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18.
사샤는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커튼을 활짝 젖히고 해가 요새의 성벽을 넘어 하늘 위로 걸리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했다. 사타구니에 지난밤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약간의 피와 흘러내린 정액. 사샤는 그것을 닦아 내고 싶지 않았다. 지난밤의 체취를 그대로 몸에 묻혀 둔 채 버진 로드를 걷고 싶었다. 비틀린 심리였다. 그 하얀 길을 욕보이고 싶었다. 순결하지 않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 사랑이 없는 결혼, 친분이 없는 하객에 더 이상 처녀가 아닌 신부까지 더해져 이제 이 거짓은 완벽해졌다. 사샤는 그것에 위안을 받았다. 완벽한 거짓에.
날이 밝자 사용인들이 침실로 몰려왔다. 사샤는 목욕하기를 거부했고 사용인들은 접시에 물을 떠 와 그녀의 손과 발, 얼굴을 깨끗하게 씻겼다. 그 후 곱게 매니큐어를 바르고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실에서 사람이 왔다. 그는 흥분이 가득한 얼굴로 새하얀 드레스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어때요? 로랑 양? 이 공단하며 자수까지, 직원들 모두 달라붙어 심혈을 기울였어요.”
사샤는 거울로 비치는 드레스를 감상했다. 팔목까지 레이스와 자수가 섬세하게 세공된 롱슬리브 하이넥 드레스였다. 우아하고 금욕적이었으며 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주문하신 것처럼 최대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변경했어요. 로랑 양은 목선이 아주 아름다우니 하이넥도 잘 어울릴 거예요.”
디자이너는 흥분된 목소리로 드레스를 자랑하고 서둘러 사샤에게 그것을 입혔다. 몸에 잘 맞도록 허리끈을 바짝 조이고 치맛단을 풍성하게 펼친 뒤 베일까지 씌우고 나자, 그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사샤의 모습을 보며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치장을 도와주던 사용인들도 모두 흥분으로 얼굴을 환히 빛냈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마네킹처럼 서서 제 모습을 관조하는 이는 오직 사샤 저 하나뿐이었다.
하녀 하나가 그에게 부케를 건넸다. 레드 베리와 에리카 잎 안개가 어우러져 고혹적이고 차분한 색채를 더했다. 사샤는 꽃이 하얀 눈밭에 떨어진 하나의 핏방울 같다고 생각했다. 슬프고 배덕했다.
“로랑 양. 마차가 준비됐어요.”
시종의 이야기에 사샤는 치맛단을 잡고 몸을 움직였다. 앞뒤에서 시종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도왔다. 아치문 앞에, 두 줄로 병렬된 암갈색 말 네 마리가 끄는 검은색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귀에 이명이 들렸다. ‘탕’ 하는. 요한이 돌시를 향해 쏜 총소리와 함께 마구간 바닥에 흐른 붉은 피비린내도 떠올랐다. 사샤는 순간 몸을 휘청였다. 넘어질 뻔한 것을 사용인이 붙잡아 버텼다.
“조심하세요.”
시종들은 마치 그녀가 높은 힐이라도 신은 듯 굴었다. 그러나 실상, 키가 작은 보반과 맞추기 위해 그녀는 아주 납작한 단화를 신었다. 디자이너가 특별 제작한 웨딩 슈즈로 마치 공단으로 감싼 슬리퍼 같았다.
마차 안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모두 남의 것인 듯 생경하였다. 사샤는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다 멍하게 제 손에 쥔 부케를 내려 보았다. 가슴이 아릿하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찔리는 듯 아팠다. 오랫동안 알고 있었고, 준비했던 순간이건만 이제 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차를 멈추고 어디든 끝까지 달아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다 요한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금 현기증이 났다. 사샤가 가는 길목마다 꽃과 새하얀 리본이 장막처럼 걸려 있었다. 요새의 군인과 사용인들은 오랜만의 잔치를 즐기기 위해 모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성대한 결혼식에 들뜬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은 마차 안의 신부를 좀 더 찍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새삼 이 결혼이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은 요한이 계획하고 뜻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있었던 균열들은 그의 계획을 무너뜨릴 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사샤는 제 아랫배를 꾹 눌렀다. 아직 제 몸속에는 그의 흔적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아팠다가 우스웠다가, 다시 마음이 아리고는 했다.
마차는 성당의 앞에 섰다. 발판을 내리고 문을 여니 그곳에서부터 활짝 열린 성당의 안까지 버진 로드가 길게 이어졌다. 버진 로드의 맨 앞에서 기다리던 호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로랑 양.”
“…….”
호세와 눈이 맞닿았다.
“디디에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제게 부탁하셨던 일입니다. 버진로드는 저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요한 대신.”
“…….”
그를 보는 사샤의 입술이 떨렸고 호세의 입가 또한 그랬다. 내민 그의 손을 잡는데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어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고 싶었다. 그를 위로하고, 사죄하고, 사죄받고, 또 위로받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참느라 고개를 떨구었다.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그가 이끄는 대로 버진 로드를 걸었다. 장대한, 파이프 오르간 선율이 울렸다.
군인들은 모두 검은 정복을, 사용인들은 모두 격식을 차린 옷차림을 했다. 요새의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기엔 턱없이 작은 성당에 인파는 문밖으로도 길게 줄을 이루었다. 신부의 들러리들이 사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모두 장교였다. 검은 정복을 입고 화관 대신 모자를 쓴 모습이 조금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버진 로드의 끝에 전례복을 차려입은 신부가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디디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그곳엔 그 대신 낯선 자가 서 있었다. 디디에의 장례식을 치러야 옳았다. 이곳은 슬픔에 잠겨 있어야 옳았다. 모두 환영 속에 잠겨 있다. 깨어나 디디에를 기리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보반이 걸어왔다.
사샤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보았다. 신랑의 베스트맨으로 그 역시 말끔한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차가운 그의 시선과 마주 닿았다. 시린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은 무엇에도 동요되지 않는 것 같았다. 호세가 보반에게 인사하고 사샤의 손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쁜 공단 장갑에 싸인 사샤의 가는 손이 보반의 두툼한 손 위에 얹어졌다. 요한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나른히 눈꺼풀만 깜빡였다. 군인다운 곧은 자세로 진지하고 무표정하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제가 성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사샤는 보반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기도하는 내내 멍하니 땅만 쳐다보았다. 요한을 바라보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요한이 보반에게 건네준 반지를 사샤는 약지에 끼웠다. 요한이 바라보는 앞에서 선서하고, 손을 잡고, 보반의 손에 베일이 걷히고 그와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것이 끔찍하고 슬펐다. 탑에서 종이 울렸다. 나가는 걸음마다 꽃잎이 뿌려졌다. 아무 데나 부케를 던졌다.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사샤. 조금이라도 웃을 수는 없는 거야?”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보반이 속삭였다.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그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었으니 조금은 즐겨 보라고.”
사샤는 마지못해 옅게 미소 지었다.
“내 첫 번째 결혼은 어땠는지 아나? 와이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정숙한 여자였어.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약간의 지참금을 주고 그녀를 데려와 허름한 여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네. 따로 연회장이 없어서 잔디밭에 천막을 친 채 여관의 주인 내외와 장인만을 모시고 했지. 싸구려 와인과 빵을 놓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봐. 나는 도첸에서 가장 오래된 고성의 성당에서 가장 좋은 양복을 입고 가장 웅장한 홀에서 연회를 하게 되었어.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늘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네. 비록 내 처지가 불안하고 마땅치는 않네만 어쩌겠는가? 모든 것은 다 신에게 맡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밖에. 그래서 나는 말이야. 사샤.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즐기며 살기로 했다네.”
“…….”
보반은 씩 미소 지었다. 아주 약간의 두려움과 아주 거대한 흥분과 희열이 뒤섞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정말로 즐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목숨을 위협받았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비록 아내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남아 있으나 어쩌겠나. 가슴 깊이 묻어 두고 지금의 상황에 적응해야지. 세상 사람들이 내게 뭐라 수군대든 상관없어. 어쨌든 나는 자네처럼 젊고 아름다운 새 아내를 얻은 남자 아닌가.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는.”
사샤는 더는 듣고 싶지 않은지 정원을 가로지르는 풍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보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요한이 빅토리아 시가지에 고급 타운 하우스를 신혼집으로 준비했다더군. 사실 나는 넓은 정원이 있는 저택을 선호하네만 도시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 게다가 그것이 더 진보적이고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진보적인 정치인이 될 거라네. 사샤. 벌써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변화된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해야 현명한 처사일 테지. 그리고 언젠가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을 쓴 자서전을 낼 거라네. 내가 겪은 고난과 시련이 날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겠지.”
“…….”
대꾸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를 수 분째, 신혼부부를 실은 마차가 다시 요새로 돌아왔고 그들은 곧바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홀의 가운데에는 몇백 명이 함께 춤을 추어도 될 만큼 커다란 무대가, 홀의 가장 앞에는 신부와 신랑을 위해 준비된 길고 호화스러운 연단이 보였다. 시종들은 사샤와 보반을 연단의 가장 상석으로 안내했다. 곧 오케스트라가 축가를 연주했고 신랑·신부를 위한 떠들썩하고 화려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쨍, 쨍. 쨍.
연회의 첫 문을 연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보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리스털 잔을 스푼으로 쳤다.
“보반 의원님의 베스트맨으로서, 여기 자리한 신혼부부를 위한 축배를 들까 합니다.”
그는 잔을 높이 들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심도, 근심도 없는 상냥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보반 의원님과, 그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위해.”
사샤는 잔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보반과 사람들은 그를 따라 잔을 들며 ‘위해’라고 되뇌었다. 보반이 사샤의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테이블 아래로 사샤가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침부터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의 기름지고 간지러운 콧수염을 비롯해서 말이다.
그 후로도 사샤와 보반을 위한 축배가 몇 번이고 이어졌다. 샴페인과 와인 잔이 연거푸 비워질수록 축배와 연설은 더욱 빈번해졌다. 크리스털 잔을 스푼으로 울리는 소리에 히스테릭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사샤는 축배를 들건 말건 허겁지겁 와인 잔을 비웠다. 맨 정신으로 그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사샤.”
보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춤을 춰야 할 때라네.”
“…….”
사샤는 무기력하게 그를 따라 일어섰다. 어지러워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으나 몸이 휘청였다. 보반이 그녀를 억지로 지탱했다. 비틀거리며 무대로 향했다. 그와 손을 맞잡고, 희미하게 보이는 시선으로 간신히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보반의 두터운 팔이 사샤의 허리를 휘감고 그와 배가 딱 마주 닿자 왠지 모르게 구역질이 치밀어 사샤는 그를 밀어내 버렸다.
“사샤!”
보반이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샤는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다. 배 속이 뒤틀렸다. 그녀는 코르셋 위에 손을 얹고 도리질했다.
“속이, 속이 안 좋아요.”
보반은 재빠르게 주위의 시선을 훑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었다, 보반은 재빠르게 웃으며 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이런, 사샤, 우리 귀여운 아내가 너무 오랫동안 긴장해 있던 모양이군!”
“……화장실…….”
사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삭였다. 보반이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쓸며 술을 따르던 하녀 한 명에게 손을 까딱였다.
“내 아내를 화장실로 데려다주게.”
“네. 의원님.”
여종은 민첩하게 사샤의 몸을 감싸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사샤가 사라지자 멈추었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제각기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며 즐기기 시작했다.
사샤는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베일을 벗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비틀비틀 뒤로 걸어 한편에 마련된 푹신한 쿠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똑똑똑.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부인. 괜찮으신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네. 부인.”
사샤는 한숨을 쉬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천장처럼 어둠도 빙빙 돌았다.
똑똑똑.
사샤가 손으로 제 눈두덩이를 짚었다.
똑똑똑.
하녀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어쩐지 재촉하는 것 같아 짜증이 솟았다. 두통에 짜증까지 더해지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사샤는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괜찮다니까요!”
그러나 대답 대신 끼익, 문이 열렸다. 사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결혼, 춤, 노래, 음악, 군복을 입은 사람들, 술, 노래, 축배, 건배, 보반. 억지로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나를 내버려 둬. 아주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해 줘. 그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러운 연극에서 벗어나게 해 줘. 아주 조금만.
“신부가 지나치게 자리를 오래 비우면 의심을 사.”
사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하녀가 아니라 내내 보반의 옆자리에 앉아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기획하고, 지켜보던 요한이었다. 그는 문을 닫고 서서 말했다.
“그것도 남편과 첫 춤을 추기 직전에 말이지.”
“난 당신과 달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요한은 소매를 살짝 들춰 손목시계를 살폈다.
“지금은 아니야. 사샤. 적어도 보반과의 춤은 마치고 쉬도록 해.”
사샤가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난 당신 같은 기계가 아니야. 어제 살을 섞은 남자가 남편의 옆에서 축배를 드는데 방실방실 웃을 만큼 냉정하지 못해.”
그 말에 요한은 고개를 치켜들며 차갑게 일갈했다. 마치 투정을 부린다는 듯.
“네가 자처한 일이잖아.”
사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을 수 없었는지 있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화장실을 요란하게 울렸다.
“나쁜 새끼.”
“…….”
요한이 손으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다행히 입술이 터지지는 않았다.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내가 많은 걸 해 달래? 고작 잠시 쉴 시간을 달라는 것뿐이잖아! 아주 잠깐, 혼자 있게 해 달라잖아! 그다음엔 보반과 춤을 추든 입을 맞추든 옷을 발가벗고 뒹굴든 한다잖아!”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요한은 사샤의 어깨를 쥐고 그녀를 뒤로 밀어붙였다. 뒷걸음질 치다 얼마 못 가 그녀는 쓰러지듯 쾅, 벽에 부딪혔다. 사샤는 이를 물고 신음을 삼켰다. 아프다고 소리를 내면 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금니를 물고 대신 요한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남자로 인해 벽에 밀쳐진 여자와, 여자를 벽에 밀어붙인 남자 사이에 살욕이 넘실거렸다. 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어금니를 물고, 헐떡거리며 그는 그녀를 향해, 그녀는 그를 향해 분노했다.
“뭐 하러 왔어. 요한.”
“…….”
“발정 난 개새끼처럼, 내 냄새를 맡으러?”
들어 본 적 없는 저속한 단어, 들어 본 적 없는 경멸에 찬 말투. 연약하고 부서질 것 같던 종군 간호사였던 사샤 대신 잔인하고, 비열하고, 더러운 여자가 남았다. 요한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다. 죽이고 싶었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는 너를…….
요한이 부술 듯 사샤의 턱을 쥐고 입을 맞췄다. 온몸으로 그녀를 벽으로 짓눌렀다.
“이거 놔!”
버둥거리는 손을 잡아 그녀의 머리 위에 눌렀다. 한 손으로 치마를 들치고 얇은 스타킹과 가터벨트를 더듬어 올라가 가랑이 사이를 매만졌다.
“요한…….”
사샤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요한이 그녀의 몸을 반대로 뒤집었다. 골반을 당기자 사샤가 벽을 잡고 수그렸다. 요한은 허겁지겁 치마를 들추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사샤의 얇은 속옷을 찢어 버린 후 부풀어 오른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윽!”
사샤가 신음을 토했다. 요한은 빠르게 추삽질을 했다. 곱게 틀어 올린 사샤의 머리가 충돌할 때마다 흐트러졌다. 요한은 드레스 위로 사샤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요한은 눈을 감았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콧등에 주름이 갈 만큼 세게.
그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본능적이고 뜨거운 것이었다. 분노일지도 모른다. 살욕일지도 모른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욕망이 그를 덮쳤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었다. 짓밟고 짓이기고 더럽히고 붙잡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녀를 지배하고 싶었다. 아니, 지배당하고 싶었다. 블랙홀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
요한이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후두둑,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희뿌연 정액이 쏟아졌다.
허억, 허억, 허억…….
숨소리가 화장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물기를 머금은 타일의 차가운 향기가 났다. 요한은 뒤로 물러섰다. 사샤는 자리에 와르르 무너졌다. 요한은 뒤로 돌아 개수대를 잡고 숨을 가다듬다가 현기증이 나 제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뭘까. 이게 대체 뭘까. 가슴이 조이고, 아프고, 뒤틀리고, 고통스럽고, 겁이 나는 기분. 후회가 밀려왔다. 결혼식 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겁간하듯 안은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는지 모른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녀가 성당에 들어올 때, 신랑에게 반지를 건넬 때, 그 반짝이는 것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어갈 때. 보반과 입을 맞출 때, 축배를 들 때, 그 남자의 비계 낀 팔에 안길 때. 죽이고 싶었어.
그녀의,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홀에 둘러쳐진 휘장을, 화려한 꽃병을, 음식이 가득한 접시를 모두 다 부수고 찧어 갈기고 싶었다. 대체 왜, 왜 이러는지.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그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요한은 마른세수를 하고 지퍼를 채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거울에 비친 사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우는 것이다. 갑작스레 턱, 숨이 막혔다.
왜 울지. 대체 왜. 왜 우는 거야. 사샤. 왜.
“보반과 키스하기 싫어.”
“…….”
“그 사람이랑 춤추기 싫어.”
“…….”
“네가 좋아.”
네가 좋아.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가 웃는 게 싫어. 보반의 옆에 앉아 있는 게 싫어. 네가 그의 들러리인 게 싫어. 너의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와 웃는 게 싫어. 파티가 싫어. 춤추는 게 싫어. 결혼식이 싫어.
“사샤…….”
요한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사샤가 허겁지겁 몸을 돌려 그의 가슴팍에 안겼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던 충견처럼, 서글프고 한없이 연약한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날 돌시에게 데려다줘. 디디에 신부님에게 데려다줘. 타리프에게…….”
“사샤.”
“검은 옷을 입혀 줘. 하얀 꽃을…… 하얀 꽃을 한 송이만 줘. 무릎을 꿇고 마음껏 울 수 있게 해 줘. 기도하게 해 줘. 용서를 빌 수 있게 해 줘…… 나를…….”
참았던 설움이 모두 쏟아졌다.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이었다. 슬픔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젠, 이젠 정말로 참을 수 없어.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요한이 그녀의 젖은 뺨을 쓸었다.
“돌시는 땅속에 묻었어. 타리프는 가족에게 돌아갔고, 디디에 신부는 곧 성직자 묘에 안장될 거야.”
“…….”
“다 끝났어. 사샤.”
“…….”
“잊어.”
“…….”
사샤가 고개를 떨궜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잊어. 잊어. 그녀는 머리에 쓴 화관에서 로젤라 한 송이를 떼어 요한에게 건넸다.
“이걸…… 돌시의 무덤에 놓아 줘.”
또 한 송이.
“이건, 타리프에게.”
마지막 한 송이.
“이건…… 디디에 신부님께…….”
요한은 그녀가 주는 것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작고 초라하고 슬픈 자줏빛의 꽃송이들. 요한은 쓰디쓴 침을 삼켰다. 식도가 메말라 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그들의 무덤에 내 피를 뿌려줘. 요한.”
“…….”
로젤라 꽃송이가 그 증거이다. 언젠가 꽃송이가 내려앉은 그 자리에, 내 뜨거운 피를 뿌리리라. 그리하여 그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줄 것이다. 사랑과 속죄의 증거로 언젠가. 언젠가 꼭.
“…… 추워…….”
사샤가 제 어깨를 안으며 떨었다.
“추워, 요한.”
추워. 죽을 것 같아. 추워. 요한은 그녀의 떠는 어깨와 앞뒤로 흔들리는 몸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절망적으로 흔들렸다.
“사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가 춥다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해 본 적이 없어. 이런 건. 어려워.
사샤는 그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뺨을 비볐다. 요한이 멈칫멈칫 그녀의 몸을 안았다.
“더 꽉 안아 줘.”
그녀가 속삭였다. 요한은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부서질 듯이 꽉. 사샤는 그의 품에 조여든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알아. 나는 미쳐 가고 있지. 하지만 괜찮아. 내 인생은 찰나의 순간보다 짧을 테니.
***
사샤는 연회장으로 돌아가 보반과 춤을 췄다. 술기운 덕인지, 아니면 요한과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난 덕인지 한결 마음이 진정되어 더는 발작을 일으킬 듯 굴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알코올과 흥에 취한 사람들이 저마다 왁자지껄 떠들며 새로운 부부에 대해 덕담을 하고 아름다운 신부를 찬양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몇 차례 더 술잔을 들었다.
연회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샤는 보반의 배려와 신부의 특권으로 해가 질 때쯤 연회장을 빠져나와 제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웨딩드레스를 벗고 목욕을 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로션과 오일을 바르고 온종일 시달린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질하는 사이 끼익, 벽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사샤의 방에 들어올 이는 하나뿐이었다.
요한.
그 역시 정복을 벗은 편안한 차림새였다. 짙은 고동색 레인 코트를 든 손에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어디를 가려는 거야?”
“따라와. 사샤.”
요한이 사샤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고갯짓했다. 사샤가 다가가자 요한은 제 레인 코트를 사샤의 어깨에 두르고 허리끈을 단단히 조여주었다. 서늘한 가죽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하얗고 창백한 손을 꼭 잡았다. 그가 말했다.
“이 미로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
“…… 아니.”
“유사시를 대비해 곧바로 성 내부를 가로질러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곳까지 연결되어 있지.”
“…….”
그는 나머지 한 손에 기름 램프를 들고 그녀를 이끌었다. 끼익, 벽의 어느 한쪽이 그의 손에 밀렸다. 그 아래 아득히 길고 가파른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음습하고 눅눅한 향이 났다. 어디선가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가자.”
“…….”
사샤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와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사샤는 파자마를 움켜쥐고 그를 따라 한참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길은 끝에 다다를수록 좁아졌다가 이내 갑자기 뻥 뚫려버렸다. 강파르던 내음과 바람이 어느 순간 온몸에 부딪혀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바다의 향과 바다의 바람이었다. 어두운 바다 위로 달빛과 별빛이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바다야…….”
사샤는 넋이 나가 황홀하게 외쳤다.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바다의 내음이나 바람을 느낀 적도 없었다. 그 신선하고 비릿한 향을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바다야 요한.”
“…… 그래. 바다야.”
사샤는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에 홀려 걸음을 내디뎠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바다야.”
“…….”
“바다야.”
사샤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실감하지 못하는 듯이. 그녀는 감격에 겨워 가슴을 들썩였다. 하늘의 달빛과 물에 반짝이는 별빛, 규칙적으로 들고나는 파도 소리에 완전히 압도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요한이 조용히 말했다.
“돌시는 이곳에 뿌렸어.”
사샤는 황홀함에 젖어 있던 얼굴을 돌려 그를 보았다.
“바람을 타고 절반은 바다로, 절반은 흙으로 날아 갔을 거야.”
그는 제 가슴팍에서 로젤라 꽃송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것으로 너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면. 사샤.”
“…….”
사샤는 신발을 벗고 좀 더 바닷가로 다가가 꽃잎을 따 젖은 모래 위에 흩뿌렸다. 파도가 몰려와 그것을 삼켜갔다. 남은 꽃잎들은 바닷바람을 타고 젖은 모래 언덕을 굴렀다. 언젠가 돌시의 영혼을 따라 그 절반도 어딘가로 날아가리라.
“원한다면 벨이 있는 곳에도 데려가 줄게.”
요한의 말에 사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벨은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시퍼런 멍투성이에 곪고 찢겨 있어 누군가 살짝 건들기만 해도 고통에 펄쩍 뛰어오르게 되고는 했다. 그것은 돌시와도, 타리프와도, 디디에와도 같지 않고 또한 요한과도 같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무력해야 했던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그로 인한 비참함. 그것이 ‘벨’이란 존재에 커다란 유령을 씌워둔 것이다. 너를 순수한 채로 남겨두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어. 벨. 너는 한때 내게 단 한조각의 희망이었고, 유일한 사랑이었지. 그것을 저버린 것은 사실 그녀였는 데도, 저를 배신한 것은 사실 벨이였는 데도 사샤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망각했다. 인정하면 더욱 비참해질 것 같아서. 더 처참해질 것 같아서. 나는 너에게 집착했던 것이 아니다. 너에게 덧씌운 내 환상에 집착했을 뿐이야. 아아. 벨. 사실 나는 널 증오해. 네가 나를 배신하던 그 모든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해. 넌 내게 상처를 주었지. 살기 위해 날 죽이려고 했지. 내가 시킨 짓이라고 모략질을 했어. 그 순간들이 사실 늘 날 상처입혔어. 혼신을 다해 너를 돌봐 주었는데 네가 내게 준 것은 고작 그뿐이었지.
“사샤.”
요한이 재촉하듯 그녀를 불렀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겠어.”
“…….”
“그게 좋겠어.”
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을지도 몰라. 리볼버의 나머지 총알을 모두 써 버릴지도 몰라. 벨. 어째서 날 배신했어? 사실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았어. 너를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를 용서하지 못했어. 너는 교활하고 충동적이고 위험한 아이였다. 어리석은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내게 준 상처들은 정말 아주 오랫동안 아물지 않으리라. 어쩌면 영원히 아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너는 그토록 염원했던 목숨을 잃었으니 우린 비긴 거야. 벨.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네가 준 상처를 씻고, 너를 잊겠다. 이제 너는 내게 무용하다. 이제 내게 상처를 내지도 나를 아프게 하지도 못한다. 너를 용서해. 이젠 너를 용서하겠다.
사샤는 백사장 위에 서서 몇 번이고 바닷바람과 발목을 간질이는 바닷물을 음미하고 요한을 따라 다시 요새로 돌아갔다.
“요한.”
사샤는 그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고마워…….”
“…….”
“내게…… 보여준 행동 중…….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어.”
긴 계단을 오르며 가빠진 호흡으로 그녀의 말이 툭툭 예고 없이 끊겼다.
파자마 단이 물에 젖어 오던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계단을 올라 내실의 미로에 다다랐을 때쯤에는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친절이라.”
요한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그보다 친절하던 때는 많았다. 돌이켜 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심지어 저도, 사샤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던 때에도.
“나는 네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길 바라지 않아.”
요한은 마지막 계단을 오른 후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람이 가진 감정 중 가장 가치 없는 것이지. 네가 거기서 벗어났길 바라. 그게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아.”
“…….”
분노, 슬픔, 기쁨은 사람을 뜨겁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무언가를 이루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빼앗게 만든다. 그러나 절망은 사람에게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뿐이다.
사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한번 닦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요한이 그녀를 끌어당겨 좀 더 수월하게 계단을 오르게 도왔다. 사샤가 마지막 계단을 내디뎠을 때 둘의 얼굴은 코끝이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워 졌다. 사샤는 시선을 내려 그의 입술을 보았다. 기름 등불이 스며든 듯 뜨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목이 타 사샤는 침을 한번 삼키고 제 입술을 물었다.
요한은 그녀를 미로로 이끌어 사샤의 방도, 자신의 방도 아닌 곳으로 이끌었다. 그가 문을 연 곳은 내실에서 가장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이었다. 오랫동안 비운 탓에 가구마다 하얀 천이 덧씌워졌고 빈 중앙에는 러그 카펫과 쿠션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무대의 한가운데 같았다. 사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요한은 식은 체온을 데우려 미리 준비해둔 와인을 한 잔 따랐다.
“…….”
사샤는 요한이 왜 이 빈 방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한참 동안 궁리하였다. 요한이 하얀 천 하나를 벗겼다. 8mm짜리 영사기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전원을 켜자 영사기가 불빛을 뿜었다.
“앉아, 사샤.”
사샤는 요한이 턱짓을 한 곳에 주춤거리며 앉았다.
“뭘 하는 거야?”
요한은 뚜벅뚜벅 걸어가 스위치를 내렸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겼다. 그는 영사기에 필름을 끼우며 말했다.
“영화를 볼 거야.”
“…….”
사샤는 영사기 불빛이 닿는 빈 벽을 바라보았다. 점점이, 필름의 스크래치가 찍혔다.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뻑였다.
“……나…… 영화 같은 거…… 본 적 없어.”
그녀가 접한 매체란 병동에 있는 라디오가 전부였다. 시가지에 영화관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군인들의 병실에 호리호리한 몸매와 게슴츠레한 눈을 뽐내는 여배우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간호사들이 얼굴을 빛내며 어젯밤 본 영화의 남배우의 생김새와 목소리를 찬양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늘 궁금증을 가지고 있긴 했다.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소설과도 다르고, 사진과도 다르고, 음악과도 다른,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그 재미있고 매력적이라는 미디어가 과연 어떤 것인지.
그러나 한 번도 극장에 가 보지 못했다. 그럴 형편도, 시간도 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사투를 벌이는 아이들을 돌보기에도 바빴다. 고단한 몸을 뉘이고 쉬기에도 바빴다. 그렇다고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덧 사샤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즐길 줄 모르는 벽 같은 여자. 요한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와인 잔을 건넸다.
“자. 추위가 좀 가실 거야.”
“…….”
사샤는 그것을 받아 들며 멍하고 신기한 눈으로 그가 제 옆에 앉는 것을 쳐다보았다.
“전부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
“오늘, 연회장 화장실에서.”
그가 쿠션을 쌓아 팔꿈치에 괴며 대답했다. 사샤는 눈을 깜빡였다.
“왜?”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요새에서의 마지막 추억치고는 너무 점잖지 못해서?”
사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늦은 밤에 듣기에는 지나치게 명랑하고 맑은 소리였다. 아스라이 어둠에 빛이 비치듯, 종달새가 지저귀듯, 그녀의 목소리는 요한의 귓가를 간지럽게 했다. 그는 저가 그녀를 따라 웃는지도 모르고 그녀가 웃는 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런 걸 신경 쓰기도 하는구나.”
“안 써.”
사샤가 여전히 웃음기가 묻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요한이 무뚝뚝하게 그러나 분명한 열기를 담아 고백했다.
“말했잖아. 넌 다르다고.”
“……그거 사랑 고백 같은 거야.”
“난 그런 것 안 해.”
요한이 부드럽게 부정했다. 사샤는 코웃음 치며 시선을 영사기가 투사되는 벽으로 돌렸다.
“어쨌든, 여러모로 첫 경험을 선사해줘서 고마워. 싫든, 좋든.”
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도 익숙하진 않아.”
“…….”
곧 테이프가 늘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영상이 시작됐다. 시작부터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다.
“뮤지컬이야.”
“뮤지컬?”
“노래와, 춤과, 이야기가 같이 있지.”
사샤가 와인을 꿀꺽 삼키며 화면에 집중했다.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당신은 영화를 좋아해?”
사샤가 빈 잔을 내밀며 말했다. 요한은 그녀의 잔에 와인을 채우며 대답했다.
“좋아해. 난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지.”
“자연과, 동물도.”
사샤가 덧붙였다.
“맞아.”
그가 대답했다. 사샤는 다시 와인을 홀짝이다 불현듯 궁금하여 물었다.
“어쩌다가 군인이 됐어?”
“전쟁 중이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군인이 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으니까.”
“…….”
사샤가 무언가를 더 묻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고문을 당하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 버린 사샤와 달리, 요한은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시작한다. 사샤. 이제 정말 집중해야 해.”
그러나 요한은 능숙하게 사샤의 흥미를 영화로 돌렸다. 사샤는 재빠르게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한은 와인을 병째로 마시다가, 사샤가 잔을 건네면 그것을 채워 주고 다시 홀짝였다. 영화가 끝날 때쯤 와인은 동이 났고 사샤는 러그 카펫 위에 완전히 누워 버렸다. 그녀는 쿠션을 머리에 궤고 화려한 독백 무대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선율에 취해 있다가 벽이 다시 하얘지자 눈을 비볐다. 요한이 상영을 끝마친 영사기 전원을 내리고 불을 켜기 위해 일어나려 하자 사샤가 그를 잡아 제지했다.
“켜지 마. 요한. 그러면 여운이 달아날 것 같으니까.”
“…….”
요한은 다 비운 와인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 돌아간 필름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고마워. 정말 좋은 추억이 됐어.”
“…….”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은 너무나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조금은 행복해졌어. 아니, 좀 많이 행복해졌어. 죄스러울 만큼.”
“…….”
요한은 그녀가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네가 나를 안아 주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아.”
“…….”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 모로 누운 그녀를 따라 누웠다. 요한의 가슴이 사샤의 등에 닿자, 사샤는 웃으며 그의 팔을 끌어 제 허리에 둘렀다.
“그것 봐. 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지?”
“…….”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샤는 확신했다.
“너는 날 사랑한다니까.”
그런 건 안 해. 다시 한 번 그렇게 부정할 줄 알았는데 요한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러고 있다가, 내가 잠들면 내 침실로 옮겨 줘.”
“…….”
요한은 슬그머니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점잖지 못하다며?”
“먼저 안아 달랬잖아.”
“그 뜻 아니야.”
그가 사샤의 엉덩이에 제 하복부를 비볐다.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것이 느껴졌다. 요한이 사샤의 귓불을 혀로 핥았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요한. 난 별로….”
그러나 요한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벌리며 파고들었고 이내 파자마 자락이 위로 들렸다.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낭창한 허리를 지나 그녀의 실크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둔덕을 갈랐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아랫도리는 매끄럽게 그를 인도했다.
“뭐라고 했어?”
그가 간지럽히듯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고 애를 태우듯 질구 주위를 희롱하며 물었다. 사샤는 마른 입술에 혀를 축이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원해.”
“사샤.”
“안아줘. 요한….”
“안고 있어.”
사샤는 도리질하며 그의 부풀어 오른 바지지퍼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귓가에 닿는 그의 숨소리가 뜨거웠다.
“사샤.”
그가 헐떡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가 발음하는 저의 이름은 특별했다.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촉촉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네 말. 받아들이기로 했어.”
“…요한….”
사샤는 흥분에 못 이겨 헐떡였다. 체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를 정도로 젖었다.
“날 원해?”
그가 물었다. 너무나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해. 널 원해. 요한. 널 원해. 사샤는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 내뱉었다.
“네 구멍이 채워지길 원해?”
“응. 원해. 원해….”
“간절하게?”
사샤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넣을 거야.”
요한이 귓가에 속삭였다. 바지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지이익, 내려갔다. 그는 제 부푼 앞섶을 쓰다듬던 사샤의 손을 잡아 그녀의 무릎 뒤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무릎을 잡아 가랑이 사이가 벌어지도록 했다. 그의 굵은 페니스가 그녀의 둔부사이를 비볐다.
“요한….”
사샤는 숨을 토하며 헐떡였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결합하길 원했다. 그의 것에 꿰어지고 싶었다. 단지 살을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이어 지고 싶었다.
“벌려.”
“요한….”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벌려.”
“아….”
사샤는 신음하고 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알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그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줬다. 사샤는 제 무릎을 굽히고 그 뒤를 팔로 단단히 감아 끌어당겼다. 부끄러움 따윈 없었다. 요한의 체온과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넋이 나갔다. 지독한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없었다. 요한은 사샤의 자그마한 팬티를 옆으로 밀고 페니스로 질구를 비볐다.
“조금 더.”
사샤는 제 다리를 더 당겨 안았다.
“착하네. 사샤.”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어. 그는 놀리는 듯 중얼거리고 허리를 쳐 올려 그녀의 안을 빠듯하게 채웠다.
“아응!”
사샤는 그 충만함에 몸을 떨며 헐떡였다. 허리가 절로 휘었다. 요한은 꿈틀대는 그녀의 등 근육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찌나 아름답고 생생한 움직임인지. 절로 신음이 났다. 그녀가 저를 더 조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이 그녀의 안에서 더 부풀어서인지, 빠듯한 내부가 더 빠듯했다. 사샤의 엉덩이가 어서 움직이라 안달이라도 하는 듯 흔들렸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오래 버티지 못할 성 싶었다. 요한은 무릎을 감은 사샤의 팔에 제 팔을 겹쳐 감았다. 억센 힘으로 그것을 더 당기니 허리가 그쪽으로 휘며 골반이 같이 들렸다. 사샤가 ‘아!’하고 단발의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스러워서인지 아니면 놀라서인지 그것을 궁리할 겨를도 없었다. 요한은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사샤의 낭창한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철썩 철썩, 피부끼리 마찰하는 음탕하고 색정적인 소리가 요란했다.
“아! 요한! 요한! 아!”
비명을 내지르는 사샤의 입안에 요한은 제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빨아 봐.”
“아응!”
“빨아 봐 사샤. 이게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자 사샤는 입을 오목하게 좁히고 그의 엄지를 빨았다. 손가락에 그녀의 혀가 마찰했다. ‘아…’하고 요한은 눈을 감고 신음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축축하고 까끌하고 간지러운 혀가 손가락이 아니라 제 성기를 빨고 있다고 상상했다. 네 입에 내 성기를 물릴 일은 없겠지. 하지만 네 예쁜 입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 예쁜 입안에 들어가 네 보드라운 혀를 느끼고 네 목젖 안까지 들어가면 얼마나 황홀할까. 사샤가 울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요한. 요한.
아아. 사샤. 하지만 그러면 네가 나를 간절히 부르며 헐떡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이토록 달콤한 것을 포기할 순 없어. 사샤의 다리를 감은 요한의 손이 더 올라가 그녀의 젖가슴을 주었다. 몇 번 주무르고 더 올라가 그녀의 턱을 잡았다.
“아윽!”
하며 사샤는 등을 굽혔다. 손에 힘이 빠져 들렸던 다리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그녀는 누에고치처럼 몸을 말려했다. 부르르르 그녀의 엉덩이와 골반이 떨렸다. 간헐적으로 숨을 끊어 헐떡이자 요한은 추삽질을 멈췄다.
“절정이야?”
그가 땀에 젖어 헐떡이는 그녀의 어깨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나 사샤는 바닥으로 늘어져 헐떡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아. 그래. 절정이네. 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한쪽 다리 위에 올라타 반대쪽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는 다시 그녀의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그의 선단이 낯선 곳을 찔러 사샤는 ‘흑’ 하고 울었다. 요한은 다시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사샤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듯 입만 뻐끔거렸다. 요한은 그녀가 지금보다 더 늘어지거나 혹은 탈진 전에 행위를 끝내고 싶었다. 허리를 흔드는 행위가 사샤에게 난폭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요한!”
사샤가 절명하기 직전인 듯 비명을 질렀다. 도리질을 하다가 버거워 엉엉 울고 싶어질 때쯤 요한은 그녀의 안에서 제 페니스를 빼내 카펫 위에 사정했다. 헉헉거리는 남녀의 숨소리가 한동안 뜨거운 방안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요한은 그녀의 파자마를 끌어내리고 열이 식기 전에 따듯한 모포를 덮어주었다. 노곤하게 몸이 늘어져 사샤는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요한이 제 옷차림을 정돈하고 슬그머니 사샤의 머리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단단하고 따듯한 팔 베게에 사샤는 저 혼자 옅게 웃었다.
“아까 뭐라고 했지? 사샤?”
“내가 잠이 들면…… 옮겨달라고.”
“아.”
맞아. 그렇게 말했지. 요한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샤가 노파심에 덧붙였다.
“꼭 내가 푹 잠들고 난 다음이야. 깨어나면 슬퍼지니까. 알겠지?”
사샤는 대답도 듣지 않고 눈을 감았다. 가을의 날씨는 겨울처럼 추웠고, 빈 방에는 우풍이 감돌았지만 사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영사기의 반복되는 소리는 자장가 같았고 요한의 품은 봄날의 햇볕처럼 따스했다. 모든 것이 다 꽉 채워진 기분이었다. 하룻밤의 다디단 꿈. 내일 아침에는 다시 불행하고 외로운 현실과 맞닥뜨린다 해도 눈을 뜨기 전까지 사샤는 지금의 행복이 자신의 꿈속에서도 지속되길 빌었다. 요한의 향기와 온기와 그의 상냥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