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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화


55. “야, 이 새끼야. 너 이제 어떡할 거야.” “뭐가 말입니까.” “대체 어쩌자고 I.D.C 연구원을 납치해. 제거 대상을 가로챘는데 I.D.C가 널 가만둘 것 같아?” “납치가 아니라 보호입니다만.” “그러니까 네가 왜 제정신도 아닌 연구원을 보호하냐는 말이야. 게다가 핵심 생체 조사관 중 한 명이었다며. 나중에 조정실에서 알게 되면 너한테 무슨 혐의를 씌울 줄 알고 그런 짓을 벌여?” “조정실이 무섭다고 해야 할 일도 안 합니까?”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나사 빠진 연구원 데리고 해야 할 일이 뭔데? 그리고 네가 3년 전에 파견 요원 패는 바람에 조정실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거 몰라서 이래?!” 약 3년 전, 동북아 지역 국제 협약 기반 협조 작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외 안보 조정실에서 현지 협약 관리 명목으로 파견 요원을 투입했을 당시, 무혁은 그 배치 자체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해당 작전은 이미 다자(多者)간 협약의 적용을 받는 사안이었고, 현장 판단의 여지가 넓게 설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원은 작전의 흐름보다 고지식한 매뉴얼을 우선시했다.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현장 개입을 제한했고, 그 과정에서 협약 당사국과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엄연히 협약 위반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었다. 상대 요원과의 언쟁으로 작전이 지연되는 사이, 현지 협력선 하나가 노출되는 바람에 작전이 빠그라질 위험에 처한 무혁은 현장에서 제 판단을 밀어붙였다. 요원이 공개적으로 제지에 나서면서 물리적 충돌까지 이어졌더랬다. 결과적으로 작전이 무혁의 판단대로 진행됐고 목표도 확보되었다. 신속한 대처 덕에 외교적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서는 달랐다. 문서에는 ‘현장 마찰’이라는 표현만 남았고, 파견 요원은 ‘통제선 무시’라는 단서를 달았다. 무혁의 성과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징계는 없었다. 다만 그날 이후, 대외 안보 조정실 내부에서 무혁의 이름 앞에는 아니꼬운 수식어가 붙었다. 통제 불가. 위험 요소. 관리 필요 대상 등. 공식 문서에는 그 정도 표현이 전부였지만 문서 밖으로 붙는 거친 표현과 모욕과도 같은 별명은 더 가관이었다. “조정실 새끼들이 벼르든 말든 알 바 아닙니다.” “야, 진무혁.” “그 연구원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실장님이 책임질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무혁은 종만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하임에게 붙여 둔 인물로부터 간략한 보고 문자가 와 있었다. 무혁이 돌연 피식 웃자 종만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추켜 올라갔다. “웃어?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새끼야?!” “귀여워서요.” “뭐?” “약돌 돼지 고추장불고기를 사흘 연속으로 먹는다는데 귀엽잖습니까.” “지금 뭔 개소리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무혁은 저를 미친놈 보듯 하는 종만을 두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는 곧장 하임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납니다. 밥은 맛있게 먹고 있어요?” 깜찍한 극세사 파자마에 똥머리를 하고서 밥을 먹는 모습에 절로 눈이 갔다. 약돌 돼지가 입맛에 맞아도 너무 잘 맞는지 같은 메뉴를 사흘 연속으로 요청하고 있단다. -네. 지금도 먹고 있어요. 고개를 치켜든 하임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도 고추장불고기라며. 3일 연속으로 먹는데 질리지도 않나 보네.” -언니 요리 솜씨가 너무 좋으셔서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요. 무혁은 전날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바람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 참이었다. 고작 하루를 못 봤을 뿐인데도 하임의 말랑말랑한 살결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많이 먹어요. 이따 집에 들어갈 때 맛있는 거 사 갈게.” -맛있는 거 안 먹어도 돼요. 전 무혁 씨가 1분이라도 더 일찍 집에 왔으면 좋겠는데……. 하임 특유의 솔직하고 조심스러운 애교는 요즘 그의 삶의 낙이나 마찬가지였다. 무혁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띠― 띠― 알림음과 함께 새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일찍 갈 테니 기다려요. 나중에 다시 연락하죠.” 바로 통화를 마무리한 무혁이 다음 전화로 넘어갔다. 조금 전과 달리 서늘하고 딱딱한 음성이 낮게 깔렸다. “무슨 일이야.” -캡틴, 여담 마을에 대해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 * * 하임이 새로 고용된 도우미를 맞닥트린 건 며칠 전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배소진이라고 해요.] 무척이나 고운 외모에 세련된 도시 여성 포스를 풍기는 인물은 첫눈에 하임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서구적인 몸매까지 지녀서 그런지 꼭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 이렇게 도시적이고 당당한 커리어 우먼 분위기의 여성을 보니 촌스러운 제 자신이 조금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쿨하고 털털한 성격까지 지닌 소진은 능숙하게 하임과 친밀감을 쌓으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무혁과는 부모님끼리 지인이라 어릴 적부터 간간이 보아 온 사이라고 했다. “오늘은 하임 씨 스킨 케어해 주려고 기기들 갖고 왔어요. 한번 누워 볼래요?” “스킨 케어요?” “요새 홈 케어 기기들이 잘 나와서 이것저것 써 보는 중이거든요. 괜찮은 것만 가져왔으니 하임 씨도 한번 경험해 봐요.” 하임은 난생처음 보는 작은 기계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되게 신기하게 생겼네요.” 신문물을 처음 접해 본 외계인처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자 소진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임으로선 소진과 매일 다양하게 시간을 보내는 덕에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단 생각도 딱히 들지 않았다. 전문가 못지않은 손길을 받던 하임은 소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가 현재 드레스 숍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드레스 디자인도 공부하신 거예요?” “공부뿐만 아니라 대학 인턴 때부터 경력도 꾸준히 쌓아 온 걸요? 귀국하기 전까지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우와, 웨딩드레스라니. 너무 멋져요.” 하임이 이곳에서도 변함없이 꺼내 입은 제 생활한복을 만지작거리며 동경 어린 낯으로 중얼거렸다. 예쁜 옷을 입어 보긴커녕 화장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꾸미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는 그녀였다. “그럼 평소에 드레스도 자주 입으시나요?” “보통 사람들보단 많이 입는 편이죠. 이브닝 파티나 이런저런 행사 때 입는 것 외에 모델로도 활동 중이거든요.” “모델이요?” “드레스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한 게 대학 때 교수님 소개로 웨딩 화보 모델 했을 때부터였어요. 원래 유학하면서 패션을 전공하긴 했는데, 그전까진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없었거든요.” 가만히 누운 채 케어를 받는 동안, 하임은 소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들었다. 하임이 흥미로워하는 걸 느꼈는지 소진이 얼굴 위로 팩을 올려 주며 덧붙였다. “하임 씨도 타고난 몸매가 무척 좋은 거 알아요? 키는 크지 않지만 몸 선도 예쁘고 비율이 좋아서 드레스도 잘 어울릴 거예요.” “저는 드레스 입을 일이 없는걸요.” “그건 모르는 거죠. 특히 이 주근깨가 너무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주근깨가요?” 하임이 그다지 공감이 안 간다는 반응을 보이자 소진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정말이에요. 화보 찍다 보면 일부러 주근깨 그리는 경우도 잦다니까요? 신비롭고 몽환적인 소녀 콘셉트에 너무 잘 어울리겠어요.” 민망한 듯 미소를 짓던 하임은 언젠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혁 옆에 서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집에서 입는 편한 옷도 화보처럼 멋스럽게 소화하는 남자라 턱시도 차림도 무척 근사할 터였다. ‘나중에 정말 우리가 결혼식이라는 걸 하게 될까?’ 무혁과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설 수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을 이룬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조용히 뺨을 붉히던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에 취해 이내 스멀스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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