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18화
17.
요새 앞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보반은 이미 땅거미가 진 성의 문 앞에 기름등을 들고 서 있다가 말을 타고 오는 사샤를 보고 뛰어나왔다.
“사샤!”
요한은 사용인에게 말고삐를 건네고 사샤를 말 등에서 내려 주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착지였으나 차가웠다. 사샤는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그는 블레이저의 단추를 풀며 덴버와 몇 마디를 나누고 보반과 사샤를 보필하는 사용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안부를 물을 동안 조용히 인파를 헤치고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샤.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없나?”
“네. 없어요. 괜찮아요.”
사샤는 대답을 하면서도 성안으로 사라지는 요한의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어서 들어가 씻기부터 하세!”
보반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모두 비켜 주게!”
“비켜 주세요!”
사용인이 치맛단을 붙잡고 분주하게 사람들의 사이를 헤집었다. 사샤는 넋이 나간 채 보반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랐다.
“군인들에 사용인들까지 자넬 찾으려고 난리도 아니었어. 대체 결혼을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설마 도망치려고 한 건가?”
“…….”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도망치려 했다. 처음엔 타의였고 나중엔 자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사용인은 욕실로 뛰어 들어가 물을 받았다. 보반은 그녀의 침실까지 따라와 추궁했다.
“사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위기는 심상치 않은데 아무도 내게 이야길 해 주지 않았어. 내 약혼녀가 사라졌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몰라야 하냔 말일세. 자네도 내게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을 건가?”
이 일은 당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 당신이 알아야 할 내용도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이것은 내가 사랑하던 것들을 잃은 이야기이다. 내 탓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이야기이다. 당신은 그것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언제나 안위를 궁금해하며 도망칠 궁리만 하는 당신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고 먼 이야기이다.
“사샤.”
보반이 나무라듯 그녀를 불렀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를 따돌릴 거야? 내일이면 당신은 내 아내야. 당신에 대한 권리는 모두 내 것이란 말일세. 그러니 내겐 자네에 대한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어.”
“……디터를 죽였어요.”
“……뭐.”
보반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입을 벙끗거렸다.
“디터를 죽였어요. 칼로 목을 쑤시고 잘랐어요.”
“…….”
“그 덕에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를 뒤집어썼죠.”
“…….”
“놈의 아킬레스건을 끊고, 손등을 넝마로 만들었죠. 칼끝으로 손을 다 잘라 내고 핏줄을 다 끊어 놨어요.”
“…….”
이야기가 더해질수록 사샤의 눈은 광기와 증오로 얼룩졌고 그것을 보는 보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더 듣고 싶어요?”
“…….”
그가 입을 뻥긋거렸다. 마침 목욕물을 다 받았는지 사용인이 나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로랑 양. 목욕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가세요. 옷 벗는 것을 도와 드릴게요.”
보반이 뒤로 물러섰다. 사샤는 그를 노려보다 하녀의 손에 이끌려 욕실로 들어갔다. 딸깍, 문이 닫히자 그는 몸을 떨며 쏜살같이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필시 그는 사샤가 미쳤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사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미쳤다고 생각하는 편이 그녀에겐 더 득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겠지. 더는 나를 들쑤셔 기분을 심란하게 하지 않겠지. 이제 내게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하겠지. 하녀가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그녀의 옷을 벗겨 냈다.
“로랑 양. 괜찮으신가요?”
떨리는 하녀의 목소리에 사샤가 정신을 차렸다. 여자는 측은하고 가엽고 또 한없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사샤의 안색을 살폈다. 밑으로 떨어진 옷들이 ‘철퍽’ 젖은 소리를 냈다. 지독히도 무거운 핏물이 이제야 몸에서 한 꺼풀씩 떨어져 나간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요한은 집무실에 들어서서 피가 묻은 장갑과 블레이저부터 벗어 던졌다. 창가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양주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들이켜니 때를 맞춰 덴버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소장님.”
요한은 손등으로 입을 닦고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았다.
“디디에 신부님과 타리프의 시신은 모두 수습해 두었습니다. 이제 어쩔까요?”
타리프의 죽음에 관해서는 유족들에게 사고사로 알리고 넉넉한 보상금을 지급하면 된다. 그러나 디디에의 경우는 일이 조금 더 복잡했다. 그의 소속은 도첸이 아니라 교황청이었다. 저의 교구지, 그것도 폐쇄된 요새 안에서 도첸 군인에게 구타당하여 죽었다는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안 그래도 대외적으로 좋지 않은 도첸의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줄 것이 확실했다. 또 당장 내일 거행되는 사샤의 결혼식을 집전할 주교도 필요했다.
“빅토리아 성당의 오르커스 주교를 데려와. 그리고 네피란의 바실리오 추기경에게 서신을 보내. 은밀히 뵙자고.”
“네. 소장님.”
“일이 수습될 때까지 입단속 잘해. 공식적으로 디디에 신부는 요양 차 병가 중인 거야.”
“네. 소장님.”
요한은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그는 지나치게 흥분해 있지도 또는 가라앉아 있지도 않았다. 다만 수습해야 할 수많은 일에 대해 침착하게 정리하며 숨을 고르는 것으로 보였다. 덴버 대령은 머뭇거리다 요한이 몸을 움직여 책상 위의 서류들을 헤집기 시작하자 물었다.
“그 디터의 일에 대해서는…….”
요한은 목이 답답한지 셔츠 목깃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지?”
“네. 도로시 소위가 낙태로 인한 자궁 파열로 지난밤 사망했습니다. 상대 남성은 디터라고 사샤 양에게 진술받았습니다.”
서류를 뒤적거리던 손이 멈췄다. 요한은 냉하게 침잠된 눈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샤 로랑의 진술이라니?”
“지난밤 도로시가 발견된 곳이 사샤 로랑 양의 침대 위였습니다. 사샤 양의 방으로 가는 길목이 온통 도로시가 흘린 피로 물들어 있었고, 사용인과 사람들을 깨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사샤 양이고 도로시가 죽기 전까지 돌본 것도 사샤 양입니다. 소장님. 그녀는 정말 헌신적이고 절박하게 도로시를 도왔습니다. 매우 익숙하게요. 마치 전에 해 본 적이 있는 듯이…….”
“보초병은 다 어디에 있고?”
요한이 점점 짙은 의구심을 드러내는 덴버의 말허리를 잘랐다. 사내는 꿀꺽 침을 삼켰다.
“보초병은…… 없…… 없었습니다.”
“…….”
요한이 서류를 내려놓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기가 무섭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진술하기로 소소한 일탈이라고…….”
“병사가 근무 중 자리를 비운 까닭이 소소하고, 대단하고 그 경중을 따져야 할 일인가?”
“……군장과 정복을 반납시키고 군법에 따라 영창에 수감시켰습니다.”
“…….”
요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 부하가, 군인이 주어진 근무 시간에 일탈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 말이다.
“그 새끼들의 상관이 누구지?”
“유라함 소위입니다.”
“그 두 새끼들이랑 같이 옷 벗겨. 유라함 소위의 상관은?”
“하멜 대위입니다.”
“벗겨. 그 위는?”
“소장님. 마땅히 군법 회의에 기소하여…….”
“언제 기소해서 언제 처벌받을 때까지 기다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한 때라고 생각하나, 덴버 대령?”
“…….”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들판에 죽은 말 사체가 있어. 깨끗하게 치워.”
“네.”
즉각 대답하고 덴버는 다시 망설였다.
“……디터 소령의 시체는…….”
“가져다가 사냥터의 입구에 효수해 놔. 열흘간 효수해 병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인 후 들짐승에게 던져 줘.”
“……네.”
요한은 몇 가지의 밀린 업무와 보고를 더 처리하고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집무실을 벗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손에는 양주와 술잔을 든 채였다.
내실로 향하는 입구에 처음 보는 보초병 둘이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다가 경례를 붙였다. 바로 직전 무슨 일이 있었나 알고 있기에 둘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요한이 그들을 지나칠 때는 너무 겁을 먹어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요한이 그들을 쳐다볼 일은 아마도 없을 터였다.
요한은 방문을 열었다. 그는 침실의 문을 한 번도 잠가 본 적이 없었다. 숨길 것도 가릴 것, 겁이 나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 요한은 처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곧바로 방문을 잠갔다. 처음으로 숨기고 싶고 가리고 싶고 겁이 나는 것이 방 안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사샤.
그녀가 내실의 미로를 통해 그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요한은 가운 차림의 그녀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요새로 향하는 길, 우연히 만난 호세에게 마구간에 디디에 신부와 타리프가 죽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그리고 덴버에게 디터가 탈출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돌시의 마방이 텅 비어 있을 때처럼. 숲에서 너를 발견했을 때처럼. 오늘 하루 너무 자주, 너무 잦게 그는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길고 또 너무나 위태로운 하루였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하루, 어서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하루였다.
사샤는 그의 냉랭한 얼굴을 살폈다. 성기게 얽혀 있는 슬픔이 막 목욕을 끝내 말갛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에 스며 있었다. 짙은 장미향과 같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샘물같이. 맑고, 영롱하고,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미안해. 요한.”
뭐가? 대체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사과를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사샤가 가운의 앞섶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돌시를…….”
“…….”
요한은 사샤에게서 가장 먼 테이블 위에 술과 잔을 올려놓았다.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릴 줄을 몰랐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그녀가 있음으로 하여금 다시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리며 다시 모든 것이 둔탁하고 혼란해질 뿐이었다.
돌시를 잃어 마음이 아프던가? 아니, 되짚어 볼 필요도 없이 아프지 않다. 미련도, 슬픔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래 그랬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란 자아는 본래 그렇듯 죽음에서도, 탄생에서도. 기쁨에서도, 슬픔에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이다지도 내 눈을 멀게 하는가. 가끔 정신을 잃게 하고, 혼란을 느끼게 하는가. 고통이 없던 내 생에 들어와 이다지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요한은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이 혼탁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달아나고 싶어. 사샤. 너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가능하면 멀리 아주 멀리.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예식은 빅토리아 성당의 오르커스 주교가 집행할 거고, 또…… 본래 네 들러리를 서게 되어 있던 도로시는 죽었으니 다른 간호 장교를 붙여 줄게. 초면이겠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침묵해. 일을 번잡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도로시가 죽기 전에 날 찾아왔어.”
“그 일에 대해서는 보고받았어.”
“디터의 이름을 불렀어.”
“사샤.”
그 일에 대해선 들었어. 그러니 제발. 멈춰. 네 목소리를 이제 그만 멈춰.
“그가 도로시의 연인이었나 봐.”
요한은 잔에 술을 따르며 콧방귀를 꼈다.
“디터는 누구의 연인도 되지 않아.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는 여자와도, 남자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아. 꼴리면 무력으로 제압하고 제 성기를 박아 넣는 것뿐이지.”
“…….”
디터는 그런 자다. 결벽적이고, 빈틈이 없고, 잔인하며, 날카롭다. 가끔 본능에 지배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져 배출구를 찾고 싶어지면 그는 감정을 교류하고 대화와 온기를 나누는 대신 상대를 제압해 제 욕구를 해소하고는 했다. 지금껏 디터는 그 대상을 요새의 밖에서 찾았다.
가장 만만한 자는 음습한 골목에 자리 잡은 창부들이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잘 뭉개지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거리의 여자를 찾아 잔인하게 욕구를 채우고 돌아오곤 했고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요한도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그것이 요새 내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도로시가 그의 레이더에 걸렸다. 자리에 누워 고통에 타들어 가던 디터에게는 매일 저를 간호하기 위해 드나들던 간호 장교 이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대량으로 투여된 모르핀과 마약성 진통제가 그의 판단력을 흐리고 본능을 부채질하는 데 한몫했을 것도 분명했다.
그 일에 대해서도 요한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해야 옳다. 유능한 간호 장교를 잃음으로써 병력이 손실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것은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지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도로시가 그녀의 침대 위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에 이토록 화가 나는가. 뜨겁고 참을 수 없는 것이 배 속에서부터 부글거렸다. 손끝이 떨려 주먹을 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많은 여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여자에게서 즐거움을 얻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여자도 그를 화나게 한 적은 없었다. 한 번도 그의 분노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어째서 너는 나를 화나게 하는가. 어째서. 너는 나를 뜨겁게 하고 또 감정적으로 만드는가.
내게 없는 것을 끄집어 내 이토록 나를 무섭게 만드는가.
“요한.”
사샤가 저를 불렀다. 요한은 눈을 감고 술을 들이켜며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타리프와 디디에 신부님이…… 나 때문에…….”
그만해! 요한은 참을 수 없어 크리스털 잔을 집어 던졌다. 액체를 흩뿌리며 잔이 산산조각 났다. 사샤는 움찔 몸을 떨고 그를 보았다. 요한은 숨을 삼키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고요히 말했다. 씨근덕대는 숨소리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야. 네가 또 할 필요는 없어. 사샤.”
“요한. 내 이야기를 제발…….”
“돌아가.”
“요한. 난 당신이 아니면…….”
“돌아가! 사샤!”
“당신이 아니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요한이 악을 지르자 사샤도 같이 악을 썼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서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난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가 없단 말이야!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누구에게도! 사과할 수 없어!”
“그렇다면 하지 마. 그딴 것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아.”
“그럼 난…….”
“넌 보반과 결혼할 거야. 내일. 그리고 나는 그의 베스트맨이 되지. 이 모든 계획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잊지 마. 나는 네 친구도, 네 편도 아니야. 사샤. 그러니 돌아가.”
“당신이랑 있고 싶어.”
“…….”
요한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당신이랑 있고 싶다고.”
너와 있고 싶다고. 힘들고 아프니까. 외롭고 쓸쓸하니까. 이기적이게도. 난 정말이지 이기적이게도 지금 당신과 있고 싶단 말이야.
“돌아가.”
“당신이 날 찾아냈잖아.”
“…….”
“날 찾아내서 내게 달려와 나를 껴안고 매만졌잖아.”
“그런 적 없어.”
“아니. 그랬어. 그랬잖아. 달려와서 날 안았잖아.”
“…….”
그래. 그랬어. 내가 달려가서 너를 안았어. 어렴풋이 떠올려 봐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억.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앞에는 오직 그녀만 보였고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품에 안았다. 너무 순식간에 제멋대로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은 거기에 자신의 의지가 들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나는 너를 안았지? 그 넓고 우거진 풀숲에서 어째서 나는 그토록 빨리 너를 찾아낸 거지. 어째서 나는 너를 찾아내고, 너는 나를 돌아보았을까. 그 많은 나무 사이로, 그 넝쿨진 이파리들 사이로 어째서 우리는 너와 나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을까.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늘 내 시선이 닿는 곳엔 네가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을까.
“요한.”
어째서, 늘 너는 내가 원하는 때에 꼭 내 앞에 있는 걸까.
“이런다고 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알아.”
“나는 너를 구원해 줄 수 없어. 사샤.”
아니.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할 수 있어.”
“…….”
사샤가 가운을 풀며 다가왔다. 요한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날 안고……날 만져 줘. 그거면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실크 가운의 새로 보이는 가녀린 그녀의 실루엣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네가 두렵다. 참을 수 없이 두렵다. 네가 주는 모든 것이 너무나 두려워. 낯설고, 생경하고, 겪어 본 적이 없는 무지의 경험과 감정들이.
“돌아가. 사샤.”
“…….”
사샤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가운을 완전히 벗어 버림으로써 그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싸구려처럼 굴지 마.”
그는 경고했다.
“난 여자를 안지 않아. 사샤. 내게 몸을 던지는 여자의 턱을 부수고 갈비뼈를 으깨 놓을 뿐이야.”
“거짓말이야.”
사샤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당신에 대해 잘 모를 땐, 그것을 믿었어.”
언젠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모두 믿던 때가 있었다. 당신의 잔인한 일화들을.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마침내 그것을 알았어. 당신이 돌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때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았어.
“이젠 알아. 이젠 다 알아. 당신은 겁이 나면 잔인한 거짓말을 하지.”
나 역시 거짓말을 했어. 보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에게 무엇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들이 너무나 끔찍해서. 입을 열기가 겁이 나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때, 비로소 진실한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당신은 그런 때를 마주한 적이 없지. 마침내 모든 것을 벗어 버렸을 때, 마침내 알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기를 찾는 것을, 비로소 눈물이 나는 것을, 비로소 감정을 깨닫는 것을.
“날 구원해줘. 요한.”
우리 서로에게 위안을 찾자. 비로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온전하게 고통을 나누자. 당신은 나를 구원하고, 할 수 있다면…… 아아. 요한. 그럴 수 있다면 나도 당신의 구원이 되고 싶어.
“사샤. 난 여자를 다정하게 대해 본 적이 없어.”
요한이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사샤는 개의치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그게 어떤 뜻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마침내 요한의 뺨을 제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상관없어.”
상관없어. 모든 것은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지지. ‘언젠가’라는 단서를 붙여 미래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 줄 알아? 있잖아. 품에 있는 것들은 당장이라도 없어져 버려. 미래 따윈 모르겠어.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잖아. 만약 내일 네가 사라지면. 내일 내가 없어지면 말이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오늘을 후회할 거야. 언젠가 함께하자고 한 약속들이나,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던 장담할 수 없는 희망 대신 요한, 나는 오늘을 택하겠어. 지금 당장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택하겠어.
“나는 내일 보반과 결혼할 거야. 그리고 오늘은 당신과 있을래.”
“…….”
“난 그러기를 선택하겠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요한.”
“…….”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너를 잃을지도 모르지. 언젠가 나를 잃을지도 모르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요한, 나는 너를 안고 싶어. 너를 사랑하니까 너를 갖고 싶어. 그래서 내일 당장 죽는대도 후회하지 않는 것을 할 거야. 지금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을 할 거야.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구하겠어. 요한 너를. 너의 영혼을. 너의 뜨거움을. 너의 사랑을.
“지금 뿐이야. 이 순간이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지나가. 그러니 부디 날 잡아. 당신은 나를, 나를 사랑하잖아. 그걸 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 난 알아. 난 당신을 알아.
요한의 숨결이 가빠졌다. 볼에 닿는 그녀의 손은 눈이 절로 감길 만큼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이를 세우고 그녀를 물거나 아니면, 그것이 아니면…….
요한은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틀어쥐고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사샤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안았다. 입술을 뭉개듯 비비며 요한은 사샤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가 기꺼이 입을 벌렸다. 서로의 코끝이 눌렸다. 요한이 고개를 틀어 더욱 깊숙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사샤가 기꺼이 그를 맞이했다. 이제야 입을 맞춘다. 진정한 남자와 여자로. 그 안에 욕망을 담아 이제야 첫 키스를 한다.
요한이 그녀를 뒤로 몰며 셔츠를 벗었다. 사샤의 파자마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툭 끊어졌다. 침대 발치에 무릎이 걸려 사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하얗고 말캉한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요한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한 팔로 무게를 지탱하고 한 팔로 젖은 머리카락이 붙은 뺨을 매만졌다. 입술, 목덜미, 긴 쇄골을 따라 손을 그리다가 갈비뼈 부근에서부터 오른쪽 젖가슴을 모아 손 안에 가득 쥐었다. 손에 꽉 들어찬 가슴이 젤리처럼 부드럽게 뭉개졌다.
사샤가 덜컥 입을 벌렸다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의 손가락이 제 가슴을 주무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요한이 비죽 튀어나온 유두를 혀로 쓸고 입안으로 머금자 사샤는 새된 신음을 내며 몸을 뒤틀었다. 요한이 행동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붉어진 사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 타액이 묻은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뺨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그 느낌이 지극히 생경하고 또 자극적이라 손끝이 떨렸다. 사샤는 현기증이 나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날 봐.”
요한이 말했다.
“날 봐. 사샤.”
“…….”
사샤는 손을 내리고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왼편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색정적인 손길로 유두를 비비는 그는 정욕에 불타는 사내가 아니라 탐구하는 모험가의 눈빛이었다. 그에게 사샤의 몸은 지도였다. 그는 보물찾기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반대쪽 유두를 머금었다.
“아응!”
사샤가 신음하며 가슴을 튕겼다. 요한은 혀로 진득하게 제 침을 바르고 고개를 들어 열락에 빠진 사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 젖은 왼쪽 가슴도 그의 손에 잡혀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사샤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가슴팍도 꼭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살갗에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열기가 코 안 점막을 통해, 벌어진 입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를 통해 요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제 허벅지로 사샤의 다리를 벌리고 오른손을 그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아!”
사샤가 혼비백산하며 무릎을 붙이려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포개지는 대신 단단한 요한의 허리에 걸려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요한!”
사샤가 요한의 팔뚝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요한은 개의치 않고 사샤의 부드러운 음모를 매만지고 그 아래 부드럽게 젖어 있는 둔부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젖은 클리토리스가 손끝에 만져졌다. 사샤가 허리를 꺾으며 신음을 내질렀다. 요한은 눈가를 떨며 사샤의 예쁜 코끝 물방울 모양의 콧구멍이 들려 팽창했다 수축하는 것을 보았다.
몇 번 클리토리스를 매만지니 그것은 금세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질척이는 정도도 더 심해졌다. 그의 아래에도 피가 몰렸다. 씨근덕거리는 그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들숨과 날숨에 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기 시작했다.
사샤의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렸다. 그가 클리토리스를 더 비벼 댈수록 휘청거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탱글거리는 젖가슴이 그녀가 몸을 뒤틀 때마다 출렁였다. 팽팽한 가죽 사이로 갈비뼈가 튀어나왔다. 가느다란 허리, 명치부터 길게 파인 줄이 배꼽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몸은 실로 완벽했다. 적당히 야위었고 적당히 풍만했으며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었고 또 너무도 달콤한 향이 났다. 요한은 다시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사샤는 제 손등을 물고 신음을 삼켰다. 온몸이 너무 뜨거워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제 클리토리스를 굴릴 때마다 온몸이 움찔 조여들었다. 찌릿한 통각이 느껴졌다.자꾸만 앓는 듯한 소리가 났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극은 더욱 거세져 한계치까지 몰고 갔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혀가 침입할 때의 느낌, 그의 커다란 손이 제 가슴을 감싸 쥐었을 때의 희열, 그리고 그가 제 아랫도리를 손으로 쓸고 문지르고 매만질 때마다 더욱 강렬해지는 황홀함에 덜컥 겁이 났다.
“요한……아, 나…… 좀, 흑, 무……무서워.”
“…….”
“나…….”
사샤가 더듬거렸다. 덜덜 떠는 입술에 언어와 신음이 반복해서 섞여 나왔다. 지극히도 자극적이었다. 그는 사샤의 턱을 쥐고 입술을 덮었다. 벌어진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혀가 밀고 들어왔다. 사샤는 벌거벗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손톱이 그의 피부에 파고들었다.
요한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이미 팽창하여 불거진 제 페니스를 꺼냈다. 손가락 대신 더 뜨겁고 뭉근한 것이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부볐다.
“으응!”
사샤가 신음했다. 요한이 입술을 떼었다. ‘파-’ 하고 더운 숨을 뱉어 내며 사샤는 헐떡거렸다. 신음했다.
“아응! 아!”
요한이 무게를 실었다. 실크 같았다. 두터운 점액이 뜨거운 두 성기 사이에 부드럽게 섞였다. 사샤가 손으로 시트를 틀어쥐고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허리가 꺾이고 턱이 들렸다.
“아앗!”
요한이 그녀의 턱을 잡아 시트 위로 눌렀다.
“안 돼. 사샤. 날 봐야지.”
쾌감에 넘어가려는 것을 힘으로 제압하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보고 싶었다. 쾌락에 들떠 절정에 달하는 얼굴을.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흥분하는지, 어떤 얼굴로 어떻게 절정을 맞이하는지.
“아…….”
참을 수 없어. 참을 수 없어. 안 돼!
신음이 끊기며 다음 순간 사샤의 숨이 멎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사샤.”
그가 한 번 더 저의 이름을 불렀다. 안 돼. 눈이 멋대로 감겨. 그를 볼 수가 없어. 아. 한계다. 벌어진 입에서 참았던 비명과 절정이 함께 쏟아졌다.
“아으으윽!”
허리가 간헐적으로 튀었다.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입술이 부풀고 그녀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눈이 꽉 감기고 콧등이 찌푸려졌다. 절정을 맞이하는 얼굴은 울음을 터트리는 얼굴과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이 절묘하게 섞였다. 요한이 다급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잠시 후 여운에 떠는 사샤의 아랫배에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요한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잠시 후 그가 지퍼를 올리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사샤는 감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제 아랫배를 매만졌다. 뭉근하고 따듯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만지지 마.”
요한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끝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닦아 낸 뒤 그녀의 배도 꼼꼼히 닦았다. 사샤는 짧고 강렬한 기억을 음미하느라 한동안 멍했다. 요한이 제 배를 다 닦은 손수건을 욕실에 던져 넣고 아직 채우지 않은 바지 벨트를 짤랑거리며 양주를 병째 들이켤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맞아?”
요한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술을 넘기느라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이게 정상적인…… 섹스야?”
요한은 눈썹을 한 번 까딱이고는 다시 양주 병나발을 불었다. 사샤는 더욱 미간을 구겼다. 이렇게 해서 아이는 어떻게 갖는 거지? 사샤는 말끔히 닦인 배 위를 만졌다. 제 아랫도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직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관계를 하면 늘 임신의 가능성이 도사린다는 것 정도는 익히 듣고 보아 알고 있다. 정액을 배 위에 뿌려 임신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이건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성행위였다. 첫 경험의 쓰라림이나 고통도 없었고 그가 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샤가 익히 알고 있는 정상적인 성행위가 아니었다.
“다시 해. 이거, 이거 아닌 거 같아.”
그는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새였다. 사샤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식하고 색정적인 화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왕 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제대로 안기고 싶었다. 대충 흉내만 내고 끝나는 것은 싫었다. 그러려고 온 것 아니야.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끝낼 생각 없다.
“물론 어떻게 하는지 난 잘 모르지만 내 의학적 지식에 의하면 이건 성행위가 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 같아.”
“사샤.”
그는 탄식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근처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됐건 남녀가 알몸으로 뭔가를 하면 그게 성적인 행위인 거야. 지금 상황에서 뭘 더 바라?”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사샤가 두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그러니까…… 이건…….
“이건 뭔가 결합됐다는 느낌이 안 들어…….”
요한은 알코올을 넘기며 제 아랫배를 손으로 쓸었다. 조각조각 선명한 복근이 그의 손길을 따라 물결쳤다. 건장한 남자의 몸은 병동에서 일하며 이미 수없이 보아 왔건만, 요한의 몸은 달랐다. 그 흔한 점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은 벨벳 같았고 영롱한 진주 같았다. 조개껍질의 눈부신 무지갯빛 속 면 같았다. 단단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눈앞이 잠깐 흐릿해지는 것 같아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하는 결합이란 게 내 성기가 너의 질구에 삽입되는 것을 말한다면, 사샤.”
“…….”
그렇게 되는 거구나. 사샤는 그제야 ‘섹스’의 진정한 생물학적 의미를 알았다. 어디선가 ‘원료가 들어간 곳에서 결과물이 나온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어 본 것도 같았다. 그 의미를 곱씹어 보거나 정확하게 추려 보려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 네가 버진 로드를 걸을 때마다 내 정액을 질질 흘릴 생각이 아니라면.”
뭘 흘려? 그게 흐르기도 하나? 사샤는 아는 것이 없어 반박할 수가 없었고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알코올로 뜨듯하게 덥혀진 배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방금 여자의 몸을 핥고 매만지고 절정에 다다르게 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도로시의 꼴을 봐. 그녀가 어떻게 되었나. 섹스의 말로란 그런 거야.”
요새 내에서 요한은 수많은 여종들의, 여군들의 낙태비를 대 주었다. 그들이 원하면 낙태비를 지원했고 아이를 낳기 원하면 산파를 붙여 조용히 아이를 낳도록 해 주었다. 만일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적어도 위생적인 공간에서 믿을 만한 의사에게 낙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리라.
그러나 다가와 도움을 청하는 이보다 저 혼자 해결하다 봉변을 당하는 경우의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수치로 여긴 까닭일 테지만 요한은 낙태를 한 여자나 사생아를 낳은 여자를 불결하거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실 모든 것에 그러하듯 아무 감정도,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현상을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말끔히 덮거나, 깨끗이 치우거나. 그러한 과정을 거칠 뿐이었다. 모든 것은 타인의 일이었다.
그는 결혼을 할 생각도 없었고 여자의 자궁에 제 씨를 뿌릴 생각도 없었다. 번식의 행위 말고 그 짓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 행위에서 위안을 얻거나 남성성을 확인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몸을 섞고 살을 섞고 제 씨를 품어 주길 열망할 만큼 여자를 사랑한 적도 없었다. 온정을 준 것들은 기껏해야 동물이나, 들풀뿐이었다. 그나마 정을 품어 보려, 상냥하게 대해 보려 노력해 본 것은.
“원하지 않게 배가 부르고, 당황하고, 두려워 모르는 이에게 목숨을 내맡기게 되겠지.”
“…….”
“여자의 안에 뿌려 대는 남자의 배출이란 결국 재앙일 뿐이야.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정작 씨를 뿌린 본인은 멀쩡하면서 말이야.”
“꼭 당신은 사내가 아닌 것처럼 말하네.”
“생물학적 성별을 부정하는 게 아니야. 직시하는 거지.”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그에게는 언제나 감정이란 것이 없어 보였고 그렇기에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직시하고 늘 관조적인 태도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난 상관없어.”
사샤는 침대에 앉아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거든.”
한차례의 절정이 휩쓸고 간 싱그러운 알몸의 그녀를 바라보던 요한의 입매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어느새 진지해진 그가 말했다. 부드러워 자칫 차갑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로.
“무슨 소리야. 넌 아주 오래 살게 될 거야.”
이번에는 사샤가 픽 웃었다.
“도첸의 꼭두각시로? 보반의 아내로? 정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연기하면서?”
“…….”
“내 용도는 그런 거잖아.”
요한은 대답 대신 술병의 주둥아리를 곰곰이 매만졌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보반과 자라고 했지.”
그가 술병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진지한 눈빛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런 적 없어.”
“그래서 날 화나게 했잖아.”
“씨가 없는 걸 염두에 두라고 했을 뿐이야.”
“……여전히 내가 그와 잤으면 좋겠어, 요한?”
“그런 적 없어.”
“결혼하게 되면…… 그가 날 강제로 취할까?”
요한의 눈가가 가늘게 경련했다. 그는 다시 술병의 주둥이를 매만졌다.
“별로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사샤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갔다. 요한의 시야에 사샤의 하얀 허벅지와 탐스러운 음모, 납작하고 윤기 나는 아랫배가 흐릿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요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허리를 안았다. 말랑거리는 젖가슴이 그의 허벅지와 바지 앞섶을 눌렀다. 요한은 알코올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어쨌든 고마워. 위로가 되었어. 적어도 무슨 일이 생기든 후회하진 않을 테니까.”
보반이 나를 안아도 말이야. 적어도 내 처음은 당신이라고 여기면 되니까. 달콤하고 행복한 기억이 될 거다. 적어도 네가 나에게 쾌락을 알려 줘서 다행이야. 네가 아니라면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겠지. 내가 나를 만져주고 열락에 들뜨게 하며 나를 꽃피워준 것과 같은 감각은.
사샤는 눈을 감고 그의 심장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힘차게 뛰는 소리는 그가 온기를 지닌 인간임을 증명한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네가 그것에서 도망간대도 말이야.
별안간 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엉겁결에 사샤도 고개를 들었다. 요한이 그녀의 팔뚝을 잡고 끌어 올렸다. 사샤는 저항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요한은 그녀의 무릎을 받쳐 안아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던지듯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바지 지퍼를 풀었다.
“…….”
사샤는 미간을 구기고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러나 올려다본 요한의 얼굴은 맹렬한 빛을 띠고 있었다.지이익, 하고 그의 지퍼가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입을 벌리고 뻐끔거렸다.
“네가 자초한 거야.”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사샤의 발목을 잡아 벌리고 완전하게 닫혀 있는 그녀의 질구를 향해 페니스의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쾌락과는 다른 음성. 고통이 동반된 불가항력적인 단발의 비명이 터졌다. 그는 저돌적으로 제 몸을 밀어붙였다. 좁은 질구가 그로 인해 벌어졌다.
“아파! 요한!”
요한이 제 손에 침을 뱉은 다음 그것으로 그녀의 질구에 문질렀다. 매끈한 타액을 윤활제 삼아 그의 페니스가 한 번에 끝까지 밀려들어 갔다.
“아아앗!”
사샤가 까무러치며 소리 질렀다. 우드득, 뭔가가 뜯기는 느낌이 났다. 뭔가가 찢어지는 감각이었다.
“아파!”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발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요한은 그 상태로 허리를 퉁겼다. 쓰라린 질구에 단단한 페니스 기둥이 마찰하며 다시 들이쳤다. 사샤는 허리를 꺾으며 울었다.
“아파!”
“날 봐, 사샤. 날 봐!”
요한이 고함을 질렀다. 사샤가 그를 보았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내렸다. 전체적으로 번잡하게 흐트러진 얼굴에 고통과 열기가 뒤섞였다.
“……아파, 요한.”
“그래. 원래 아파. 여자의 구멍에…….”
쿵 하고 그가 다시 허리를 짓쳤다.
“앗!”
그가 마디마디를 끊고 그때마다 그녀를 비집고 나왔다 다시 비집고 들어갔다.
“남자의 것이 들어가는 건…….”
“아윽!”
“원래 그런 거야. 사샤.”
“아아!”
그것도 모르고 가소로운 소리를 내뱉는다. 순진한 척, 유혹하고 다시금 그 예쁘고 아름다운 눈망울로 나를 자극한다. 왜 매번 너는 내 화를 돋우는가. 왜 나는 네 한마디에 이성이 끊기는가. 너처럼 위험하고 음탕한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요한이 그녀의 목을 쥐었다. 사샤가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팔뚝을 감았다.
나는 너를 증오해. 사샤. 아니 너를 갈망해.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 네가…… 네가…….
“요한!”
사샤가 그를 불렀다. 요한은 무너지듯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덮고 혀를 밀어 넣었다. 허릿짓이 더 다급해졌다. 사샤는 숨이 막히는 듯 그의 팔뚝을 툭툭 쳤다. 요한은 입술을 떼어 내고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앗!”
그리고 다시 벌어진 그녀의 질구에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엎드려 있자니 그가 들이닥칠 때 고통이 한층 더 심했다. 사샤는 까무러치며 시트 깃을 부여잡았다. 이제는 아프단 이야기도 나오질 않는다. 차라리 정신이 가물거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이 사샤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목에 감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아흑!”
사샤가 ‘악’하는 소리를 냈다. 허리는 아래로 꺾이고 당겨진 머리카락을 따라 고개가 위로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한!”
만류하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불렀으나 페니스가 다시 박히자 뒷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했다.
“아!”
그가 머리카락을 당길 때마다 엉덩이가 그의 몸으로 밀렸다. 암말의 고삐를 쥐듯 그는 사샤의 머리카락을 쥐고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제 성기 기둥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활처럼 휜 하얀 허리와 엉덩이가 지독히 자극적이었다.
그는 속도를 붙였다. 사샤의 풍만한 엉덩이가 부딪힐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고 요한은 더욱 깊게 그녀의 안으로 저를 박아 넣었다. 혈관이 역류하고 아랫도리로 피가 쏜살같이 몰렸다. 커다란 것에 핏발이 서며 더 부풀었다. 그가 이를 사리물었다. 머리카락을 놓자 사샤의 머리가 시트 위로 곤두박질쳤다.
“아! 흣! 요한!”
요한은 개가 접붙이 하듯, 시트를 짚고 그녀의 등에 완전히 몸을 밀착했다. 길게 팬 등줄기에 코끝이 닿았다. 짭짜름한 땀 내음과, 이제 막 목욕을 끝낸 여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밀어붙이는 힘을 이기지 못해 사샤의 몸이 완전히 앞으로 쓰러졌다. 허벅지를 붙이고 발목을 든 그녀의 발가락이 안으로 바짝 말렸다. 요한은 사샤의 등줄기에 ‘흑’ 하고 신음을 토하며 사정했다. 바짝 마른 입술에서 뜨거운 입김이 하얀 피부 위를 적셨다.
“사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나를 불안하게 해…….”
살면서 단 한 번도 불확실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불안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사샤는 다르다. 그녀는…… 요한은 터질 것같이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너는 날 아프게 해…….”
“널 사랑하는 거야.”
“…….”
요한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사샤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올려 보았다. 붉게 물든 몸에는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았다.
“너도 날 사랑하는 거고.”
“…….”
요한의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가져 본 적 없어. 나는 감정이란 것을 모른다. 행복함. 따듯함. 슬픔, 두려움. 그게 무엇이든 겪어 본 일이 없다. 아프다, 춥다, 차갑다, 덥다. 겨우 그 정도의 감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언가 차갑고 두텁고 거대한 것이 심장에 박혀 있었다. 고동은 미약해서 아주 강한 자극을 줄 때만이 그 맥박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린 후에, 목숨을 위협받을 때, 강렬한 고통에 아드레날린이 분출할 때. 그때만이 요한은 자신이 인간임을 느꼈다. 심장 소리로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사샤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그의 고동이 그녀의 손에도 전해져 왔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의 고동 소리를 느끼다가 그의 손을 끌어 저의 가슴에 가져갔다.
“봐. 나랑 똑같잖아.”
“…….”
“너도 날 사랑하는 거야. 나처럼.”
그렇게 말하는 사샤의 얼굴과 음성이 천진한 아이 같았다. 그래서 요한은 피식 웃었다. 몰라. 모르겠어. 사샤. 이게 사랑인지, 무엇인지. 하지만 넌 날 아프게 하고, 날 두렵게 해. 날 고통스럽게 하고 또…… 날 뜨겁게 하지.
“넌 달라. 사샤.”
그것만은 말할 수 있다. 넌 특별해. 다른 사람과는 달라. 아니 누구와도 달라.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아니…….”
그는 도리질을 하다가 다시 멍해졌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어. 망망대해 같아. 심해 같고, 우주 같아.
사샤는 침대에서 내려가 가운을 챙겨 입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어 내리고 그녀는 다정하게 요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얼얼했다.
“잘 자, 요한.”
“…….”
사샤는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요한이 멀어지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멍하니, 아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떨렸다. 미간이 제멋대로 파였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사샤는 상냥히 미소 짓고 다시 한번 인사했다.
“잘 자.”
“…….”
요한의 손이 맥없이 풀렸다. 사샤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요한은 가쁜 숨을 토했다.
모르겠어. 사샤.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