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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


7. 아직 완치되지 않은 몸이 얼마나 따라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선제공격 정도는 가능한 위치였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들려다가 이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조심스러울지언정, 발걸음 자체는 무척 가벼운 데다가 침입을 감추려는 사람의 움직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경계와 은폐가 몸에 밴 자들의 기척은 무게를 나누거나 숨결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특징이 있는데, 지금 다가오는 발걸음은 그런 종류의 긴장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체중을 싣지 않으려는 듯, 상대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발뒤꿈치를 최대한 조심스레 굴리는 움직임이었다. 그 여자였다. 살의를 거둔 무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침상 쪽으로 향했다. 원래 이 시간대엔 오지 않았던 거 같은데.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선 잠든 척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는 깨어나기 전의 자세 그대로 천장을 향해 누운 채 몸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눈꺼풀이 내려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혁은 숨결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장대한 체구가 무색할 만큼 기척이라곤 없는 움직임은 마치 귀신 같았고, 모든 소리가 소멸된 것처럼 움직였다. 무혁은 눈을 감은 채 여자의 발소리를 따라가며 상황을 가늠했다. 여자는 저를 숨겨 둘 목적으로 이곳에 데려온 듯했다. 삼동이라는 녀석을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 같았다. 신고나 외부 연락이 이루어진 흔적도 없었다. 이 고립된 공간에 자신을 데려다 놓은 것이 단순한 구조 이상의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무혁은 그녀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곧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마침내 그의 범위 안에 여자가 들어왔다. 무혁은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켰다.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곧 하임이 조용히 다가와 옆에 쪼그려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눌리고, 그녀 특유의 단내 섞인 풀 향이 코끝에 스쳤다. 이불 위를 더듬던 손이 식어 버린 팥 주머니들을 하나씩 치우고, 곧 온기가 밀려 들어왔다. 새로 데워 온 듯한 주머니 여러 개가 몸 옆에 착실히 자리 잡자 그녀가 손을 뗐다. 뜨듯한 열기가 스치자 무혁은 되레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조막만 한 주머니는 이 공간에 범람하는 냉기를 밀어 내기에 심히 부족했다. “오늘 밤부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해서요. 핫팩 더 많이 가져왔으니까 얼어 죽으시면 안 돼요. 마음 같아선 제가 밤새 곁에 있어 드리고 싶지만…….” 간절히 기도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에 무혁이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을 살리겠답시고 이렇게까지 호구 짓 하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나. 이불까지 정돈해 주는 손길을 느끼는 동안 계산을 끝낸 무혁은 돌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꺄악―!”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손목을 낚아챈 그는 놀란 여자를 전처럼 제 품으로 거세게 당겨 안았다. 역시 따듯하네. 여전히 생체 난로처럼 뜨듯하고 포근한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생사의 위기 좀 넘었다고 고작 이 정도에 추위를 느끼다니. 자존심이 상하긴 하나 핫팩을 품에 안고 오느라 딱 좋게 데워진 여자의 온기를 좀 더 나눠 받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지금, 이 고립된 곳에서 제가 붙잡아 둘 만한 유일한 끈이 바로 이 여자였다. 하여 그녀의 순진한 호의를 적절히 이용해 두는 편이 유리할 듯싶었다. 이런 판국에도 미남계를 써먹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자 그럴듯한 계획이 세워졌다. “……추워.” “…….” 고작 건조한 두 글자만으로 먹히는 여자는 어리석으리만치 착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고쳐 안았다. 한 꺼풀 가면을 쓴 채 반응을 살피던 무혁은, 속내와는 별개로 그 감촉이 생각 외로 편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제 늑골 아래 작고 부드러운 곡선들이 정확하게 밀착하는 것이, 마치 오래 쓰던 맞춤 베개처럼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방탄조끼가 없어서인지 더 생생하게 와 닿았다. 너무 가벼워 놓칠 듯하면서도 온기만큼은 또렷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무혁은 간만에 눈여겨볼 만한 흥밋거리를 찾은 것 같아 조금 재밌어졌다. 어쩌면 이용 가치가 꽤 높겠군. 그리 단정하자마자 갑자기 잠기운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훈련으로 약물에 대한 심리적, 육체적 저항력을 강화했더라도 이런 몸 상태로는 약기운을 밀어 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굳이 지금 상황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인지하자 버티던 방어벽이 무너졌다. 이어서 나른함이 서서히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저, 저기…….” “…….” 무혁은 조심스러운 부름을 무시한 채 온기에 정신을 내맡겼다. 얼굴이 가슴팍에 묻히다시피 한 여자가 저를 빼꼼히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추위가 완전히 가시자 의식이 조용히 침전했다. 일말의 경계까지 서서히 풀리며 무혁은 수면의 어두운 바닥으로 천천히 잠겨 들었다. * * * 하임은 꼭두새벽부터 산에 올랐다가 점심쯤에 그날 캔 약초와 버섯을 팔고, 오후에 분교로 향했다. 천종산삼은 여전히 코빼기도 안 보였으나, 그래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채취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2인 1조로 움직일 때보다는 못해도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 여겼다. 삼동이와 번갈아 가며 남자를 보살폈기에 망정이지, 삼동이가 없었다면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자가 잘못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남자를 데려오고 이튿날 밤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 참이었다. 새벽녘이면 마을 어딘가를 스치는 낯선 기척이 감지됐다. 발을 끄는 소리도, 숨을 고르는 기척도 거의 없었지만, 사람의 움직임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임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미세한 흔적이었다. 그 무렵부터 군인들도 마을을 돌았다. 생활 실태를 확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질문보다 시선이 더 길었다. 집 안을 훑는 눈빛이 단순한 실태 조사라 보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외부인이 머물고 있는지 가늠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달까. 분교까지 확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남자를 숨겨 둔 창고 방은 오래 잠겨 있던 공간이었고, 겉으로는 방치된 곳처럼 보였다. 군인들이 내부를 훑고 갔어도 수상하다고 여기진 않은 듯했다. 그때마다 하임은 그를 폐분교에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집이었다면 이미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상이 자주 스쳤다. 그렇게 한동안은 긴장의 연속이었으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새벽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생활 점검을 한다던 군인들도 어느 순간 발길을 끊었다. 마을은 다시 본래의 풍경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남자가 이 근방에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감시의 끈이 느슨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오늘도 몰래 폐분교에 잠입한 하임은 곤히 자는 남자의 입에 약수를 흘려 넣었다. 이틀 전에 드디어 의식이 돌아온 듯했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든 후로 또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덥석 안겼던 기억이 떠오르자 하임은 괜히 손끝이 간질거렸다. 겁이 날 만큼 가까워졌는데도, 낯선 품이 단단하고 따듯해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아직도 남자의 체온과 묵직한 팔의 감각이 지워지지 않은 터였다. 그래도 오늘은 남자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정성껏 돌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군인 형아 다 나았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삼동이는 알 수 있어. 형아 엄청 엄청 건강해.” 삼동이는 왜인지 민망하다는 양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임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딱히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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