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19.
하임의 머리를 제 가슴 위에 지그시 누른 무혁의 턱이 굳게 다물렸다. 별안간 여유를 잃을 정도로 다른 감각이 불쑥 고개를 든 탓이었다.
제 허벅지 위에서 얌전히 몸을 내맡기는 하임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미묘한 자극이 되고 있었다. 장난도 장단이 어느 정도 맞아야 치지, 너무 순진하고 순종적이란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빳빳해지는 아랫도리가 하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고 싶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심경을 대변하는 손이 허리춤을 어루만졌다.
‘그 장 씨 새끼도 분명 이런 목적이었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돈을 빌려줬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다다르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눈깔 있는 사내라면 그녀의 속살이 얼마나 말랑하고 보드라울지 안 보고도 알아챘겠지.
“임하임 씨, 근데 원래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한테 잘해 줘요?”
“네?”
“다른 남자들한테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구냐, 이 말이야.”
겉으론 부드러운 어조지만 말끝이 기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임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지만, 지나치게 가까운 얼굴 탓에 기류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 아니요. 저는 아무에게나 잘해 주지 않아요.”
“그런가.”
무혁이 어설프게 붙어 있는 하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아무래도 하임 씨는 지금보다 덜 착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러니 앞으로 다른 남자를 도와주고 싶어지면 선뜻 나서지 말고 한 번 더 고민해요. 내 생각 하면서.”
하임은 그대로 말문이 막힌 채로 눈동자를 굴렸다.
말 자체는 흘려들어도 될 가벼운 충고 같았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질투할 리 없다고,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묘하게 전기가 튀었다.
다른 남자를 돕지 말라니, 왜 내게 이런 말을 하시는 거지?
그의 신체 변화가 느껴진 탓에 호기심 어린 희망이 스며들었다. 차마 묻지 못한 감정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무혁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질투 맞을걸.”
“……!”
“임하임 씨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깜짝 놀랄 텐데. 궁금해요?”
질투 두 번 한다고 했다간 전 재산을 줄 기세네. 무혁은 뺨을 붉히며 속눈썹을 떠는 하임의 반응에 속으로 코웃음 쳤다.
‘아, 진짜 확 잡아먹어 버릴까.’
그는 찹쌀떡 같은 볼과 분홍빛이 도는 자그마한 귀를 한 번씩 슬쩍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 단둘이서만 산에 가요. 다른 사람들 몰래 데이트할 겸.”
* * *
겨울의 문턱에 걸린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 고요했다. 나무들은 잎을 대부분 떨군 채 가지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숨을 들이쉬면 흙 내음보다 냉기가 먼저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사삭―
말라비틀어진 낙엽을 밝을 때마다 건조한 소리가 작게 부서졌다. 하임은 산속의 잔소리 같은 기척들을 하나씩 묵음 처리하듯 삼키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
그녀는 말없이 저를 뒤따르는 무혁을 흘끗 보고는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추위가 내려앉은 산은 더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웠지만, 그와 함께여서인지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초소에 다다르자 무혁이 잠시 방향을 가늠하더니 돌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경계심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행동에 하임이 노심초사하며 뒤를 쫓았다.
“처, 천종 씨. 어디 가세요?”
“내가 굴러떨어진 곳을 확인해 봐야겠군요.”
성큼성큼 앞서 걷는 그의 걸음이 너무 빨랐다. 거리가 금세 벌어지자 그녀는 더 말 걸 생각도 못 하고 부지런히 산을 올라야 했다.
‘나보다 훨씬 잘 타시잖아.’
확신하듯 특정 방향으로 걷던 무혁의 앞에 지나치게 가파른 경사가 나타났다. 절벽까진 아니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각도였다.
“여기서 잃어버린 거 같은데.”
“뭐를요?”
“시계.”
“어떤 시계요?”
“목에 걸고 다니는 작은 회중시계. 하나밖에 없는 외할아버지의 유품입니다.”
“아…….”
“나한텐 더없이 소중한 물건이라 온 산을 뒤져서라도 찾아야겠군요.”
“기억이 나시는 거예요?, 저번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고…….”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혁이 아슬아슬한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수준에다가 낙엽이 수북한 탓에 첫 발부터 미끄러질 뻔했다.
“여, 여기서 시계를 찾겠다고요?”
그것도 맨몸으로? 하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매일 밤새 찾다 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위험하니까 하임 씨는 뒤로 물러나 있어요.”
“…….”
무혁은 곧장 손을 뻗어 흙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낙엽을 훑어 내고, 작은 손전등에만 의지한 채로 돌과 흙 속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계속해서 굽혀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자 하임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기적이 아니고서야 시계를 찾기는 힘들 텐데.
오밤중에 산에서 시계 하나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았다. 사고 직후도 아니거니와 계절이 바뀌며 산도 그때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무리이다 싶으면서도 ‘유품’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 천종 씨, 그렇게 하면 한 세월이 걸릴 텐데요.”
“못 찾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지.”
무혁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가며 군데군데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새벽까지는커녕 며칠이고 이 산자락을 어슬렁거리며 뒤질 기세였다.
그 대책 없는 행동을 지켜보던 하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시계, 작동도 하나요?”
“…….”
그 말에 땅을 헤집던 무혁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빛이 은밀하게 내리깔렸지만 내뱉는 어조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그때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하임은 그 대답만으로 결심이 섰다는 양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천천히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차가운 낙엽을 한 줌씩 치워 내며 귀를 바짝 붙였다.
삭―
마른 잎이 움찔거리는 작은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밤이었다. 하임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호흡이 점점 깊어지자 주위의 작은 떨림과 숨결 같은 소음이 또렷하게 걸려들기 시작했다. 대지 속을 잔잔하게 흐르는 미세한 울림들이 뿌리와 지면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붕, 징―
무언가 약하게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먼 곳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왔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쳐 버릴 아주 작은 소리였다.
하임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고 귀를 더 바짝 눌렀다. 미세한 소리를 잡아내기 위한 감각의 통로를 넓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
그 모습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무혁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그녀의 사소한 몸짓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시야에 담았다.
틱, 틱, 틱―
둘 사이의 공기가 숨을 죽인 듯 조밀하게 고조된 사이, 하임은 마침내 미약하지만 분명한 무언가를 잡아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의 심장 박동 같은 소리였다.
‘이건 시계의 초침 소리야.’
하임은 숨을 죽인 채 그 진동을 따라 방향을 천천히 좁혀 나갔다. 잠시 후 고개를 들자 왜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실루엣 하나가 잡혔다.
“……천종 씨?”
순간 너무 무방비했나 싶어 속으로 아차 싶던 찰나, 어둑한 형체가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임하임 씨, 거기 있어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위치 좀 알려줘 봐요.”
아, 다행이다. 나를 못 보셨구나.
“잠시만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많이 가파른데 괜찮겠습니까?”
“네, 걱정 마세요.”
하임은 조심조심 움직이며 그와 거리를 좁혔다. 능숙한 몸놀림으로 산비탈을 오르는 그녀의 손이 제 발치에 닿자 무혁이 팔을 훅, 당겼다.
“……!”
“역시 심마니라 그런가, 씩씩하게 산을 잘 타네.”
웃음기 어린 어조가 나직하게 울렸다. 무혁은 앉아 있었으나 가파른 땅이 바로 등 뒤에 있어 누운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몸 위에 엎드린 듯한 자세가 되었다.
터질 것 같은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도 닿지 않을까, 하임이 재빨리 일어나려 했으나 굵직한 팔이 등허리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