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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화


8. “그렇게 쉽게 판단해선 안 돼. 이분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으셨고…… 어쩌면 정신적 후유증도 남아 있을 수 있어.” “음. 하루타 형아처럼?” 삼동이의 질문에 하임은 불현듯 옆 마을에 사는 신원 불명의 외지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루타 씨 때와 얼추 비슷한 것 같네. 몇 달 전에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로 밭에서 발견되었다던 남자였다. 하루타를 처음 발견한 군인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수술 끝에 살아남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은 재일 교포 한국인이며 이름은 하루타라는 것. 이 두 가지 외엔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하임은 건너 건너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맞닥트린 적은 없었다. 군부도 경찰도 그를 데려다가 몇 번이고 조사했으나 알아낸 건 없는 듯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루타는 자신이 발견된 마을에서 임시 거주를 하게 되었다. 신분도 배경도 알 수 없는 이방인을 민통선 구역에서 지내게 하는 건 그야말로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조치였다. “근데, 하임이는 군인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되잖아. 봉주 할아버지가 싫어하실 텐데.” “…….” 하임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삼동이는 그저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젊은 외간 남자를 꺼리는 거라 여길 테지만, 사실 할아버지가 경계하는 건 따로 있었다. 하임이 앓고 있는 청각 공명 증후군. 질환이라 할지라도 이는 소수 특정 기관이 군침을 흘릴 만한 능력이었다. 극도로 희귀한 이 능력이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연구’라는 명목으로 실험대에 끌려가 신무기 개발의 부속품처럼 취급될 것이라며 겁을 주곤 했다. 하여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군인들을 경계했고 또 천적이라도 되는 양 무척 싫어했다. 그런데 그녀가 신원도 모르는 군인을 구했으니 이를 알게 된다면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이분이 완전히 다 낫고 나면 무사히 마을을 떠날 수 있게 도와드릴 거야. 그때까지 다른 누구에게도 절대 들켜선 안 돼.” * * * 삼동이는 분교를 나서자마자 마을 어르신들 댁을 돌며 장작을 패고 소정의 삯을 받았다. 겨울맞이 준비로 바빠진 여담 마을은 여기저기 할 일이 많았다. 곳곳에서 비닐하우스 보수를 도와 달라고 하거나 김장용 배추를 옮겨 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옆 마을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는 만큼 삼동이는 당분간 일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안심했다. 집에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그는 심순 할머니가 준 과일을 깎아 도시락 통에 담았다. 하임이 저녁엔 올 수 없다고 했기에 혼자 군인 형아를 보살펴야 했다. 무료함을 채울 만화책을 몇 권 챙겨 분교로 돌아갔을 때, 삼동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 군인 형아는 늘 보던 자세 그대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눈에 들어온 약통이 삼동이의 눈길을 붙잡았다. 약통 위치와 내용물은 떠나기 전 그대로였으나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연고가 그랬다. 하임이 남자의 생채기에 발라 준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연고의 뒷면이 위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앞면이 보였다. 마치 누가 뒤집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저와 하임이 함께 방을 나섰으니 둘 중 하나가 약통을 다시 건들 일은 없었다. 그 작은 변화를 캐치한 삼동이가 보따리를 내려놓고선 남자에게 다가갔다. 곤히 자는 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삼동이는 아리송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칫 코가 스칠 듯한 거리까지 다가간 그의 눈엔 물음표가 가득 떠 있었다. “형아.” “…….” “군인 형아, 일어났어?” 속눈썹 한 올조차 움직임이 없었으나 삼동이는 계속 말을 걸었다. “연고는 왜? 더 발라 줄까?” “…….” “깼으면 놀자. 삼동이 심심해.” 기분이 좋아진 삼동이는 확신의 어조로 내뱉으며 웃었다. 며칠 새 정이 붙었는지 그가 깨어나기를 내심 간절히 기다리던 중이었다. “우리 게임하자.” “…….” “형아? 시치미 떼면 간지럼 태울 거야.” 간지럼도 태우고 같이 만화책도 봐야지. 별안간 신이 난 삼동이가 장난기를 내비치며 슬그머니 이불을 들칠 때였다. “형아, 얼른 일…….” 쉭― 퍽― 눈 깜짝할 사이에 삼동이의 시야가 뒤집혔다. “…….”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왜 내가 천장을 보고 있지. 상황을 파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딘가 둔탁한 통증이 밀려오며 마비가 된 것처럼 몸에 힘이 빠졌다. 보통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물리적인 공격에 정신이 혼미했다. “……아파.” 그는 머리 위에 빙빙 도는 별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무혁은 분교에 아무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어딘가 엉성하고 모자라 보이는 두 은인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대화를 엿들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던 그는 옆 마을에 산다는 하루타에 관해서도 귀를 곤두세웠다. 기억 상실증이라……. 게다가 민통선이 해제도 안 된 시기에 마을에서 지내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는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매번 똑같은 풍경을 훑었다. 그러다 약통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하고 연고를 집어 들었다. 상처에 바를 때마다 간지러워 짜증을 유발한 연고였다. 때론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이 간지럼이었다. 유통 기한을 확인하곤 툭 던지듯 내려놓은 연고 탓에 그 어벙한 녀석의 의심을 사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군인 형아, 일어났어?” 속으로 살짝 놀랐으나 그저 심심해서 잡소리를 하는 거라 여겼다. 근데. “연고는 왜? 더 발라 줄까?” ……이 새끼 뭐지? 어리숙한 시골 촌놈 새끼는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여러 약과 뒤섞여 있던, 그깟 연고 하나가 뒤집힌 걸 알아챘다고? 작전 중이었다면 작은 흔적조차 용납하지 않겠으나 이곳은 하등 상관없는 촌구석이었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새끼가 알아채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무혁은 온몸에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혹시 저를 노리는 암살자는 아니려나. 어쩐지, 190cm에 육박하는 저를 쌀 한 포대 옮기듯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것도 그렇고. 만약 이것이 전부 다 꾸며진 것이라면 100점을 줄 만한 위장술이었다. “우리 게임하자.” 씨발, 무슨 게임. 러시안룰렛? 몸싸움? 칼싸움? 둘 중 한 명이 뒤질 때까지 하는 게임쯤이야. 이미 경험해 본 무혁이었다. 총이 없으니 관자놀이에 칼을 박아 줄까. 그 전에 저 혓바닥 좀 댕강 잘라 버렸으면 좋겠는데. 급기야 삼동이는 시치미 떼면 간지럼을 태운다며 협박하더니 이불에 손을 댔다. 그와 동시에 무혁이 두 눈을 떴다.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삼동이를 제압하며 급소를 공격하자 그가 나가떨어졌다. 덩치는 곰인데 기초적인 방어 반응이 조금도 없었다.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아예 기본 훈련조차 안 된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좀 전까지 무혁이 누워 있던 자리에 고꾸라진 삼동이가 서럽다는 양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파.” “…….” 얼마 안 가 눈을 뒤집고 기절하는 곰 한 마리를 바라보던 무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 * * 다음 날. 도도도도― 벌컥― 복도를 타고 가벼운 발소리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앉아 있던 무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동공이 문을 통과하는 형체를 정확히 조준했다. 그는 하임을 안다는 듯 바라보았고, 동시에 낯선 듯 들여다보았다. 살짝 상기된 두 뺨, 들뜬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밤색 머리칼. 전체적으로 약하고 가늘다는 느낌이 드는 생명체였다. “어, 어…….” 무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어 버린 하임이 좀 전과 달리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 그는 툭 치면 부러질 듯한 팔목과 자그마한 손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안녕하세요, 일어나셨네요…….” 제 앞에 쪼그려 앉는 여자에게선 일말의 경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오늘, 무혁은 처음으로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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