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18화
18.
“……방금 그거 무슨 소리예요?”
“저쪽 복도 끝 창문이 떨어졌나 봅니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해 보이던데.”
“어떡하죠? 그럼 누가 확인하러 올 수도 있잖아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밖에서 봐도 위태로워 보였을 테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오면 숨으면 되고.”
오만 걱정이 다 들기 시작한 하임과 달리 무혁은 여유롭기만 했다.
“감자전 직접 만들었다더니 맛있군요. 하임 씨도 얼른 먹어요.”
“맞아. 하임이가 만든 감자전이 제일 맛있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매끄러운 칭찬에 넘어간 하임이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곧 일손을 도우러 가야 하는 삼동이는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음 달까지 어떻게든 천만 원을 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하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루 종일 산을 탄다고 해도 그 액수를 버는 건 무리였다. 천종산삼을 제외해도 20년 내외 삼을 발견하는 것도 매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개수로 승부를 봐야 하나.
가격이 높지 않은 어린 삼을 닥치는 대로 캐서 팔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들 역시 마음처럼 눈앞에 나타나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언제 첫눈이 내릴지 모르는 이 날씨에.
오죽하면 심마니들이 ‘눈 오기 전에 산에 들어가는 게 마지막 기회’라고 하겠나. 산이 소복한 눈에 덮이면 난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도 당연했다.
이장과의 대화로 입맛이 없는 하임이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무혁이 한입 크기의 조각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오늘도 어디 아픈 겁니까?”
“아, 아니에요.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요.”
두 남자가 맛있다고 추켜세워 준 감자전이 무(無)맛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시선은 바닥에서 좀처럼 들리지 않았고, 그 탓에 무혁이 계속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
무혁은 그녀의 머릿속이 돈 걱정으로 가득하리란 걸 짐작하였으나 그의 관심사는 다른 쪽이었다.
‘이번에도 먼저 알아챘단 말이지.’
이장이 찾아온 건 우연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임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삼동이를 먼저 들여보내고 단속까지 했다.
두 번까지는 우연이겠거니 넘길 수 있어도 세 번은 곧 확신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일반인이라면 절대 잡아내지 못할 결의 소음을 읽는 듯했다. 심지어 거리와 방향까지 꽤 구체적으로.
문제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였다.
훈련받은 요원들도 장비 없이는 곧잘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환경음을 맨몸으로 감지한다니. 땅속에 매장된 저를 찾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몰래 한숨을 내쉬는 하임을 지켜보는 무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질감과 흥미가 뒤섞인 날 선 시선이 내내 그녀에게 머물렀다.
삼동이가 떠난 후, 무혁은 말수마저 줄어든 하임에게 말을 걸었다.
“부탁이 있습니다만.”
“부탁이요? 뭔데요?”
“나를 산에 다시 데려가 줄 수 있어요? 지난번에 갔다 온 곳 말하는 겁니다.”
“왜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고가 있던 날에 산에서 중요한 물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군요. 가서 살펴보면 기억이 조금이라도 또렷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 그러시구나. 근데 산에서는 웬만해선 찾기 힘드실 텐데요?”
“그거야 모르지. 임하임 씨가 날 찾아 준 것처럼 기적이 또 일어날지.”
“…….”
하임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은 오늘따라 빨리 떠날 채비를 하는 그녀의 뒤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등 덴 건 다 나았습니까? 물집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네에. 천종 씨가 약 발라 준 덕분에 이제 아무 느낌 없어요.”
훅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하임의 눈동자가 허공을 방황했다.
“거짓말 같은데. 다 나았는지 확인해 보게 잠깐 앉아 봐요.”
“네?”
무혁은 조금만 건드려도 확 커지는 구슬 같은 눈망울을 빤히 들여다봤다.
“하임 씨는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별로 신뢰가 안 가거든. 그러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 그러실 필요는……!”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눈꼬리도 축 처져서는, 어디 한 군데 아픈 표정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믿어.”
“아, 아파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역시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거군요.”
“…….”
무혁이 대답을 회피하는 하임의 턱을 가볍게 쥐어 올리자, 긴장한 그녀의 가슴이 잔잔하게 들썩였다.
“……정말 별일 아니에요. 천종 씨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살살 구슬리면 통장 비밀번호까지 다 불게 생겨선 의외로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나도 하임 씨한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긴, 제 이름도 기억 못 하는 무능한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요……!”
“하임 씨 마음 이해합니다. 나 같아도 정체 모를 남자에겐 사소한 고민조차 나누기 껄끄러웠을 거고.”
무혁의 자기 비하에 적잖이 충격받은 듯한 하임이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지었다. 한마디 더 했다간 말간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위로 정도는 해 줘도 되겠죠.”
“위로요?”
“이리 와 봐요. 안아 줄게.”
책상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무혁이 두 팔을 벌리자 하임이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한 번 더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꺅……!”
다시 의자에 착석한 무혁의 허벅지 위엔 하임이 공주님처럼 폭, 안겨 있었다.
“위로는 그쪽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부끄러운 하임은 양 발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이다가 이내 서서히 몸을 이완시켰다.
“의지도 안 되는 새끼한테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저, 저는 천종 씨가 미덥지 않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알아요. 내 꼴이 이렇다 보니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하임이 조심스레 무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기억 상실 빼곤 모든 것이 다 완벽해 보이는 남자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안아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 되는데…….’
하임은 그의 한쪽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의 넓은 가슴이 바로 귀밑에서 오르내렸고, 규칙적인 호흡 사이로 은은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낯설고 당황스러웠던 자세가 어느새 안정감으로, 그리고 그 안정감이 말할 수 없는 설렘으로 번져 갔다. 제 어깨와 팔, 허리를 감싼 손길은 전혀 노골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듯 자연스러웠는데, 그래서 더 유혹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천종 씨가 안 떠났으면 좋겠어. 인연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온기 너머엔 어른 남자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힘으로는 충분히 자신을 움켜쥐고도 남을 사람인데. 모든 힘을 억누른 채 저를 품고 있다는 감각이 그에게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근육질 팔뚝에 비치는 힘줄의 움직임, 탄탄한 허벅지의 낯선 감촉을 인지하자 속이 간질거렸다. 당장이라도 심장 뛰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저도 천종 씨를 안아 드리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요?”
은근한 사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용기 내어 묻는 말에 그가 하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자로 뻗은 입매 끝이 감질날 만큼 은은하게 휘는, 시니컬한 미소는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근사했다.
“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그러니까 천종 씨가 우울하실 때 위로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할 때요. 저라도 괜찮으시면…….”
휙―
“……!”
별안간 무혁이 하임의 허리를 가볍게 쑥, 들더니 저와 마주 보고 앉게끔 자세를 고쳤다.
“이런 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겁니다.”
그는 얼어 버린 하임을 더 꽉 고쳐 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한층 더 낯부끄러워진 자세와 별개로, 아래를 뭉근하게 누르는 존재감에 멍한 눈을 깜빡였다.
처음엔 주머니에 커다란 물건이 들어 있나 했으나 위치가 지나치게 중심에 몰려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