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자각 없는 현실
Chapter 2. 자각 없는 현실
플로어에 올라간 라벨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춤을 본래 못 추는 건가? 아니면 내 발을 끝장내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아뇨, 그게, 앗! 죄송합니다.”
“춤추면서 평생 들을 사과를 다 들을 것 같은데.”
라벨은 부드러운 구두가 아니라 단단한 소가죽 부츠라도 신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란은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커플에 란은 깜짝 놀랐다.
‘올리비아랑 유스?!’
라벨이 속삭였다.
“그렇다고 춤을 멈추지는 말고.”
“아, 네, 네.”
허둥거리는 란을 보며 라벨은 신음을 삼켰다. 그 역시 황족의 소양으로 춤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란을 리드하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그는 그녀를 데리고 플로어에서 내려오는 걸 택했다. 그가 말했다.
“잠시 걷지.”
“아, 네에―”
힐끗 란이 플로어 쪽을 돌아보았다. 정말로 올리비아와 유스타프가 춤추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어찌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여기서도 웃는 게 보일 정도였다.
‘진짜로 반한 건가?’
정말로 올리비아가 유스에게 홀라당 넘어간 거야? 이렇게 빠르게?
어떻게 하지?
당황한 란은 라벨이 이끄는 대로 야외 무도장을 살짝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와서 라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라치아 공작, 집중 좀 하게.”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저하.”
란이 깊게 숨을 삼켰다.
‘그래, 생각해 보면 원작의 중요 내용은 바꿀 수 없는 거였잖아. 그러면 올리비아가 유스에게 반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맙소사.
진짜 어떻게 하지?
라벨이 어쩔 줄 모르는 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유스타프 경과 형수님이 춤춘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네?”
란이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혹시― 경을 좋아하고 있는 건가?”
그 질문에 란은 순간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가 그녀는 펄쩍 뛰었다.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황태자비마마가 유스타프에게 반한 것 같아서요.
말로 내뱉으려 하니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끼병이라고 해야 하나?
웃으며 춤 한 번 췄다고 반한다고 말한다면, 자신 역시 무수한 남자들에게 반한 거겠지.
란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올리비아가 유스타프에게 진짜로 반했는지는 확인해보면 될 일이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때 가서 대처하면 되는 거다.
어째서 자신이 그리 당황했는지 란은 알 수가 없었다.
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라벨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말인가?”
“그 질문으로 제가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네요.”
라벨은 가만히 란을 보다가 대답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란은 피식 웃고 주변을 둘러본 후에 말했다.
“이쪽 정원은 와 본 적이 없네요.”
“구경할 만한 건 없다네.”
“밤이라서 더더욱이요.”
어둠 속에서 정원은 그저 덤불 더미들이 늘어선 듯 보였다. 낮이라면 멋졌을 다듬어진 커다란 나무도 밤의 달빛 아래서는 기묘한 파수병처럼 보였다.
라벨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연인 사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그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뜻밖의 반응에 라벨은 눈을 끔벅였다. 외진 곳에서 여성에게 저렇게 말하면 반응은 두 가지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얼굴이 굳어지거나.
하지만 란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시원하게 웃고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정말로 그럴 것 같아요. 밤의 밀월이란 말이죠? 그럴듯하네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라벨은 깨달았다.
‘자기가 연애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군.’
어째서일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란은 상당한 미녀였고, 어디서도 남자들의 눈길을 받았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관객 같군.”
마치 자신에게는 무대 위의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듯한―
“네?”
란이 의아한 얼굴로 라벨을 보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
갸웃했다가 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면.’ 하고 말했다.
“그럼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오해를 받게 될 테니까요.”
“그전에 한 가지.”
“네.”
“유스타프 경에게 궁정 출입권을 줘야 한다 권한 게 형님이라 하더군.”
“황태자 전하께서 말입니까?”
“그래.”
그가 살피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이 괜히 유스타프 경에게 잘해줬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황태자와 유스타프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을 라벨은 슬쩍 언급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가볍게 인사했다.
“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저하.”
조금의 불안이나 곤란 같은 틈을 보이지 않는 란을 보고 라벨은 픽 웃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럼―”
라벨이 말했다.
“따로따로 돌아가도록 하지.”
“네, 저하 먼저 가시지요.”
“그래도 되겠나?”
“전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가겠습니다.”
란의 말에 라벨은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도 근처고 사람도 많으니 별일 생기지는 않겠지.
“알겠네, 그럼.”
라벨이 먼저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 황태자의 아이디어였단 말이지?’
루스가 저택에 와서 유스타프와 독대를 가졌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합의된 사항일까?
‘아냐, 그랬으면 유스가 미리 말했을 거야. 그러면 이게 라치아 공작가의 내분을 위한 거란 말일까?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의욕적인 인간이던가?’
‘쓰레기도 가끔은 쓸모가?’ 하는, 사정없는 평가를 하고 있는데 불쑥 본인이 튀어나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란은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화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한 박자 쉬고 그녀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파티장은 저쪽입니다.”
“아니, 이 어두운 곳에서 뭔가가 반짝이길래, 요정인가 하고 와봤더니 그대로군.”
나름대로 로맨틱한 말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란은 그저 짜증만을 느낄 뿐이었다.
란이 말했다.
“그럼 전 파티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빠져나가려는데 루스가 화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놓아주십시오.”
“에이, 왜 그러나? 우리 사이에. 응?”
“전하. 소리를 지르겠습니다.”
“질러보게.”
루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날 덮치려고 했다고 할 거고, 사람들에게 팬티 색까지 말해줄 테니 말이야.”
란은 입을 떡 벌렸다. 황태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거다.
모두가 진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를 끌어모으는 라치아가 얄미워서, 그리고 그 혈통도 아니면서 공작이랍시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자신이 아니꼬와서라도 필사적으로 소문을 더더욱 진득하게 퍼트리겠지.
자신이 속옷을 벗고 황태자 위에서 허리짓을 하고 있었다고 소문이 변질될 때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거다.
쓰레기라도 황태자는 황태자, 제국의 이인자니까.
‘개새끼, 뭐 진짜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쾌감과 분노가 란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반대 손으로 후려치고 싶지만 양손을 다 잡혀버리면 곤란해진다. 그녀가 그렇게 애쓰는 걸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바라보며 루스가 히죽거렸다.
“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나 좀 하자는 거네. 응?”
“이야기는 손을 놓고도 할 수 있지 않나요.”
란의 말에 루스가 피식 웃었다.
“손을 놓으면 바로 도망갈 거 아닌가?”
“이야기만 하는데 왜 도망가겠어요?”
“그런가?”
“네.”
란이 쏘아보듯 루스를 보며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팔을 놓자마자 도망가기 위해 그가 잡아당기던 방향의 반대로 당기던 팔에서 힘을 빼는 순간, 그가 확 란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
란의 입을 틀어막고 루스가 그녀를 밀어 쓰러트렸다. 란은 버둥거리며 그를 걷어차려고 노력했지만 긴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감겨서 제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으으읍!!”
란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불빛이 바로 저기 보이는데,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아무리 잘나봐야 계집이지, 다 똑같아. 조용히 해!”
루스는 흥분해 낮은 목소리로 지껄이며 그녀를 깔아뭉게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퍽―!
그때 몸이 휙 가벼워졌다. 루스의 몸이 한쪽으로 날아가듯이 나뒹굴었다.
“누님!”
다급한 목소리와 달리 손은 상냥했다. 부드럽게 상체가 일으켜졌다. 몇 번 더 기침을 하고 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유, 유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어, 괘, 괜찮아.”
아픔보다는 놀람이 더 컸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빠득 이를 악 물며 유스타프가 제 망토를 벗어 그녀의 머리까지 둘러주었다.
“이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그때 나뒹굴었던 루스가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황태자를 걷어차다니! 반역죄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유스타프 경?”
“전하?”
사람들이 모여들자 란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유스타프의 망토가 시선에서 그녀를 가려주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모여든 사람들에게도, 루스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붙잡고 일으켜 세워주며 다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란은 그제야 유스타프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조명 탓인가 그의 얼굴이 너무 희게 보였다.
푸른 눈동자만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개미 소리만 했고, 저절로 다리가 떨려왔다.
그래도 유스타프의 손이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넘어질 염려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망토를 둘러줘서 주변을 볼 수 없는 것도 그녀가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란은 입술이 떨리며 파르르 숨이 나오는 걸 꽉 눌렀다.
‘여기서 울지 마, 울지 마. 아직은 아냐.’
사람들이 모여들자 루스가 소리쳤다. 그가 유스타프를 삿대질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머님! 저 새끼를 당장 황궁 감옥에 넣으십시오! 여봐라! 근위병!”
길길이 날뛰는 루스의 얼굴 위로 하얀 장갑이 철썩 부딪쳤다.
순간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듯한 침묵이 무도장을 내리눌렀다.
루스는 “어?” 하고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보았다가 유스타프를 보았다.
“너, 지금……?”
“결투를 신청하는 겁니다. 전하. 감히 제 누님을 모욕한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루스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결투는 무슨! 헛소리하지 마라! 반역! 반역이야! 반역이다!”
약 맞은 벌레 같은 모습이었다.
유스타프가 한숨을 내쉬고 란에게 두른 망토를 단단히 여며 얼굴까지 가린 게 풀어지지 않게 한 후에 번쩍 안아 들었다.
“황족에게 결투를 청하는 걸 금지하는 법은 없습니다. 황후마마, 즐거운 연회가 엉망이 되어버렸군요. 죄송하지만 누님의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먼저 퇴석하겠습니다.”
카트야 황후는 당황해서 순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스는 반역이라고 하지만, 그가 란을 억지로 강간하려다가 유스타프에게 발각되었다는 건 빤한 일이었다.
“어머님,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라치아 공작을 의원에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벨이 옆에서 말을 거들어 카트야 황후는 결정을 내렸다.
“퇴석을 허락하네.”
유스타프는 가볍게 인사하고 그대로 야외 무도회장을 나섰다. 루스는 그걸 보면서 근위병에게 잡으라고 소리쳤지만, 근위병들은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태자! 진정하세요! 이목이 있습니다!”
카트야 황후가 눈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서 머리를 식히세요.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군요.”
카트야 황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야외 무도회는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무도회였고, 유스타프 경의 참석 때문에 고위 귀족들도 대부분 자리를 한 연회였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저런 추태라니.
황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올리비아, 네가 대신 손님을 좀 봐 드려라.”
카트야 황후는 올리비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귀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완벽하게 망쳐진 야외 무도회의 호스티스 역할을 맡게 된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게다가 방금 그녀의 남편이, 라치아 공작을 겁간하려다가 발각되어 결투 신청을 받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가운데서 올리비아는 고개를 치켜들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녀는 제국의 황태자비이며, 미로 공작가의 영애다.
결코 황후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
“소란스러움이 있었군요. 자, 여러분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곡을 연주하라고 하지요.”
그러며 그녀는 시종을 불러 비싼 샴페인을 가져오게 시켰다.
“괜찮으십니까?”
마차를 기다리며 유스타프가 다시 물어 와서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몇 번째야……?”
“죄송합니다.”
“뭐가?”
“제가 제대로 보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그가 통렬하게 저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아냐, 내가 좀 더.”
말하려다가 문득 란은 눈을 찌푸렸다.
“그냥 그 미친놈 탓 아닌가?”
“그러네요.”
산뜻한 대답에 란은 작게 웃었다가 저도 모르게 울기 시작했다. 란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어, 아니, 이상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습니다.”
유스타프가 낮게 속삭이고 그녀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그의 품에 파묻고 오열했다. 거기서 그렇게 황태자가 행동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화가 났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 분노가 식자 이제는 전신이 떨리며 두려움이 밀려들어왔다.
때마침 도착한 마차에 올라타서도 유스타프는 란을 내려놓지 않았고, 망토를 열지도 않았다. 그래서 란은 진정될 때까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
심장 소리.
울음이 멈추고 나서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울고 나니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대충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망토에 슬쩍 얼굴을 닦은 후에 란은 얼굴을 덮은 망토를 끌어내렸다.
“이제 괜찮아졌어.”
그녀가 작게 말하자 유스타프는 그제야 시선을 그녀에게로 내렸다.
“앉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응. 무겁지.”
당황하며 란이 일어나는 걸 유스타프가 제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래 봐야 옷 무게죠.”
그 말에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가 몸에 힘을 빼고 툭,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유스가 있어서 다행이야.”
유스타프가 슬쩍 란을 보고 “그런가요?” 하고 되묻는데 란이 “아!” 하고 몸을 번쩍 일으켰다.
“결투!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할 것도 없지요. 결투에 임하면 그뿐입니다.”
“아니, 혹시 황태자에게 상처라도 입히면 큰일 나는 거 아냐? 막, 황실에서 얼음수정 안 쓴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
“……그게 문젭니까?”
“어-?”
“그런 짓을 당할 뻔 했는데, 고작 얼음수정 판매요?”
“유스타프가 구해줬으니까…….”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곧 차갑게 말했다.
“누님께 이런 식으로 말해봐야 소용없겠죠. 자신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 분이시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니, 그런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 건가? 나 현실감이 여전히 없나?’
란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희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런 짓까지 당했는데도 어딘지 딱 하고 모든 게 맞물리지 않는다. 눈앞의 일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0.5cm정도, 아주 약간, 떠 있는 느낌. 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고민하는데 냉랭한 목소리로 유스타프가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안 쓴다고 하면 눈에 보이는 마법 물품이야 물론 자제하겠죠. 그러나 이미 편리하게 삶에 섞여 든 물건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차피 제국에만 얼음수정을 파는 것도 아니지요. 황태자라 해도 결투에 임할 때는 그저 한 사람의 기사일 뿐입니다.”
논리 정연한 말에 란은 그가 이것까지 계획하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닙니다.”
“응?”
“지금 이거 계획한 건가, 하는 얼굴이셨습니다.”
“어? 진짜?”
놀라 란이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얼굴에 그렇게까지 드러날 수가 있나.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게 막았을 겁니다.”
말하고 유스타프는 ‘대체 왜 라벨을 따라간 겁니까?’ 하고 추궁하고 싶은 걸 참았다. 별개의 일이지만, 괜히 그녀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유스타프는 대신 입술 사이로 깊게 숨을 빨아들이고 말했다.
“아마도 대리인을 세우겠죠.”
“어? 아…… 하긴, 황태자가 직접 결투장에 나오지는 않겠네.”
“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란이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황제와 너무 척지게 되는 거 아냐?”
“조율하러 온다면 그것도 좋겠죠. 아무래도―”
유스타프는 깍지를 끼며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무능한 아들과 달리 돋보이는, 능력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까요? 라치아도 황제 앞에서만은 잠잠하다. 같은 뉘앙스요.”
“어?”
“그렇게 되게 부추길 겁니다. 게다가 제 생각에 멍청한 황태자는 그걸 잘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황제와 황태자 사이에 다툼이 하나 쌓인다면 그게 첫걸음이지요.”
란은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분명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유스타프는 그 한순간에 그 모든 걸 계산한 거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란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 위에 마주 손을 얹었고, 유스타프가 그 손을 쥐며 말했다.
“적당히 마무리되면 라치아로 돌아갈까요?”
이번에는 란도 수긍했다.
“그래, 돌아가자.”
그 말에 유스타프가 빙그레 미소 지었고, 란은 그 미소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일까?
요즘 들어서 유스타프가 아주 부드러워진 것 같다. 예전처럼 찌르는 듯한 시선이나 표정도 없고.
“유스.”
“네.”
“날 누나로 인정하기로 했어?”
그 말에 단번에 유스타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리가요.”
쳐내는 말에 란은 “아, 역시?” 하고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팔짱을 꼈다.
란은 괜히 말 꺼냈다, 하다가 어라? 하고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제 괜찮아.’
아까는 정말로 놀랐고, 한참 동안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괜찮았다. 그녀는 힐끗 유스타프를 보았다.
“유스.”
“네.”
“다시 한 번 고마워.”
그 말에 유스타프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당기며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다음에 완벽하게 지켜드렸을 때 해주십시오.”
그 말에 란은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거 기대할게.”
유스타프는 잠시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침묵하다가 힐끗 란을 돌아보았다. 란은 제 어깨에 기대서 어느 사인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란의 눈가를 훔쳤다. 라벨과 함께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라벨 혼자 돌아온 걸 보고 가보기를 잘했다.
‘거기서 그 새끼.’
유스타프는 다시 격렬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루스는 제 목이 붙어 있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거다.
마차는 곧 녹색 아치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연 풋맨은 잠든 가주를 보고 약간 놀란 눈치였다. 유스타프는 몇 번 어색한 동작을 노력한 끝에 그녀를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풋맨들이 재빠르게 발판을 마련하고 문을 잡았다.
시종들은 망토로 말린 도롱이 벌레 같은 가주를 바라보다가 유스타프의 차가운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녹색 아치로 들어가자 집사가 당황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있어.”
유스타프는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어차피 오늘 밤이 끝나기 전에 온 사교계에 소문이 퍼질 거고, 내일 아침이면 시종들 귀에도 소문이 들어갈 거다.
미리 말해두는 게 좋았다.
“시녀장과 함께 집무실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가주님은―”
유스타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데리고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집사는 충실하게 고개를 숙였고 유스타프는 란을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침실이 아니라, 거실 소파에 그녀를 앉히고 어깨를 흔들었다.
“누님.”
“으응…….”
“일어나십시오. 주무시게 해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가 좀 더 강하게 어깨를 흔들어서 란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
잠시 눈을 깜박이던 란이 주변을 둘러보고 눈을 비볐다.
“여기 어디야……?”
아직 잠에 취해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듯한 어조여서 유스타프는 피식 웃었다.
“녹색 아치입니다.”
그의 말에 란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진짜? 언제 왔어?”
“좀 전에요. 그리고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가신들에게 지금 설명해야 할 겁니다. 내일이면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을 테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서 대기 중인 카라에게 말했다.
“화장 고치고 옷도 갈아입겠어. 머리도 새로 하고.”
“네, 가주님.”
카라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란은 빙긋 웃으며 유스타프를 보았다.
“고마워. 혼자 처리하지 않아서.”
“이 이야기는 누님께서 하셔야지요.”
유스타프는 느긋한 어조로 말하고 살짝 인사를 했다.
“그럼 저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집사에게는 시녀장과 함께 집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응, 알겠어.”
“네.”
그가 물러나자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에 세숫물을 가져온 카라와 소다가 재빠르게 그녀의 재치장을 돕기 시작했다.
잠시 후 란은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운 흔적 없이 깔끔하고 청초한 얼굴이 되었다.
머리카락은 그냥 풀어서 늘어트리고 비스듬히 앞머리를 땋아서 초승달 모양의 백금과 진주로 된 핀으로 고정했다.
란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이 멀쩡하단 걸 확인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말했다.
“그럼 가지.”
방을 나가니 블레인 경이 서 있어서 란은 그에게 살짝 미소 짓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집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시녀장과 집사, 유스타프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블레인이 마지막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다들 무슨 일인가 불안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하겠지만, 오늘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서 이야기하려고 부른 거야.”
란은 그렇게 말하고 오늘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집사인 롤프가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감히 가주님께 그딴 짓을 했단 말입니까! 황실은 라치아 공작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블레인 역시 분노로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이 건은 정식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과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스타프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사과를 받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지. 일단 결투 신청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자고. 누님, 내일 황제를 알현하러 가시죠. 저와 함께요.”
“그래.”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미 유스타프의 계획을 다 들은 터라 저항감은 없었다. 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이어 말했다.
“내일이면 모두에게 소문이 퍼져 있겠지. 라치아 공작가를 향한 악의적인 소문도 분명 나올 거고.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거네. 남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는 미리 듣는 게 낫지. 아랫사람들에게도 알려두게.”
그 말에 집사와 시녀장, 블레인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우리 측에서 소문을 먼저 나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니 함구령은 내리지 말도록.”
그리고 란은 빙긋 웃었다.
“우리에게 유리한 소문일수록 더 좋겠지. 힘없고, 가련하고, 순진무구한 라치아 공작 이미지라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란은 세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블레인은 유스타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다음에 하기로 결심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신들이 나가자 란은 한숨을 내쉬고 책상에 끙차, 걸터앉았다.
“힘없고 가련하고 순진무구한 라치아 공작이요?”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이 녹색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물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아?”
유스타프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청초하신 라치아 공작님이죠.”
그 말에 란이 “으아아아!” 하고 제 팔을 문질렀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으―”
유스타프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소름이 쫘르륵 돋았다.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언론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맞아. 하지만 이건 가십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이고, 난 린드버그 남작 때와 같은 실수는 안 할 거야.”
필요하다면 언론전도 해야지.
할 수 있다면 가십지도 포섭해서 찌라시를 뿌리고 싶지만, 아직 이 세계에 그런 식의 언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속 활자가 있기는 하지만 인쇄 기계는 자동이 아니라 전부 수동이고, 일단 문맹률이 워낙 높아서 책은 어디까지나 고가의 상류층 전유물이었다.
“‘아랫것들이 뭐라고 수군대는지 아세요?’도 주요한 이야깃거리니까. 황태자에 대한 지지도를 떨어트리기도 좋고.”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럼 이제 씻고 자야겠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할 테니까.”
“주무십시오.”
“응, 유스도 잘 자.”
란은 저녁 인사를 하고 총총 서재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유스타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이황자를 만나 볼 때군.’
이튿날, 란은 아침 일찍부터 황궁으로 입궁해 알현을 요청했고, 황제는 알현을 바로 허락했다.
“오오, 라치아 공작!”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 아래로 내려오는 환대를 보여주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란이 드레스 자락을 잡고 우아하게 황제에게 인사했다. 행잉 슬리브(hanging sleeve)가 달린 담적색의 드레스에 목에는 진주 초커를 차고, 머리카락은 전부 틀어 올린 후 잔머리를 살짝 흘러내리게 해서 더욱 청순함을 돋보이게 했다.
황제는 “고개를 들게.” 하고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유스타프는 세 걸음쯤 떨어진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제 동생인 유스타프입니다. 폐하의 은덕으로 궁정 출입권을 얻게 되었지요. 제가 이리 무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폐하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유스타프가 날 구해 준 거니까, 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도 일어나게. 이 모든 게 내가 불미해서 생긴 일이야.”
“그런 말씀을…….”
란이 순진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후작가와의 문제를 잘 조율해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황가에 충성하자고 굳게…….”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며 입술을 꼭 깨물자 황제는 다급히 말했다.
“그대의 충정이야 익히 알고 있네.”
유스타프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런 란을 위로하듯 팔을 도닥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누님께서는 아직 충격에서 회복되지 않으셔서…….”
그러며 황제가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그런 일을 겪은 귀부인이 하루 만에 회복되기는 어렵지요.”
“유스, 괜찮아요. 폐하께서는 이해하고 계십니다.”
확정적인 단언이었다. 거기에 대고 ‘아닌데? 난 이해 못 하는데?’ 하고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황제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그럼, 익히 알고 있네.”
그러자 유스타프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제가 반역자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황제 폐하께 역기를 든 게 아닌데, 어째서 반역자라는 거니? 그건 이미 거론하지 않기로 했잖느냐. 황태자 전하께서 실수하신 거라고.”
란이 몸을 곧추세우며 제법 기운을 차린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지만…….”
그러며 유스타프가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굳어진 황제의 얼굴은 그 시선에 풀어졌다.
“그래, 그건 태자가 말실수를 한 듯하네.”
유스타프가 란의 팔을 놓더니 급작스럽게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유스!”
사전에 말이 없던 일이라 란이 놀라 허리를 숙였다.
“폐하, 제 누이의 명예는 제 손으로 꼭 되찾고 싶습니다. 부디 결투를 허락해 주십시오!”
당황해 란은 어쩔 줄 모르며 황제와 유스타프를 번갈아 보았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스타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야 물론이네. 자네 같은 명예를 아는 자가 차기 라치아 공작이라니, 제국의 앞날이 밝군. 내 황태자가 직접 결투에 나가도록 이야기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감격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고 란은 멍한 얼굴을 했다.
내가 아는 유스타프가 맞나?
그러고 나서 황제와 유스타프는 제법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알현실을 나서자, 유스타프는 말이 없어졌다.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그가 짜증 나는 어조로 말했다.
“멍청한 아비 밑에 멍청한 자식이로군요.”
“유스…….”
“네.”
“너 진짜…….”
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유스타프의 자존심이 얼마나 높은지, 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자존심을 굽히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유스타프는 목적을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였다.
“대단하네, 우리 유스.”
“그 ‘우리’만 빼주시면 좋겠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그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누님.”
“네.”
“누님께서는 정말로 제 누님이 되고 싶으십니까?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를, 저를 정말로 남동생으로만 생각하신다고요?”
있을 수 없을 때의, 허를 찔린 일격이었다. 란은 순간 숨을 헛삼켰다.
“그야―”
물론이라는 말은,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푸른 눈동자 앞에서 나오지 않았다.
란은 목덜미를 물린 짐승처럼 가볍게 헐떡였다.
“나는, 유스……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유스타프를 남동생처럼 생각하냐고?
진짜로 가족이 되고 싶은 거냐고?
란은 거기에 ‘네.’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이방인이고, 떠날 사람이니까.
여기에는 섞일 수 없는 존재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항상 그 앞에서 떠들었던 게 이렇게 정면으로 까발려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란은 손가락 사이로 말했다.
“나 열심히 하고 있고. 유스도 좋아해.”
애정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남아서 이러고 있겠는가?
그때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살며시 내렸다. 어쩐지 그의 눈에는 경멸이 아니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싫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빤히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란이 어쩔 줄 모르는데 그가 다시 픽 웃으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좀 화가 나서 말입니다.”
“어―? 뭐가? 왜? 뭐야, 뭐라고 하는 거 아니라며―”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말을 할 텐데, 그때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뭐야? 뭔데?”
“힌트를 드릴까요?”
“응.”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타프가 천천히 말했다.
“누님이 절 배신할 수는 있지만, 제가 누님을 배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란이 눈을 찌푸리고 재빠르게 말했다.
“나도 배신 안 할 거야.”
유스타프가 픽 웃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뭐야, 나 못 믿어?”
“아뇨, 믿습니다.”
그러니까 배신도 당하는 거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제 황태자 쪽에도 적당히 딸랑이를 보내야겠군요.”
“……딸랑이?”
란이 갸웃하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녹영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게른 남작이 황태자와 친하다고 하더군요. 더해서 게른 남작은 쓰레기입니다. 적당한 이익을 쥐여 주면 원하는 대로 떠들어 주겠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마차 창틀에 팔을 올렸다.
“황태자가 직접 결투에 나오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덤입니다.”
“……설마 죽일 건 아니지?”
“제가 그렇게 멍청한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유스타프가 딱딱하게 말하자 란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빠르게 답하니 유스타프가 힐끗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그리고 누님께 새 시녀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시녀를?”
“네.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바꿀 테니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 아치에 도착해서 란은 금방 새 시녀를 만나볼 수 있었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눈동자는 우아한 제비꽃 빛깔.
나이는 이제 열일곱? 열여덟쯤 되었을까?
키가 크지만 호리호리해서 시녀 복장이 매우 잘 어울렸다.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디모디아 루스테라고 합니다. 벨로인 백작님의 먼 친척입니다만, 백작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가주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벨로인 백작가.
그 순간 란은 상대의 정체를 알았다. 그래서 란은 웃으며 말했다.
“벨로인 백작의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디아라고 불러도 될까?”
“네, 가주님.”
소녀는 처음으로 높은 공작을 본 데다가, 그분이 친절하게 대해주자 감격하며 들뜬 목소리로 얼른 답했다.
소다와 카라 역시 디아를 쉽게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가주님을 모시는 시녀의 수가 적어서 고생하고 있었던 터라, 새로운 동료가 반가웠다.
게다가 시골 소녀답게 쾌활하고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모습은 금방 두 사람의 호감을 샀다.
‘녹영인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러가는 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벨로인 백작은 녹영에서 운영하고 있는 가짜 귀족 신분 중의 하나였다. 제국 귀족은 아니고, 왕국 귀족 신분을 빌려 쓰고 있었다.
‘호위 대신이구나.’
아무래도 남자인 호위 기사는 같이 갈 수 있는 장소가 한정되어 있으니, 시녀를 붙인 모양이었다.
‘뭐, 알아서 잘 지내겠지. 그나저나 돈을 엄청 먹인 보람이 있네.’
녹영이 란에게도 공개되고 나서, 녹영에 들어가는 돈이 어떻게 나눠져서 장부에서 조용히 흘러들어 가는지 란은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액수가 예산으로 들어갔다.
‘돈은 기름칠하는 역할이니.’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것도, 그 유지에도 돈이 들어간다. 심지어 정보 수집을 위해 길거리 거지에게서 말을 듣는 데에 들어가는 동전 한 닢까지도 돈이다.
정보기관은 돈 먹는 집단이었다. 게다가 이미 쭈그러든 녹영을 다시 키우기 위해 모든 걸 단기간에 하고 있으니 당연히 들어가는 금액도 컸다.
하지만 돈을 먹은 만큼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도 점점 두툼해지고 있어서 란은 혀를 내둘렀다.
‘어느 시대나 정보는 중요하니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들었다.
오늘 치 서류를 봐야 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란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
와장창!
값비싼 유리와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올리비아가 눈짓하자 창백한 얼굴로 시종이 문을 열었다.
“그만 진정하세요, 전하.”
올리비아가 안으로 들어가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그 말조차도 루스에게는 놀리듯이 들렸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가 욕설을 퍼부으며 땅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올리비아 쪽으로 걷어찼다.
“씨, 뭐라고? 내가 직접 결투를 하라고? 미친 거 아냐? 노망났나?”
누구를 향한 건지 뻔한 소리라 올리비아는 얼굴을 굳히며 시종을 손짓으로 물렸다.
“아무리 그러셔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차기 황제가 바로 난데!”
올리비아는 안 그래도 차가웠던 마음이 더더욱 차갑게 굳는 걸 느꼈다. 정말로, 정말로 이런 인간이 어떻게 제국 황태자일 수가 있을까?
“그래, 뭐 좋아. 내가 다 죽여 버리지, 뭐. 내가 그 새끼 목을 베어버리고 힘으로 다 차지해주겠다 이거야. 그래 봐야 꼬맹이인데.”
씩씩거리던 루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슬슬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그 야외 무도회장에서 잠깐 만났던 유스타프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라치아 공작가의 발 빠른 대응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지금 여론은 황태자를 비난하는 형태로 쏠리고 있었다.
황제가 라치아 공작의 손을 들어준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이 패를 버릴 수 없었다.
“전하,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결투를 일단 피하고―”
올리비아의 말에 루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만약 루스에게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었다면 여기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루스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에게 올리비아는 그저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패 중 하나에 불과했다.
철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아픔보다 순간, 모멸과 수치감이 그녀의 오장육부를 타고 올라왔다.
뺨을 감싸며 올리비아는 루스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루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 꼬맹이에게 지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라치아 공작입네 하는 그 창녀도 그렇고 너도 건방지기 짝이 없어. 애도 못 낳으면서. 차기 후계자가 없으니 제국의 위엄이 안 서는 게 아니냐!”
큰 소리로 헛소리를 떠들며 면박을 주고 루스는 그 자리를 떴다.
올리비아는 그가 나가자 파르르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래, 그렇다면.’
꼭두각시로도 쓰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작자라면, 버리는 수밖에 없지.
올리비아는 종을 흔들어 시종을 불러서 난장판이 된 방을 치우게 했다.
‘자, 그럼 남은 카드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까.’
올리비아는 제 손가락 끝을 가볍게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
가정교사는 어리고 버릇없어 보이니 그만두라고 했지만, 올리비아는 그 말에 오히려 이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약점이 오히려 나은 법이니까.’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정말로 결투에서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비극적 미망인이 되어서 여론을 한껏 내 편으로 두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만만찮아 보였어.’
유스타프를 생각하며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제국 사교계는 곧 황태자와 유스타프의 결투 소식으로 가득 찼다.
결투 장소가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누가 이길지도 큰 내깃거리 중 하나였다.
황태자 역시 황실 기사단장에게 사사한 몸이다. 그렇게 쉽게 질 리가 없다. 게다가 나이도 훨씬 많고 성인이 아닌가?
유스타프 경은 아직 미성년이다.
하는 의견과,
그래도 유스타프 경에게는 실전 경험이 있다. 얼마 전에 영지전에서도 일대일 대결을 하지 않았느냐?
심지어 이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사교 클럽마다 비밀스러운 내기판이 열렸다.
유스타프의 결투 때문에, 결투의 원인이 된 황태자가 란을 덮친 이야기는 오히려 그렇게 가십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 망나니 놈이 또 그랬나 보군.’
‘심지어 초대장도 가지 않은 황후마마의 야외 무도회에서요.’
‘라치아 공작만 불쌍하게 됐지 뭐예요.’
란에 대한 평가는 그 정도였다.
불쌍하게도.
물론 그 상황을 자극적으로 써 내려가려는 호사가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자들은 빠르게 잠잠해졌다.
녹영의 부지런한 방문 덕분이었다.
녹색 아치는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손님은 귀한 손님이었다.
“란!”
리제가 모자를 꽉 누르고 에스코트도 없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듯 하며 현관으로 달려 올라왔다.
키릭스 후작은 에스코트를 위해 내밀었던, 허공에 뜬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전하의 머릿속에 벌레라도 들었나 봐요.”
뇌를 먹어치워서 없나 보다, 하는 신랄한 말을 잘 돌려서 하는 재주가 엘리제에게 있었다.
란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무사한 모습을 보니 기쁩니다, 라치아 공작. 그리고 유스타프 경.”
키릭스 후작이 왼 눈가를 가로지른 제 흉터를 습관처럼 손끝으로 슥 문지르며 말했다.
“설마 이런 요청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생각나는 사람이 후작님밖에 없어서요. 어려운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라치아 공작가에 빚을 지워두는 건 나쁘지 않지요.”
“카티!”
저도 모르게 엘리제가 그의 애칭을 부르고 나서 얼굴을 붉혔다. 란이 웃고 말했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죠. 귀한 손님을 밖에 계속 세워뒀군요.”
란은 두 사람을 네 번째 응접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귀빈을 위한 응접실로 안내했다.
집사가 아니라 가주가 직접 나와 환대하고 응접실까지 안내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호의의 표시였다. 하지만 엘리제도 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니까 당연히.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팔짱을 꼭 끼고 나란히 드레스 자락을 살랑살랑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키릭스 후작이 유스타프에게 속삭였다.
“어째 우리가 찬물 신세가 된 것 같지 않나?”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죠.”
“그건 너무 무난한 대답이고.”
키릭스 후작이 그렇게 말하더니 호박색 눈으로 유스타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투라니, 생각보다 무모한 짓을 하는군.”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목을 밟아 부러트릴 것 같았습니다.”
유스타프가 하도 느긋한 어조로 말해서 처음에 후작은 농담인 줄 알았다가, 진담이라는 걸 곧 깨달았다.
“날 너무 믿는 거 아닌가?”
유스타프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게 밖으로 나가면 좋을 리가 없었다. 유스타프가 말없이 앞서가는 엘리제를 턱짓했다.
“부인을 많이 사랑하시는 듯하여.”
“한 방 먹었군.”
후작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행은 곧 응접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소파에 앉은 키릭스 후작은 다리를 소파 테이블 위에 꼬아 올려놓았다. 그 방만한 자세에 엘리제가 눈을 찌푸리는데 유스타프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어떻게 걷어찬 건지 소리가 크지도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테이블이 앞으로 죽 밀려 나가서 후작의 발이 땅에 떨어졌고, 유스타프가 공손히 말했다.
“공작님 앞입니다.”
키릭스 후작은 양손을 들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발 받침이 필요하신 거면 가지고 오게 하지요.”
란은 용서의 말 없이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이지. 그런 떠보는 짓은 그만둬요.”
“제 마나님의 말대로.”
키릭스 후작은 그렇게 이야기했고, 란은 시종을 불러 다시 테이블을 원래 자리로 옮기고 닦은 뒤에 다과를 가져오게 했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엘리제는 사교계의 소문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녹영을 통해 들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란은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엘리제는 생크림 케이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세계는 버터크림은 존재하지만, 휘핑한 생크림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크림을 차갑게 유지하며 설탕을 듬뿍 넣어 휘핑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란은 마법 도구와 설백나무로 그것을 해결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생크림을 듬뿍 얹은 수플레 팬케이크에 엘리제는 진지하게 “정말로 맛있어요.” 하고 강조했다. 란은 “얼마든지 먹어요.” 하고 시종을 시켜 몇 개나 더 가져오게 만들었다.
진한 홍차에 크림을 얹은 푹신한 케이크를 먹자 엘리제는 기분이 곧 유해지는 걸 느꼈다.
“사교계의 이야기는 그 정도예요. 정말이지. 아아,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가 요즘 근위기사단장에게 특훈을 받는다는 거 알고 있나요?”
“저도 들었습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여 엘리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결투라니.”
그런 것보다는 법적인 해결이 더 좋았겠지만, 황태자에게 법의 판결을 내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키릭스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드린 겁니다.”
란이 말하고 키릭스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근위기사단장과 아시는 사이지요.”
“과거 인연이 조금 있었지요.”
“편지로도 이야기했던 사항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유스타프를 상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키릭스 후작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번득였다. 그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편지를 받았을 때도 생각했지만, 가르침이 아니라 상대라는 그 단어 선택이 굉장하다고 생각했지요.”
키릭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유스타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단어 선택이 맞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군요. 그러니 공작 각하, 그 제안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려운 제안 수락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키릭스 후작.”
란의 산홋빛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라치아 공작가는 그 무엇도 잊지 않습니다.”
“그거 고맙고도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키릭스 후작은 그렇게 대답하고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잠깐 안내받아도 될까?”
“물론입니다.”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란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은 응접실을 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엘리제가 재빠르게 란에게 말했다.
“저렇게 말하고 후작님이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모처럼 피가 끓는다고 하면서 말이죠.”
“어쩐지 답장이 빠르다고 생각했어요.”
란이 그렇게 대답해서 두 사람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제가 케이크를 자르며 물었다.
“그런데 란, 정말로 괜찮아요?”
“네, 정말로 괜찮아요. 그때 진짜 놀라기는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유스가 걱정이죠.”
“유스타프 경이? 왜요?”
“왜냐니. 그야 결투를 한다니까 그렇죠.”
“하지만 결투라고 해도 요즘은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 : 먼저 피를 보는 사람이 지는 방식)잖아요?”
“그렇게 하는 추세라는 거지, 그런 식으로 땅땅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얼마 전에도 결투하다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야 그렇지만…….”
엘리제가 란을 살피며 말했다.
“상대가 황태자 전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심하게까지 싸우게 될까?
“그러니까 더 걱정이죠. 오히려 더 싸울지도 모르잖아요.”
란의 말에 엘리제는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남자들은 터무니없이 멍청하게 굴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유스타프 경은 그런 타입은 결코 아닌데.”
“황태자 전하가 반칙을 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에요. 독을 쓰거나…….”
“설마.”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 결투가 얼마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오히려…….”
말하다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자신이 읽은 것과는 다르게 틀어지고 있어서, 란은 초조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원작처럼 똑같이 흘러간다면 란이 이렇게 유스타프를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낸 그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버렸다. 영지전이나 결투는 원작에는 없었던 일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죄책감에 참을 수가 없을 거다. 이야기가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제 멍청함에 란은 한숨을 삼켰다.
‘그냥 얼음수정이랑 마법 도구만 좀 팔고, 돈 많이 벌어서 라치아 공작가를 부자로 만들어 시나가 오면 둘이 잘살게 하고, 나는 그냥 멀리 떠나는 생각만 했는데.’
황태자와 유스타프의 결투라니.
‘기분이 이상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불쑥 엘리제가 생크림을 듬뿍 바른 수플레 팬케이크를 내밀었다.
“먹어요.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예요.”
란은 웃으며 포크를 받아 들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엘리제 말대로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유스타프 경은 괜찮을 거예요. 카티, 아니 카로크가 가르치면 질 리가 없어요.”
남편에 대한 신뢰가 듬뿍 묻어나는 말이었다.
‘가르친다, 라.’
란은 후작에게 편지를 보낼 때 한 수 가르침을 청한다는 표현을 굳이 상대해 주시길 원한다는 표현으로 고친 유스타프를 생각했다.
그때는 진짜로 황당했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 나이 또래에 할 법한 오만한 생각이다.
‘어리긴 어리다니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아, 참. 란.”
“네.”
“유스타프 경이 황태자를 걷어찼다는 게 사실이에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퍽, 하는 커다란 발길질 소리가 들렸으니 아마 상당히 강하게 걷어찬 거겠지. 사람을 그렇게 차면 가죽 공을 차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이 날아가듯 사라졌으니까.’
“그것도 좀 세게요.”
“어머, 시원해라.”
꺄르르 장난스럽게 웃더니 엘리제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란.”
“네.”
“그게, 이건 좀 무례한 질문인데―”
“말해 봐요.”
“유스타프 경이, 그러니까, 음. 란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며 란이 손을 저었다.
좋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좋아할 가능성조차 배제하는 강렬한 몸짓이라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항의하듯 말했다.
“하지만 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누님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잖아요.”
“어휴, 유스타프는 진짜로 날 누나라고 생각한 적은 단 1초도 없을걸요.”
한탄하듯이 란이 말하자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그녀가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럼 란은요?”
그 질문에 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대답은 쉽게 나왔다.
“저도요.”
유스타프를 남동생 삼고 싶다거나, 남동생처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남자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서로의 사정에 의한 동맹 관계라는 거죠.”
깔끔하게 정리하듯 말하고 란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리제의 친구가 라치아 공작이거나 공녀가 아닐지도 몰라요. 만약, 음. 그게 싫다고 해도 난 이해해요.”
“난 이해 못 해요.”
리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한번 친구면 영원히 친구죠. 그건 신분과 관계없는 문제예요. 만약에 란의 이름이 란이 아니게 되더라도,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걸 잊지 말아줘요.”
란은 그 말에 사르르 마음 안쪽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친구라는 걸 잊지 않을게요.”
“좋아요.”
엘리제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란을 보았다.
처음에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되었고…….
‘어쩐지 란은 거리감이 있단 말이야.’
모든 가능성에서 자신은 쏙 빼놓는 느낌.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라면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유스타프 경이 란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결투를 위해서 황제 앞에 무릎까지 꿇었다고 들었다. 모두가 유스타프가 라치아의 명예를 귀히 여긴다고 말했지만, 엘리제의 감은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음유시인의 서사시 일부 같은 상황에 푹 빠져서 ‘기사의 명예와 도리’ 같은 것을 읊고 있지만.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 타입의 사람이 뭘 놓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카티에게 그렇게 대드는 남자애는 지극히 드물다.
그러니 지켜보면 알게 되리라.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와 디저트를 더 청했다. 환대를 대하는 훌륭한 손님의 자세라 란은 기뻐하며 시종을 불렀다.
카로크 샤드 키릭스 후작은 드물게 긴장과 즐거움을 함께 즐기고 있었다. 더해서 약간의 짜증까지.
왼눈이 안 보이는 걸 짜증 나게 만드는 상대였다.
외눈이 아니었다면 좀 더 이 승부를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잃은 걸 안타까워해 봐야 소용없고.’
잃어서 얻는 것도 있는 법.
‘아니, 잃었는데 얻는 게 없으면 억울하니까 얻어내야지.’
카로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의 검날이 밀고 오는 대로 제 칼날의 힘을 뺐다 넣었다 하며 강약을 조절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인지 유스타프의 검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밀고 나가자 유스타프는 미묘하게 검의 각도를 조절해 그의 검을 미끄러트렸다. 카로크는 아차, 하며 검의 균형을 잃는 척했다. 들어오면 바로 벨 작정이었다. 그런데 유스타프는 그대로 간격을 벌려버렸다.
카로크는 혀를 찼다.
‘뭔 애가 저래?’
저 나이대에는 이겼다, 싶으면 무모하게 들어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저건 어디 험한 바닥을 구르다 온 용병처럼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목숨 걸고 하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하지?”
카로크가 투덜거리자 유스타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검을 맞부딪쳐 왔다.
카로크가 다시 검의 힘을 조절하려는 순간, 유스타프가 먼저 힘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어쭈?’
카로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내 기술을 베낀 거야?
‘그렇다면.’
카로크의 검에 힘과 스피드가 휙 올라갔다. 그러자 유스타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 힘을 올렸다. 빠른 공방전이 이어졌다.
둘의 간격은 거의 멀어지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보통 긴 검을 휘두를 때면 붙어서 이런 식으로 검 싸움을 하지 않는다.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돌면서 살피고 다시 붙는, 그런 형식의 검술 대련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둘은 남들이 보면 기가 질릴 만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승부도 빠르게 났다.
앗 하는 사이에 카로크의 검이 유스타프의 목에, 유스타프의 검이 그의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비겼네.”
카로크가 말하며 검날을 떼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졌습니다.”
한 타이밍 늦게 검이 들어갔다.
그의 시인에 카로크는 씩 웃었다.
“누구에게 배운 거지?”
“와일드 남작에게 배웠습니다.”
블레인의 아버지이자, 전 청염 기사단 단장이다.
“그렇군.”
툭툭 카로크는 뭉툭한 검 끝으로 부츠 끝을 두들겼다.
‘저 나이에 이 정도라니, 장래가 기대되는 녀석인데.’
보통 저렇게 실력이 있는 놈이면 흔하게 있는 오만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제 잘난 건 잘 알고 있고, 그걸 이용하는 방법도 잘 알지만 그걸 과신하지는 않는.
‘능구렁이라도 속에 들어 있나.’
카로크는 제 젊을 때를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그럼 한판 더 할까?”
“네.”
유스타프가 검 끝을 가볍게 떨치며 대답했고 둘은 해가 떨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련에 열중했다.
유스타프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아마 이게 마지막 연습이 될 터여서 한계까지 몰아붙이니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대련에 열중한 건 오랜만이었다.
블레인이나 다른 기사들은 아무래도 검을 맞댄 시간이 길다 보니 패턴이 비슷했고, 예측되는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키릭스 후작은 달랐다.
처음 보는 패턴에, 처음 보는 검술, 제법 비겁한 점까지 전부 유스타프의 마음에 들었다.
뜨거운 물 속에서 근육이 노곤노곤해지는 걸 느끼며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3일 후가 결투 일이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황태자에게 결투라니, 너무나도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제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에 코를 내밀다니.
자신은 라치아의 머리이다.
머리가 잘리면 손발은 기능할 수가 없으니, 대장은 어디까지나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 원칙을 스스로 깨 버렸다.
입술을 깨물고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유스타프는 그 원인을 생각했다. 너무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보이는 원인이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더라?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믿지 마세요.
그건 자신도 잘 안다.
―만약, 만약 유스타프. 혹시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죽어가는 광기로 어머니는 아주 좋은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속삭였다.
―누군가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면
“죽여 버리세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차갑게 웃었다. 어머니는 할 수만 있다면 아버님과 함께 죽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영원하고 완전하게 라치아 공작 부인의 자리를, 남편을 소유하고 싶었겠지.
깊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그는 눈을 감았다.
한참 탕 안에 있다가 나가니 시종이 공손하게 “가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 전해 왔다.
“왜 전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셔서.”
혀를 차고 유스타프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은 대충 턴 다음 응접실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란이 그의 기척에 반갑게 돌아보았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시선을 돌린다.
그러더니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아 유스타프가 말했다.
“옷 벗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란이 펄쩍 뛰었다.
“어쩐지 그런 눈으로 보셔서.”
“아니거든!”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며 그는 역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감정이 다 드러나면서도 가주직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배워온 가르침을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존재.
만일 혈통을 제외하고 자신과 란 중에서 어느 쪽을 가주로 하고 싶으냐고 가신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확신할 수 없는 게 불쾌한지 아닌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어머니가 한 말을 전해주면 뭐라고 말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스타프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 없으면 오면 안 돼?”
란이 괜히 멋쩍어져서 말하자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지요.”
“너무하네.”
투덜거리고 란이 이어 물었다.
“대련은 잘 했어?”
“네.”
“유스타프.”
“네, 누님.”
“단답형 대답은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
“네.”
“정말이지.”
란은 가볍게 뺨을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용건을 이야기했다.
“나 잠든 사이에 서류 처리해줬다면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별말씀을.”
“그런데 말이야.”
“네.”
“왜 티모느 강 하류에 수차 만드는 거 보류한 거야?”
유스타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부 다시 훑어보신 겁니까?”
“어? 아니. 그러면 일 두 번 하는 거잖아. 내가 유스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콧방귀를 흥 뀌고는 란이 이어 말했다.
“근데 그건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라서, 왜 이렇게 답을 냈나 궁금해서.”
“겨울이 되면 강이 얼어버립니다. 수차를 관리하기도 어렵고, 갈수기에는 수량이 너무 줄어서 수차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티모느 강 하류는 보를 만드는 편이 나으니까요.”
“아아, 그렇구나. 비는 많이 오는 편인가?”
“네.”
“그럼 저수지나 보가 낫지. 티모느 강은 생각보다 수량이 적은가 보군.”
강이라고 해서 한강 같은 걸 생각했는데…….
‘이 동네 지리를 전부 파악하는 건 무리야.’
게다가 그녀가 받은 교육은 여성에게 맞춰진 것으로, 이런 가주직을 위한 교육도 아니었다.
현대의 지식과 짜 맞춰서 지금까지 어찌어찌 운영해 왔지만, 역시나 허점이 드러나고 만다.
“유스.”
“네.”
“빨리 커라.”
“…….”
그래야 이 귀찮은 일을 얼른 너에게 넘겨주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씩 웃었다가 얼굴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누님?”
“아니, 너 결투 괜찮은가 싶어서. 사실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건 제가 정합니다.”
유스타프가 딱 잘라 말했다. 란은 그 말에 움찔했다가 양손을 들고 말했다.
“미안, 방금은 실언이었어.”
내 일 때문에 결투를 한다는 사람에게 그럴 가치가 있나 싶다니, 할 수 있는 멘트 중 최악의 것이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란이 눈썹을 모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다치지 마.”
“전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었다. 간지러워 란이 어깨를 움츠리고 말했다.
“유스, 은근 스킨십 좋아하는구나.”
“싫어합니다.”
“뭐?”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란이 유스타프를 보자 그가 픽 웃었다.
그럼 싫어하는 짓을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거야?
나 싫으라고?
오묘해지는 란의 얼굴을 보며 유스타프가 물었다.
“저녁은요?”
“30분 후에 시작해.”
“알겠습니다. 후작님께는 전하셨습니까?”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유스타프가 쓰다듬었던 뺨을 한 번 쓸고, 란이 이어 말했다.
“그럼 준비해. 에스코트하러 올 테니까.”
그 말에 유스타프가 “반대 아니던가요?” 하고 물었고 란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가끔 반대도 있는 거지.”
‘그렇게 큰소리쳤는데.’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머리를 땋던 소다의 손길이 딱 멈췄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아니, 괜찮아. 그게 아니라 내가 유스타프를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늦어져서.”
목걸이 상자를 들고 있던 카라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 역시 신사의 중요한 일인걸요.”
“맞아요.”
소다가 그렇게 말하며 손길을 빠르게 했다. 디모디아가 마지막으로 블러셔를 팡팡 두들기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 소다가 머리를 틀어 올리는 걸 도와준 그녀가 카라 대신 목걸이 상자를 들고, 카라가 란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가느다란 백금과 다이아몬드가 번갈아 장식된 체인에 마름모꼴 에메랄드 펜던트가 달린 물건이었다.
“어쩜, 가주님 눈동자 색이랑 똑같아요.”
“맞아요. 너무 잘 어울려요. 눈동자가 녹색인 게 더 돋보여요.”
칭찬을 들으며 란은 미소 짓고, 카라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소매는 팔목에서 끝나지만 그 아래 화려한 레이스가 겹겹이 덧대어진 앙가장트(engageantes) 스타일로, 그 아래 희고 가는 팔이 강조되어 보였다.
란이 응접실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유스타프가 가볍게 묵례를 했다.
“내가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란이 투덜거리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건 다음에 기대하죠.”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저녁 만찬을 위해 연회복을 입은 모습은 란이 보기엔 완벽해 보였다.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으며 란이 속삭였다.
“그런데 보통 이럴 때는 네가 엘리제를 에스코트하고 후작님이 날 에스코트하는 거 아냐?”
“그러기 싫다고 하시니.”
“그러네.”
키득키득 란이 가볍게 웃었다.
“사이좋은 건 좋지.”
엘리제와 카로크의 사이가 좋다는 걸 새삼 확인하며 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 만찬은 길게 이어졌다. 란과 엘리제, 카로크는 포도주까지 곁들였지만 유스타프는 알코올은 입에 대지 않았다.
카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에는 금주지.”
식사가 끝나면 보통은 남녀가 따로 나눠져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관례지만, 사람 수도 적었고 관례를 따지는 모임도 아니라 넷은 편하게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서도 란은 샴페인을 은근히 마셔서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자리가 파했을 때 마음속으로 ‘큰일이다. 취했나 봐.’라고 생각할 정도의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절대로 손님 앞에서, 친구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다!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는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란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엘리제와 키릭스 후작을 배웅했다.
그러고 제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유스타프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취하셨지요.”
그가 속삭인 말에 란은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취했는데.”
“제 눈은 못 속입니다.”
“조, 조금?”
“마시는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죠. 어째서 뭐든 그렇게 빠르게 하십니까?”
한국 사람, 빨리빨리.
그런 농담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걸 란은 억눌렀다.
“성격인가 봐.”
“보통 성격이 급한 사람은 포기도 빠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끈질길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방학 때 단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기숙사에 남아서 생활했다.
그러면 항상 ‘왜 안 와, 이번에도 안 와?’ 하는 편지가 도착했다.
아니, 언제나 그녀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학기 중에 면회를 신청하러 온 적도 서너 번 있었다.
그때도 면회실로 내려가지 않았다.
지인들은 ‘너무하다.’ 하고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유스타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란은 하루 종일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떠나고는 했다.
사실 처음 그렇게 문전박대하면 두 번째는 안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녀는 꾸준히도 면회하러 왔다.
마지막에는 결국 지인 등쌀에 못 이겨 면회실 앞까지 간 적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란이 책을 읽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비껴 들어온 햇빛에 금발이 반짝였고 긴 황금빛 속눈썹 아래 유리구슬처럼 눈동자가 투명했다.
어쩐지 현실감 없는 모습이라 한참 보고 있으려니 란이 고개를 들었다.
반가워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번지자 유스타프는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게 들킨 민망함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대로 면회실 문을 잠그고 가버렸다.
면회실은 밖에서 문을 잠그는 구조라서 당황한 란은 문을 열려 노력하며 그를 불렀지만, 그는 무시하며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란을 본 기억이었다. 그 후로는 부모님 장례식장이었고.
“그런가? 나 은근히 포기 잘 하는 것 같은데.”
란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가 진득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게는 안 보입니다.”
“에이, 아닌데.”
고개를 휙휙 젓는 란을 붙잡고 유스타프는 걷기 시작했고, 그녀도 가볍게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스.”
“네.”
“나 하나 고백해도 돼?”
“말씀하세요.”
“유스타프가 맞았어.”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데 뭐가 말입니까?”
비아냥거리는 건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란은 깔깔 웃고 속삭였다.
“내가 유스타프를 남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
유스타프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팔이 붙잡혀 있던 란은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유스?”
“그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이 히죽 웃었다.
“주인공.”
“……네?”
유스타프라도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란은 그런 그를 보고 놀리듯 실실 웃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안 가르쳐 주지롱.”
“역시 취하셨죠.”
“안 취했지롱.”
“대체 그 종결어미는 뭡니까?”
“롱롱이지롱.”
“…….”
유스타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누님.”
“응?”
“내일 되면 분명히 부끄러워하실걸요.”
“……팩폭.”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방문 앞까지 란을 데려다주었다.
“주무십시오.”
“응, 유스도 잘 자.”
휙휙 크게 손을 흔들고 란은 안으로 들어갔다. 유스타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제 방으로 돌아오는데 입구에 블레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블레인 경?”
“도련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유스타프는 피곤함을 느끼며 눈가를 문질렀다.
하루 종일 대련하고, 저녁 만찬까지.
그는 지금 꽤 피곤한 상태였다.
“전에 이야기를 이어서인가? 들어와.”
“피곤하시면 다음에―”
“기다리게 해놓고? 그건 아니지.”
“제가 멋대로 와서 기다린 겁니다.”
“알아.”
대답하며 유스타프는 안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까닥했다.
블레인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소파에 털썩 몸을 던지듯 앉고 다리를 꼰 다음 유스타프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래서?”
“가주님께 녹영을 붙이셨지요.”
유스타프는 푸른 눈을 떠서 블레인을 바라보았다.
“블레인 와일드.”
“네.”
“주제넘은 발언은 하는 게 아니지.”
녹영은 네가 입댈 문제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블레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한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로스를 가주님의 호위로 붙이고 싶습니다.”
“로스를?”
유스타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하는 게 아니고?”
“제가 항상 가주님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로스의 실력은 도련님도 익히 아시겠지요.”
“그렇지.”
블레인은 기사단장이고, 그가 계속 란에게 붙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로스가 란에게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지도―
생각하다가 유스타프가 픽 웃었다.
“그거 좋겠지. 하지만 란의 의견도 들어 보는 게 낫겠어.”
“알겠습니다.”
블레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란의 호위 문제는 그 일이 생기고 나서 계속 블레인과 의논하던 건이었다. 괜찮은 호위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뽑은 패가 로스라.
‘의식적인 건지 무의식적인 건지.’
로스는 대표적인 유스타프파다.
물론 유스타프와 란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저택 내에서 봤을 때 그게 뚜렷하게 보이는 자의 대표가 로스였다.
그런 로스를 란에게 호위로 붙인다. 유스타프는 손끝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잘하겠지.”
어느 쪽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유스타프는 미소 지었다.
이튿날 유스타프의 예언대로 란은 부끄러워 죽으려 하며 술을 적게 마시겠다고 결심했다.
✥✥✥
결투는 당연히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공개 결투 같은 걸 했다간 그야말로 검투사 같은 구경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결투 신청은 유스타프가 했으니, 결투 장소는 루스의 의견대로 황태자궁 앞에서 이루어졌다.
양측의 관계자들이 와 있었다. 심판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항복이라고 하는 쪽이 지는 승부였다.
‘미개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없이 유스타프의 손목에 승리를 기원하는 손수건을 묶어 주었다.
“유스.”
“괜찮을 겁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유스타프가 낮게 속삭였다.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젖은 녹색 눈을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다치지 마.”
유스타프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건너편에 선 루스는 이미 이긴 듯한 승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그의 손목에 손수건을 묶어 주려고 했지만 루스가 손을 저어 손수건을 쳐냈다.
“이런 것 없이도 이겨.”
올리비아는 싱긋 웃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웃음이 어찌나 싱그럽던지 멀리 있는 란에게도 뚜렷이 보일 정도였다.
‘우와.’
요 며칠 사이에 더더욱 부부 사이가 악화된 것이 보였다.
거기서 더 악화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두 사람은 검 끝을 서로 맞댔다.
시작 신호도 없었다.
서로 잠시 노려보는 듯하더니 결투가 시작됐다.
“―!”
유스타프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검이 울려?’
루스와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검에 묘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검을 손으로 잡고 있기 힘들 만한 진동이었다. 루스의 푸른 눈이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마법인가.’
치사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래서 유스타프는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단지 손에서 검을 떨어트릴 작정이라는 게 좀 우습기는 했다.
생각보다 온건한 방법이잖은가?
‘주변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실시간으로 걸어주는 건 아닐 테고.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면 그렇게 지속 시간은 길지 않지.’
마법은 순간적인 것이다.
오랫동안 유지를 하려면 그만큼 마력이 필요하므로, 마력을 계속 소모해야 했다.
그래서 지속 마법은 길어봐야 1분 남짓이었다.
하지만 결투에서 1분은 크다.
유스타프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쉰 다음 웃었다.
“패는 그게 전부냐?”
속삭이듯 묻는 말에 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분노하며 그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다음 순간 유스타프가 발로 그의 손을 걷어찼다. 루스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침묵이 정원을 감쌌다.
“너…….”
분노인지 공포인지로 부들부들 떠는 루스에게 유스타프는 부드럽게 말했다.
“가서 주워 오시지요.”
“이건 검술 대련이야!”
“아뇨, 결투입니다.”
루스는 이를 갈며 허리를 굽혀 검을 주웠다. 결투 중에는 시종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직접 허리를 굽혀야 했다.
수치와 분노에 루스는 검을 잡자마자 준비 동작 없이 바로 유스타프에게 달려들었다.
유스타프는 검을 맞부딪쳤다. 아까와는 또 다른 기묘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루스는 이를 드러내듯 웃어 보였다. 오늘 이 애새끼의 목을 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으리라.
마법사에게 압박을 넣어 검에 마법을 걸었다. 이제 몇 번만 검을 더 부딪치면 유스타프의 검은 산산조각 날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신이 목을 찌르면 끝.
깨끗한 승리였다.
하지만 꼭 유스타프의 눈에 공포가 차는 걸 보고 싶었는데 담담한, 아니 자신을 하찮은 듯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에 구멍이 나면 생각이 바뀌겠지! 나에게 이런 수치를 줘?’
검을 부딪칠 때마다 루스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카운트했다.
이제 세 번, 두 번―
“이야야압!!”
소리까지 내지르며 루스는 마지막 한 번, 검을 부딪쳤다.
팡―!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스타프의 검이 폭발하듯이 산산조각 났다. 루스가 히죽 웃는데 뭔가가 안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뿌드득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통증이 안면을 덮쳐왔다.
“윽―!!”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루스는 뒤로 물러섰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프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때 두 번째 타격이 그를 덮쳤고, 루스는 비명을 지르며 제 샅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모여 있던 남자 관객들 모두가 끔찍한 걸 본 얼굴을 했다.
유스타프는 쓰러진 황태자를 보다가 제 손에 손잡이만 남은 검을 버렸다. 그가 매우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하필 큰 검조각이 거기로 튈 줄은 몰랐습니다.”
유스타프는 황태자 쪽 참관인을 향해 가볍게 인사해 보였고,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한 걸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의를 불러라!”
유스타프가 제 자리로 돌아오자 란은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놀랐어…….”
한참을 안았다가 놓아주며 속삭이듯 하는 말에 유스타프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싸구려 악당이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요.”
검의 진동이 검을 놓게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진동으로 검날을 부순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검이 산산조각 나자마자 유스타프는 그대로 황태자의 안면을 후려쳤다.
코뼈가 아예 뭉그러질 정도의 일격이었다. 당황하며 물러선 황태자에게 이어 검을 휘둘렀는데 짧아서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이 나빴는지 손잡이에 붙어 있던 남은 칼날이 날아가서 그만 그의 성기 부근에 꽂혀 버렸다.
검이 펑 하고 터졌을 때, 란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움찔하고 떨려왔다.
그 한순간의 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 치게 싫었다.
그리고 마치 루스의 행동을 예측한 것 같은, 그가 똑바로 찔러오는 검을 피하며 들어간 깨끗한 한 방. 그리고 운이 나빴던 두 방 째.
‘운이 나쁘지만 시원하다.’
하지만 아직도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농담처럼 란이 중얼거렸다.
“결투에서 주먹으로 이겼다는 말은 처음 들어.”
“검이 부서졌으니까요.”
“맞아, 검.”
아무리 그래도 검이 자연적으로 저렇게 산산조각 날 리가 없다. 검 손잡이 부분의 남은 칼날도 약해져 있어서 운 나쁘게도 원심력에 날아간 것이리라.
궁의들에게 실려 가는 황태자를 바라보는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돌아가죠.”
그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돌아가자.”
유스타프가 이겼다는 얘기는 그가 멀쩡히 황궁을 나왔을 때 먼저 알려졌고, 이어서 어떻게 이겼는지도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관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앞으로 무수히 많은 초대장이 도착했으며, 다들 어떻게든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다.
“검이 갑자기 폭발했대요.”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마법이겠죠.”
“신성한 결투에서 그런 짓이라니,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오.”
“주먹으로 마무리가 되다니.”
“마무리는 주먹이 아니라-”
키득거리며 따라오는 웃음소리. 칼날이 그의 성기에 박혀서 그가 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즐거운 이야기였다.
헛기침을 하고 다른 목소리가 진중하게 말했다.
“검이 약해져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주먹 한 방에 황태자의 코가 납작해졌다면서요?”
“그건 실제 그렇다는 말이죠?”
“네.”
까르륵 웃음을 타고 황태자의 코와 성기에 대한 이야기도 퍼졌다.
궁의와 마법사들이 힘을 썼지만, 코가 산산조각 나서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라는 소문이었다. 물론 그의 성기도 다시 붙였지만 발기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즐겁게 붙여졌다.
“납작코가 되었지 뭐예요.”
“아뇨, 비뚤코죠.”
정정하는 말에 단숨에 폭소가 터졌다.
코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은어이기도 해서 ‘비뚤코’라는 말은 그가 불능이라는 뜻이었다.
황태자에 대한 희화화는 빠르게 퍼져서 평민들조차 황태자를 부를 때는 ‘비뚤코’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로 공작가는 ‘아무리 그래도 황족의 얼굴을 후려치다니!’ 하는 항의를 했지만, ‘검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유스타프의 변명이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게다가 그 검이 왜 없는 건지, 역시 귀족들이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다.
황궁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래서 라벨은,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손님을 보며 기묘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느꼈다.
유스타프가 태연한 얼굴로 그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문전박대했어도 태연한 얼굴이었을까?’
라벨은 괜히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았다. 갑자기 누가 찾아왔다고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말해서 누군가 했더니 라치아 영식이었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라치아의 차기 가주.
란이 임시 가주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가 성인이 되는 순간 라치아의 가주가 바뀌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사교계 소문의 중심.
라벨로서는 그렇게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구설수는 싫어하는데.”
라벨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싫어합니다.”
“그럼 여기에 오면 안 되지.”
“황자님의 궁에서 이야기가 나가지 않는다면, 구설수에오를 일도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기가 차서 ‘허, 참.’ 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지?”
“이용당하는 건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용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유스타프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라벨은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조용한 게 좋아.”
낮게 라벨이 말하자 유스타프는 팔걸이를 툭툭 가볍게 두들겼다가 말했다.
“황족에게는 황족으로서의 의무가 있지요. 제게 라치아로서의 의무가 있는 것처럼.”
“어떤 의무인가?”
“의무를 모르는 자에게는 말해도 소용없고, 아는 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는 의무입니다.”
라벨은 뚫어지게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유스타프는 느리게 말했다.
“답을 지금 원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황자님께서 원하는 답을 저에게 주십시오.”
유스타프의 말에 라벨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무 강한 힘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지. 강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적이 만들어져.”
“약하다고 해서 적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더군요.”
“그건 그렇군.”
라벨은 어깨를 으쓱했고,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용건은 이것뿐입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유스타프는 답 없이 인사해 보이고 응접실을 떠났다. 그가 나간 자리의 찻잔에서는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라벨은 한숨을 삼켰다.
‘황족에게는 황족으로서의 의무라.’
라벨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어루만졌다.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팔걸이. 푹신하고 섬세하게 짜여진 카펫, 유리로 세공된 소파 테이블, 수정이 달린 샹들리에.
매일매일 청소와 시종을 들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는 이유.
자신이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
그렇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의무.
의무에는 책임이 따르며, 권력에는 의무가 따른다.
자신은 제국의 백성을 향한 의무가 있다.
‘무거운 말을 가볍게도 하는군.’
라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즉, 유스타프의 말은 이거였다.
―지금 황태자가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만약 그가 황제가 되면 제국 꼴이 어떻게 되겠어? 그러면 네가 황제가 되는 걸 어떻게 생각해?
라벨은 끙 하고 얼굴을 문질렀다.
그야말로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형님이 정신을 차리실지도 몰라. 아직 아버님은 정정하시고…….’
게다가 현명한 형수도―
생각하다가 라벨은 두통이 일어나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일단 형님이 정통 후사를 남기실 수 있을지 하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군. 사생아를 양자로 들여오는 일을 형수가 허락할까?’
확실히 형수는 현명하다.
황제에게 있어서 완벽한 파트너일 것이다.
‘문제는 형님이 그럴 만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거지.’
솔직히 라벨은 미로 공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발에 보라색 눈, 아름다운 외모에 정치 감각까지, 올리비아는 여러모로 이상적인 배우자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벨은 이상하게 그녀에게 거부감이 있었다.
미로 공작가 특유의 자존심 때문일까?
귀족, 특히 황족에게 혼인은 정치적인 문제이며 배우자는 정치 파트너다.
하지만 라벨은 황족답지 않게 낭만적인 꿈이 있었다. 적어도 마음이 있는 상대와 혼인하고 싶다, 하는 그런 꿈이.
‘지나치게 책을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만 대답을 미뤄도 되지 않을까? 이번 결투로 인해서 형님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셨을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유스타프를 향한 분노 때문에 복수심으로 자신을 갈고 닦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위안을 얻으며 라벨은 대답을 보류하기로 했다.
‘비뚤코도 잘하면 바른 코가 될지도 모르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내밀한 응접실은 창문이 없어서, 그는 나오자마자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날이 흐리군.’
오늘 열릴 야외 무도회는 다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벨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