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암흑룡 델판토
Chapter 2. 암흑룡 델판토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며 새하얀 돌들이 튀었다.
유스타프는 검을 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큰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에서 상대방의 눈이 번득이는 게 보였다.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동자가 세로로 깜박임을 하며 이쪽을 틈 사이로 노려보고 있었다.
‘크군.’
유스타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마주 보았다. 눈동자가 저 정도 크기라면 몸체는 훨씬 크겠지.
“이브리아아―”
상대가 으르렁거리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가 말했다.
“이브리아는 없다.”
“내놔라!”
“이미 천 년 전 일이야.”
유스타프의 목소리에 상대는 잠시 침묵했다.
후욱후욱 불꽃이 섞인 숨결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가 사라졌다. 한순간 상대가 보이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싶었다.
유스타프는 방패를 들고 올걸,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쾅―!
드래곤이 다시 머리를 문에 부딪쳤고, 이번에는 완전히 문이 부서졌다. 하지만 문의 크기에 비해 드래곤의 몸체가 더 커서 그는 목이 걸렸다.
“네놈들이 이브리아를 해쳤구나!!”
그가 그렇게 외치며 목 양쪽을 부풀렸다가 불숨을 내뱉었다.
유스타프는 투구창을 내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불꽃이 동굴 입구에서 토해져 나옴과 동시에 유스타프도 동굴 입구에서 나왔다.
그가 참았던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불꽃의 열기는 갑옷이 막아 주지만, 그 불을 숨 쉬며 삼켰다가는 목 안쪽이 다 타 버렸을 터였다.
“가주님!”
“주군!”
“라치아로 돌아간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달려와 말에 올라탔다.
쾅!
쾅!
산을 울리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울리는 소리가 멈췄다가 이번에는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 에헤프 라 도르후아!!”
“무슨 뜻이죠?”
루미에가 갸웃하자 블레인이 “모르지.” 하고 말하며 말에 올라탔다가 말했다.
“아군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 같군.”
빙벽에 흩어져 있는 마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외쳤다.
“포메이션 F!”
그러며 그가 달려 나가자 기사들이 따라 말을 달리며 일사불란하게 포지션을 만들고 말 뒤에 있는 장창을 꺼내 들었다.
블레인이 투구창을 내리며 말했다.
“마님께서 성벽을 만들어 두셔서 다행이군요.”
“란은 선견지명이 있거든.”
유스타프가 답했다.
“크아앙―!”
“컹컹―!”
각양각색의 마수들이 길을 막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낙마하지 마라!”
블레인이 소리쳤고 유스타프가 이어 말했다.
“낙마하는 녀석은 마갑과 갑옷을 빼앗고 연병장 백 바퀴 돌릴 거다.”
블레인이 피식 웃었다. 기사단원들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 말은 낙마해도 두고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원들은 허벅지에 힘을 주며 창과 마갑으로 마수들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눈으로 된 흰 성벽이 햇빛에 반짝였다.
성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뒤에 따라오는 마수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데 성벽 사이로 궁수들이 서 있는 게 보여서 유스타프가 말했다.
“전력으로 달려!”
그러자 말들의 옆구리에서 날개가 솟구쳤고, 말들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달려 마수들과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문으로 기사들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성벽에 서 있던 란이 외쳤다.
“발사!”
그러자 화살 비가 마수들을 향해 쏟아졌다. 란이 두 번째로 외쳤다.
“마법 부대, 발사!”
그러자 불덩이들이 날아가 쾅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수들을 흩었다. 그러는 사이 기사단원들은 전원 무사히 성문 안으로 들어왔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성문의 가장 큰 고리를 걸자, 문 전체에 마법진이 번쩍하고 빛났다가 사라졌다.
유스타프가 말을 버려두고 성벽으로 올라가서 란을 붙잡았다.
“여기 서서 뭘 하십니까!”
“지휘하지.”
태연하게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기가 찼다. 그녀는 지휘관답게 갑옷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노출이 되게―”
쿵―!
그의 말을 가르며 산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니하 둠 오하르 에헤프!!”
웅웅 울리는 소리가 빙벽 전체를 감아 돌았다.
란이 혀를 찼다. 유스타프가 란에게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응, 아― 유스에게는 다르게 들리나. ‘동포들이여, 일어나라. 때가 왔다.’ 그렇게 외치고 있어.”
그러며 그녀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빙벽의 마수가 몇 마리나 될까?”
“상당히 되는 것 같군요.”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빙벽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마수 떼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하늘 저택의 성벽 앞에 새까맣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려가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이 비행하는 마수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벽 아래층에도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애로 슬릿, arrow slit)이 마련되어 있어서 란은 사수들 역시 다 성벽에서 내려가도록 했다.
“이제 어쩌지?”
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란의 계획을 실행해야겠지요.”
“드래곤 슬레이어 계획?”
“네.”
“그렇지만―”
“키에에엑!”
쿵―!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란을 멈추게 하고 유스타프는 성벽 밖으로 나왔다.
먹이를 찾는 독수리처럼 비행형 마수들이 빙빙 상공을 돌다가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리고 뭔가에 부딪쳤다.
쿵―!
그때마다 언뜻 햇빛 속에 뭔가가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이브리아의 보호막인가 봐.”
란이 중얼거렸고,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렸다.
“왜 나오셨습니까?”
“저걸 봤으니까. 안전하다고 판단했어.”
그런 판단을 할 정도의 머리와 권리는 있어, 하고 란이 말해서 유스타프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저게 언제까지 버틸까요?”
유스타프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가주님, 마님!”
블레인이 눈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두 분 다 여기에 계시면 안 됩니다.”
란이 그 말에 키득 웃었다. 유스타프가 힐끗 그녀를 보자 란이 노래하듯 말했다.
“혼나는 게 나 혼자가 아니구나, 싶어서.”
그 사이 다가온 블레인이 란의 말을 듣고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두 분을 혼내겠습니까. 기사들을 성벽에 배치시켰습니다.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미끄러지더군요.”
“얼음이라 그런가?”
란이 갸웃하자 블레인이 고개를 살짝 흔들고 말했다.
“발톱이 몸무게를 지탱할 만큼 깊게 박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얼음이 단단히 언 거야…….’
드워프제 얼음은 다른 건가?
란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스타프가 물었다.
“얼음수정 비축은 얼마나 있습니까?”
“아, 그게―”
란이 살짝 뺨을 붉혔다.
유스타프는 얼음수정이 빽빽한 창고를 보고 말했다.
“3년은 농성해도 되겠군요.”
“그, 그게― 일단 전쟁이니까 물자 비축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식량은요?”
“비슷해.”
많이많이 쌓아 뒀지.
“너무 많은가―?”
란이 갸웃하며 물어와 유스타프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지?”
역시 보급이 중요하다니까, 하고 란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해서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유스!”
‘이런 상황에―?’ 하고 란이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자 블레인과 시종장이 시선을 멀리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란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때 지하 저장고 위에서 기사 한 사람이 일행을 부르며 말했다.
“드워프분들이 오셨습니다.”
“알겠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광산 근처의 돌집에서 묵을 드워프들이지만, 란이 어둠에 대해 언급하고 성벽을 부탁한 뒤로는 모두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유스타프와 란이 나가 보니 드워프들 모두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 대표로 파센이 나와 말했다.
“우리도 한몫 끼워주게. 모처럼의 전투인데 우리도 싸우고 싶으니.”
그러자 뒤에서 도끼로 제 방패를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드워프들이 “맞아, 맞아!” “몸이 굳으려던 참인데 잘됐네.”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배치 조를 짜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유스타프는 란을 힐긋 보았고, 그녀가 재빠르게 말했다.
“난 저택으로 돌아가 있을게.”
“네.”
그가 드워프들과 함께 성벽 쪽으로 가는 걸 보고 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전투에서 자신은 쓸모가 없다.
‘나도 좀 더 칼에 재능이 있었으면…….’
시나를 떠올리며 란이 팔짱을 꼈다가, ‘어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나가 어디로 갔지?”
분명히 기사단을 맞으러 나올 때까지는 자신과 함께 있었는데.
“시나 양이라면 아까 기사단 쪽으로 가던데요.”
슥 누가 어둠 속에서 나와서 깜짝 놀라 흠칫했다가, 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키리.”
암록색 옷을 입은 키리가 히죽 웃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있을 수 있어?”
“10년쯤 훈련 받으면요.”
“……그렇군.”
란이 멋쩍게 대답하고 되물었다.
“기사단 쪽으로 갔다고?”
“네.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그 차림으로 괜찮아?”
녹영은 그림자 단체잖아?
“저는 보이는 그림자라 괜찮답니다.”
키리가 명랑하게 말해서 란은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과 키리가 기사단을 향해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정체가 루미에와 시나라는 걸 란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잠깐, 이거 놓고 말해!”
“뭘 놓고 말해! 너 당장 옷 벗어!”
“싫어!”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고 있는 게 보였다. 란은 시나가 갑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시나? 루미에?”
“란 언니!”
“주인님!”
“제 말 좀 들어 봐요.”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십시오.”
둘이 거의 동시에 이야기했다가, 서로 마주 보았다.
“란 언니는 나랑 더 친하거든?”
“주인님은 내 주인님이시고, 넌 손님일 뿐이지.”
키리가 여우 눈을 하고 히죽 웃었다.
“이야, 사랑싸움 중간에 껴 계시는 우리 마님.”
“아니거든.”
란이 키리를 향해 눈을 찡그려 보이고 다가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왜? 무슨 일인데? 시나는 또 왜 그런 차림이야? 갑옷은 어디서 났어?”
“남은 거 입었어요.”
시나는 당당히 말했다. 키가 좀 작다는 걸 제외하면, 투구까지 눌러쓴 시나를 알아볼 방법은 전혀 없었다.
란이 말했다.
“일단 투구부터 벗고 말해. 안 무거워?”
“괜찮아요.”
시나가 그렇게 말하고 투구를 벗었고, 루미에가 그걸 빼앗듯이 받아 든 후에 으르렁거렸다.
“여기 싸움이 뭐라고 네가 끼어?”
“루미에도 싸우잖아! 나도 싸울 수 있어!”
“실전 경험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네가? 짐만 돼.”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거 아냐? 밖에 마수들을 봐!”
“그게 너는 아냐.”
란이 당황해 물었다.
“시나, 전투에 나가려고?”
“네.”
시나가 란을 돌아보았다.
“저도 열심히 훈련했고, 싸울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란이 딱 잘라 말했다. 루미에는 간신히 “거 봐.” 하는 소리를 삼켰다. 대신 주인님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왜요?”
시나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고 란 역시 진지하게 말했다.
“이런 일 하면 안 돼. 전에도 내가 이야기했었잖아.”
란이 손을 뻗어 시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돌아갈 테니까.”
“하지만, 언니―”
시나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루미에가 눈을 크게 뜨고 뭐라고 하려는데 란이 살짝 고개를 흔들고 가라는 눈짓을 했다. 루미에는 “나중에요.” 하고 입 모양만 벙긋하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란이 빙긋 웃고 말했다.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그 말에 금방 시나의 눈에 눈물이 글썽 고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저 계속 여기 와서 신세만 지고 있고. 어, 언니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하는데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시나가 손등으로 슥 눈물을 닦고 말했다.
“그리고 저렇게 마수들이 많은데요. 루미에 혼자 싸우다가 다치면―”
“루미에는 혼자가 아냐. 동료들이 있잖아. 그리고 시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정말요?”
시나가 작게 되물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얼른 갑옷 벗고 와.”
“네, 네!”
환한 얼굴을 하고 시나는 도로 기사단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키리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할 일이 없어서 싸움이라니, 저분도 성격이 참 특이하시네요.”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싸움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고.”
란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키리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요? 전 애 보기는 안 합니다.”
“키리에게 안 맡길 거야. 걱정 마.”
“그러시다면야.”
뭐로 쓰시든 마님의 마음, 하고 키리는 마음 놓고 미소 지었다.
란은 프란체에게 시나를 맡겼다. 마법 세공사인 그는 지금 무기며 방어구를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프란체는 약간 못 미더운 얼굴로 시나에게 집게를 내주며 말했다.
“손끝이 예민해야 합니다. 이걸 집는데, 아주 살살 집어 주세요. 잘못 쥐면 터지니까요. 그리고 그걸 여기 홈에 넣어 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마법 세공품을 조립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자 시나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제가 젓가락으로 쌀알도 집는 사람입니다.”
그러며 그녀는 능숙하게 콩알 크기의 약한 부품을 집어 올려 짜 맞췄다.
프란체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님. 손이 부족했거든요.”
“아니야. 도움이 됐다면 나야말로 기쁘지.”
란이 그렇게 말하고 집중한 시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저택 안은 화살이며 사슬 등을 만드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란이 보급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은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고 높게 경고를 외치는 짧은 소리가 세 번.
란은 획 몸을 돌렸다.
‘습격이다!’
저택을 뛰어나가다가 란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디모디아에게 팔을 붙잡혔다.
“어딜 가시려고요, 마님!”
“방금 은나팔 소리가 났어.”
“네, 전투가 시작됐겠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마님이 계시면 됩니까?”
“하지만―”
“마님은 마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해 주세요.”
디모디아의 말에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시 저택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부상자 병동을 짓겠어. 치료사에게 가자.”
디모디아가 싱긋 웃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눈 성벽 안은 전투로 치열했다. 아래쪽에서는 애로 슬릿을 통해 화살을 계속 퍼부었고, 위쪽에서는 올라온 마수들을 처리하기 바빴다.
얼음에 발톱이 박혀 올라오지 못하자, 마수들은 자기들끼리 밟으며 놀라운 점프력을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올라온 것들은 기사단이 물리쳤다.
“으아아―!!”
성벽 위에 몸을 내민 마수를 기사단원 두셋이 장창으로 찔러 힘을 줘 밀어냈다.
쾅―!
쾅―!
화염과 함께 파이어 볼이 날아가 마수들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마수들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성 밑에는 그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는 것은 인간 쪽이었다.
블레인은 창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중갑옷이었으면 지금쯤 뻗었겠군.’
그나마 드워프들이 제작해 준 가벼운 갑옷이라 체력을 어느 정도 보존하는 게 가능했다.
블레인은 해가 떨어지는 걸 보고 유스타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해가 집니다.”
“불을 지펴.”
“네.”
블레인이 병사들에게 불을 지피라고 명령했고, 병사들은 밝은 얼음수정 램프를 가져다가 성벽 위를 밝혔다.
“콰나트 룸 도하.”
다시 빙벽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수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걸 보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상당한 마수의 시체를 남기고 마수들은 물러났지만, 일정 거리 이상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유스타프가 잠시 물러난 마수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까 말한 대로, 교대로 쉰다. 식사는?”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태양을 등지고 어두운 실루엣이 펄럭 빙벽 위로 날아올랐다.
블레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병사들 역시 놀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실루엣은 점점 빠르게 가까워졌고, 블레인은 그 모습이 거대한 배와 크기가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성벽 바로 위까지 날아온 검은색 드래곤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일부는 그림자처럼 평면적으로 보였고, 일부는 검은색 비늘이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노을과 어둠의 경계 속에서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저 생명체가 이상한 건지. 블레인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쿵!
그 거대한 몸체가 성벽 앞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목 양쪽이 부풀어 오르고는 주황색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헉―”
“으아악!”
“신이여!”
몇몇 병사들이 납작하게 엎드렸지만 유스타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불꽃은 이브리아의 보호막에 막혀 사방으로 갈라졌다.
불꽃을 뱉은 드래곤이 낮고 음산하게 웃었다.
“게 나히드 두 라움?”
블레인이 어색하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니.”
란은 알겠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드래곤을 마주 보았다.
“타 니하드르 이브리아, 니하드!”
“저건 누가 해석해주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블레인이 말했고 유스타프가 픽 웃었다.
“이브리아를 내놔, 겠지.”
“이브리아가 없다는 걸 전할 수는 없을까요?”
그때 루미에가 옆에 서며 물었다. 그는 투구창을 거칠게 들어 올리며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말해 봐야 안 믿을걸.”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는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병사와 기사 모두가 재빠르게 단단히 자세를 잡았다.
유스타프가 손가락을 들어 드래곤을 가리키고 말했다.
“청염.”
드래곤의 오른쪽 눈에 확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드래곤은 고통에 섞인 울부짖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다가 날갯짓을 해 날아올라 몸통으로 성벽에 부딪쳤다.
쿵! 쿵!
성벽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태우는 고통이 더 심했는지 드래곤은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날아올라 빠르게 사라졌다.
병사들이 환호성과 함께 “라치아 만세! 유스타프 만세!”를 연창했다.
유스타프는 손을 내렸다.
‘엄청나군.’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드래곤의 한쪽 눈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체력이 빨려나갔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문제는 이 타격이 상대에게 무의미한 타격이라는 것이다.
“괜찮으신가요?”
루미에가 작게 속삭이듯 물어왔지만 유스타프는 무시했다. 루미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설마 걸어서 성벽을 못 내려가실 정도는 아니겠지요.”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그때 파센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방금 그걸로 성벽에 금간 곳이 있어서 보수해야 할 것 같은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급하라고 하지요.”
유스타프의 말에 파센이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좋아, 좋아.” 하고 퍽 유스타프의 허리를 쳤다.
“청염과 드래곤의 대결이라니, 캬― 역사에 남을 순간이야!”
유스타프는 거의 쓰러질 뻔한 걸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제대로 섰다. 파센은 드워프들을 이끌고 성벽 보수 작업을 하러 떠났고,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며 성벽에 기대어 섰다.
블레인이 말했다.
“당분간 소강상태일 것 같으니 내려가서 쉬시지요.”
“맞습니다.”
로스도 옆에서 맞장구를 쳐서 유스타프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들어간 유스타프는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사가 아니라 저택이라니.’
“유스!”
란이 후다닥 달려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유스타프는 작게 숨을 삼켰다.
그녀는 시녀 같은 복장을 하고, 커다란 앞치마를 앞에 매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
“뭐 하시느라 옷이 그렇습니까?”
“부상병 돌보고 있지.”
란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찌푸렸다.
란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유스타프의 마음을 눈치챈 란이 다시 그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건 잘 압니다.”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유스타프는 생각했다.
란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유스는 괜찮아? 아까 드래곤이 공격해 왔을 때, 청염을 썼지.”
유스타프가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지만, 란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보기만큼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니까.”
“겨울이니까요.”
“그러니까! 가신들에게 구원병이라도 요청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겨울이라 사신이 제대로 도착할지 모르겠어. 봉화라도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했는데.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당기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벽이요. 그게 없었으면, 하늘 저택을 버리고 다섯 번째 관문까지 내려가야 했겠죠.”
“하긴.”
그렇게 말하고 란이 눈을 찡그리며 빠르게 말했다.
“눈이 단단하니까, 그래도 눈폭풍만 아니면 사신이 빠르게 도착할 거야. 가장 가까운 곳이 일루미니티 백작가니, 그쪽의 사병을 빌리게 되겠지만 이 겨울에 병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 봤을 때―”
“란.”
유스타프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란이 흠칫하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됩니다.”
“아―”
란은 작게 소리를 내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확실히 그건 그래.”
“그렇죠.”
“미안, 나 너무 유스를 붙잡고 있었어. 배고프지? 저녁 먹자.”
란이 그렇게 말해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려진 저녁 식사를 보고 유스타프가 중얼거렸다.
“제 기사들은 실전이 겨울 훈련보다 낫다고 하겠군요.”
“맛있는 걸 먹어야, 싸울 힘도 나지.”
“저택을 등 뒤에 두고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요.”
“그건 나도 그래.”
란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늘 저택에는 이브리아가 걸어 준 마법이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전투를 빠르게 끝내려면 역시 드래곤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지.”
“없지요.”
“어떻게?”
“싸워야죠.”
유스타프는 간단히 말했고, 란의 녹색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어떻게?”
“잘, 이요.”
“유스타프.”
“네, 부인.”
얌전히 그가 대답해 란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녀와 그가 아내이고 남편이라는 게 어쩐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란이 턱을 괴고 말했다.
“그 ‘잘’, 나도 열심히 생각해 볼게요.”
유스타프가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나팔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빠르게 란의 턱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뒤 달리듯 방을 나갔다.
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설원이다.
‘아, 또.’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가만히 서 있었다.
더 이상 힘 빼려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꿈에서 움직이는 게 진짜로 힘을 빼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네가 와!”
란은 소리쳤다.
하지만 풍경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란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투덜거렸다.
“물론 천 년 동안 봉인한 상대를 해치우지 못한 게 네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좀 억지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뭔가 말해 줄 게 있으면 애태우지 말아 줘. 우리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천 년 전 어둠을 물리치고 가둔 상대에게 “왜 죽이지 못했냐?” 하고 생떼를 쓰는 건 물에 빠진 사람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란은 붙잡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란의 양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깜짝 놀랐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만 보여서 란은 소름이 돋았다.
“―의 관.”
차가운 입술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녹음의 관을 말하는 건가요?”
저절로 말투가 공손해졌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어깨에 얹었던 손도 사라졌다.
란은 두려움을 참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텅 빈 설원이 보일 뿐이었다.
란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온건한 눈뜨기군.’
그녀의 눈에 공작 부인 침실의 천장화가 보였다.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따듯한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보니, 성벽의 병사들이 어둠 속에 아른아른 보였다.
벌써 며칠째 소모전이었다.
부상자도 늘어나고 있었고, 병사들도 지쳐 갔다.
드래곤은 그 후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마 마수 숫자가 줄고 있어서 다행인가.’
들판에 남은 마수 시체가 늘어나는 만큼, 마수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든 게 보였다.
언젠가 다 물리칠지도 모른다.
그게 희미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드래곤을 물리치는 게 직빵이라고 해도 말이야.’
란은 커튼을 닫으며 작전 회의에서 나왔던 여러 안건을 떠올렸다.
‘왜 대장을 가장 후방에 두는지 알겠어.’
체크 메이트를 하고 싶으면, 그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돌아가든, 잡고 가든 해야 한다.
드래곤이 지금 빙벽에 자리 잡고 있다면, 마수를 뚫고 빙벽으로 가서 드래곤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걸 어떻게 해결해서 드래곤과 대치를 한다고 해도, 만약 드래곤이 그대로 날아올라 영지를 공격한다면?
‘그나마 비행형 마수들이 하늘 저택 너머 다른 마을을 공격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이상한 점이지만, 여튼 마수들은 집요하게 하늘 저택만을 공격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점점 그쪽으로 가닥이 모이고 있었다.
‘녹음의 관.’
란은 꿈에서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그때 성벽에서 다시 은나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란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겹쳐서 뿔피리가 길게 울었다. 란은 숨을 삼켰다.
은나팔은 통상 공격, 그리고 뿔피리는.
“드래곤이다!”
성벽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시나는 창문을 열었다. 멀리 어둠 속에서도 더 짙은 어둠을 끌며 드래곤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케헤레 베아 루아루아 둠.”
드래곤의 음산한 목소리가 겨울 공기를 타고 퍼졌다. 시나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
시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곧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벗어 뒀던 옷을 후다닥 챙겨 입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날듯이 뛰어 내려갔다.
루미에는 기가 차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인가?”
로스가 숨을 삼키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죽은 마수 시체가 일어나는 거?”
“그래.”
루미에는 그렇게 말했다가 순간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쪽!”
로스는 무슨 말인가 했다가 루미에가 성벽을 달려 내려가는 걸 보고 당황했다.
자리를 무단이탈하다니.
“아!!”
그러나 곧 로스도 깨달았다. 성벽에서 죽은 마수 시체 몇몇을 안뜰에 모아 뒀던 것이다.
치료사가 약재로 쓸 수 있다고 했던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체가 일어난다면―
로스도 루미에를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하늘 저택은 얼음수정 램프 덕분에 밝았다.
하지만 밝다 해도 한계가 있다.
“꺄악―!”
“괴물이야!”
안뜰에서 들리는 소리에 루미에는 발에 힘을 더 줬다. 안뜰로 들어서자 일어난 마수들이 비틀거리며 사람을 잡으려 하는 게 보였다.
곰 같은 놈이 두 마리, 개 같은 놈이 한 마리.
그러다 루미에의 눈에 단숨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괜히 시나의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안 되니까.
방패를 단단히 쥐고 시나는 곰 괴물의 발톱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활이나 가르칠 걸 그랬지.”
그는 그렇게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달려가 단숨에 곰의 머리를 잘랐다. 머리가 잘린 괴물은 비틀비틀하면서도 두 발로 서 있었다.
“루미에!”
시나가 외쳐서 루미에는 그녀에게 눈을 찡그려 보였다.
‘이거 죽일 수는 있는 건가?’
그때 뭔가가 퍽 하고 곰에게 맞았고 불꽃이 확 일어났다.
루미에가 고개를 드니 창백한 얼굴의 란이 손에 불붙은 뭔가를 들고 있었다.
“화염병?”
시나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는데 다시 란이 병을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빗나가는 것을 루미에가 걷어차서 방향을 맞췄다. 유리병이 깨지지 않게 밀어내듯 걷어차자 다른 곰 괴물의 등에 맞았고, 다시 화염이 화르륵 일어났다.
“끄어엉―!”
목이 없던 곰과 달리 목이 있는 곰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더니 쿵 쓰러졌다.
“아아악!”
다른 비명 소리에 루미에는 달려가 개를 닮은 마수를 처리했다. 란이 달려와 소리쳤다.
“부상자를 안쪽으로!”
마수에게 물리고 찢긴 사람들을 안으로 옮기고, 죽은 사람들은 한쪽에 모았다.
란은 손이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떨면 안 된다.
그녀는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그때 몸뚱이만 남은 개 괴물이 란을 덮쳤다.
“마님!”
“주인님!”
“란 언니!”
모두가 동시에 외쳤고 란은 개를 걷어차려고 애썼다. 눈앞에서 잘린 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누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뒤로 끌어냈고, 개 괴물의 등에 화염이 떨어졌다. 로스가 불붙은 개를 걷어찼다.
란은 숨을 헐떡였다.
“괜찮으십니까?”
루미에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옷이 다 찢어졌어요.”
시나가 달려와 말하자 란이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다 찢어져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발톱에 걸린 듯했다.
“괜찮아, 안에 갑옷 입었어.”
란의 말에 시나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루미에가 말했다.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시나.”
시나는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루미에가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퉁기고 말했다.
“방패 잘 썼어.”
그 말에 시나가 저도 모르게 웃었고 루미에는 “나중에 보자.” 하고는 로스와 함께 다시 성벽으로 돌아갔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는 대단해.”
그녀의 말에 시나가 “네?” 하고 눈을 크게 떴고 란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검이나 창을 잘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시나가 란이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며 말했다.
“검이나 창을 잘 쓰면 그냥 졸이죠. 언니는 대국을 보잖아요. 장군! 참모! 그게 더 대단한 거라고요.”
병사만 가지고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시나의 말에 란은 “그런가.” 하고 작은 안위를 얻었다.
“하지만 큰일이네요. 아까 그 괴물들, 죽은 게 다시 일어난 거면…….”
시나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난 게 얼마나 병사의 사기를 꺾을까.
탈영하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진짜로 드래곤이군.”
그때 있을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 란은 몸을 휙 돌렸다.
하레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니, 완전히 드래곤도 아닌가?”
“하레쉬!”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 정도는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레쉬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옆에 로브를 쓴 사람이 스르륵 나타났다.
하레쉬가 말했다.
“시간이 잘 맞은 것 같은데. 이쪽은 우리 마법사야.”
“단순히 마법사라니, 번역이 거치네요.”
로브 안에서 음악적인 울림을 가진 공용어가 들려왔다. 새하얀 손이 로브를 뒤로 넘겼다.
별빛이 반짝이는 듯한 백은발에 은색 눈동자.
뾰족한 귀의 엘프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마법사가 아니라 엘―파세라입니다.”
그 말에 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숲지기…….”
그 말에 엘프가 방긋 웃었다.
“그 말이 더 고아하게 들리는군요. 맞아요. 그게 더 맞을 것 같네요. 저는 샤레이아라고 합니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입니다.”
란은 엉망일 게 뻔한 자신의 몰골을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샤레이아가 다시 빙긋 웃었다.
“라치아와 국교를 맺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세계수의 시간과 같이 흘러가기를.”
란이 맞받아치자 샤레이아는 더더욱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럼 일단 저걸 내쫓아야겠군요. 그쪽에게 드릴 선물이지만 미리 써도 될까요.”
그러며 샤레이아가 소매에서 나뭇가지를 꺼냈다.
‘세계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세계수 가지를 친교의 선물로 가져온 거야?
샤레이아가 빙긋 웃고 가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엘―엘 드하라 밈 루흐아 알룸!”
그러자 온화한 빛이 가지에서부터 폭발하듯이 넘쳐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지 않았지만, 똑바로는 볼 수 없었다.
빛은 성벽을 넘어 빙벽까지 빠르게 퍼졌다.
“세네다라, 카다움! 카다움!”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란도 시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세계수여, 저주받아라, 저주받아라.
잠시 후 가지의 빛이 사그라졌고, 샤레이아가 그걸 정중하게 두 손으로 들어 란에게 건네주었다.
“녹음을 드리우시길.”
란이 그 가지를 받아 들며 인사했다.
“생명의 정수가 그대에게.”
하레쉬가 란에게 말했다.
“피 냄새가 나.”
“아, 좀 전에 괴물과 싸우다 보니.”
내 몰골이 지금 엉망이라는 건 네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
란은 제 얼굴을 문질렀다. 잘린 목에서 피가 튀어 얼굴도 엉망일 터였다.
“아니, 너 부상당했다고.”
그러며 하레쉬가 그녀의 허벅지쯤을 가리켜 보였다.
란은 멍하니 그쪽을 보았다. 피투성이에 찢어진 드레스 자락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란!”
그때 저쪽에서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스!”
“괜찮습니까? 방금 그 빛은 대체 뭡니까?”
“난 괜찮아. 이분들이 가져오신 세계수 가지에서 빛이 나온 거야. 아, 이쪽은 숲지기이신 샤레이아 님이셔.”
“지금 그 소개를 할 때가 아닐 텐데.”
하레쉬가 그렇게 말하며 란의 허벅지에 손을 대자마자 란은 통증에 소리를 지르며 넘어질 뻔했다. 유스타프가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아, 으―”
란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
‘지금까지는 아드레날린 분비로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나 봐.’
유스타프는 이를 악물고 란을 안아 올렸다.
“안으로 들어가죠. 두 분도.”
그러며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
란은 하레쉬에게 치료를 받고, 엉망인 의복을 갈아입고서 시나의 도움을 받아 알현실로 향했다.
진주 방에서 샤레이아와 하레쉬, 그리고 유스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셋은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지, 그녀가 들어오자 대화를 멈추고 란을 돌아보았다.
“상처는 어때?”
하레쉬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욱신거리지만 괜찮아요.”
샤레이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요.”
란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손님이 주인에게 자리를 권한다는 건 인간들의 예절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엘프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예절이겠지.
란은 유스타프가 빼 준 의자에 앉았다. 허벅지 쪽이 발톱에 걸려 찢어졌는데 다행히도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지만……’
란이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유스타프에게 물었다.
“성벽은? 괜찮아?”
“네, 그 빛 때문에 마수와 드래곤이 모두 물러났습니다.”
“다행이다.”
란은 안도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 그녀는 샤레이아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샤레이아가 빙긋 웃었다.
엘프답게 키가 큰 그녀는 거의 180cm에 가까운 키였는데, 그게 또 완벽한 비율로 인해 아름다워 보였다.
“딱 좋은 타이밍에 도착했지요.”
유스타프가 드물게 낮게 웃고 말했다.
“드워프분들이 좋은 부분만 가져간다고 화내시더군요.”
그 말에 란 역시 웃었다. 파센이 펄펄 뛰고 있을 모양이 눈에 선했다.
“땅속 친구들도 와 있군요. 정말로 천 년 전의 싸움이 기억나네요.”
샤레이아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국교를 맺자고 하셨지요.”
“네, 그래서 사실은 군대를 보내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에 거처야 할 인간 나라들을 생각하니 그건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샤레이아의 말에 란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서쪽 끝의 엘프들과 라치아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란은 샤레이아를 바라보았다.
숲지기.
고귀한 인도자.
세계수의 사제.
“숲지기께서 직접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한번 와 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직접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후후 샤레이아가 웃은 후에 시나에게 물었다.
“엘프는 처음인가요, 이방인이여?”
시나가 화들짝 놀라 뺨이 붉어졌다. 너무 뚫어져라 봤나 보다, 하고 시나는 민망스러워서 말했다.
“저희 세계에는 엘프가 없거든요.”
“그랬군요.”
샤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빛은 뭔가요?”
“세계수에 응축되어 있던 달빛과 별빛이에요.”
샤레이아의 말에 시나는 연신 감탄했다.
‘세계수라니, 별빛과 달빛이라니, 진짜 판타지다.’
“그럼 두 번은 쓰지 못하겠군요.”
란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샤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계수가 아니라 잘린 가지이니 아까 쓴 것이 전부지요. 다시 쓰려면 양지바른 곳에 심고 백 년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럼 아까 같은 마법을 또 쓴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샤레이아의 대답에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레이아가 란을 보았다가 유스타프를 보고 말했다.
“아까 얼핏 어둠을 봤어요.”
그러며 그녀가 양손을 눈앞에 들어 깍지를 껴 보였다.
“어둠과 드래곤이 이렇게 섞여 있더군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부분은 실체인데 또 다른 부분은 평면적인, 그림자 같은 느낌입니다.”
샤레이아가 양 깍지를 빼 보였다.
“둘을 분리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요.”
“어떻게요?”
란이 되묻자 샤레이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본인이 해야지요.”
샤레이아의 말에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는데 란이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꿈을 꿨어요. 아무래도 이브리아가 나오는 꿈 같았는데…… ‘녹음의 관’이라고 딱 한 마디만 하더군요.”
“녹음의 관이요.”
샤레이아가 의아한 얼굴을 해서 란이 말했다.
“가져오게 하죠.”
잠시 후 시녀가 조심스럽게 관을 가지고 왔다.
백금과 다이아몬드, 크고 투명한 에메랄드로 이루어진 관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그걸 샤레이아는 가볍게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요.”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은색 눈동자가 거울 같다고, 란은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군요. 너무 희미해요.”
“어째서 제 꿈에 나타나는 걸까요?”
란의 물음에 샤레이아가 희미하게 웃고 말했다.
“그야 지금 주인이 란 님이시니 그렇지요.”
샤레이아가 그렇게 말하고 란에게 관을 내밀어, 란은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한번 가까이에 놔둬 보세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레이아와 하레쉬는 저택에 묵으라는 말을 거절하고는 또 사라졌다. 전투가 시작되면 오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아니, 빙벽 쪽에도 갈 수 없는데 어디서 묵으려고.’
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엘프들을 붙잡지는 못했다.
시나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엘프는 진짜 신기하네요. 하레쉬는 그래도 ‘오, 엘프다.’ 하는 느낌이었는데 샤레이아는 진짜…… 진짜 엘프 같았어요.”
시나의 말에 란은 웃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란도 알 것 같았다.
그때 시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럼 전 나가 볼게요. 루미에가 무사한지 봐야겠어요.”
그리고 재빠르게 방을 나섰고, 란은 미소를 지으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둘만 남았네?”
유스타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눈가에 피로가 보여 란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런 전투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으니 힘든 게 당연하다.
‘게다가 아직 어리잖아!’
스물 초반에게는 너무 힘든 짐이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탁탁 제 허벅지를 두들겼다.
“앉아, 앉아.”
유스타프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상처 터집니다.”
“아.”
맞아. 꿰맸지.
유스타프가 털썩 란의 다리 옆에 앉아서, 예전처럼 그녀의 다리에 기댔다. 상처 나지 않은 쪽 다리라 통증은 없었다. 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사기는 어때? 괜찮아?”
“아까 그 세계수 덕분에 나아졌지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상자는 좀 어떻습니까?”
“치료사들이 바쁘긴 하지만 괜찮아. 하레쉬도 왔으니 더 나아지겠지.”
“전투에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자는요?”
“경미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최대한 빠르게 처치해서 돌려보내고 있어. 심각한 사람은…… 노력하고 있고.”
“천을 엄청 삶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감염되지 않으려면 기본이야. 열탕 소독이라도 해야지.”
“그쪽 세계의 상식입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니까.”
“무슨 말씀을. 매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란은 그의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겼다. 그가 기댄 무게가 무거워졌다, 하고 란이 그를 내려다보니 유스타프는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나?’
하긴, 피곤하기도 피곤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를 내려다보는데 유스타프가 눈을 번쩍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란은 그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그녀의 허벅지에 기대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모처럼 둘인데, 자면 시간이 아깝지요.”
“역시 내가 좀 더―”
도움이 된다면, 이라는 말을 하려는데 유스타프가 그녀의 무릎에 입 맞췄다.
“란은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응?”
“란이 드워프, 엘프와 교류하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겁니다. 드워프가 없으니 눈 성벽은 요원했겠고, 엘프가 없었다면 오늘은…….”
유스타프가 낮게 말했다.
“패배했을지도 모르지요. 죽은 것들이 일어날 때 성벽의 소동을 들으셨어야 합니다.”
“심각했어?”
“매우요.”
공포는 전염된다.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거기서 꺼내는 것만 해도 매우 힘들다.
“탈영을 걱정했을 정도니까요.”
란은 그 말에 신음을 내뱉었다. 유스타프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엘프의 등장으로 사태는 역전되었고, 그건 란의 공이죠.”
그런가, 하고 란은 미소 지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라 유스타프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유스타프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럼 내 공로를 치하해 줘야 하지 않나?”
유스타프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뒤로 빼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고 핥았다.
“상으로 뭘 원하십니까?”
란은 속으로 ‘으아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확 뒤로 뺐다.
“유스!”
당황해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유스타프가 조용히 이어 말했다.
“보석을 줘도 심드렁하시고, 드레스를 가져다 드려도 별로인 듯하시고―”
란이 눈을 크게 떴다가 몸을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둘 다 엄청 기쁜데. 정말로 좋았어. 내가 이야기했잖아.”
“네, 하지만 먼저 보석이나 드레스를 요구하시지는 않잖습니까?”
“그야 유스가 말하기도 전에 사 주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걸.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럼 기다려야 했던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걸 기다리지?’ 하고 고민에 잠겼다.
무엇보다도 그가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란이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게다가 기다리는 사이에 란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누가 먼저 사 가면?
“그럼 라치아를 줘.”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의 녹색 눈이 빤히 그를 바라본다.
유스타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란.”
“응?”
“이미 가졌습니다.”
“어?”
“라치아는 제 전부입니다. 그리고 란은 저를 가졌지요. 그러니 이미 라치아 역시 란의 것입니다.”
란은 멍하니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라치아를 달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란에게 있어서 라치아는 짐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유스 그걸 나눠줘. 우리가 반반 들고 가자.
그런 의미였는데.
란은 제 말이 바보 같아져서, 어쩐지 울 듯한 기분이 되어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항상 나에게 녹음을 드리우는 내 아가씨.”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드레스 끝자락을 들어 입 맞췄다.
란이 덥석 그의 양 뺨을 잡아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네.”
“사랑해. 그리고, 네 라치아도 사랑해.”
란은 웃었다.
“항상 물었었지, 라치아가 좋냐고. 지금 엄청 사랑하게 됐어.”
유스타프가 몸을 일으켜 란에게 키스했다. 그가 속삭였다.
“란은 항상 제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니까―”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뿐이야.”
란이 그렇게 말하며 씩 웃고 팔을 뻗었다.
“그럼 안아다 주시겠어요?”
유스타프가 그녀의 상처를 유의하며 조심스럽게 란을 안아 들고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침실로.”
일단 좀 쉬어야겠어, 하고 란이 녹음의 관을 가리키며 “저것도, 저것도.” 하고 말해서 유스타프는 조심스럽게 란을 한 팔로 옮겨 안고 관을 챙겼다.
란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샤레이아 말이야, 진짜 엘프 같더라.”
“엘프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레쉬는 아무래도 인간과 교류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인간에 익숙한 점이 있는데, 샤레이아는 그런 점이 없으니까.”
“비인간적인 면모라면 확실히.”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외모에는 특히, 현실감이 없는 면이 있었다.
그런 그의 뒷생각을 읽은 듯이 란이 툭 던졌다.
“외모도 인간 같지 않고. 정말 예쁘기는 예쁘더라.”
“그렇더군요.”
“그으래에?”
그녀의 말이 길어져서 유스타프는 웃음을 살짝 눌렀다. 가끔씩 괜히 그녀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전 하늘의 별보다 2월의 스노우드롭이, 5월의 장미가, 10월의 금목서가 더 좋습니다.”
“아.”
란이 눈을 깜박이고 웃었다.
“그럼 별을 마음껏 바라봐도 좋아.”
사실 나도 보고 싶거든.
그렇게 속삭이고 란이 낮게 웃었다.
✥✥✥
“엘프와 세계수라니.”
루미에도 기가 찼다. 그의 말에 시나가 “역시.”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닌 거지?”
“당연하지.”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엘프만 해도 보통은 존재만 알지 보지 못한다고. 거기에다가 세계수. 난 그게 저잣거리 음유시인 노래에나 나오는 줄 알았지.”
그 말에 시나는 어째 안심이 되었다. 루미에가 픽 웃었다.
“어쨌든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병사들 사기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으니 다행이지.”
“그래?”
“그래. 다들 세계수며 엘프며, 어둠이며.”
루미에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이세계에서 넘어온 손님까지. 언젠가 분명히 음유시인의 노래가 될 텐데, 거기에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있으려나.”
“루미에 이름은 꼭 나올 것 같은걸.”
시나가 소곤거려 그는 히죽 웃었다. 둘은 지금 기사단 건물 뒤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시나는 란에게서 받은 털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루미에는 무장한 차림 그대로였다.
시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나도 란 언니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루미에가 웃었다.
“그건 무리지.”
“너무하네.”
“그리고 그러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알아. 지금도 충분히 무모해.”
루미에는 방패를 들고 마수와 맞서던 시나를 떠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지금의 너로 충분해.”
루미에의 속삭임에 시나가 빤히 그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하나 부러운 게 더 있어.”
“뭐가?”
“루미에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
“뭐?”
눈을 크게 떴다가 루미에는 입꼬리를 삭 올리며 미소 지었다.
요염하고 교태로운 미소.
“저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리고 싶으신 건가요, 주인님?”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어조다. 시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불러 드릴 수 있지요. 주인님.”
시나가 그를 확 끌어안았다.
“아니, 그냥 역시, 시나라고 불러 주는 편이 훨씬 좋아.”
오글거려.
시나가 작게 속삭여서 루미에는 의아해하면서도 짧게 생각하고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시나의 나라, 이야기해 줘. 대한민국.”
“또?”
“들으면 별세계 이야기 같아서 즐거워.”
“딱히 별세계는 아닌데. 아니지, 맞나?”
갸웃하고 시나는 천천히, 루미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분도 없고, 노예도 없는, 유흥을 위해서 서로 죽이지 않는 나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브리아는 천막을 홱 젖히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당황해 담요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상대는 사정 봐주지 않고 그녀의 담요를 억지로 당겨서 빼앗았다.
부상당한 후라 블랙 드래곤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델.”
자신의 상처를 보고 눈을 부릅뜬 그를 보고 달래듯 이브리아가 말했다.
“난 괜찮아요.”
“안 괜찮아.”
흑룡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어둠이고 뭐고, 그냥 떠나자.”
이브리아는 미소 지었다.
“이제 목표가 코앞인걸요.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이건 내 사명입니다.”
음악적이고 달콤한 목소리는 단호했다.
델판토는 우울하게 말했다.
“언젠가 저것들이 널 삼킬 거야.”
“전 그리 생각 안 한답니다.”
명랑하게 말하고 이브리아가 제 드래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델판토는 짐짓 눈을 찌푸리며 피하는 척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델. 이제 금방 모든 게 다 끝날 테지요. 그러면 같이 여행이나 다녀요.”
“흥, 뒤치다꺼리나 하러 다니는 거겠지.”
델판토가 금색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해서 이브리아가 “아니에요. 진짜예요.” 하고 항변했다.
“그렇다면.”
델판토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밝은 금색 눈동자가 검은 속눈썹에 싸여 아름다웠다.
이브리아가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하자 델판토가 고개를 들어 답례하듯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때 다시 천막 입구가 펄럭이고 남자가 들어왔다.
“이브리아 님, 잠깐―”
그러다 그는 델판토와 이브리아를 보고 재빠르게 돌아섰고, 이브리아가 웃었다.
“괜찮아, 라치아. 무슨 일이야?”
‘아.’
란은 눈을 깜박였다.
‘꿈.’
상당히 생생한 꿈이었다. 란은 고개를 들어 협탁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부드러운 벨벳 천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녹음의 관이 놓여 있었다.
어둠 속 약한 빛에도 백금과 에메랄드가 희미하게 빛나 보였다.
‘역시 꿈을 보여 준 건가? 과거 이야기?’
갸웃갸웃하다가 란은 옆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자고 있는 유스타프가 보였다.
평소라면 그녀를 포도 넝쿨처럼 칭칭 감고 잘 테지만, 오늘은 란의 상처를 누를까 봐 걱정된다며 손만 잡고 있는 중이었다.
‘한 침대에 누운 거 진짜 오랜만이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도무지 같이 자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란도 바빴고, 유스타프도 바빴다. 란은 방금 꾼 꿈을 생각했다.
이브리아와 델판토.
둘이 연인이라는 것은 란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브리아는 델판토를 봉인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좋아하고, 또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같이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도 귀중한 일이야. 정말.’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녹음의 관이 왜 과거 이야기를 보여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돌파구를 찾아야 해.’
어떻게든 그 드래곤을 잡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샬에게 부탁해 볼까?’
정령과 어둠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그리고 얼마만큼 많이 대가를 필요로 할까.
‘눈 한 짝 정도로는 안 되겠지. 아냐, 또 혹시 모르잖아. 아니지, 란 로미아 드 라치아. 교훈을 잊었어? 유스타프가 해서 싫은 건 나도 하면 안 돼.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자.’
머릿속이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하자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지.’
그러며 몸을 돌리자 눈을 뜨고 있는 유스타프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란은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유스, 안 잤어?”
“자다가 깼습니다.”
란이 그 말에 갸웃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꿈꿨어?”
“아뇨, 그건 아니고요. 란은 꿈꿨습니까?”
“응…….”
란은 제가 꾼 짧은 꿈을 간단하게 털어놓았다. 어둠 속이라 옛날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이야기하니 유스타프가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이상한 꿈이군요.”
“그지? 어차피 꿈꿀 거면 좀 더 본격적으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내용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씩 웃었다. 소년 같은 웃음이라, 유스타프는 저절로 마주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다행이다, 유스가 있어서.”
“저도 다행입니다. 란이 있어서.”
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스.”
“네.”
덩달아 그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나 허벅지 많이 안 움직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며 빤히 그를 바라보자 유스타프가 소리 없이 상체를 반쯤 세웠다. 하지만 아직 망설임이 남아 있어서 머뭇거리는 걸 보고 란이 팔을 뻗으며 말했다.
“상냥하고 다정하게 해 줘.”
유스타프가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슈미즈를 미끄러트리며 올라왔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튿날 유스타프는 새벽같이 눈을 떴다. 동이 트기 거의 직전이었다. 습관으로 몸에 밴 이른 기상이다.
그는 이 시간에 란을 깨울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고 있는 그녀의 흰 어깨에 입 맞추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란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유스타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소다는 헛기침을 하고 커튼을 열며 말했다.
“마님, 이제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평소라면 좀 더 자게 두고 싶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다.
란의 생활 역시 병사들과 함께 가고 있었다.
“마님, 일어나세요.”
아니면 창문 열어 버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디모디아가 란을 경쾌하게 불렀다.
하지만 침대에서 반응이 없어 두 여자는 머리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안 일어나시네요.”
“어젯밤에 공작님이 너무 괴롭히신 거 아닐까요.”
“어머나? 마님은 부상 중이신데!”
“파렴치!”
그렇게 주고받고 힐끗 침대를 보았는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안으로 들어온 카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푹 주무시고 계시네요.”
소다가 뺨을 붉히며 말해 카라는 헛기침을 하고 침대가로 다가갔다.
“마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카라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는 이불 위로 살살 란을 흔들었다.
“마님, 마님.”
소다와 디모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카라 역시 놀라 그녀를 강하게 흔들었다.
“란 님?”
이렇게까지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카라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의사를 불러라. 소다는 나와 함께 마님을…….”
“네, 네.”
디모디아는 재빠르게 물러났고, 소다는 카라를 도와 란의 의복을 정제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저 잠이 든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단지 깨어나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치료사가 달려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당황스러운 듯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어 각성제를 란에게 먹이기도 하고 냄새를 맡게도 했지만, 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유스타프 역시 공작 부인의 침실인 나무 그늘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란?”
너무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는 란을 보며 유스타프가 낮게 그녀를 불렀다.
“란, 란? 란!”
그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다가 흠칫 하고 놓았다. 그의 푸른 눈에 무감정한 빛이 서려 치료사는 숨을 삼키며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진찰판으로 봐도 다른 아프신 곳은 없으신데…….”
그때 휙 유스타프가 몸을 돌려 성큼 그에게로 걸어갔고, 치료사는 히익 하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그를 그대로 지나 테라스 문을 확 열었다.
“하레쉬.”
그가 부르자 거짓말처럼 하레쉬가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올 줄 알고 있었나?”
“란이 눈을 안 뜹니다.”
그의 말에 하레쉬가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빨리해 안으로 들어왔다. 샤레이아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하레쉬는 잠든 란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고, 눈을 찌푸렸다.
“자고 있는 거 맞아. 맞는데― 보통 이런 증상은…….”
“마법이죠.”
노래하듯 말하고 샤레이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거울 같은 은색 눈동자가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주 오래된 꿈이네요.”
그 말에 유스타프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녹음의 관.”
그가 그녀의 협탁 위에 놓인 관을 집어 들었다. 그걸 던져 깨려는 걸 카라가 비명을 지르며 막았다.
“공작 각하!”
샤레이아 역시 놀란 듯 말했다.
“깨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유스타프가 흠칫하며 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인데도, 머릿속에 끈이 끊어져서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가 관을 샤레이아에게 내밀었다.
샤레이아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관을 받았다.
파직.
작게 스파크가 일어나 샤레이아도 유스타프도 움찔했다. 유스타프가 휙 란을 돌아보았지만 란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샤레이아가 에메랄드로 된 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란 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단순히 잠든 것뿐이니까요.”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유스타프의 말에 샤레이아는 란을 바라보고 다시 관을 본 후에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대현자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잠으로 그녀를 끌어들였겠지요.”
그러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스타프는 샤레이아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그는 시선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란을 부탁하죠.”
유스타프의 말에 샤레이아가 오른발 뒤꿈치로 탁 바닥을 쳤다. 하레쉬가 옆에서 덧붙였다.
“맡겨 두라는 인삽니다.”
“인간은 이렇게 안 하나?”
샤레이아가 하레쉬를 돌아보고 물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심각해 보이지 않아서 유스타프는 어째 안심이 되었다.
이러다가 내일쯤, 아니면 모레쯤 란은 태연하게 하품하고 일어나서 어젯밤처럼 “꿈꿨어.”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치아 공작으로서, 문지기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외부에 있다.
‘괜찮아. 란은 괜찮을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말을 되삼켰다. 그가 아는 란이라면, 어떤 역경이든지 이기고 다시 돌아올 거다.
유스타프는 마음을 달래며 눈 성벽으로 향했다.
어젯밤 충격적인 사건 이후로 마수들도 드래곤도 잠잠했다. 모처럼 짧은 휴식이었다. 병사들은 유스타프를 보고 경례를 붙였다.
“주인님은요?”
성벽에 서 있던 루미에가 물었다. 그 역시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다. 유스타프는 루미에에게도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고,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주인님은 왜 눈 안에 둬도 불안한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 말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루미에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그가 이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루미에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공작님,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유스타프는 힐끗 그를 보았다. 대답이 없는 게 허락인지라 루미에는 거침없이 물었다.
“만약 제가 주인님을 데리고 라치아에서 도망쳤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유스타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없이 차갑고 날 선, 달콤하기까지 한 미소였다. 유스타프가 매끄럽게 말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가?”
“아뇨, 지금 확신이 섰습니다.”
빙긋 웃으며 루미에가 대꾸해 유스타프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이건 뭐 땅끝까지 쫓아왔겠군.’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 그리고 루미에 자신은 십자가형에라도 처해지고, 주인님은…….
루미에는 얼른 생각을 멈췄다.
그는 지금도 란이 좋았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애정이었고, 시나를 좋아하는 건…….
란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랐다.
란에 대한 애정이 종교적이며 맹목적인 그런 애정이었다면, 시나와의 애정은 좀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한없이 그녀를 알고 가까워지고 싶은 그런 애정이었다.
‘생각하니 보고 싶네.’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타프와 마찬가지로 정면을 보았다. 자신이 라치아 공작가의 기사가 되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루미에는 솔직히 말하면 탈영병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하늘 저택의 시종이나 하녀가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모두가 이런 상황에서도 제복을 입고, 갑옷을 걸치고 라치아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서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은 올까요?”
루미에가 그렇게 묻자 유스타프는 “글쎄.” 하고 짧게 답했다. 그때 저쪽에서 파센이 다가왔다. 어깨에 도끼를 걸친 드워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엘프 놈들이 왔다고 그랬지?”
“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토끼 귀 놈들. 번쩍번쩍하는 걸로 시선을 다 끌고 말이야. 흥, 그래도 우리가 더 오래 같이 싸운 걸 잊으면 안 돼.”
“물론입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귀라니, 너무하네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파센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투카!” 하고, 누가 봐도 드워프 욕일 듯한 단어를 짧게 내뱉으며 뒤로 펄쩍 물러섰다. 샤레이아가 서 있었다.
샤레이아가 미소 지었다.
“땅굴 속에 사는 종족이여, 오랜만입니다.”
“땅굴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 도시다! 건물도 제대로 못 짓는 미개한 풀 족속아.”
“풀 족속…….”
샤레이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 단어가 신선한지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며 몇 번 입 안으로 말을 읊조리다가 웃었다. 방울 소리처럼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땅굴 족은 유쾌하군요.”
“땅굴 족이라고!”
파센이 펄쩍 뛰며 뒷목을 잡았고 루미에는 웃음을 삼켰다. 샤레이아가 살며시 하늘을 보았다가 정면을 보았다.
“2, 3일은 오지 않을 거예요. 어둠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유스타프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란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샤레이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 주변 결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회의실로 가지요.”
✥✥✥
란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투명해.’
그녀는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 년 전이라 그런가, 옷차림이 참.’
지금 옷차림에 비하면 진짜로 거지꼴과 다름없는 차림으로 사람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무기도 조잡하기 그지없어서, 어떻게 저런 무기로 괴물과 싸우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인간, 엘프, 드워프가 각자 무장을 하고 섞여 있는 모습은 신기했다.
‘또 꿈속이라는 건 알겠는데……’
란은 천천히 군중 속을 걸어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냥 천을 통과하는 데에 약간 저항감이 있었지만, 막상 한번 통과하고 나니 의외로 편했다.
천막 안은 소란스러웠다.
백금발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엘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우리만 소모되는 거 아니오!”
“소모는 개뿔! 우리 드워프들도 얼마나 죽어 나갔는 줄 알아?”
“두 분 모두 자기 희생만 강조하는 거 아닙니까?”
“도움도 안 되는 약해빠진 인간은 빠져.”
“뭐라고요?”
작전 테이블을 앞에 두고 각 종족의 대표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모두 피로가 누적된 얼굴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대현자 이브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듣고 있던 이브리아가 낮게 말했다.
“다들 그만해.”
그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하지만!”
란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브리아가 잠시 테이블 위의 상황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이쪽 방면은 나 혼자 맡도록 하지.”
“이브!”
뒤에 서 있던 델판토가 소리 질렀다. 이브리아가 싱긋 웃었다.
“괜찮아.”
드워프와 엘프, 인간 대표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인간 대표인 빨강머리 여자가 공손하게 말했다.
“대현자님만 혼자 보낼 수는 없지요.”
“그렇습니다.”
엘프 대표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워프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리아가 픽 웃었다.
“아니, 혼자가 나을 것 같은데.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과 같이 가는 것보다는.”
꼬집는 말에 셋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브리아가 손을 저었다.
“그렇게 됐으니까 나가 봐.”
셋은 머뭇거리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나갔다.
란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녀의 마음과 맞은 듯이, 델판토가 이브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미쳤어?”
“안 미쳤어. 봐 봐, 동쪽 산맥은 길이 좁아서 나 혼자서도 가능해. 게다가 이제 어둠도 작아졌지. 이게 마지막이야.”
“네 마지막이 될 생각이야?”
“아니라니까.”
이브리아가 눈을 찌푸리는데 천막을 확 열고 라치아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 젊은 남자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다.
“제정신입니까? 지금 동쪽 산맥을 혼자 감당하신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치아가 “이브리아 님!” 하고 외쳤다가 델판토를 돌아보았다.
“좀 말려 보십시오.”
“얘가 내 말을 듣냐?”
델판토가 그렇게 말하고 라치아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라치아가 말했다.
“그럼 저와 제 부대는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왜 화력을 집중하는데― 게다가 라치아는 정예 부대잖아. 그런데 빠지면―”
“어차피 제 충성의 대상은 플라일이 아닙니다. 이브리아 님과 함께 갈 겁니다. 죽는다면 함께 죽죠.”
라치아의 말에 이브리아는 눈을 찌푸렸고 델판토는 웃었다.
“난 역시 라치아가 좋다니까.”
“그거 감사한 말이군요.”
라치아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라치아가 문지기가 된 게 아니었군. 그러고 보니 초대 라치아의 문서에서 ‘너도 델판토를 좋아했지.’ 하고 이브리아가 말하는 장면이 있었지.’
셋의 사이가 좋아 보여서, 가슴이 아파 왔다.
어쩌다가 델판토가 그렇게 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장면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빠르게 넘어갔다.
전투는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어둠에게 물든 마수는 일반적인 마수와 달라서 훨씬 크고 강했다. 게다가 부상을 입혀도 쓰러지지 않고 목이나 심장을 찌를 때까지 끄떡없이 움직이며, 잔혹했다.
란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끔찍한 영화도 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런 실전은 상상 이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브리아가 맡은 동쪽은…….
란은 나타난 마수를 보고 숨을 삼켰다.
‘거인?’
만약 유스타프가 겨울 사냥 때 저런 마수랑 싸우는 거였다고 한다면, 란은 그가 사냥을 나갈 때마다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델판토가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서 덤빌 정도의 크기라면 짐작이 가는지?
‘물론 내가 본 드래곤과는 좀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빙벽에 나타났던 드래곤보다 몸집이 더 작았다. 새까만 비늘은 흑요석으로 하나씩 세공한 것처럼 반짝이며 빛나서,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브리아는 마법을 쏘아 댔고, 라치아는 활과 창으로 공격했다.
그렇게, 그 거대한 거인을 무찔렀나 싶은 때에 거인이 델판토의 한쪽 날개를 잡아 찢었다.
“델!”
이브리아가 비명 같은 비통한 소리를 질렀고, 델판토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거인의 목을 마지막으로 물어뜯었다. 목이 뽑혀나가고, 거인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졌다.
라치아 역시 고함을 지르며 쓰러진 델판토에게로 달려갔다. 날개가 찢어진 드래곤은 헐떡이며 창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델, 델, 델!”
이브리아가 그를 끌어안고 소리를 지르다가 왈칵 피를 토했다.
란은 기겁하고 소리 질렀다.
“이브리아! 델판토!”
하지만 그녀의 비명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라치아가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델판토와 이브리아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했다.
란은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장면이 홱 변했다.
밤의 막사였다.
란이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승리하기는 했지만 역시 마지막이 가까운 만큼 저항도 만만찮아 상당히 많은 숫자의 사람이 죽은 것 같았다.
물론 가장 큰 손실은 델판토와 이브리아였다.
이브리아가 쓰러졌다는 말에 사기는 급속히 떨어졌다.
“이브리아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라치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이브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너무 써서 그래.”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델은?”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마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겠지요.”
“응.”
이브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얼굴을 감쌌다.
“내 탓이야.”
“아닙니다.”
“아냐, 델은 드래곤인데, 날아야 하는데―”
“회복력이 좋으니 고쳐지실 겁니다. 다시 나실 수 있을 거예요.”
라치아가 위로하자 그녀가 젖은 눈을 들었다.
“그, 그럴까?”
“네, 물론입니다.”
라치아의 말에 이브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닦아 냈다. 라치아가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마법을 쓰시니 당연히 그러실 만합니다. 서쪽에 있는 자들에게 방어막을 치시면서, 동쪽 군대 전부를 상대하셨죠.”
“어둠의 독기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걸.”
“군대가 당하는 모든 데미지를 이브리아 님이 받아내고 계시니 진작 이렇게 되지 않은 게 용합니다. 이브리아 님, 저는 당신의 희생 위에 자유의 깃발을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자유란 제 피를 흘리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이미 다들 희생하고 있어. 죽은 사람도 많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지.”
라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브리아가 빙긋 웃었다.
“이제 진짜 끝이야. 얼마 안 남았어. 난 알 수 있어.”
라치아는 길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은 막사를 나가는 라치아를 보았다가 이브리아를 보았다.
대현자는 잠시 무표정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와라.”
그녀의 말에 란은 흠칫했다. 이브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모를 줄 아나?”
“어, 아니, 그러니까―”
란이 더듬거리는데 다른 자가 대답했다.
“역시 대현자로군.”
킬킬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천막 한쪽에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 란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둠.”
“약해졌어, 내가 이렇게 쉽게 들어오게 하고 말이야. 으응? 이제 어떻게 싸울 거지? 망가진 몸으로?”
“너 하나는 처리할 수 있어.”
“그런가? 다들 두려워하는데? 널 버리고 도망칠 거라고. 이렇게 애써 봐야 네게 무슨 이득이 있지? 네 애인은 죽어가고, 너도 죽어가고 있지.”
“델은 죽지 않아. 나도 그렇고.”
“아니, 넌 죽을 거야. 네 부대는 전멸할 거야. 네 애인은 십자가에 높이 박힐 거고, 난 네 사지를 찢을 거다!”
그림자가 천막 안을 새까맣게 메꿨다.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델판토의 울부짖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고 이브리아는 이를 갈며 지팡이를 들었다.
“내게서 떠나가라!”
빛이 환하게 터져 나왔다. 어둠이 순식간에 작게 줄어들었다.
“별빛의 아이, 세계수의 딸, 정령에게 사랑받는 대현자여―”
빈정거리며 어둠이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넌 강하지. 하지만 네 애인도 그럴까?”
그리고 어둠은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브리아가 비틀거리며 지팡이에 기대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델…….”
중얼거리고 이브리아가 휘청이며 지팡이를 짚고 필사적으로 천막 밖으로 나갔다. 호위를 하는 것인지 서 있던 라치아가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브리아 님?”
“델, 델은?”
“막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라치아가 이브리아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브리아가 말했다.
“확인해 봐야겠어.”
라치아는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를 부축해 델판토의 막사로 향했다.
란은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것 같아 가슴속이 꽉 죄여들었다.
역시나, 델판토의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비통하게, 이브리아가 소리 지르고 그를 찾으러 가겠다고 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란은 눈물이 쏟아져서 얼굴을 가렸다. 이건 불공평하다.
정말로 이건 너무―
“이 다음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가 않네.”
목소리가 들려 란은 휙 고개를 들었다. 사방의 경치가 변해 있었다.
새하얀 빙벽, 그 숲 속에 그녀는 서 있었다.
란의 앞에는 이브리아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란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브리아?”
“그래.”
이브리아가 란을 보고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안.”
이브리아의 손이 란의 시야를 덮쳤다.
✥✥✥
유스타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성벽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성벽 밖으로 나와 무장을 하고 쫙 도열해 있었다.
루미에는 하늘 저택에 있는 시나와 란을 떠올렸다.
힐끗 하늘을 한 번 보고 루미에가 말했다.
“오늘이란 말이죠.”
샤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샤레이아는 며칠 전 이브리아의 결계가 그 수명이 다했다고 알려왔다. 이제 곧 방어막이 깨질 거라고.
“그리고 어둠도 그 사실을 알 겁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이었다.
그녀 옆에는 하레쉬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는 우아하게 휘어진 활을 들고 서 있었다. 화살집은 허리에 달려 있었고, 반대쪽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빙벽에서 바람이 부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유스타프는 란을 생각했다.
그녀는 벌써 3일째 잠자고 있었고, 그는 초조함을 떨치기 위해서 애를 써야만 했다.
‘천 년.’
그는 봉인되었던 어둠을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그래, 미칠 만하다.
부상자나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말을 해 뒀지만, 아무도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다.
얼음 땅을 달려 때맞추어 도착한 일루미니티 백작과 와일드 남작 역시 가세해서 진을 쳤다.
“우―우 세레나 드 하스.”
웅웅 울리는 소리가 빙벽을 감싸고돌았다. 샤레이아가 우아하게 번역했다.
“너희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때다.”
로스는 ‘너네 다 뒈졌다는 말을, 참.’ 하고 창을 꽉 잡았다.
드래곤이 빙벽 위에서 날아올랐다. 드래곤이라고 하기도 뭐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한쪽 날개는 그림자처럼 얄팍해 보이며 퍼덕였고, 몸 역시 군데군데가 그림자라 크게 보였다가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동시에 남은 마수들이 몰려들었다. 죽었던 마수들 역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단원들은 차례로 투구창을 내렸다. 짧은 입김과 함께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청염을 떨치시길.”
“푸른 불꽃의 광휘가.”
유스타프가 제 투구창을 내리며 짧게 말했다.
“불꽃의 가호가 그대들에게.”
그가 손을 들자 성벽 위에서 화살 비가 마수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역시 날아와 쾅쾅 터졌다. 그 상황에서도 새까만 마갑으로 둘려진 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사단원들은 등자 옆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달깍 하고 얼음수정이 맞아 들어가면서 마법이 발동되었다.
첫 번째 화살비가 끝나자마자 유스타프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고, 동시에 기사단원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충분히 가속도를 받고 나서, 기사단원들과 마수들이 충돌했다.
날아온 드래곤이 성벽을 향해 불꽃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쩡―!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났다.
빙벽의 병사들은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 하늘에 금이 간 날을 그들은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드래곤이 다시 한 번 빙벽을 향해 불을 뿜자 병사들은 무기를 꽉 쥐었다.
쩍―
더더욱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청염.”
유스타프가 부르자, 푸른 화염이 드래곤의 얼굴을 감쌌다. 드래곤은 울부짖으며 하늘로 솟구쳤다가 크게 선회해서 내려오며 기사단원들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 공격이었다.
불꽃이 빠르게 훑고 지나가자 마수들은 재가 되거나 불타서 넘어졌지만, 기사단원들은 불꽃 속에서도 계속 움직였다. 그들이 등자를 꽉 당기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모된 얼음수정이 탕 튕겨 나와 바닥으로 떨어지고, 새 얼음수정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끼워졌다.
“불꽃 한 방에 수정 하나라니.”
블레인이 중얼거리자 로스가 웃으며 말했다.
“목숨 값보다야 싸지.”
블레인이 피식 웃으며 “그렇군.” 하고 외친 뒤 재가 된 마수를 창에서 털어내고 크게 회전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깃발이나 수식 없이도, 청염 기사단원들은 단장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유지했다.
마수들을 성벽에서 멀리 떼어내어 한쪽으로 모는 작전이었다.
양떼를 몰아대는 목양견들처럼 기사단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샤레이아는 그것을 지켜보며 길고 긴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지팡이 위에 별빛 같은 빛무리가 반짝이며 모여들었다.
하레쉬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서서 혹시 기사단이 놓친 작은 마물들이 달려오면 화살로 쏘아 맞혔다.
파센이 씩씩거리며 도끼를 휘둘렀다.
“우리 몫도 좀 남기라고!”
말을 타지 못하는 그들은 샤레이아와 함께 성벽 주변에 남아서 남은 마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어둠은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선회해서 돌아온 어둠은 다시 성벽을 향해 불꽃을 내뿜었다.
쨍―!
독특한, 소름 돋는 맑은 소리를 내며 방어막의 금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샤레이아.”
하레쉬가 짧게 그녀를 불렀고, 샤레이아는 ‘나도 알아.’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주문을 완성했다.
“페얄 알루빔.”
빛의 너울.
그녀의 주문이 완성되자 지팡이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 빛은 황금빛 오로라가 되어 너울처럼 청염 기사단이 모은 마수들 위에 펼쳐졌고, 죽은 마수들은 전부 다 다시 쓰러졌다.
살아 있는 마수들 역시, 어둠에게 사로잡힌 것에서 풀려 얼떨떨한 듯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샤레이아가 그대로 쓰러지려는 걸 하레쉬가 붙잡았다. 그녀는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는 쉽게, 그녀가 더는 한 마디도 못 할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레쉬의 말에 샤레이아는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큰 소리로 울부짖자, 하늘 저택의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병사들은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고, 예민한 말 역시 앞다리를 곧추세우는 것을 기사들이 능숙하게 달랬다.
어둠은 새까만 그림자 같은 날개를 더 크게 펼치고 다시 눈 성벽을 향해 불꽃을 내뿜었다.
쩌저적—
방어막의 금이 점점 더 늘어나더니 결국,
쨍그랑―!
시릴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불꽃이 눈 성벽을 훑자, 순식간에 성벽의 일부가 둥글게 녹아내렸다.
성벽 안쪽에 있던 병사들은 미칠 듯한 공포를 느끼며 성벽에서 빠져나왔다.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고 싶은 걸 억누르며 그들은 저택 안으로 도망쳤다.
“이브리아! 케세!”
어둠이 외쳤다. 그가 달리는 병사들을 향해 불꽃을 뿜어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통구이가 되지는 않았다. 프란체와 시나가 밤샘해서 만든 마법 도구 덕분이었다. 드래곤은 곧 새하얀 하늘 저택에 발톱을 박아 넣고 꼬리를 휘둘렀다.
물리적 공격에는 어쩔 수 없는지라, 몇몇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유스타프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흑마는 민첩하게 더욱 속도를 올렸다.
“청염.”
유스타프가 다시 부르자 드래곤이 불꽃에 휩싸였다. 어둠은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꼬리를 휘두르다가 날갯짓하며 힘껏 날아올랐다.
불꽃이 사라지자 어둠이 낮게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꼬리가 바닥을 좌우로 쓸고 있어, 목적이 명확히 보였다.
“산개!”
블레인이 소리쳤고 기사단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몇몇 기사단원들은 드래곤의 꼬리를 피하지 못했고, 거대한 꼬리에 얻어맞은 기사는 말과 함께 퉁기듯이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불꽃이 시야를 덮쳤다.
탕.
두 번째 얼음수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각자에게 예비된 수정은 총 6개.
남은 건 이제 4개다.
두 번째 불꽃도 통하지 않자, 어둠은 물리 공격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안착했다.
어둠이 소리쳤다.
“이브리아를 내놔!”
‘공용어.’
유스타프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가 투창을 집어 들어 드래곤에게 던졌다. 비늘에 살짝 박히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유스타프는 단단히 창을 쥐고 드래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주님!”
블레인이 단기필마로 달려가는 가주를 보며 소리 질렀다. 유스타프가 창을 든 반대 손으로 가볍게 수신호를 보내는 게 보였다. 블레인은 이를 갈며, 유스타프와 평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 주군을 섬기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루미에 역시 기가 찼다. 기도 찼지만, 경외감도 느껴졌다.
유스타프뿐이 아니라 기사단원 각각의 승마 실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스타프와 블레인이 달리는 것을 보고 보조를 맞춰서 달리기 시작했고, 기마술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루미에는 말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처럼 인마일체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대신 다른 기술은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루미에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블레인은 드래곤의 뒤쪽으로 돌아가는 루미에를 보고 미간을 모았다. 저런 식으로 명령 외의 행동을 하면―
그때 쿵 하고 누가 옆에서 말을 부딪쳐서 블레인은 화들짝 놀랐다. 유스타프였다.
“죽고 싶나?”
그의 말은 달리는 말 위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블레인은 한눈판 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고, 유스타프는 그걸 보는지 안 보는지 다시 멀어졌다. 블레인은 약간 감격에 몸이 떨려왔다.
주군이 제 몸을 걱정해서 일부러 다가와 말을 걸어 줬다는 게 감격이었다.
드래곤은 달려오는 기사들을 향해 머리를 휘둘렀다. 기사들은 재빠르게 산개해서 피했다가 다시 모였다. 그때 뒤로 돌아간 루미에가 말 등 위에 다리를 올린 후, 있는 힘껏 뛰어서 드래곤의 꼬리에 칼을 박아 넣었다.
드래곤이 몸을 휙 돌리며 꼬리를 마주 흔들다가 루미에가 떨어지지 않으니 땅에 쿵쿵 꼬리를 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스타프가 드래곤의 다리에 창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달리던 힘 그대로였으므로 창은 드래곤의 비늘을 뚫고 뼈에까지 가서 박혔다.
“크아악!!”
드래곤은 소리를 지르고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브리아!!”
그는 다시 소리를 지르더니 기사들을 무시하고 하늘 저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유스타프는 이를 악물었다.
시나와 시녀들은 쿵쿵거리는 소리에 숨을 죽였다.
그들은 하늘 저택의 지하실에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간이침대에는 여전히 란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무, 무너지면 어떻게 하죠?”
소다가 낮게 속삭였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경쾌하게 대답한 것은 키리였다.
“생매장이죠.”
“키리!”
디모디아가 비난하는 목소리를 냈고, 키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진짜로 종이처럼 창백해진 소다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무서우면 떠나면 됐잖아요?”
결전이 있기 전에, 유스타프는 떠날 자는 떠나라고 했다.
소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여기서 끄, 끝내지 않으면 어디로 가나 저 드래곤이 쫓아올 거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지요.”
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쿵―! 쿵―!
다시 저택이 흔들리며 머리 위로 돌가루가 떨어졌다. 시녀들은 흐느끼며 서로를 꼭 붙잡았다.
“시끄럽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시녀들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란이 상체를 세우고 있었다.
“란 언니!”
시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님!”
카라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다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마님!” 하고 이름을 불렀다. 란이 묘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묘하게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녹음은?”
란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시녀들은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녹음의 관을 가져왔다. 란이 그걸 붙잡고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미안하네.”
그리고 그녀가 관을 머리에 썼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하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빛났다.
“그럼 난 이만.”
그러더니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팟 하고 사라졌다. 시녀들은 대경하여 다들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마법?”
간신히 시나가 내뱉자 키리가 으르렁거렸다.
“마님을 찾아!”
디모디아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차 하며 다른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쿵쿵!
다시 저택이 크게 흔들리더니 요란한 소리가 났다.
“꺄악―!”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고 키리와 디모디아는 재빠르게 균형을 잡았다. 키리는 이를 갈았다.
“무너졌어.”
“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요.”
디모디아가 대답하고 시녀들에게 말했다.
“여기 계세요! 키리.”
키리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시녀들에게 말했다.
“디아는 내가 차출해 가지.”
그리고 두 사람은 지하실을 나섰고, 시나는 망설이다 무기를 챙겨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남은 시녀들은 멍하니 셋을 바라보다가 밖에서 들리는 포효에 귀를 꽉 틀어막았다.
드래곤은 하늘 저택의 일부를 꼬리로 후려쳐 무너트렸다.
그건 저택을 무너트리기보다는 꼬리에 매달린 루미에를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드래곤의 의도대로, 루미에는 건물에 처박혔다. 그의 검은 그대로 꼬리에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루미에는 신음을 내뱉었다.
‘엄청 아프네.’
아무리 드워프제 갑옷이라고 해도, 한계는 있는 법.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갈비뼈에 금이 간 게 아닌가 잠깐 생각했다.
드래곤이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루미에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가 허탈함을 느꼈다. 얼음수정은 전부 마갑에 달려 있다.
드래곤의 양쪽 목이 부풀어 오르고 루미에는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이다.
그때, 드래곤의 몸이 뭔가에 튕겨 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거구가 바닥에 떨어졌고, 루미에는 멍하니 그걸 보았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님?”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림빛 네글리제 차림의 란이 허공에 떠 있었다. 마구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녹색 관이 반짝였다.
그리고 표정이 풍부한 란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루미에!”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시나가 달려오는 게 보여 루미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리에서 휘청이며 일어났다.
“시나!”
창백한 얼굴의 시나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루, 루미에, 다친―”
“안 다쳤어.”
말하고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주인님은 저게 뭐고?”
“나도 몰라.”
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땅바닥을 구른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야.”
란의 말에 드래곤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이브리아.”
그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렸으므로, 루미에도 시나도 움찔했다. 하지만 란은― 이브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천 년이라, 천 년, 천 년.”
그녀는 한탄했다.
이브리아가 손가락을 들어 드래곤을 가리키고 말했다.
“이제 끝을 낼 때다.”
어둠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가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 몸으로? 어떻게? 그깟 평범한 계집의 몸으로 뭘 하려고?”
이브리아가 히죽 웃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빙벽이 울리기 시작했다. 란이 경쾌하게 말했다.
“내 마력의 일부는 이 산맥에 결정화가 되어 있거든.”
그녀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빛나기 시작했다.
웅웅웅—
빙벽이 울리는 소리가 대지와 천공을 가득 채웠다.
“너 하나 끝장내기는 충분하지.”
“평범한 몸으로 네 마력을 끌어다 쓴다고? 그 계집이 죽을 텐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여럿을 구한다면, 해야지.”
이브리아가 지휘하듯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반짝이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녀의 발밑에 나타나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법진은 순식간에 압축되어 사라졌고, 이브리아의 손끝에서 금색 레이저 같은 빛이 쏟아져 나갔다.
드래곤은 마주 불꽃을 쏘았고, 두 가지가 중간에 부딪치며 사방에 열기와 광풍을 쏟아냈다.
이브리아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칫.’
이브리아는 거칠게 코 밑을 닦아냈다. 불꽃을 멈춘 드래곤이 말했다.
“넌 항상 그딴 식이었어.”
갑작스럽게 드래곤의 말투가 변해서 이브리아의 얼굴이 흔들렸다.
“델?”
저도 모르게 그녀가 떨리는 음색으로 속삭이듯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드래곤은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항상, 널 생각하지 않고. 남겨진 나도 생각하지 않고.”
“델, 맞아?”
드래곤의 앞발이 천천히 이브리아를 향해서 뻗어나갔다. 커다란 발톱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상처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이브리아의 입술이 떨렸다.
“죽어.”
다음 순간, 드래곤이 그녀를 움켰고 루미에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관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나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때 푸른 불꽃이 드래곤의 눈을 집요하게 태웠고, 드래곤은 울부짖고 란을 땅바닥에 던졌다.
“언니!”
“주인님!”
루미에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으며 달려가는데, 새까만 흑마가 훨씬 더 빨랐다. 전력으로 달린 유스타프는 손을 뻗어 추락하는 란을 붙잡음과 동시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가 작게 신음 소리를 내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드래곤을 공격하는 데 청염만 세 번째.
체력적으로 지치는 게 느껴졌다. 이미 갑옷 안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란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란에게서 꺼져!”
그 말에 이브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라치아로군.”
“대현자인지 뭔지, 꺼지라고.”
“그래도 되나? 공작 부인 한 사람만 희생하면, 다른 자를 모두 구할 수 있는데? 선택을 해라, 라치아 공작.”
“꺼져.”
이브리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여자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란도, 라치아도 전부 내가 구해. 한 사람이라도 잃을 것 같아? 희생은 필요 없어.”
그 말에 이브리아는 얻어맞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브리아아―!”
자리에서 일어난 드래곤이 앞발을 휘둘렀고, 이브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었다.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그녀가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란!”
비명처럼 유스타프가 소리 질렀다. 이브리아가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동의했다. 널 구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거짓말.”
유스타프가 으르렁거리며 하는 말에 이브리아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란이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절대로 날 혼자 두고 가지 않아.
예전의 란이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납득했을 거다. 이브리아의 말에 흔들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말에 천천히 녹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크게 눈을 떴다.
“란?”
“아파. 젠장, 내 머릿속에서-”
란이 헐떡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 다 죽고 싶어?”
“싫어, 내 몸이야!”
란이 제 입으로 빠르게 말하고 반박하는 모습은 미쳤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란, 날 봐요. 란.”
유스타프가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그의 눈을 보게 했다. 그 새파란 눈을 보며 란은 이를 악물었다.
‘유스, 유스, 이게 내 유스야. 이게 현실이야.’
‘안 돼, 안 돼. 몇 년을 기다렸는데, 이렇게는 안 돼.’
란은 할 수 있다면 제 머리를 갈라서 이브리아를 쫓아내고 싶었다. 감정적인 면에서나 지식적인 면에서나 이브리아 쪽에서 쏟아지는 기억양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레―샤다?”
그때 부축을 받고 달려온 샤레이아가 소리쳤다.
그 순간, 란은 다정하게 웃는 엘프들과 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장면들이 쏟아져서-
‘젠장할!’
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레이아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엘 레레므 데하스?”
이브리아가 묻자 샤레이아가 얼굴에 미소를 띠려 애쓰며 말했다.
“푸하난 드 라사 레레므.”
“샤다.”
이브리아는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인 그녀는 바닥이 차가워 살짝 발을 굴러 보였다. 네글리제가 얇아서 추위가 느껴졌다. 이브리아는 오랜만인, 고통에 가까운 실제 감각을 음미했다.
‘추운 게 뭐가 행복해!’
란이 빽 머릿속으로 소리를 지르자 이브리아는 ‘그러게.’ 하곤 물러났다.
“란.”
다시 유스타프가 그녀를 불러서 란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괜찮아. 아마도.”
그녀가 유스타프의 불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을 보고 웃었다.
“머릿속이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퉁겨져 나간 어둠이 다시 울부짖더니 날개를 펼치고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블레인이 소리쳤다.
“방패 벽!”
기사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서 란과 유스타프를 가운데에 두고 방패를 들어 둥글게 벽을 쌓았다.
어둠이 불꽃을 쏘아냈다.
방패에 달린 얼음수정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게 보였다. 천천히 방패 가장자리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란이 손을 뻗자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던 녹음의 관이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다.
“란?”
“아니, 그게.”
란은 제 손안의 녹음의 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렇게 불러오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마치, 손을 뻗어서 집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지식을 함부로 빼 가지 마!’
이브리아가 소리쳐서 란은 ‘아, 역시 그런 거였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녹음의 관을 띄웠다.
“안 돼!”
이브리아가 소리쳤지만, 란의 손은 정확하게 동작을 그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녹음의 관은 진동하며 떠 있었다. 란이 작게 말했다.
“쉐하나 드쉐.”
동시에 파도처럼 강력한 힘이 녹음의 관에서 뻗어 나와 드래곤을 밀어냈다. 땅에 떨어진 어둠이 울부짖으며 발톱을 땅에 박았지만, 아무 소용없이 주르륵 밀려서 남은 눈 성벽을 부수고 그 밖까지 밀려났다.
“잠깐은 막을 수 있을 거야.”
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녹음의 관은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픽 쓰러지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붙잡았다.
“란? 란.”
몇 번 눈을 깜박이고 란은 숨을 내쉬었다.
“유스.”
유스타프가 그녈 힘껏 끌어안았다. 란은 온몸에 격통을 느꼈지만, 아랑곳 않고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신경이 타는 듯한 고통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방패를 내리고 블레인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 쿨럭, 찮아요.”
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녀가 손을 저었다.
“방패를 내려도 돼요. 이틀은, 저게 버텨 줄 겁니다.”
란이 녹음의 관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블레인이 손을 흔들자 기사단원들은 재빠르게 방패 벽을 해제했다.
란이 유스타프에게 속삭였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유스타프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란이 멍하니 반파된 하늘 저택을 바라보았다.
“부서졌네.”
“다시 지으면 됩니다. 아니면, 역시 빙벽은 추우니 다른 곳으로 가든가요.”
“방금 뭐였나? 세상에! 케― 하르쉐키!”
저쪽에서 달려온 파센이 빛나는 녹음의 관을 보고 소리를 내질렀다. 샤레이아가 말했다.
“레―샤다였습니다.”
“뭐? 진짜?”
파센이 펄쩍 뛰어, 로스가 물었다.
“그게 뭡니까?”
“대현자.”
하레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와 샤레이아, 두 엘프의 얼굴은 어두웠다.
파센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씩씩거렸다.
“제길, 노래에 나올 법한 부분인데 하필 풀쟁이들만 있었다니!”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일행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스타프가 심호흡하고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하늘 저택은 커서, 남은 부분이 있으니까요. 이틀은 저게 있을 거라고 하셨죠?”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