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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화


17. “하임이 너, 옆 마을 장 씨한테 빌린 돈 아직 다 못 갚았담서?” “……네.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하임이 네가 올해 몇 살이던가? 스물은 넘었지?” “스물셋인데요?” “어이고, 네가 벌써 스물셋이누? 허허, 그럼 시집가도 되겠구먼.” “……뜬금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장 씨가 다음 달까지 돈 못 갚으면 그냥 돈 대신 하임이 너를 색시 삼겠다던데, 차라리 너도 그게 낫지 않겠누?” “네?!” 화들짝 놀란 하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결혼이라니요, 말도 안 돼요! 저 돈 갚을 수 있어요!” “자그마치 천만 원을 빌려 놓고 아직 반도 못 갚았담서. 근데 어떻게 다음 달에 그 큰돈을 다 갚을 수 있겠누?” “갚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갚을 거예요. 전부 못 갚으면 남은 금액은 장 씨 아저씨네 감자밭에서 일해서 갚기로 이미 얘기도 다 됐어요. 근데 결혼이라니요……!” “장 씨 곧 땅 팔 거라 내년엔 감자 캘 일 없어.” “그럼 다른 밭에서 일하면 되죠. 장 아저씨가 키우는 농작물이 한둘이에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장 씨가 돈 빌려준 사람이니 결정권은 그 양반한테 있는 거 아니겠누.” “이장님은 왜 갑자기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뱉는 순간, 하임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갯불처럼 스쳤다. “……설마 장 씨 아저씨가 중개라도 해 달래요?” 최 이장이 가끔 결혼 중매를 서고 소개비를 챙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에도 다른 마을에 사는 과부와 홀아비를 붙여 주고 봉투를 받아 갔다나. 갑자기 심장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서늘하게 조여들었다. “크흠.” “저는 차라리 노예처럼 일하고 말지, 절대 장 씨 아저씨랑 결혼은 안 해요. 심지어 장 씨 아저씨는 저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다는 거 모르세요?” “장 씨 정도면 훌륭한 신랑감인데, 네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이장님.” 하임이 차갑게 정색하자 최 이장은 불쾌해졌는지 언성을 높였다. “그 돈 기한 내에 못 갚으면 이자도 붙는다믄서? 봉주 형님도 모르게 그 큰돈을 빌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제가 알아서 책임질게요. 제가 이장님한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쯧쯧, 도와 달라고 쪼르르 달려올 땐 언제고. 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도움 필요할 때 안 도와주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옆 마을 장 씨 아저씨한테까지 손 벌린 거구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하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웃 중 누군가가 곤경을 겪으면 두 발 벗고 나서 주었지만, 막상 그들이 아프고 힘들 때 되돌아온 손길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도 누군가는 도와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하임은 설움이 북받쳤더랬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최봉길 이장이었다. “제 채무든 결혼이든 이장님이 관여하실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여담 마을 이장인데, 신경을 어떻게 안 써?! 하임이 네 채무 문제로 옆 마을이랑 괜한 갈등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냔 말이야. 이제 행정 처리도 다 끝나면 마을끼리 합심해서 관광 둘레길도 조성해야 하고, 의논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잡음이라도 생겼다간…….” 쨍그랑―! 느닷없는 소음에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사색이 된 하임의 눈이 소리의 근원지인 분교에 꽂혔다. * * * 무혁은 달빛마저 흐릿한 깊은 밤을 틈타 몰래 활동을 시작한 참이었다. 우선 분교 내부부터 샅샅이 살펴본 뒤, 이 근방을 돌며 지형을 파악했다. 산에 다녀오던 날, 하임이 알아서 CCTV 사각지대로 안내한 덕에 동선은 머릿속에 잡힌 상태였다. 이러한 대처 센스를 보면 마냥 대책 없는 여자는 아닌 듯싶었다. 근질근질한 몸을 움직이니 분교에 처박혀 있는 시간이 그나마 덜 무료하게 느껴졌다. 어둠이 긴 계절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창밖을 응시하던 무혁은, 하임과 삼동이가 나란히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걸 확인하곤 녹슨 연장들을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분교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쓸 만하다 싶어 모아 둔 것이었다. “형아, 안녕.” 헤벌쭉 웃는 삼동이를 무심히 흘긴 무혁은, 함께 모습을 드러내야 할 하임이 보이지 않자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왜 혼자야.” “하임이는 밖에. 갑자기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어.” “…….” 그는 때마침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웬 불청객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람은 누구야.” “누구?” 삼동이는 무혁의 어깨 너머로 목만 쭉, 빼어 창밖을 확인하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장님이다. 여기에 왜 오셨지?” “이장?” “응, 우리 마을 이장님. 이장님은 여기 재수 없다고 엄청 싫어하시는데.” “왜.” “귀신 나와서 싫대. 귀신 보고 기절한 이후론 얼씬도 안 해.” “귀신은 얼어 죽을.” “여기에 진짜 귀신 있어, 형아. 봤다는 사람 또 있는데. 형아는 아직 못 봤어?” 지랄들 하고 있네. 대꾸할 가치가 없는 잡담을 한 귀로 흘리는 무혁의 입매가 소리 없이 비틀렸다. “근데 형아, 창문에 가까이 가면 안 돼. 하임이가 조심하라고 했어.” 주의를 가뿐히 무시한 무혁은 다시 그림자 속에서 바깥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장이라면 나름 마을의 실세이니 얼굴을 봐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하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순간, 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내 그는 삼동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붙여 보이고는 창고를 나섰다. 곧이어 빈 교실 하나로 들어서자 창틀만 남은 작은 쪽창으로 찬바람이 스쳐 들어왔다. 그곳에선 바깥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고, 무혁은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마을 얘기든 어떤 사소한 단서든, 저와 닿을 만한 정보가 하나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저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였다. 하임이 옆 마을 누군가와 채무 관계라는 걸 알게 됐을 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장이라는 노친네가 쏟아 내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실로 어이가 없었다. 고작 천만 원 가지고 시집 타령에 색시 드립이라니. 게다가 스물셋밖에 안 된 하임에게 마흔셋 노총각을 갖다 붙인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국내판 매매혼이야.’ 제 손목시계값도 안 되는 금액 때문에 노예처럼 일하겠다는 하임과, 그런 그녀를 노총각에게 팔아넘기지 못해 안달 난 이장의 대화는 기막힘, 그 자체였다. 촌구석이라 그런가, 아직도 저런 구시대적 발상을 굴리는 인간이 있다니. 무혁은 이장을 싸늘히 노려보며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가스라이팅 같은 거추장스러운 단어를 붙이기에도 하찮은 수준의 언변이었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씹.’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진절머리를 내며 돌아선 무혁은 창고로 돌아가는 대신,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을 기준으로 건물 왼쪽은 창문이 떨어져 휑한 곳이 더러 있었고, 심지어 복도 끝 창틀 하나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듣자 하니 몇 년 전에 저 지점에서 불이 나서 건물이 홀라당 탈 뻔했다나. 대낮에도 으스스한 풍경을 무심히 지나친 무혁은 덜렁거리는 창틀을 발로 툭, 찼다. 그러자 대번에 떨어져 나간 창틀이 통째로 추락하며 거센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운동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라 소음만 들렸을 터였다. 쨍그랑―! ‘귀신보다 더 독한 새끼한테 뒤지고 싶지 않으면 꺼지든가.’ 그는 산산조각 난 유리창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고는 권태로운 시선을 돌렸다. * * * 최 이장은 역시 재수가 없는 곳이라며 도망치듯 운동장을 떠났다. 덩달아 놀란 하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헐레벌떡 분교에 발을 들였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니 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감자전을 뜯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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