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대현자 이브리아
Chapter 3. 대현자 이브리아
하늘 저택의 무너진 부분은 다행히도 본관은 아니었기에, 일행은 본관으로 모두 이동했다.
유스타프가 뒷일을 하는 사이 란은 꼼짝없이 침대에 갇혀 있었다. 란 역시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기 때문에, 침대로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안녕.”
이브리아를 보고 란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허공을 보고 낮게 말했다.
“제발 평범하게 잠들 수는 없는 건가요?”
“자고 있잖아? 그냥 꿈이 좀 특이한 거지.”
이브리아의 말에 란은 팍 인상을 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고 하고 싶은데-”
“못 나가는 거 너도 알잖아.”
“알죠.”
“몸을 가진 쪽이 더 유리하다니까? 내가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프하니아스라니.”
‘사고방식의 유연함이,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르다니까.’ 하고 이브리아가 투덜거리는 걸, 란은 기가 차서 바라보았다.
자기 몸을 빼앗아서 죽을 때까지 써먹으려고 했던 뻔뻔한 인간이, 이제 와서 또 태연하게 못 빼앗아서 아쉽다고 말하고 있다니.
란은 앞이마를 꾹꾹 눌렀다. 다른 자의 기억과 감정이 밀고 들어오는 걸 방어하는 건 힘들었다.
기억은 자기 자신이다.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고 해 보자. 그런데 다음 날, 그 놀이공원에서 부모님께 뺨을 맞은 기억이 난다.
그러면 공원에 갔던 기억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브리아의 기억 역시 란에게 그런 식이었다. 그게 원래 기억이 아니고, 사실이 아니고, 내 기억은 이거고, 그건 가짜 기억이야.
하고 분리하며 싸우는 일이라니.
‘하지만 대단하기는 대단하구나. 빙벽의 마력석이 전부 이브리아의 마력이었다니. 마력석의 종류가 셋이었던 것도 드워프, 엘프, 인간 마법의 근원이 그녀이기 때문이야.’
이브리아가 빙긋 웃었다.
근원. The origin.
마법의 시작이자, 근본이자, 원류이자 정점.
지금 엘프와 드워프와 인간의 마법은 다른 계통으로 나눠졌고, 그래서 마력석도 다르게 나눠 쓰게 되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이브리아가 말했다. 이제 란의 몸을 차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브리아는 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쓰려면 육체가 필요하니 말이다.
란이 눈을 깜박였다가 말했다.
“어둠을 없애는 일이라면 협력할 생각이에요.”
이브리아가 짙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 일이지.”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깜짝 놀란 란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왔고, 디모디아가 조심스럽게 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깨셨어요?”
“응, 그리고 진짜 나야.”
디모디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왜 이 시간까지 안 깨웠어?”
“가주님께서 푹 주무시게 놔두라고 하셔서.”
“아, 진짜.”
‘유스타프, 이 녀석.’ 하는 말을 입안으로 삼키며 란은 셔츠에 바지로 옷을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디모디아가 흐트러진 란의 머리를 잽싸게 땋아 내려주었다.
허둥지둥 방을 나가는데 유스타프와 마주쳤다.
“유스.”
“란.”
유스타프가 잠시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아 보이는군요.”
“응, 일시적이었던 거라서 괜찮아. 몸살 난 그런 느낌.”
“피를 토하는 몸살도 있습니까?”
“아니, 지금 느낌이.”
란이 손을 위아래로 팔랑거리며 이제 괜찮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유스타프가 물었다.
“녹음의 관은 괜찮은 거지요?”
이 말은 녹음의 관이 펼치는 결계가 란의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괜찮아. 하지만 시간이 거의 없네. 설마 하룻밤 동안 잔 건 아니라고 해줘.”
“아닙니다.”
당일 저녁이라고 유스타프가 설명해 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들 모여 달라고 해 줄래?”
“회의실에 이미 모여 있습니다.”
“응, 그럼 가자.”
란이 앞서 걷기 시작하는데,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앗, 하고 가볍게 발끝이 들리며 넘어지듯 안긴 란이 그를 돌아보았다가 웃었다.
“돌아왔잖아.”
“그랬죠.”
“나, 유스가 알아줘서 기뻤어. 절대로 그런 거래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
라치아와 제 목숨을 바꾸는 그 거래를. 유스타프가 약간 놀라 물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응. 내가 몸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전부 보고 듣고 느꼈으니까. 덕분에 확 깨어났다니까.”
유스타프가 이를 갈았다. 그 말은 마법을 쓸 때의 타격을 란도 고스란히 느꼈다는 말이다.
대현자니 뭐니, 정말로 염치도 없는 뻔뻔한 여자다.
유스타프는 이브리아를 속으로 매도했다. 란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고 까치발을 해서 턱에 가볍게 입 맞췄다.
“유스를 혼자 두지 않아.”
“네.”
그가 미소 지으며 란을 안은 팔을 풀었고,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씩 웃은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브리아와 이야기를 했어.”
유스타프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드래곤을 물리적으로 죽여도, 어둠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브리아는 어둠을 끝장내고 싶어 해. 그리고 그 비책이―”
란이 힐끗 유스타프를 돌아보았다.
“문 안에 있대.”
란의 설명에 회의실의 모두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만약 발견되면, 어둠은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가 봉인되어 있는 문 쪽으로 움직이는 생명체다.
절대로 가만둘 리가 없었다. 란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도 저 어둠을 물리치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이브리아의 힘은 지금 모두 셋.”
란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빙벽.
녹음의 관.
그리고 문 속의 지팡이.
이 셋 중에서 빙벽만이 순수한 힘이고 녹음의 관과 지팡이에는 이브리아의 사념이 깃들어 있다.
녹음 하나로는 안 되고, 지팡이와 합쳐져야만 제대로 어둠을 잡을 수 있는 마법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난 무조건 가야 해.”
“란!”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녹음에서 내 몸으로 사념이 넘어와 있는 상태니까. 몸이 없으면 마법을 쓸 수가 없고.”
“다시 녹음의 관으로 들어가라고 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하죠.”
“그게 안 되나 보더라고.”
란이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연함에 유스타프는 이를 갈았지만, 란은 설명을 계속했다.
“에메랄드라고 생각했던 그 녹색 보석이 사실은 마력석이라고 해요.”
“마력석이라고?”
녹색 마력석이라는 말에 드워프인 파센의 눈이 번쩍했다.
“그거 꼭 가까이서 보고 싶군. 나도 깜빡 에메랄드인 줄 알았다고! 이 내 눈을 속이다니!”
“감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널 데리고 문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지. 마수들이 돌아올까?”
하레쉬가 샤레이아를 보고 물어 샤레이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둠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그 근처에는 있을 거야.”
블레인이 눈을 찌푸렸다.
“그러면 마수와 싸우며 문으로 가야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까―”
란이 고개를 기울이고 자기 남편에게 말했다.
“삼동작전, 어때?”
“미끼는요?”
“지금 저 녹음의 관 말이야. 이브리아의 사념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브리아 느낌이 남아 있대. 그러니까 저게 어둠에게는 이브리아로 보인다는 거지.”
“그럼 미끼는 누구로 하죠?”
“저 애로 하자.”
활짝 웃으며 란이 손가락을 들어 시나를 가리켰고, 다음 순간 란이 팍 인상을 쓰며 손을 내렸다.
“잠깐, 지금 거 아니야.”
-왜?! 딱이잖아?
‘멋대로 남의 몸을 움직이지 말아 주겠어요?’
란이 머릿속으로 소리 지르자 이브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딱이야.
“제가 할게요.”
시나가 손을 들었다.
“시나!”
루미에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는 걸 떨치고 시나가 말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란을 똑바로 보았다.
“저랑 헷갈렸다고 했잖아요. 영혼 색이 비슷하다고요. 그런데 녹음의 관까지 쓰면 완벽하겠죠. 절 이브리아라고 착각할 거예요.”
란이 당황해 양손을 저었다.
“하지만, 위험해.”
“알아요. 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계속 받기만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하고 싶었다. 시나는 미소를 지으며 슬쩍 덧붙였다.
“이씨 가문의 후계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아요.”
그 말에 귀족들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란은 ‘차원 이동자의 말에 넘어가지 마!’ 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가문의 명예야 이곳에서는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현대에서 김씨 가문의 명예라고 해 봐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고 란은 신음을 내뱉었다.
“너 미쳤어!”
대신 소리친 건 루미에였다.
“겁도 없이 미끼는 무슨 미끼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게다가 중간에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냐? 끝까지 착각하게 할 거면 내가 적합해.”
―맞아, 맞아.
머릿속에서 중얼거리는 말에 란은 인상을 팍 썼다.
‘당신은 조용히 해요.’
―머리도 검고, 풍기는 냄새가 비슷해. 속을 거야, 어둠은. 쟤로 하자.
‘시나는 돌아가야 한다고요.’
―그래, 하지만 여기서 어둠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되잖아?
란은 신음을 흘렸다.
“란?”
유스타프가 민감하게 반응해 그녀를 부르자 란이 제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아니, 이브리아가 머릿속에서 떠들어서.”
“그 여자가 아직도 란 머릿속에 있다고요.”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번쩍 빛났고 란은 손을 저었다.
“응, 사념이 넘어와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문으로 가면 떨어질 거야.”
시나가 물었다.
“뭐래요? 대현자는?”
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그게 곧 대답이라 시나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내 말이 맞죠?”
“주인님.”
루미에의 주홍색 눈이 그녀를 바라봐서 란은 움찔하면서도 즐거웠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화를 내는 게 더 좋았다.
자유로운 루미에.
하지만 그 생각은 접고, 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유스타프가 지켜줄 거야.”
“란!”
유스타프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란이 말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시선을 끌려면 대장이, 유스타프가 필요해. 없으면 이상하잖아? 이브리아도 물론이고. 아니면 누가 드래곤을 상대해? 나는― 하레쉬와 갈게.
“우리는?”
파센이 눈을 팍 찡그렸다. 란이 웃었다.
“유스타프와 함께 남아 주세요.”
드워프의 달리기와 은밀 기동 솜씨는 믿을 수가 없다.
란이 이어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녹영도 있잖아. 원하면 키리도 데려갈게. 하지만 인원을 많이는 안 데려가. 삼동작전이니까, 나인 척하는 다른 팀 하나가 더 필요해.”
빙벽에서도 시선을 분산할 만한 다른 팀이.
유스타프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회의실 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블레인.”
블레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들었다.
“란을 부탁하지.”
블레인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재빠르게 그가 고개를 숙였다.
“존의.”
“첫 번째― 란, 란이 이름을 지으시죠.”
“응?”
당황하는데 어둠 속에서 녹영의 첫 번째가 걸어 나오며 웃었다.
“제 이름을 란 님이 지어 주시나요?”
“첫 번째로 부르는 건 그러니까.”
란은 눈을 크게 뜨고 녹영의 첫 번째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디서 나온 거야?
“란, 이름.”
유스타프가 재촉해서 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칸, 어때요?”
키리랑 비슷하기도 하고. 란의 말에 칸은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이제 란이 네 주인이다.”
그 말에 란도 칸도, 심지어 블레인도 놀라 유스타프를 보았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녹영은 원래 공작 부인의 거니까. 네 주인이 새로 생기자마자 사라지게 하고 싶진 않겠지.”
칸은 망설임 없이 란에게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유스타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다른 한 팀은 키리에게 맡기지. 원하면 기사단원 중에서 두셋은 차출해도 될 거고.”
유스타프가 차례로 지도에 말을 놓았다. 그 후에 그가 말했다.
“나머지는 전력으로 여기에 드래곤의 발을 묶어 두도록 하지요.”
유스타프가 란을 돌아보았다.
“이걸로 된 겁니까?”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고, 유스타프는 별말 없이 그녀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자세한 내용은 식사 후에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남은 말은 후에 하기로 하고, 일행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단단히 화난 루미에의 뒤를 시나가 부르며 쫓아가는 게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회의실에 남은 건 이제 단둘뿐.
‘아니지.’
“혹시 칸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니겠지?”
란이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웃었다.
“있지요.”
“으음―”
란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물러나라고 하면 됩니다.”
“내가?”
“네. 이제 녹영은 란의 것이니까요.”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정보기관이잖아. 중요한 거고―”
“그러니까 란에게 맡기는 겁니다.”
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런 식으로 제 능력을 믿어 주는 것, 그리고 신뢰해 주는 건 기분 좋다.
“그럼 사양 않고. 음, 그러니까― 10분간 물러나.”
명령하자 조용하다. 란이 갸웃했다. 그녀가 유스타프에게 속삭였다.
“물러났을까?”
“났지요.”
“그럼.”
란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유스타프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란을 생각하면서 제 마음이 평온할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가―”
말을 잇다가 그가 문득 생각난 듯이 낮게 웃었다.
“그러네요. 책이라면 란이 주인공인 거군요.”
“응?”
놀라 란이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자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딱 그렇죠. 란을 주인공으로 해서 전원이 휘말려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 유스타프가 주인공인 게 아니고?”
“아니죠. 지금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란이지요.”
그가 속삭이고 란의 입술에 입 맞춘 후에 말했다.
“그러니 해피엔딩으로 끝날 겁니다. 소설이란 본디 그런 법이지요.”
란이 웃으며 마주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그녀가 머뭇머뭇하다가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살짝 그의 입술을 핥았다가 얼른 떨어졌다.
유스타프의 눈이 좀 더 짙은 빛을 띠었다. 욕망이 서리는 그 눈을 보며 란이 말했다.
“돌아오면 또 데이트하자.”
“공국으로 독립하면 시간도 안 날걸요.”
“그럼 그거 다 끝내고. 둘이 하면 금방 끝나.”
유스타프는 수긍하며 덧붙였다.
“물론 그전에 침실로 들어가서 한 달은 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유스!”
란의 얼굴이 붉어지자 유스타프는 작게 웃었다.
시나는 허둥지둥 앞서가는 루미에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루미에!”
그의 몸이 제동이 걸린 듯 멈춰 섰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그가 당황하는데 시나가 그를 끌고 근처 방으로 들어갔다.
강제로 끌려 들어온 루미에는 기가 찼다.
작은 방은 조용했고, 부드러운 색조로 꾸며져 있었다.
란의 취향이다.
저절로 마음 한쪽이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한숨을 내쉬는데 시나가 그를 벽에 밀어붙이고 쿵, 옆을 짚었다.
“화났으면 말을 해.”
“이미 결정했으면서 무슨 말?”
“루미에.”
“너에게 내 의견이 중요하기는 해?”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내 말도 먼저 좀 들어주면 안 돼?”
“그 얘기 들으면 그 결정 바꿀 수 있는 건가?”
“아니.”
“그럼 내가 왜 들어야 해?”
“루미에가 왜 화를 내는지 아니까.”
“내가 화가 나는 건, 넌 그 중요한 걸 나와 상의도 없이 결정했기 때문이야.”
“아냐, 내가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이야.”
“그래, 그 위험한 일을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결정했으니까.”
“위험하지 않아.”
“미끼가 돼서 드래곤 아가리로 뛰어드는 게?”
기가 차서 그가 시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약간 목이 아픈 걸 느꼈다.
“루미에, 다들 목숨을 걸고 있어. 그리고 그 자리는 내가 제일 적합해. 알잖아,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어둠이 시나를 대현자로 착각해서 이 세계로 끌고 왔다. 그러니 어딘가 그녀와 닮은 점이 있다는 말일 터. 이보다 더 좋은 미끼는 없다.
“그렇다고 네가 그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어! 넌 피해자잖아.”
“그게 싫은 거야. 피해자로 있기 싫다고.”
“그 말이 아니잖아.”
“그 말이지. 난 지고는 못 살아.”
시나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게 나야.”
넌 나의 좋은 부분만을 취할 수는 없어.
시나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루미에를 좋아해. 있는 그대로 루미에가 좋아. 물론, 화낼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면 말없이 가지 말고 화를 내줘.”
시나가 고개를 숙였다.
“루미에와 상의 없이 결정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건 나에게 중요한 일이었어. 화를 낼 만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시나가 그 검은 눈으로 다정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나인 걸 바꾸진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루미에가 루미에인 걸 좋아해.”
란 언니를 좋아하는 루미에 그대로 좋아.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괴로움까지 포함해서 전부.
루미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부터 무거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가 팔짱을 꼈다.
“화를 내도 된다고.”
어깨를 움츠리며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미에가 낮고 빠르게 말했다.
“제정신이야? 미끼? 미끼를 자처하는 정신 나간 얼간이가 어디 있어! 방패 어설프게 다룬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마! 돌아간다고 했잖아! 여기서 장례식을 치를 작정이야?”
시나는 일절 반박하지 않고 얌전히 루미에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퍼붓고 나서 루미에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긴, 가주님이 널 다치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주인님이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 될 테니까.
“그지?”
슬쩍 살아나는 시나가 얄미워서 그는 그녀의 뺨을 잡아당겼다. 주욱 뺨이 늘어나도 “헤헤.” 웃는 걸 보니 더는 화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있는 그대로를 좋아한다라.’
루미에는 빤히 시나를 보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루미에는 제 자신이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과거를 시나가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시나도, 란도 공통적인 것은 ‘내가 네 상처를 낫게 해 줄게.’라거나 ‘바꿔 줄게.’ 하는 오만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자신을 본다는 것.
그리고 그대로도 네가 좋아, 하고 말해 준다는 것.
루미에는 몸을 숙여 시나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가 속삭였다.
“나도 있는 그대로 네가 좋아. 봄날 망아지 같은 내 아가씨.”
✥✥✥
란은 고민 끝에 제 나디움 갑옷을 시나에게 양보했다. 물론 시나는 펄쩍 뛰며 극구 사양했지만, 란은 단호했다.
“드래곤의 발톱이 더 무서워.”
란의 말에 시나는 연신 “하지만, 하지만.”을 반복했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받아.”
유스타프의 말에 거기 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가장 앞장서서 반대할 사람이 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란도 순간 놀랐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갑옷을 시나에게 밀어붙였다.
“봐 봐, 유스도 그렇게 말하잖아.”
“하지만, 그게.”
더듬거리다가 어쩐지 유스타프의 허락에 기가 꺾여서 시나는 나디움 갑옷을 받아들었다.
루미에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기사단원들의 갑옷은 미스릴 합금이다.
그 갑옷도 베는 게 유스타프의 나디움 검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시나가 그 갑옷을 입자 안심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란이 걱정되었다.
‘주인님도 무모한 짓을 하시는데.’
그가 가볍게 입술을 깨무는데 란이 덧붙였다.
“정말 괜찮아, 그리고 내 안의 이브리아가.”
란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어 말했다.
“마법을 쓸 수 있어서 괜찮아.”
“그건 그거고, 란에게는 청염을 드리죠.”
“뭐?”
란이 휘둥그레 눈을 뜨는데 유스타프가 청염을 빼어 란에게 내밀었다. 란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청염은 나보다 유스에게 꼭 필요하잖아! 드래곤을 막을 무기인걸!”
“네, 하지만 저보다는 란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난 이거 쓰지도 못한다고.”
“란.”
유스타프가 시나의 손에 들린 나디움 갑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왜 갑옷을 줘도 괜찮다고, 양보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청염을 받지 않으시겠다면, 그 결정도 무를 겁니다.”
“줬다가 뺏는 게-”
말하다가 유스타프의 눈초리에 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작게 신음하다가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에 반지를 억지로 쥐여 주자 한숨과 함께 받아들었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청염은 반드시 저에게로 돌아오니까.”
란도 저에게도 데리고 돌아와 주겠지요.
뒷말을 알아들은 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서로 무장을 하는 걸 마지막으로 동이 틀 무렵, 란과 블레인, 칸, 하레쉬는 함께 길을 떠났다.
키리가 이끄는 또 다른 미끼가 될 팀은 이미 약간 먼저 출발한 뒤였다.
“어둠 속에 출발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시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란이 고개를 저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안 보이는데, 어둠은 너무 잘 봐. 오히려 빛이 있을 때가 나아.”
시나는 그제야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제 ‘마법을 쓰면 안 되나?’ 하고 란이 조심스럽게 이브리아에게 물었었다.
‘공간이동으로 날아갈 수는 없어요?’
―여기서? 들쭉날쭉한 마력석의 파장이 이렇게 가득한 곳에서? 팔다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면 가능하지. 원래의 나라면 모를까 반쪽짜리로는 계산이 안 돼.
‘당신 마력이잖아요?’
―내가 흡수하기 전에는 아니지.
란은 한숨을 삼켰다.
정말로 몰래 숨어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녹음의 가호가 사라지기 무섭게 어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동이 터오는 빙벽을 등지고, 떠오르는 해마저 어둡게 만드는 새까만 날개를 펼쳤다.
이틀 동안 잔뜩 약이 올라 있는 상태로 어둠은 날아올랐다. 바로 눈앞에 갈가리 찢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가로막혀 빤히 봐야만 했으니, 심지어 그 상대에게 굴욕적인 꼴까지 당했으니 당연했다.
어둠이 날아오는 걸 보며 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렇게 컸던가요?”
“더 커진 것 같군.”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했다. 긴장이 돼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고 시나가 물었다.
“속을까요?”
“속을 거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에 시나는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주변에는 기사와 드워프들이 단단히 무기를 들고 서 있었지만, 드래곤의 정신을 빼놓을 뿐 곧 후퇴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이아몬드 홀로.’
시나는 차원 이동 덕분에 달리기를 잘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란이 주고 간 갑옷 역시 가벼워서 속도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을 터였다.
시나는 가야 할 방향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어제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래도 신경 쓰였다.
“집중해. 온다.”
그의 말에 시나는 훅 숨을 삼켰다. 고개를 들자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커진 어둠이 낮게 저공비행을 해오고 있었다.
“방패 벽.”
유스타프의 말에 드워프와 기사단 모두가 방패로 벽을 만들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양, 어둠이 불꽃을 뿜어냈다.
검은색 불꽃이었다.
파센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방패에 달린 얼음수정의 색이 순식간에 바뀐다. 얼음수정이 완전히 색이 바래고 방패의 일부가 녹아내리고야, 아슬아슬하게 드래곤은 휙 상승하며 선회했다.
샤레이아가 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셰프라.”
그러자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가느다란 빛이 하늘을 가르고 떨어져 바늘 같은 것이 드래곤의 등 위로 박혔다.
드래곤은 분노에 찬 소리를 짧게 내지르고 몸을 털듯이 움직인 후에 다시 날아왔다.
“이브리아아―!”
“뛰어.”
유스타프의 신호에 시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이 몇 개 드래곤에게 맞았지만, 드래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나를 향해 날아갔다.
다음 순간 시나는 뒤에서 누군가가 덮쳐서 같이 구르며 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하는 드래곤의 발톱이 머리 위를 쓸고 지나갔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장신구가 그 발톱에 걸려 올라가 뽑히는 느낌이 나서, 시나는 소름이 돋았다.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시나는 반사적으로 관을 붙잡았지만, 다행히도 관은 다른 핀으로도 고정되어 있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자신을 넘어트린 사람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어나게 했다.
“가.”
목소리를 듣고서야 시나는 그게 유스타프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떨리는 무릎에 힘을 줘서 달리기 시작했다.
목에 걸린 청염이 낮게 울어 란은 몸을 떨었다.
그녀가 청염을 꽉 붙잡고 휙 고개를 돌렸다.
빙벽 중턱에서도 드래곤의 모습은 너무 잘 보였다. 거기에서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님.”
블레인의 부름에 란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미안.”
란은 그렇게 말하고 발에 힘을 줬다. 그녀가 가는 양을 지켜보던 하레쉬가 눈을 찌푸리더니 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등을 내밀었다.
“하레쉬?”
“그렇게 소리 내면서 걸으면 다 들리겠어.”
잠깐 망설이던 란은 곧 그의 등에 업혔다. 망설이고 있는 시간조차 아깝다.
그러고 나자 놀랄 정도로 숲이 고요해진 걸 느꼈다.
바스락바스락 걷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건, 란 자신뿐이었던 거다.
어쩐지 민망해져서 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의 속도 역시 확 올라갔다.
하레쉬는 묵묵히 쫓아오는 블레인을 보며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어머, 이 엘프 너에게 호감이 있나 봐. 세상에, 엘프가 인간 여자를 다 업고 다니네.
머릿속에서 이브리아가 재잘재잘 떠들어서 란은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좀 해요.’
―천 년이야. 천 년 동안 육체 없이 있었다고. 엘프의 좋은 몸을 음미하는 게 어때서?
‘그런 성격이었어요?’
―천 년이면 사람 성격도 바뀌지.
‘델판토 일편단심 아니고요?’
―일편단심? 아, 이런 뜻이군.
‘남의 머릿속 지식을 마구 뒤지지 말아 줄래요.’
―후후, 너도 내 지식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쓰고 보고 있잖아?
‘그건…….’
-내 지식과 네 지식을 생각하면 네 쪽이 훨씬 이득 아냐?
맞는 말인지라 란은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고 이브리아는 다시 조용해졌다.
‘기분 이상해.’
내 머릿속에서 다른 누군가가 떠든다니.
정신병이라고 할 만한 증상 아닌가.
란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레쉬가 멈췄다.
둘러보니 아직 문 근처에 오지도 않은 장소인데―
“난 양팔을 못 써.”
하레쉬가 말해서 란이 갸웃하는데 블레인이 대꾸했다.
“압니다.”
블레인이 앞으로 나서며 검과 방패를 뽑아 들었다.
“보조하죠.”
칸이 그렇게 말하며 어둠 속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뭔가 있나?’
란이 바싹 긴장해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풀쩍 뛰어 하레쉬가 몸을 피하고 블레인이 방패로 상대의 발톱을 막았다.
‘저게 뭐야?’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곤충 같은 것이었다. 얼굴은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맨드릴 원숭이랑 비슷했는데, 몸은 사마귀 같았다.
네 발로 딛고 서 있고 앞발은 칼날 같은데, 키가 블레인보다 더 컸다. 란의 전신에 오한이 내달렸다.
“가십시오.”
블레인이 짧게 말했고, 하레쉬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란은 당황했지만,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가, 같이 하면―”
“저건 저 기사도 이겨. 다른 놈도 같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드래곤은 네가 아니면 안 되지.”
하레쉬의 말에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혀 깨문다.”
하레쉬는 경고하고 속도를 휙 올렸다. 더는 란을 배려하지 않는 움직임이라, 란은 몸이 마구 흔들리는 걸 느끼며 턱에 힘을 주고 그를 꽉 안았다.
자신도 엘프처럼 달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바보 같은 생각이네.
‘그 사이를 못 참고 또 일침이에요?’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니까.
‘알아요. 하지만―’
―만능인 인간은 없어. 있으면 그건 신이지.
‘안다고요.’
―알면 그런 말은 하지 않지.
잠시 침묵했다가 이브리아가 이어 말했다.
―내 멍청했던 과거 때문에 말하는 거야. 난 내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란은 그녀의 후회를 알 수 있었다.
―난 델이 강하다고 생각했어. 나만 괜찮다고 하면 델도 괜찮을 줄 알았지. 하지만…….
이브리아가 괴롭게 속삭였다.
―내가 힘들다고 기댔다면 달라졌을까? 아니면 좀 더 강했다면 달라졌을까?
‘만능인 인간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하지만 난 이브리아잖아.
‘그래도 당신이 신은 아니죠.’
―천 년이 지났어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나.
‘네.’
란의 단호한 대답에 이브리아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다 온 것 같군.”
핫, 하고 숨을 삼키며 란이 고개를 들었다.
‘말로도 30분 걸리는 거리를 이렇게 빠르게?’
하지만 주위를 보니 분명히 이제 검은색이 되어 부서진 은색 아치의 잔해 부근이었다. 란은 그의 등에서 내렸다.
흰색 조약돌 길은 흐트러졌지만 남아 있다.
“뛰어.”
하레쉬가 그녀의 등을 밀며 활을 빼 들었다.
힐끗 돌아보니 까마귀 떼 같은 비행형 마수들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란은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제 달리기 솜씨를 믿을 수가 없으므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 도착해 란은 숨을 삼켰다.
‘무너졌어!’
새까맣게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아 있는 동굴 입구는 무너진 돌로 막혀 있었다.
란은 돌무더기를 움직이려 애썼지만, 그렇다고 큰 돌들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마법 쓴다.
이브리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다.
란은 이브리아가 넘겨주는 지식을 받았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지식이란 자신이 배움으로써 쌓는 거다.
하지만 란은 이브리아가 가진 지식을 제 것처럼 쉽게 꺼내어 쓸 수 있었다.
‘매X릭스의 지식 다운로드가 이런 건가?’
란이 돌무더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시스.”
그러자 돌들이 허공에 떠올라 입구가 드러났다. 란은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쿠쿵―!
무거운 소리와 함께 돌들이 다시 떨어져 입구를 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동굴 안을 채웠다. 밀도 있는 어둠은 그 자체로 공포심을 만들어 냈다.
란은 마법의 여파로 인한, 짧게 전기 충격을 받은 듯한 저릿함에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가 더듬더듬 걷기 시작했다.
‘만약 눈이 먼 적이 없었다면, 지금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목 근처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청염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아!”
그때 발밑에 돌이 걸려 미끄러져, 란은 그대로 쓰러졌다.
아니, 쓰러졌는데 쓰러지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악!”
바닥에 구멍이 있었던 건가?
내장이 울렁이는 감각이 란의 위장을 쓸고 지나갔다. 자이로 드롭을 타는 듯한 추락의 감각.
‘죽는구나.’
이렇게 떨어지면 죽는다.
몸이 그때 딱 멈췄다. 란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사방이 다 암흑이었다.
-근처에 있어.
이브리아의 말에 란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떨어지던 자세니까 어디가 아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발을 뻗으니 바닥이 느껴져서 란은 똑바로 섰다.
“지팡이라고 했죠?”
-응, 지팡이지만 내 사념의 4분의 1이 거기에 있어. 어둠을 봉인하면서 연구하라고 놔뒀지. 지금쯤이면 분명히 방법을 알아냈을걸.
“그리고 당신은 녹음의 관에서 잠들어 있었고요.”
-그래, 필요할 때에 필요한 몸을 얻으려고.
“무서워라.”
-결국 못 얻었잖아.
그런 대화를 하며 란은 걷기 시작하다가 멈췄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이브리아?”
-응?
“아뇨, 당신 말고. 다른 사념체.”
-아.
“이브리아! 이브리아?”
“여기야.”
작은 목소리가 들려서 란은 휙 몸을 돌렸다.
-저거야!
이브리아의 기쁨이 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란 역시 기쁨에 들뜨게 되었다. 그녀가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야.”
“여기야.”
그런데 말이 반복될수록 란은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브리아?”
“여기야.”
“이브리아, 맞는 거죠?”
“여기야.”
란은 침을 삼키고 멈춰 섰다. 그때 시선 끝에 희끄무레한 뭔가가 나타났다.
-저건가 봐!
“너무 작지 않아요?”
란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게 “여기야.” 하고 말하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
청염이 크게 울었다. 란은 그 자리에 발이 딱 붙어 버렸다.
다가오는 것은 이브리아였다.
머리뿐이지만.
루미에는 초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란과 함께 발견했던 비밀 통로였다. 다이아몬드 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독특한 통로.
다이아몬드 홀로 시나가 뛰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루미에는 전신이 바싹 긴장되어 발가락마저 오므라드는 기분이었다. 이어 유스타프가 달려 들어오고, 그 뒤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드래곤이 쫓아 들어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과 문이 부서졌다.
루미에는 드래곤의 몸체가 정확하게 홀 가운데에 왔을 때,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벽에 있는 흰 돌을 꽉 눌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이 미끄러지기 전에 살짝 돌아본 통로의 바닥은 이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거대한 샹들리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드래곤의 몸 위로 떨어졌다.
뾰족한 철창들이 구부러졌고, 몇몇은 박혔다. 드래곤이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홀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을 무지갯빛으로 퉁겨내는 크리스털 조각들이 비산하는 분수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든 게 기묘하게 느리게 보이고,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시나는 홀 벽에 딱 붙어서 입을 벌렸다. 너무 달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어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시나는 제 손목을 당기는 힘을 느꼈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스타프였다. 전력 질주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따라 달렸다.
드래곤이 몸부림치며 검은색 불꽃을 뿜어냈다.
그러다가 유스타프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그에게 부딪쳐, 시나 역시 같이 멈춰 섰다. 그가 뭔가를 조작하자 발밑이 훅 하고 꺼졌다.
불꽃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 끝을 지직 태우는 냄새가 났다.
아래는 푹신한 건초 더미여서 시나는 푹 그 안에 빠져들었다.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니 자신이 떨어진 구멍은 곧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천장에 의해서 막혔다.
“서, 성공한 건가요?”
헐떡이며 시나가 물었다.
머리 위에서는 계속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쿵, 쿠쿵―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천둥이 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래.”
유스타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해서, 시나는 왜 란이 그를 사랑하게 됐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드래곤이 이걸로 죽을까요?”
“설마.”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 시나를 일으켜 세우며 덧붙였다.
“하지만 시간은 벌겠지.”
시나는 제 머리와 옷에서 건초를 털어냈다.
“죽으면 좋을 텐데요.”
“만약 죽는다고 해도, 어둠이 그 시체에 붙어 있다면 계속 움직일 거고.”
그 말에 시나는 소름이 돋았다. 좁고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등불을 든 남자가 달려왔다.
“시나!”
외침에 시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나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무서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루미에가 “내가 뭐라고 했어?”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말을 삼키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무서웠지? 잘했어.”
시나는 눈물이 팍 터지는 걸 느끼며 그의 품에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유스타프가 뒤에서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긴장 풀지 말도록.”
루미에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유스타프를 보았다가 시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걸을 수 있겠어?”
“응.”
시나는 눈물을 그의 가슴에 문질러 닦아내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슬쩍 천장을 올려다보니 아직 울리는 소리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조용했다.
루미에가 물었다.
“대체 뭘 위해서 저런 장치를 만들어 둔 겁니까?”
“뭘 위해서일 것 같아?”
유스타프는 그렇게 되묻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시나가 약간 몸을 떨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집을 부수면 우리 이제 어디서 살아……?”
루미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덧붙였다.
“그건 살아남고 나서 생각해 보자. 뭐 공작님께서 우리를 노숙하게 하지는 않으시겠지.”
시나는 떨리는 웃음을 삼키고는 아직도 머리에 잘 고정되어 있는, 머리카락에 본드로 붙인 것 같은 녹음의 관을 손으로 더듬었다.
“벗겨줄까?”
루미에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는 잠시 그녀의 머리핀을 바라보다가 신음처럼 말했다.
“난 못 하겠다. 이건 시녀분에게 부탁하자.”
“서둘러.”
앞서간 유스타프의 말에 둘은 서로 마주 보았다가 달려가 얼른 통로를 빠져나왔다.
눈이 부셔 시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다.
“세상에…….”
그녀는 부서진 하늘 저택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빙벽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저택은 이제 양 날개 같았던 새하얀 건물이 다 무너지고 본관만 덜렁 남아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덩어리들은 부서진 채로도 눈처럼 빛나서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값비싼 기물을 보면 더욱더.
그리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드래곤 꼬리야?”
“그런 것 같은데.”
흰 돌덩이에 깔려 드래곤의 몸은 대부분 보이지 않았는데, 꼬리만 길게 쭉 나와 있었다.
꼬리 끝은 마치 가시 달린 철퇴 같았다. 그게 미동도 없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드워프 몇몇이 그 꼬리 근처에 서서 떠들고 있었다.
저쪽에서 샤레이아가 미끄러지듯 가볍게 달려왔다.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드래곤은?”
“일단 기절한 것 같아요. 부상도 입은 것 같고요.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요.”
“드워프들은 뭘 하는 거죠?”
갸웃하며 시나가 묻자 샤레이아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고 말했다.
“드래곤 비늘이 얼마나 단단한지 궁금하다고 저러고 있는 겁니다. 제3 시대 이후로는 드래곤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에 어처구니없음이 담겨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꼬리 가시를 잘라서 연구할 기세예요.”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고 ‘위험하니 그만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번개가 치듯 빛이 번쩍했다.
그것도 눈앞에서 바로 친 것처럼 강렬한 빛이었다.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빛에 다들 눈을 깜박였다가 휙 고개를 돌려 빙벽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빛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맙소사…….”
시나가 중얼거렸고, 유스타프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샤레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기둥은 전 대륙에서 다 보이겠군요.”
‘란.’
유스타프는 습관처럼 반지에 손을 가져갔다가, 청염을 란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를 지켜줘.
단 한 번도 무엇을 빌어 본 적이 없었건만, 란에 대한 일에서는 애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유스타프는 깊게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가 보시든가요.”
루미에가 슬쩍 말을 꺼내서 유스타프는 눈을 뜨고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휘파람을 불어 제 병사들을 모으며 말했다.
“란에게 혼나.”
✥✥✥
어둠 속에서도 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보였다. 가면 같은 미소를 띤 얼굴로 이브리아의 머리가 둥실둥실 다가왔다.
‘위험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란은 이가 다닥다닥 부딪치는 걸 느꼈다.
-저게 뭐야…… 저건…….
“이브리아……?”
간신히 폐를 쥐어짜서 묻자 이브리아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주욱 입이 찢어져서 귀밑까지 미소가—
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고, 그 순간 이브리아의 머리가 총알처럼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으아아악!”
란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욕이 저절로 목구멍까지 나오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대로는 못 도망쳐!’
생각과 동시에 란은 마법을 발동시켰다.
“르류디스!”
캉-!
기묘한 금속성과 함께, 란이 만든 배리어에 머리가 부딪쳤다.
캉, 캉, 캉.
“어떻게 된 거야!”
란이 소리를 지르자 머릿속의 이브리아가 허탈한 듯 말했다.
-당한 거야. 어둠에게……. 어떻게-내 사념체가 어떻게 당했지? 어떻게? 저렇게 너덜너덜해져서 미쳐버릴 정도로, 어떻게 괴롭힌 거야?
“델판토.”
어둠이 그를 쥐고 있으니까.
란이 중얼거림에 머릿속 이브리아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란은 그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이를 악물었다.
“그럼 이제 저걸 어떻게 이겨?”
-못 이겨, 나, 나는 5분의 1밖에 안 된단 말이야. 내 지식도, 힘도……. 최상급 정령이라도 부르면 모르겠지만.
“으-”
란은 이를 악물었다. 이름은 안다. 하지만 부르면 치를 대가가—
그때 이브리아의 머리가 사라졌다. 란은 눈을 깜박였다.
‘어, 어디로 간 거지?’
그때 귓가에서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못 들어올 줄 알았지? 못 들어올 줄 알았지? 못 들어올 줄 알았지?”
란은 비명과 함께 정령을 불렀다.
“우라스!”
빛이 있었다.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가 떠오르듯이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가 공간을 내리누르듯 나타나 지배했다.
어둠 속에 홀로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란은 안도해 어깨를 늘어트렸다. 청염이 희미하게 계속 울어 란은 위로하듯 반지를 꼭 붙잡았다.
눈앞에 느닷없이 표범 머리가 드밀어져서 란은 비명을 삼켰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란의 눈을 보고 정령이 물러났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대는 대담한 짓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겁이 많군.”
누구라도 표범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으면 놀랄 거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봤던 이브리아의 머리인 줄 알았다.
“우, 라스……?”
조심스럽게 부르니 표범이, 우라스가 웃었다.
“그래.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물질계가 아닌 곳에 불린 적은 처음인데.”
“물질계요?”
“네가 있던 세계.”
“그럼 여기는요?”
“경계야.”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휙 돌리니 거기에는 이브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가 묘한 웃음을 머금고 우라스를 보았다.
“아버지.”
“엑.”
란이 이상한 소리를 내자 우라스가 웃었다.
“키운 딸이지. 정령은 아이를 낳지 않아.”
“아, 그렇군요.”
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란이 미심쩍은 얼굴로 이브리아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존재하는 거죠? 진짜 이브리아 맞나요? 아니면-”
“여기는 경계니까 존재하는 거야. 네 꿈에도 내가 나오잖아? 하지만 여전히 마법을 쓰려면 네 몸이 필요해. 그리고 두 번째는 그래, 나야. 그 4분의 1과 하나가 됐지. 빌어먹을.”
이브리아는 욕을 하고 양팔로 자신을 감싸듯 안았다. 란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하고, 희미하게 떨기까지 한다는 걸 알았다.
“이브리아. 괜찮아요?”
란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자 크게 흠칫했다. 란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와 등을 토닥거리자 이브리아가 낮게 웃었다.
“델이 갈기갈기 찢기는 걸 봤어. 어둠이 델을 계속, 계속-”
“아, 이브리아.”
란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란은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위로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이브리아가 울음을 터트리더니 란의 품에 푹 안겼다. 란은 깜짝 놀랐지만 계속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란은 드래곤과 싸우고 있을 유스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브리아를 재촉할 수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이브리아는 고개를 들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란의 물음에 이브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떻게 할까.”
란이 눈을 찡그렸다.
“방법 있는 거 맞죠?”
“그래, 하지만-”
이브리아가 자신을 가리키고 란을 가리켰다.
“마법을 쓰려면 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천 년의 고문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란은 숨을 삼켰다. 이브리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물론 네 자아가 붕괴돼도 내 자아는 멀쩡하니까 마법을 쓰면 되기는 하지만. 넌 살기로 결심했다면서.”
“그렇죠…….”
란은 이마를 짚었다. 잠시 망설이다 란은 고개를 들었다.
“하죠.”
“괜찮겠어?”
“아마도요? 게다가 당신도 멀쩡했잖아요.”
“내가 돕지.”
우라스의 말에 란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이브리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당신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랐어요. 가장 적합하기는 하죠.”
“적합이요……?”
“그는 빛의 정령이야. 내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덕분이고. 일종의, 정화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좀먹은 부위는 털어낸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가 세상을 부수겠다고 하고 있었을걸.”
이브리아가 명랑하게 말하고 란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감사하지. 프하니아스, 란 로미아 드 라치아. 그대가 녹음의 관의 주인이라 다행이야.”
이브리아가 그러며 손바닥을 폈다.
“그래도 상당히 괴로울 거야.”
그녀가 낮게 속삭여 란은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라스가 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란은 깊게 숨을 삼키고 이브리아와 손을 맞댔다.
고통이 쏟아져 들어왔다.
란은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신경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마취 없이 신경 치료 받는 고통을 수백 배로 부풀려놓은 듯한 고통과 괴로움과 긴장이었다.
“숨 쉬어요, 란.”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들려서 란은 흐느끼며 숨을 쉬려고 애썼다. 하지만 호흡을 내뱉고 들이마시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흐윽, 흐으윽-”
“그건 란의 기억이 아니에요.”
“유스…….”
흐느끼며 란이 간신히 그의 이름을 내뱉고 동시에 숨을 깊게 삼켰다.
“잘했어요. 천천히, 다시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요.”
간신히 미친 듯이 뛰던 심장 박동이 조금 내려가고 정신이 돌아왔다.
“아파…….”
란이 속삭이자 유스타프가 “당연히 그렇겠죠.” 하고 말해 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황금색 눈동자와…….
란은 작게 웃었다.
“우라스.”
그러자 유스타프의 모습을 했던 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효과가 있었나?”
“있었어요. 엄청.”
란은 그러며 입가를 닦았다. 신경을 갉는 듯한 감각이 아직 남아있지만 지금은 드래곤을 처리할 때다.
“이브리아?”
-그래, 있어.
머릿속에서 이브리아가 답했다. 밀려온 방대한 지식에 란은 파르르 숨을 내쉬었다가 눈을 찌푸렸다.
“시간을 돌려요?”
-그래, 델이 그렇게 되기 전으로 되돌리는 거야. 그러면 되지.
“시간을 되돌리는 건 금기―”
-다른 방법이 없어.
“하지만 이거 너무 무모한데요. 이론이…….”
란이 중얼거리자 이브리아가 웃었다. 란은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저도 이브리아와 비슷한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래. 하지만 내 지식수준으로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인 거야.
“혼자서야 그렇지만. 우라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안 될까요?”
란이 슬쩍 우라스를 돌아보자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당신 딸이잖아요? 한 번 도와주면 안 되나요?”
“안 된다는 걸, 너도 알 텐데.”
우라스의 말에 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모르는 뭔가가 혹시 있을까 했죠. 알겠어요.”
“하지만.”
우라스가 미소 지었다.
“널 죽지 않게 지켜줄 수는 있지.”
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거 고맙네요.”
델판토 한 마리의 시간을 돌리려고 해도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어갈 테고, 고압 전류가 흐르듯이 되면-
‘내 몸이 어디까지 견뎌 줬을지.’
우라스가 뭔가를 던져 란은 그걸 받았다. 작은 동전 크기의 녹색 보석이었다.
“세계수의 가호가 있기를.”
우라스가 그렇게 말하고 날개를 펼쳐서 퍼덕이자 란은 몸이 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어어-?”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몸이 뭔가에 낚아채인 듯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끌려 올라갔다.
-와아, 이거 그거지? 롤러코스터?
‘전 그거 진짜 무섭거든요?’
란이 비명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녀는 문 앞에 나와 있었다. 란은 얼떨떨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왔군.”
“하레쉬.”
란이 그를 돌아보자 하레쉬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레쉬?”
“본인인가?”
“네.”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하레쉬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손바닥 안의 녹색 보석을 꽉 쥐었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뭘?”
“시간을 돌리는 마법이죠.”
란이 빙긋 웃고 보석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샤레이아의 마법진과는 전혀 다른 마법진이었다. 샤레이아가 그림 같은, 별과 달과 해가 있는 마법진이었다면 이브리아의 마법진은 온통 룬문자 같은 마법 문자로 가득한 마법진이었다.
✥✥✥
마법사의 탑은 고함과 비명으로 난리가 났다. 마법사들은 모두 창문을 바라보며 양손을 벌리고 소리를 쳤다.
“세계가 멸망할 거야!”
“이런 미친 마력을 움직이는 게 누구야?! 저쪽에 뭐가 있지?”
“빙벽? 빙벽이 폭발하는 걸까요?”
“어둠!”
“문이 망가진 건가?”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대륙 전체에 있는 마법사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경외와 공포에 사로잡혀 누구는 외치고, 누구는 엎드려 경배했다.
그리고 자기의 마법사가 그런 미친 행동(?)을 하는 걸 바라보며 귀족들 역시 동요에 빠졌다.
라벨 역시 궁정 마법사의 발작(?)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
“궁정 마법사가 미쳤다고?”
“그게,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당황한 시종장이 말하며 덧붙였다.
“현재 모든 마법사들이 다 그 모양이라고 하더군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라벨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시종장이 작게 말했다.
“정말로 종말이 오는 걸까요?”
“설마.”
말하면서도 라벨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궁정 마법사를 만나러 가겠다.”
✥✥✥
쿠릉.
돌 더미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은 움찔하며 꼬리를 주시했다.
돌 더미에서 빠져나온 드래곤의 꼬리가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꼬리를 절단해야겠다고 하던 드워프들도 재빠르게 물러서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크아아악―!”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돌 더미를 뚫고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몸이 엉망이었다.
날개는 찢어졌고, 등에는 샹들리에가 박혀 있었다. 뒷다리 중 하나는 부러진 듯 덜렁거린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드래곤은 꼬리를 휘둘렀다.
몇몇이 방패째로 나가떨어졌다.
“이브리아아―!”
격렬한 분노만 남은 채로, 드래곤은 눈을 희번덕였다.
그때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샤레이아가 그걸 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브리아.”
드래곤은 머리 위의 마법진을 눈치채지 못하고 주변을 바라보며 마구 불꽃과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다 드래곤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거기구나!”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자, 시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건물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서, 본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나와 이동을 위해 짐을 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나도 그걸 돕고 있었다.
시나는 짐을 던지고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드래곤이 오게 하면 안 된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드래곤은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날개는 이미 별 쓸모 없는 듯 보였다.
기사들이 화살과 창을 쏘아 보아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렸다. 훅 하고 끼쳐오는 뜨끈한 숨과 비린내가 느껴졌다.
‘먹힌다.’
시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확 떠밀었다. 시나는 바닥에 넘어져 굴렀다. 그녀의 손바닥과 무릎이 거친 바닥에 미끄러졌다.
“계속 뛰어!”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저릿한 무릎에 힘을 줘 네발로 기듯 비틀비틀 일어나 계속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뭔가 기묘한 소리가 났다.
선뜩한 느낌이 들었다.
달리다 시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입을 벌렸는데 목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루미에가 드래곤의 이 사이에 있었다. 한 손으로는 위턱을, 다리로는 아래턱을 눌렀는데,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몸을 관통한 채였다.
드래곤의 턱이 더 좁혀졌다. 루미에의 팔이 달려 있어야 하는 부분을 지나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발이 먼저 뛰어나갔다.
시나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새하얀 구멍으로 변해서 드래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드래곤이 버둥거리며 땅에 발톱을 박으려 했지만, 흡입력이 원체 강한지라 그대로 몸이 딸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에 박혀 있는 루미에도 그대로 함께 말이다.
“안 돼! 루미에! 루미에―!”
시나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언뜻 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구멍은 드래곤을 삼키고 순식간에 줄어들어 닫혔다.
란은 고개를 들었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고개를 젖혀야 위쪽에서 빨려 들어오는 드래곤을 볼 수 있었다. 란의 손이 두 번째 마법을 그리는데 드래곤이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드래곤의 입에서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다.
사람인데—
마법의 영향으로 아주 천천히,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가 가까워지자 란이 비명을 질렀다.
“루미에!”
-집중을 흩트리지 마.
이브리아가 강제로 시선을 드래곤에게로 고정하자 란은 울부짖었다.
‘안 돼, 루미에, 루미에가-!’
-여기서 어둠을 놓아주면 다 끝이야. 마력이 역류해도 끝이고.
란은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시야가 자꾸만 일그러졌다.
하레쉬가 말했다.
“내가 돌보지.”
그제야 란은 조금이나마 집중할 수 있었다. 이브리아가 손안의 보석을 꽉 쥐며 말했다.
-이거 떨어트리면 마력이 너에게 직격이야. 그러면 어떻게 될지 알지?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아.’
그녀가 두 번째 마법진을 완성하자 빛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하레쉬는 땅에 가까워지자 빠르게 떨어지는 루미에를 받아들어 땅에 눕혔다.
그는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심각하군.’
“어라, 죽기 전에 내 주인님이 마법을 쓰는 걸 보네요.”
창백한 얼굴로 루미에가 멀쩡한 한쪽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란에게 고정되었다.
하레쉬는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정신력에 감탄했다. 지금쯤 기절하거나 고통에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하레쉬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하레쉬는 벨트를 푼 뒤 팔 위쪽을 묶어 지혈했다. 하지만 사실 지혈은 필요 없었다.
죽었어야 할 상처다.
갑옷도 우그러져서 그의 몸을 파고들어 있었고 다리 역시 너덜너덜해서…….
하레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응급처치를 했지만,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저 죽나요?”
루미에가 물어 하레쉬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미에가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그는 란을 보았다. 그녀가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이쪽을 신경 쓴다는 게 보였다.
사랑스런 내 주인님.
사랑하는 내 시나.
두 사람 다 울겠지.
‘어쩐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드래곤을 보았다. 발버둥 치던 드래곤의 크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작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마법에 있어서 완전한 문외한이고 심지어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도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어떤 힘의 파동을 느꼈다.
지금 란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시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지.”
“그리고 릴리에게도.”
“전하지.”
“주인님에게는…….”
루미에는 짧게 숨을 헐떡였다.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찌푸렸다.
“책에 나온 죽기 전 묘사가 틀린 건 아니군요. 주인님껜 전 행복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가 숨을 길게 내쉬는데 마법진이 순식간에 커졌다.
하레쉬는 전신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고, 그 충격은 루미에에게도 전해졌다.
-너 미쳤어?
‘안 미쳤어.’
란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델판토 한 마리만을 대상으로 한 마법이야. 마법진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도, 시간이 되돌려지지는 않잖아.’
-느리게는 가지.
‘그거면 돼. 그거면-’
-너도 알잖아.
‘시끄러워.’
란의 말에 이브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떨어질 때 힐끗 본 것만으로도 이브리아는 그가 이미 사망에 가까운 상태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란도 알고 있다는 거다.
지금 잠깐 유예를 둔다고 해도…….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은 항상 있는 거니까.
이제 코끼리만큼 작아진 드래곤을 보며 이브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때 어둠이 드래곤에게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돌려지자 더는 델판토 안에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이스타리프!”
푸른 불꽃이 허공으로 솟구쳐서 완벽한 모습을 갖췄다. 푸른 불꽃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스타리프가 웃었다.
“원하는 걸 말해.”
증오를 담아, 타오르는 녹색 눈동자로 란이 명령했다.
“어둠을 삼켜 버려.”
“분부대로.”
이스타리프는 답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둠에게 달려들었고, 불꽃과 어둠은 전투를 시작했다.
이제 델판토는 아기 코끼리만큼 작아졌다. 란은 마법을 멈췄다. 어둠과 분리가 되었으니, 더는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든 보석을 떨어트리며,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걸 눌러 참고 루미에에게로 달려갔다.
“루미에!”
루미에는 피로감을 느끼며 란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죽지 마. 부탁이야.”
란은 흐느끼며 그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루미에는 미소 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루미에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을 느꼈다.
“약속 하나만 해 주시겠어요.”
“할게, 뭐든 할게. 할 테니까.”
“시나를 본래 세계로-”
그의 말이 끊어졌지만 란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 꼭 돌려보낼게. 맹세해.”
“죄송, 합니다.”
루미에가 작게 말했다.
“주인님을 위해, 쓸, 목숨인데-”
“아냐, 아냐, 아냐.”
란은 몇 번이나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해?
그는 곧 죽을 거고,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회복 마법은 없는 거야?’
-없어.
이브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며 그녀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살려줄 수 있다고?’
-아니.
이브리아는 제 계획을 보여 주었다. 그의 영혼만을 다른 세계로 넘겨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란은 숨을 헐떡였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루미에, 나 믿지?”
“그럼요.”
“그럼 남은 목숨, 나에게 줄래?”
“물론입니다.”
의아해하면서도 루미에는 미소 지으며 답했고, 란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주홍색 눈이 크게 뜨여졌다.
‘불가항력이었다고, 가주님께…….’
그게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차가운 얼음을 삼킨 것처럼 뭔가가 그의 목구멍을 통해서 퍼졌고, 곧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안 돼!”
깨어질 듯한 비명에 란은 고개를 들었다. 이스타리프가 어둠을 조각내어 삼키고 있었다. 약해진 어둠은 이스타리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 돼, 안-”
어둠의 마지막 단말마는 꼭 쥐새끼의 비명 같았다.
그렇게 어둠을 전부 삼키고 나자, 이스타리프의 몸이 크게 확 부풀어 올랐다.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며 사방으로 춤췄다.
“아하하하―!”
기묘하게 고조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우라스의 목소리만 낮게 들려왔다. 그가 란에게 말했다.
“새로 이름을 붙여라.”
“네?”
“다른 정령을 삼켰으니, 격이 달라졌지. 자아를 가지려면 새 이름이 필요해.”
란은 당황해 이리저리 산개하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어, 음, 그러니까―’
“빨리.”
푸른색, 타오르는, 불꽃, 파랑― 파랑, 파랑―
“시엘(ciel)!”
불꽃이 확 사그라들었다.
푸른빛 안개에서 천처럼 변한 불꽃은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베일이 벗겨지듯,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새파란 머리카락은 이제 부드럽게 휘날리고, 스타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얼굴이 어딘가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는 전과 달리 반투명한 무지갯빛 날개가 달려 있었다.
시엘은 쿡쿡 웃고 손을 뻗어 란의 양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창공의 이름을 붙이다니. 재미있네. 재미있어.”
“파란색……이라서.”
중얼거리고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어둠을 삼킨 푸른 불꽃, 창공을 가르는 날개를 가진 그대. 새 이름을 축하합니다.”
시엘이 히죽 웃었다.
“이래서 난 그대가 좋아. 란 로미아 드 라치아. 혓바닥으로 살아남는 능력은 귀하지.”
“그건 감사하다는 말이겠지.”
중얼거린 말은 이브리아였다. 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반투명한 이브리아가 서 있었다.
“이제 마법 쓸 일은 끝났으니까.”
사념체답게 돌아온 것뿐이야.
“하, 하지만.”
당황해 란이 제 머리를 쥐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브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선물.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걸 담보로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가요?”
이브리아가 쿨쿨 자고 있는 새끼 코끼리만 한 드래곤을 가리켰다. 그녀는 드래곤에게 다가가 몸을 기댔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드래곤을 통과하기만 했다.
“이 아이를 부탁할게. 더 이상 델이 아니지만, 소중한 내 아이야.”
“물론이에요.”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브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브리아가 말했다.
“차원 이동문을 열려면 지금이야. 대규모의 마법을 써서 빙벽의 마력석들이 전부 공명하고 있는 지금.”
란은 깊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트렸던 녹색 보석을 주웠다.
란은 시나를 떠올리고 마법을 펼쳤다.
이윽고 나타난 시나는 울던 중이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다가 란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루미에, 루미에가!”
시나가 란을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나, 나 때문이에요. 내가, 내가 제대로 달렸으면―”
“네 탓이 아냐.”
란이 시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시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하레쉬 앞의 루미에에게 닿았다.
“루미에!!”
그녀가 달려가려는 걸 란이 몸으로 막았다. 소리굽쇠처럼 공명하던 마력석의 공명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걸 란은 느낄 수 있었다.
“시나, 시나!”
“루미에! 루미에! 언니, 놔 줘요! 루미에가!”
란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녀를 막을 수 없어서, 란은 충격 요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루미에는 죽었어.”
시나의 몸이 굳었다. 커다래진 그녀의 눈을 보며 란은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루미에의 시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란이 빠르게 말했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어, 당장 네가 돌아가도록 차원의 문을 열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미안, 나도 알아. 하지만-”
점점 공명이 작아지고 있다.
란은 보석을 쥐고 마법을 쥐어짰다. 스스로도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시간을 돌리는 마법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둥근 타원형의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 너머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
란은 탄식 같은 신음을 삼켰다.
한국이었다.
너무 익숙한 풍경이 그녀의 눈앞을 지나갔다.
란은 깊게 숨을 삼키고 시나의 어깨를 떠밀었다.
“가.”
“하지만, 언니!”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하지만, 루미에는 나 때문에, 아니 나는―”
“여기 남아도 시나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기다리는 가족이 있잖아. 루미에의 마지막 부탁도 널 돌려보내는 거였어.”
란은 스스로가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란은 다시 그녀를 떠밀었다.
“가. 가족이 기다리고 있잖아. 시나야, 만나서 즐거웠어.”
“란 언니, 난. 나는―”
시나는 문 너머를 보았다가 란을 보았다. 란은 그녀를 입구까지 있는 힘껏 밀었다.
“시나야. 돌아가.”
“못 가요!”
시나가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가요, 루미에가 나 때문에-”
차마 그 뒷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시나가 울부짖었다.
“그래도 이렇게는 아니죠, 아니라고요. 적어도 끝이 다 나고서, 언니, 안 돼요, 안 돼요.”
란에게 매달리며 그녀가 악을 썼다.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란의 눈에서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하지만 이제 희미한 울림만 남았다.
만들어 둔 문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란은 초조해졌다.
란이 제 머리에서 핀을 하나 뽑아서 시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다이아몬드가 작게 눈꽃 모양으로 달린 핀이었다.
“우리는 널 잊지 않을 거야.”
“언니―”
“여기서 더 뭘 하려고? 넌 이제 아무것도 더 할 게 없어. 내가 약속할게. 분명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분명히.”
“정말이죠?”
“그래. 더는 못 열고 있어. 빨리.”
란이 힘껏 그녀를 밀었다.
“가, 빨리! 루미에를 위해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시나는 반대쪽으로 발을 내밀었다. 시나의 모습이 사라지자 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뱉은 숨결을 따라 밝은 빛이 반짝거리며 닫히는 공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걸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훅―
모든 소리가 점멸되었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시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 쌓인 지리산.
익숙한 산길.
그녀는 옷을 어루만졌다.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듯한 옷차림이었다.
‘뭐지?’
분명히 방금까지 그쪽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아래쪽에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한국어다.
시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뭔가가 얼굴을 찔러 보니, 란이 주었던 핀이었다.
멍하니 그 핀을 바라보다가 시나는 울기 시작했다.
✥✥✥
연속으로 거대한 마법을 쓴 터라 란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는 손바닥 안의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파직—
그러자 거짓말처럼 가볍게 금이 가더니 보석이 깨졌다.
‘고마워.’
그동안 그녀가 받아야 할 데미지를 대신 받아주었다.
-잘했어.
이브리아가 말해 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더듬더듬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좋은 곳에 태어나겠죠? 그래서 좋은 부모님 밑에서, 좋은 가족들이랑, 여기서는 못 누렸던 거 다 누리고 살겠죠? 그렇겠죠?”
싸움도, 전쟁도, 신분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그럼. 아마 기억도 가지고 다시 태어나게 될걸.
“그거 좋은 걸까요…….”
-그래야 다시 만나는 거 아냐?
이브리아의 말에 란은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리아는 이제 거의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그녀가 살짝 웃고 자신의 드래곤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부탁할게.”
“네.”
“내 드래곤. 그냥 새끼 드래곤이야. 이름은 새로 붙여줘. 아까 보니 이름 짓는 솜씨가 그럴듯하던걸.”
“드래곤은 뭘 먹죠?”
저도 모르게 되묻자 이브리아는 웃었다.
“그냥 큰 개랑 똑같아.”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길러 줄 거야?”
“그가 떠날 때까지는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리아가 웃었다.
그녀가 허공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다 그녀에게 빚을 졌어요.”
란은 어디로 말하는 거지?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엘이 방긋 웃어 보였다.
이브리아가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원하는 게 있어?
란이 눈을 굴렸다가 말했다.
“북쪽 바다로 통하는 길이요.”
이브리아는 크게 웃고 “좋아.” 하고 명랑하게 말한 후에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란이 놀라 “이브리아!” 하고 외쳤지만,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대신 지팡이가 하나 서 있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란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지팡이를 어루만지자 지팡이는 재가 되어 흩어졌다.
“끝났군.”
하레쉬가 다가와 말했다. 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힘을 다했으니, 사라진 거지. 이제 이브리아도 평안히 다시 별의 강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시엘이 웃었다.
“맞아. 그러니, 아까 명령한 대가를 받아 볼까?”
“뭐라고?”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말이 나왔다.
아니, 자기가 말하라고 해 놓고서는!
시엘이 빙긋 웃고 그녀의 목에 걸린 반지를 쿡 찔렀다.
“이스타리프로서의 계약은 끝났지만, 다시 시엘로서 계약하고 싶군. 앞으로 다시 천 년. 어때?”
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엘은 빙긋 웃고 그대로 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란은 반지를 꼭 붙잡았다. 푸른 보석 안에 불꽃이 가볍게 춤추는 것이 보였다.
란이 고개를 들자 귓가에서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대에게 내 나름의 보상을 해야겠군. 하지만 일단은―”
우라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돌아가게.”
하늘 저택은 조용했다.
드래곤이 사라지고, 잠시 뒤 시나도 사라져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가 초조하게 빛기둥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확실한데.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빙벽의 빛기둥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파센이 빛기둥을 노려보다 샤레이아에게 말했다.
“끝나가나?”
샤레이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 하고 짧게 말했다. 그녀는 저쪽에서 진동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거대한 폭포나, 끝없는 낭떠러지를 볼 때 느끼는 그런 떨림.
외경.
하지만 그 마력이 점차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그제야 그녀는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이내 빛기둥이 완전히 팟 하고 사라졌다.
유스타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데 그의 앞에 새로이 빛기둥이 떨어졌다. 놀란 로스가 “주군!” 하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란.”
그가 작게 그녀를 부르며 기둥 안으로 손을 넣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이 갈라지듯, 빛이 그의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란이 그의 손을 잡았다.
유스타프는 그녀를 획 끌어당겨 기둥 안에서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란이 그의 품에 푹 안기자 기둥이 사라졌다.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안녕, 유스.”
유스타프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 란은 파고들 듯 그를 더 꽉 안았다.
란은 유스타프에게 루미에에 대해서, 시나에 대해서 몽땅 다 말하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운 뒤 기진맥진해져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란이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어.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는데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내려놓으며 제 등 뒤로 돌려 란은 놀라 ‘뭐지?’ 하고 보았는데, 눈앞에 커다란 표범 발이 있었다.
발만 해도, 란의 키쯤 될 것 같은.
고개를 들어 올리니 30층 높이는 되는 크기의 표범…….
‘우라스?’
놀라 란이 입을 벙긋거리는데 우라스 역시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크기 조절을 잘못한 것 같은데.
그러고는 그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란보다 조금 더 작게.
표범은 란을 올려다보며 변명했다.
―물질계는 너무 오랜만이라.
“여긴, 어떻게―?”
란이 당황해 말하자 우라스가 무너진 저택을 보며 말했다.
―복구할 건 하려고 말이지.
그가 눈을 찡긋하고 여섯 장의 날개 중 두 장을 펴서 펄럭이자 반짝이는 은색 빛 가루가 폭풍처럼 퍼져 나갔다.
빛 가루는 부서진 저택을 감쌌고 천천히 저택이 다시 조립되기 시작했다. 우라스가 말했다.
―뭐 변화 줄 곳이 있나?
“그, 글쎄요.”
란이 더듬거리자 우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간 내 취향을 가미하지.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하늘 저택이 다시 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언제 무너졌냐는 듯이, 모든 것이 새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걸로 사람들도 고쳐질 거고.
“정말인가요?”
란이 환하게 웃으며 묻자 우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의 관에 있던 보석도 이제는 못 쓰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우라스가 손을 내밀었다.
―받게.
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우라스가 거기에 커다란 주머니를 떨어트렸다.
안에서 뭔가 구슬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걸로 세공은 저기 엘프나 드워프, 어느 쪽이든 원하는 쪽에 맡기지 그러나.
“감사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거겠지. 하고 란은 주머니를 꽉 쥐었다.
―그리고 이건 이브리아가 부탁한 거네.
우라스가 가느다란 팔찌를 내주었다. 이어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웃었다.
―만나서 즐거웠네. 영원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일은 별똥별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의 즐거움이지. 프하니아스.
“정령님…….”
란이 작게 그를 부르자 우라스가 표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드래곤도 잘 부탁하지.”
아, 참.
드래곤.
란이 당황해 눈을 크게 뜨니 우라스가 마술처럼 품에 드래곤을 안아 들고 내밀었다.
란이 손을 뻗는 걸 저지하고 유스타프가 드래곤을 받아 들었다. 우라스가 란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란은 신음을 삼키며 우라스를 보았다. 유스타프가 뭐라고 하려는데 우라스가 란에게 속삭였다.
“시간을 돌리는 마법은 위험해. 그것과 그것에 관련된 지식을 요구하겠네.”
란은 안도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 알면 자기 영혼과 바꿔서라도 원할 마법이지만, 란에게는 필요 없었다.
우라스는 빙긋 웃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잘 있게, 녹음의 관의 주인이여. 우리의 우정이 계속되길.”
그리고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란은 잠시 시간을 돌리는 마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란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유스타프가 자기 품에서 쿨쿨 자는, 생각보다는 가벼운 블랙 드래곤을 보고 란을 보았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들어갈까?”
힐끗 유스타프가 하늘 저택을 바라보았다.
약간 달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흰색 대리석은 여전히 눈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네. 들어가죠.”
✥✥✥
그 뒤로 한 달은 정신이 없었다.
“지쳤어―”
란이 유스타프의 무릎에 몸을 던지며 말하자 서류를 보던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러실 만하지요.”
란은 그의 허벅지를 베고 휙 돌아누웠다.
유스타프가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정리해 주었다.
“각 나라에서 사신까지 보내고…… 진짜 난리도 아냐.”
“그만한 일이니까요. 드래곤에, 빛기둥에…… 어둠이 다시 부활했다든가…….”
심지어 라치아의 정원에서 파닥파닥 날아다니며 놀고 있는 작은 드래곤을 보면 그걸 꿈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마법사들이 어찌나 라치아 빙벽 10km 라인으로 몰려들었는지…….
모두가 거기에 진을 치고 사건의 전말을 듣기 전에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서, 란은 솔직하게 모든 걸 말했다.
이브리아가 자신에게 지식을 남겨 뒀다는 것만 빼고.
‘이렇게 흥분했는데 그 사실까지 알려주면 노령의 마법사들은 심장마비가 올지도.’
안 그래도 바쁜데 마법사들까지 달라붙을 걸 생각하면 골치 아팠다. 지금도 뭐 기억나는 게 없냐며 쫓아다니니 말이다.
‘나중에 조금씩 생각난 거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부려 먹을까.’
졸업 논문을 원하는 대학원생을 부려 먹는 교수님처럼.
‘너무 악당 같군.’
란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게다가.
“세계수도 있고요.”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저택 구조도 바뀌고!”
“게다가 ‘란의 대로’는 어떻고요.”
“아하하…… 나 그렇게 내 이름을 새겨 놨을 줄은 몰랐어.”
“전 그런 걸 란이 요구할지도 몰랐습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라치아가 생긴 이후로 가장 하늘 저택이 북적거리지 않았을까 하는 시간이었다.
하늘 저택의 구조는 미묘하게 바뀌어서 방들도 커지고 증축이 되었다. 더해서 정원도 많이 늘어났는데, 그중의 한 정원에는 세계수가 크게 자라 있었다.
분명히, 작은 가지를 선물로 받아서 심었던 것인데 어쩐지 새로 생긴 정원 가운데로 옮겨 심어져 있고, 적어도 100년은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세계수가 있는 정원은 따뜻했다.
야외인데도 봄 날씨였다.
그 정원만 벗어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닥쳐왔지만, 그 정원은 언제나 따뜻했다.
거기에 드래곤.
드래곤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지적인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브리아의 말마따나 커다란 개 같았다.
하는 말은 “뀨―”뿐이었고 파닥파닥 날아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이성이 생길 만큼 자라려면 30년은 걸립니다.”
샤레이아의 말에 란은 당분간은 큰 개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거기다가, 란이 이브리아에게 ‘북쪽 바다랑 통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한 말 역시 이루어졌다.
예전에 어둠을 봉인하는 문이 있던 자리-어둠이 나오며 산산이 부서져 닫혔던 곳-에 거대한 문이 새로 생겼다.
높이는 10m쯤 되고 좌우 폭은 25m쯤 되는 거대한 문이었는데,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문 정중앙에는 ‘란의 대로’라고 크게 새겨져 있었다.
란은 그걸 보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문이 꼭 닫혀 있어서 어떻게 여는 걸까? 하다가 우라스가 준 팔찌를 끼고 손바닥을 올리니 스르륵 문이 사라졌다.
문 너머에는 문만큼 커다란 터널이 뚫려 있었다.
머리 위에는 육각형의 마력석이 빼곡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빛을 내뿜고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설마……?’
터널 안쪽으로 병사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며칠 만에 돌아와서 보고했다.
“건너편은 바다로 통하는 곳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항구로 딱 맞을 것 같은 장소였습니다.”
역시나였다.
머리 위의 마력석은 태양과 똑같이 낮에는 밝았다가 저녁이 되면 어두워진다고 했다.
“하지만 완전히 깜깜해지는 건 아니고, 달빛 정도로 빛은 남아 있습니다.”
“터널이라 그런지 기온도 낮지 않고요.”
“숨쉬기에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길도 단단히 다져져 있어 출입이 용이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드워프들은 역시 자신들이 가 봐야겠다며 터널 안으로 들어갔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왔다.
“이 터널을 연구해야겠어!”
“옮겨 와서 살겠네!”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일단 대족장에게 보고를 하러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샤레이아와 하레쉬 역시 세계수와 드래곤을 보고 장로들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물론 그렇게 각자 돌아가기 전에 우라스가 선물해 준 주머니를 열어보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말이다.
란이 주머니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짙은 녹색 보석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아.’
란은 숨을 삼켰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도와줬던 보석이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녹색을 띤 보석을 드워프들에게 보여주니, 파센은 열심히 루페로 그걸 들여다보았다.
“이건 에메랄드는 아닌데…….”
“어디 봐 봐, 네 눈으로 제대로 보겠어?”
옆에 있던 다른 드워프들이 차례로 보석을 빼앗듯이 감식했다.
“녹색인데도 꼭 다이아몬드처럼 무지개색 휘광이 나타나는군.”
“그렇다고 녹색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으음, 정말로 홀릴 듯한 녹색이야. 투명도도 그렇고, 내포물도 하나도 없어. 아름다워.”
그것의 정체를 알려준 것은 샤레이아였다.
샤레이아는 그 녹색 보석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톨이에요.”
“카리톨?”
란이 의아해하며 되묻자 샤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진액이에요.”
드워프들이 그 말에 펄쩍 뛰고 다시 보석을 보았다.
란이 되물었다.
“진액이요?”
“네, 그러니까 일종의 호박인 거죠.”
“아.”
란은 신기한 기분이 되어 녹색 보석을 어루만졌다. 소나무 진액이 굳어서 호박이라는 보석이 된 것처럼 이건 세계수의 진액이 굳어서 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세계수의 가호가 있기를, 하고 말했던 거였구나.’
란은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게 녹색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
“결정화가 된다고도 들었어. 하지만 이 정도의 양이 나오려면 만 년쯤 걸릴 텐데?”
“네?”
단위가 너무 이상해서 란은 입을 딱 벌렸다. 파센이 란의 손을 꼭 잡았다.
“꼭 우리에게 맡겨 주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을 만들어 주겠네.”
샤레이아가 재빠르게 말했다.
“세계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건 우리지요. 저희의 미적 감각이 더 나을 겁니다.”
“흥, 휘어지게만 만들면 우아한 줄 아는 것들이.”
“단순한 걸 예쁘다고 생각하는 분들과는 달라서요.”
옥신각신 다투다가 결국 둘은 란에게 결정을 밀어붙였다.
“어느 쪽이 나은가?”
“맞아요.”
“그, 그게―”
느닷없는 자존심 대결인지라 란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보석을 도로 주머니에 넣은 후에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두 분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 주세요. 양이 많으니까 세트로요.”
“뭐?”
“뭐라고요?”
“이 풀쟁이들이랑 협력이라고?”
“직선밖에 모르는 땅딸보들과요?”
‘으, 말이 심하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샤레이아도 파센도 움찔했다.
“두 분 모두 양쪽의 기술이 궁금하지 않아요? 어떻게 만드는지, 같이 일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샤레이아와 파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여기서는 장인인 파센 쪽이 더더욱 확실히 움찔거렸다.
‘궁금해!’
파센은 정곡을 찌르는 란의 말에 마음 한쪽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엘프의 기술, 궁금하다고. 기술 교환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니까 말이야. 마력석을 쓰는 방법도 완전히 다르고. 게다가 이쪽은 카리톨이라는 걸 몰라봤어. 잘하면 기술을 빼낼 수 있을지도.’
샤레이아도 눈을 가늘게 떴다.
‘드워프의 기술, 확실히 궁금하기는 하단 말이죠. 숲기지로서, 동족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는 게 좋겠지요. 게다가 나디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란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만약 싫다고 하신다면 그냥 인간에게 맡기겠어요. 그편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요.”
샤레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러게. 란이 거기까지 부탁한다면야. 우리도 어쩔 수 없지.”
“협력하죠.”
“협력하지.”
“감사합니다.”
란은 활짝 웃었다.
이로써 그녀의 중재로 엘프와 드워프 사이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말은 앞으로도 이런 일이 필요하다면, 가장 먼저 날 떠올리게 될 거라는 말이지. 게다가 라치아에서 드워프와 엘프의 합작품을 독점.’
이거 참, 남는 장사로군요.
란은 웃음을 삼키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작업실은 따로 라치아에 만들어도 되고, 편하신 곳으로 결정해도 됩니다.”
“흐음, 이쪽으로 오는 게 낫겠지.”
“저도 그편이 나은 것 같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전부 저희 쪽에서 지원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하게 해주세요.”
인간 시종도 필요하겠죠. 분명.
‘어깨너머로 기술을 좀 배우라고 해야지.’
란은 속으로 흐흐 웃음을 짓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어 창백해져서 군대를 이끌고 뒤늦게 도착한 나머지 가신들은, 란과 유스타프의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리고 란의 대로와 세계수, 드래곤을 보며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전투에 참여했던 일루미니티 백작과 와일드 남작은 란스 남작이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것을 위로했다.
그가 겨울에 오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일루미니티 백작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들으면 건국을 위한 선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란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어떤 나라든지 각자 고유의 건국 신화가 내려온다.
“라치아 왕국의 시작은 봉인된 어둠을 물리치고, 이걸로 시작하겠군요.”
“심지어 그게 사실 아닙니까!”
란스 남작이 흥분해 외쳤다. 그는 아쉽다는 듯이 팔걸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요. 이 빌어먹을 날씨만 아니었으면―”
말하고 그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헛기침을 했다. 란 앞에서 비속어를 쓴 게 걸린 모양이었다.
와일드 남작 역시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목까지 붉어져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과의 전투라니…….”
오랫동안 라치아를 섬겨온 봉신들이니만큼 다들 어둠과 문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스스로가 그 전설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란스 남작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짐작 가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전투만이 아니라 빛기둥에, 제2 시대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던 정령이 실제로 등장했다. 물론 청염처럼 사역하는 정령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정령이 실체를 드러낸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그 크기라니.
그리고 그가 선물한 것이 빙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터널이다. 심지어 부서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부상자들이 모두 낫는 기적까지 목격했다.
말하면서도 자신이 허풍선이가 된 느낌이라고 일루미니티 백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일루미니티 백작뿐이라, 란은 ‘역시 라치아 핏줄은 다 저렇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렇게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바쁘게 시간이 흘렀다.
일단 세계수와 대로에 대한 것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드래곤에 대한 것도.
그렇다고 해도 어둠의 봉인이 깨지고 대현자 이브리아와 어둠이 나타났다는 것, 그걸 물리쳤다는 건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란과 유스타프 두 사람은 서류에 파묻혔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편지-를 가장한 외교 문서-에 대응하기 바빴다. 아직 라치아는 제국에 속해 있어서, 타국에서는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제국을 거쳐 이야기했다. 그러니 제국에서도-정확히 말하면 라벨 쪽에서 ‘귀찮아. 빨리 나가 버려.’가 되어서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개인 시간은 거의 없었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가져도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늦은 새벽,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쪽 팔걸이만 장미꽃같이 말린 조각을 해서 높게 해둔 긴 카우치에 유스타프가 기대어 앉아 있고, 그 다리를 베고 란이 방만하게 누워 있었다.
유스타프가 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했다.
“그래서 그냥 공국을 버리고 왕국으로 독립할까 합니다.”
“아, 나도 그거 찬성. 제국 눈치 보느라 공국으로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란이 고개를 끄덕여 유스타프가 “그편이 외교에서도 편하죠.” 하고 덧붙였다.
“응, 격이 맞아야 잘되니까.”
란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며 깍지를 껴서 배 위에 올렸다.
“어쩐지 유스 얼굴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그건 란이 일찍 잠들기 때문이죠.”
란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그, 그야 피곤한걸.”
“밤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침대에서 기다리는 건 잠자는 란뿐이고…….”
유스타프의 중얼거림에 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 하지만 유스랑, 음, 그러면― 이튿날 일할 체력이 안 남으니까.”
“그래서 피하셨다는 겁니까?”
란의 얼굴에 더더욱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아니, 그게, 일부러는 아니고―”
그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서류를 옆에 내려놓고 일어나려는 란의 어깨를 꾹 눌렀다.
“란,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뭔데?”
그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카우치에서도 가능하다는 거요.”
란의 얼굴이 삶은 새우마냥 새빨갛게 변했다. 말도 나오지 않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걸 보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이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 유스?!”
버둥거리는 란을 발목을 붙잡아 유스타프는 한쪽을 카우치 등받이에 걸고, 다른 한쪽은 바닥으로 내리게 했다. 완전히 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다리를 벌린 자세가 되어서 란은 버둥거렸다.
“잠깐, 유스!”
하지만 다리가 걸린 상태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아 고정하고 드레스를 올린 후 속옷을 가뿐하게 벗겨냈다.
드레스가 올라와 란은 이제 유스타프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공기가 닿으면 안 되는 곳에 닿고 있다.
‘말도 안 돼!’
손으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눌러서 어떻게든 시야에 유스타프를 넣으려 했지만, 그의 뜨거운 혀가 아래에 와 닿자 실패했다.
“흑!”
숨을 삼키며 란은 허리를 떨었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유스타프는 편안히 자리를 잡고 그녀의 동그란 붉은 구슬을 혀로 굴리고 입술로 누르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충혈되어 단단히 선 클리토리스를 엄지와 검지로 빙글빙글 돌리며 유스타프는 시선을 내렸다. 활짝 벌어진 입구는 애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며 벌름거리고 있었다. 야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손가락을 밀어 넣자 꼭하고 조여 오며 움찔거린다.
유스타프를 혀로 다시 음핵을 굴려댔다. 머리 위에서 란이 어쩔 줄 모르며 허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살 혀로 표피를 드러내며 굴리다가 강하게 빨아들이면 허리가 퍼덕퍼덕 뛰었다.
“으흑, 응, 유스, 그만, 집무실인데, 아으읏, 사람, 오면-”
“문을 닫고 도로 나가겠죠.”
“그, 흐윽-”
“아직 말할 여유가 있으시네요.”
유스가 약간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빨아올리자 란은 작게 소리를 지르며 벌벌 떨었다. 애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가 살살 혀로 부풀어 오른 애처로운 구슬을 핥으며 말했다.
“아픈 쪽을 더 좋아하시나 보군요.”
“아니, 아냐, 으읏! 으흑, 안 돼, 아으으윽!”
절묘한 혀 놀림에 란은 파들파들 떨며 다시 절정에 올랐다. 애액이 카우치에 얼룩을 만들 정도가 될 때까지 유스타프는 혀를 멈추지 않았다. 새하얀 허벅지 안쪽이 몇 번이나 경련하며 그녀의 입구가 농밀한 꿀을 쏟아냈다.
“유스, 싫어…… 얼굴 보여줘…….”
훌쩍이는 목소리에 유스타프는 제 하체를 바라보았다. 부풀어 오를 만큼 올라서, 약간 통증마저 느껴지는 앞섶은 쿠퍼액으로 젖어서 얼룩이 생겨 있었다. 유스타프는 입술을 가볍게 핥고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란이 양팔을 뻗었다.
“유스-”
유스타프는 빙긋 웃고 등받이에 걸린 그녀의 다리를 카우치 위로 내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주며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란의 다리 한쪽은 여전히 카우치 위에 있었고, 한쪽만 땅에 닿은 상태여서 그녀의 다리는 약간 벌어진 채 그대로였다. 유스타프는 한 손으로 란의 상체를 감싸듯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부풀어 오른 성기를 다시 어루만졌다.
“아, 유스, 잠깐, 이제 그만-”
란이 몸을 비틀었지만 양팔까지 단단히 유스타프의 손에 붙잡혀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다리를 모으려 하자 유스타프가 뒤에서 발목을 걸어서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까 계속되는 애무로 힘이 빠진 다리는 제대로 닫기조차 힘들었다.
집요하게 클리토리스만 애무하던 아까와 달리 이제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란, 완전히 젖어서 뚝뚝 흐릅니다. 이 소리 들립니까? 물소리가 철벅거리네요.”
“힉, 읏, 아아앙-”
란은 일방적인 쾌락에 허덕이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랫배가 찌릿찌릿하다 못해 저릿했다. 란은 허리를 흔들어대며 그의 손가락에 박자를 맞췄다. 유스타프가 손가락을 멈추자 그녀가 울상이 되어 그를 돌아보며 허리를 내려 그의 손가락을 삼켰다.
“유스으…….”
끙끙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조였다가 풀며 란이 허리를 들썩거렸다. 이미 몇 번의 쾌감이 주어졌지만, 아직 유스타프가 주는 절정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미 맛을 보았던 만큼 안타까움이 남아 그녀에게 불을 붙였다.
“사람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조르는 모습을 보이시고. 누굴 불러서 보라고 해야 할까요?”
놀리는 말인지 알면서도 란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유스타프는 웃으며 란의 목 뒤에 연신 입 맞추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귀 뒤에 쪽쪽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의 움직임은 능란하기 짝이 없었다. 결코 절정을 주지 않으면서 그의 손가락은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유스, 유스-”
란이 허덕이며 허리를 흔들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
“원하시면 카우치 위에 무릎을 꿇고 벌려보세요.”
“…….”
“계속 이러시고 계시겠다면야 상관없지만-”
그가 클리토리스를 꾹 잡아당기자 란은 전신을 떨었다. 하지만 절묘한 순간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란은 결국 엉금 기듯이 카우치 위에 무릎을 꿇는 자세로 바꾸었다. 유스타프가 벨트 푸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유스타프는 잠시 새하얀 둔부과 그 사이에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예쁜 붉은 성기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침이 뚝뚝 흘러서 카우치를 적시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바싹 발기한 제 페니스를 그녀의 입구에 슬슬 문지르자 란이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귀두가 그녀의 입구에 슬쩍 걸렸다가 지나갔다. 그 한 번의 동작으로도 그의 성기는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유스타프.”
란이 엉덩이를 좀 더 올리며 그를 돌아보려 애썼다. 유스타프는 천천히 그녀의 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찌걱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그의 것을 빨아들이며 벽이 요동했다. 그는 아주 느리게 달라붙는 안을 음미하며 느리게 움직였다.
란이 참지 못하고 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유스타프가 낮게 웃었다.
“란, 정말로 귀여워요. 이건 란이 먼저 조른 겁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란의 허리를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고 액체가 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하윽, 아, 아앗!!”
이미 달아올라 있었던 란의 몸은 금방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멈추지 않았다.
“힉, 아윽, 아아아-!!”
순식간에 두 번 절정에 달해 란은 경련했지만 달라붙는 질벽 안을 무자비하게 유스타프의 페니스가 쑤셔댔다. 절정에 달해서 볼록하게 올라왔던 내벽들이 다시 귀두에 문질러져서 세 번째 절정에서 란은 흐윽 하고 폐에서 숨이 빠지는 소리만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움찔움찔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팔이 경련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란의 클리토리스를 꽉 눌렀다가 집게와 중지 사이에 껴서 위아래로 훑듯이 문지르자 란이 흐느꼈다.
“아, 그만, 유스, 싫어, 이상해, 이상해져어-”
지나친 자극으로 머릿속이 망가질 것 같다. 그걸 저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혀가 엉키고 사고 능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란은 버둥거렸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몸 위에 제 몸을 겹치듯 해서 귓가에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이상하게 되어 주십시오, 그럼 전 분명히 만족할 텐데 말입니다. 정신 나간 당신을 가둬서 나만 보게 하면, 그리고 나만 볼 수 있다면 지독히 만족스러울 테죠.”
란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귓바퀴가 빨리자 움찔하며 란은 결국 길게 액체를 쏟아냈다. 그 상황에서도 수치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싫어, 나…… 오줌…….”
“그런 게 아닙니다.”
짐승 같은, 웃음 섞인 그의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기분 좋으면 나오는 거죠. 제 정액처럼요.”
그가 그녀의 아랫배를 슥 누르며 속도를 높여 사정했다.
“이렇게 누르면 제가 더 뚜렷하게 느껴집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으신가요?”
“응, 좋아, 좋아아-”
풀어진 혀로 란은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카우치에 엎드린 란의 안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며 유스타프가 말했다.
“전 이제 시작입니다.”
✥✥✥
란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은 어두워 낮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서 아랫배부터 허벅지랑 허리까지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으, 진짜.’
“일어나셨습니까?”
고개를 돌리니 유스타프가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란이 한탄하듯 하는 말에 유스타프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란이 푹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만 이렇게 지쳐 쓰러지고.”
유스타프가 낮게 웃었다. 란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며 베개를 팡팡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상하잖아. 난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움직이는 건 네가 훨씬 더 많이 움직이는데― 콜록.”
목소리를 높이자 갈라져, 란은 기침했다. 유스타프가 얼른 물을 건네주었다.
물 잔을 받아 마시고 란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몇 시야?”
“꼬박 하루 지났습니다.”
“진짜?”
눈이 휘둥그레져서 란이 몸을 일으키다가 제가 알몸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이불을 끌어올렸다.
유스타프는 ‘새삼스레.’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는 란도 귀여워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안 깨웠어?”
“너무 푹 주무셔서.”
“어쩐지 정신이 맑다 했지.”
“계속 얼마 못 주무셨으니까요.”
유스타프가 로브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란이 재빠르게 이불 안에서 로브를 입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유스타프가 설렁줄을 당겨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다.
“혹시 욕실에 들어오려는 거면―”
방어적이 된 란의 얼굴에 유스타프는 웃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밤새 충분히 만족한 유스타프는 란의 뺨에 키스해 주고 느긋하게 마저 일하러 갔다.
‘만족할 만하지.’
전날 밤을 떠올리며 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카우치, 이제 못 쓸 거야.’
란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천이 엉망이 되었으니, 못쓰겠지. 으―
뜨거운 물에 씻고 나서 가볍게 밀크티와 과일로 식사하고 나니 몸이 가뿐했다.
키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새 카우치를 주문했습니다.”
“풋―”
란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서 기침을 해댔다. 키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임의로 비슷한 디자인으로 주문했습니다만, 괜찮을까요?”
“괜찮아.”
간신히 말이 나왔다.
“키리, 너 정말.”
란이 노려보자 키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런 일이―전투에 나선― 있고 난 뒤로도 키리는 태연하게 시녀 제복을 입고 제자리인 양 시녀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소다와 카라는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뭐라고 해야 하나.
든든해하는 것 같았다.
늑대인가 경계했는데 잘 보니 양치기용 보더콜리더라, 하는 그런 든든함이었다.
디모디아와는 약간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디모디아에 대해서는 긴가민가한 듯 보였다. 더해서 워낙 디모디아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는 듯 보였다.
나중에 살짝 소다와 카라만 불러 키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카라가 우아한 미소로 답했다.
“드래곤도 눈앞에서 봤는데 이 정도는요.”
란은 ‘그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 상대가 전설 속 드래곤이라면 뭐든 두려우랴.
‘나도 이제 뭐가 나타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러며 란은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두 사람 다.”
카라는 황공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소다는 젊은 아가씨답게 감동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후로 시녀들은 그녀들 나름의 결속을 다지며 잘 지내고 있었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건 말하지 않고 바꿔도 괜찮아. 아니, 바꿔 줘. 그리고 청구는 유스타프에게 해.”
투덜거리며 덧붙이자 키리가 “그래야지요.” 하고 웃었다.
남들이 보면 기어오르는 시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란은 그런 키리가 좋았다.
남들이 쉬쉬하느라 못 할 말을 키리는 거침없이 하리라.
그리고 란 정도의 자리에 있으면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귀한 존재다.
카라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물론 부부의 사이가 친밀한 것은 좋은 일이지요.”
“맞아요.”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자 빠르게 물었다.
“그럼, 오늘 내 남은 일정이 어떻게 되지?”
“원래는 골든로즈 상단주를 만나실 예정이었습니다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내일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레버리가? 여기 오면 며칠은 묵고 가게 될 텐데, 손님방은 준비가 되어 있겠지?”
카라가 “물론입니다.” 하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그럼 그건 됐고, 다른 일은?”
키리가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저녁에 칸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알았어.”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라고 해도 곧이네.’
란은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을이 지는 하늘과 시계를 번갈아 보니, 확실히 봄이 오는 게 느껴졌다.
‘점점 낮이 길어지니 말이야.’
란은 새콤달콤한 눈딸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봄이 오기 전에, 겨울 추위가 약간 누그러진 그때 나오는 눈딸기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혀 위에서 터지는 달콤함을 느끼며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한 알까지 입안에 넣고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다시 일해야지.”
✥✥✥
칸은 흥미로운 눈으로 제 새로운 주군을 바라보았다.
란은 그가 가져온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중이었다.
녹영이 공작 부인의―곧 라치아 왕비가 되겠지만― 소속이 된 이후로 란은 조직도를 보며 여러모로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가져올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넓네? 진짜 잡다하다.”
란이 가볍게 보고서를 접으며 말하자 칸이 웃었다.
“시험해 보신 겁니까?”
“응.”
어떤 조직을 새로 인계받으면, 어디까지 기능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
태연하게 답하고 란이 말했다.
“녹영을 상단으로 탈바꿈시키려고 생각 중이야.”
“상단이요?”
“그래.”
란이 빙긋 웃었다.
“대륙 어디나 구석구석 다닐 수 있고, 정보나 동향에도 민감하지. 게다가 돈도 벌 수 있어.”
란이 금화를 튕겨 올리는 시늉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돈은 황제부터 거지까지, 흘러가지 않는 곳이 없지.”
귀족이 귀족일 수 있는 이유는 영지를 소유하며 막대한 부를 손에 넣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안 되니까 신분제가 무너졌던 거고.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신분제를 무너트린 건 결국 자본이었다.
그러니 란은 자본은 조금도 놓고 싶지 않았다.
‘황금만능주의 같은 걸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돈으로 뭐든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백억 줄 테니 지금 절벽에서 뛰어내릴래요? 가족에게 돈 주는 것만 빼고 그 돈으로 뭘 해도 됩니다.’라고 물으면 다들 거절할 거다.
그런 일은 돈 주고 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란은 칸을 바라보았고, 칸은 검은색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쩐지 란은 가슴이 아파 와서 시선을 떨궜다. 시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에 바빠서 잊고 있다가도,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면 참기가 어려웠다.
루미에의 시신은 문 근처에 있었지만, 청염 기사단 전사자를 위한 묘지에도 따로 묘가 마련되었다.
그가 저쪽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는 보지 못하는 거니 그녀에게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란은 그 생각을 애써 멀리 떨쳤다. 지금 울면 안 되지.
‘좋아.’
란은 생각을 현재로 돌렸다.
녹영이 라치아 가문에 목숨을 건 충성을 바치는 것도,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
란은 그 점을 매우 높게 샀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
그들이 라치아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라치아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 했다.
“새로운 상단을 만들어서 대륙 전체에 지부를 만들 거야. 어음을 만들고, 이 상단의 어음이면 어느 나라 어느 산골에서도 가치가 있도록 만들 거야.”
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대한 꿈입니다만, 녹영만으로 될까요? 게다가 일단 녹영의 임무는…….”
“응, 그러니까 셋으로 나뉘는 거지.”
란이 손가락 세 개를 꼽았다.
“하나는 지금 녹영처럼, 정보 수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건 모르는 상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
칸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란이 씩 웃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더 짙게 드리우는 법이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그럴듯해 보이려면 정말로 자신이 무해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네? 이 상단이 스파이라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하고 웃음을 터트릴,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뒤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세 번째로, 진짜 정예들.”
“‘녹영은 정보 수집 단체이지, 그런 짓까지는 안 해. 그런 건 괴담이지.’라고 할 만한 일을 하는 자들 말이군요.”
칸의 말에 란은 그저 웃기만 했다.
확답이 없다는 점마저 녹영의 주인다워서 어쩐지 칸은 뿌듯해졌다.
란이 깊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재개편이 있을 거야. 어쨌든 대륙의 부를 손에 쓸어 넣어 보자고.”
“존의.”
짧게 말하고 칸이 씩 웃었다.
“녹음을 드리우시길.”
란이 고개를 가볍게 까닥하고 답했다.
“생명의 정수가 그대에게.”
칸이 “새 보고서를 가져오겠습니다.” 하고는 물러서며 방구석의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란은 눈을 부릅뜨고 그걸 보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맞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짜 신기하단 말이야.’
란은 방 모서리에서 시선을 떼고 책상 위에 놓인 초를 바라보았다.
마법 램프가 있으니 불빛을 위한 초는 필요 없었다. 이건 향초였다.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를 내는 초의 촛불이 흔들리는 걸 란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혼자다.
여기는 아무도 없고, 그녀는 지금 방 안에 혼자였다.
란은 다리를 의자 위로 끌어당겨 무릎을 모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꽉 누르고 란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차피 달라졌어.
그래, 그건 안다.
하지만 이야기대로 되었다면 루미에는 죽지 않았겠지.
그게 란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릴리에게도 상황을 설명하는 긴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가 어디까지 이해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원래대로 갔다면 릴리는 죽었겠지. 하지만 그건 란의 변명이고 이들은 모르는 일이니까.
이렇게 운다고 하면 루미에는 분명히 “주인님도 참.” 하고 웃었겠지.
‘아.’
이런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이 눈물이 났다. 무릎 사이에 이마를 묻고 란은 잇새로 흐느꼈다.
“란.”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란은 고개를 들었다.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조명이 어두워져 있는 것도 몰랐다. 향초 불만 어둠 속에 흐릿하게 반짝였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란은 재빠르게, 눈가를 닦아냈다.
“깜박 졸았나 봐.”
“조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내죠.”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젖은 뺨을 눌렀다. 따뜻하고 굳은살이 박여 있어 단단한 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다.
란은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유스타프가 몸을 기울이더니, 무릎을 모으고 웅크린 채로 란을 가볍게 들어 제가 의자에 앉고는 란을 휙 허벅지에 앉혔다.
당황한 란의 얼굴을 제 어깨에 누르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
“…….”
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미에는 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연애 감정은 한 톨도 없었지만 그래도 유스타프 품에서 그 때문에 우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유스타프가 항상 루미에를 경계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도 그렇고.
하지만 그래도 유스타프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왜냐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가 날 이해해 줬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란은 마음껏 울음을 터트렸다.
유스타프는 우는 란의 등을 살며시 두들겼다. 제 앞에서까지 참는 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울고, 어리광 부려 줬으면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한참 후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해, 유스타프는 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 맞췄다.
“쉬이― 괜찮습니다. 제가 있어요.”
란이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꾸물꾸물 그를 꽉 끌어안아서 유스타프는 웃음이 나오는 걸 살짝 눌러 참았다.
웃을 때는 아니니까.
“란도 그랬잖습니까. 저쪽에서 다시 태어나서 시나를 만날 거라고요. 그럼 그렇게 되겠지요.”
“응.”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며, 이미 들은 말이지만, 다시 반복되는 위로에 란은 위안을 얻었다.
“유스.”
“네.”
“유스는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마? 응?”
“물론입니다.”
유스타프의 대답에 란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멋쩍어져서 란은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유스는? 울고 싶은 일 있으면 얼마든지 울어도 되는데.”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글쎄요.” 하고 중얼거렸다.
란이 고개를 들자 유스타프가 희미한 미소를 돌려주며 말했다.
“라치아가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화가 납니다. 하지만, 슬프다거나 란처럼 운다는 식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느낌도 없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눈물이 콸콸 나오는 란 쪽이 그에게는 오히려 신기했다.
젖은 금색 속눈썹과 반짝거리는 녹색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유스타프가 물었다.
“이상합니까?”
“아니.”
란이 고개를 흔들고 푹 그의 가슴에 뺨을 묻으며 말했다.
“내가 두 배로 우니까 균형이 맞는 거 아닐까.”
“그거 괜찮군요.”
유스타프가 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란이 뺨을 부비다가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유스에게는 내가 있어.”
“란이 있지요.”
적도 아니고 부하도 아닌,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교환할,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상대.
란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그려지자 유스타프는 어쩐지 마음이 놓여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란은 갸웃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유스타프가 가볍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상단을 만드신다고요.”
“아, 벌써 이야기가 들어갔어?”
“네. 그리고 대충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지요.”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왕실에서 직접 상단을 운영한다는 게 어떨까 싶기는 하지만…….”
“아, 그놈의 체통 문제인가?”
란이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현대에서 온, 이쪽 세계에서 본다면 지극히 실리주의자인 란에게 이놈의 귀족적 자존심이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망한 양반이라도 갓끈을 매고 엣헴, 뒷짐을 지며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
그런 감각이라는 건 알겠다. 이쪽의 귀족은 묘한 곳에서 더 그런 게 심하기도 하고.
‘올리비아만 봐도.’
란은 문득 그녀를 떠올랐다.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재빠르게 방향을 틀면 되는데 ‘예전에는 이 방식으로 잘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바꾸기에는 내 자존심이.’ 하는 것 때문에 방향을 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방식이 실패했을 때의 분노는 엉뚱한 곳에 쏟아지고.
‘아, 하긴 그건 귀족만의 문제는 아닌가. 아냐. 귀족들이 더 심하기는 하지. 귀족이란 자부심 때문에.’
그에 비하면 라치아는 파격이다.
아마 북쪽에 살기 때문에, 생존이 최우선이 되었기 때문이겠지.
‘제국 입장에서는 좀 야만이기는 하지. 천 년 가문이라서 그나마 인식이 괜찮은 거고.’
“그럼, 상단을 하면 왕국으로서 위엄이 떨어지는 거야? 안 되려나?”
“제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그 위엄이라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럼 역시, 할래.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왕보다는 왕비의 심심풀이 놀이 같은 느낌인 거지.”
“심심풀이요.”
잠시 유스타프는 란이 구상한 상단의 자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고 란이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는 란이 그렇게 웃을 때가 좋습니다.”
“응?”
“호승심 가득하게요. 란이 있어서 전 항상 거듭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유스를?”
의아한 얼굴이 된 제 아내를 보고 유스타프는 다시 웃었다.
“내가 라치아 가주에 더 적합한가, 하고요.”
란이 눈을 크게 떴다.
“라치아의 가주는 유스야.”
“란이 그렇게 말하는 건 제가 라치아의 혈통이기 때문이죠.”
“엑,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유스가 아니면 누가 해?”
“란이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임시지만 충분히 훌륭했죠. 만약에 란이 제 이복 누이였다면.”
란이 입을 내밀었다.
“그건 싫은데.”
유스타프가 뾰족 내민 그녀의 입술이 귀여워 가볍게 입 맞추고 말했다.
“그야 이복 누이면 이런 걸 못 할 테니 저도 싫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전 가장 먼저 란을 암살해 버렸을 겁니다.”
란이 입을 떡 벌렸다. 유스타프가 느긋하게 말했다.
“제가 가주가 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거 참…… 인정해 줘서 정말 고맙네.”
란이 한숨과 함께 말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유스, 이거 진짜 이상해.”
너 암살해 버렸을 거야, 이게 최상급 찬사라니.
“이상한가요?”
갸웃하는 그를 보며 란은 다시 웃었다. 란이 씩 웃었다.
“만약 내가 가주가 되고 싶었다고 해도, 유스타프를 먼저 없애버렸을 거야. 중요하지만 위험한 직위를 줘서, 약간 외곽으로 보낸 다음에 샥―”
유스타프가 그 말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걸 보고, 란은 정말로 유스타프의 기준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여기 귀족들의 기준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골든로즈 상단주가 온다지요.”
“응, 뭐 할 이야기 있어?”
“아뇨. 란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응, 맡겨둬도 좋아. 난 그럼 군대의 재편성을 유스에게 맡겨 둘까. 그쪽은 진짜 모르겠어.”
이곳은 경찰이 없다.
현대에서야 군대와 경찰이 따로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마을의 치안부터 시작해서 영지전까지, 병사에서 기사 모두가 전부 군대에 속해 있다.
그러다 보니 편제나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라, 그녀는 감사하며 그 일은 유스타프에게 맡겨 두고 있었다.
물론 각각의 영지야 영주의 사병으로 치안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라치아 왕국이 된다.
주요 요소마다 왕국군이 배치될 거고…….
‘어지간하면 중앙집권화를 하고 싶은데, 여기는 좀 우습게 섞여 있어서.’
완전히 봉건제도 아니며, 완전히 중앙집권제도 아니다.
“다행히도 건국에 공신이 생기는 건 아니라서, 왕권 강화에는 충분하니까…….”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수호룡이 있으니까요.”
“뀨, 말이야?”
“……설마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건 아니겠죠?”
“아냐, 아직 안 정했어. 다들 드래곤 님이라고 부르던데.”
“드래곤 님치고는 말썽이 잦지만…….”
“그런데 수호룡이라니.”
“간판으로는 그럴듯하지요. 저걸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세계수는?”
“그건 은밀하게 뿌릴 내용입니다.”
“아하, 이해했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룡의 존재는 공표.
세계수의 존재는 비공식.
“신비감은 중요하니까.”
“중요하지요.”
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우리 언제 휴가 가지?”
“잘하면 올 여름쯤이요.”
“진짜? 그렇게 빨리?”
“지금 같은 속도로만 하면요.”
유스타프는 란을 보며 말했다. 란 밑에 있는 행정관들이 질려서 다들 “마님은 사실 서너 명인 거 아닌가요? 란, 로미아, 드, 라치아, 이렇게 넷이라든가요?” 하는 말을 할 정도로 란은 빠르게 일하고 있었다.
란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여름 휴가를 기대하도록 하지요.”
✥✥✥
레버리는 ‘란의 대로‘를 보고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 되었다.
“항구, 항구 선점권 주실 거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말하는 레버리를 보고 란이 헛기침을 했다.
“물론 골든로즈 상단은 저희와 오래 거래해 오기는 했지요.”
“그러니까요!”
레버리의 적극성에 란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거래에서는 보통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거 아닌가요?”
“그거야 정말로 그 거래를 대신할 패가 있을 때의 이야기죠. 라치아 왕국이 세워지면 이 북쪽 항구는 필수예요. 여기에 선박이 들어와야 한다고요.”
“그건 그렇지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버리가 싱긋 웃고 손을 모았다.
“제가 하프엘프라는 걸 아시지요.”
“알지요.”
“북쪽 항구는 엘프와 드워프도 사용하겠죠?”
“물론이에요.”
“라치아는 이종족과 정식 국교를 맺은 유일한 왕국이니까요.”
“아직 왕국은 아니지만―”
“봄 되면 하실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저! 레버리 리버티가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 사이에!”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레버리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냥 해 달라는 건 아니랍니다.”
“그럼, 어디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란이 빙긋 웃으며 말했고 두 여자 사이에서 작게 스파크가 튀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두 사람이 새로운 계약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은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였다.
지친 얼굴로, 양쪽 모두 만족한 표정이 되어 레버리는 행복하게 하늘 저택을 떠났다.
란 역시 축 늘어져서 탁자에 엎드렸다.
‘필요한 건 다 얻어냈지.’
너무 레버리를 조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곳은 로미아 상단에 줄 거니까.’
상단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니 키리가 “로미아 상단으로 하죠?” 하고 말했고 어쩐지 그게 찬성표를 잔뜩 얻어서 상단 이름은 로미아 상단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R. 로미아 상단. 줄여서는 다들 R. R. 상단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었다.
‘어쩐지 민망해.’
상단의 깃발은 녹색 바탕에 은색의 세계수 그림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착착 상단도 준비되어 갔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시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