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53화
53.
하임은 정신 못 차리는 새에 벽과 무혁 사이에 갇힌 채로 하염없이 시달렸다. 머지않아 그녀의 눈이 감길 듯하자 그가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흐읏! 응! 하으응!”
“후우.”
마침내 절정에 달한 무혁이 귀두 밖으로 정액을 토해 냈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다 못해 탈진한 하임은 그의 사정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무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가슴을 느긋하게 주무르며 후희를 즐겼다.
“하아, 하아.”
“씻으러 가자.”
“……잠이 들 것 같아요.”
“씻겨 줄게.”
무혁은 곧 실신이라도 할 것 같은 하임을 안아 들었다. 그녀는 새끼 원숭이처럼 그에게 안긴 채로 욕실에 발을 들였다. 머지않아 욕실에서도 비명 같은 교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 * *
여담 마을에 투입된 NEXA 3인조는 청명국과 I.D.C의 추가 흔적을 찾기 위해 산과 마을 곳곳을 수색했다.
그들은 경호 따위는 필요 없다는 봉주가 산으로 향하면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이 지역의 지리를 모두 꿰뚫고 있는 봉주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 묵묵히 앞서 걸었다.
‘임꺽정’이란 별호로 암암리에 전해져 오던, 전설의 주인공을 맞닥트린 3인조는 내심 봉주에게 관심이 많은 듯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봉주는 그들이 배운 모든 교범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위치 추적도 통신 보조도 없던 시절. 현재 기준에선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를 거슬러 온 대선배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력에서는 묘한 균열과 동시에 분명한 기개가 전해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부당한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고, 동료들을 살려 낸 책임을 홀로 떠안았다는 것.
하여 봉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3인조의 시선에는 은근한 존경도 섞여 있었다.
“어르신, 그럼 접근 금지 구역 내에서 마지막으로 지뢰가 발견된 게 언제입니까?”
봉주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다.
“2년 전. 지뢰 탐지 임무 중에 폭발해서 육군 부사관 다리 한쪽이 날아간 게 마지막이여.”
“접경 지역과 가까웠습니까?”
“그리 가까웠던 것은 아니여. 북한이 매설한 나뭇잎 지뢰가 집중 호우 때 떠내려왔던 거여.”
“두 달 전에도 북한군이 MDL(군사 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을 침범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안전성이 보장되었다고 보기엔 아직 무리인 듯한데 접근 금지를 해제했다는 게…….”
북한 측은 불모지 조성 및 탈북민을 막기 위한 조치로 지뢰를 매설한 거라고 주장했으나, 폭우 기간에 북한이 의도적으로 지뢰를 유출한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형 파악 차 접근 금지 구역까지 둘러보고 하산하는 길, 바울이 군용 지도에 무언가를 표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유실 지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저런 곳에서 약초를 캤다니. 담력이 캡틴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 그 심마니 아가씨?”
정환의 질문에 좌표를 들여다보던 바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산은 5년 전에 산사태로 유실된 지뢰가 스물아홉 발 발견되었던 곳입니다. 경사도 심해서 토사 붕괴나 지형 변형도 잦은 지역이고요.”
“이제 캡틴의 여자가 된 이상 힘들게 약초 캘 일도 없을 텐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내내 선두에서 걷던 봉주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뒷짐을 진 그가 손가락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내자 3인조가 순발력 있게 흩어졌다.
“…….”
등 뒤가 고요해지자 봉주는 혼자서 마저 산길을 내려갔다. 이내 산 초입에 도착한 그를 최 이장이 능글스러운 얼굴로 맞았다.
“아이고, 봉주 형님. 댁에 왜 안 계신가 했는데 산에 다녀오셨나 보네.”
“최 이장이 어쩐 일이여.”
“요새 하임이가 통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 거요?”
봉주의 까칠한 눈빛에 최 이장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맨날 뽈뽈 돌아댕기는 애가 안 보여서 그렇지.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내 손녀가 돌아댕기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여.”
“아이고, 형님. 또 말 섭섭하게 하시네. 우리가 본 세월이 얼만데, 하임이도 내 손녀 같은 아인데 궁금해할 수 있는 거 아니요?”
최 이장을 싸늘히 응시하던 봉주가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가 싶더니 그의 멱살을 덥석 잡아 올렸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손녀는 얼어 죽을 씨팔, 이 개만도 못한 호로 잡놈 새끼가. 우리 하임이가 손녀 같아서 스무 살도 더 처먹은 장 씨 놈한테 팔아서 뒷돈 챙기려고 한 거여?!”
“그것도 다 하임이를 위해서 그런 거지!”
“그 주둥이 다물지 않으면 니놈 창자를 배 밖으로 꺼내서 산짐승 먹이로 던져 버릴 줄 알어.”
“혀, 형님이야말로 당장 이거 놓고 사과하쇼! 나랑 장 씨가 하임이 안 도와줬으면 형님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거 같쇼?!”
형형한 기세를 풍기는 봉주의 어조가 심해까지 내려앉았다.
“이런 쌍놈을 봤나. 니랑 니놈 애비야말로 그동안 나한테 꿍쳐 먹은 돈이 얼만데, 하임이까지 끌어들여서 그딴 수작질까지 혀.”
“…….”
“엉? 그 간사한 주둥이로 어디 계속 씨불여 봐.”
봉주는 여담 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부터 체류비, 관리비니 하는 명목으로 꾸준히 돈을 내 왔다. 액수가 크지는 않았지만 빼먹는 법도 없었다.
정착 당시에는 최 이장의 아버지가 이장직을 맡았기에, 부자에게 약 45년이란 세월 동안 돈을 뜯긴 거나 다름없었다. 이장이라는 감투를 쓴 자들의 탐욕을 묵묵히 견뎌 온 봉주였다.
그게 갑질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아도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어쨌든 여담 마을은 오래도록 군의 통제를 받았고, 그 시절 이장은 군부와 가장 깊게 맞닿아 있던 자리였다.
괜히 밉보일 이유도,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게 최선이었다. 하여 적당히 돈을 쥐여 주면 이장은 군인들 앞에서 저에 대해 알아서 말을 아꼈다.
몸이 크게 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봉주는 하임에게 병원비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깊이 캐묻지 않았다. 그 무렵 최 이장이 먼저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시골 노인들 대상으로 나온 의료 지원금이 있다느니, 봉주가 그간 마을에 보탠 게 있으니 기꺼이 돕겠다느니, 혀를 한껏 간사하게 굴리며 말을 엮어 댔다. 당시엔 그 말을 온전히 믿었다기보다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모두 하임의 부탁으로 제게 늘어놓은 말이었고, 최 이장은 저를 위하는 마음을 저당 잡아 손녀까지 이용해 먹으려고 했다. 지금 봉주의 손에 쥐어진 멱살에는 오래 묵은 감정이 모두 실려 있었다.
“이거 놓으쇼! 안 그래도 마을 운영비말인데…….”
봉주는 그의 멱살을 놓지 않은 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이, 최방길이. 지금까지 받아 처먹은 것들마저 전부 토해 내고 싶지 않으면 내 눈에 띄지 말어.”
“형님이야말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윽.”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최 이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거 놓으라니까!”
“한 번만 더 내 손녀로 장난질하면 그땐 이장이고 뭐고 없어. 뼈도 못 추리게 될 거여.”
퍽―
봉주가 신경질적으로 멱살을 놓자 최 이장이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노장의 기세에 완전히 눌린 그는 봉주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씩씩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다시 고요가 찾아오자 흩어져 있던 3인조가 봉주의 뒤에 섰다. 앞만 보고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놈이 수상혀.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구먼.”
“저희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봉주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낡은 자루 가방을 뒤로 휙 던졌다. 안에는 이 시기에 캘 수 있는 익숙한 약초가 들어 있었다.
“니들 대장한테 전혀. 그것들 넣고 닭 푹 고아서 우리 하임이 먹이라고.”
“예, 어르신.”
“…….”
말없이 앞서 걷는 봉주의 뒷모습이 어딘가 적적해 보였다.
* * *
“이 늙어 빠진 영감탱이를 씨발. 내가 아주 족쳐 놓을 줄 알아.”
트럭을 몰고 옆 동네 읍내로 향하는 동안, 최 이장의 잇새로 신랄한 욕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뒤져서 땅에 묻히기만 해 보쇼. 영감탱이 무덤에 온갖 오물을 쏟아부어 줄 테니.”
다 허물어져 가는 어느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고 주위를 깊게 살폈다. 읍내 변두리에 자리한 상가는 가게들이 줄줄이 폐업하면서 인적도 끊기다시피 한 상태였다.
장사를 이어 가는 가게라고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다방 하나뿐이었다. 다방에 들어선 최 이장은 유일한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조심스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