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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혀의 싸움, 힘의 싸움


Chapter 1. 혀의 싸움, 힘의 싸움 뚜껑 없는 마차는 경쾌하게 삼나무 길을 달렸다. 삼나무 길 양편의 부티크들은 사교 시즌의 피크를 맞이하여 신상품을 쭉 진열하고 있었다. 어차피 귀족의 물건은 전부 오더 메이드여서, 부티크는 사실 사교의 장이었다. 살롱처럼 꾸며진 부티크 안에서 귀부인들은 사교적 만남을 가지고, 서로 카탈로그를 보며 드레스와 장신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목표는 삼나무 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여왕이자, 제국 최고의 성군의 이름을 딴 예레니아 공원이 목표였다. “올해 들어 첫 피크닉이에요.” 엘리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가 손에 든 양산은 분홍빛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것이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첫 피크닉인 것 같아요.” 란의 말에 엘리제가 “어머!” 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정말요?” “네, 그래서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즐거울 거예요!” 엘리제가 힘주어 말했다. 그녀 옆에 앉아 있던 키릭스 후작이 픽 웃고 말했다. “리제는 뭐든 즐겁지.” “어머? 무슨 말씀을?” 엘리제가 남편에게 입을 비죽였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나가기 때문에 즐거운 거라고요.” 리제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피크닉이라고 해도 만약에 황후의 초청으로 황태자비 부처와 함께 떠나는 거였으면 절대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란의 대답에 엘리제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소문은 들었어요.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가― 정말인가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일 거예요.” “세상에. 파렴치하기도 하죠.” 엘리제가 분개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아내를 달래듯 키릭스 후작은 가볍게 그녀의 손등을 두들겼다. 란은 힐끔 키릭스 후작을 보았다. 그의 왼쪽 눈에는 세로로 자상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눈은 감은 채였다. 애꾸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이었구나. 키릭스 후작의 눈이 란과 마주쳤다. 서른 중반인 그는 노련한 용병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란은 싱긋 미소 지었고 키릭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제 아내에게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요.” “네, 저도 좋은 친구가 생겨서 기뻐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란은 자신의 새하얀 레이스 양산을 한쪽으로 기울여 유스타프 쪽으로 그늘이 좀 더 지게 하고 물었다. “햇빛 괜찮아?” “괜찮습니다. 누님이 쓰세요.” 유스타프가 양산을 쥔 그녀의 손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이제 5월, 수도의 날씨는 쾌청하고 푸르렀다. 그만큼 햇빛도 쨍해서 나들이 가는 여성들은 모두 다 양산을 쓰고 있었다. 란이 “그럼 사양하지 않고.” 하며 양산을 다시 제 머리 위로 돌렸다. 엘리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사이좋네요.” “그야 이 세상에 둘뿐인―” 란은 말꼬리를 흐렸다. 음, 남매는 아니고, 가족? 란이 끙끙거리는 사이 유스타프가 대신 끝맺음을 해주었다. “누님이 훌륭하신 분이라,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에이, 유스에게 가르칠 게 뭐가 있어?” 란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은 좋다. 키릭스 후작이 유스타프를 보며 말했다. “경은―” “그냥 유스타프라고 불러 주십시오, 후작님.” 유스타프의 말에 키릭스 후작이 빙긋 웃고 말했다. “그럼 나도 그냥 카로크라고 불러 주게.” “좋습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릭스 후작이 물었다. “영지전에서 캐머론 후작의 사병들을 완전히 전멸시켰다면서?” “전멸은 시키지 않았습니다. 항복은 받아줬죠.” “기사들은 전원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는데?” 유스타프가 피식 웃었다.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해두지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군.” “저도 카로크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로니칼(마수의 일종. 닭의 머리에 몸은 도마뱀. 크기는 2~4m 정도 된다)을 혼자서 잡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그 말에 키릭스 후작이 낮게 웃었다. “그럼 소풍 바구니를 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엘리제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어째서 이렇게 날씨도 좋은 날 호숫가에 피크닉을 나와서 피 냄새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음? 나는 좀 궁금한데요?” 란의 말에 엘리제가 “란!” 하고 목소리를 높였고 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리제와 저는 따로 예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좋아요.” 리제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예레니아 공원의 크기는 상당해서, 마차로 공원 외곽을 빙 돌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리고 그 공원 가운데에는 청옥빛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공원 곳곳에 돗자리를 편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게 누구인지 다들 금방 알아챘고, 일행은 좋은 자리를 양보로 얻어냈다. “이럴 때 쓰라고 작위가 있는 거죠.” 엘리제가 란에게 속삭였다. 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리를 얻는 정도의 권력만 있다면 정말로 평화로울 텐데 말이에요.” 물론 자리를 양보한 남작 부부 일행은 키릭스 후작과 라치아 공작에게 깊이 눈도장을 찍는 걸로 만족한 것이지만 말이다. 뒤를 따라온 시종들이 마차에서 내려 재빠르게 자리를 세팅하고 피크닉 바구니들을 줄줄이 내려놓는 사이, 란과 엘리제는 얼른 부드러운 매트 위에 자리를 잡았다. 피크닉 바구니 안은 풍성했다. 소스와 훈제 연어, 차가운 햄과 소 혀를 넣은 샌드위치, 새하얗게 구운 가벼운 비스킷과 각종 잼, 비시스와즈(감자와 크림으로 만드는 차가운 스프), 애플파이, 크림 커스터드, 거기에 얼음과 설탕을 가득 넣어 만들어온 아이스티가 세팅되었다. 나무로 만든 매끄러운 접시와 냅킨을 나누어 받고 일행은 곧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음, 연어 진짜 맛있어요. 라치아에서는 많이 먹겠죠?” 엘리제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킥킥 웃었다. “오히려 라치아 연회장에서는 가장 많이 남는 게 연어예요. 너무 흔하니까요.” “어머나, 그거 아쉽네요.” 엘리제가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연어를 포크에 돌돌 말아 소스를 듬뿍 찍었다. 란이 아이스티를 컵에 따르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스파클링 와인도 가져오기는 했어요. 남자분들은 어떠신가요?” “좋은 와인인가요?” 키릭스 후작의 말에 엘리제가 눈을 찌푸리며 “여보.” 하고 말했지만 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치아의 이름을 걸고.” “그럼 꼭 한잔하게 해주시죠.” 시종이 얼른 와인을 들고 왔다. 라벨을 확인하고 카로크는 “사양했다면 후회했겠군요.” 하고 미소 지었다. 황금빛 액체가 유리잔을 빠르게 채웠다. 유스타프와 카로크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느리게 와인을 음미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사냥과 전투에 대한 이야기였다. “라치아에서는 사냥이라고 하면 보통 마수 사냥이죠.” “그럼 내가 보통 사냥에 초대해야겠군. 올해 사냥개들이 괜찮거든.” “그거 기대하죠.” 엘리제가 어깨를 으쓱하고 란에게 말했다. “우리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좋아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아아, 아까 황태자 전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그분의 사생아 있잖아요.” 엘리제가 낮게 목소리를 소곤거렸다. 란도 상체를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벌써 사생아가 두 명이나 있으시다면서요.” “네, 한 명은 어미가 코르티잔이니 뭐 상관없지만, 한 명은 발제 남작 부인이 모친이거든요.” “귀족 부인이요?” “네, 그렇다니까요.” “발제 남작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죠.” “세상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남편이 있을 때 이미 황태자를 상대로 바람―불륜을 했다는 거 아닌가? ‘물론 처녀를 건드리지 않는 게 바람둥이의 미덕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이야기다. “뭐 덕분에 발제 남작도 황태자의 측근으로 지위를 누렸으니까요.” 이 무슨 베르사유도 아니고. 란은 저절로 혀가 차고 싶어지는 걸 눌러 참았다. 프랑스야 왕이 정식으로 정부까지 두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아들이 꽤나 영특한 모양이더군요.” 엘리제의 말에 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사생아지요.” “네, 하지만― 지금 두 분 사이에는 아이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양자로 입적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에요.” “어머, 어머?” 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생아를 정식으로 입적한다고? “맙소사, 숙녀분들이 우리보다 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나누시는군.” 키릭스 후작이 끼어들어 엘리제가 흥이 깨졌다는 듯이 남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리로 가서 남자끼리 이야기나 하시죠?” “남자끼리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유스타프가 말하자 엘리제가 살짝 뺨을 붉히며 말했다. “정말이지, 유스타프 공자님과 결혼하게 될 여자는 행운아일 거예요.” 키릭스 후작이 눈썹을 슥 올리며 말했다. “그게 내 앞에서 할 이야기인가?” “어머? 이미 저는 당신과 결혼한 몸이잖아요. 이런 이야기야말로 유부녀의 특권인 거죠.”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다시는 그런 이야기가 안 되는 게 유부남의 족쇄지요.” “그럼 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 남편의 위엄은 집에 가서 찾아야겠어.” 키릭스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잔을 한 번 더 채웠다. 란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절대로 황태자비마마가 허락하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제가 미로 공작을 만나 본 바로는…… 그 역시도 그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테고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두 분 사이에는 3년이나 아이가 없었잖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란은 갸웃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안 될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황태자비마마께는 자존심에 상처가 가는 일이죠. 미로 공작가의 끝없는 자존심은 유명하잖아요?” “어머? 그런가요?” 란이 호기심을 보이자 엘리제가 “모르세요?” 하고 흥이 나서 이야기했다. “왜, 버턴 있잖아요?” 란은 그게 뭐더라, 하다가 요즘 인기 만점인 경마 경기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 “그게 버턴 백작과 미로 공작이 내기를 한 거거든요. 둘이서 경마 게임을 만들기로 했는데, 이름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경주를 해서 이기는 쪽의 이름을 하는 걸로.” “그럼 버턴 백작이 이긴 거네요.” “그죠. 그게 벌써 100년 전 일인데, 미로 공작가는 그 뒤로 절대로 경마를 하지 않는답니다. 이렇게나 인기인데도요. 그리고 버턴 백작가에 아직도 이를 갈고 있고요.” “100년이나요.” “네.” “엄청나네요.” “그렇지요. 그러니 미로 공녀인 황태후마마도 그 이야기가 나왔다는 걸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성적인 척하지만 기질이 격렬하거든요, 하고 엘리제가 마무리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양자 입적이라.’ 이런 이야기도 오갔었구나. 이건 그녀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원작 시작 전에 관한 이야기는 잘 모르니까. ‘게다가 지금은 변수도 너무 많아져서.’ 적어도 예전에는 라치아 공작가가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일도 없었고, 황태자가 자신을 쫓아다니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제 일이 어떻게 굴러가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정보로 최대한 추론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엘리제가 은근히 소문을 잘 수집하는구나.’ “아니 그런 이야기는 어떻게 들은 거예요?” 궁금해져서 란이 묻자 엘리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다들 제 앞에서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아.”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에게는 사람이 마음을 놓게 하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척하고 있지만,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녀 나름의 위장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굉장하다. “아,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엘리제의 말에 란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글쎄, 조코 남작 부인의 앵무새가 남작 부인 모자의 꽃 장식을 전부 먹어치워 버렸대요!” “어머?” 란이 눈을 둥글게 뜨자 엘리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남작 부인이 추궁하자 ‘정말 나빠! 나빴어! 너무해!’라고 했다지 뭐예요!”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코 남작 부인이 얼마 전에 남작과 부티크에서 싸우면서 어린아이마냥 ‘정말 나빠, 나빴어! 너무해!’ 하고 외쳤다는 건 그 부티크 살롱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서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녀의 앵무새는 유명해서 그 앵무새 목소리가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듯했다. 이야기는 그 뒤로 경쾌하게 흘러갔고, 란은 모처럼 머리를 비우고 하는 대화를 즐겼다. 산더미 같은 딸기를 마지막 한 알까지 먹어치우고서야 일행은 소풍을 끝내고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모처럼의 휴식이었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풍의 효과는 채 일주일도 가지 않았다. 연이어 찾아온 두 사람이 그 원인이었는데 첫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하레쉬였다. 그는 녹색 아치에 도착하자마자 불평을 늘어놓았다. “대체 인간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는 거지? 자기들끼리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어 있으면 답답하지 않은 건가?” 그리고 정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여기는 좀 낫군. 사람 손을 너무 타기는 했지만 말이야.” “칭찬 고맙군요.” “부탁했던 물건을 가지고 왔다. 나를 개인 심부름꾼으로 써먹는 건 그만둬.” 하레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가져온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검이 들어 있었다. 란이 유스타프의 생일 선물로 주문한 것이었다. 란은 침을 삼키고 가볍게 검집 표면을 훑었다. 새하얀 검집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엘프 목(木)으로 일반적인 나무와 질감이 달랐다. 목재보다는 상아 같은 무기질 느낌이 났다. 거기에 우아하게 문양이 새겨져 들어가 있었고 손잡이 쪽에는 라치아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란은 조심스럽게 검을 들어 빼보았다. 백은빛 날이 번쩍였다. 문외한인 란이 보기에도 매우 좋아 보이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란은 깊게 숨을 삼키고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레쉬.” “대금만 제대로 주면 상관없어. 그리고 인간 쪽 세공품도 꽤나 호평이야. 철을 다루는 기술은 우리 쪽에서는 크게 발달되어 있지 않으니까.” “이 검은 철이 아닌가요?” 놀라 란이 묻자 하레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는군. 엘프는 철을 다루지 않아, 우리가 다루는 광물은 ‘쉐브아’야. 마법적인 처리가 필요한 광물이지.” “그렇군요.” 그러니까 마법적인 처리가 필요 없는 값싸고 질 좋은 인간제 철도구가 잘 팔린단 말이지? 하긴 냄비 하나를 만들 때도 마법 처리를 해야 한다면 그건 귀찮을 테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엘프에게는 철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거 아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에 부친다. 굳이 더 일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땅딸보들과의 거래는 잘되나 보지?” 하레쉬의 말에 란은 피식 웃었다. “네, 드워프분들은 말투가 거칠긴 하지만 좋은 분들이세요.” “흥.” 코웃음을 치고 하레쉬는 주머니에서 작은 양피지를 꺼내서 란에게 건네주었다. “물품 대금과 목록이다.” “항상 거래 감사드립니다.” 란은 공손하게 목록을 받았다. 엘프에게서 들어오는 세공품은 엘프 목으로 된 나무 세공품이 많았다. 아니면 유리나 보석류도 종종 들어왔는데, 다들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렸다. 엘프들의 마법 도구는 아직 협상 중이기는 하지만 들어온다면 반향이 굉장할 터였다. 묵고 가라는 란의 예의 바른 말을 하레쉬는 언제나처럼 무시하고는 떠나갔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뜻밖에도 일루미니티 백작 본인이었다. 란은 세 번째 알현실로 향했다. 라치아의 봉신 중 가장 높은 작위를 가진 백작이니,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언제나처럼 사자 갈기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듯한 백작은 들어온 란을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백작.” 말했다가 란이 슬쩍 그의 얼굴을 살피고 물었다. “편히 말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일루미니티 백작이 답했다. 란이 헛기침하고 자리를 권했다. “그럼 앉아, 팔튼 경.” 일루미니티 백작은 그 말에 잠시 란을 바라보았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신다는 게 제 이름을 부른다는 뜻일 줄은요.” “싫으면 무를까?” “가주님은 어디까지나 가주님이시니까요.” ‘네가 말하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는 뜻이라 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팔튼 경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네. 나도 가주보다는 란이라고 불러 주는 편이 좋아.” “그럼 란 님.” 그렇게 말하고 일루미니티 백작이 다리를 꼬았다. 란이 종을 흔들어 들어온 시녀에게 차를 주문한 뒤에 물었다. “원하던 찻잎은 잘 구했어?” “그 찻잎 말입니다만. 왜 그 찻잎을 찾으십니까?” 허를 찔려 란은 팔걸이를 움찔하고 붙잡았다가 놓았다. 그녀는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설마 백작이 파고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당히 신원을 처리하고 손을 뗄 거라고 믿었던 터라, 파고들어 오니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찻잎의 상태가 안 좋은가?” 란의 미간이 살짝 모이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일루미니티 백작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답했다. “상태도 상태지만 질 때문입니다. 뭔가 그 찻잎에 추억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란은 툭툭 팔걸이를 두들겼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잠깐, 이제 신년이 지났지? 아, 제길. 불법 투기장으로 끌려간 건가? 아직 여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신음을 삼켰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갔다. 여기서 그냥 눈감고 있어도 된다. 어차피 루미에는 그 모든 고난을 거치고서 라치아로 오게 되니까. 죽지는 않아. ‘단지 인생이 황폐해질 뿐이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란이 똑바로 백작을 보았다. “있어. 그러니까 꼭 구해야 해.” 팔튼 러드 일루미니티는 잠시 자신보다 한참 어린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딸의 목숨을 구했고 그 값을 치르는 건 당연했다. 만약 란이 그걸 요구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란이 요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호의’였고, 지금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란을 향한 자신의 호의다. 그래서 팔튼은 고민했다. “지금 찻잎이 어떤 상태인지는 아십니까?” “불법 유통되고 있지.” “아시는군요.” “응.” “그래도 말입니까?” “그래도.” 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도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손은 뻗고 싶었다. 백작은 결연한 의지에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그 찻잎을 이용해서 돈을 상당히 버는 모양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란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 찻잎에는 꽃이 붙어 있거든.” “꽃이요?” “응, 한 줄기에서 잎도 나고 꽃도 나잖아? 그 꽃을 먼저 되찾으면 잎은 어떻게 될 것 같아.” 루미에가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렇게 구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동생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 몸이 약한 어린 여동생을 인질로 잡혀서 그는 벗어나지도 못하고 밑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여동생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죽고, 죽고 나서도 그 사실을 숨기며 주인은 루미에에게 더더욱 잔인한 싸움을 요구한다. 나중에 루미에는 여동생이 죽은 걸 알게 되고 주인을 죽이고 그 바닥에서 도망치는데, 거기까지 구르는 것이 참……. ‘투기장에 넘어가기 전이라고 생각해서 여동생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여동생이 중요하다. 란의 말에 팔튼은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란이 문득 불안해져서 말했다. “만약에 그쪽의 인맥으로 부족하다면―” “아닙니다.” 백작이 똑바로 란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쪽에서, 찻잎 구매자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란이 살며시 입을 벌렸다. “구매자를? 어째서?” “그런 쪽에 발을 들였다는, 더러운 약점이라도 하나 잡으려는 거겠지요. 하지만 꽃이라, 알겠습니다. 그쪽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고 팔튼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낮게 물었다. “도련님은 모르시는 일이죠.” “응.” 란 역시 작게 대답했다. 팔튼은 딱히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뒤늦게 차를 들여온 시녀가 당황해 란은 손을 저어 차를 내려놓게 했다.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시녀에게 물러가라고 하고 란은 찻잔에 차를 따르고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었다. 사치스러운 밀크티를 만끽하며 란은 손가락으로 문제를 꼽아보았다. 1. 나의 생존 2. 생존 후 인생 3. 황태자 개새끼 4. 미로 공작가 5. 루미에 6. 엘프와 드워프 사이의 삼각무역 7. 기타 등등 ‘일단 생존은 괜찮아. 유스타프와 약속했으니까.’ 란은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생존 후 인생은…… 가짜 신분이라도 하나 만들어 두는 게 좋을 텐데. 이건 레버리에게 부탁할까? 골든로즈 상단이라면 신분 세탁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레버리는 유스타프의 압박에 굴하지도 않을 것 같다. 나중에 뒤가 털릴 위험도가 낮다. ‘레버리가 바쁘지 않을 때 이야기해야지.’ 그리고 황태자와 미로 공작가. 이 문제는 둘이 하나로 묶여 있는 문제였다. ‘황태자 개새끼. 짜증 나.’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음을 삼켰다. 왜 그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다른 의미로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아 골치 아팠다. ‘역시 황제를 만나 봐야겠어.’ ‘네 아들 단속 좀 하라.’고 한 소리 해둬야겠다. 황태자가 라치아 공작에게까지 껄떡거린다는 건 황실에 좋은 소문도 아니니까. ‘아니면 그냥 라치아로 도망가버리는 수도 있고.’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라치아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마력석만 시장에 자리 잡으면 그녀는 토끼처럼 라치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미로 공작가가 걸리는데…….’ 드반이나 올리비아는 적으로 삼으면 골치 아픈 존재다. 아마 그쪽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게다가 난 황태자비의 독살을 응원하면 응원했지 반대하지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괜히 친근하게 굴었다가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이건 저쪽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루미에는…….’ 루미에……. ‘일단 이건 여동생을 구하고 나서 생각해 보자.’ 불법 투기장은 불법이니까, 여차하면 수도경비대에 찔러서 투기장을 부숴 버리면 되지 않을까? 물론 수도경비대가 알고도 눈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압박하기는 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나?’ 정치적으로 돌려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다. 누군가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정치적 거래는 항상 오고 가는 법. 빚을 지는 것도 그렇다. ‘만약 여동생을 구하지 못하면…….’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엘프와 드워프 사이의 삼각무역이나, 아니면 원작이 시작하며 벌어질 사건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지금 어떻게 할 재간이 없었다. 특히 원작 후의 사건들은 더욱 그랬다. ‘그래도 편지라도 남기고 떠나야지.’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 진짜 토할 것 같아.” “등이라도 두들겨 드릴까요?” 느닷없는 목소리에 란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손에 든 잔이 흔들려 밀크티가 옷에 쏟아졌다. 더더욱 당황해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다가온 유스타프가 냅킨을 들어 그녀의 옷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인기척은 좀 내주면 안 돼?” “꽤 오래 서 있었는데도 모르셔서.” “서 있지만 말고 말을 해 줘.” 란은 그렇게 말하고 얼룩이 생긴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그녀의 젖은 손가락을 닦았다. “다음부터는 주의하죠.” 어쩐지 민망해져서 란은 손가락을 움츠렸다. 유스타프는 순순히 그 손을 놓아주고 시녀를 불러 차를 치우게 했다. 란이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 얼룩 생기겠어.” “버리시죠. 어차피 어머님의 옷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는 정말로 잘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란은 제 소맷부리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이어붙인 흔적 위로 레이스를 달아서 자신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그야 보면 알지요. 색이 안 어울립니다. 누님은 좀 더―” 빤히 유스타프는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부드러운 색이 어울리지요.” “그런가…….” 란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걸 한 번에 알아보냐고요. 귀족의 눈은 다른 건가? 고민하는데 유스타프가 말했다. “누님, 백작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어?” 놀라 란은 어깨를 움찔했다. “그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셨잖습니까?” 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게, 개인적인 일이었어.” “…….” 유스타프는 대답 없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며 란이 말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냥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변명하다가 퍼뜩 란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 따로 백작과 이상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건 아냐! 진짜로!” 린드버그 남작과 손을 잡는 것과 일루미니티 백작과 손을 잡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혹여라도 란은 그가 오해를 할까 봐 필사적으로 말했다. 유스타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 정말?” 놀라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는 비소를 지었다. “네, 누님에게는 정말로 놀라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쩐지 가시 돋친 말이라 란은 다시 움찔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야, 나랑 유스타프는…….”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란은 웅얼거렸다. 그와 그녀는 친한 관계는 아니잖은가? 객관적으로 봐도 위치상 서로를 위협하는 관계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는 게 아니라 했고, 유스타프에게 라치아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안다. 그러니 유스타프는 라치아에 위협이 된다면 란 역시도 사정없이 치워버릴 거다.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물우물하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그녀가 움찔하는 걸 보고 그는 가볍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시니 더는 캐묻지 않겠습니다.” “정말?”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란의 눈에 미심쩍다는 기운이 어려서 유스타프는 웃어버렸다. “뭐, 뭐야?” 당황한 란을 보니 유스타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유스타프는 응접실을 나갔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시녀를 불러 옷을 가져오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얼룩진 옷을 입고 집안을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정말로 황태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드반이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비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방을 서성거리는 제 오라비에게 짧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긴요, 뻔한 생각이지요. 그보다 오라버니, 정신 사나우니 자리에 앉으세요.” 드반이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 돌아섰다. “널 저놈과 결혼시키는 게 아니었다. 아버님이 명령하시지만 않았다면―”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었다. “미로의 성을 가진 여자로 태어난 이상은 가장 좋은 곳으로 팔려가는 게 미덕 아니겠습니까?” “비아!” 드반이 소리를 치고 그녀의 앞에 가서 앉았다. “팔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넌 황태자비야. 곧 황후가 될 거다. 제국 여성의 정점이란 말이다. 그런 자리에 팔려가는 사람도 있나?” 드반이 코웃음을 쳤다. “황태자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황태자비는 너 하나뿐이야. 결국, 그도 미로 공작가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아내에게 잘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알게 될 거다.” ‘그럴 머리가 있으면 좋겠군요.’ 올리비아는 그 말을 찻물과 함께 삼켰다. 그녀는 잠시 라치아 공작을 떠올렸다. ‘그 멍청이가 왜 반했는지 이해가 가.’ 하지만 그 멍청이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라면, 황태자와 치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기도 했고, 반대로 그녀를 납작하게 눌러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못 될 거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란이 제 아랫사람인 걸 확실하게 하지 않는 한은. “그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계집애가 라치아 공작이라니― 제국 공작가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드반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 귀족들은 제 가문에 드높은 자부심이 있었다. 특히 초대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하사받은 가문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미로 공작가와 우슬라 공작가는 전통적으로 라치아 공작가를 터부시했다. 그들은 초대 황제와 함께 피 흘린 동료도 아니며, 성씨를 하사받은 것도 아니다. 자기들이 보기에는 그저 굴러들어온 돌인 거다. 그 풍조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 없다, 하고 라치아를 공격하기는 좀 그랬다. 천 년 가문. 빙벽과 하늘 저택, 문. 라치아는 그 모든 것과 함께 단단히 서 있었고, 모두가 거기에 경의와 시기를 나타낼망정, 라치아 가문을 ‘근본’으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라치아 공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얼음수정으로 인해 굴러들어온 부로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란 로미아 드 라치아’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드반 역시 그 점을 지적하고 나왔다. “지금이야 라치아의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라치아 공자가 차기 가주가 되는 순간 그 여자의 성세도 끝이다. 그러면 황태자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버려지겠지. 그 정도의 여자일 뿐이야.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는 여동생을 위로했다. 올리비아는 오라버니의 위로에 피식 웃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드반은 실제 아버지보다 더욱 그녀에게 아비 노릇을 해주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공녀였을 때의 생활을 떠올렸다. 미로 공작가는 기본적으로 중앙 정치에 가깝고 궁중 귀족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수많은 격식과 정치적 언사들, 그 가운데서 자란 올리비아에게 야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이며,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야심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라치아 공작이 부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런 천한 여자가 뭐가 부럽단 말이냐?” 드반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올리비아가 키득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여자이면서 공작이 되어서 유능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최고는 나여야 하는데.’ 손톱 거스러미처럼, 란의 존재는 올리비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겉으로 부럽다고 순순히 말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올리비아는 그 사람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드반이 말했다. “황태자에게는 내가 한마디 해 두마. 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차를 좀 더 드세요, 하고 올리비아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자신은 라치아 공작처럼 될 수는 없다.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는 게지.’ 그리고 라치아 공작도 그녀보다 위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는 방긋 웃었다. 드반은 그녀의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리고 다시금 속으로 불쾌감을 삭였다. 그 무도회장에서 황태자의 무례함은 상상 초월이었다. 만약 거기서 라치아 공작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에게 장갑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드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생각보다 더 황태자가 멍청하다면.’ 그리고 이런 식으로 미로 공작가를 무시한다면. ‘차기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그리고 제 여동생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라치아 공작 역시 뭔가 조처해야 하지 않을까.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바보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남매는 그렇게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겼다. ✥✥✥ 녹영은 약간의 불안함을 감추며 주군을 바라보았다. 유스타프는 종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람이라고?” “네, 일루미니티 백작이 옛 연줄로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종이에 적혀 있는 말이지만, 녹영은 충실하게 대답했다. 유스타프가 일루미니티 백작이 뭘 하는지 조사하라고 녹영에게 명령한 후 녹영의 첫 번째 보고서였다. 유스타프는 더 깊게 조사하라고 명령하고 싶은 마음과 이만 손을 떼라고 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물었다. “어떤 자인지 아나?” 이건 보고서에 없는 내용이다. 녹영이 고개를 숙이고 애매한 정보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신분이 낮은 자가 아닌가 합니다. 노예 경매장 같은 곳을 돌아다닌다 하더군요.” “노예…….” 그런 사람을 일루미티니 백작이 왜 찾는 걸까? ‘란의 부탁이라면, 왜? 란은 누굴 찾는 거지?’ 게다가 단순히 사람을 찾는 거라면 녹영도 함께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일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과거의 인연이라도 되는 건가.’ 유스타프는 자신이 모르는 란의 과거를 생각했다. 라치아 공작가에 오기 전의 란에게도 친구가 있고 인연이 있었을 거다. 기분이 나빴다. 유스타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종이를 불에 태우며 말했다. “더는 조사하지 않아도 돼.” 녹영은 놀란 듯 그를 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존의.” “대신―” 유스타프는 툭툭 팔걸이를 두들기고 낮게 말했다. “호위를 좀 붙이는 편이 좋겠어.” 녹영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유스타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을 뻗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훑었다. 하지만 같은 페이지만 여러 번 읽어도 머리에 도무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검이라도 휘두를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이라 저택은 고요했다. 가느다란 은색 초승달은 높게 떠 있었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침묵의 정원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리였다. 모든 것이 푸른빛과 검은빛을 띠는 밤의 정원을 가로지르다가 유스타프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누님?” 그가 놀라 다가가자 숄을 두른 란 역시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혼자 뭘 하시는 겁니까? 호위는요?” “어차피 저택 내인걸? 무슨 호위가 필요해. 너야말로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잠이 오지 않아서 검이라도 휘두를까 하고 나왔습니다.” “나도 배워볼까…….” 란이 중얼거려 유스타프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검을요?” “응, 나도 호신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 “누님은 일단 승마를 제대로 배우시는 게 어떤가요?” “자, 잘할 수 있어.” 당황해 란이 더듬자 유스타프가 피식 웃었다. 란이 그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구경해도 돼? 검술 연습?” “누님은 왜 잠이 안 오십니까?” “그냥,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무장까지―” 말했다가 유스타프는 신음을 내뱉었다. “어째서 맨발입니까?” “응? 맨발로 풀이랑 돌이랑 흙 밟는 거 좋아.” 건강에도 좋대. ‘예전에 맨발로 문경새재 넘기인가? 그런 것도 있었고―’ 생각하는데 유스타프가 그녀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란은 놀라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가주님?” 그때 풀숲 뒤쪽에서 허둥지둥 블레인이 나왔다가 유스타프와 란을 보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유스타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는 무슨 일인지?” “아뇨, 그게―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이 새벽에 정원에서 말인가?” 블레인은 더더욱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해서 고개를 숙였다. 유스타프는 그에게 명령했다. “가서 슬리퍼나 가지고 오지.” “존명.” 블레인은 뒷걸음쳐서 자리를 떴다. 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새벽에? 블레인이 여기를? ‘앗.’ 설마 누구와 만날 약속이라도 한 건가? 저택의 시녀 중 한 명과 밀회라도 하는 건가. ‘오, 블레인 경, 제법인데?’ 란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스타프가 걷기 시작하며 물었다. “누구를 만날 약속이 있으신 거였습니까?” 블레인과 만날 약속이었냐고는 묻기 싫었다. “어?” 란은 눈을 깜박였다가 살짝 유스타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무래도 이렇게 해야 그래도 좀 안정감이 있었다. “아니. 없는데.” 유스타프의 굳은 얼굴이 좀 풀렸다. 그가 개인 연무장까지 가서 그녀를 근처 대리석 벤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응, 괜찮아.” 이제 초여름인걸.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기 거치대로 다가가서 연습용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처음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응?” “배우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말에 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그럼 기초 교본 첫 페이지입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하나씩 분절해서 동작을 보여줬다. 동작 자체는 단순했다. 하지만 란이 보기에도 모든 동작이 전부 깔끔하게 떨어져서 우아하게 보였다. ‘으―’ 쉬워 보여도 내가 하면 절대로 저렇게 안 나오겠지. 그가 절반쯤 동작을 보였을 때 블레인이 손에 슬리퍼를 들고 연무장 입구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에게 가서 유스타프가 슬리퍼를 받아왔다. 유스타프의 서슬 시퍼런 눈에 블레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별말 하지 않고 “가보게.” 하고만 말해 블레인은 얼른 물러났다. 유스타프가 슬리퍼를 받아 돌아와서 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란의 발목을 잡고 손수건을 꺼내 발을 닦기 시작했다. “유, 유스?!” 당황해 발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가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슬리퍼를 신으면 안 되지요.” “괜찮아! 이대로 신어도 괜찮아!” 란이 어쩔 줄 모르며 외치듯이 말했다. 그가 “그런가요?” 하고 그녀의 발에 슬리퍼를 신겨주었다. “앞으로는 맨발로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아무리 저택이라고 해도 예의에 어긋납니다.” “으, 으응.” 란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누님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말했다. “너도 이런 거 아무에게나 해주지 마. 정말이지, 유스, 의외로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 괜히 민망함을 감추려 힘주어 하는 말에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에게나 이런 걸 하면 미친놈이죠.” 그 대답에 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그럼 나는 뭔데? 누님? 누님이라서? 평소에는 누님 취급 해주지도 않으면서? 아니, 누님이라고 해도 이런 거 해줘도 되는 건가? 란이 혼란에 빠져 있건 말건 유스타프는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 보여드린 게 제1장이었습니다만, 한 번 더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넘어갈까요?” “하, 한 번 더 볼래.” “좋습니다.” 유스타프는 별말 없이 한 번 더 처음부터 동작을 반복했다. 란은 그걸 보면서 심장이 제발 조용히 뛰었으면, 하고 바랐다. 란은 황태자와 그렇게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무도회를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버리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충분히 광고는 되었으니까요. 괜히 황태자 전하와 엉키는 것보다는 떨어져 있는 편이 낫겠지요.” 황태자는 몸이 안 좋아 칩거한다는 란의 앞으로 꽃다발까지 보냈다. 란은 꽃다발을 삶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았다. 레버리가 미소 지었다. “쇼핑이나 하시며 기분 푸시죠.” “쇼핑이라…… 이상하게 습성이 사치로는…….” 중얼거리는데 레버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사치가 아니라 기본적인 소비 활동을 하시라는 겁니다. 도대체가 그렇게 재산을 쌓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세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돈이 들어왔으니 이제 대대적으로 영지를 수리해야 하는데. 드워프에게 부탁해 둔 갑옷도 어떻게 되었나 확인해야 하고……. ‘영지로 돌아갈까?’ 어차피 더는 할 일이 없다. 보통이라면 무도회를 더 나가서 사교의 성과를 안고 영지로 돌아가야겠지만, 딱히 라치아에 더 사교의 성과가 필요하지도 않고― 게다가 슬슬 정치적 싸움도 질린다. ‘이번 사교 시즌은 내내 녹색 아치에 있을 거라고 유스에게 말해뒀는데.’ 유스타프를 생각하니 발목 부분이 간질간질해져서 그녀는 발을 꼬았다. “참. 레버리,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뭡니까?” 란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적당한 신분 하나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비밀리에.” “어느 정도의 신분이면 될까요.” 레버리는 어디에 필요하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란은 이 눈치가 빠른 하프 엘프에게 감탄하며 으쓱했다. “그냥 적당한 신분이면 돼요. 준귀족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레버리는 별 부탁 아니라는 듯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덧붙였다. “꼭 제국의 귀족이 아니어도 되는 거지요?” “물론이에요.” 어쩌면 제국에서 아예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디 다른 왕국 준귀족 정도의 신분이 적당하겠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일이 풀려서 얼떨떨할 정도였다. 적어도 이런저런 대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얼굴이시군요.” 싱긋 레버리가 웃으며 말해서 란은 제 얼굴을 더듬었다. “티가 났나요.” 레버리가 “그 정도의 눈치는 있지요.”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라치아 공작님. 그러니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뿐이랍니다.” 란이 피식 웃었다. “돌려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제가 생각할 일이죠.” 레버리의 말에 란은 가뿐하게 부담되는 마음을 털어냈다. 언젠가 레버리가 자신에게 뭘 요구할지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란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으리라. “그럼 호의는 감사하게 받죠. 고마워요, 레버리.” “영광입니다, 공작님.” 레버리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답했고 란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외모에 감탄했다. 뭐랄까? 하레쉬를 봤을 때도 그렇고, 엘프들은 이목구비가 완벽하지만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딘가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레버리는 하프이기 때문인지 인간적으로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종족 간의 격차는 다른 세계에서는 겪어볼 수 없는 일이라, 란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레버리, 미인이에요.” 느닷없는 칭찬에 레버리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가주님도 미인이세요.” “에이― 레버리에 비하면 아니죠.” “어머? 정말로 절 띄워주시네요.” 레버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직 어린 가주가 종종 보이는 이런 친근한 모습이 그녀는 퍽 만족스러웠다. 100만 베라트의 신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엘프와의 거래도 잘 이루어지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네, 일부이긴 하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싶어요.” 란의 말에 레버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인간에게 엘프는 그냥 엘프다. 엘프 가운데 다양한 종족이 있고 각자의 문화가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래 봐야 엘프는 다 똑같겠지, 하는 무지한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란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녀의 거래 역시 그 일부에밖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레버리가 찻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가주님은, 인간 같지 않으세요.”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소 지었다. “칭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칭찬이랍니다.” 레버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금 미소 지었다. 이어 그녀는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얼음수정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네.” “이제 저희 독점 기간이 슬슬 끝나가고 있지요.” 란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미소 지었다. “그렇지요. 어떤가요? 100만 베라트의 가치는 있던가요?” “아시면서 물으시는군요. 그 열 배라도 드릴 가치가 있었습니다.” 레버리가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1년 더 연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독점을요?” “네, 물론 얼음수정의 가격은 더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선금으로, 천만 베라트를 지급하지요.” 순간 란은 자신의 경악을 숨기려 애써야 했다. 천만 베라트? 천만? 아까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천만이라니. 게다가 부동산 같은 것도 아니라 현금으로, 천만. 란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자금을 융통할 수 있을 정도로 골든로즈 상단이 거대해진 것이다. 란은 덥석 미끼를 물지 않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고 물었다. “얼음수정의 가격을 얼마나 올릴 생각이신가요?” “슬슬 올리기 시작해서 올해 시장 가격을 20% 정도 올릴 예정입니다. 얼음수정의 매입가는 5% 정도 더 올릴 생각이고요.” 란은 미소 짓고 말했다. “천만 베라트는 필요 없습니다. 대신 골든로즈 상단과 라치아가 거래할 때는 수수료를 10% 낮추는 걸로 하죠.” “가주님.” 레버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라치아 공작을 그만두게 되면, 저희 상단에 와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파격적인 대우를 하겠습니다.”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 황태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무도회에서 란에게 춤을 청했다가 거절당하고, 황후와 황제에게 한마디씩 이야기를 들었다. “제길!”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탁자를 걷어찼다. 흑단목으로 만든 단단한 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쪽팔려서 무도회도 나갈 수가 없잖아!’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무리 루스라 해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후에 드반이 뭐라고 지껄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작가. 고작 공작가다. 위대한 제국의 차기 황제 앞에서 감히! “왜 그 애송이에게서는 연락도 없는 거지.” 유스타프라고 했나? 떠먹여 줘도 먹을 줄 모르다니, 그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루스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직접 친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바마마께 부탁해볼까…….” 루스는 턱을 어루만졌다. 그는 곧 납죽 엎드려서 벌벌 떨고 있던 시종에게 외쳤다. “폐하를 뵈러 가겠다! 서둘러라!” 시종이 재빠르게 기어 물러나자 루스는 흐흐 웃음을 흘렸다. 이 계획은 자신이 생각해도 훌륭하다. 재빠르게 들어온 시녀들이 그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었다. 망토를 걸치자마자 루스는 바로 태양궁으로 향했다. 황제 카르발은 황태자의 알현을 알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못난 아들에게 항상 실망하면서도 카르발은 그걸 큰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똑똑한 아들이었으면 경계했을 거다. 그리고 카르발은 ‘내가 죽을 때까지만 제국이 안녕하다면야.’ 하는 생각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았다.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카르발의 물음에 루스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제게 라치아 공작가를 분열시킬 좋은 안이 있습니다.” “라치아를?” 카르발이 그제야 상체를 아들을 향해 돌렸다. 라치아는 카르발에게 위협이었다. 일단 제국에서 정통성을 얻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그랬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가난한 영지이니 상관없었다. 라치아 전 공작이 빚을 지고 영지를 담보 잡히는 이야기 역시 카르발에게는 흡족한 소문이었다. 그런데, 새 라치아 공작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반전했다. 얼음수정. 그것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해 가는 라치아. 카르발은 그게 매우 못마땅했다. 할 수 있다면 라치아 공작가를 치고 그 광산을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후작과의 영지전으로 청염 기사단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무슨 안이냐?” 그런데 그런 라치아를 분열시킬 방법이라니, 꽤 기꺼워서 카르발은 물었다. “유스타프에게 궁정 출입권을 주십시오.” “궁정 출입권을?” “네, 지금은 그 여자애가 임시 가주라고 하며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사교계 출입도 대신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유스타프에게 궁정 출입권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듯하군.” 카르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콧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스타프도 사교계로 진출할 것이고 란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반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스타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제 세력을 불려놓으려 했겠지만, 유스타프가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도 무산될 테니 둘의 싸움을 더 앞당기는 거다. 카르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다. 내 당장 칙서를 내리마.”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아바마마.” “루스, 너도 제법 대국을 보게 되었구나.” 카르발의 칭찬에 루스는 미소 지었다. 이제 저 칙서를 받게 되면 유스타프는 황태자가 자신의 편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지. ‘그러면 그다음은 그 여자를 나에게 내놓겠지.’ 루스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황제 알현실을 빠져나와 루스는 허둥지둥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당장 이 욕정을 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대낮부터 사창가로 향하라고 명령하는 황태자였다. 그 이야기는 곧장 올리비아에게도 들어갔다. 소식을 전한 시녀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 낮부터 코르티잔을 찾으신다는 말이냐.” 올리비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픽 웃었다. 그녀가 수틀에 바늘을 넣으며 “물러가라.” 하고 명령하자 시녀는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녀와 같이 수 모임을 가지고 있던 코트 레이디(court lady : 여성 황족의 시중을 드는 귀족 여성. 시녀지만 친구 같은 위치였다)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지나갔다. 재빠르게 토리 남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 금방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그 말에 올리비아가 슥 보라색 눈을 들어 토리 남작 부인을 보자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귀부인이 답을 내놓았다. “황태자비마마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지요. 남자들이야 다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다 그런 거니, 황태자비가 자존심에 상처 입을 일도 없다. 올리비아가 빙긋 웃고 그 귀부인을 바라본 후에 토리 남작 부인을 매서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더는 수를 놓을 기분이 아니니, 오늘은 이만 파할까 하오.” 그 말에 재빠르게 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보이고 퇴장했다. 오늘부로 토리 남작 부인은 코트 레이디를 그만두게 될 거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마저 수를 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루스가 자신을 찾지 않고 창녀에게 가준다는 사실이 감사할 정도였다. 의무적인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올리비아는 구역질이 났다. ‘그러면 올리비아, 어떻게 하고 싶니?’ 그녀는 스스로 그렇게 속삭이며 미소 지었다. ✥✥✥ 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칙서를 받았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에게 궁정 출입을 허용한다는 칙서였다. 양피지로 만들어져 금박을 입힌 칙서를 유스타프에게 내밀며 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좋지만, 왜 갑자기 이런 칙서를 보낸 걸까.” “아마 보내면 누님이 당황할 거로 생각했겠지요.” “왜?” 란이 정말로 의아하다는 얼굴로 녹색 눈을 크게 뜨며 되물어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누님이 항상 제가 누님을 죽일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요.” 그답지 않은 직설적인 말에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당황해 변명했다. “항상 걱정하지 않아. 진짜로 믿고 있단 말이야.” “제 약속은요.” “그렇지?” 약속을 굳게 믿고 있다는 말인데, 왜 비꼬는 듯한 뉘앙스지? 란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쪽에서 뭐라고 생각하든 난 차라리 한시름 놨어. 유스타프가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으면 다행이지. 다음에 나랑 같이 갈래?” “나가시려고요?” “응, 유스타프의 데뷔니까 역시 황궁 무도회가 좋으려나. 아, 옷도 새로 맞추자.” 어쩐지 들떠서 상기된 얼굴로 이것저것 말하는 란을 보자 유스타프는 ‘귀찮은 여러 가지 반론’을 접었다. “그것도 좋겠지요.” 단지 그는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황제가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에게 궁정 출입권을 내렸으며, 그가 곧 황궁 무도회에 나올 거란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교계에 쫙 퍼졌다. 황궁 무도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유스타프가 언제 나올까 궁금해했고, 황후 역시 그러해서 슬그머니 란에게 그가 나올 때를 묻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유스타프가 무도회에 가기로 정한 날은 날씨도 야외 무도회에 완벽한 날이었다. 황궁 정원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유스타프가 참석한다는 말이 돌자마자 사람들은 어떻게든 초대장을 얻으려 혈안이 되었다. 황후는 평소보다 높은 참석률에 흐뭇해졌다. 그녀는 골든로즈 상단에 새로운 마법 물품을 가득 주문하고 얼음수정도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렇게 꾸며진 야외 무도회장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반짝이는 빛의 구체들이 무도회장을 밝히며 둥둥 떠다니고,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는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음식들 역시 차가운 것들은 차갑게, 뜨거운 것들은 뜨겁게 마법 물품에 의해 보존되었다. 다른 곳의 무도회처럼 날아드는 벌레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가설된 플로어 위에는 허공에 떠 있는 4단짜리 거대한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샹들리에 빛이 벌레를 쫓아내 준다고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감탄하며 힐끔힐끔 조명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삼 분의 일쯤 아래로 내려갔을 때 라치아 공작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구로 향했다. 출입구에는 커다란 아치가 세워져 있고, 아치에는 온갖 생화와 반딧불 같은 빛 무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완벽한 한 쌍의 장식 인형 같은 란과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가, 모두가 탄식을 내지르는 바람에 오는 민망한 침묵이 살짝 감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케스트라 음악이 그 침묵을 메워주었고,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너무 쳐다봐.” 란이 소곤거리자 유스타프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야 궁금하겠지요.” “하긴.” 란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황후가 우아한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라치아 공작, 유스타프 경.”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란이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하고 유스타프 역시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황후가 호호 웃고 란의 손을 잡았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는 필요 없지 않은가.” “영광입니다. 마마, 이쪽은 제 남동생인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입니다.” 황후가 눈을 반짝이며 유스타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유스타프 경.” 유스타프가 가지고 있는 작위는 기사 작위뿐이었기 때문에 황후는 그에게 ‘경’ 칭호를 사용했다. 유스타프가 황후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가 까르륵 웃었다. “마음껏 즐기시게나. 오늘 그대와 춤추고 싶은 영애들도 많으니 말이야.” 유스타프는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고 황후가 란에게 말했다. “그대도 편하게 즐기게나. 올리비아도 와 있다네.” 헉. 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재빠르게 대답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마마.” 황후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유스타프를 다른 귀족들에게 소개시켜주는 즐거움과 귀찮음을 재보다가 귀찮음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길.” 황후가 그렇게 말하고 물러나자 란은 한숨을 내뱉었다. ‘올리비아가 있다고?’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들어 그녀는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오늘을 위해 정장을 새로 맞춘 유스타프는 그녀가 봐도 새삼스럽게 멋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눈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새파란 눈은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거기에 넓은 어깨에 늘씬한 몸, 쭉 뻗은 팔다리는 아무리 봐도 삽화마냥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차기 공작에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미혼. 사람들이 달라붙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떻게든 유스타프와 정략혼을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어떻게 하지. 올리비아가 지금 유스에게 반하면?’ “누님?” ‘심지어 목소리도 좋아!’ 제 부름에 반응하지 않고 끙끙거리는 란을 보고 그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찡그려도 잘생겼어!’ “누님.” 그가 좀 더 힘주어 그녀를 불러서 란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 으응?” “한 곡 추시겠습니까?” 란은 피식 웃고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여전히 못 추는데.” “알고 있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가볍게 플로어로 인도했다. 야외 무도장 가운데에 만들어진 가설 플로어 위에는 이미 춤추고 있는 몇몇 쌍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로 능숙하게 들어간 유스타프가 그녀를 살짝 잡아당겼다. ‘와―’ 란은 저도 모르게 놀라 숨을 삼켰다. 신년회 때와 또 달랐다. 손도 훨씬 커지고 키나 어깨가……. ‘어라? 유스타프가 이렇게 춤을 잘 췄나?’ 더블릿이 아무리 남자의 리드에 의지하는 춤이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날 거라고 란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발이 가벼워, 스텝도 엉키지 않고 그가 가볍게 그녀를 돌릴 때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유스.” “네.” “나 더블릿에 재능이 있었나 봐.” 그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피식 웃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아니, 이럴 때는 ‘제가 잘 추는 겁니다.’ 해야지.” “이미 알고 계시니까요.” 여유 있는 미소에 어쩐지 란은 진 기분이 되어 입을 비죽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잘 추게 된 거야?” “누님의 춤이 도무지 늘지 않겠구나, 느꼈을 때요.” “……?” 그녀의 의아한 얼굴을 보고 유스타프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플로어 주변에서 수다를 떨던 귀부인들은 부채를 꽉 쥐거나 뺨을 붉혔다. 누가 봐도 차기 라치아 공작의 안주인 자리가 눈부신 왕관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전부터 소문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보는 것과 소문은 전혀 다르다. ‘소문만 그런 거지― 사실은 못생겼을지도 몰라.’ ‘그래도 살인자라니, 너무 야만스럽지 않나요?’ 같은 이야기는 오늘을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게다가 라치아 공작가가 부를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 역시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명예, 돈, 권력. 심지어 젊고 잘생긴 차기 공작. 눈에서 불이 나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란은 약간 불안감을 느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유스.” “네.” “운명의 상대를 기다려.” 뜬금없는 말에 유스타프는 푸른 눈을 깜박였다. 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 언젠가 진실한 사랑을― 아, 말로 하려니까 진짜 민망하네. 하여간 미래의 공작 부인은 내 허락을 받아야 해.” 넌 시나를 기다려야 해. 시나를!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란이 말했다. 플로어를 빙글빙글 돌 때마다 보이는 레이디들의 시선이 이글이글했다. ‘이러다가 유스가 엉뚱한 여자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에 란은 말을 했지만, 하고 나니 그야말로 면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슬쩍 유스타프의 눈치를 살피니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고 변함도 없었다. 단지 파란 눈이 빤히 그녀를 살피듯 보고 있어서 란은 어깨를 움츠리며 덧붙였다. “아니, 물론 유스 마음이기는 하지만―” 중얼중얼하자 그가 후― 가볍게 한숨인지 뭔지인지를 내뱉고 말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눈을 내리고 다시 꿍얼거리는 란을 보며 유스타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깊은 한숨이었다. 란은 그 한숨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말했다. “딱히 유스에게 압박을 넣으려는 건 아니야.” “당분간은 결혼 생각 없습니다. 누님께서 없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맞아. 아직 결혼 생각 하기에는 이르지.” 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유스타프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어서 란은 웃음을 지웠다. ‘으, 나 좀 싫은 시누이 같았어.’ 란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 “네.” “그냥 내가 한 말 다 잊어.” 하지만, 난 단지 시나랑 너랑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 유스타프는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가까이 당겼다. 느닷없이 가까이 끌려가서 란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얼굴 하면 다들 싸웠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말에 얼른 란은 미소를 지었다. 연주가 끝나자 유스타프는 플로어 밖으로 그녀를 인도한 후에 물었다. “뭔가 마시시겠습니까?” “어? 아니― 아, 리제.” 키릭스 후작 부인이 아는 척을 해서 란은 얼른 부채를 펼쳐 그녀를 아는 척했다. 엘리제가 웃으며 다가와 인사하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유스타프 경.” “오랜만입니다. 후작 부인.”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해 엘리제는 빙긋 웃었다. “후작님은요?” 란이 묻자 엘리제가 부채로 입가를 툭 치고 말했다. “귀찮다고 오늘은 안 왔어요. 정말이지, 모처럼 유스타프 경의 데뷔일인데 말이죠.” “그건 챙겨주지 않으시는 편이 감사한데요.” 유스타프가 중얼거려 엘리제가 “어머?” 하고는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유스타프가 대답하는데 금방, 키릭스 후작 부인의 지인들이 다가왔다. 미혼인 아가씨거나, 결혼 적령기를 앞둔 딸을 둔 귀부인들이었다. 어찌나 눈을 반짝거리며 제 소개를 하는지 중간에서 소개해주는 키릭스 후작 부인이 약간 밀릴 정도였다. ‘우와, 굉장하다.’ 란은 질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야 유스타프가 멋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점점 둘러싸며 밀어내기 시작하는 아가씨들에게서 벗어날까, 하고 슬며시 그녀가 뒷걸음치는데 유스타프가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딜 가십니까?” 그의 물음에 란은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아니, 그냥 음료수를 좀 마시려고.” 유스타프가 “제가―” 하고 운을 떼자 순식간에 아가씨들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여서 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내가 가져올 수 있어.” 유스타프는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고, 란은 후다닥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니 가관이었다. ‘굉장하다.’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유스타프는 한눈에 보였다. 그가 여자들보다 키가 훌쩍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란은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한 잔 따랐다. ‘맛있다.’ 적당히 새콤달콤한 레모네이드는 아주 차가워 유월 밤에 어울렸다. “라치아 공작.” 누가 말을 건 건가 하고 돌아보니 정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황자 저하?” 라벨이었다. 라벨이 피식 웃고 말했다. “그렇게 놀란 얼굴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아뇨, 그게― 이런 파티에 오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물론 그렇지만, 라치아 공작 영식이 나온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안 갈 거면 초대장을 달라고 청하기에 와 버렸지.” 라벨의 말에 란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저하라면 초대장을 주고 그냥 오셔도 되었을 텐데요.” “그렇지만 그러기 싫어서.” “상대가 누군지 안됐군요.” 란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자 라벨이 마주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부하가 상사의 권위에 기대려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지.” “사적 영역에서는요. 하지만 그런 재미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란의 말에 라벨이 약간 놀랐다가 “그렇군.” 하고 미소 지었다. “그래서 녹색 아치는 모두 제복을 입힌 건가? 재미있는 발상이었어. 기사단에서 제복을 지급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녀 모두에게 제복이라니.” “다들 좋아해 주던걸요.” “당연히 그렇겠지. 게다가 고급 옷감이라면서? 라치아의 부가 얼마나 쌓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아.” “관심 없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정치에. 란의 말에 라벨이 씁쓸하게 웃었다. “없어야 하니까.” 그 말에 란의 얼굴에서 놀리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 라벨은 웃었다. “그대는 도무지 소문 속의 그 수완 좋은 라치아 공작 같지가 않아.” “그건 저하께서도 마찬가지인걸요. 이렇게 저희가 다정히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찌 비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라벨의 호박색 눈이 온기를 머금었다. “글쎄, 어떻게 비치려나?” 둘이 잠시 마주 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분이 사이가 좋은지는 몰랐군요.” 라벨과 란이 거의 동시에 상대를 돌아보았다. “형수님.” “황태자비마마를 뵙습니다.” 란이 치맛자락을 잡고 깊게 무릎을 굽혔다. 올리비아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백은색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땋아 올린 뒤 다이아몬드 장식을 달고, 우아한 은회색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보라색 눈은 웃음을 머금고 있지만, 머릿속은 재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터. 라벨이 웃으며 말했다. “녹색 아치 정원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나? 저에게는 초대장이 온 적이 없는데요.”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란이 순간 대답할 말을 망설이는데 라벨이 먼저 대답했다. “제가 정원을 보고 싶다고 부탁했거든요.” “저하께서 그런 데에 관심이 있으신 건 몰랐군요.” “책에 있는 묘사만 보면 실물도 궁금해지기 마련이죠.” 라벨의 대답에 올리비아는 “그렇군요.” 하고 빙긋 웃었다. “유스타프 경은 인기가 좋네요.” “저도 놀라고 있던 참이랍니다.” “저런 피도 섞이지 않은 동생이 있으니, 란도 설레겠어요.” 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는 걸 간신히 눌러 참으며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올리비아는 허를 찔린 듯 움찔했다. “안 그래도 저하께서 라치아 공작은 결혼하기 힘들겠어, 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말에 라벨이 부러 큰 웃음을 터트린 후 말했다. “내가 그랬었지.” 올리비아 역시 부채를 펼치며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듯 웃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라벨이 웃음이 끝나기 전에 얼른 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란이 얼른 그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기꺼이요.” 올리비아에게서 멀어지며 라벨이 속삭였다. “찔릴까 무섭네.” 란은 ‘저도요.’ 하고 맞장구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둘은 서로 인척이다. 맞장구를 삼키고 대신 그녀는 실제적인 고민을 말했다. “저 춤 잘 못 춰요.” 라벨이 피식 웃었다. “시험해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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