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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화


16. ‘이 모든 것이 연기는 아닐까.’ 지금 이 상황이 전부 함정이라면. 며칠 사이에 이 여자가 저들과 내통한 거라면. 저를 찾아올 때 말고는 밖에서 무얼 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 무혁은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소매에 숨겨 둔 칼을 만지작거렸다. 하임이 소리를 지르려고 하면 즉시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새 조금 정든 풋풋한 얼굴이 피범벅이 될 걸 상상하면 좀 아깝긴 하다만. ‘모르는 사이에 저 새끼들의 제안에 넘어간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리 결론을 낼 무렵, 하임이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무혁의 눈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이내 하임이 느닷없이 명상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혁은 불청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면서도 시선을 하임에게서 한시도 떼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칼을 고쳐 잡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후, 두 명의 인원이 땅을 뒤적이고 초소를 들락거렸다. 거리가 멀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덮쳐 버릴까.’ 마음 같아선 이대로 확 밀고 나가 두 놈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온몸에 피가 솟구치는 충동이 뇌를 쳤다. 하지만 이 자리엔 변수가 있었다. 단숨에 간파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닌 것도 같은, 임하임이란 여자였다. 지금까진 자신을 살린 은인이니, 정말 그녀가 적과 무관하다는 전제하에 적어도 험한 꼴을 보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을 즈음, 가늘게 떨리던 하임의 눈꺼풀이 열렸다. 연필로 그어 둔 듯 둥글게 올라간 눈썹이 휘며, 말간 눈망울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마치 또 무언가를 확실히 잡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 겁에 질린 하임은 숨을 고르지 못한 채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손끝이 살짝 굳고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훤히 드러났다. 그것 외엔 특별한 수상함을 읽지 못한 무혁은 멀어지는 불청객의 기척을 끝까지 좇았다. 좁은 바위틈 너머로 그림자가 사라질 무렵, 하임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저 사람들이 천종 씨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도 할 법한 추론이라 대꾸할 가치가 없었기에, 무혁은 그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날 동, 동료분들은 다 죽었…… 흡.” 하임이 본인의 입을 틀어막는 속도보다 그의 청각이 더 빨랐다. 문장은 완성되기 전에 이미 그의 귀에 또렷하게 꽂힌 뒤였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무혁은 꺼져 가던 의식 속에서 중성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간 이무열과 최이연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던 말. 더군다나 이연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걸 직접 봤기에 두 사람의 생존 가능성을 제로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임이 쉬이 입에 올릴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날 내게 동료가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는 엄지로 칼날의 냉기를 천천히 쓸었다. 질문 자체가 형식일 뿐, 눈빛은 이미 심문과도 같았다. 우물쭈물하는 하임은 말끝을 더듬다가 억지스러운 설명을 내놨다. “저, 저도 몰라요. 혹시나 동료분들이 있었나 해서 여쭤 본 거예요.” “방금은 ‘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그 말은 그러니까, 만약 계셨다면 그렇게 된 건가 싶어서…….” 거짓말은 좆도 못 하는 여자지만 내뱉는 말 하나하나는 괜히 하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날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흔적은 못 봤습니까?” 휙휙 고개를 젓는 움직임에서만큼은 속이려는 기색이 없었다.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네.’ 발칙하게도. 북방 하늘다람쥐 같은 무해한 얼굴 아래에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건지. 저를 저 새끼들에게 넘기려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뭘까. “알다시피 내가 기억이 없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 “그러니까 임하임 씨가 나 좀 도와줘요.” 하임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꼭 다물어 볼이 봉긋 솟은 모습은 영웅 역할이라도 떠안은 듯한 어설픈 의지로 가득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도와드릴게요.” “하임 씨가 있어서 든든하네요.” 무혁의 입매가 가볍게 휘었지만, 그의 눈은 단 한 줄기의 온기도 품지 않았다. * * * [일단 울프독 사체는 처리한 걸로 보고해. 나머지랑 함께 묻었다고.] [울프독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외부에 알릴 필요는 없어. 한 명만 살아남았으면 조용히 수색해서 처리하면 된다.] [대체 누가 한 짓일까요. 혼자 힘으론 절대 못 빠져나왔을 겁니다.] [파악할 때까지 당분간 작전 중단한다. 일단 울프독 거주지 근처에 인력 배치해 놓고 동태 살펴.] 삼동이네 주방에서 감자를 씻던 하임의 손동작이 느려졌다. 귓속에서 전날 밤에 들었던 대화가 메아리치듯 오래도록 맴돌았다. 아무래도 ‘울프독’은 천종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그 사람들은 천종 씨를 찾으면 또 죽이려 들 거야. 혹시 우리 마을에도 쳐들어오면 어쩌지. 막연히 위험하리라 생각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구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다시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 화를 입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많이 슬플 것 같았다. 그를 더 철저히 숨기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가?” 바로 옆에서 머리를 들이민 삼동이가 해맑게 웃었다. 한참 멍을 때리던 하임이 움찔했다. 아무리 청각이 예민해도 완전히 넋을 놓고 있을 땐 감각이 좁혀지기 마련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감자전 만들 감자는 다 씻었어?” “응.” “하임이가 만든 감자전 맛있겠다. 삼동이는 열 개 먹어야지.” 하임은 감자전 반죽이 완성될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삼동아.” “응?” “너 앞으로 잘 때도 무전기랑 핸드폰 둘 다 옆에 두고 자. 알았지?” “왜?” “혹시 누군가가 다시 천종 씨 잡으러 올 수도 있으니까 위험에 대비해야지. 외지인이나 군인이 나타났다 싶으면 연락하기로 하자.” 누가 보면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을 위해 유난을 떤다며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하임은 그를 돕기로 한 제 선택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삼동이는 금세 들킬 일은 없으리라 믿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태평하게 받아넘겼다. “꼭이야, 꼭. 당분간은 잘 때도 방심해선 안 돼.” “방심 안 해. 삼동이도 천종이 형아 지킨다.” 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요리에 속도를 더했다. 능숙한 솜씨에 노릇하게 익은 감자전이 접시 위에 겹겹이 쌓여 갔다. “삼동아, 간장 양념 만들어 줘.” 그녀는 홍고추 슬라이스 세 개와 잣 고명을 꽃 모양으로 마무리한 뒤, 할아버지 몫으로 가져갈 전 몇 장을 소쿠리에 따로 챙겼다. “이제 가자.” 분교로 향하는 길, 내내 경계를 놓지 않던 하임은 후문 근처에 다다른 순간 뭔가에 놀란 듯 멈추어 섰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뒤를 휙 돌아보더니 삼동이의 등을 떠밀었다. “삼동아, 너 먼저 들어가.” “왜?” “얼른. 나는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알았어.” “천종 씨한테 절대 창밖 보거나 소리 내지 말라고 전해. 너도 창가에 얼씬거리면 안 돼, 알았지?” “응.” 순순히 대꾸한 삼동이가 보따리를 떠안고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하임은 망을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가 실내로 들어선 기척을 확인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싶었으나 저를 찾는 듯한 누군가가 이미 운동장 입구를 통과한 뒤였다. “어이, 하임아!” 여담 마을의 이장, 최봉길 영감이 그녀에게 용건이 있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임은 그가 건물에 더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뛰다시피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집에 찾아갔더니 아무도 없더만. 여기서 뭐 하누?” “아, 더 추워지기 전에 캘 만한 게 있나 싶어서요.” “그렇구먼. 근데 삼동이랑 같이 있던 거 아니었남? 이 녀석은 어디로 사라졌데?” “삼동이는 뒷산에 잠깐 올라갔다 온다고 했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하임이 분교 쪽으로 향하는 최 이장의 시선을 슬쩍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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