.
“저, 로랑 양.”
누군가 계단으로 오르는 저를 불렀고 사샤는 세 번째 계단을 밟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에 가까운 담갈색 머리의 군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볼을 붉히고 순진해 보이는 회색 눈망울을 흔들었다.
“저, 저는 하멜 하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손에 든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샤는 시선을 내려 그것을 보았다. 노란 소국이 한가득이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로랑 양의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 재즈 공연이 열렸던 그날 이후 사샤에게 첫눈에 반해 열병에 빠진 군인들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개중에는 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해 보려는 이도 존재했다. 대개는 하멜 하사처럼 순수한 것이었다. 요한이 요새를 비운 뒤 그들은 꽃이나 시, 그게 아니면 작은 연서 같은 것을 보반 모르게 그녀의 커피 잔 아래에 몰래 넣어 놓거나 아니면 이렇게 뒤쫓아 직접 전해 주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요한이 없을 때만 가능한 일탈인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받아 주십시오. 처음으로 꽃을 꺾어 보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꽃을 받아 들고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하…….”
“하멜. 하멜입니다.”
“하멜 하사님.”
사샤가 저의 이름을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감격했는지 몇 번이고 호흡을 고르기 위해 사내의 가슴이 들썩였다. 사샤는 노란 소국을 한 손에 들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하멜 하사는 그녀의 원피스 자락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계단 아래 서서 그녀의 향기와 그림자를 음미했다.
몰래 따르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샤에게 좋은 일이었다. 특히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는 사내들이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더욱 그랬다. 사내들의 눈이 집요하게 저를 따를 동안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해코지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요한이 없는 동안에 유일하게 사샤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사샤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꽃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다른 뜻은 없었다. 낯선 이가 건네주는 낯선 물건은 곁에 둘 수 없었다. 상대가 열병에 빠진 병사라 해도 규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사람의 호의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선의는 훗날 갚아야 할 빚이 될 것이다. 이제는 그런 세상의 법칙 같은 건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사샤는 외투를 벗어 침대 위에 올려놓고 비밀 문을 통해 요한의 방으로 갔다. 첫 통화 이후 그에게는 두 번 다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탓이다. 이유도 까닭도 없었지만 막연하게 그와 무엇인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저와 돌시가 뭔가가 연결된 것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자신과 요한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어쩌면 돌시와 연결된 것보다 다 강렬하고 뜨겁게.
사샤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리된 요한의 침대 시트를 손으로 한 번 매만졌다. 방은 가구에서 나는 나무 향과, 사용인들이 매번 갈아 놓았을 꽃향기만 미미하게 감돌 뿐, 요한의 흔적이나 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공간은 아늑하기보다 황폐하게 느껴졌다. 주인이 없기 때문일까. 서늘한 방 안은 그렇기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처럼 말이다.
사샤는 주인이 비운 책상 의자에 앉았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단단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 몇몇 긁히거나 찍힌 자국이 보였다. 홈이 파인 나무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펜에는 분명 요한의 흔적이 묻어 있을 터였다. 사샤는 그것을 만져 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뿐이었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길한 의문을 떠올렸다. 도로시가 벤 아이 아빠는 누구일까. 성안에는 남자가 넘쳐나니 개중 누구도 아이 아빠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병동에서 장교들을 주로 보필했으니 일개 병사보다는 장교일 확률이 더 높으리라.
요한일까.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리 여자가 궁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굳이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진정시킬 요량으로 자신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기도 하지 않았나. 그 뜨겁고 불쾌한 침입이 첫 키스였다. 그때에는 그것이 입맞춤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
그다음 날도, 요한이 없던 다른 때와 같았다. 꼭 그런 날이 있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안할 때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반과 함께 식사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그의 살찐 팔을 붙잡고 산책하러 나갔다. 정오에 맞춰 호세가 요새로 그녀를 데리러 왔고, 사샤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성당으로 향했다. 디디에는 언제나와 똑같은 컵에, 언제나와 똑같은 차를 내주었다.
“왜 그러나요?”
디디에는 이미 다 식어 버린 찻잔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는 머쓱하게 웃었다.
“모르겠어요. 괜스레…….”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괜스레 좀 기분이 그렇네요.”
디디에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결혼식이 벌써 이틀 앞으로 다가왔으니……. 하지만 너무 두려워 마세요.”
그는 따듯한 손으로 사샤의 손을 따듯하게 쥐었다가 놓았다.
“일단 요새만 빠져나갑시다. 그 이후는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사샤는 디디에의 말을 듣고도 입술을 깨물며 찻잔만 쳐다보았다. 모르겠다.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은가? 요한에게서 멀어지고 싶은가?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에게서 떨어지면 어쩌면 이 지독한 집착과 애정이 식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의 곁에서 벗어나야만 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너무나 까마득하고 현실감이 없다. 그저 막막하고 막연하기만 했다.
디디에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보반 의원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샤 양? 선한 자입니까?”
“그는…….”
사샤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사리사욕이 많고 허영심이 강하지만 영리하진 않죠. 악하기보다는 아둔한 쪽이에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이 귀를 잡았다. 사샤는 디디에의 뜻을 유추하며 물었다.
“만약 내가 탈출하게 되면, 그럼 보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
디디에는 대답 대신 애써 안심하라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사샤 양은 아무 염려 하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세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지, 어떤 꿈을 가질지 그것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차마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요한이 꼭 운명 같다는 말. 착각이나 집착이 아니라 꼭 신이 저를 위해 내려 준 운명의 사람 같다는 말. 멀리 있어도 무언가가 둘 사이를 관통하여 연결된 것 같다는 말.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 작은 숨소리 하나에도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 그러다가 이제는 제 몸은 여기에 남고 넋은 그를 따라 사라진 것만 같았다. 떠나 버린 영혼은 오로지 그와 연결될 때에만 제 육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것을 디디에에게 설명한다 한들, 그가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해 줄 순 있을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갈등하는가를 묻는다면 그조차 대답할 수 없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노라 말하지도 못한다.
“차가 다 식었네요. 새 것을 내오죠.”
디디에가 다시 따듯한 차를 내왔다. 그러나 이내 찻잔은 다시 식어 버렸다. 사샤는 목이 타면서도 어쩐지 찻잔을 집어 들지 못했다. 마음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돌시와 방목장을 돌고 빗질을 해 주었다. 타리프가 다가와 인제 그만 마방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할 때쯤이 되어서야 사샤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타리프는 돌시의 말고삐를 잡아 마구간으로 끌었다. 사샤는 돌시의 등을 두드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결혼 준비로 바쁘시겠습니다.”
타리프가 말했다.
“안 그래도 정신없으실 텐데,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 귀한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닌지…….”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감사해요. 덕분에 하루 중 행복한 시간이 생겼으니까요.”
타리프는 크게 놀라는 모양새였다. 사샤의 말이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은 듯하나 진심이어도 큰일 날 소리인가 보다.
“항상 행복하셔야죠. 보반 의원님이 어떤 분인지 저야 잘 모릅니다만, 사샤 양이 고르셨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분일 겁니다. 세간에서 무어라 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사샤 양이 얼마나 기품 있고 고귀한 숙녀분인지 압니다. 꼭 행복해지실 겁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으시면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예쁠 겁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아마도 그는 미디어에서 만들어 낸 ‘야욕의 불륜녀’라는 타이틀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랬다. 세간의 시선에 사샤는 장미처럼 향긋한 독을 지닌 뱀같이 교활한 여자였다. 사실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멍청한 천치인데 말이다.
“그래도 짬이 나면 들러 주십시오. 그래야 돌시도 덜 슬플 겁니다.”
“네.”
사샤는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임에도 그녀의 웃음은 진솔하여 마치 진실로 들렸다. 식을 올리고 시가지로 나가면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 거다. 디디에는 그녀가 요새에서 나가면 어떻게든 제삼국으로 망명시키겠다고 했고 이미 그 방법도 찾은 듯했다. 다만 시기를 기다릴 뿐.
타리프가 마방에 돌시를 넣어 놓고 안장과 고삐를 풀 동안 사샤는 돌시의 반들거리는 털과 갈기를 매만졌다.
너와 함께 도망가고 싶었는데. 처음엔 요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고 싶어서 이 눈부신 암말을 택했다. 오만하게 이 암말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노라고 말하는 그의 자존심을 뭉개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이용하려고 했다. 하등한 존재인 짐승이니 그래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물로 취급했는지도 모른다.
설마 네가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어. 돌시. 네가 계속 나를 거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너와 작별할 때마다 이토록 슬프진 않을 거야.
탈출을 하려면 이 암말을 두고 가야 한다. 데리고 갈 수 없다. 이제 겨우 마음을 나누었는데. 이제야 겨우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얻은 것은 두고, 다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오로지 자유롭기 위해서. 그것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유로울 때조차 그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사샤는 암말의 영롱한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잘 있어, 돌시. 또 올게.”
그녀의 콧등에 이마를 대고 살아 숨 쉬는 애정의 온기를 받은 뒤 돌시의 우리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악!’ 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마방의 문을 잠그던 타리프가 그녀의 비명에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사샤는 손으로 빛이 하얗게 새 들어오는 마구간의 입구를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타리프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흙과 풀과 멀리 숲의 광경만 보이는 곳.
“…….”
타리프는 그녀가 가리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몰라 몇 번이고 그녀의 손끝과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번갈아 둘러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
사샤는 진정하지 못하고 숨을 헉헉 내뱉었다.
보았어. 분명 보았어. 분명 디터를 보았어. 디터의 그림자를 보았어. 그의 형체를 보았어.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어. 그의. 그의 하얗고 창백한 얼굴을 보았어. 귀신처럼 푸른, 푸른 낯빛을 보았어. 사샤는 그를 보고 뒤로 넘어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가씨…….”
타리프가 영문을 모르고 그녀를 한 번 더 불렀다.
보았어. 분명 보았어. 분명히, 분명히 저기 있었어.
“……디…… 디터…….”
“예?”
“디터를 봤어요. 그가, 그가 와 있어요.”
타리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입구를 살폈다.
“아가씨.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
타리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디터 소령은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지 않습니까. 알음알음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디터 소령은 채찍 형을 받고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다고 했어요. 설령 이제 거동을 한다 해도 이곳에는 오지 않으십니다. 그는 마구간을 싫어해요.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절대로 마구간을 제 발로 오지 않는다. 혹시 요한을 따라온다 해도 마구간 밖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을 택했다. 지난번에 사샤를 데리러 올 때도 그는 방목장의 울타리 근처로만 왔을 뿐이다. 그것도 몹시 언짢은 얼굴로 말이다.
디터는 짐승의 냄새를 싫어했다. 짐승의 냄새가 묻은 타리프도 싫어했다. 그렇다고 향기로운 꽃이나 과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형체가 있고 색이 있고 냄새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하지 않았다. 타리프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가능하면 디터와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저를 경멸하는 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비난을 듣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었다.
타리프는 벌벌 떠는 사샤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사샤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아가씨. 아가씨 진정하세요. 혹시 디터 소령이, 아가씨를 해코지하던가요?”
그가 저에게 얼마나 많은, 얼마나 잔인한 짓들을 했는지 타리프는 모른다. 영문도 모르는 그의 혐오와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 내는 것이, 견뎌 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그는 모르리라. 요한이 그에게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요한이 디터가 앗아 간 단도를 돌려주었다.
정확히 요한이 어떤 이유로 디터를 채찍 형에 처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그것이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요한이 모르겠다고 한 그 감정을 디터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옆에 있으니, 그의 명령으로 저를 개처럼 따라다녔으니 분명 알고 있으리라.
“그는…… 그는 나를…….”
그가 몸을 추스르고 업무에 복귀하면, 그러면 그때의 그는 나를 어쩔까. 나를 다시 때리려 할까. 나를 가두려 할까. 그도 아니면 나를 죽일까.
“사샤 양은 요한 소장님의 손님입니다. 그것도 아주 귀한 손님이지요. 보반 의원님과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게 아닙니까. 그런 아가씨를 대체 디터 소령이 어떻게 죽입니까. 그럴 수 없어요. 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난 요한의 귀한 손님 따위가 아니야. 나는 포로다. 인질이다. 꼭두각시다. 디터가 짓이기면 짓이겨져야 하는 벌레이다. 그리고 디터는 틈만 나면 자신을 짓밟으려 한다. 그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늘 밟지 못해,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 그러니 그는 나를, 나를 죽이려 들 거야.
“디터가 있는 걸 봤어요. 분명히…….”
아무래도 진정하지 못하는 사샤를 보며 타리프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세요. 사샤 양. 어서요.”
그는 사샤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키고 마구간 입구의 반대편으로 데리고 갔다. 두꺼운 나무 기둥을 끼고 돌자 커다란 목제 테이블과 얼기설기 널빤지로 덧대어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은 도구함이 보였다. 타리프는 열쇠로 도구함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1년에 두어 번, 소장님이 다른 장교분들을 이끌고 꿩 사냥을 하러 나가십니다. 이 총은 그때를 위해 구비해 둔 것이에요. 사냥용 라이플도, 리볼버도 있지요.”
사샤는 그가 손으로 짚은 곳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리프는 소총을 하나 꺼내 작동이 잘 되는지 노리쇠를 당겨 보고 어깨에 멨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군인처럼 정교하진 않아도 저도 총을 다룰 줄은 압니다. 무언가 사샤 양을 위협하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것을 맞출 정도는 될 겁니다.”
“…….”
“소장님의 귀한 손님입니다. 제게도 사샤 양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지요. 제가 보반 의원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타리프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러나 사샤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제게, 제게도…… 제게도 주세요. 제게도 총을 주세요. 저도 배웠어요. 어떻게 다루는지 알아요.”
그러나 타리프는 기겁을 하며 도리질했다.
“그건 안 됩니다. 총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사샤 양. 훈련받은 군인도 가끔 오발로 죽는 마당에 이제 곧 결혼을 앞두신 분께서 총이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소장님이 아시면 큰일 납니다.”
그가 너무 단호히 말했기에 사샤는 다시 조를 수 없었다. 그녀는 앞서는 타리프를 따라가며 미련이 남은 얼굴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타리프를 따라 정원을 지났다. 사용인들은 곧 있을 결혼식을 위해 분주하게 꽃을 따 바구니째 연회장으로 날랐다. 분명 자신의 결혼이건만 사샤는 남의 일보다 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사샤.”
보반이 어쩐 일로 성의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보반 의원님.”
타리프가 안심하며 모자를 벗고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창밖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여서. 고맙네.”
그는 사샤의 손을 잡아 이끌며 타리프에게 인사했다. 그는 타리프가 어깨에 사냥용 라이플을 메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보반은 사샤의 손을 제 겨드랑이에 꽉 끼고 서둘러 타리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작고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자가 왜 총을 들고 있는 거지? 저자도 군인인가?”
“아니요. 요한의 마구간지기예요.”
“마구간지기가 왜 총을 들고 있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요.”
사샤는 부정했다. 보반이 생각하는 ‘무슨 일’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일 것이다. 사샤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복잡하게 털어놓았다.
“마구간에서 디터를 봤어요.”
보반은 인적이 드문 성벽의 앞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디터? 디터 소령?”
“네. 분명 본 것 같은데, 타리프는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실제로 아무도 없었고요.”
“오. 사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헛웃음을 켰다. 완전히 안심한 얼굴로 잔뜩 굳었던 어깨도 자연히 내려갔다.
“나도 디터 소령에 대해서는 들어서 아네. 모두 쉬쉬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입이 가벼운 몇몇 사용인들은 조금만 구슬리면 술술 불게 되어 있지. 게다가 나 같은 정치인에게는 더 그래.”
그는 지위를 뽐내듯 두둑이 나와 있는 배를 한 번 쓸었다.
“이제 디터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해. 사샤. 군법에 반역은 중죄네. 거기다 채찍 형이라니, 도첸에서 그것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야. 군인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이지.”
보반은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되었다는 듯한 동정과 비아냥거림이 그 안에 뒤섞였다.
“설령 그가 아직 소령이라 해도 직위 해제를 당한 것과 진배없어. 앞으로 결코 진급할 수 없을 테니까. 남들보다 일찍 퇴역 군인으로 뒷방에서 늙어 갈 처지가 된 거네. 사실상 요한이 내친 것과 다름이 없단 말이야. 그런 주제에 그가 무슨 힘이 있어 감히 자네와 나를 건들 수 있겠어? 이제는 처지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
사샤는 혼란스러워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물론, 과한 처사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평소 요한의 방식이나 성품으로 보았을 때 납득을 못 하는 자는 없어. 게다가 디터라는 그 작자. 군인들에게 신망도 명예도 없는 작자더구만. 애초에 왜 요한이 그를 곁에 두었는지조차 미스터리였단 사람들이 더 많아.”
아니. 디터는 요한에게 잘 맞는 짝이었다. 디터는 거의 맹목적으로 요한을 따랐다.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사샤, 저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디터에게 있어 자신은 요한이란 완전무결한 존재에 흠집을 내는 가시 같은 존재였으리라. 만일 요한이 저 때문에 디터에게 그런 처분을 내린 것이라면, 디터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상사와 그의 심복의 사이에 틈을 만들어 균열을 일으킨 셈이니 말이다.
“물론 잔인하고 냉정하기로는 요한 폰 윌렌도르프를 따를 자가 없지만 디터 같은 저속한 자와는 결이 좀 다르지. 디터란 놈은 완전히 미치광이야. 이제 와 털어 낸 것이 요한이나, 우리의 앞날에는 참으로 다행이야.”
“……그는 날 죽이려 들 거예요.”
사샤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보반은 그녀가 지금껏 한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한 것인지 의아했다. 그는 헛웃음을 켜며 다시 말했다.
“사샤. 그는 결코 자네를 해코지하지 못해. 말했잖아. 그는 근신 중이야. 근신 중인 군인은 정복을 차려입을 수도, 무기를 휴대할 수도 없지. 그는 정해진 구역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기껏해야 성당, 자신의 방, 의무 병동, 도서실 따위가 전부라네. 우리가 이 성을 나가기 전까지 우리 옆에 얼씬도 할 수 없어. 그리고 그 이후엔 빅토리아 시가지로 나갈 테고 끈 떨어진 디터와는 영원히 작별이란 말이지. 그런 그가 대체 자네를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보반에게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나온 일들이나,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을 말이다. 죽어서도 증오하리라 맹세한 남자와 얽힌 수많은 감정과 그로 인해 디터의 미움을 산 일들을 말이다. 자신조차 이것을 몇 마디의 말로 정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데 하물며 보반을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했다.
“들어가지. 사샤. 나와 테라스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어떻겠나? 과시도 할 겸.”
보반은 사샤의 손을 두드리고 다정하게 제 팔 위에 그녀의 손을 올렸다.
“어서. 가세.”
사샤는 맥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지나가는 곳마다 요새의 사람들이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웃는 낯빛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결혼을 앞두고 들뜬 신부를 연기하려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은 단 한 가지. 분명 디터가 저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확신.
오늘 본 것이 헛것이든 진짜 그 사내든 이것은 분명 경고였다. 신이 아니면, 저의 본능이 내린 경고였다. 대비해야 했다. 요한이 없는 이상 자신을 지켜 주리란 확신을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올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려면 스스로 지키는 방법뿐이다.
사샤는 방 안에 앉아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어둠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숨이 멎은 듯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는 마침내 새까만 어둠이 창밖을 덮치자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타리프가 보여 주었던 수납함 속의 권총뿐이었다. 깊이 찌를 수도 없는 단도를 가지고는 안심할 수 없었다. 서툴더라도 눈앞의 상대를 단번에, 간편하게 죽일 수 있는 무언가를 가져야만 가슴 깊이 도사린 공포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둠이 스며들기 무섭게 방을 빠져나갈 결심을 했다. 불침번을 서는 보초병에게는 잠이 오지 않아 안뜰을 산책하려 한다고 둘러대면 된다. 그들은 드는 자에겐 엄격해도 나는 자에겐 관대하니 따돌리기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막 코트를 여미고 문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사샤는 방어적으로 물러섰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군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잡으러 온 것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공포란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형상화하게 했다.
그러나 벌컥 열린 문 앞에 도사린 것은 사샤가 생각하는 공포가 아니었다. 귀신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가 쓰러질 듯 말 듯 간신히 문간을 잡고 서 있었으나 그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사샤는 가슴께를 집은 손을 내리며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도로시.”
사샤는 푸르게 질린 그녀의 눈두덩이에서 어두운 숄 아래 더 어두운 색으로 물든 파자마로 시선을 내렸다. 검붉은 빛은 분명 피였다. 도로시의 새하얀 파자마 밑단이 모두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 피가 멈추지…….”
“…….”
간신히 말을 이어 가는 도로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발음을 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그녀의 입술이 파리하게 떨렸다.
“도와……줘…….”
눈이 돌아가며 앞으로 꼬꾸라지는 것을 사샤가 받았다. 그녀는 끙끙대며 도로시의 축 처진 몸을 침대에 눕혔다. 가랑이 사이에서 난 피가 길게 선을 이루며 이어졌다. 사샤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사이드 테이블의 스탠드를 켜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사샤는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미 피로 흥건했다. 속옷에 복대에, 뜨개질을 한 속바지까지 몇 겹을 감싸 입었는데도 모두 젖어 있었다. 낙태술을 받은 직후 자궁 파열로 죽은 여자를 여럿 보았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는데 맥박은 널을 뛰고 있었다. 위험해. 곧바로 수혈을 받아야 한다.
“도로시, 수혈을 해야 해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대체 여기까지 저 몸을 이끌고 어떻게 올라온 것일까. 내실로 들어오기 전 보초병들은? 그중 아무도 도로시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그럴 리 없다. 요한의 보초병들이 그렇게 무능력할 리가 없다. 피가 계속 새어 나왔다. 하얀 시트가 흥건하게 젖고 있었다.
“도움을 청해야겠어요.”
사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며 침대에서 내려오자 도로시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절박하고 완강했다. 두려움에 질린 눈동자로 사샤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죽어요! 잘 알잖아요!”
“안 돼. 어차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도로시. 수혈부터 받아야 해요! 그래야 나도 당신을 도울 수 있어!”
“디터…….”
“…….”
뭐?
“뭐라고요?”
사샤가 그녀의 중얼거림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다시 물었다.
“디터가…….”
“…….”
“날…….”
그녀는 헐떡거렸다. 질린 얼굴에 서글픔과 공포가 스며 있었다.
“도로시?”
“날…….”
디터가…….
“디터가 아이 아빠예요?”
이유는 모른다. 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둘이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은 안다. 도로시는 의무 장교였고 그러니 언제나 장교들과 마주치고 폐쇄된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로시는 몸을 떨며 흐느꼈다. 고통과 공포. 사샤는 그녀의 몸에서 무언의 신호를 얻었다. 그것은 긍정이었다.
“죽여…… 도망…… 도망쳐…….”
도망쳐.
“……도로시.”
“죽……여.”
“누굴, 누굴 죽인다는 거예요?”
“미안해……. 네 방…… 아무것도…….”
“도로시?”
도로시의 머리가 시트 위로 떨어졌다.
“도로시!”
사샤는 침대맡에 있는 종의 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사용인이 필요한 때면 울리라고 했던 것이다.
“안 돼! 정신 차려!”
사샤는 도로시의 뺨을 두드렸다.
“보반!”
그녀는 갈비뼈가 부서질 정도로 가슴을 누르고 호흡을 불어넣었다.
“도로시!”
사샤는 절박하게 그녀의 명치를 쾅쾅 때리고 눌렀다. 관자놀이에 땀이 흘렀다. 그러나 도무지 도로시는 다시 숨을 쉬지 않았다. 아주 희미하게 맥박만 뛰고 있을 뿐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보반!!”
제발 누구라도 좀 도와줘!
“이게 무, 무슨 일이야!”
실크 가운을 걸친 보반이 다급한 사샤의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함했다. 사샤는 마치 제가 죽어 가는 양 얼굴이 퍼렇게 질린 보반을 돌아보며 외쳤다.
“보반! 사람들을 불러 줘요! 도로시를 병동으로 옮겨야 해요! 빨리요!”
보반은 넋이 나간 채 가운 끈을 동여매고 복도를 종종걸음 쳤다. 긴 복도를 지나 내실의 입구에 다다랐으나 서 있어야 할 보초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도로시가 흘렸을 피가 긴 꼬리를 그리며 그녀의 방까지 이어져 있을 뿐이다. 그것을 보니 갑자기 정신이 아찔했다. 보반은 벽을 짚으며 제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때마침 급하게 숄을 걸치고 손에 기름등을 든 사용인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다 그를 발견했다.
“의원님.”
“……가, 가서, 의사를, 의사를 불러 와…….”
하녀는 계단에서부터 보반이 서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네! 의원님!”
그녀는 파자마 단을 그러쥐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요새의 이곳저곳에 불이 밝았다.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 못한 몇몇 장교와 하인들이 저마다 기름등을 들고 내실로 몰려들었다.
보반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사샤의 방 안까지 길고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핏자국을 피해 구석으로 걸었다. 환하게 열린 사샤의 침실 문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공포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흐느끼고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하는 사용인들도 있었다.
몇몇의 장교가 앞장섰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보반의 등 뒤에 섰을 때, 짙은 벨벳 휘장이 달린 침대의 시트가 마치 물들인 듯 붉은 피로 흥건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위에는 피를 뒤집어쓴 하얀 피부의 여인 둘이 있었다. 한 명은 침대에 종이 인형처럼 누워 있었고 또 한 명은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한쪽은 숨이 완전히 꺼져 있었고 한쪽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모두가 상황을 인지하였을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의무 병동에서 근무하는 대령이 인파를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 도로시……. 대체 이게, 어떻게…….”
그는 입술이 까맣게 죽은, 도로시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얼이 빠진 얼굴 그대로 사샤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샤 양.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샤는 완전히 진이 빠졌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런 시술 같은 거 받지 말라고 했잖아.
“사샤 양.”
대령이 질책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보반이 보호하듯 그의 앞에 섰다.
“이보게. 목소리를 좀 낮추지 않겠어?”
“하지만…….”
“보시다시피 내 약혼녀의 방에 쳐들어온 것은 저 여자고, 사샤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나머지 상황은 자네가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아닌가.”
보반은 대령에게 몸을 붙이고 좀 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24시간 보초를 서야 하는 보초병들이 자리를 비웠더군.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면 그것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할 걸세. 소장의 귀에 들어가면 무슨 사달이 날지 알고. 디터가 어떤 처분을 받았나 잘 기억해 봐.”
“…….”
보초병이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에 대령은 더욱 놀랐다. 내실을 지키는 보초병은 절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교대하기 전까지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애초에 문제는 도로시가 죽은 것보다 도로시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사샤의 방에 들어왔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일개 장교의 죽음보다 더 큰일이리라.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대령은 다시 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녀 하나가 다가와 사샤의 몸에 제 숄을 둘러 주었다.
“로랑 양…… 괜찮으십니까?”
그는 마치 제 식구라도 되듯 울먹이며 사샤의 젖은 어깨를 비비고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그러고는 사샤를 창가의 소파로 안내하고 그 옆에 껴안다시피 앉아 사샤의 손과 어깨를 주무르고 비볐다.
사샤의 얼굴은 파리했다. 사용인들이 침대 시트째로 도로시를 꽁꽁 싸서 들쳐 매는 것이 보였다.
“사샤. 괜찮은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보반이 그녀의 앞에 몸을 굽히며 물었으나 사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반이 눈짓으로 사용인을 물리쳤다. 그러고는 더 은밀히 물었다.
“보초병도 사라지고. 저 여잔 대체 여길 어떻게 기어 와서 죽었느냔 말이야. 말해 봐, 사샤. 자네가 죽인 거야? 내겐 이야기를 해 줘야 해, 사샤. 말했잖아. 우리는 한배를 탔다고. 무슨 일인지 알아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게도 말하지 않을 텐가?”
“…….”
“좋아.”
보반은 성이 난 투로 내뱉고 몸을 일으켜 휙 제 방으로 사라졌다. 쌩한 몸놀림으로 사용인을 스쳐 가자 그녀가 다시 와 사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괜찮으세요? 마실 것을 좀 가져다 드릴까요?”
사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엇이든 아니라고 하는 것뿐이었다. 도로시가 어째서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째서 보초병이 틈을 타 자리를 비운 것인지 그것도 모른다.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라고는 도로시가 내뱉은 말들뿐이었다. 디터, 도망쳐, 죽여.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이건 불공평해, 도로시. 이렇게 죽어 버리는 건 불공평해.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겨 놓은 채 죽는 것 말이야. 왜 죽기 전에 나를 찾아왔어. 왜. 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널 동정하는 것뿐이야. 그걸 원한 거야? 겨우? 겨우 내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고백하고 싶었어? 그래서 죄책감을 지우고 싶었던 거니? 아니면 복수해 달라는 거야?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널 가엽게 여기는 것뿐이야. 이건 불공평해. 도로시. 너무 불공평해.
***
다음 날 사샤의 방으로 자신을 ‘대령 댄버’라고 소개하며 남자 하나가 방문했다. 전날 그녀를 질책하며 추궁한 그 대령이었다.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전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사용인이 내온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사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날 대단한 실례를 범했습니다. 로랑 양. 자리를 비운 보초병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졌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비운 까닭이 무엇이라던가요?”
“요한 소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잠시 느슨해진 모양입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으니 잠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더군요.”
야심한 새벽을 틈타 자리를 비운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대로 자리를 지키는지 어쩌는지 확인할 이는 처벌을 받아 몸져누워 있었고, 요한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 태만해졌으리라. 대령은 여전히 경직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도로시는 의무 병동 내에 신임이 두터운 장교로 제가 매우 아끼는 부하고…….”
“이해해요. 심려치 마세요.”
그에게 무어라 해코지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도 이 상황은 모든 것이 너무도 급작스러우리라. 그러나 사샤의 상냥한 대답에도 그는 안심하지 못했다. 여전히 상기된 것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저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령의 명예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과 의무 병동을 맡은 대령으로서 정확한 그녀의 사인과 그 사유를 보고해야 하는 책임감 같은 것 말입니다.”
덴버는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하였다.
“도로시의 사인은…….”
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초조함과 불안함에 아랫입술을 씹으면서도 눈앞의 찻잔을 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궁 파열일 거예요.”
사샤가 대신 답하니 그제야 그는 찻잔을 들었다. 마른 입술과 타는 목을 진정시키는 그의 표정은 마치 치부라도 드러난 듯 파리하게 굳었다. 사샤가 물었다
“부검을 했나요?”
“아니요.”
덴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시의 가족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동의는커녕 아직 소식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전해야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딸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하였는데 그 사유 또한 여자로서, 군인으로서 부끄러운 것이라면 부모에게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사샤는 덴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라는 것을.
“그녀가 왜 로랑 양에게 찾아왔을까요?”
그것은 덴버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사샤 로랑을 찾아왔는지 말이다. 그녀를 꼭 찾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둘 사이에 저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제가 알고 있었으니까요.”
“…….”
“아주 우연히요.”
“그렇다면…… 역시.”
불법 낙태로 인한 자궁 파열이었다. 유추하고는 있었지만 완전하게 확인되니 뒷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덴버는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혹시 상대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네. 아마도요.”
“……혹시, 우리 부대의 사람입니까?”
사샤는 아주 잠깐 갈등했다.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다물어야 할까. 이 남자가 그것을 알아도 되는 걸까. 눈앞의 사람이 요한이라면 망설임 없이 이야기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없다. 대신 낯선 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아주 낯선 이만 제 앞에 있었다.
“네.”
“…….”
덴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사샤는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디터 소령이요.”
“…….”
대령이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직책상 디터는 그의 아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디터는 요한 소장의 오른팔로서 계급을 막론하고 요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반역죄로 처벌받아 근신 중이다. 그리고 이제 그에겐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하나 더 붙었다. 그것이 비록 사내에게는 큰 죄목이 되지 않는다 하여도 군인으로서는 평생의 낙인이 될 것이다. 제 동료를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몬 군인.
사샤는 보반의 말을 기억했다. 그가 디터는 결코 요한의 신뢰를 예전처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예 나락으로 떨어졌으면 좋겠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어. 조금이라도 더 고통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다시는 위협이 될 수 없도록. 언젠가의 소원처럼 그가 죽었으면 좋겠어.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대도 상관없어. 죽기만 한다면.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 적 있습니까?”
“당신이요.”
“…….”
그는 이마에서 나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의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화가 나고도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얼굴로 덴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샤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사샤 양. 일어나지 마세요. 용서를 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횡설수설 사과하고 인사말을 한 그는 군모를 쓰며 방을 빠져나갔다. 사샤는 이미 식어 버린 찻잔과 오전의 짙푸른 햇살 속에 홀로 남았다. 그녀는 휘장이 쳐진 침대를 보았다. 지난밤 도로시가 누워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전과 달랐다. 사샤는 두 번 다시 그 침대에 편히 누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두 번 다시는. 그곳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