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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건국, 휴가, 탄생


Chapter 4. 건국, 휴가, 탄생 라치아가 왕국으로 독립하는 선언문이 제국과 각 왕국에 도착한 것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쯤이었다. 제국의 황제인 라벨은 약속한 대로 라치아의 독립을 축하한다고 말했고, 제국의 인정에 다른 왕국들도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국교를 맺자며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일단 라치아와 척을 지면 얼음수정을 얻는 데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래서 왕국으로 독립하는 나라답지 않게, 피 흘림 없이 라치아는 왕국으로 독립했다. 건국일 대축제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벌어졌고, 온 국민에게 포도주와 고기가 내려졌다. 한 달 동안 벌어진 건국 대축제에는 각국의 사신이 찾아와 인사를 했고, 모두가 정원을 뒹굴거리는 드래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돌아갔다. 키릭스 후작―이제 키릭스 공작이 된― 부처도 초대장을 받아 도착했다. 엘리제가 환하게 웃으며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비마마.” “리제.” 란이 다가와 엘리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전에 했던 말 기억나? 언젠가 라치아 공작이 아니더라도 친구가 되겠다는 말.” “그게 왕비마마가 되겠다는 말인 줄은 몰랐지요.” 란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아직 유효해. 리제에게도 그래?” “물론입니다.” 리제가 웃으며 말했고 란이 그녀의 팔짱을 끼며 답했다. “그럼 오늘 하늘 저택 안내는 특별히 내가 직접 하지.” “황송합니다.” 대답하고 두 사람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내들의 모습을 보며 키릭스 공작이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이제 전하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폐하께서 직접 인사하러 오지 못해서 아쉽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왕국 건국일에 오는 건 이상하지.” 유스타프의 말에 키릭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말했다. “어마어마하군요.” “뭐가?” “사람들의 시선이요. 다들 라치아 왕국에 발을 걸쳐 보려고 난리입니다. 사실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고요.” “많아 봐야.” 유스타프의 중얼거림에 키릭스 공작―카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잡음이 없는 거지요. 왕국기도 굉장하던걸요. 검은 드래곤이라.” “이제 문은 없으니까.” “그거 말인데, 진짜로 어둠과 드래곤이 나왔습니까?” “사실이야.” “하.” 카로크는 한숨 같은 소리를 짧게 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믿고 싶어도 말이죠. 그 빛기둥을 봤으니, 원. 게다가 제 마법사가 어찌나 발작을 하는지. 안 그래도 제가 오늘 여기 온다는 거 알고서는 따라가게 해 달라고 하도 졸라서 떼어놓느라 고생했습니다.” “제국에서도 보였나?” “전역에서 보였죠. 그리고 진짜 드래곤도 데리고 계시다면서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이제 부쩍 커서 제법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밥과 잠자리 때문에 하늘 저택으로 늘 돌아오긴 하지만. “참, 새로운 미로 공작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로크가 히죽 웃었다. “라벨 폐하는 편하실 겁니다. 미로 공작가를 손바닥 위에 올리셨으니까요.” “그게 나도 편하니까.” 라치아에 얼음수정이 있는 이상, 제국은 언제나 라치아를 삼키고 싶어 할 터였다. 라벨이 라치아의 독립을 허락해 준 것도 수많은 논의를 거쳐서였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음수정의 수입 문제였으니까. 제국이 라치아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라치아에서 매년 일정량의 얼음수정을 제국에 수출한다는 게 계약이었다. 약간 많은가, 하는 양이었지만 그대로 계약했다. 란이 “점점 더 얼음수정의 수요는 늘어날 테고, 지금 좀 많은 듯이 계약해도 곧 부족해질걸.”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란은 전기의 공급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 것처럼, 생활에 스며들어갈 얼음수정의 양도 당연히 늘어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니 그 계약대로 해도 괜찮아.” 어차피 부족해질 테니까. 그래서 라치아 독립을 위한 물밑 작업은 편하게 진행되었다. 유스타프는 카로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고, 그가 갸웃하며 몸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면 오늘 저녁에 제국과 왕국 사이에 물밑 거래가 오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겠지.” 유스타프가 낮게 말해 카로크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럼 귀찮은데 따로 만남이라도 가질까. 왕국 사신들이 슬슬 지겹거든.” 제국의 사신이라면 둘이 만나도 괜찮지. “절 연회에서 빠져나갈 이유로 써먹지 말아 주십시오.” 말하면서도 카로크는 웃고 있었고, 유스타프는 “지겨워.” 하고 짧게 말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제국의 공작과 유스타프가 함께 사라지는 모습에 연회장에 남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자신을 보는 엘리제의 눈초리에 란이 갸웃하며 시선을 보냈다. “왜?” “아뇨, 그게 그 유명한 녹음의 관인가 하고요…….” “아.” 란이 제 머리에 꽂힌 작고 사랑스러운 관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웃었다. “아니야.” “그렇죠? 예쁘기는 한데 너무 작다고 생각했어요.” “보여줄까?” 란의 말에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환영이지요.” 란이 씩 웃었다. 왕국 독립 선언 때에 맞춰서 아슬아슬하게 엘프와 드워프가 새로운 녹음 세트를 들고 왔다. 양쪽 모두 뿌듯한 얼굴이었다. 관과 목걸이, 팔찌, 귀걸이, 반지까지 풀세트로 이루어져 있는 세공품은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이 시대의 액세서리를 조잡해 보이게 만드는 그런 장신구들이었다. “어떠십니까?” 드워프 장인이 물어 란은 활짝 웃었다. “이 이상 훌륭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로 너무 멋진 작품입니다. 세상에.” 그녀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나씩 물건을 들어 보일 때마다 장인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관은 직선적인, 위엄과 당당함을 가지고 있는 디자인이었다. 세심하게 보석을 커팅하고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된 관은 대관식에 어울릴 법한 느낌이었다. “이 무거운 관은 항상 하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엘프가 그렇게 말하며 화려한 관에 있는 장식을 살짝 분리해서 란은 입을 벌렸다. 빗처럼 생긴 작은 티아라는 커다란 카리톨을 박아 넣고 그걸 중심으로 태양과 별을 형상화한 듯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었다. 이런 자리에서 가볍게 머리 장식으로 할 수 있는 티아라였다. 란은 그 아이디어를 극찬했다. “그래요, 녹음의 관을 항상 하고 다닐 수 없으니 아쉬웠어요.” 그리고 그 빗처럼 된 부분을 본래 커다란 관에 딱 끼워 넣으면 맞아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공학적으로 신경을 썼다는 것은 드워프 작품 같은 느낌이다. 반지는 작은 캐럿으로 촘촘히 만들었는데, 가드링 같은 디자인으로 란이 하고 있는 결혼반지와 나란히 하면 딱 맞아들게 되어 있었다. 섬세한 배려라 란은 얼른 그 반지를 결혼반지와 겹쳐서 끼웠다. 목걸이는 또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카리톨뿐만 아니라, 루비와 사파이어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목걸이는 짙은 유색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게 생동감 넘치게 보였다. 귀걸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카리톨을 번갈아 사용해 늘어지는 디자인이었고, 팔찌는 한 뼘 정도의 길이였는데 양쪽 팔목에 착용하는 한 쌍으로 된 디자인이었다. 백금을 실처럼 길게 잡아 늘여서 만든 섬세한 걸작품이었다. 여름에 장갑 대신 사용할 예정이라고 란이 말해서, 엘리제는 새 유행이 될 팔찌를 유심히 보았다. 각각의 디자인이 확연히 다르지만, 또 함께 착용하면 어울렸다. 같은 색의 맞춤 보석보다 좀 더 고난도의 맞춤이었다. 무엇보다도 란은 항상 손에 낄 수 있게 만든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 머리의 티아라 장식도. “양측이 다 고생했지.” 덕분에 우리도 많이 배웠고. 란이 킥킥거리는 사이에 엘리제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관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엘리제는 콕 손끝으로 관을 찔러 보았다. 장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저녁 연회 때에 쓰면 딱이겠네요. 누구라도 이 관을 쓴 마마께서 그 자리의 주인공인 걸 알아챌 거예요.” 엘리제의 말에 란이 씩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속삭였다. “근데 우리 둘인데 이제 말 놔도 되지 않아?” 엘리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허술해서, 이러다가 모두의 앞에서도 말실수할지도 몰라요. 말투야 상관없잖아요? 친구인 건 변함없으니까요.” “그거야 그렇지만…….”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라, 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제 나라가 달라졌으니 만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생기겠지만……. “자주 놀러 와, 리제.” “네, 비전하.” 엘리제가 활짝 웃었다. 건국일 마지막 날 열린 밤 연회는 그야말로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한밤중에 열린 연회에 란이 유스타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밀빛 머리카락은 금분이 없이도 반짝이며 금색으로 빛났고, 그 아래 녹색 눈동자는 테를 두른 듯이 선명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많지만 그 내면의 빛이 바깥으로 나오는 듯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외모에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란은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의 모습은 머리 위의 빛나는 관과 함께 모두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붉은 입술로 살짝 미소 지으며 란은 사람들을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플로어로 가볍게 이끌자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스타프 역시 오늘을 위해 화려하게 성장을 했기에, 란에게 밀리는 감이 조금도 없었다. 누가 보았다면, 리치아의 국왕 부부는 외모를 보고 뽑았냐고 할 만한 완벽한 한 쌍이었다. 침묵이 가득 찬 홀에 떨리는 듯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되고 란과 유스타프는 춤을 시작했다. 바싹 긴장했던 란은 유스타프의 눈을 마주 보자 곧 긴장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걸 느꼈다. 매끄럽고 완벽하게 빙글빙글 돌며 두 사람은 더블릿을 추었다. 란은 의아해져서 유스타프를 보았다. 네 마디가 끝나면 사람들이 춤추러 플로어로 들어와야 하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지?’ 슬쩍 유스타프에게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니 다들 홀린 듯이 이쪽만 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유스가 그만큼 멋지기는 하지만…….’ 춤이 다 끝나고 나서야,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중간에 플로어로 나가는 것조차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스러움이 번져나가는데 란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시범을 보여 드렸으니, 이제 직접 춰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고, 오케스트라는 재빠르게 같은 곡을 한 번 더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플로어에 사람이 차기 시작했고, 란과 유스타프는 한 곡 더 추고서야 플로어에서 벗어났다. 그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은 환상적이었다. 란은 마법사가 있으니 다들 이런 것에 익숙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저녁에 불꽃놀이를 할까?” 했더니만 시녀들은 모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가 없는 공작가라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니 제국의 연회에서도 불꽃놀이는 없었다. 알고 보니, 마법사에게 그런 유흥을 위한 뭔가를 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마법사의 자존심이라는 거지. 하긴, 그래서 마법 세공품이 팔렸지.’ 그래서 란은 야심차게 불꽃놀이를 계획했고, 마법 세공사들은 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는 실제 불꽃보다도 멋진 불꽃들을 만들어 냈다. 프란체가 가져온 도면을 보고 란은 슬쩍 가필을 했고, 프란체는 눈이 튀어나올 듯 되었다. “아니, 이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떠올라서?” “그냥이요? 그냥이요? 그냥 이게 된다고요?” “응, 그냥이야.” 란은 그렇게 말하고 술술 도면을 하나 더 그렸고, 프란체는 입을 떡 벌렸다. 란이 히죽 웃으며 “이것도 그냥.”이라고 말하자 그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냥을 저에게 좀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계속 우리 왕국 마법 세공사로 있을 거야?” 그러자 프란체가 펜을 꺼내 들며 “당장 영구 계약이라도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고 란은 웃으며 약간의 이론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프란체는 환한 얼굴로 몇 장의 종이를 붙잡고 연구하겠다고 방에 틀어박혔고 말이다. ‘마법 세공사도 저 정도인데, 마법사에게 알려지면 장난 아니겠는걸.’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그 결과물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예쁘다.’ 란은 허공에 터지며 색색으로 색과 모양을 변화시키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하나하나가 터질 때마다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이니 소리가 없어도 되지만, 란은 불꽃놀이에서 소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리도 첨부했다. 커다랗게 붉은빛으로 터졌던 불꽃은 다시 무수히 반짝이는 금색의 불꽃이 되어 터지고 그 가루들이 반짝이며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성이나 드래곤 같은 복잡한 모습도 되었고, 심지어 움직이기도 했다. “어때?” 란이 유스타프에게 속삭이자 유스타프가 불꽃에서 시선을 떼고 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아름답습니다.” “다들 보잖아.” 란의 목소리가 더 낮아지자 유스타프가 낮게 웃고 속삭였다. “다들 불꽃을 보느라 바빠요.” 그는 란의 허리를 당겨서 다시 한 번, 좀 더 깊게 키스했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도 반짝이는 빛 무리가 보였다. 간신히 란이 입맞춤을 끝냈을 때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건국식 마지막 날 국왕 부처가 먼저 사라지면 안 되겠지요.” “안 돼.” 란이 붉어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고, 유스타프가 그녀의 젖은 입술을 가볍게 엄지로 훑고 미소 지었다. “그거 아쉽군요.” 그가 살짝 속눈썹을 내리깔고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을 기쁘게 해 드릴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 이럴 때만 누님이지.” 란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항의하자 유스타프가 “하지만―” 하고 더 낮게 말했다. “이렇게 부르는 걸 더 즐거워하시는 걸 제가 몸으로―” “―!” 란이 손바닥으로 철썩 그의 입가를 치듯이 막았다. 그리고 스스로 놀라 주변을 힐끗 돌아보았는데 유스타프의 말처럼 다들 불꽃을 보느라 정신없었다. 삶은 새우 껍질처럼 새빨개진 란의 얼굴을 보고 유스타프는 웃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가볍게 그 손가락을 깨물었다. “정말로 안 가실 겁니까?” 란이 손을 홱 빼고 말했다. “가고 싶으면 먼저 가지 그래?” 한 박자 쉬고 란이 재빠르게 이어 말했다. “우리 침실 베란다에서도, 잘 보여. 불꽃.” 유스타프가 파란 눈을 깜박이더니 웃고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하고는 회장을 빠져나갔다. ‘조, 좋아.’ 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적당히 눈치를 봐서, 나도 회장을―’ 하는데, 엘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제가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어 란은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봤구나!’ 엘리제가 봤다는 건, 엘리제 말고도 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거겠지. 키스하고 나서 슬쩍 사라지는 국왕. 그 뒤를 따라 살그머니 사라지는 왕비. ‘왜인지 너무 적나라하잖아.’ 란은 결국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연회장의 파장 분위기를 다독이고서야 란은 제 방으로 돌아갔다. 부부 침실과 연결된 문 앞에 서서 란은 깊게 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내에게 오늘 꼭 일찍 돌아갈게, 라고 약속해 놓고 결국 일 때문에 늦어 버린 남편의 마음 같은…….’ 헛생각을 하며 란은 살며시 문을 열었다. “유스……?” 살짝 이름을 부르며 침대가로 다가갔는데 유스타프는 보이지 않았다. “유스?” 그녀가 갸웃하며 발코니 쪽으로 나가니 거기에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란은 머뭇머뭇 다가갔다가 에잇 하고 뒤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늦어서 미안해. 죄송합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어 란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사람들에게 잡혀 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 응? 그래도 이제는 여유 있으니까.” 그러며 란이 그의 등에 푹 얼굴을 묻었다. “봐주세요. 한 번만. 네?” 란의 웅얼거림에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허리를 감싼 란의 팔을 풀어내며 말했다. “설마 소박맞은 신부 같은 기분이 될지는 몰랐지요.” “무슨 말을! 내가 왜 유스타프를 소박맞히겠어.” 란이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픽 웃었다. “심정적으로 말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으시고, 처음에는 두근거리다가 그 다음은 화가 났다가 지금은 좀 식었다고 해야 하나요.” 란이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미안, 내가 오늘 밤 다 보상할게.”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보상입니까?” 하고 되물으며 그녀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란이 그를 침대에 밀쳤고 순순히 유스타프는 침대에 앉았다. 란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 체력이 허락하는 한은?” 눈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일단 시도해 보고 나서, 용서할지 안 할지 생각해 보지요.” 그녀가 달칵하고 그의 허리띠를 풀어 잡아당겼다. 란이 허리띠를 쭉 당기며 말했다. “그럼 일단 양손 내밀어 봐.” ✥✥✥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줄 알았어.” 란이 유스타프의 몸 위에 축 늘어져서 말했다. 유스타프가 낮게 웃어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손목 괜찮아?” 유스타프가 말없이 제 손목을 보여줬고, 란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푹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흔적도 없네.” “란보다 튼튼하게 되어 있거든요.” “아니, 같은 인간인데 왜 차이가 나는 거지.” “갑옷으로 무장하고 랜스를 든 채로 말을 달리는 저와 란의 체력이 같다면 그것도 큰일 아닙니까.” “하긴.” 란이 그렇게 말하며 끙차 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킨다. 그는 이 머리카락이 그의 몸 위에 미끄러지는 것도 침대 위에 흐트러지는 것도 좋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란의 새하얀 목덜미에 남은 붉은 흔적들을 따라 내려왔다. 란의 살결은 부드러웠고, 핥아 올릴 때마다 혀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 감촉을 떠올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의 아내는 그런 건 모른다는 눈으로 순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한 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쓸어내리는데 란이 입을 열었다. “유스.” “네.” “내가 세상에서 유스를 가장 사랑하는 거 알지?” “알지만 말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유스타프를 가장 사랑해.” 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가 다른 손으로 란의 뺨을 감싸며 묻자, 란이 뺨을 부비며 말했다. “아니, 조세권 문제 때문에.” 이 분위기에서 조세권이라니?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그녀에게 지분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가신들이 거부할까 봐요?” “그거도 그렇고.” 란은 갸웃했다.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라치아 왕국은 본래 봉토와 함께 내렸던 조세권을 회수하고, 대신 봉록을 내리는 형태로 바꾸기로 했다. “괜찮을 겁니다. 일단 봉록을 받는 게 조세권보다 낫고요. 라치아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영토니까.” “하긴.” 란은 웃고 그의 몸에서 굴러 내려와 옆에 나란히 누웠다. 유스타프가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에게 덮으며 다독여 주었다. “북쪽 항구도 그렇고, 로미아 상단도 그렇고. 할 일이 많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사람을 뽑는 일이지요.” “그렇지.” 대답하고 란이 눈을 번득였다. “대학을 세우자.” “대학이요?” “응, 제국 아카데미 같은 거!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고등 학문을 다루는 거지. 모여서 마음껏 연구하세요. 연구비는 라치아 왕실에서 지급합니다. 그러면 저명한 인사들이 모일 거고, 그러면 제자도 모일 거고, 그러면 사람들도 모일 거고―” 란이 양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대학 도시라는 게 생기는 거지. 학문의 왕국. 그러면 인재는 저절로…… 훌륭하게 낚읍시다. 아, 귀족만이라든가 그런 제한은 빼고.”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그쪽에는 그런 게 있나 보지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수정이랑 눈설탕을 열심히 팔자고요. 로미아 상단도 본격적으로 가동시키고…… 북쪽 항구는 민간 투자를 받는 게 좋으려나?” “란.” 유스타프가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고 란이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어쩐지 즐거워 보입니다.” 란은 헤헷 웃었다. “그야― 전투 같은 건 진짜 못하니까. 어쩐지 요즘 유스만 계속 일한 느낌이라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한다는 게 기뻐.” 순순한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제국이나 왕국과의 외교도 앞으로는 중요하겠지…….” “그렇겠죠.” “유스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지만.” “정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응, 라치아에게 정치라는 건 무의미한 거지. 하지만 앞으로는 필요할걸.” 말하고 란이 물었다. “유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장기말일까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란이 반짝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가장 중요한 건 판을 짜는 거야.” “과연.” 유스타프가 웃고 속삭였다. “그럼 저는 룰 브레이커가 되겠습니다.” 그 말에 란이 웃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룰러와 룰 브레이커를 둘 다 쥐고 있으면, 무서울 게 없지.” “그리고 저 조금 반성이 되는데요.” “응?” 의아해하며 란이 갸웃하자 유스타프가 자세를 바꿔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어― 유스?” 당황한 란이 눈을 깜박이자 그가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눌러 고정하며 빙긋 웃었다. “잠드시는 데 그렇게 도움이 된 것 같지 않아서.” “이제, 잘 거야. 잘 거예요. 잘 겁니다.” “네, 그러니 도와드리지요.” 그건 잠이 아니라 기절이거든? 란이 가볍게 버둥거렸지만 유스타프의 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란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 로미아 상단의 깃발이 전 대륙 곳곳에 휘날리게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년이었다. 다른 상단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며 지나치는, 보부상들이나 간혹 들어갈 산골까지 상단은 깃발을 가지고 들어갔다. 그런 곳에서는 상단이라는 말이 이미 ‘로미아가 오는 날이야.’ 하는 말로 바뀔 정도였다. 로미아 상단은 누구라도 일정한 심사만 거치면 가입할 수 있었고, 이들에게는 동패와 작은 깃발을 지급했다. 덕분에 보부상들도 쉽게 로미아 상단에 가입할 수 있었고, 그들은 저렴하게 공급받은 물건을 팔러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위에 있는 철패, 은패, 금패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만큼 주어지는 혜택의 격차도 어마어마했고 말이다. 로미아 상단의 깃발 아래에는 항상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로미아 상단에게> 란이 캐치프레이즈라고 이야기한 이 문구는 깃발과 함께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뭔가 질이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 하면 로미아 상단을 찾았다. 민트색의 깔끔한 패키지를 들고 가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으쓱해졌고 말이다. “할 수 있다면 음유시인에게 PPL을 부탁하거나 CM송이라도 부탁하는 게 좋을까.” 란이 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면 아랫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또 얼마나 일을 시키시려고!’ 란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하는 게 좋겠지.” 하고 말해서야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란이 말했다. “아냐, PPL은 하자.” “그, 그게 뭡니까?” 로미아 상단에서 금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총 다섯 명. 지국장급의 인사들이었다. 지점장, 지부장, 지국장.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눠지고 지국장은 각 국가에서 로미아 상단을 통솔하는데, 지금은 그 지국장들이 모인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음유시인이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할 때 우리 로미아 상단을 거기에 끼워 넣는 거야. 예를 들어 다쳐서 약을 꺼내는데 그 약이 로미아 상단에서 사온 약이라든가…… 옷을 사는데 로미아 상단에서 사온 옷감으로 만들어요, 라고 한다든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지국장들은 서로를 살폈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연히 있지. 로미아 상단 이미지가 좋아지잖아. 게다가 어쩐지 ‘아, 나도 이야기 속 레이디처럼 되고 싶어. 그럼 나도 똑같이 로미아 상단에서 옷감을 살까?’ 이렇게 된다고.” 란의 설명에 그제야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유시인도 길드가 있지? 그쪽에 의뢰를 하는 게 좋겠다. 하겠다는 음유시인에게는 적절한 금액을 지불하자고.” 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서로 편하게 의견 교환의 시간이 있은 후에 회의가 끝났다. ‘역시 모이는 데도 시간이 걸리니까, 중계 지점을 두고 순간 이동 포인트 같은 걸 만들까.’ 란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돈이네.” “그래도 이제 로미아 상단은 흑자로 돌아서지 않았습니까?” 란이 몸을 빙글 돌려 유스타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간신히 1년 만에. 1년 만에 흑자라니 쾌거이기는 하지.” 버틸 자금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떤 사업이든지 초기에는 투자비용이 한없이 들어가고, 그걸 메우지 못하면 폭삭 망한다. 그러니 오랜 적자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기본 자금이 사업 성공의 기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슬아슬한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한다면 그 돈까지 까먹을 확률이 높은 거다. ‘오일 머니, 아니 마력석 머니 만세라고 볼 수 있지.’ 유스타프가 피식 웃었다. “충분하네요, 내탕금.” “충분하지. 이제 날이 갈수록 늘어날걸. 많이 벌면 주변 땅도 좀 사는 게 좋겠지.” 중얼거리고 그녀는 축 늘어졌다. “유스~” “네.” “그때 여름이면 휴가 간다고 그랬었잖아.” “그랬죠.” “그런데 언제 가?” “지금 갈까요?” 유스타프의 웃음 섞인 말에 란이 눈을 번쩍 떴다. “진짜?” “네. 틸라노이가 완성됐다는군요.” “1년 만에?” “네.” “세상에.” 란의 녹색 눈이 반짝이며 즐거움이 서렸다. “진짜? 유스 시간 돼?” “란이야말로 됩니까?” “란 로미아 드 라치아를 뭐로 보는 거야? 당연히 갈 시간이 있지.” 아랫사람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그럼 가죠.” 유스타프가 결론을 내려 순식간에 여름 휴가가 결정되었다. 두 부부가 하늘 저택을 떠나며 업무를 쉰다고 하니 밑의 수많은 부하 직원들은 작게 만세를 불렀다. 틸라노이는 엘프가 설계한 여름 별장으로, 숲과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원래 라치아 공작가의 사냥터였던 곳인데 지금은 왕실 별장으로 탈바꿈했다. 엘프들이 설계한 만큼 우아하고 높게 솟은 아치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새겨져 있었다. 그 새김 하나하나가 일종의 부적이라고 하레쉬가 설명해 주었다. 녹색과 푸른빛의 돌이 절묘하게 사용된 틸라노이는 공용어로 번역하면 ‘녹음의 관’이라는 뜻이었다. “예쁘다……”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숲 가운데의 별저는 8개의 욕실과 6개의 방, 3개의 거실로 이루어진 소박한(?) 장소였다. 숲 속에 유리구슬을 놓아두면 주변의 나무와 흙과 하늘을 반사해 숲과 같은 빛깔을 띠고 햇살이 영롱하게 빛난다. 란은 틸라노이가 그런 유리구슬 같다고 생각했다. “유스.” “네.” “굳이 지금 휴가를 오자고 한 이유가 있어?” 란의 물음에 유스타프가 갸웃했다. “틸라노이가 완성되면 달려가겠다고 설계 단계부터 말하셨지요.” “했지.” “그리고 마침 시간이 여름이고요.” 여름 휴가를 약속하기도 했었고. 그 말에 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스타프는 뭔가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게 있나 고민하다 물었다. “역시 시녀를 상주하게 할까요?” 지금의 틸라노이에는 란의 부탁으로 단둘밖에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식사와 세탁물을 배달해줄 시종이 오가기는 하지만 그때 외에는 둘뿐이었다. “아니, 둘인 게 좋아.” 란이 빙긋 웃었다. ‘역시 자기 생일을 또 까먹고 있잖아?’ 란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생일 선물이야 주문했지만…… 주문한 거 말고 다른 것도 해주고 싶은데. 역시 할 만한 건 생일 밥상인가.’ 유스타프는 란의 표정에 눈을 찡그렸다. 저 표정이면 잘 알고 있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지?’ 여기 와서도 일 생각인가, 하고 그가 괜히 란의 이마를 쿡 찔렀다. “……?” 놀란 란이 제 이마를 누르며 눈을 크게 뜨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여기서는 일 생각은 버리죠.” “응.” 란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의 휴가다. 허투루 쓸 생각은 없다. “그럼 내부도 둘러보자.” 란이 유스타프의 손을 잡아끌었고 그는 웃으며 끌려갔다. 4개의 방은 사계절을 테마로 만들어져 있었다. 라치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방은 각 방마다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봄은 연녹색 토파즈와 페리도트를 기본으로 해서 연한 노란빛으로 함께 꾸며져 있었다. 여름은 짙은 녹색 에메랄드와 투명한 물빛 아콰마린, 수정에다가 흰 레이스를 함께해서 만들어졌고, 수정으로 만든 발이 침대 머리맡에 쳐져 있었다. 가을은 홍산호에 진주, 베이지에 갈색 색조로 만들어졌고 겨울은 은으로 만든 가지, 다이아몬드와 루비에 작은 은방울로 이루어진 장식과 크림빛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란은 은방울 장식을 흔들고 깔깔 웃었다. 유스타프는 그 모습을 보며 ‘란 정말 요정 같지 않나.’ 하는, 남이 들으면 ‘전하의 탈을 쓴 넌 누구냐!’라고 할 만한 생각을 했다. “진짜 다 예쁘다. 아, 너무 좋다. 한 달은 쉬고 싶어.” “쉬면 되지요.” “그럴까~ 신혼 때도 고작 일주일이었고. 두 번째 신혼여행?” 란이 유스타프의 목에 팔을 두르며 달콤하게 말했다. 유스타프는 일 생각을 접어 두고 아내의 눈가에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 “그거 좋군요.” ✥✥✥ 란은 약간 초조해졌다. 유스타프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건 좋다. 좋은데. ‘시간이 없어.’ 뭔가 혼자 만들 시간이 없다. 결국 란은 유스타프를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유스.” “네.” “여기 원래 사냥터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나 토끼털이 가지고 싶어.” 미안, 토끼야. 란은 속으로 토끼에게 사과했다. 유스타프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토끼요? 이 계절에?” “이 계절에는 안 돼?” “털을 얻을 거면 여름 토끼털은 볼품없습니다.” “그, 그렇군.” 그건 생각 못 했네. 하지만 여기서는 억지를 쓰기로 했다. “그럼 산 채로라도 좋아. 보고 싶어. 토끼 귀엽잖아.” “산토끼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하고 유스타프는 차비를 해서 밖으로 나갔다. 사냥용 장비를 갖춘 후에 유스타프가 말했다. “밖으로는 나오지 마세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다시금 미심쩍다는 얼굴로 란을 보았다. ‘토끼가 귀엽다니.’ 도무지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감각이었지만, 란이 귀엽다니 그런 거겠지. 그는 가볍게 말을 몰아 사냥터로 나갔다. 어차피 요즘 전혀 사냥하지 않았으니, 사냥감들도 방심하고 있을 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사냥터지기에게 들러 사냥개를 몇 마리 데리고 유스타프는 숲으로 말을 달려갔다. 그 사이 란은 재빠르게 부엌으로 내려갔다. 부엌에는 하녀가 놓고 간 재료가 놓여 있었다. 란은 조심스럽게 도서관에서 가져온 요리책을 꺼냈다. “좋아.”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팔을 걷어붙였다. 유스타프가 사냥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유스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서둘러야겠다. 란은 푹푹 밀가루를 푸기 시작했다. ‘밀가루 두 컵, 버터가 반 컵…… 눈설탕, 눈설탕… 설탕 한 컵…….’ 입안으로 웅얼거리며 그녀는 계량하고 계란을 깼다. “으라차차!!” 있는 힘껏, 란은 계란을 휘핑하기 시작했다. 흰색 뿔이 생길 때까지 흰자를 머랭화하는 과정이었다. “팔 아파.” 잠깐 쉬었다가, 란은 다시 마구 흰자를 휘핑했다. 팔이 떨어져 나갈 쯤이 되어서야 간신히 머랭이 완성되었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채 친 밀가루와 머랭과 기타 재료를 넣고 섞은 다음 틀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녀는 오븐을 노려보았다. 얼음수정으로 온도가 조절되는 오븐이라 그래도 나무 장작 오븐보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란은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그러고서 그다음으로는 크림을 휘핑하기 시작했다. ‘죽겠다.’ 이미 흰자를 머랭 친 것만으로도 팔이 아픈데 생크림까지 올리려니 팔 근육이 ‘이 이상은 안 될 것 같아.’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해야 해.’ 그나마 접시를 차갑게 식힐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냉풍기가 돌아가는 부엌은 살 만했고, 란은 쉬지 않고 생크림을 마구 쳐서 푹신하게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흐늘흐늘하네…….’ 빵실하고 단단하게 오르지는 않아.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엌에서 달콤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오븐에 타이머를 달아두라고. 타이머도 없이 어떻게 오븐을 쓰는 거야?” 란이 끙끙거리며 오븐 앞을 서성였다. 시계를 보고, 다시 요리책을 본다. “됐나? 됐겠지?” 란은 꼬치를 하나 들고 오븐을 열어 케이크를 찔러 보았다. 꼬치에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아서 그녀는 환호를 내뱉으며 틀을 오븐에서 빼냈다. “주인님, 전하께서 오십니다.” 속닥속닥 누군가가 속삭여서 란은 펄쩍 뛰었다. “벌써?” “시간이 좀 흘렀지요.” 녹영은 그렇게 목소리만 내고는 사라졌다. 란은 “으아아―” 하고는 재빠르게 케이크를 틀에서 분리해서―하다가 옆구리가 왕창 뜯겼다― 냉장고에 넣었다. 크림도 함께 넣고 재빠르게 앞치마를 벗고 손을 씻은 후에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스!” 헉헉거리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가 “그렇게까지 뛰어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하고는 웃으며 자루를 내밀었다. “토끼입니다.” “살아 있어?” “네. 하지만 다리는 묶어 뒀어요.” “그래?” 란은 희고 보송보송한 토끼를 생각하며 약간 기대감을 갖고 자루 입구를 열었다가 확 닫았다. “이, 이게 뭐야?” “토끼지요.” “이렇게 커?” “네.” 유스타프의 얼굴이 다시금 의아해졌다. 란은 자루를 열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갈색의 토끼는 그야말로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덩치도 크고 생김새도 뭐라고 할까……. ‘깡패……?’ 자루 안에서 토끼가 펄쩍 뛰어서 란은 깜짝 놀라 자루를 떨궜다. 그러자 자루가 펄떡펄떡 뛰어 란은 비명을 지르며 유스타프의 뒤로 잽싸게 숨었다. “저거 잡아 봐.” 유스타프가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귀여우시다면서요.” “아냐, 내가 생각한 토끼는 저게 아니라고.” 그의 등에 이마를 박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는 ‘역시 귀여운 게 아니었군.’ 하고 작게 안도했다. 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풀어줘.” “잡느라 고생했는데요.” “그럼 먹을 거야?” “그럴까요. 토끼 고기 먹어 보신 적 없으시죠.” “응…….” “요리해서 올리라고 하죠.” 그러며 그가 걸음을 옮겨서 란은 깜짝 놀랐다. “어디 가?” “부엌에 가져다 두려고요.” “내, 내가 가져갈게! 부엌!” “란이요?” “응.” ‘나 할 수 있어.’ 하고 란이 그의 손에서 자루를 빼앗듯이 들고는 자기 몸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왜……?’ 다시금 의아함이 생겨 유스타프는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엌에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나?’ 하지만 딱히 숨길 것도 없어 보인다. 유스타프는 란이 요리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 요리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요리하는 귀부인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달려가던 란이 돌아서며 말했다. “유스는 일단 씻고 있어!” “알겠습니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의 사냥이니 상당히 즐겼지만, 여름에 말을 달린 덕분에 땀도 흠뻑 흘렸다. 유스타프는 욕실로 향해 가볍게 차가운 물로 씻고 나왔다. ‘토끼가 귀엽다니.’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 그는 씻으면서도 계속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잠시 있으려니 란이 차가운 냉차를 잔뜩 만들어서 올라왔다. 유스타프의 몫과 제 몫을 따르고 란이 그의 다리 옆에 털썩 앉아 몸을 기댔다. “고생했어.” “아뇨, 나름 흥미로웠습니다. 죽이지 않고 포획하는 건요.” “어떻게 잡은 거야?” 란의 물음에 유스타프는 덫과 몰이에 대해서 가볍게 설명했고, 란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토끼가 저렇게 늠름한지 몰랐어. 난― 희고 보송보송한 토끼만 생각했다고.” “겨울이 되면 털이 하얗게 되기는 하죠.” “정말?” “네.” “신기하네.” 하지만 저 모습에서 털만 희게 변한다고 해도 늠름함은 변함없을 것 같다. 유스타프가 조심스럽게 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란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다리에 무게를 주어 기댔다. “유스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둘은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친밀함이 안개처럼 농밀하게 떠돌았다. 느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기대있는 온기. 서로의 무게, 숨소리. 충족감이 차올라 둘은 한참을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창문 밖에서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 휩쓸리는 소리가 명랑하게 쏴쏴 울리고, 차가운 물가로 내려온 새들이 가볍게 깃털을 고르며 우는 소리가 났다. 서로가 거기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뚜렷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함께 있어 행복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유스타프와 란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날 밤, 란은 일을 마무리하려 살금살금 침대에서 일어났다. 힐끗 돌아보니 유스타프는 자고 있었다. ‘좋아.’ 슬그머니 란이 방을 나서자마자 유스타프는 눈을 떴다. ‘정말이지.’ 그는 궁금해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났다. 란이 자신에게 뭔가 숨기는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유스타프는 로브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란은 그가 따라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는 등불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심지어 소리를 안 내려는 건지 맨발로 복도를 달려갔다. ‘어딜 가는 건지.’ 란은 복도를 빠져나가서 아래층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의 불이 팟 하고 들어와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란이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좋아, 반나절이면 충분히 촉촉해졌겠지. 시럽을 발라 뒀어야 했나? 책에는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나저나 생크림 이거 괜찮은 거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란이 뭔가 열심히 하는 게 보였다. ‘설마?’ 눈을 크게 뜨고 란이 뭘 하는지 보니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유스타프가 뭐 좋아하더라. 역시 생크림에는 딸기가 최고인데, 딸기는 없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서서 유스타프는 란이 열심히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란은 가끔씩 자루 안의 토끼가 움직이면 “힉.” 하고 숨을 멈췄다가 자루 눈치를 보며 케이크를 만들었다. “이거 돌림판이라도 필요한 거 아닌가, 매끄럽게 안 발리네.” 란이 꿍얼거리자 그녀의 혼잣말 상대인 녹영이 슬그머니 그림자에서 나왔다. 그녀는 힐끗 문 쪽을 바라보았고, 유스타프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입가에 손가락을 대서 녹영은 잽싸게 시선을 내렸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아냐, 내가 스스로 만들 거야.” 그녀의 중얼거림에 녹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녹영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자 란은 끙끙거리며 케이크를 완성했다. ‘이거 진짜 아니다.’ 란은 케이크를 바라보며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깍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케이크는 그냥 생크림을 바른 것뿐. 그 위에 글씨를 캐러멜로 썼지만 아무래도 내놓을 만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맛이야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겉모습이 이래서야……. 선물이라고 내놓기에 민망하다. ‘전위적인 작품이야.’ 란은 그렇게 평가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꾹 눌렀다. 아니, 왜 이런 데에는 재주가 없는 것인가? 케이크가 타지 않은 거라도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냥 하녀에게 케이크를 가져오라고 하는 게 낫겠다.’ 아니면 그냥 고집부리지 말고 시녀와 함께 만들 걸 그랬다. 란은 아까운 마음에 케이크를 돔으로 덮은 후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터덜터덜 위층으로 올라갔고, 유스타프는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재빨리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안 오지?’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유스타프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나오는 걸 봤으니 지금쯤 도착해야 할 것 같은데. 결국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란을 찾아갔다. 쉽게 문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방을 발견하고 유스타프는 슬쩍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란만이 아니라 그녀가 불렀는지 녹영 서너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란의 타박에 종이를 가늘게 잘라 만든 고리로 종이 사슬을 만들며 녹영이 말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우셨어요?” “어렸을 때.” “……?” 란이 피곤한 눈을 부비며 “얼른얼른 만들어. 내일까지는 완성해야 하니까.” 하고 재촉했고, 녹영들은 가위질과 풀질에 집중했다. 유스타프는 거기로 뛰어 들어가서 란을 꼭 안아 주고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눌러 참았다. 동틀 때가 되어서야 란은 “아, 유스 일어나겠다.” 하고 허둥지둥 완성한 종이 장식품들을 박스에 넣어 숨기고 침실로 돌아왔다. 슬쩍 어두운 침대를 바라보니 유스타프가 아직 자고 있는 듯 보였다. 살그머니 침대로 돌아가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당기며 웅얼거렸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응, 화장실에 좀.” 중얼거리는 란의 발을 유스타프의 발이 가볍게 눌렀다. “발 차가워요.” “맨발로 다녀와서.” 슬그머니 발을 빼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그녀를 더 꽉 안으며 그녀의 발 위에 제 발을 올렸다. “발 따뜻해져야죠.” “응.” 란이 중얼거리고 그의 품 안에서 금방 잠들었다. 유스타프는 슬쩍 눈을 뜨고 란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밤새서 일했으니 그럴 만하지.’ 손수 준비하는 생일 파티라니. 신기했다. 그리고― 가슴이 떨렸다. 살아 있는 쥐 한 마리를 삼킨 듯한― 유스타프는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런 식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란은 참 다양하게 제 심장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다채로운 감각의 세계. 란은 항상 그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다. 그저 지나가던 것들이 그녀와 함께 있으면 특별해졌다. 나비 날갯짓의 경이로움을, 물총새 깃털 빛의 오묘함을 란과 함께하면서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를 구축하는 게 반짝이는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란은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이 너에게도 있다고, 란은 눈으로 항상 말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줄 때마다, 그녀로 인해 세상이 가치 있어지는 걸 유스타프는 느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이 가치 있어지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걸, 누가 알 수 있을까? 유스타프는 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세계가, 팔 안에 있다. ✥✥✥ 란은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진짜 자 버렸어!’ 놀라 란은 옆을 돌아보았고, 자리가 비어 있어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스?” “거실에 있습니다. 일어나셨습니까?” 유스타프가 걸어와 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허둥지둥 물주전자를 들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 들어 세면대에 부어 주었다. “미안, 나 늦잠 잤네. 어제 한 것도 없는데.” “괜찮습니다. 란, 오늘 따로 할 일이 있나요?” “어? 아니, 딱히…….” 란이 세수하고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 낚시 나가도 될까요?” “낚시?” “네. 가능하면 혼자서.” “당연히! 괜찮아! 나가, 나가.” 란의 얼굴이 밝아져서 유스타프는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가 나가는 게 좋으신가요?”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나야 유스와 있고 싶지. 하지만 유스타프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그것도 응원하는 거지.” “그러면 같이 있을까요?” “으―응?” 란의 표정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유스타프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는 이렇게 서툰 그녀가 좋았다.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고, 협상 테이블 앞에서는 깨어지지 않는 가면을 쓰면서 자신 앞에서만은 표정과 몸짓에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는 그녀가. “아니, 그래도 유스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하는 절박함이 보여서 유스타프가 웃고 말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응! 큰 물고기 잡아 와.” 유스타프는 란의 배웅을 받으며 별저를 나섰다. 호숫가로 말을 몰기는 했지만, 낚싯대는 가져오지 않았다. 부산히 생쥐처럼 몸을 놀릴 란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문득, 란이 물총새 장식을 좋아하는 걸 생각했다. ‘이 호수에도 있을까?’ 유스타프는 힐끗 안장에 걸린 사냥용 활을 바라보고 좀 더 속도를 올렸다. 란은 재빨리 움직였다. 높은 천장에 사다리로 올라가 종이 사슬 장식과 모빌 장식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생일 만찬은 눈을 딱 감고 주방 하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가져온 비스킷이며 닭고기를 식지 않게 오븐에 넣어 두고, 란은 제 케이크를 꺼냈다. ‘이건 아냐.’ 만든 게 아깝기는 하지만, 혹시나 하고 시녀에게 부탁했던 케이크는 그녀의 작품에 비하면 예술품이다. ‘마음만 주자, 마음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크를 도로 냉장고에 넣었다. 이어 그녀의 짐 가장 안쪽에서 종이 포장을 꺼냈다. 바쁘게 일하는 틈틈이 뜨개질하며 만든 목도리였다. 녹색과 흰색, 꽈배기 뜨기로 만든 작품은 그럴 듯했다. ‘이거랑.’ 하나는 주문품인 엘프제 활과 화살 통이었다. 활에 얼음수정이 딱 들어갈 공간이 있었는데, 이걸 작동시키면 훨씬 적은 힘으로 활을 당기는 게 가능해서 속사가 쉽다고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식어도 괜찮은 것들은 미리 상에 차리고 란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유스타프가 오기만 하면 된다. ‘아, 참. 옷 갈아입어야지.’ 란은 짐을 뒤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속옷은 슬쩍 침실에 넣어 두고, 란은 연푸른색 하늘거리는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란은 유스타프가 얼마나 놀랄까 기대하며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저택 앞으로 들어오는 유스타프의 모습이 보였다. 란은 얼른 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란? 저 왔습니다.” “유스, 여기야!” 란은 목소리만 높였다. 그녀는 두근거리며 준비한 줄을 꽉 쥐었다. “란, 왜 나오지 않고―” 그가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 란은 힘껏 줄을 당겼다. 그러자 문 위에 걸린 바구니가 뒤집어지면서 종이꽃이 후루루 흩날려 떨어졌다. “생일 축하해!” 란이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유스타프는 눈을 끔벅였다. “유스?” “아뇨.” 유스타프가 제 몸에서 종이꽃을 털어 내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란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음식 만드는 거 나도 도운 거야.” “그거 놀라운데요.” 말하며 유스타프는 생일 케이크가 없는 걸 보고 갸웃했다가, 뒤쪽에 둥근 은 뚜껑이 덮인 무언가를 보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종이 장식이 특이하네요.” “예쁘지?” “새인가요?” “학도 있고, 종이 고리도 있고.” 말하고 멋쩍은 듯 란이 덧붙였다. “번쩍이는 샹들리에 옆에 붙이니까 좀 그렇지만.” “아닙니다.” 란도, 유스타프도 돈은 흘러넘치게 있었다. 돈을 써서 사람을 부려 뭔가 만드는 건 쉬웠다. 그냥 ‘예쁘게 장식해 주세요.’ 하고 돈만 지불하면 끝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본인의 수고가 들어간 장식은 특별했다. 그들의 시간은 귀중했고, 그 시간과 귀찮음을 이기고 뭔가를 직접 한다는 건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일이다. 시간은 흘러가며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서 투자한 다는 것.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되돌릴 수도 메울 수도 없는 것을 서로에게 준다는 것. 가치 있는 걸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그 가치를 알아준다는 건 두 배로 기쁜 일이다. 란은 유스타프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그 모든 수고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배고프지? 잠깐만, 먹기 전에.” 란이 얼른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뚜껑을 열어 보이자 유스타프의 얼굴이 굳었다. 화려하고 매끄러운 케이크. 란은 그의 표정에 당황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게 아니라…….” 중얼거리고 유스타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란이 만든 케이크는요?” “어?” 화들짝 란이 놀라 그를 바라보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케이크, 만들지 않았습니까. 혹시 버렸나요?” “아니, 안 버렸……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케이크 만든 거?” “그 정도는 알죠.” “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야? 뭐야?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는 란에게 유스타프가 말했다. “란이 만든 케이크로 주세요.” “아, 안 돼. 그거 진짜 이상하게 생겼단 말이야. 먹으면 병이 걸릴지도 몰라.” “그럴 리가요.”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자 란은 ‘어어’ 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유스, 진짜 이상하다니까.” “안 이상해요.” 유스타프가 정확하게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여는 걸 보고 란은 신음을 내뱉었다. 유스타프가 케이크를 꺼냈다. 휘핑이 덜 된 생크림이 약간 흘러내린 듯한 케이크. 캐러멜로 써진 삐뚤삐뚤한 ‘유스, 생일 축하해’ 하는, 아래로 갈수록 자리가 모자라서 작아진 글씨. “……이상하잖아…….” 그녀가 중얼거려 유스타프가 웃었다. “아뇨, 전 이게 훨씬 더 마음에 드는걸요?” “위로는 됐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왜 제 말이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아니,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객관성은 저희 둘 사이에 중요하지 않죠.” 관계가 객관적이 되려면 타자화가 되어야 하고, 타자화가 되는 관계라면 이미 관계가 아니다. 관계는 항상 주관적인 법.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주관적으로, 란이 만든 케이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란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맛은 그래도 괜찮을 거야.” 구워지기는 잘 구워졌어. 자투리 먹어 봤는데 괜찮았어……. 자그마한 변명 같은 말에 유스타프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그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저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쑥스러워하는 란과 케이크와 함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유스타프는 케이크를 잘랐다. 시트도 일정하지는 않아도 3단으로 잘려서 크림이 발려 있었다. “맛있어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도 케이크를 한입 입에 넣었다. 보기에는 그래도 맛은 괜찮아서 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것도.” 란이 얼른 포장된 꾸러미를 내밀어 유스타프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내가 직접 뜬 거야. 목도리랍니다.” “직접이요? 아니, 어디서 시간이 난 겁니까?” “손은 놀리고 입은 떠들면서.” 란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유스타프가 몇 번이나 목도리를 만지작거리고 꽉 찬 음성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응.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어쩐지 부끄러워 란은 얼른 접시를 유스타프 앞으로 밀었다. “얼른 먹자.” “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포도주는 향긋했고, 음식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시간 진짜 빠르다.” “그러네요.” “널 처음 본 게― 이제 10년도 전이네…….” 란이 중얼거리고 가볍게 웃었다. “유스, 근데 진짜로 내가 얼음수정 채굴권 가지고 가 버렸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럼, 가지고 가시는 거죠.” “진짜? 가신들이 난리 날 텐데?” “그런가요?” 유스타프가 빙긋 웃어서, 란은 턱을 괴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분명 채굴권을 누군가에게 팔았을 거야. 그리고 그랬다면―” “라치아 영지에서 일하려면 통행료를 상당히 내야겠죠.” “그랬겠지…….” 그녀가 그 채굴권을 가지고 거기에 눌러앉을 가능성은 없었다. 가능성 중 하나는, 골든로즈 상단에 채굴권을 단숨에 팔아 버린 후 어마어마한 목돈을 챙겨 사라지는 거다. “진짜, 상상도 못 했어.” 그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란은― 당시의 누님은 항상 초연했으니까요.” “초연?” 그게 무슨 나와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 하고 란이 갸우뚱하는데 유스타프가 말했다. “누님은 항상 라치아가 좋지 않다고 했었죠. 보통, 어떤 대상에 힘과 정성을 쏟으면 그 대상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서 거기에 힘과 정성을 쏟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난 이걸 좋아해.’ 하고 합리화라도 하겠지. “그런데 누님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라치아는 어차피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좋아할 필요도 없고. 또 딱히……. 그 땅에 애정이 있는 게 아니니까. “저는 란을 좋아하니,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저에게서 도망갈 기회를요.”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 표현이었다. 그는 애정을 다루는 방식을 어머니에게 배웠고, 어머니의 방식을 그녀에게 적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았지.” “않으셨죠.” “눌러앉아 버렸네.” “네.” “그러면, 내가 그 뒤로 사라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도망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네.” 간결하게 대답하고 유스타프가 웃었다. 란이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며 “에이, 그건 모르지.” 하고 말했고 유스타프가 답했다. “10년이 걸리든, 30년이 걸리든, 내가.” 그가 서늘한 미소 지었다.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아?” 란의 녹색 눈이 동그래졌고, 유스타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겁니다.” “그, 그렇군.” 중얼거리고 란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좀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줘. 역시.” “충분히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리고 있는걸요.” “그거야 그렇지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란은 그를 보다가 웃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방식으로 너도 날 사랑해 줘. 어쩌면 투정 같은 말. 하지만 서로 달라도, 사랑한다는 건 알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준비해 둔 속옷을 떠올리며 란이 말했다. “마지막 선물이 있는데.” “뭡니까?” “음, 이따가 보여 줄게. 일단 씻고 다시 만나자.” 유스타프가 “씻고서 봐야 할 정도로 경건한 선물인가요?” 하고 물었고 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선물이지.” “알겠습니다.” 의아해하면서도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은 씩 웃어 보이고 제 침실로 돌아가 재빠르게 씻고 속옷을 꺼냈다. 란이 주문한 속옷 디자인화를 보고 소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이게 옷이에요?” 하고 말했고 키리는 “어머어머어머? 진짜 참신한데……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란은 잠자리 날개 같은 천으로 된 속옷을 챙겨 입고, 레이스 달린 가터벨트와 실크 스타킹을 신었다. 슬쩍 거울을 보았지만, 스스로도 정면으로 거울을 보기 낯 뜨거웠다. 그 위에 로브를 재빨리 입고서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선물을 나, 를 실천할 때다.’ 오늘은 겨울 침실이었다. 란이 침대에 앉아서 발을 까닥거리고 있으니 유스타프가 들어왔다. 유스타프는 로브 차림의 란을 보고 놀랐고, 란은 옷을 갖춰 입은 그를 보고 웃었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네.” “이리 앉아 봐.”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자 유스타프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서서 끈을 당겨 풀었다. 유스타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란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 어두워진 눈동자로 란을 훑어보았다. 란이 웃으며 빙글 한 바퀴 돌았다. “마지막 선물은 나야.” 유스타프는 그 말에 그녀를 잡아끌고 가터벨트를 당겼다가 놓아 주며 말했다. “란은 이미 제 것인 줄 알았는데요.” 란이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속삭였다. “물론 제 사랑은 전부 당신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날 소유했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유스타프가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제 사랑을 전부 주어, 란을 사지요.” “나쁘지 않은 거래 같은데.” 말하고, 단추를 풀던 란이 손을 멈추자 그는 약간 초조함을 느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란이 다정한 녹색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뺨을 감쌌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유스. 생일 축하해.” 그녀가 몸을 숙여 부드럽게 입맞춤을 했다. 유스타프는 란을 당겨 더 깊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그녀를 침대로 휙 쓰러트리듯 눕히자 침대 장식으로 걸린 은방울이 짜르릉 작은 소리를 냈다. 유스타프가 란을 내려다보며 거칠게 제 옷을 벗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란의 붉은 입술을 짓뭉개듯 눌렀다가 입안을 훑자 그녀가 가볍게 그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핥았다. 유스타프는 불에라도 댄 것처럼 흠칫하며 손을 뗐다. 란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천천히 선물을 즐겨 주세요.” 유스타프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낮게 신음을 흘렸다. 천천히 해야 하는데 천천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낮게 말했다. “조금 거칠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란을 아프게 하지는 않겠지만―” 란이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손가락을 모아 막고 속삭였다. “네, 기꺼이.” 결국 참지 못한 유스타프가 거칠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란도, 유스타프도 마지막 선물을 철저하게 즐겼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긴 밤이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여름 휴가 내내 두 사람은 더더욱 거리낌 없이 깔깔거리고 장난치며 호수와 숲을 돌아다녔다. 이미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더 깊이 알 수 있고, 친밀해지는 것에는 끝이 없다는 게 즐겁다고, 란은 생각했다. 밤의 호숫가에 서서 란은 팔을 벌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간 관이 희미하게 빛났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법을 그려냈다. 호수 표면이 반짝이며 마법진이 빛나다가 천천히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란이 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끝.” “이걸로 된 겁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여기가 중계 지점이 될 테니까, 라치아 왕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통신구를 쓸 수 있어. 순간 이동은 좀 더 촘촘하게 깔아야 하니…… 내가 나중에 시간이 나면.” 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들이 알면 또 난리 나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이게 참, 전수해 주기도 어렵고 그럴 만한 시간도 없고.” 게다가 인간에게만 전수하는 건 불공평하잖아? 하려면 엘프와 드워프에게도 모두 가르쳐야 하고. 자신이 그런 대단한 스승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하나씩 해야지, 뭐.”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아내를 더 이상 일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휴가를 보내니 더욱더.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마지막 날이지. 아쉽다-” 란이 관을 벗으며 달려와 유스타프의 품에 푹 안겼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요.” “꼭이다?” “네.” 그 역시 이런 시간이 너무 필요했다. 부부는 꼭 다시 오자고 굳게 다짐하며 휴가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라치아 왕국의 건국 기념일 행사는 화려하게 열렸다. 도시 곳곳에 라치아의 깃발이 펄럭이고, 한밤중에도 가로등에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었다. 건국 기념일은 저녁이 되어도 통행금지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등불을 들고 깔깔거리며 시끌벅적하게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이 시기에 맞춰서 북쪽 항구에 배가 가득 들어왔기 때문에 어디에나 물건이 흘러넘쳤다. 란도 등불을 하나 샀다. 가로등 때문에 등불은 필요 없지만, 그래도 다들 축제 분위기를 즐기려 등롱을 들고 다녔다. 란이 산 것은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드래곤 모양의 등불이었다. “귀엽다.” 란이 등불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말하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요.” 란이. 뒷말을 접고 유스타프는 살짝 란의 허리를 잡아당겨 사람들을 피했다. “아, 나오니까 좋다.” 유스타프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든 간격을 유지하려고 애쓸 녹영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유스는?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에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란이 키득거리며 그의 팔짱을 꼈다. 두 사람 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란은 머리카락을 몽땅 틀어 올려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스타프도 용병 같은 간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두 사람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야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며 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밝고 옷차림도 훌륭했다. 야시장의 물건들은 전부 수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조잡하고 가격도 비쌌지만, 그래도 축제날 한 번쯤은 살 만한 물건들이었다. ‘아직 대량생산은 되지 않고 있으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옷감은 당연히 사람들이 손으로 짜는 거고, 옷을 만들고 바느질을 하는 것 모두가 사람 품이 드는 일이다. ‘일단은 인구수가 증가하고 있으니까.’ 이대로 십수 년이 지나면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이 대량 증가할 것이다. ‘베이비 부머 같은 거지요.’ 그래서 아직 야시장의 주요 물품은 대부분 먹는 것이었다. “저거 사 보자.” 란이 유스타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픽 웃고 동화를 꺼내 음료수를 샀다. 설백나무 수액이었다. 희뿌옇고 달콤한 맛이 나는 수액을 한입 마시는 순간, 란은 헛구역질 이 올라왔다. “―!” 손으로 입을 막으며 란은 뺨을 부풀렸고 놀란 유스타프가 “란!” 하고 짧게 외쳤다. ‘독인가?’ 그가 란이 마신 수액의 냄새를 맡았다. 헛구역질을 하며 란이 손을 저었다. “아니, 난, 괜찮, 그거 왜 그렇게 역겨워?” “입맛에 안 맞으시나 보군요.” “그런가 봐. 아, 제길.” 유스타프가 얼른 그 옆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왔다. 란은 조심스럽게 차갑고 시원한 주스를 마셨다. “아, 살 것 같다.” “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데요.” 유스타프는 아직 의심을 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수액을 맛봤다. 혀가 저릿하지도 않고, 특별한 증상도 없었다. 뭐든 란처럼 바로 구역을 하게 하는 독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응, 그냥 냄새랑 맛이 역겨워서.” 란은 한숨을 내쉬고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미안. 내가 마시자고 해놓고.” “그냥 입맛에 맞지 않으셨던 거면 괜찮지요.” “역시 새로운 거에 함부로 도전하면 안 돼. 눈설탕은 맛있는데.” 수액은 왜죠. 한탄하듯 말하고 란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야시장에서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 냄새 때문에 위가 계속 울렁거리는 듯했다. 다들 그 수액을 많이 사 먹는 걸 보니, 란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수 같은 건가.’ 다시 생각해도 역해서 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식당가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고, 술집에서는 건배사로 “국왕 전하 만세! 비전하 만세! 라치아 만세!” 같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란이 술집을 기웃거리자 유스타프가 물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이럴 때는 위험하니까 안 됩니다. 하는 거 아냐?” “전 란의 보모도, 호위도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소리는 지킬 자신이 없는 작자나 하는 거죠.” 느긋하게 말하고 유스타프가 란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들어가시겠습니까?” “응.” 란이 녹색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집 입구에 서기가 무섭게 란은 돌아서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성대하게 구역질을 시작했다. 놀라 따라 달려온 유스타프가 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란, 괜찮습니까? 란.” 전부 게워내고서 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이거 설마?’ 란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가능성이 너무 충분해서 이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생리 주기가 지났던가?’ 건국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항상 생리가 늦어져서 시녀나 그녀나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이 증상은…….’ “란, 괜찮습니까? 어의에게 보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스타프가 란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며 하는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오늘은 그냥 쉴까……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봐.” “그렇게 합시다.” 유스타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식의 느닷없는 구역질이 결코 몸에 좋은 증상이 아니라는 건 그도 잘 알았다.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갑자기 증상이 나타난 거라든가?’ 그렇게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흘러, 유스타프는 옆에서 걷는 란을 번쩍 안아 들었다. “유스?!” “얼른 돌아가죠. 당장 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계속 일만 했지요. 어지럽지는 않습니까? 과로로 몸에 이상이 생긴 걸 수도 있습니다.” “아, 하긴. 그러네. 그럴 수도 있겠다.” 란은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고 유스타프는 기가 찼다. “뭐가 ‘그럴 수도 있겠다.’입니까? 도대체,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느닷없는 돌발 사태에 인파를 뚫고 칸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란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어. 환궁한다.” “알겠습니다. 뒤쪽에 마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허둥지둥 유스타프는 뒤쪽에 준비된 마차를 찾아 올라탔다. 란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별거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아니……” 짐작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닌데, 또 유스타프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했다. 임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괜히 들떴다가 실망하게 될 수도 있고…… 나도 너무 들뜨지 않는 게 좋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 하늘 저택은 상당히 확장된 상태였다. 북쪽 항구로 통하는 란의 대로 때문에, 그 앞에 큰 길과 마을이 생겼고 하늘 저택은 그 험준한 땅에 성벽을 쌓았다. 란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신기했다. 빙벽에 누가 마을을 만들겠어? 하고 생각했는데 돈이 관련되고 필요가 생기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란의 대로 안쪽에도 건물들이 생겼다. 며칠은 걸리는 길이라서 중간에 휴식처로 여관이 생긴 것이다. 당연히 라치아 왕국의 허가를 받은 여관이었고, 임대료를 내고 있었다. 물론 치안소도 그 안에 있었고 말이다. 하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유스타프는 다급하게 어의를 찾았고, 시녀들이 란의 옷을 갈아입히고 가림막 뒤에서 어의를 맞이했다. 진찰판을 들고 란을 진찰한 어의의 표정을 보고 란은 정답을 알 것 같아서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어의가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비전하.” 그 말을 들은 시녀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활짝 웃고는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한 목소리로 축하했다. “경하드립니다!” 안에서 큰 소리가 나자 결국 참지 못한 유스타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란은 괜찮은 건가?” 란이 키득키득 웃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자 모두가 미소를 감추며 방에서 물러났다. 란은 양 뺨을 찰싹찰싹 치고, 짐짓 어두운 얼굴을 하고 가림막 밖으로 나왔다. “유스.” 유스타프는 재빠르게 물러난 시녀와 어의를 보았다가 란의 표정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한달음에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은 겁니까?” “그게―” 란은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모았고 유스타프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란?”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고 다들 물러나라고 한 거야.” 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많이―” 아픈 거냐고, 묻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유스타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란이 심각하게 말했다. “유스. 내가 일을 못 하게 된다고 하면 화낼 거야?” “당연히 아니지요.”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요양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란, 대체 뭐라고 한 겁니까? 많이 안 좋은가요?” 초조한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란이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속삭였다. “아빠가 된 거 축하해.” 유스타프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렇게 얼빠진 얼굴은 처음이라 란은 경쾌하게 웃었다. 여전히 유스타프는 이해를 못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임신이래.”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듯 이야기하자 유스타프의 입술이 떨렸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접기를 반복하고 물었다. “만져도 됩니까?” “당연하지?” 란이 웃었다. “벌써부터 안 그래도 돼.” 유스타프는 아주 천천히, 그녀가 살얼음으로 된 것처럼 살살 뺨을 만지고 꽉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요.” “응.” 란이 다시금 말하자 유스타프의 입에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란.” 떨리는 그의 음성을 듣자 어쩐지 자신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란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유스타프는 차마 그녀를 힘주어 마주 안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란 로미아 드 라치아―” 말꼬리가 저절로 떨렸다. 그가 그녀를 밀어내고 다시 물었다. “아이라고요.” “응.” 란이 히죽 웃자 유스타프가 웃었다. 순수하게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 그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걸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럼 대체 얼마나, 아니―” “글쎄? 내 예상으로는 두세 달쯤 된 게 아닐까 싶은데? 나도 오늘까지는 몰랐어. 입덧이 진짜 갑자기 오는구나. 이럴 수가 있나.”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란을 보고 유스타프는 참을 수가 없어져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마 다른 곳은 잡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항상 그보다 가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더 작고 연약한 것이 생겼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실 나도 그래.” 란이 제 배에 살짝 손을 올려보았다. 이 안에 아이가 있다니. 유스타프와 나의 아이. 생각하니 어쩐지 간지럽고 사랑스럽다. 유스타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럼 걸어 다녀도 되는 겁니까? 아까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아니면―” “유스, 유스, 유스.” 허둥거리는 유스타프의 어깨를 란이 웃으며 가볍게 눌렀다. “괜찮아. 걸어 다녀도 되고, 뛰어도 돼. 일도 예전처럼 할 거고―” “안 됩니다.” “음, 그래. 일은 좀 줄일게. 다행히 사람들도 많아졌으니까.” 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인재를 모을 때까지가 가장 큰 일이지, 모으고 나면 어느 정도는 알아서 굴러간다는 게 조직 체계의 장점이다. 그리고 시스템만 잘 갖춰 두면 그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지만 확인해도 평타는 친다. 란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 초기가 가장 바쁘다고 하지만, 전쟁을 통해 건국을 얻어낸 것도 아니니 라치아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안정이 되어 갔다. ‘그만큼 적도 빠르게 느는 것 같지만.’ 옆 나라가 지나치게 부강하게 되는 걸 바라는 나라는 없을 거다. 라치아는 남과 서로는 제국과 맞닿아 있고, 북으로는 빙벽, 동으로는 로샤펜 왕국과 맞닿아 있었다. 로샤펜 역시 라치아처럼 가난한 작은 왕국이었지만, 라치아가 왕국이 되고 부가 흘러넘치면서 로샤펜의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라치아로 넘어오는 게 문제가 되었다. 로샤펜 왕국은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로미아 상단에 무리하게 관세를 매겼다. 그때 꾹 하고 유스타프가 란의 코를 잡았다. “유스?” 코맹맹이 소리로 놀라 란이 그를 보자, 유스타프가 코를 놓아주며 말했다. “일 생각하시는 거지요.” “어―” “이제 쉬십시오.” “일을 줄인다고 했지, 안 하겠다고는 안 했어.” “란.” 유스타프가 눈을 살짝 찌푸렸고, 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뭐, 임신 초기는 안정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란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단숨에 일이 다 끊겼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게다가 어딜 가든 어디서 나타났는지 유스타프가 나타나서 꼭 따라붙었다. “유스, 회의는 어쩌고?” “제가 없어도 잘될 겁니다.” “아니, 잘 안 될걸.” 란이 기가 차서 말했다. 유스타프가 신음을 내뱉고 말했다. “하지만, 란이 어디에 있나 불안해서.” “난 멀쩡해. 괜찮다구.” 란이 제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이자 유스타프는 “그렇게 과격하게 움직이면―” 하고 말했고, 란이 눈을 찌푸렸다. “아니, 이 정도는 괜찮다니까.” “저도 좀 알아봤습니다. 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손가락만 하다고요.” “음,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 란이 움직이면―” 란은 기가 찼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내가 임신했다고 해서 내 모든 걸 네가 통제할 수는 없어!”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통제하려는 거였으면 벌써 감금이라도 했겠지요. 전 그냥 따라다니는 거 아닙니까?” “아, 아니, 그게 그렇지만.” 그때 저쪽에서 재상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국왕 전하!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유스타프……” 란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으르렁거렸다. “혹시나 역사서에 아내에게 푹 빠져서 망한 나라의 군주로 이름을 올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럼 얼른 가. 난 양옆에 키리랑 디모디아를 데리고 다닐게. 칸도 곁에 있으라고 하고. 응?” 란의 설득에 간신히 유스타프는 떨어졌고, 재상은 “비전하께서 왕국을 구하셨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국왕을 끌고 사라졌다. 란이 눈을 찌푸렸다. “저거 유스 맞아? 유스의 탈을 쓴 다른 사람 아닐까?” 키리가 웃고 말했다. “전하께서는 가족을 전부 사고로 잃으셨으니까요 .” “아……” 란은 작게 숨을 삼켰다. 생각을 못 했다. 유스타프의 어머니는 병으로, 나머지 가족들은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 유스타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양 말하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게다가 비전하를 잃으실 뻔한 경험도 여러 번 있으셨고요. 그분의 유일한 가족은 비전하셨는데, 이제―” 키리의 말에 란이 제 배에 손을 올렸다. “첫 번째 혈육이네.” “그렇지요.” 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런 과보호는 너무 심해.” 란이 투덜거려서 디모디아가 명랑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휴식이잖아요. 쉬시는 게 좋겠지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키리와 디모디아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말했다. “비전하, 이 길은 지금 행정실로 가는 길인데요.” 란이 손을 휙휙 저었다. “응, 그냥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이러니까 전하께서 비전하를 과보호하시는 거라니까요.” 디모디아가 한숨을 내쉬고 키리가 작게 덧붙였다. “일중독.” 란이 혀를 차고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것도 이상하잖아. 지금 내가―” 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임신했다는 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내 행동이 달라져 봐. 바로 알아챌걸? “나가지 않게 하고 있는 거였나요. 국왕 전하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키리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란은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라치아는 이제 거의 안정되었지만, 아직 안정이 되지 않은 곳도 있고 적도 너무 많아. 우리 둘 사이의 아이는 더더욱 바라지 않겠지.” 후계가 생긴다는 건 왕위가 그만큼 견고해진다는 말이다. 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좋은 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는 거지만, 이미 그 단계는 지나 버렸으니까.” 키리가 갸웃했다. “하지만 그런 멍청이가 있을까요? 지금 하늘 저택은 요새나 다름없는걸요.” “그야 외부의 침입에는 그렇지만.” 디모디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내부에서요?” “새로운 사람이 많이 늘었잖아. 지금도 신입을 엄청 뽑고 있고. 전부 신분 확인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쉽지는 않지.” 건국 초기는 아무래도 적당히 넘어가는 일도 많은 법이다. 란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운 시녀들의 얼굴은 나도 잘 모르니까.” “그걸 다 아는 쪽이 이상한 것 같은데요.” 디모디아가 눈을 굴렸다. 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적어도 내가 얼굴은 다 익히고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유스타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는.” 키리가 여우눈으로 히죽 웃었다. “하지만 좋으시면서.” 란이 웃음을 지으면서도 눈을 찡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좋은 마음이 10이면 곤란함이 90이야.” 그녀가 행정실 앞에 서자 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단 할 일은 할 생각입니다.” “비전하의 의지를 누가 막겠습니까.” 키리가 웃었다. “전하께서도 못 막으실 텐데요.” 행정실에서 일을 끝내고서, 란은 해가 지기 전에 묘지에 들렀다. 저택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묘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가까운 법이라고 라치아 가주가 그랬다던가. “어쩐지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루미에의 무덤가에 섰다. 깨끗하게 손질된 무덤의 묘비에는 이름과 연도만 새겨져 있었다. “그쪽으로 갔다는 건 알지만 말이야. 이쪽에서는 끝인 거니까.” 란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 언제쯤이면 울지 않게 될까? “루미에. 네가 진짜 많이 행복하기를 바라.” 란은 그렇게 말하고 꽃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잠시 서 있다가 란이 돌아섰다. 새하얀 빙벽이 일몰에 반사되어 주홍색으로 빛났다. 잠시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데 검은 점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걸 바라보고 란은 웃었다. “노아.” 순식간에 가까워진 드래곤은 이제 말만 한 크기였다. 드래곤은 사람의 모습으로 훌쩍 변했다. 이제 대여섯 살쯤 되는 사내아이의 모습이었다. 보통 이렇게 모습을 바꾸려면 30년은 걸린다는데 노아는 3년 만에 모습을 바꿨다. “란. 마중 나왔어.” “그거 감사한 일이군요.” 란의 말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서 란이 타고 온 마차 위에 앉았다. 사실 이렇게 달리는 마차 위에 앉아서 바람을 맞는 게 노아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말은 드래곤인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기겁해서 날뛰기 때문에, 이런 마차놀이는 란이나 유스타프가 타는 마차에나 할 수 있었다. 그 둘의 마차를 끄는 말은 군마여서 훈련이 되어 있었다. 키리가 노아를 보고 중얼거렸다. “이 이상 든든한 가드는 없죠.” “없죠.”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가 마차 꼭대기에 앉아 있으면 라치아의 누구나 그 마차가 누구의 마차인지 알았다. 비전하의 마차겠지. 그러니 표적이 되기 쉽다고도 하겠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드래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자는 없었다. 마차는 시민들의 환호와 만세 삼창 속에서 하늘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 ‘아니, 그렇다고 이건 아니지 않나. 감금이라니.’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그녀는 지금 왕국의 여름 별장인 ‘틸라노이’에 머물고 있었다. 란이 투덜거렸다. “물론 내가 좀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하나도 안 너무하거든요?” 키리가 찻주전자를 든 채로 경쾌하게 맞받아치며 물었다. “차를 더 드시겠어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키리는 약차를 따르며 말했다. “새벽까지 일하시는 건 좀이 아니지요.” “한 번이었잖아.” 키리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란이 “어― 두세 번……” 하고 웅얼거리고는 차를 마셨다. “나야 쉬니까 좋지만……” “좋으시다면 좋으신 대로 즐겨 주세요.” 키리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어서 란은 한숨을 내쉬고 읽던 편지를 마저 펼쳤다. 루미에 대신 그녀는 릴리에게 꾸준히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자세한 사정을 덧붙여 써 보내면서도 란은 그녀가 그걸 믿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해도, 이제 릴리가 이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란은 릴리에게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해 달라고, 루미에 대신 최선을 다하겠다고 편지를 썼고 릴리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어조의 편지를 써서 돌려보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릴리의 성인식이 가까워진 요즘, 릴리는 라치아 왕국에서 일해도 되냐고 물었고 란은 기꺼이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서 란은 릴리가 오면 어디서 묵을지, 거처를 정하고 꾸미며 나름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엥?’ 오늘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레쉬라니.’ 릴리의 편지에는 ‘언니, 저 하레쉬가 좋아요!’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오빠에게는 말 못 할 내용이지만……’ 하며 덧붙임을 보냈고 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레쉬가 보기에 릴리는 완전히 핏덩이일 텐데?’ 나이 차이가 최소 70년 정도 나지 않나. ‘뭐 자기가 좋다니 어쩔 수 없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릴리는 어리니 짝사랑이든 연애든 마음껏 해 보는 게 좋을 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덕에 란은 여가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 일 안 하니까 할 게 없다.” 란이 기지개를 켜며 외쳐서 디모디아가 눈을 찌푸렸다. “쉬는 걸 좀 즐기세요.” “그러네. 책도 실컷 읽고 있고…… 어?” 란이 움찔해서 휙 디모디아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뱃속에서 움직였어…….” “어머?” 디모디아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키리는 어쩐지 움찔하며 물러났다. 소다가 꺄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란은 신기해서 제 배를 한번 만져보았다. “음, 역시 움직이네.” “벌써 그렇게 움직이다니 활발하네요.” “평균이 아닌 건가?” 갸웃하며 란이 카라에게 묻자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아이니까, 평균이 아닌 게 당연하죠.” “으음―” 그런 식의 부담도 좀 그런데. 란은 피식 웃고 끙차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법 배가 나와 있었다. “그럼 모처럼이니 낮잠이나 잘까?” 란이 살풋 웃으며 말해 시녀들은 재빠르게 잘 준비를 했다. 낮에 모처럼 틸라노이에 손님이 한 사람 방문했다. “란은?” 유스타프의 물음에 그의 망토를 받아 들며 키리가 말했다. “낮잠 주무시고 계세요.” 그리고 “깨울까요?” 하고 상투적으로 덧붙였다. “아니.” 유스타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키리가 그의 어깨너머를 힐끗 보고 물었다. “혼자 오신 건가요?” “그래.” “아, 지금쯤 난리 난 호위대장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음미하듯 눈을 감고 키리가 중얼거렸다. 유스타프가 코웃음을 쳤다. “혼자인 게 더 편해. 청염도 있고.” “그거야 그렇지만요.” 키리는 유스타프가 적어도 호위대장에게는 말하고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유스타프는 아무 말 없이 빤히 키리를 보았고, 키리는 갸웃했다가 얼른 대답했다. “그 뒤로는 딱히 멍청한 시도는 없네요.” “노릴 거면 분명 날 노릴 거라고 생각했지.” 일부러 자신의 호위까지 느슨하게 했는데. 유스타프의 말에 키리가 킥킥 웃었다. “전하를 노리든, 비전하를 노리든 효과는 같을 것 같거든요. 그러면 비전하 쪽이 좀 더 만만하다고 할까?” “그러니까 란에게 호위가 더 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하나?” “붙어 있어도, 라는 거겠지요. 비전하께서 저희 그림자의 주인인 걸 아는 자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위대한 대마법사라는 것도. 짙은 미소를 띠며 키리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침실로 향했다. 슬쩍 들여다보니 쿨쿨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란이 있었다. 저절로 그동안의 피로며 뭐며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행정관들의 미묘한 기 싸움이라든가, 회계관이 쳐들어오더니만 ‘행정관들은 돈이 펑펑 나오는지 알아!’ 하고 외쳤던 거라든가, 근위병단 재편성에서 나오는 병단장들의 알력 다툼― 같은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슬쩍 뺨을 눌러보니 “흐냠.” 하고 란이 입맛을 쩝쩝 다셔서 유스타프는 다시 웃었다. 그러자 스르륵 란이 눈을 떴다. 유스타프는 얼른 손을 허리 뒤로 숨겼다. “유스―?” “네.” “어서 와.” 란이 팔을 벌리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런가. 그래서―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란을 믿을 수가 없으니 좀 더 여기 있어 주시면 좋겠는데요.” “엥? 암살 시도 다 처리된 거 아냐?” 란이 의아해하며 물어 유스타프가 움찔하고 물었다. “아셨습니까?” “그야.” 란이 입을 비죽였다. “난 녹영의 주인이야. 게다가―” 이런 식의 협잡이면 진짜, 어마어마하게 몸으로 겪었다. 제국이든 왕국이든, 일단 상대의 처리에 암살을 시도하는 게 기본 요건인 듯했다. ‘보통 그런 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상대도 궁지에 몰려 있다는 이야기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런 느낌.’ 암살은 결코 쉽지 않다. 가서 죽여라, 라고 하면 픽 죽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납치 시도 두 번, 암살 시도를 두 번 당한 게 접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최면을 이용한 것까지 있었다고. 나중에 뒤를 캐 보니 란만 없앤다면 트라반 왕국 재흥에 상당한 금액을 쏟겠다고 올리비아가 개인적으로 약조했던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반역죄인 것이라, 라벨이 새로운 미로 공작을 마음껏 휘두르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라치아 독립도 한층 더 수월했고. 하지만 이건 모든 일이 지난 후의 이야기고, 그때는 상당히 끔찍했다. “그런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확실히.”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이야기하겠습니다.” “좋아.” 유스타프는 변명처럼 “란이 놀랄까 봐―” 하고 작게 말했고 란은 웃었다. “나도 알아.” 그러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당겨 제 배 위에 올렸고, 유스타프의 몸이 흠칫했다. “움직이네요.” “응.” 유스타프가 반은 경외하는 듯한, 반은 숭배하는 듯한 눈으로 란을 보아 란은 다시금 웃어 버리고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이렇게 활달한 걸 보니 분명히 딸이야.” “딸이요?” “응, 유스를 닮았으면 이럴 것 같지 않거든.” 어쩐지 날 닮았지.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웃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이름을 미리 생각해 둬야겠군요.” “그게 좋겠지.” 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스타프에게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유스.” “네.” “나 먹고 싶은 게 있어.” “하명하시지요.” 그의 말에 란이 킥킥 웃고 “눈딸기.” 하고 속삭여서 유스타프의 표정이 묘해졌다. “눈딸기요.” “응, 그거랑 밤 케이크가 먹고 싶어.” “밤 케이크. 그건 알겠습니다.” “복숭아도.”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저야 시키는 입장이니까요.” 부하들을 닦달하지요, 하는 그의 말에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스타프는 이제 눈에 띌 정도로 나온 란의 배를 바라보았다. “불안합니다.” “뭐가 불안하신가요?” 란이 그의 양 뺨을 감싸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도 튼튼하고 유스도 튼튼하고, 게다가 세계수의 가호까지 있는걸. 아이도 분명히 튼튼해.” “아뇨, 그게 아니라.” 유스타프가 제 뺨을 감싼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뜻밖의 고민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렸다가 웃었다. “좋은 가주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죠.” “유스타프는 좋은 아빠가 될 거야.” 란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하다는 거지.” 란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이어 말했다. “그냥 부모가 되는 건 쉬워. 하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건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고, 쉽지 않다고 생각해. 나도, 유스도 초보니까 둘이 같이 하면 돼. 괜찮아. 그리고―” 란이 속삭였다. “우리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 많잖아?” 모르면 물어보면 되지.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웃고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대었다. “큰 고민이었는데, 란에게 말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변해 버리네요.” “그러니까 부부지.” 둘이서 짐을 지면 된다구.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다시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란을 안았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 조심스러운 손은 변하지 않아서,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와 그의 어깨에 기대며 그녀 쪽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 칸은 빙벽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물론 상사가 까라면 까는 게 부하의 미덕이라고 하지만, 여름이 온 이 상황에 빙벽에서 눈딸기라니. 구석구석 산을 뒤지고 다니는 녹영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짠했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그 짧은 시기에 나오는 딸기인지라, 이미 날씨가 온화한―빙벽치고는― 여름에는 딸기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인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니까.’ 유스타프의 말도 말이지만, 어쨌든 녹영의 주인이 원하는 게 있다면 가져다 바치는 게 녹영의 자존심. “여기에 있습니다!” 그때 위쪽에서 부하가 외쳐 칸은 반색했다. “정말인가!” “네!” 거의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꼭대기에 가까운 곳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눈딸기 서너 알을 건져서 녹영은 뿌듯한 얼굴로 빙벽을 내려왔다. 이제 딸기를 보존 마법이 걸린 용기에 넣어서 틸라노이로 부치면 끝난다. 칸은 주인님 옆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는 키리를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 일이 잘 맞는다니 다행이지만.’ 성실한 녹영인 디모디아와 달리, 두 번째인 키리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다. ‘주인님은 그 점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녹영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칸 역시 그럴 듯한 직함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로미아 상단의 부상단주라는 자리 역시 그의 자리였다. 상단주는 란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 자리는 비어 있었고, 부상단주인 그가 실질적으로 여기저기 안면을 트고 다녔다. 종종 보는 키리는 “제법 상단주처럼 보이네요.” 하고, 비웃는 건지 아닌지 모호한 웃음을 킥킥 흘리고는 했다. ‘재미있는 주인님이지.’ 칸은 란을 떠올렸다. 한없이 다정하고 물러빠져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면서도 어떤 때는 놀랄 정도로 날카롭고 잔혹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모른다는 점이 너무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고 모른다는 점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자기 건 아끼니까.’ 그런 점은 유스타프와 똑같다. 이런 일을 하면 자신이 장기말로 쓰이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란이 결코 그렇게 쓰고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칸은 알았고, 키리도, 그 아래 모든 녹영들도 알았다. ‘그렇게 믿게 하는 건 대단한 거지.’ 칸이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녹영들은 딸기를 구해 생글생글한 얼굴이었다. 주인의 명령이면 잔혹한 고문도 암살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작자들이 딸기를 구했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좀 우습기도 했다. ‘뭐, 주인님은 그런 점이 건강하고 좋은 거야, 라고 했지만.’ 뭐가 건강한지는 모르겠다. 하늘 저택으로 들어가는 성벽을 통과하는데, 블레인이 그를 불렀다. “칸.” 칸은 힐끗 그를 보고 부하들에게 딸기를 보내라고 하고는 블레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표정을 보니 눈딸기를 구한 것 같군요.” 블레인의 말에 칸은 피식 웃었다. 블레인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녹영의 첫 번째 그림자와 이렇게 대낮에 대화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걸 확인하시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블레인은 이제 왕실 기사단 단장이었고, 그의 옷은 예전보다 더 화려했다. 무엇보다도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푸른색 망토는 왕실 기사단 단장에게만 하사되는 물건이었다. “북쪽 항구에 엘레비스 상단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째거든요.” “이번 주에 말입니까?” “네. 이렇게 자주 상선을……” “보낼 만큼 큰 상단이 아니죠.”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경비병들 조사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온 건가요?” 블레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저희 쪽으로는 한계가 있는지라. 뭐, 물론 엘레비스 상단이 커질 수도 있는 거지만.” “알겠습니다.” 칸이 고개를 끄덕였고 블레인은 작게 웃었다. “직접 녹영에게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 기사단장에게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지요. 그보다 업무 과중 아닙니까?” 항구 경비대 일까지 왕실 기사단장에게 들어간다면? “북쪽 항구는 왕실 영역이니까요.” “거기로 쳐들어올 멍청이는 없을 텐데요.” 란의 대로를 통하지 않으면 대륙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오로지 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죠.” 나중에 가주님께, 하다가 블레인이 눈을 찌푸리고 정정했다. “전하께 혼납니다.” 칸은 피식 웃었다. “국왕 전하는 무섭지요.” “무섭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감정한 푸른 눈이 자신을 보면 전부 꿰뚫려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를 분노하게 만들거나 화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웠다. ‘웃게 만드는 건 비전하뿐이고.’ 블레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칸에게 말했다. “할 이야기는 그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칸이 성벽을 내려갔다. 블레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돌아서서 성벽 너머를 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 저택 바로 근처까지 들어온 마을과 길의 북적임이 보였다. 변하지 않은 건 빙벽뿐이었다. 한없이 높은, 그 깎아지른 듯한 산맥은 만년설이 쌓인 채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그때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검은 드래곤이 날아오고 있었다. 성벽에 내려앉은 드래곤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이제 대여섯 살쯤 되는 어린 남자아이 모습이었다. “블레인.” “노아 님.” 블레인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란은 고심 끝에 드래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다. 드래곤이 없는 이 시대 마지막 드래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란이 웃으며 말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 이 드래곤이 어둠이었다는 걸 아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덕분에 모두가 적대감 대신 이 생물에게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고, 노아의 머리를 마구 쓸어대는 건 란뿐이었다. 물론 노아가 그걸 용인하는 것도 란뿐이고. 란도 유스타프도 노아의 모습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수호룡으로 공표되어 있는 존재다. 그리고 드래곤이면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가장 나았다. 그가 자아가 생기자마자 생긴 그의 출생에 대한 궁금증이나 여러 가지 질문들을 란은 진실로, 성심성의껏 답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노아는 그냥 신기할 뿐인 듯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럼 난 그대의 원수인가?” 하고 물어와 란은 희미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노아는 환해진 얼굴로 “그럼 됐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는 마음껏 하늘 저택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성벽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블레인의 물음에 노아가 갸웃하고 말했다. “싸움 났다.” “네?” “1번 대랑 2번 대.” 블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왕실 기사단이 되면서 청염 기사단은 재편성이 되었고, 사람 역시 늘어났다. 그래서 단일 편성이 아니라 부대를 나눠 총 5개의 부대가 되었더니만, 서로 경쟁심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놈들이 또! 어딥니까?” “연무장.” 블레인이 씩씩거리며 성벽을 내려가는 걸 보고 노아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인간들이란.” 드래곤인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멀리를 바라보았다. 란의 존재를,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란의 뱃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그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니. “얼른 보고 싶다.” 작게 중얼거리고 노아는 슬쩍 병사들을 보았다. 성벽의 병사들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빠르게 경례를 했고, 노아는 곧 다시 드래곤으로 몸을 바꾸어 날아갔다. 느긋하게 세계수 밑에서 간식이나 먹을 예정이었다. 봄의 정원으로 들어가자 온화한 공기가 느껴졌다. 노아는 재빠르게 모습을 바꾸고는 뜻밖의 인물을 보고 갸웃했다. “하레쉬.” “노아 님.” “여기는 무슨 일이야?” 란이 하늘 저택에 없는데? “제가 란에게 볼일 있을 때만 온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사실이잖아?” 노아의 반문에 하레쉬가 정색했다. “아닙니다.” “아냐?” “네. 그리고 오늘은 노아 님을 뵈러 온 겁니다.” 그가 그러며 양피지 뭉치를 내밀었다. 너덜너덜해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문서였다.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 고마워.” “하지만 저희도 자료는 거의 없어서……” “알아. 어둠에게 대륙이 다 먹히기 전에 드래곤들은 떠났고, 남은 건 나뿐이라며. 어둠 때문에 기록은 대부분 파괴됐고.” “네.” “이상해.” 노아가 눈을 찌푸렸다. “내가 모르는 나라니.” 하레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을 되찾고 싶으십니까?” 노아가 눈을 들어 하레쉬를 보았다. 드래곤의 금색 눈동자에 하레쉬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전혀. 이상한데 여하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같아. 그런 이야기.” “그렇군요.” “게다가 여자 때문에 생을 망치다니 한심하잖아.” 투덜거리며 노아가 하레쉬에게 양피지 뭉치를 받아 들고 물었다. “란은?” “건강합니다.” “뱃속의 아기도?” “네.” 노아가 어린아이답게 웃었다. “기대된다.” “그러십니까?” “응.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노란빛에 가까운 금색 눈이 반짝 빛났다. “여자아이일 거야.” 겨울이 오기 전에 란은 하늘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의 주인이 돌아오니 저택 역시 활기를 띠었다. 사실은 이제 왕궁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모두가 여전히 하늘 저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저택이라고 하면 왕실의 위엄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새로운 왕궁을 지음으로써 그 의견도 잠재웠다. 치우친 빙벽이 아니라 새로운 왕궁이 나라 중심부에 세워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쪽을 왕궁이라고 부르고, 이쪽은 여전히 하늘 저택이었다. 제복도 왕국이 되면서 새로 싹 바꿔서 하인부터 수석 집사까지 모두가 제복을 입고 근무했다. 그 많은 인원에게 제복을 맞추는 것은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라치아 왕실이 기꺼이 그 모든 금액을 지불했다. “쓴 만큼 얻는 것도 있으니까.” 란은 그렇게 말했고 왕실에 들어오는 하녀가 가장 기대하는 날은 역시 제복 지급일이 되었다. 제복은 맞춤이라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고, 처음 제복을 입는 순간 모두 뿌듯한 웃음을 짓고는 했다. “모두가 기뻐하는 얼굴을 하는 그때가 좋지요.” 이제 수석 시녀장이 된 카라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역시 카라에게 맡기기를 잘했어. 항상 카라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수석 시녀장은 란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와는 역할이 달라서 카라와 란은 업무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카라가 “후후, 황공한 말씀을.” 하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소다가 있으니까요.” 카라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다도 제법 관록이 붙어서 새로 들어온 시녀를 잘 다루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키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본인이 들을 때 큰 소리로 해 주세요.” “다음에는 꼭 그러지.” 란의 말에 카라가 “어머?” 하고는 “소다는 그러면 얼굴 빨개질 거예요.” 하고 말했다. 때마침 소다가 쟁반에 다과를 들고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즐겁게 하고 계시나요?” 란이 씩 웃었다. “음― 소다가 엄청 잘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 란의 말에 소다의 뺨에 붉어졌다. “화, 황공합니다.” 키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죠. 비전하도 참,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요.” “키리, 무례하게.” 소다가 눈을 찌푸리며 얼른 쟁반을 내려놓았다. 카라가 빙긋 웃고 말했다. “거의 완성되어 가시는군요.” “응.” 란이 무릎 위에 올려뒀던 작은 털신을 들어 올렸다. 소다가 양손을 꽉 맞잡았다. “세상에, 이거 너무 귀여워요.” 곰돌이 무늬까지 들어간, 새하얀 털신이었다. 란이 제 손바닥 위에 털신 한 쌍을 올려두고 살펴보았다. “그지? 내가 봐도 잘 만들었어. 역시 이런 쪽이 더 취향이라니까.” 란이 한숨 섞인 웃음을 내쉬었다. 여기 와서 느낀 건데 자신은 수에도 뜨개질에도 재주가 있었고, 또 거기에 집중하는 시간은 상당히 즐거웠다. “평범한 레이디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이야. 재능도 있고.” “그럴 마음이 없으시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녀들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청염을 떨치시길.” 유스타프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물렸다. 란이 “왔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가기 전에 인사를 하러 들렀습니다.” “겨울 사냥?” “네.” “올해도 가는구나.” “가야지요.” “잘 다녀와요, 아빠.” 그 말에 유스타프는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란이 만든 털신에 시선이 닿았다. “작네요.” “작지.” 그의 푸른 눈이 란을 바라보았다. “원하신다면 정말로, 느긋하게 지내셔도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느긋하잖아.” 달이 거의 찬 후로는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심심해서 빈손을 채우려 일하니 벌써 털신만 세 켤레, 손수건도 열 개쯤 되었다. 그녀가 털신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눈을 찌푸렸다. “진짜로 나 일중독인가 봐.” “부디 쉬어 주세요.” “알았어.”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배를 보며 말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는 떠나고 싶지 않지만…….” “얼른 다녀오면 되지. 그리고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고.”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지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이나 내일쯤 새로운 손님이 오니까.” “아. 키릭스 공작 부인이 오는군요.” 이 시기에 와 주다니 고마운 손님이다.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신 것 없이 모시겠습니다. 손님방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란의 출산 시기 때문에 겨울 사냥도 확 앞당겼다. “그럼.” 인사하고 유스타프가 란의 입술에 입 맞추고,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고는 방을 나섰다. “녹음을 드리우시길.” 알현실에 우아한 인사가 울려 퍼졌다. “생명의 정수가 그대에게.“ 마주 인사하고 란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리제!” “비전하.” 꺅꺅거리며 소녀처럼 손을 마주잡고 엘리제는 란을 바라보았다. “경하드립니다.” “편지로 이미 이야기했잖아.” “그래도요.” 엘리제가 흠흠 하고 란을 살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혈색이 좋은 거지요?” “좋기는, 동글동글해졌지. 게다가 다리도 붓고, 툭하면 눈물도 나고.” 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심지어 화장실도 자주 간다고.” 엘리제가 명랑하게 웃어서 란도 웃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가 와줘서 기뻐.” “황공합니다.” “공작가는 어때?” “아―” 엘리제가 빙긋 웃었다. “즐거워요. 후작과 공작이 뭐가 다를까 했는데, 확실히 다르던걸요. 공작 부인은.” “음, 상상이 되는걸, 리제가 제국 사교계의 중심이 돼서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 “어머? 비전하. 설마요.” 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폐하께서 결혼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황태후 마마는?” “여러 가지로 충격이 크신지 물러나 계세요.” “뭐, 그렇겠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녹영을 통해서 제국 황실 이야기야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보고서가 아닌 이런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건 즐거웠다. “조코 남작 부인의 앵무새는? 여전해?” “아, 얼마 전에 열린 티파티에 날아 들어와서는 케이크를 훔쳐 먹다가 딱 걸렸다는군요.” “진짜? 앵무새가 케이크도 먹어?” “견과류 타르트였거든요. 조코 남작 부인이 짠하고 새로 만든 다실로 손님들을 안내했는데― 그녀의 앵무새가 정신없이 타르트 위의 견과류를 먹고 있었던 거지요.” “아, 저런.” “저런이지요.” 두 사람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란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와줘서 고마워, 리제.” “별말씀을요. 겨울 내내 곁에 있으면서 수다를 떨 테니까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거 기대되네.” 란이 빙긋 웃었다. 엘리제가 와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유스타프는 마중을 나온 란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요.” “응, 하지만 나오고 싶었으니까.” 란이 빙긋 웃고 손을 뻗어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조심조심 마주 안았다. 만삭인 그녀를 정면에서 안는 건 피하고 싶다. 가볍게 그녀의 뺨에 키스하는 입술이 차가워서 란은 미간을 모았다. “차가워.” “밖은 겨울이거든요.” “마수는?” 유스타프는 언제나처럼 겨울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스타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수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이 없어졌으니 그 영향일까요. 대신―” “사람?” “네. 사람과 돈이 모이니 범죄자가 생기는군요. 이런 한겨울에도 말입니다.” “국왕 전하는 그런 일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이 정도는 기분 전환용이지요.” “아, 밑에서 벌벌 떨 하급 관리들 얼굴이 눈에 선하다.” 국왕이 전면에 나서서 사냥과 범죄자 척결이라니. 같이 말을 달릴 경비대장의 등에 식은땀이 흐를 게 눈에 보인다. “뭐, 라치아는 작으니까 가능한가.” 공작일 때와 크기가 동일하니, 사실 업무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재편성 때뿐. 작아서 인구수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대신 구석구석 행정이 손에 닿는다는 점은 좋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하지만 임산부로서는 괜찮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조심조심 란의 배를 어루만졌다. “조용하네요.” “그래도 지금은 좀 움직이는걸.” 원래 출산일이 가까우면 거의 안 움직인대, 하고 란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아빠랑 만나서 좋은가 보네.” “제 목소리를 안다는 게 신기합니다.” “나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란의 말이 씨가 된 것처럼, 그날 새벽에 하늘 저택의 불이 전부 켜졌다. 방 밖에서 서성이는 유스타프는 안쪽에서 비명이 터질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전하, 차라도 드릴까요?” 곁에서 엘리제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도 긴장이 가득 차 있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네.” 란이 저러고 있는데, 뭐가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키리가 지쳤지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비전하는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공주님도 역시 무사하시고요.” “내가 들어가서―”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너머를 기웃거리며 말하자 키리가 손가락을 들었다. “딱 1분만요.” 엘리제는 안도하며 복도에 놓인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그래도 빨리 나왔네요. 초산은 하루 종일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유스타프는 대답 없이 초조하게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말은 들었지만 역시 눈으로 직접 란을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 후 치료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시라고 말해 유스타프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잔뜩 지친 얼굴로 란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유스.” “란.”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란의 오른쪽 눈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눈가를 쓸자 란이 말했다. “얼굴 빨갛지?”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몸을 숙여 그녀의 뺨에 입 맞췄고 란이 가볍게 웃었다. “아기 봤어?” “아직요.” 란이 시선을 돌리자 포대기에 아기를 감싸서 디모디아가 살며시 다가왔다. “예쁜 공주님이에요.” 란은 아기를 보자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안녕, 아가야.” 유스타프가 조심스럽게 디모디아에게서 아기를 받아 들었다. 그는 잠시 홀린 듯이 아기를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란을 닮았어요.” 란이 웃었다. “아직 누구를 닮았다고 할 단계는 아니지 않아? 빨갛고, 못생겼지. 아, 머리카락은 유스를 닮아서 검은색이네.” “아뇨, 귀엽습니다.” 힘주어 유스타프가 말해서 란은 다시 웃었다.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면…….” 눈동자는 무슨 색이려나? 갸웃하자 키리가 말했다. “눈동자 색을 알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자, 아기님은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비전하께선 쉬셔야 해요.” “응……”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도 됩니까?” “그럼 나중에 침실에서 뵙지요.” 키리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의 손을 붙잡아 그 손등에 입 맞추고 유스타프는 방을 나갔다. 란은 축 늘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제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카리톨 목걸이에서 따듯한 기운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남아 있는 통증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이어 들어온 하레쉬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톨에는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착용자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지.” “그랬구나.” 란은 키리가 가져온 약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혹시나 추가적인 출혈이 있는지 보고, 그 다음 침실로 옮겨드리겠습니다. 푹 주무시면 됩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너 시간 후에야 란은 침실에 누웠고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누운 란의 손을 잡아주었다. “주무세요.” “응…… 그리고 이름.” “생각해 두지요.” 유스타프가 말하고 잠드는 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란은 완전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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