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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화


15. “삼동아, 만약에 누군가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알려 주고 너는 마을로 내려가. 알았지?” “하임이 위험하면?” “안 위험해. 나는 절대 안 들킬 자신 있어.” “하임이 귀신 무서워하잖아.” “왜 느닷없이 귀, 귀신 얘기를 하고 그래…….” “밤이니까.” 하임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면서도 무서운 듯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사실 군인이나 산짐승보다 귀신이 더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작고 마른 어깨가 더 작아지자 무혁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숙한 애들 데리고 이게 뭔 지랄인가.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는 지금,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협조하기로 했다. “귀신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고마워요, 천종 씨.” 그녀는 마치 감동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삼동이가 샛길로 사라지자 하임이 긴장한 낯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출입 금지 구역이에요.” “그럼 가죠.” 단둘이 오르는 산길은 점점 더 가팔라졌고, 나뭇가지와 덤불이 더 조밀하게 얽혀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임은 길을 안다는 듯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름길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은 겁이 많다던 말이 무색할 만큼 안정적이었다. 무혁은 그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처럼 훈련으로 다져진 건 아니어도 이 지형에서만큼은 완벽히 익숙해 보였다. “임하임 씨.” 낮게 깔린 음성에 하임이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네?” “이 구역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요. 가끔 할아버지 몰래 삼동이랑 산을 오르곤 했거든요.”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여긴 아무도 안 와서요. 조용하잖아요.” 대답은 순진했지만, 그 이면에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낡은 철조망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5분쯤 뒤였다. 간이 철책은 저번보다 조금 더 허술했고, 녹슨 팻말 위엔 군사 시설 관련 지역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임은 반쯤 뜯겨 나가 바람에 헛도는 ‘출입 금지’ 표식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매번 여기로 넘어가는 겁니까? 혼자?” “네.” “하임 씨는…… 겁이 많은 것 같은데 겁이 없군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거나 납치당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게 군인이든 사냥꾼이든 누구든 간에. 실수로 총에 맞았다고 해도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지역. 더 나아가 지뢰를 밟고 몸이 고깃덩이처럼 조각조각 터져 버릴 수도 있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눈앞의 여자는 대체 뭘 믿고 여길 그리 쉽게 넘어 다니는 걸까. 가시지 않는 위화감에 무혁의 눈빛이 차게 내려앉았다. “천종 씨,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진입 금지 테이프를 넘은 하임이 달빛을 피해 나무 그림자 뒤로 향했다. 그러곤 갑자기 쪼그려 앉자 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녀는 마치 땅속의 소리가 궁금한 사람처럼 귀를 지면에 바짝 붙였다. 또 뭘 하는 거지. 제법 먼 거리였으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일반인이라면 검은 잉크처럼 번지는 숲의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는 야간 시력 또한 평균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설마 내가 본인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떤 목적이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그 단서를 찾고 싶다는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하임이 다시 제게로 다가오자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제가 갔던 길이 맞는지 살펴보고 왔어요.” “……그랬군요.” 한참 동안 한 포인트에서 움직이지 않은 걸 뻔히 보았는데도, 하임은 서툰 거짓말을 내놓았다. 무혁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천종 씨, 천천히 따라오세요. 발밑 조심하시고요.” 그는 세 걸음 앞서가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온은 더 떨어지고 높은 지대의 공기는 초겨울처럼 매서워졌다. 무성한 나무 사이를 꽤 걸은 뒤에야 무혁의 기억에 남아 있던 초소 부근에 다다랐다. “……천종 씨가 묻혀 있던 곳은 여기예요.” “…….” “제가 망볼 테니까 살펴보세요. 지금은 손전등 켜셔도 될 것 같아요.” 무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킨 지점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자, 첨예한 시야 안으로 지형의 경사와 인위적인 흔적이 얇게 드러났다. 말없이 그 자리의 선들을 따라가던 무혁은 고개를 들어 멀리 북서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능선이 꺾이는 각도, 산 입구에서 이 지점까지 걸어온 거리, 그 사이에서 지나쳤던 표지 없는 분기점들. 머릿속에서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도 없이도 지형을 복원해 내는 건 몸에 밴 작업이었다. 산에 들어선 직후부터 그는 이미 각도와 방향, 교차 지점을 무심하게 암산하고 있었다. ‘……이 지점이면 작전지 기준 남서 방향. 거리로 치면 대략 1.6km 근처겠군.’ 그 계산은 너무 익숙하고 매끄러워 스스로도 무의식에 가까웠다. 무혁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제한적이나 북극성에서 살짝 비켜난 별의 위치로 방향을 가늠했다. GPS를 비롯해 아무런 장비도 없으니 원시적인 방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딴 짓을 또 하게 될 줄이야.’ 입안에서 터진 비웃음이 짧은 숨결에 실려 흩어졌다. 그는 손전등을 켜고 땅을 비췄다. 경사 때문에 지면이 평평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비가 몇 번이나 지나갔을 텐데.’ 왜 침식된 흔적이 여전히 ‘자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걸까. 무혁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자국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잡초가 눌린 각도, 단단한 흙과 주변의 어색한 틈. 이건 틀림없이 누군가가 다시 손을 댄 흔적이었다. 어느새 싸늘해진 얼굴로 흙을 긁어 본 그는 얽혀 있는 돌과 나뭇가지를 확인했다. 산짐승이 파헤친 것처럼 의도적으로 위장한 걸 보면 인간이 한 짓이었다. ‘역시 내 시체를 회수하러 왔었군.’ 머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다른 제삼자의 개입을 의심하거나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씨발, 좆 같네.’ 집으로도 본부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당장 정보를 모을 길도 없었다. 이중성 그 새끼나 제발 뒤졌기를. 마찬가지로 적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니 이보다 더 답답하고 짜증 날 수 없었다. 만약 그 새끼가 아직 NEXA 요원 행세를 하고 있다면 더더욱 최악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피로가 관자놀이를 갉아먹는 기분이 들던 때였다. “처, 천종 씨……!” 낮게 깔린 다급한 부름이 날아왔다. 무혁이 돌아보기도 전에 하임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누군가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숨어야 해요!” “…….” “얼른요!” 하임의 시선이 향한 어둠을 따라가 봐도 무혁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요.” 그녀가 그를 어딘가로 이끌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방해받아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앗.” 낙엽에 미끄러지려던 하임의 허리를 무혁이 한 팔로 단단히 받쳤다. 그는 미처 바닥까지 내려간 음성을 끌어올리지 못한 채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냉담하고 까칠한 음색에 하임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무혁은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꺾으며 말을 이었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하임이 초소와 거리가 제법 떨어진 서쪽을 가리켰다. “……저 바위 뒤에 숨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혁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보나 마나 야생 동물이겠거니, 생각하며 바위 근처에 다다른 그가 돌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실제로 누군가의 기척이 들린 것이다.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닌, 인간의 기척이 이쪽으로 접근 중이었다. “얼른 숨어요.” 하임이 바위 뒤로 몸을 웅크리며 그를 잡아당겼다. 무혁은 주변을 살피느라 바쁜 그녀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보다 먼저 눈치를 챘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요원들 중에서도 저보다 민감한 감각을 가진 이는 없었다. 불청객들의 움직임이 가까워질수록, 무혁의 동공은 날 선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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