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54화
54.
구석 쪽, 낡은 시스루 커튼 너머로 남자의 윤곽이 어렴풋이 비쳤다. 첫인상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남자는 오늘도 공간을 잡아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흠. 또 뵙습니다, 오태구 씨.”
“…….”
인사 없이 고개만 끄덕인 상대가 앉으라는 듯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지난번 마을을 둘러보고 간 외지인은 언뜻 봐도 돈이 많아 보였다. 최 이장은 결부터 다른 최고급 양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자리에 앉았다.
“물건은요.”
‘어린 녀석이 싸가지 하고는.’
최 이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춘 채 순순히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표지가 군데군데 헤어진, 두툼한 노트 한 권은 모서리도 손때로 반질거렸다.
“여담 마을의 역사를 담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최 이장은 노트를 넘기는 남자의 손놀림을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담 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싶다는 상대의 제안을 어떻게든 현실화시키고 싶었다. 부친 세대 때부터 군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기록해 오던 습관이 횡재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웬만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전부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민통선 구역에서 살아온 세월, 밤마다 들리던 경계 방송, 까다롭게 통제되던 출입. 명절이면 제를 올리고, 농번기엔 서로 품앗이해 온 지난날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국경과 가까운 마을만의 풍습, 이곳 주민들에겐 당연했던 규칙들이 외지인들에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소개될 터였다.
“이걸 관광으로 풀면 이장님께도 좋은 자산이 되겠군요.”
남자의 짤막한 감상에 최 이장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현실화가 된다면 관광 수익의 일부가 그의 통장에 꽂힐 거라 했기 때문이다. 최 이장은 지긋지긋한 여담 마을을 떠나 호화스러운 노년을 보내는 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저희 여담 마을에 대해 궁금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여담 마을 토박이이자 산증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어느 페이지를 유심히 응시하던 상대가 무심히 말했다.
“여기 나오는 임봉주 씨가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심마니 영감인가 보군요. 주변 마을까지 명성이 꽤 자자한 것 같던데.”
천종산삼을 캔 기록을 언급하자 최 이장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조금 전에 봉주에게 좋지 않은 꼴을 당한 터라 심기가 단단히 비틀려 있는 상태였다.
본격적인 관광 사업 준비를 앞두고 마을 운영비를 인상해야겠다는 생각에 봉주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를 설득하면 나머지 주민들은 자연히 협조할 것이라 판단되어 대화를 시도했으나 본전도 못 찾은 참이었다.
“자자하기는요. 딱 한 번 우연히 캔 거 가지고 다들 추켜세워 준 거지. 지금은 다 늙어서 고약한 성질머리 빼곤 남은 게 없는 작자이지요.”
“이분의 이야기를 메인 주제 중 하나로 소개해도 재밌겠군요. 그래서 그런데, 이분과 단둘이 면담해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단둘이요? 글쎄요, 그 양반이 지껄이는 말은 십중팔구가 욕이라 기분만 상하실 텐데.”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는 반응을 지켜보던 상대가 덧붙였다.
“그건 제가 직접 만나서 판단해 보죠. 물론 수고비는 따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
“조만간 새 약속 날짜와 장소를 알려 드릴 테니, 그때 그분을 그곳으로 모셔 와 주셨으면 합니다만.”
최 이장은 차마 알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봉주가 제 말을 따라 줄 리 없거니와 하임의 일로 이제 완전히 척을 진 거나 다름없었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떠올리는 사이, 상대의 눈은 어느새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 있었다.
“아. 그리고 그 삼동이란 친구 말입니다. 외부에도 따로 교류하는 친인척이 없는 겁니까?”
별안간 삼동이가 언급되자 최 이장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겁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라 가족과 친척이라곤 한 명도 없어요. 근데 갑자기 삼동이는 왜……?”
“그렇다면,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군요.”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손길로 최근 기록까지 확인한 남자가 노트를 덮었다. 차는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던 상대는, 또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금세 자리를 떴다.
“하여간 사업하는 놈들은 원체 싸가지가 없어.”
툴툴거리던 최 이장은 그가 두고 간 돈 봉투를 확인하자마자 불만이 싹 씻겨 내려갔다.
“돈이 차고 넘치는 놈들은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최 이장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단박에 비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를 위해서라면 소를 희생해야 하는 법. 그는 앞날을 위해 자존심을 챙기기보다 봉주와 화해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읍내 마트로 향했다.
* * *
회의실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청명국의 최근 행적을 파 보니 확실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더군. 단순 군사 실험 결과가 예전 같지 않아.”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무기 실험 주기가 유난히 짧아졌어. 그런데 더 의문인 건, 실험 횟수가 늘어났음에도 성공률은 오히려 높아졌다는 거야. 기술 축적이라기보단 외부 유입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자료가 전환되자 청명국 인근에서 포착된 연구 인력의 이동 경로와 함께, I.D.C 산하로 분류된 법인 이름들이 나란히 떠올랐다.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거나 이미 기록에서 사라진 인물들이었다.
“또한 최근에 북한 내부에서 주민 실종 건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더군. 탈북 루트와는 다르고, 개인 브로커의 움직임으로 보기에도 규모가 커. 공급선도 너무 일정하고.”
실종자 명단을 가만히 훑어보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강제 노동 이송 기록도 없이 군 통제 구역 안에서 사라진 거면 우리가 예상한 게 맞을 겁니다. 청명국이 자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제공하고, I.D.C가 무기 기술 일부를 넘기는 구조로 보입니다. 완성품보다는 핵심 모듈이나 데이터 쪽일 가능성이 높고요.”
한 마디로 국가 단위의 인신매매였다. 주민들은 실험용으로 소모되고, 실패 데이터는 현장에서 폐기될 터였다.
“I.D.C 놈들이 거래 대상을 제대로 골랐어.”
종만이 낮게 덧붙였다. 무혁은 그가 그리 말한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북한은 사람이 사라져도 설명이 필요 없는 구조로, 실종을 범죄가 아니라 행정상 누락으로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국가가 직접 나서기엔 부담스러운 일을 대신하는 청명국의 역할은 명확했다. 외부에서 보면 인신매매로 보일 일이 그들 내부에서는 그저 관리 대상이 이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국제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고립과 폐쇄를 이어 온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도 없었다.
“문제는 이 거래가 한 번 성립되면, 멈출 이유도 없다는 거야. 공급도, 수요도 끊길 일이 없거든.”
“이걸 우리 선에서만 끌고 가기엔 판이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대외 안보 조정실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요.”
누군가의 질문에 무혁이 답했다.
“공식 협조 요청을 하면 이건 곧바로 안보 사안으로 묶이겠지. 우리가 지금까지 쥐고 있던 정보도 그 순간부터는 공유 대상이야. 놈들이 순순히 협조해 줄 인간들도 아닌데, 통제권까지 그쪽으로 넘어갈 확률이 높으니 지금은 보류하는 게 나아.”
무혁이 속한 ‘NEXA(국외 특임 조사단)’ 또한 국정원 소속이나 ‘비인가 부서’라는 태생적 약점이 있었다. 필요할 때는 앞에 내세우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선을 긋는 자리. 타 조직과 협동하더라도 성과 또한 공유되지 않는 데다가 책임만 또렷하게 남는 구조였다.
그리고 대외 안보 조정실은 그 점을 누구보다 불편해했다. 그들은 국제 협약, 외교 마찰, 안보 프레임 등 모든 대외 사안을 국정원 중심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 과정에서 보고와 승인, 책임의 흐름이 벗어나는 조직은 애초에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에서 NEXA는 그 기준에서 늘 애매한 존재였다. 공식 조직도 아니면서 국제 파트너와 직접 접촉하고, 필요하면 국경 밖에서 먼저 움직이는 팀.
그래서 항상 충돌이 반복됐다. NEXA가 현장에서 성과를 내면 조정실은 침묵했고, 문제가 될 소지가 보이면 가장 먼저 제동을 걸었다. 그때마다 절차 위반, 외교적 부담, 안보 리스크 같은 말들이 따라붙었다.
인정하지는 않되, 완전히 없앨 수도 없는 조직. 대외 안보 조정실에게 NEXA는 그런 골칫거리였다.
“일단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진무혁만 남고 다들 나가 봐.”
곧 무혁과 단둘이 남게 되자 종만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