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9화
9.
신기할 정도로 조막만 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찼고, 도톰한 입술은 바른 게 없는 듯한데도 붉었다.
이제야 하임의 확실한 생김새를 뇌리에 새긴 무혁은 언젠가 북해도에서 보았던 어느 소동물을 떠올렸다.
당시 깊고 울창한 숲으로 도망친 표적을 처리하고 난 직후였다. 몸 안엔 따끔한 열이 돌았고, 손끝에 묻은 피가 식기도 전이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으며 숨을 고르던 중, 나뭇가지에 웅크려 앉아 있던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더랬다.
흩뿌려진 피와 살기로 점철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주먹만 한 털 뭉치였다.
북방 하늘다람쥐.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하고 순진무구한 생김새를 보는 순간 느꼈던 허탈함이란.
산 것과 죽은 것. 파괴한 것과 남아 있는 것 사이의 괴리 속에서 일순간 머리가 텅 비어 버렸더랬다.
생사의 경계 위에 선 저와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한 존재는 일종의 불협화음 같았다. 별안간 인생의 무상함과 감정의 균열이 쓰나미처럼 저를 덮쳤다.
당시 무혁은 갑자기 ‘귀엽다’는 감정을 느낀 스스로에게도 짧은 혐오감이 일었다. 그건 피곤함도 자책도 아닌, 이름 없는 감정이었다.
기이할 만큼 순하고 약해 보이는 것들은 가끔 저를 허탈하리만치 무력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조심해야 할 상대는 칼을 들고도 칼을 쥔 줄 모르는 자들임을, 무수한 경험으로 깨달아 온 터였다.
여자를 눈에 담자마자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줄이야. 그녀는 지금이 한겨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었다.
뽀얀 솜을 얹은 듯한, 둥그런 방울 두 개는 작은 짐승이 귀를 잔뜩 부풀린 것 같았다. 무해한 인상이 잠시나마 제 눈길을 붙잡았다.
“어, 음, 제 소개가 너무 늦었죠? 저는 임하임이라고 해요.”
무혁이 입을 열지 않아도 하임은 알아서 떠들어 댔다. 부끄러운 티가 역력한데도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는 의지가 투명하게 비쳤다.
“저, 몸은 좀 어떠세요? 어디 불편한 곳은…….”
그의 침묵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뺨에 핀 홍조는 점점 더 짙어졌다.
머쓱해진 하임은 왠지 오늘따라 말이 없는 삼동이를 흘긋거렸다. 원래도 눈치가 없긴 하지만, 뭐라도 말해 보라 눈짓해도 그저 입을 다물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하임이 다시 무혁을 돌아봤다.
“불편하시면 억지로 말 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저를 가늠하듯 빤히 보는 서늘한 시선에 긴장했다. 홀릴 듯한 외모와 달리 무혁을 둘러싼 분위기는 무감하고 냉정했다.
“이건 기력 회복에 좋은 약초를 우린 건데, 드시겠어요?”
무혁은 순간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삼켜야 했다.
매일같이 제 얼굴을 훔쳐보며 온갖 감탄사를 다 흘려 놓고선.
눈꺼풀을 닫은 상태에서도 따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쳐다봤으면서 지금은 은근슬쩍 제 눈을 피하고 있었다.
순진한 두 은인은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을 정도로 써먹기 쉬운 상대들이었다. 목숨을 살려 준 답례야 나중에 거하게 해 주면 되는 거고.
촌구석 사람들에게도 결국 돈이 최고일 테지. 돈이라면 그에게도 가장 명료하고 간편한 방식이었다. 무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임하임 씨라고 했죠?”
“……네.”
“그쪽이 날 구했다면서.”
그가 입꼬리를 의미심장하게 휘었다.
* * *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이름도요?”
“그렇습니다만.”
하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혁은 입에 지퍼가 잠긴 삼동이를 무심히 흘겼다.
“그간의 일은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어쨌든 살려 줘서 고맙단 인사부터 해야겠군요. 그쪽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구더기 밥이 됐을 테니.”
“헙.”
하임이 심장 마비라도 온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고작 이 정도 표현에 저리 경악할 일인가. 무혁은 저답지 않게 최대한 순화했음에도 창백해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에 군번줄을 매고 있던 걸 보면 군인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일반 직업 군인은 아니었던 듯하군요.”
“…….”
“그래서 그러는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습니까?”
“뭐든요. 뭐든 도와드릴게요.”
하임이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슬픈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라도 보는 표정이었다.
무혁은 작은 발짓에도 속을 듯한 순진함에 또 한 번 허탈함과 무력함을 느꼈다. 하나 시답잖은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며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모든 장비와 무기를 잃은 상태라 제약이 많았다.
어떻게든 본부에 연락을 취한다고 해도 내부에 또 다른 배신자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누구보다 예리하다고 자신해 왔으나 별안간 아군과 적이 쉬이 분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중성.
“…….”
무혁은 머리로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 새끼가 언제부터 배신을 준비했고 어떤 연유로 배신했는지 낱낱이 알아내야 했다.
넌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뭐가 됐든 간에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족친다.’
그는 그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맨몸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이곳이 여담 마을이란 거지.’
곰곰이 따져 보자면 이곳 여담 마을은 등잔 밑과 다름없었다. 은신과 감시에 있어서 최악이거나 혹은 최적화된 환경일 터였다.
또 하나의 특이점은 최근 민간인 통제선이 해제된 곳이라는 점이었다.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무혁은 그 결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필이면 간첩의 도주로를 좁혀 가던 시점, 가장 북측과 인접한 마을의 통제를 푼다는 건 보안에 균열을 하나 더 내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우연이라 치기엔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했다.
그는 당시 보고서를 훑으며 잠깐 스쳤던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이 마을에 무언가 있는 건 아닐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담 마을 한복판에 서 있으니 그 찜찜함이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겉보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사람들은 순했고, 풍경은 고요했고, 밤이 되면 불빛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고요함은 때로 가장 두꺼운 위장막이 된다. 감시가 느슨해진 듯 보이면서도, 어쩌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촘촘히 짜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날 자신이 추적하던 간첩의 도주가 이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면, 그가 지금껏 쫓아온 건 그저 흘려보낸 미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중성의 밑그림이었을 터.
배신이 드러났던 그날, 이중성은 끝까지 태연했다. 마치 모든 변수가 계산 안에 들어 있다는 듯한 눈빛. 자신은 쫓는 자라 생각했지만, 실은 이중성이 유도한 방향으로 성실히 달려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좆 같게도.
무언가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무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여 그는 이 마을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판은 이미 한참 전부터 벌어져 있었고, 자신은 여태껏 그 거대한 설계도의 가장자리만 더듬고 있었던 셈일지도.
통제가 풀린 이유, 그 시점, 누가 이득을 봤는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흐름을 전부 하나씩 짚어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혁은 제 눈치를 살피는 삼동이와 하임을 이용해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쪽이 땅속에 묻혀 있던 나를 찾아냈다던데. 어떻게 찾은 겁니까? 산에 산삼을 캐러 들어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 그게…… 어디 가셨나 싶어 찾다가 우연히 흙 상태가 다른 곳을 발견해서요. 혹시나 해서 파 본 건데 피가 묻은 가방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
“드, 들으셨다시피 출입 금지 구역이라 들키면 곤란해지거든요. 벌금도 워낙 세고 그래서…… 병원으로 모시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하임은 마치 제 머릿속을 꿰뚫는 듯한 고요한 눈빛이 매섭게 느껴졌다. 잘생긴 것과 별개로 그가 풍기는 기류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아, 그리고 저희가 팠던 곳은 다시 원상태로 돌려놨어요. 엊그제 종일 비도 내려서 웬만해선 흔적 찾기 어려울 거예요.”
제 발 저린 하임이 조잘거렸다.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는 시선은 살짝 비껴간 상태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무혁이 여상하게 대꾸했다.
“상황을 듣자 하니 외부에 알리지 않은 게 나한테도 더 좋은 걸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근데 안 무서웠습니까? 안에 잔인하게 훼손된 시체가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