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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닿지 않는 마음


Chapter 3. 닿지 않는 마음 녹색 아치는 부산스러웠다. 란이 공작령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해서 그걸 위한 짐을 싸느라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란은 약간 걱정도 있었다. ‘루미에를 어떻게 하지.’ 할 수만 있다면 내려가기 전에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볼까?’ 란은 그렇게 결심하고 디모디아에게 펜과 종이를 준비하게 했다. ―원하던 꽃은 구하셨는지요? 이러다가 꽃이 다 져버리겠습니다. ‘으음, 마지막 문장은 너무 재촉하는 것 같은가? 아니, 근데 그게 맞잖아.’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짤막한 편지를 접어 쟁반 위에 올렸다. “일루미티니 백작가에 빠르게 보내도록.” 명령을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짐 싸고 마차 준비하고 하려면 이틀은 걸리니까.’ 그 사이에 답이 오길. 톡, 토톡. 그때 가볍게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란은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비 온다.” “어머? 정말이네요. 폭우가 되면 라치아로 내려가는 일정을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카라가 그렇게 말하며 덧창을 닫으려 하는 걸 란이 말렸다. “그냥 열어 둬. 비 오는 거 볼래.” “알겠습니다.” 카라는 순순히 덧창에서 손을 뗐다. 잠시 비가 오는 걸 바라보니 디모디아가 물었다. “정원으로 가시겠어요? 아직 빗방울이 거세지 않으니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거 낭만적이네요.” 손뼉을 치며 소다가 즐거워했다. 그녀는 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준비시키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비 오는데 정원의 가제보까지 차를 세팅할 시종들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사실 은근히 기대가 되어서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비 오는데 밖에서 티타임이라고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태클을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로스였다. 란은 힐끗 로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갑옷에 기름칠은 되어 있겠지. 비 맞으면 녹슬어 버릴 테니까.” “갑옷 관리는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네.” 뭐가 문제람? 하고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이대로 나갈래.” 란의 말에 디모디아가 “하지만 비가 와서 쌀쌀할지도 몰라요.” 하며 숄을 들고 나왔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제법 굵게 빗방울이 떨어졌다. 로스는 신중하게 우산을 기울였다. 어쨌든 호위 임무를 맡은 이상은 란에게 빗방울 하나 튀게 해서는― “……가……주님.” 힘겹게 그 호칭이 나오는 걸 보며 란은 속으로 웃었다. “무슨 일이지?” “발이 다 젖으시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안아 들어도 되겠습니까?” 란은 눈을 깜박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승낙했다. 그녀의 발이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로스는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 첫걸음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스가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가,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 란은 가만히 기다렸다. 결국, 로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 다리 위에 제 팔을 올린 후에 말했다. “여기 앉으십시오.” “나 무거운데.” “압니다.” 그의 말에 란은 눈을 샐쭉하게 떴다가 팔 위에 앉았다. 생각보다 흔들림도 없고, 단단― 그때 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란은 놀라 작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을 붙잡았다. 로스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말하고 일어나야지!” 얼굴이 너무 가까워, 란이 몸을 뒤로 빼며 타박하자 로스는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디모디아가 우산을 높이 들어서 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출발할까요?” 그녀의 부드러운 말에 로스는 어색하게 걷기 시작했다. 란 역시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뜻밖의 안정감에 안심했다. 우산 아래서 란이 작게 말했다. “로스 경.” “네.” “사실 엉망으로 호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그 말에 로스의 갈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랬다가는 유스타프 님에게 누가 될 테니까요.” “아하.” 란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 경, 경은 위험을 자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녀가 속삭여서 로스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유스타프 님을 위한 위험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저택 내에서 ‘나는 유스타프 님의 편이다! 란은 적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로스 와일드, 너 하나뿐이지. 그렇다면 외부에서 가장 이용하기 좋은 표적은 누구일까? 역시 로스 와일드다. 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것도 좋겠지.” 사람을 부릴 때에는 여러 가지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나이트만으로, 비숍만으로, 룩만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퀸이라고 해도, 주변의 말은 필요한 법. “그래, 그래.” 란은 손을 뻗어 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로스의 갈색 눈은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지금, 뭐―” “아, 실롄가?” 갸웃하며 란이 손을 떼고 씩 웃었다. 가제보까지 도착해 로스는 빠르게 란을 내려놓았다. ‘역시 성인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실례였지.’ 하지만 사과하면 확대 해석 할까 봐 겁난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제보 아래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 비는 제법 기세 좋게 내리고 있었다. 녹음이 가득한 정원에서 달콤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커다란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란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정원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있어도 좋았다. 란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곧 시종들이 둥근 은쟁반으로 덮은 다도구를 줄줄이 들고 왔다. 하나씩 테이블에 다구를 세팅하고 란은 차를 우렸다. 부드러운 차 향기가 차가운 여름비 공기 속에 퍼졌다. 우려진 차는 걸러서 새 찻주전자에 옮겨 담은 후 그녀는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겼다. ‘호사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시녀들에게도 차를 권했다. 소다와 카라, 디모디아는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나와서 같이 차를 마시니까 좋네.” 란의 말에 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가주와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 있다는 게 행복했다. 같은 시녀들이 란을 섬기는 저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는지! “그런데 제복은 다들 어때?” “너무 좋아요!” 소다가 빠르게 대답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나가면 다들 녹색 아치에서 오셨군요, 하고 공손하게 대한다고요. 불량배들이 대드는 일도 없고! 가게 주인도 얼마나 정중한데요! 참, 전에 라비나는 기사분이 구해 준 적도 있대요! 라치아분이시죠? 하면서요!” 흥분한 기분 그대로 빠르게 다다다 뱉어내는 소다를 보고 나이가 있는 카라는 가주의 눈치를 보았다. 란이 관대하기만 한 주인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효수당한 회계관의 목을 잊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란은 소다의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겨울이 되면 동복도 마련할 예정이거든. 혹시 건의할 점이 있다면 알려줘.” 란의 말에 소다의 눈이 반짝였다. “동복이요?” “응 이건 여름용 옷감이니까. 소다가 아는 하녀가 많은 것 같은데 의견을 들어줘.” “네, 네! 가주님!” 소다의 얼굴이 발개져서 대답이 강하게 나왔다. 란이 카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카라가 의견 정리는 좀 도와주고.” 서열을 지켜주는 말에 카라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디모디아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사실 가주님이 무서운 분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너무 좋으신 분이셔서 행복해요.” “그건 고맙네.” 란은 그렇게 말하고 미소 지었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그가 가제보 아래 서자마자 시녀들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유스타프는 코트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차 향기에 끌려왔습니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디모디아에게 숄을 받아 들며 말했다. “완전히 젖었잖아? 괜찮아? 화로를 준비하고 다구도 준비해.” “네, 가주님.” 짧은 티타임을 아쉬워하며 소다가 말하고, 막내인 디모디아와 함께 우산을 들고 후다닥 정원 너머로 사라졌다. “비도 오는데 어딜 다녀오는 거야? 우산은 또 어쩌고?” 란이 숄로 유스타프의 젖은 머리를 닦아주려 하자 그가 살짝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누님이 입으셔야죠.” “안 추워.” “숄 버립니다.” “그런가? 빨면 될 것 같은데.” 섬세하게 짜인 직물을 바라보며 란이 눈썹을 모으는데 로스가 얼른 다가와 유스타프의 코트를 벗겨 주며 말했다. “그런 건 다시 빨기도 어려운 겁니다.” “그런가.”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로스는 몇 번 코트를 털었다. 그 사이 디모디아가 빠른 걸음으로 수건을 가지고 돌아와서 유스타프는 젖은 머리를 털었다. “가서 옷 갈아입고 오는 게 낫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그는 재미있는 걸 보았다는 듯 물었다. “누님께는 날개라도 달려 계십니까?” “응?” 무슨 말인가 하고 란이 그를 보니 유스타프가 말했다. “비 오는데 물방울 하나 튄 흔적이 없으셔서요.” “아, 로스 경이 여기까지 안아다 줬어.” 란이 웃으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로스 경이요.” 하고 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로스는 어쩐지 오싹함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대답하고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곧 시종들이 줄줄이 들어와 사용한 다구를 치우고 새 다구를 세팅했다. 작은 화로 역시 옆자리에 놓였는데, 숯을 사용한 화로가 아니라 얼음수정을 사용한 ‘자동 화로’였다. 3단계로 화력 조절이 가능하고, 좌우로 돌아가기까지 하는 제품이었다. ‘한국에서야 흔하지만.’ 여기서는 어마어마하게 획기적인 물건이다. 그만큼 시종들이 편해지기도 했고. “화로까지는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유스타프가 중얼거리자 란이 말했다. “여름 감기가 얼마나 독한데.” 유스타프는 “감기 걸릴 날씨는 아니지요. 7월의 수도는.” 그렇게 대답하고 손가락을 가볍게 들었다. “얼음.” 시종에게 짧게 명령하자 곧 얼음과 얼음 잔이 대령되었고, 유스타프는 찻주전자를 들어 얼음 잔에 뜨거운 차를 부었다. 쩌적— 가볍게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나고 순식간에 냉차가 만들어졌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닙니까?” “응?” “시녀들과의 시간을요.” “아냐, 나중에 또 마시면 되지. 그러고 보니 유스랑은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 보낸 적이 없었네.” 어쩌다 보니 계속 일에 치여서 일하는 시간에만 같이 있을 뿐, 사적 대화를 위한 시간을 따로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러네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차를 마시고 내려놓자 얼음이 울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잠시 그 소리와 어우러지는 빗소리를 듣다가 유스타프가 손을 저었다. 그러자 시종들이 재빠르게 가제보에서 물러났다. 로스는 머뭇거리다가 떨어져서 뒤돌아섰다. 란이 속삭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다녀온 건데?” “아뇨, 그게 아니라 사적 이야기가 하고 싶으시면 하시라고.” “뭐야, 그게―”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가볍게 웃었다. “유스는? 하고 싶은 이야기 없어?” “글쎄요.”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유스타프 춥지 않아?” “네.” “날씨가 그래도 좀 쌀쌀하네.” “그러네요.” “유스타프.” “네.” “단답형으로 대답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알겠습니다.” 란이 샐쭉하게 눈을 떴다가, 흥, 하고 말했다. “사적 이야기 안 해도 상관없지. 우리 그런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네가 가주가 되면, 끝인걸. 침묵이 가제보 안을 휘감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역시 란이었다. “저거 봐 봐.” 유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리석이 파였네. 가제보가 세워진 지 꽤 오래됐나 봐. 물방울에 파인 거지?” 가제보 지붕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 아래 바닥 대리석에 확실하게 표시를 남겨놓았다. 녹색 아치가 세워진 지도 300년. 가제보가 그렇게까지 오래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무른 대리석이 파일 정도로는 오래된 모양이었다. 유스타프가 그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바위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어?” 느닷없는 말에 란이 고개를 들어 유스타프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파인 대리석만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찮다고 생각할 테고, 매번 조각나서 퉁겨나가는 꼴이 우습다고도 생각하겠죠. 그리고 나중에는 그러든지 말든지 무감각해졌을 겁니다.” 유스타프가 이렇게 길게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란은 경청했다. 톡. 톡. 톡. 부딪치는 그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아졌을 때. “그러다가 언제 바위가 자신이 파였다는 걸 알아채는지 아십니까?” 란이 대답할 타이밍인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망설이는데 그가 이어 말했다. “더는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찰랑 하고 고이는 소리가 났을 때죠.” 물 위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그때 바위는 당황할 터였다. “그리고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는 더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고, 고인 물이 사라져 버렸을 때. 제 안이 얼마만큼 텅 비게 되었는지를 보고 나서 깨닫게 되겠죠.” 그리고 빗방울이 딱히 바위를 파이게 하려고 했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치사하죠.” 유스타프가 란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어? 뭐, 뭐가?” 뭐가 치사한데? 당황해서 란이 되물었다. 어딘지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글쎄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이 뭔가 놓친 게 있는지, 은유와 비유를 잘못 생각했는지 끙끙거리는 란을 바라보았다. 유스타프는 픽 웃고 시선을 빗줄기로 돌렸다. 제법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녁이 되면 빗줄기가 더 거세질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그럼 진짜 폭우가 쏟아지겠네. 며칠 더 녹색 아치에 머무르게 되려나?” 안도가 살짝 그녀의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며칠의 여유가 있다면, 루미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라치아로 돌아가기 싫으십니까?” “응?” “녹색 아치에 머무르는 쪽이 더 낫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네, 원래 사교 시즌 끝까지는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치아로 돌아가면 할 일은 산더미일 테지만, 여기 머물러도 더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란은 눈을 감고 빙벽과 하늘 저택을 떠올렸다. “사교계에 무난히 머물렀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돌아간다고 하니 기쁜데.’ 이 복잡하고 답답한 정치를 떠나 라치아로 가서 영지 일에만 전념하는 게 그녀에게는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란은 빙긋 웃고 눈을 떴다. “유스타프는? 라치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낮게 말했다. “그게 제 전부인 곳이니까요.” 유스타프의 예언대로 밤이 되자 빗발은 더욱 거세져서 가히 채찍비라고 이름 붙일 만한 비가 쏟아졌다. 밤인 데다가 시야마저 흐리는 그 빗줄기를 뚫고 일루미니티 백작의 전령이 도착했다. 품속의 편지는 조금도 젖지 않은 채였다. 란은 어쩐지 전령에게 미안해져서 시종에게 새 옷과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라고 명했다. 시녀들은 중요한 일인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지만 감히 입에 담지는 않았다. 란은 편지를 뜯어서 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꽃은 꺾었습니다. 이 첫 문장 때문이었다. 가슴속이 떨려와 그녀는 재빠르게 다음 문장을 읽었다. ―하지만 역시나 찻잎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독점하고 있는 상인이 구매자를 보기 원합니다. ‘으아아아―’ 란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니, 그냥 이제 불법 투기장입네, 하고 가서 다 부수면 되는 거 아닌가? 아, 그러다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옮기려나? 사실 이렇게 큰 규모의 투기장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수도 경비대가 모를 수는 없지.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을 텐데, 그 연결 고리를 찾아서 부수는 일은 내 본분이 아니란 말이야. ‘그건 황실에서나 할 일이지.’ 하지만 황태자나 황제의 꼴을 보니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 것 같다. ‘수도 안에서 라치아의 사병을 움직이는 것은 안 될 말이고.’ 더더군다나 얼마 전에 루스의 별명을 비뚤코로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즉 지금 괜히 라치아령으로 돌아가려는 게 아닌 거다.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살핀다는 뉘앙스를 보여주며 사교계에서 발을 빼려는 거였다.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겠어.’ 란은 그렇게 결심했다. 구매자를 원한다면, 만나주마.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란은 일단 ‘정령’이라는 패가 있었다. 납치 감금이라도 하려 하면 ‘이스타리프’를 부르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더 상위 정령을 불러도 되고. ‘청염으로도 충분할 것 같기는 하지만.’ 대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는 패를 쥐고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진짜로 공작을 잡으려는 멍청이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란은 생각했다. 신분제하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신분이란 절대적인 것이다. 현대인인 란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유스타프가 라치아에 대해 가지는 집착도 그렇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미 여동생까지 구해낸 상황인데, 발 빼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떻게든 루미에는 구해내야 한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편지를 디모디아에게 건넸다. “태우렴.” 디모디아는 충실하게 초를 켜서 편지를 태웠다. 방 안의 등은 마법램프로 대체하고 있어서 편지를 태우려면 따로 초를 켜야 했다. 란은 물끄러미 디모디아를 바라보았다. ‘쟤라도 데려가자.’ 녹영이니까, 재주가 있겠지. ‘로스는 데려갈 수가 없고.’ 그러면 너무 일이 커질 것 같다. 일단 로스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뛸 테고. 란은 필기구를 가져오게 해서 일루미니티 백작에게 답장을 썼다. ―직접 찻잎을 보러 가겠어요. 딱 한 문장을 쓰고 잠시 잉크를 램프 불에 비춰 마르길 기다렸다가 란은 그걸 전령에게 전하라 하고 소파에 기댔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폭우 때문에 일정이 미뤄져서 다행이다.’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디아, 잠깐 이리 올래?” “네.” 디모디아가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어딜 몰래 나가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디모디아의 보라색 눈이 조심스레 란을 살폈다. 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디아도 함께 가면 더 좋고.” “저랑요?” “응. 호위가 필요해서.” “그런, 저는…….” 머뭇거리는 디모디아를 보고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네 출신 다 알아요. “싫어?” “아뇨, 가겠습니다.” “그럼 모두에게 비밀로 해줘. 알았지? 모두에게.” 힘주어 덧붙인 말에 디모디아가 고개를 숙였다. “네, 가주님.” “응, 그럼 부탁할게.”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에게는…….’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설명하는 것도 어렵고. 란은 은근슬쩍 문제를 회피하기로 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루미에랑 안 볼 가능성이 높은데, 괜히 유스타프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전의 이야기도 그렇고, 조금쯤은 날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 주인공에게 인정받은 기분? ‘이대로 안전 이별을 잘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요즘은 마음 한구석에서 ‘이대로 라치아 공녀로 남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어.’ 유스타프에게는 정말로 라치아가 소중하니까, 거기 방해되는 건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다. 만약 유스타프가 남으라고 해도 떠나 주는 게 예의라고, 란은 생각했다. 이튿날 일루미니티 백작이 편지를 보내왔다. 찻잎 유통 기간을 알리는 꽤 노골적인 편지였다. ‘내 편지를 아무도 살펴보지 않을 것처럼 쓰는군. 살펴봐도 어때, 싶기는 하지만.’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디모디아에게 몰래 나갈 날짜를 얘기했다.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유스타프에게는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자겠다고 말해두고 란은 침실에 앉아서 디모디아를 기다렸다. 밤이 깊었을 때 디모디아가 옷과 변장 도구까지 챙겨서 돌아왔다. 서로가 아는데, 모른 척하며 란은 “이런 것까지 챙겨오다니, 잘했어.” 하고 말했고 디모디아는 “이런 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하고 수줍게 답했다. 란은 남장을 했다. ‘바지 진짜 오랜만이다. 짱 편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몇 번 다리를 움직였다. 거기에 방수 처리가 된 롱부츠를 신고, 머리카락은 촘촘하게 땋아 올린 후에 실크해트를 눌러 썼다. 셔츠에 조끼에 코트, 그리고 그 위에 비옷 대신인 방수 케이프를 걸쳤다. 겹겹이 입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되지 않는 차림이었다. 디모디아 역시 깔끔하게 남장을 했다. 다른 점은 모자를 쓰지 않고 머리를 올려 묶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화장까지 진하게 해서 어둠 속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가시죠, 가주님.” 말투도 어딘지 딱딱해졌다. ‘이쪽이 진짤까?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몰래 침실 테라스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디모디아가 하녀용 뒷문을 열어 두어 둘은 비 오는 어둠 속을 생쥐 두 마리처럼 잽싸게 빠져나왔다.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접선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루미니티 백작이 낮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기사를 한 명 대동하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평소와 달랐다. 귀족보다는, 돈 많은 평민 같은 차림이었다. “중요한 사안이라.” 란은 그렇게 말하며 모자챙에서 비가 뚝뚝 떨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모자는 이제 못 쓰겠군. 바로 장소를 옮기지.” “가시기 전에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란이 어둠 속에서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들고 있는 램프가 빗속에서 희미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절대로 본명을 말하지 마십시오. 절 뭐라고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알았어.” “일이 생기면 목숨을 우선시하시고요.” “난 장수할 예정이야.” 란의 말에 일루미니티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절대로 초조하거나 꼭 물건을 원한다는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지.” “사실 협상에 있어서는 저보다 가주님이 나으시겠지만요.” 란이 하핫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건 고마운 평가인데.” “이 수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 “그건 멍청이죠.” 란이 픽 웃고 “얼른 가지.” 하고 말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도 없이, 네 명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어차피 마차가 들어가지도 못하는 골목이라고 일루미니티 백작이 설명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란의 물음에 일루미니티 백작은 그녀를 구출한 경위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란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찌푸렸다. 역시나 여동생이 좋은 환경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왔었지. 나중에 다시 보면서 쓸데없는 신파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라니 씁쓸하다. 그 사이 일행이 수도 외곽으로 들어서자 란은 경악했다. ‘이런 빈민굴이 있었어?’ 수도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내 세금을 다 어디에 쓰는 거야?’ 물론 자기들 먹고 노는 데 쓰겠지. 그런데 제국에 왜 이렇게 빈민굴이 있는 거지? 물론 가난이야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란은 놀랐다. 가로등 하나 없는 밤의 골목은 깜깜했다. 붉은 등만이 빗줄기 속에 깜박거리며 흔들렸다. 그나마 폭우 덕분인지 냄새가 덜했지만, 그래도 지린내와 비릿한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왜 디아가 롱부츠를 챙겨왔는지 알겠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밤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밑에 밟히는 철벅철벅한 진흙이 뭔지 안 보이니까. 그렇게 좁은 골목을 지나 일루미티니 백작은 좀 트인 장소에 도달했다. 붉은 등이 가득한 골목이었다. 개중에서도 꽤 커 보이는 술집으로 백작이 들어갔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왁자한 소리와 술 냄새가 확 퍼졌다. 복층으로 되어 있는 구조로, 아래서는 술을 마시고 위층에서는. ‘일을 치르나 보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자를 더 눌러 썼다. “어서 오십쇼!” 점원이 손바닥을 비비며 재빠르게 다가왔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말했다. “아르카에게 손님이 왔다고 전하게.” 그 말에 점원이 놀란 얼굴로 “예, 예.” 하고 대답하는데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드디어 오셨구만! 올라오게!” 란이 모자챙을 손끝으로 슥 들며 올려다보니 덩치 큰 남자 둘 사이에 서 있는 짜리몽땅하고 투실한 남자가 히죽히죽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인간인가?” 란이 낮게 묻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발 매트에 적당히 밑창을 문지르고 백작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내된 방 안은 제법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싸구려 천박함.’ 란은 그렇게 평가하며 바닥의 카펫을 바라보았다. 색상은 화려하지만 방 안 분위기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금도금인지, 진짜 금인지 알 수 없는 조각상들도 제각각이었다. 촛불 아래 화려하지만 잘 보면 싸구려 티가 나고, 모여져 있으니 조잡했다. “구매자께서 직접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작은 경기장을 담당하고 있는 아르카라고 합니다.” 아르카는 제 콧수염을 비비 꼬며 상석에 놓인 소파에 냉큼 앉았다. “꼭 만나야겠다고 하니까.” 일루미니티 백작이 뭐라고 하려는 걸 손을 들어 막으며 란이 대신 대답했다. 자, 그럼 이제 시작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아르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여자라고?’ 어디 부인이 검투사를 구매하려고 하는 건가? “구매 전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네. 내가 이쪽을 믿기는 하지만, 그쪽은 못 믿어서.” 란이 백작과 아르카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하자 아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입죠. 들어와라!” 아르카가 소리치자 뒷문이 열리고 남자가 묵직한 사슬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한눈에도 검투노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미에!’ 란은 속으로 소리쳤다.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짧은 튜닉을 입고 있어 팔다리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손목과 발목에는 긴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어이, 고개 들어.” 아르카가 말하자 루미에가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란의 얼굴에 와서 박혔다. 상상했던, 아니, 보았던 얼굴과 같은 루미에였다. 그녀는 심장이 저절로 빨라지는 걸 느꼈지만, 어디까지나 평온한 자세를 유지했다. “어떠십니까? 원하시는 상품이 맞으신가요?” “맞네.” 란은 그렇게 대답하고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루미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르카를 보았다. “굳이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말씀하셨던 대로 신뢰 때문이지요.” “신뢰라, 그쪽과 쌓을 신뢰는 없네만?” “신뢰 없는 거래가 있겠습니까?” 아르카가 흥, 하고 짐짓 기분이 상한 듯 말해서 란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그쪽은 그대의 노예와 신뢰를 쌓고 있나?” 아르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노예와 무슨 신뢰입니까?” “그래?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란이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기대며 팔짱을 꼈다. “저 노예의 여동생을 그대가 데리고 있다고 들었네만.” 루미에가 천천히 눈을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아르카가 당황해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 잠깐. 설마―” “그 여동생이 있던 곳이 산호초굴이라는 곳이라지? 얼마 전에 습격받아서 다 불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당신 짓이었군!” 아르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왜 그게 그렇게 되지?” 란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 있었던 여자아이를 지금은 내가 데리고 있다는 거지.” “너―!” 아르카 옆에 있던 덩치 큰 남자들이 험악한 얼굴을 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디모디아와 백작이 재빠르게 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 여자애에게는 약이 필요하지. 나만이 줄 수 있는 약이야!” “수면제와 포도주를 섞은 약? 진정제 대용품인 싸구려 마약?” 란이 그렇게 말하며 빈정거리자 아르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루미에가 고개를 들었다. “당장 저년을―” 아르카가 소리치는데 소리도 없이 루미에가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격으로 그의 머리를 돌렸다. 우드득. 작은 소리가 나고 아르카의 목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아르카의 시체가 앞으로 쓰러지기도 전에 루미에는 책상 위의 긴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옆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의 눈에 깊이 박아 넣었다. 그제야 아르카의 시체가 바닥에 닿았다. 모두가 굳어 있었다. 아니, 란만이 굳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르카의 다른 호위가 소리 질렀다. “이 새끼가!” 그러며 커다란 검을 휘두르자 루미에는 몸을 숙여 그걸 피해내고 바닥에 떨어진, 다른 자가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들더니 상대의 목을 베었다. 목이 쿵 하는 소리를 내고 떨어진다는 것, 목이 잘린 시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는 걸 란은 처음 알았다. 천장까지 붉은 피가 쭉 뻗어 나갔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루미에가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이쪽으로 돌아섰다. 방 안은 고요했다. 루미에는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세 명을 매끄럽게 죽였다. 몇 번, 아니 수십, 수백 번 그걸 연습해 왔던 사람처럼 낭비 없는 동작이었다. 그가 피가 고인 카펫을 맨발로 밟으며 란을 향해 걸어왔다. 란은 숨을 삼켰다. 디모디아는 어디서 꺼냈는지 단검을 꺼내어 들고 있었고, 백작과 그 호위도 발검한 상태였다. 루미에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네발로 기기 시작했다. 기어서 그는 일행의 앞까지 왔다. 백작이 검을 내려 그의 목에 가져다 댔지만, 루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란의 발등에, 더러운 부츠 위에 키스하고 애교 있게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란은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눈웃음치는 거 진짜 싫은데.’ 그런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 그녀는 소설을 볼 때 ‘눈웃음을 쳤다.’ 하는 문장을 보면 기분이 별로였다. 아니, 눈웃음을 친다는 게 뭐야? 그게 예뻐? 하지만 그게 예쁘다는 걸, 진짜 요염하게 눈웃음친다는 게 어떤 건지 란은 지금 깨달았다. 저 표정은 눈웃음을 친다, 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카 님!” “괜찮으십니까!” 당황해 란이 어쩌지 하는데 루미에가 말했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안내해라.” 백작이 대신 말했지만, 루미에는 멀뚱히 란만 보았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았다. 루미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른 근처 벽에 달린 촛대를 어루만지더니 아래로 당겼다. 그르릉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바닥이 휙 돌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루미에가 앞장섰고, 그 다음에 백작의 호위, 백작, 란, 디모디아 순서로 일행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란이 이를 악물었다. ‘거기서 그러는 게 아니었어!’ 그녀가 일부러 그 사실을 말한 이유는 단순했다. ―너 더 이상 루미에에게 명령할 구실이 없어. 이거였다. 그가 습격에 화를 낸다 해도, 그녀가 귀족인 걸 아는 이상 귀족을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하지는 못할 거다. 그러면 적당한 협박과 함께 ‘나 그럴 능력 많은 사람이야.’를 어필하고 적당한 가격에 루미에를 구매하려고 했지. ‘설마 거기서 다 죽일 줄은.’ 위가 꿈틀거리더니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란은 눌러 참았다. 란이 제 케이프를 벗으려다가 욕설을 내뱉고 말했다. “이것 좀 벗겨줘. 사슬을 끌고 다니는 걸 보일 수는 없잖아.”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디아가 말했다. “제 옷을 벗어서 주겠습니다.” “됐어. 난 이 안에 코트도 입었는걸. 넌 코트뿐이잖아.” “제가 망토를 벗겠습니다.” 란이 떨리는 손으로 케이프를 벗으려는 걸 말리며 백작의 호위 기사가 재빠르게 제 망토를 벗어서 루미에에게 건넸다. 루미에가 망토로 제 몸을 감쌌다. 란은 이마를 문지르고 말했다. “일단, 저 사슬을 처리할 곳으로 가지. 그 다음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디모디아가 란의 옆에 재빠르게 붙어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응. 아니, 응.” 란이 빠르게 말해서 디모디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대답하시는 걸 보니 괜찮으신 것 같네요.” 란은 허허하는 웃음을 삼켰다. 란이 느리게 백작에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군. 그 작자가 죽었으니, 신용도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버린 신분이었으니까요. 이걸로 깨끗하게 처분하면 되지요.” 일루미니티 백작이 담담하게 말했고, 담담해서 란은 더욱 미안해졌다. 물론 그가 손 씻었다고 하기는 했지만, 뒤쪽 커넥션은 중요했을 터인데! 란은 루미에를 한 번 노려보듯 바라보았고, 그러자 루미에는 애교 있게 다시 미소 지었다. ‘아오, 진짜.’ 란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밤비 속을 걸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은 마련된 안가로 향했다. 제법 사는 평민들 구역에 있는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그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뭔가 명령했고, 그러자 시종이 곧 열쇠장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란은 말없이 루미에의 손목과 발목의 족쇄가 풀리는 걸 바라보았다. “여동생은 위층에 있네. 아직 자는 중이야.” 백작의 말에 루미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만날 수 있습니까?” 애원하는 어조로,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란이 말했다.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루미에가 입고 있는 것은 너덜너덜한 튜닉이었다. 게다가 더럽고. 아무리 그래도 저 몰골로 여동생과 상봉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다. 루미에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씻으러 들어가자마자 백작이 란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풀어줘야지.” “그리고요?” “그게 끝이야.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네, 백작.” “제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백작이 낮게 말했다. “그의 여동생이 몸이 매우 약합니다.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약으로 줬던 마약이 몸을 많이 해친 상태이고요. 저대로는…….” 말끝을 흐려 란은 놀라 되물었다. “많이 안 좋은가? 혹시 의사에게는 보여 봤나?” “몸이 아픈 근본 이유는 의사도 모르더군요.” 의미 있게, 백작이 말해서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디모디아가 그 사이 란에게서 모자와 케이프를 벗겨 주었다. 축축하고 무거운 것들을 벗고 나자 살 만한 기분이 되었다. “추격자가 붙지는 않을까?” 란의 물음에 백작은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아르카는 그 바닥에서도 악명 높았으니까요. 만세를 부르는 자들도 꽤 될 겁니다. 게다가 부하를 믿지 않는 자여서, 그가 이끄는 조직의 중요한 정보와 함께 죽었을 테니 조직은 사분오열되겠죠.” “사분오열된 조직은 보통 정당성을 찾으려고 아르카 살해자를 찾아 죽이려 하지 않나?” 란의 말에 일루미니티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마 자기들끼리 구역 싸움을 시작하는 게 먼저일 겁니다.” “그렇군.” 하긴, 땅따먹기는 선점 싸움이기도 하니까. ‘구역 싸움이라. 그러면 그 틈에 정리를 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제대로 머리가 박힌 경비대라면 하겠지. 잠시 후, 씻고 말쑥한 옷으로 갈아입은 루미에가 돌아왔다. 주홍색 곱슬한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있었다. ‘잘생기긴 잘생겼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루미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역시, 머리카락과 한 쌍으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어째서 서브남은 머리색이 밝은 걸까.’ 란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루미에를 보다가 말했다. “올라가지.” 백작이 고개를 끄덕여, 일행은 2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간호하고 있던 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 “자는 중인가?” 생각해 보면 새벽이지. 란의 물음에 하녀가 공손하게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루미에가 란에게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미에는 발소리 없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한참 그는 여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란이 “우리는 나가줄까?” 하는데 여동생이 눈을 떴다. “오빠……?” 작게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루미에가 미소 지었다. “그래.” “오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여동생이 몸을 일으키다가 격렬하게 기침했다. 루미에가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여동생의 등을 쓸어주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침하며 루미에를 꽉 끌어안았다. “오빠, 오빠―” 그러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난 미소녀!!’ 이제 열둘? 열셋? 그쯤 되었을까? 루미에와 똑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동생은, 그야말로 병색이 완연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미모를 발산하고 있었다. ‘과, 과연.’ 저런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만하다. 그런 속물적인 생각이 들 정도의 미모였다. 란은 연신 감탄했다. 하지만 울면서도 기침을 하던 여동생은 곧 발작 같은 경련을 일으켰다. “릴리!” 놀란 루미에가 그녀를 꽉 붙잡았다. 하녀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고 란이 말했다. “의사를 불러라!”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해서 하녀는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커, 커헉, 컥―” 버둥거리는 릴리에게 란이 달려갔다. ‘그러니까, 발작 때는―’ 상식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란은 애썼다.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기도에 막힌 게 없는지 확인하고―’ 그녀가 깃털 베개를 들어 릴리의 머리와 침대 헤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다음이, 아!’ “윽―!” “가주님!” 그녀가 릴리의 입에 손가락을 넣자마자 물려 란은 작게 소리를 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디모디아가 후다닥 손수건을 들고 다가와서 릴리의 입에 물려 란의 손가락을 빼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줘.” 란의 말에 디모디아가 릴리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대로 물렸네.’ 피 난다. ‘광견병……은 없겠지.’ 잠시 후 릴리의 발작이 멈췄다. 디모디아가 몸을 돌려 란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피 나잖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란은 그렇게 말하고 릴리를 힐끗 보았다. 발작이 가라앉은 작은 몸은 지쳤는지 쌕쌕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간질인 건가?’ 갸웃하는데 의사가 막 도착했다. 릴리를 살펴보고, 의사는 란의 손가락을 치료해주었다. 루미에는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아, 란은 약간 부담을 느끼며 의사에게 말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는 건가?” “네, 죄송합니다.” “그래…….” 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게 예의겠지. 루미에에게 묻자 루미에가 조용히 대답했다. “주인님이 붙여주시는 게 제 이름입니다.” 아니, 그거 아니고.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루미에라고 부를게.” 제 본명이 나오자 루미에는 흠칫했다. 그의 눈에 혼란과 경계가 지나갔지만, 곧 특유의 미소가 모든 것을 지웠다. “감사합니다.” “그게, 난 이제 루미에랑 릴리가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살라고 할 작정이었거든.” “―!!” 루미에가 전신을 움찔했다.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릴리가 아프니까…… 그게, 내가 아는 엘프 의사가 있는데, 진짜 잘 보거든. 한번 보일래? 그러려면 라치아령까지 내려가야겠지만…….” “어째서요?” “아, 엘프가 수도는 싫어해서…… 잘 안 오거든.” 전에 거래 때문에 왔던 게 마지막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째서 저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겁니까?” “그냥.” 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미에의 눈이 단숨에 의심으로 가득 찼다.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안한데, 그냥 그거야.” 씁쓸하게 웃으며 란이 말했다. “루미에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어떻게 하겠어?”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릴리의 몸이 긴 여행을 버텨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란은 잠시 릴리를 보았다가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란은 이마를 문질렀다. 루미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네 주인은 너지, 내가 아닌데.” 란은 잘라 말했다. 아까부터 일이 꼬이고 있는 것 같은데, 풀 방법이 없다는 게 짜증이 나서 그녀의 어조에도 짜증이 섞였다. “죄송합니다.” 루미에가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란은 당황해 그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세우게 했다. 그러자 루미에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러지 마. 너에게 화난 게 아냐. 그게 아니라―” 란이 다시 쓰게 웃었다. “나에게 좀 화가 난 거야. 그리고 너, 거기서 그렇게 그 인간들을 죽이면 어떻게 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라.” 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미에의 어깨가 크게 흠칫했다. “아냐, 됐어. 너도 진짜 고생 많았지. 일단은 쉬어. 자세한 일정은 나중에 알려줄게.” 그리고 란이 백작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간 비용은 전부 나에게 청구하게.” “호의인데요.” “그러니까야.” 남의 호의를 공짜로 먹는 건 쓰레기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 디모디아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일단 오늘은 좀 자고 싶다. 그러면 내일은 머리가 더 잘 돌아갈 것 같아. 디모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녹색 아치로 돌아가는 길은 길게 느껴졌다.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란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시종들이 다니는 문으로 들어가, 저택 뒷문을 여는데 거기에 거짓말처럼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란은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유스.” “네.” “나 지금 토할 것 같아.” “…….” “그리고 엄청 피곤해. 그러니까―” 유스타프가 그녀의 모자를 휙 벗겼다. 란이 눈을 찌푸리며 그에게서 모자를 가져오려고 손을 뻗었다. “진짜, 나중에 하면 안 돼?” 그녀가 투덜거리다가 순간 비틀거렸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찌푸렸다. “피비린내가 납니다.” “진짜?” 깜짝 놀라 되묻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란이 놀라 상체를 세우려 애쓰며 말했다. “유스, 옷 다 젖어. 게다가 내 부츠 더럽단 말이야.” 유스타프는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순식간에 올라가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응접실 소파에 그녀를 던지듯 내려놓고 그는 램프를 밝게 키웠다. 란은 신음을 흘리며 이제 차갑고 무거워진 손가락으로 어떻게든 케이프를 벗으려 애썼다. 집에 돌아오니 더더욱 졸음과 피곤이 밀려왔다. 일단 그녀는 지금 밤새는 중이었고, 밤새는 와중에 세 건의 살인을 목격했으며, 계획에도 없이 루미에를 라치아령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엉망인 데다가 피곤했다. 유스타프가 다가와 그녀의 옷을 대신 벗겨 주며 물었다. “손가락은 어쩌다가 그러신 겁니까?” “어? 아, 그냥 어쩌다가―” 란이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별거 아냐.” “별게 아니라고요?” 유스타프는 케이프를 벗겨내고 코트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두꺼운 상의를 벗고 나자 몸이 가뿐해졌다. “어디 그 별거 아닌 이야기가 뭔지 한번 들어 보죠. 저에게 말도 하지 않고 디모디아와 둘이 나가서 뭘 하셨습니까?” “그게…….” 란은 우물거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이요?” “유스타프는 몰라도 되는 일.” 그가 코트를 휙 벗겨내자 란은 소파에 널브러졌다. ‘으, 시원하다.’ 그가 롱부츠 뒷굽을 붙잡아 당기자 란이 놀라 소리쳤다. “유스, 더러워!” “그 더러운 걸 신고 제 방을 돌아다니시려고요.” “아니, 유스 손이―” 하지만 유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츠를 벗겨냈다. 롱부츠를 벗자, 그녀의 입은 어떻든 몸은 솔직하게 ‘시원해!’를 외치고 있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부츠를 다 벗겨서 한쪽에 던져버리고 세숫물로 손을 씻었다. “그래서요? 무슨 일입니까?” “그게…….” 란은 으으으으 하고 신음을 내뱉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검투노예로 팔렸다고 알게 됐어. 불법 투기장에. 그래서 일루미니티 백작에게 부탁해서 찾아 달라고 했어. 그리고 오늘 가서 그 사람을 찾아온 거야. 그런데 그 사이에 사고가 있어서…….” 반쯤 누워 소파 팔걸이에 팔과 머리를 묻고 이야기하다가 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 여동생이 많이 아파서…… 라치아령으로 함께 가자고 했어. 하레쉬에게 보이려고.”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그건, 유스가 알 바는 아니잖아.” 저도 모르게 란이 수동적인 공격 형태를 취했다. 유스타프가 침묵하자 란이 다시 팔걸이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라치아에 해가 가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답이 오래 들려오지 않아 란은 피곤한 눈을 들었다. “유스?” 유스타프는 팔짱을 끼고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화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어―?” “저와 약속하셨지요.” “응?” “제가 가주에 오를 때까지는, 죽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야. 그 문제였어? “안 죽었잖아.”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다른 자에게 맡기십시오. 대체 왜 직접 가신 겁니까? 아니면 적어도 제대로 된 호위를 데려가시거나요.” “디아를 데려갔어.” “로스는요? 로스를 따돌린 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실 겁니까?” “그건…… 미안한데.”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요? 거기서 일이 생겼으면 어떻게 되셨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란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굴렸다. 그야 불법 투기장 주인과 라치아 공작의 쿵짝이 내일 대서특필되었겠지. “라치아의 이름에 누를 끼치려는 건 아니었어. 아, 어차피 라치아 공작인지 모를 테니까 괜찮았을 거야!” 란이 재빠르게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하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몸을 숙여 소파 등받이를 붙잡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타오르는 것 같아 란은 숨을 삼켰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그가 소리를 치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유스타프의 시선이 팔걸이로 내려갔다. “그렇게 죽고 싶으시면, 그냥 저에게 죽여 달라고 하시지 그랬습니까? 호위 한 명 데리고서 악당 소굴로 들어갈 거라면 말입니다.” “나도 생각 없었던 거 아니거든?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그게 뭡니까?” “그건―” 정령의 이름을 아는 건데, 그건 너에게 말해줄 수가 없어. ‘아아아아!! 나 진짜 짜증 나는 인간이잖아? 네가 모르는 진실이 있거든? 근데 말해줄 수는 없어, 라니. 스스로가 화가 난다.’ 란은 으으으 하고 이 사이로 신음을 내뱉다가 말했다. “하, 하여간 지금 가주는 나잖아! 내가 너에게 내가 하는 일을 다 보고할 필요는 없어!” “…….” 유스타프가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도 란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잖아?’ 유스타프가 등받이에서 손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러지요. 가주님이 하시는 일에 제가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지요. 그게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하는 장난질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아차, 했던 마음은 유스타프의 비아냥에 싹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네 성인식에는 무사히 잘난 가주직을 넘겨줄 테니까. 너에게는 그렇게 소중한지 몰라도 나에겐―” 별거 아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내뱉은 거나 다름없었다. 순간 란은 말을 멈추고 이마를 눌렀다. “미안, 유스. 지금 거는 진짜 말실수였어. 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말이 잘 안 나와. 미안.” “누님께서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새삼스럽지만 다시 알았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고, 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쉬십시오.” 그리고 그는 휙 방을 나가버렸고, 란은 “아아아―!” 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파에 쓰러졌다. 정말, 정말, 정말, 한심하다. 눈물이 찔끔찔끔 흐르기 시작했다. 나 오늘 사람 죽는 것도 처음 봤어, 사실은 무서웠어. 유스. “엄마…….” 작게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란은 울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유스타프는 머리를 식히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가, 아직도 란이 소파에 누워 있는 걸 보고 눈을 찌푸렸다. “누님―” 부르려다가 그는 그녀가 잠든 걸 알아챘다. 눈물투성이 얼굴로 소파에 웅크려 잠든 걸 보니 화난 기분도 어딘가로 다 가버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찰랑. 물소리는 언제 제 귓가에 울린 걸까? 유스타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리 조심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고 해도 보통은 깰 법한데, 란은 완전히 푹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약간 거칠게,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우응…….” 쩝쩝 입을 다시면서도 일어날 기미는 없다. 그는 피식 웃고 그대로 그녀를 그녀의 방까지 옮겨주었다.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조용히 시키고 유스타프는 란을 침대에 눕히고 방을 빠져나왔다. 로스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유스타프를 보았다. 호위를 부탁했는데, 호위를 따돌리고 떠난 주군이 다쳐서 돌아왔다. 유스타프는 “도련님.” 하고 끙끙거리는 로스에게 “내일 이야기하지.” 하고 말하고 방을 나섰다. ✥✥✥ 루미에는 밤새 릴리의 베갯머리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 여동생을 보면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도로 꿈에서 깰 것 같아서, 루미에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이 장소를 떠날 수도 없었다. 릴리의 약값 때문에 빚을 지게 되고, 노예로 팔리게 된 것까지는 괜찮았다. ‘아르카의 말에 넘어간 게 화근이었지.’ 여동생은 자신이 돌봐줄 테니, 라고 하는 달콤한 말에 한순간 멍청하게 넘어갔던 게 시작이었다. 불법 투기장은 끔찍한 장소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남의 유희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기분은……. 루미에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러면서도 릴리는 만나지 못하게 했다. 여동생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하면 아르카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루미에가 연속으로 승리하자 아르카는 판돈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부상을 입히고, 경기를 진행했다. 모두의 앞에서 오른 손바닥에 단검을 꽂아 넣고 왼손에 무기를 쥐고 상대와 싸우게 하는 식이었다. 다음에는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걸 시킬 거라고, 아르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며 여동생은 나아지고 있다고,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 외에는 먼발치에서 산책 나온 여동생을 힐끔 보여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 루미에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여동생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둥근 이마를 어루만졌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고?’ 루미에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수상쩍은 말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때에는 받아낼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공짜가 가장 무서운 법. 루미에는 제 주인인 여자를 떠올렸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다. ‘제법 높은 지위의 귀족이 아닐까?’ 루미에는 귀족들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알고 있었다. ‘라치아령이라…….’ 불법 투기장은 세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장소지만 거기까지도 라치아 공작가의 이야기는 들려왔다. 아주 토막토막이기는 하지만 얼음수정이라든가, 황태자와의 결투 이야기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라치아 공작은 여자라고 했었지. 설마? 본인인가?’ 루미에는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그가 알고 있는 라치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종합해 그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제 남동생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겠군.’ 귀족 살해는 중죄다. 고문으로 너덜너덜해진 후에 화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루미에는 제 여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릴리는 자기가 알아서 데려가겠다고 했었지.’ 그러면 지금이 여동생을 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 루미에는 밤새 여동생의 얼굴을 망막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 란은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떴다. 카라와 소다는 란의 눈치를 보며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찜질해 주었다. “나 언제 내 방에 온 거야?” 목도 부어서 칼칼한 목소리가 나왔다. “도련님이 옮겨주셨어요.” “……유스가……?” “네.” 카라가 그렇게 대답하며 미지근한 차를 내놓아 란은 목을 축였다. ‘자면서 많이 울었나 보다.’ 머리도 지끈지끈거렸다. 카라가 말했다. “가주님, 아무래도 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어?” “의원을 부를까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란은 ‘감기 몸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스에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내가 걸려버렸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환자 취급을 받게 된 란은 옷도 가벼운 면 잠옷으로 갈아 입혀지고 팡팡 깃털을 부풀린 침대 속에 묻히듯이 눕게 되었다. “입맛은 있으신가요? 요리사에게 수프라도 조리해 오게 할까요?” 소다가 조심조심 물어서 란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었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디모디아가 들어오며 말했다. 여기는 약 먹기 전에 밥을 먹어야 한다는 관습이 없어서, 란은 그냥 옅은 황금색 액체를 마셨다. 기름을 마시는 것 같은 미끄덩한 맛이라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란이 컵을 쟁반에 올려놓자, 쟁반을 들고 있던 디모디아가 물었다. “도련님이 와 계십니다만…….” “유스가?” “네.” “디아는 안 혼났어?” 속닥속닥 묻자 디모디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저야 가주님을 따라간 것뿐인걸요.” “그럼 다행이야.” 말하고 란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피곤해서…….” 그 뒷말을 디모디아는 재빠르게 알아챘다. “네, 그럼 도련님에게 주무신다고, 다음에 만나러 오시라고 하겠습니다.” “고마워.” 란은 그렇게 말하고 푹신한 베개에 푹 상체를 묻었다. 대야를 들고 들어온 카라가 물수건을 짜서 란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시원하다.’ 약 기운이 돌아서인지 란은 금방 다시 잠들었다. 란은 눈을 떴다. 머릿속이 상쾌한 게 열은 다 내린 모양이었다. ‘얼마나 잔 거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쭈욱 기지개를 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떡 졌어!’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새 대야를 들고 들어오던 카라가 어머 하고 달려왔다. “일어나셨나요? 몸은 어떠세요.” “응, 열도 내렸고 괜찮아. 그런데 씻고 싶어.” “알겠습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하지요.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기침했다. 열은 떨어졌지만 감기가 나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름 감기라니.’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란은 가볍게 식사를 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서 란은 유스타프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로스를 쿡쿡 찔렀다. “로스 경.”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잘못했어.” 그녀의 속삭임에 로스는 놀란 얼굴로 란을 보았다가 말했다.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제가 텅 빈 방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가 입 안으로 투덜거렸다. 유스타프가 란을 안고 돌아왔을 때야, 로스는 란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때의 그 민망함이라니. “그리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 로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란이 가볍게 웃었다. “미리 이야기해 두는 거야.” 로스는 뭐라고 하고 싶은 걸 꾸욱 눌러 참았다. 란은 ‘오’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분명히 뭐라고 하면서 항의할 줄 알았는데 눌러 참는다. ‘로스 성장했네?’ 변하다니.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사람이니까, 변하는 거구나.’ 아직 안전한 흐름 안에, 흘러가는 이야기대로 무난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이제 로스는 죽지 않을 테고, 살아남아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써 나가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이야기의-예언의 중심축은 변하지 않아도 소소한 건 변한다는 뜻일까? “왜 그리 보십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란은 고개를 흔들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창밖 날씨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쨍하니 개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복도의 창문들은 전부 열려 있어 신선한 공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천천히 해가 기울어서 하늘은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흐리지 않은, 맑은 노을이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하던 유스타프가 고개를 들었다. “누님, 몸도 안 좋으시면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란은 쌓인 서류를 힐끗 보았다. “혼자서 다 하는 거야?” “제가 할 몫을 하는 거지요.” 어젯밤의 격렬한 대화가 없었던 것 같은 평온한 대화였다. 란은 어쩐지 속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유스.” “네.” “내가 어제 실언한 거, 다시 한 번 사과할게.” 정중하게 인사하니 유스타프가 책상을 돌아 나와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걸 들게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누님이 7월의 비만큼이나 사방에 뭘 흩뿌리고 다니는지 잘 압니다.” 란이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란은 되물었고 그러자 유스타프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뭘까요.” 대체 뭐람? 란은 눈을 깜박였지만, 유스타프의 기분이 풀린 듯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남의 소중한 걸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다니, 진짜로 최악의 발언이었어.’ 그것도 유스타프의 심기를 가장 건드릴 만한 말이었다. 그에게 라치아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면서. “비도 그쳤으니, 이제 내려가겠네?” “그래야죠. 누님께서 아프지 않으셨다면 오늘이라도 출발했을 겁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그런데 사람을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돼……?” “이제 와서.”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두 명이겠지요.”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여동생. “고마워, 유스.” 활짝 웃으며 란이 말하자 어쩐지 유스타프는 약간 짜증이 나서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퉁겼다. “……?” 놀라 란이 이마를 붙잡고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유스타프가 제 손을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화, 화난 거면 이야기해.” “화났다고 손을 올리면 쓰레기죠.” “그, 그럼 왜 그런 거야?” 유스타프가 이렇게 나온 적은, 아니 이런 식으로 자신을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란은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마를 때렸어? 유스타프가? 내 이마를? 친근함의 표시인 거야? 아니면 그냥?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는데 왜 당당해! 란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참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아프십니까?” “아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크다고 해야 하나. “콜록콜록.” 란이 기침을 하자 유스타프가 재빠르게 물 잔을 가져왔다. 로스는 그걸 옆에서 보며 ‘우리 주군이 저런 잔심부름을!’ 하고 손수건을 물어뜯는 얼굴이었다. 란이 물 잔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냐, 그냥 기침이야. 괜찮아.” “정말로 내일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응, 그냥 기침만 하는 것뿐이야.” 코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유스타프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귀에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누님, 저도 걱정은 합니다.” “?!” 속삭임에 놀라 란이 귀를 막으며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나다가 비틀거리는 걸 유스타프가 붙잡았다. “아시겠습니까?” “어? 어어. 고마워…….” “그럼 이제 돌아가서 쉬십시오.” “응.” 고개를 끄덕이고 란은 비틀비틀 제 방으로 돌아갔다. ‘걱정? 걱정……? 아!’ 란은 그제야 머릿속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어제 유스타프가 화낸 이유 중에, 걱정도 있었던 거구나.’ 설마 내 걱정을 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그도 그럴 게 유스타프인걸. ‘그런데 거기에 가주직 어쩌고 했으니…… 아니, 근데 정말로 유스타프가 날 걱정할 거라곤……?’ ―누님이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때 또 어제 유스타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뭔가를 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비틀비틀거리는 그녀를 로스는 불안한 얼굴로 보았지만, 란은 무사히 제 침실로 돌아갔다. ‘모르겠다. 일단 쉴래.’ 머릿속을 굴릴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란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꼭 감았다. ‘유스타프가 내 걱정.’ 생각하니 어쩐지 히죽히죽 웃음이 나와서 란은 실실 웃으며 잠이 들었다. ‘이 세계에도,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잠들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라치아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과 가주가 함께함을 알리는 깃발 역시 휘날리며 마차는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릴리는 쭈삣쭈삣 건너편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릴리가 머물던 산호초는 매음굴이었다. 당연히 여자도 많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밀빛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흘러내려 별처럼 반짝거리고, 눈동자는 투명할 만큼 맑고 깊은 에메랄드 색. 거기에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를 갖추고 묘하게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빈민굴의 매춘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여성이다. ‘게다가…….’ 어찌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운 옷이었다. 마차도 푹신푹신했다. “어지럽지는 않니?” 란이 물어서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란이 웃고 머랭 과자를 꺼냈다. “과자 좋아해? 먹을래?” 꽃 모양으로 빚은 연한 빛깔의 머랭 과자는 보기만 해도 예뻐서 눈이 커졌다. 릴리는 조심조심 과자를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었다. 란은 릴리의 눈이 땡그래지는 걸 보며 웃었다. “맛있어?” “네, 네에.” “그럼 이거 다 릴리 먹으렴.” 그녀가 머랭 과자가 들어 있는 봉지를 릴리에게 넘겨서 릴리는 입을 떡 벌렸다. “이걸 전부요?” “응.” 란은 싱글싱글 웃었다. ‘귀여워. 진짜 귀엽다. 초식동물에게 먹이 주는 기분!’ 본바탕이 워낙 미소녀라서 조금만 제대로 입혀놓으니 빛이 번쩍번쩍 났다. 란의 옆에 앉아 있던 디모디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 먹으면 너무 물리지 않을까요? 너무 달지 않아요?” “그런가? 릴리, 차와 함께 먹어.” 란이 그렇게 권하고 방긋 웃었다. 일행에게는 루미에와 릴리 남매를 옛 지인이라고 해 두었다. 라치아로 내려가는 길에 자리 잡게 도와줄 겸 같이 가는 거라고. 모두가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란이 라치아 공작가에 오기 전에 시골 기사의 딸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굳이 그때를 지적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물론 유스타프가 릴리와 란이 마차를 같이 타고 가도 된다고 말해 준 게 가장 큰 지지이기는 했다. 그렇게 출발해서 일행은 벌써 나흘째 문제없이 라치아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루미에는 말 타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걷거나, 또는 짐마차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는 힐끔힐끔 가장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라치아 공작이었을 줄이야.’ 라치아 공작가에서 사람이 맞이하러 왔을 때 무서워하는 릴리를 루미에는 몇 번이나 달랬다. “또 오빠랑 떨어지는 거야?” “아냐, 괜찮아. 같이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공작가에 도착하면 릴리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매는 항상 한 쌍으로 취급당했고, 딱히 둘을 떼어놓으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잠자리. 분수에 지나치는 것들이 주어져서 루미에는 더더욱 몸을 낮췄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릴리를 제 옆에 딱 붙여놓은 란을 보자 ‘역시나’ 싶었다. ‘그리고 저자가 유스타프.’ 차기 가주. 자신이 죽여야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대. 마치 제 속을 꿰뚫어본다는 듯한 푸른 눈이 무심하게 슥 루미에를 살필 때마다 그는 뒷목이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쉬운 상대가 아니군.’ 유스타프는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자 일사불란하게 일행이 멈춰 섰다. “잠깐 쉬었다가 가지.” 유스타프의 말에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말에서 내리는 소리며 분주하게 마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났다. 유스타프 역시 말에서 내려 란이 타고 있는 마차 문을 두들겼다. “쉬는 거야?” 란이 거침없이 마차 문을 열며 말해 유스타프는 열리는 문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정도 쉴까 합니다.” “답답했어.” “말을 타고 가시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눈을 샐쭉하게 떴다. “다음에.” “평소에 연습을 좀 해두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란은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유스타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 나자 릴리가 얼른 폴짝 마차에서 내려와 루미에를 찾아 쪼르르 가버렸다. 란이 속삭였다. “귀여워.” “뭐가요?” “릴리 말이야.” 유스타프는 뛰어가는 작은 생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고 란이 당황해 말했다. “귀엽잖아? 진짜 예쁜 미소녀잖아?” 있어 주는 것 자체로 충분한,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는 미소녀라고? “저런 게 취향이십니까?” “저런 거라니.” 란은 입을 떡 벌렸다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소아성애자는 아닌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던 카라와 소다가 쪼르르 달려와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가주님, 아직 기침하시죠.” “차를 끓여왔습니다.” “아, 고마워.” “간이 의자라도 펴라고 할까요?” “응? 아냐, 괜찮아. 계속 앉아 있었는걸. 세 사람 다 산책이라도 하고 와. 난 괜찮으니까.” 시녀에게 그렇게 말하며 란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유스타프는 시녀들이 멀어진 걸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님, 저 작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으응?” “제 암살이라도 의뢰하신 건가요?” “풋―” 란은 마시던 차를 그대로 뱉어냈다가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쿨럭, 콜록, 콜록.” 유스타프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괜찮으십니까?” “켁, 컥, 그게, 뭔, 쿨럭―” 사레들려 켁켁거리는 란에게 시녀들이 다가오려는 걸 유스타프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란 역시 손을 흔들어 괜찮다고 표시했다. 아무래도 시녀들이 듣는데 할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은 란이 낮게 소리쳤다. “그게 뭔 소리야?” “아뇨, 뭔가 시선이 그런 느낌이라. 그래서 누님이 본격적으로 가주직을 노리시나 했습니다.” “아니거든? 안 노리거든? 그리고 루미에에게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발끈해서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는 “그거 아쉽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란은 기가 막혀서 말했다. “내가 가주직을 노리면 좋겠어?” “아직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뭐가?” “뭘까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자 란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감각 진짜 오랜만이다. “유스…….” “네.” “나, 나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 “그랬지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유스타프는 흘러내린 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아직은 괜찮을 것 같은데. 란이 가주직을 원한다면, 영원히 소유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란이 손을 뻗어 유스타프의 뺨을 잡아당겼다. “?!”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유스타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란이 화난 얼굴로 낮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겁주지 마! 무섭단 말이야.”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펴서 그의 뺨에서 손을 떼고 란이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나 걱정한다며. 나 그거 좀 기뻤는데.” 근데 또 지금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그런 얼굴로 빤히 유스타프를 보자 그의 푸른 눈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가 “정말이지, 당신은.” 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가 말했다. “그럼 저 작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 거라고요.” “응.” “그럼 하나 더 묻겠습니다.” “응.” “저 자식과 아는 게 혹시 예전에 연인 사이였거나 하는, 그런 식의 아는 사이였습니까?” 란의 눈이 커졌다. 그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가 굴러떨어지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스타프는 대답을 기다렸다. 표정이 답이지만 그래도 말로 듣고 싶었다. “아니거든요? 전혀? 조금도?”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져서 란은 드디어 오해가 풀렸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가주직은 네 것이라니까, 유스. 라치아가는 몽땅 다 네 것이야. 네 것.” “네, 제 것이지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스타프가 매끄럽게 대답했다. “라치아의 것은 전부 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그 파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쳐서 란은 왜인지 심장이 꽉 조여지는 기분을 느꼈다. “쿠, 쿨럭, 쿨럭.” 괜히 란은 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유스타프가 제 크라바트를 풀더니 그녀의 목에 둘러 주었다. “목을 감싸시는 게 낫겠습니다.” “어, 응. 고마워.” 란은 매끄러운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렸고 그가 물었다. “좀 걸으시겠습니까?” “응? 응,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걷기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혼자만 어색한 것 같아 란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루미에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았다. ‘사이는 좋아 보이는데.’ 겉으로는 화기애애하면서 뒤에서는 서로 죽이려고 하는 걸까? ‘흔한 일이지.’ 한순간 유스타프의 살기가 란을 향해서 루미에는 움찔했다. 그러자마자 란이 유스타프의 뺨을 잡아당겨 더 놀랐지만. “오빠?” 제 옷자락을 당기며 여동생이 말을 걸어 루미에는 시선을 내렸다. “그래, 공작님이 잘 대해주셨어?” “응. 그리고 과자도 주셨는데, 엄청! 맛있었어.” 그러며 릴리는 머랭 과자가 든 봉지를 루미에에게 내밀었다. 루미에는 아름다운 모양의 과자를 먹었다. 파삭하고 입 안에서 부서진 머랭 과자는 순식간에 달콤함만 남기며 녹아내렸다. “달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자 릴리는 “맛있지?” 하고 웃었다. “그러네.” 그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동생은 그사이 몰라보게 혈색이 좋아졌다. 이대로 병이 낫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발작은 그래도 시시때때로 일어났고, 루미에는 그때마다 가슴 졸였다. 그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 루미에는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보고 루미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고개를 숙였다. 특유의 애교스러운 미소도 잊지 않았다. “주인님.” “아니,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란이 손을 저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어― 란이라고 불러 주면 될 것 같은데……?” “그럼 란 님.” ‘으아―’ 란은 감탄했다. 이름을 부르는 데도 저런 식으로 부를 수가 있구나. 뭔가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어조였다. 술집작부가 ‘오빠앙―’ 하고 콧소리를 내서 멍청한 남자들이 ‘으하하! 술 더 가져와!’ 하고 돈을 쓰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급인 기술이었다. 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스타프와 산책을 하려는데, 기사가 다른 일로 그를 불러 흐지부지된 김에 얼른 루미에를 보러 온 거였다. “따라올 만해? 몸은 괜찮아? 무리하지 말고 마차에 계속 타고 있어도 되는데.” “덕분에 충분히 쉬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란은 가볍게 웃었다. 루미에는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정말로, 이게 연기라면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릴리나 자신을 볼 때나 소다, 카라라고 하는 시녀를 볼 때, 아니면 다른 기사를 볼 때도 란의 눈은 똑같았다. ‘사람을 보는 눈.’ 그게 뭔지 루미에는 잘 알았다. 밑바닥을 기다 보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지 빠르게 알게 되니까. 도구나, 아니면 시녀나 하녀라는 계급으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서 상대를 보는 눈동자. 그게 너무 오랜만이라, 루미에는 가끔 계속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연기라니.’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란을 보았고 란은 다시 빙긋 웃었다. “아까 유스에게 물어봤는데, 이제 4, 5일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한다니까 조금만 더 힘내. 그리고 가면 뭐 할지도 한번 생각해 봐.” “뭘 할지요?” “그야 뭐든 해야 먹고살 거 아냐…….” 말하고 란이 좌우를 둘러보더니 입가에 손을 대고 속닥거렸다. “내가 기본 정착금 정도는 대줄 수 있지만, 그래도 루미에가 할 마음이 있어야지.” 내탕금이 아주 많이 부풀었거든. 마치 발효된 빵처럼! 란은 잔액만 봐도 흐뭇해졌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말인 듯했다. 란의 말에 루미에는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에게 뭘 시키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말은 이렇게 하지만 빠르게 눈치채고 선택을 하라는 건가?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야 란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주인님이시니.” 그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개처럼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했다. 마주친 눈동자는 여전히 요염한 빛을 띠고 있어서 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밀쳐버릴 뻔한 걸, 꽉 눌러 참았다. 대신 그녀는 그 앞에 다리를 쭈그리고 앉았다. 시선 높이가 비슷해지자 루미에는 당황한 듯하지만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주인은 너야, 루미에. 내가 너에게 뭔가 딱히 바라거나 그런 건 없어. 게다가 릴리 앞에서 이러지 마.” 마지막 말은 작게 작게 속삭이자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릴리에게 돌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원하시는 대로.” “아니―” 란은 ‘으아아아’ 하고 가슴을 쿵쿵 치고 싶은 걸 눌러 참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엄청 수상하지. 알아, 이해는 해.’ 평생 속고 이용만 당해온 인생이다.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건 말로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거지. 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 뭘 하라는 건 아냐. 천천히 생각해 봐.” 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표정의 릴리에게 란은 미소 지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준 후에 란은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루미에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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