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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화


05.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유월은 고개를 들었다. 한차례 닦은 창문에 또다시 뿌연 성에가 껴 있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추위가 더 빨리 찾아올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했다. 아직 초겨울인데도 입김이 날 만큼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유월이 손을 들어 창문을 닦았다. 흐려진 창문 너머로 겨울 특유의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정원이 보였다. 첫눈도 금방일지 모르겠다고 유월은 가만히 생각했다. “아유, 날이 많이 춥네.” 상념을 깨뜨린 건 가정부 아주머니의 말소리였다. 앞치마를 맨 그녀가 고단한 얼굴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벌써 눈이 내리려나? 어깨가 다 쑤시네.” “며칠간 바쁘셔서 더 그러신 것 같아요.”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나마 유월이 네가 도와주러 와서 한숨 돌리는 거지, 아니었으면 아줌마는 진작 병원에 실려 갔을 거야.” 그녀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너희 엄마는 별장 쪽으로 가 버렸지, 사모님은 이 겨울에도 파티 하기 바쁘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마당에 갤러리는 왜 연다고 하셔서는.” 여름 이후, 유월의 어머니는 별장 쪽 고용인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천희영은 저택에서 오래 사람 중에서 선별한 것뿐이라며 갑작스러운 이동의 이유를 대었다. 유월은 보양식을 받으러 들렀던 그날 이후로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간간이 이어졌던 통화도 그날로 마지막이었다. “나도 이렇게 정신없는데 도련님은 오죽할까.” 아주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해수가 4학년이 되고 난 이후, 부쩍 회사의 부름이 많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간의 부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2학기에 접어들면서 해수는 거의 매일같이 권성 그룹에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파티와 행사는 늘어났고, 덩달아 사용인들의 일감도 쌓여 갔다. 유월마저 손을 보태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도련님 미술 쪽으로 계속 간다고 하시지 않았어?” 아주머니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유월 또한 해수에게 지나가듯 물어본 적도 있었다. 졸업하면 무얼 할 계획이냐고. 그때마다 해수는 “글쎄. 어떻게 할까.” 하며 이유 모를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희한하네. 사모님께선 분명 도련님께서 미술 쪽으로 계속 갈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만 보면 꼭 회사를 이어받으실 것 같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주머니가 곧 쾌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여튼 돈 있는 사람들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렇지?” 다시 손을 분주히 움직인 아주머니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나도 여기 사람들처럼 돈 좀 많아 봤으면 좋겠네. 에휴, 남자를 잘못 골라도 한참을 잘못 골라 가지곤 말년까지 이 고생이야.” “전에 뵈었을 때 사장님 좋으신 분 같던데요.”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글러 먹었어. 허구한 날 친구들 불러서 놀기만 하는데, 뭘.” 아주머니가 팔꿈치로 유월의 허리를 아프지 않게 쿡 찔렀다. 그러곤 충고하듯 덧붙였다. “유월이 넌 남자 잘 만나야 한다. 알았지? 안 그러면 아줌마처럼 평생 고생해.” 그놈의 정이 뭔지. 아주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며, 그녀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미 어른들에게서 수차례 들은 이야기였다. 지긋지긋해서 정말 끝내고 싶다가도,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게 남편이란 존재라고. 그게 바로 미운 정이 쌓여서 그런 거라고. 어찌 됐든 부부 아니냐고. 미운 정. 부부. 조용히 그 단어를 곱씹던 유월은 문득 생각했다. 알코올 중독과 빚에 허덕이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피해, 권씨 일가로 숨어든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유월은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순순히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집안이 망하고, 운영하던 회사 문을 닫으면서 저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던 아버지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아내와 딸을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아이고, 힘들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냈다. “같이 고생해 줘서 고마워, 유월아. 급한 건 끝났으니까 이것 좀 먹어.” 아주머니가 과일을 담은 접시를 유월에게 내밀었다. 생각에서 벗어난 유월이 과일 접시로 시선을 준 순간이었다. “웁…….” 유월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적으로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부쩍 음식을 앞에 두면 속이 울렁거렸다. 잘 체하는 편이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아……. 별거 아니에요. 어제 잠을 잘 못 잤거든요.” “어머, 정말? 아줌마가 괜히 고생시킨 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유월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아주머니야말로 좀 쉬세요. 전 마저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 유월은 괜찮다는 아주머니를 만류한 채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도 외부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며칠 후 열릴 천희영의 자선 파티 준비 때문이었다. 유월은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행사 물건들을 나르기 위해 정원 뒷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저 문을 나서면 곧장 해수와 저의 사고 장소가 나왔다. 잔뜩 쌓인 눈 위를 적셨던 피. 사람들의 비명. 본능적으로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독 오늘따라 꺼림칙한 기분이 짙어졌다. “…….” 소름 끼치는 감각에 유월이 팔을 한번 쓸어내렸다.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쓰레기장에 봉투를 내려놓은 그녀가 빠르게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순식간이었다. 어깨가 붙잡힌 것은. 동시에 몸이 휙 돌아갔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장갑을 낀 단단한 손이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흐읍……!” 입을 틀어막은 상대방은 능숙히 그녀를 쓰레기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유월이 모든 힘을 짜내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귀에서 “쉬―” 하고 어르는 소리가 났다. 남성의 것이었다. 아니,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였다. 유월이 눈을 떴다. “애비를 이제야 알아보는 거야?” 어두운 쓰레기장 안, 퀭한 눈을 빛내는 사람. 그녀의 아버지였다. “오랜만이지? 엉?” 유월의 눈동자에 놀람이 비치자 아버지가 이죽이죽 웃었다. “신기하긴 할 거야. 네 어미나 너나 버릴 생각만 했지 다시 만나리라곤 꿈에도 몰랐겠지.” “으읍……!” “쉿. 쉬잇. 조용히 해야지.” 유월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그가 움켜쥔 그녀의 뒷덜미에 힘을 주었다. 두피가 뜯길 것처럼 아팠다. 유월이 힘겹게 숨만 몰아쉬자, 아버지가 “조용히 할 거지?” 하고 되물었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반항할 수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아버지가 자비라도 베풀 듯 살짝 손에 힘을 풀었다. 틀어막던 손이 떨어지자 허파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그녀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딸을 뒤로한 채 아버지가 손을 가볍게 탈탈 털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힘 빼지 말자고. 감동적인 재회잖아.”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어떻게, 왜.” 말을 잇던 유월의 시야에 아버지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눈은 퀭했고, 피부는 거칠었으나 복장만큼은 멀끔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이 집의 사용인 복장 차림으로 정원에 들어와 유월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그녀가 나오기를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유월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고, 쓰레기봉투에서 절그럭 유리 소리가 났다. 깨진 유리가 봉투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종아리 쪽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상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한 폭력의 기억이 다시금 재생되었다. 고통을 예감한 유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숨통이 조여들고 호흡이 얕아졌다. 손이 떨렸고,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숨어들고만 싶었다. 해수가 다시 찾아줄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제 어깨를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내 딸, 이 미친 소굴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이렇게 예쁘게 컸는데 말이야, 엉?” 얼핏 다정한 말투였다. 그러나 맹렬히 타오르는 시선은 분명한 증오를 담고 있었다. 호흡이 진정되지 않아 대답 같은 건 할 수 없었던 유월은 두려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어. 네가 권성 그룹의 웬 미친놈한테 잘못 걸렸다면서.”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할 수 없었다. 권성 그룹의 미친놈이라니. 몸이 불편한 사람은 있어도 미친놈은 없었다. 그러나 짠한 얼굴로 제 어깨를 토닥이는 아버지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멍해 있는 유월이 안쓰럽다는 듯 작은 탄식까지 토해 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그러니까 바보처럼 이 집 일이나 도와주고 있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무슨 말을.” 더듬는 그녀를 향해 아버지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서류봉투였다. 이게 무엇이냐는 듯 쳐다보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듯 아버지가 고개를 까딱였다. 봉투를 열자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몇 페이지 되지 않은 서류였다. 첫 페이지 상단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한국병원. 다리 상태를 보기 위해 해수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이었다. “……이걸 왜 제게 보여 주시는 거예요?” “계속 넘겨 봐. 그 뒤쪽까지.” 유월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서류엔 해수의 진료 기록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이어지던 날짜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이상했다. 며칠 전, 해수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는데. 왜 이 기록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걸까. 마치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는, 그러니까 완치된 사람의 기록처럼. 혼란으로 흔들리던 유월의 눈동자가 서류 안쪽에 닿았다. 무언가가 더 있었다. 서류보다 작은 직사각형 종이 여러 장. 그건 누군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그녀가 홀린 듯 그것을 꺼내 들었다. 세차게 떨리는 눈동자가 사진에 찍힌 인영을 담았다. 이내 그녀의 모든 숨이 멈췄다. 사진 속 인물은 전부 해수였다. 그는 걷고 있었다. 지팡이를 들지 않은 채, 두 다리로 자유롭게. 그녀의 시선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어떻게, 왜 찾아오신지 모르겠지만.” 입안에 맴도는 말을 겨우 토해 낸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해수 다리는 완전히 망가졌어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고요.” “네 앞에서만 그런 거겠지.” “……뭐라고요?” 아버지가 한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봐라. 사람 목 따는 건 아무것도 아닌 권성이 왜 너를 가만두었을 것 같니?” “……그건.” “보상도 받지 않는 데다, 먹여 주고 재워 준다고? 사람 새끼를 아주 병신으로 만들었는데?”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네 입으로 말해 봐라. 그 잘난 도련님이 진료받는 상황을 네 눈으로 직접 봤어?” “…….” 말문이 막혔다. 그를 따라 병원을 간 적은 있어도, 병실 안까지 들어가 적은 없었다. 함께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해수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 말에 그냥 물러났고, 차마 다시 요청하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일부러 못 들어오게 한 거라면……. “……아니야.” 유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되뇌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유월은 해수의 삶을 망쳤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해수였다. 그런 해수가, 이미 다 나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까지 저를 곁에 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에요. 해수는 어릴 때부터 많이 아파서, 치료받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했어요. 약도 지금까지 먹고 있는걸요. 사고로 다리는 다쳤지만 입을 열게 해 줘서 고맙다고, 사, 사모님께서…….” “그 새끼가 정말 벙어리였을 것 같아?” 힘겹게 움직이던 유월의 입이 멈췄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유월이 망연히 쳐다보자 아버지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 옷을 판 사람이 알려 주더군. 지 어미의 사고를 목격한 이후부터 말을 못 하게 되었다고 알려졌다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 “위로하는 조문객들에게 걔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뭔지 알아?” 아버지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귀찮아.” “…….” “‘귀찮아’였다더라. 지 생일날, 죽어 버린 어미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내뱉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고.” 넌 그런 애가 정말 정상이라고 생각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렸다는 증오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의 말에 쉽게 동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미 밀려든 단서를 조각조각 맞추고 있었다. 아버지의 학대로 잔뜩 움츠려 있던 저를, 반갑다는 듯 맞아 준 천희영. 유월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짠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저택 사람들. 해수가 걷지 못한다는 선고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던 권씨 일가 사람들. 그리고……. 목 꺾인 새 인형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저를 응시하던 권해수. 충격으로 기절할 때까지 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 무기질적인 눈동자.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 유월의 호흡이 힘겹게 떨리기 시작했다. “넌 속은 거야. 그 미친놈한테. 아니, 이 권씨 사람들에게 속은 거야. 전부 널 속였다고!” “그럴 리 없어요. 아니에요!” 그녀가 강하게 부정하며 아버지의 어깨를 밀쳤다. 그러나 눈동자에 어려 있던 믿음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 유월의 반항에 인상을 구겼던 아버지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폈다. “혼란스러울 수 있어. 너도 너 나름대로 이 집안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을 텐데, 배신감을 느낄 만도 하지.” “…….” “하지만 전부 사실이야. 10년 만에 다시 만난 딸에게 아빠가 거짓말 같은 걸 하겠어. 응?” 그가 짐짓 다정한 말투를 꾸며 내며 유월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월이 피하려 하자 몸이 흠칫 떨릴 만큼 강한 악력으로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너랑 네 어미……. 아니, 네 엄마가 그렇게 떠났을 때, 화도 많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두 사람에게 내가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한 거겠지. 지금은 이해한다.” “…….” “그럼 이렇게 하자. 너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그 자식이 다리를 저는지, 아닌지.” 흔들리던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아버지가 인지한 미소로 웃었다. “아빠 말이 사실이라는 걸 직접 확인해 보는 거다.” “…….” “자, 이건 아빠 핸드폰이야. 거기 번호 있거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아빠가 바로 달려갈 테니까. 어?” 중요한 증거라도 되는 양 아버지가 유월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과 진료 기록지를 빼앗듯 낚아챘다. 그녀의 손에 억지로 핸드폰을 쥐여 준 그는 주위를 힐끔거리며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러곤 간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빠르게 쓰레기장을 벗어났다. 저를 가로막고 있던 인영이 사라지자 다시금 한기가 훅 끼쳐 왔다. 시야가 트였지만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를 만큼. ***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유월은 아주머니가 건네준 짐을 관성적으로 정리했다. 그 이후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노을이 점점 어둠으로 변하고, 종국엔 희미한 가로등 불빛으로 변할 때까지. 정신을 차린 건 핸드폰 진동이 울렸을 때였다. 스팸 메시지를 지우고 창을 내리자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천천히 또렷해지더니, 이내 유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머니와 함께 도망치던 그날,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아버지와 오랜 시간 제 곁을 지켜 준 해수. 둘 중에 누굴 믿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유월이 집을 나선 건 그 때문이었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말이 거짓임을, 직접 해수를 보고 확인해야겠다. 그러면 저를 괴롭히는 모든 상념도 함께 사라지리라. 마중 나온 저를 보며 해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밖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처음이니까 아마 조금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볼 것이다. 날도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느냐고. 그럼 저는 평소처럼 그를 부축하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할 것이다. 10년 만에 찾아온 아버지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서 조금 무서웠노라고. 그럼 그는 너른 품으로 저를 안아 줄 것이다. 무서울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늘 보여 주었던 그 다정한 미소와 함께.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초조한 마음이 앞선 나머지 엘리베이터가 미처 열리기도 전에 유월의 몸이 튀어 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에 어깨를 부딪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길거리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슬리퍼가 그 서늘함을 지르밟았다. 해수의 차에서 늘 내리는 장소가 근처에 있었다. 다급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던 하얀 입김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차된 차. 권씨 일가의 차였다. 때마침 도착한 듯, 헤드라이트도 끄지 않은 차량 옆에서 조 비서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전해 주신 말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도 사모님 기분 백번 이해하지요. 그럼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조 비서의 시선이 문득 이쪽을 향했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고, 해수를 믿는다는 마음과 배반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벽에 기댄 몸은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네. 그럼요. 예.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예!” 얼마간 상대방에게 굽신거리던 조 비서가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 참, 지금도 이 난리인데 후계 발표 후엔 얼마나 더 하려고 이러시는지.”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가 이내 분주히 움직여 뒷좌석 문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그 말에 유월의 눈동자가 천천히 밖을 응시했다. 꾸벅 고개 숙인 조 비서 앞으로 단정한 구두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이어 매끈한 바지 밑단이 보였다. 지면에 내디딘 구두와 그 위로 보이는 바지 밑단은 한 쌍이었다. 어긋남 없이 나란한 한 쌍. 해수가 차에서 내렸다. 두 다리로 멀쩡히. ……아니야. 유월은 부정했다. 꾸준한 재활 치료 덕분에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쯤은 타인의 도움 없이도 해낼 수 있었다. “통화가 길어지던데.” “아, 그게 별일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사모님?” 조 비서는 곤란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알 만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인 해수가 피식 웃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조 비서가 능숙하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담배였다. 해수가 담배를 물자 조 비서가 곧장 라이터를 켰다. 치익. 찰나의 불꽃이 해수의 얼굴을 헤매다 곧장 명멸했다. 깊게 들이쉬고, 연기를 내쉬는 모습은 오래 행한 행위처럼 익숙해 보였다. 후우. 매캐한 연기가 선이 고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길래.” “사모님 앞으로 되어 있던 주식들과 후원 단체가 전부 도련님 앞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셨습니다. 관심도 없으셨던 것을 확인하실 정도니,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채신 모양입니다.” “뭐……. 그렇겠네요.” 긴장한 조 비서의 말에도 해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체에 나른히 몸을 기댄 채, 허공에 시선을 던지는 해수의 눈빛에 오랜 권태감이 어렸다. 내뱉는 연기가 밤하늘로 퍼졌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그냥 두세요. 그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사모님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요.” “가만있지는 않겠죠. 그래 봤자…… 내가 준 작품들이나 끌어안고 파티라도 열려나?” 연기를 길게 내뱉은 해수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유월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해수가 준 작품이라니. 설마…… 그녀의 작품이 전부 해수 거라는 말인가? 그 순간 지난 상황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해수에게 쏟아지던 찬사와 천희영의 슬럼프. 저택 사람들이 벌벌 떨 정도로 커졌던 히스테리는 어느 날 갑자기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해수가 미대로 진학하겠다고 결정한 그날부터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해수와 다른 대학을 지원하라는 권유 또한 사라졌다. 해수와 유월은 같은 대학에 진학했고, 따로 나와 집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장애물은 없었다. 차곡차곡 맞추어지는 조각의 마지막은, 매스컴의 찬사에도 눈 내리는 정원을 지켜보던 천희영의 고요한 얼굴이었다. 절망과 자괴감, 그것보다 더 큰 안도가 어려 있던 그 눈빛이……. “생각해 봐라. 사람 목 따는 건 아무것도 아닌 권성이 왜 너를 가만두었을 것 같니?” “넌 속은 거야. 그 미친놈한테. 아니, 이 권씨 사람들에게 속은 거야. 전부 널 속였다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기억들을 훑으며 모든 사고를 앗아 간다. 아니야. 해수가 그럴 리 없어. 그렇게까지…… 잔인할 리 없었다.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며 중얼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후계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모님께서 먼저 선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방금도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 안 둘 거라며 으름장을 놓으셨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그렇게나 이 집안에 소속되고 싶어 했는데, 처음부터 본인만 몰랐으니.” 입매를 비틀며 웃은 해수가 다시금 연기를 깊게 내뿜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소였다. 돌아가자. 여기 있어 봤자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머리는 그렇게 명령하고 있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죽인 호흡만 겨우 내쉴 뿐이었다. 마지막 심지까지 태운 해수가 연기와 함께 툭 내뱉었다. “조 비서는 하던 대로 해 주세요. 무슨 일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조 비서가 다시 조수석을 열었다. 그에게 없어선 안 될 지팡이였다. 그러나 해수에게 건네지 않았다. 손에 쥔 채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해수가 능숙히 그를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다리를 다치지 않은 사람처럼. 유월은 눈을 꽉 감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권해수는 두 다리로 편히 걷지 못한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저건 누구일까. 지팡이 없이, 두 다리로 걷는 저 남자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려고 한 것도 같았다. 돌아가. 저 이야기를 들어선 안 돼. 이건 모두 착각이야. 그러니까. “저, 그런데.” 그를 뒤따라가는 조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유월 양이 알게 되면 어떡하실 겁니까? 많이 놀라실 것 같은데요.” “놀라다니. 후계 발표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조 비서의 난감한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일정한 보폭으로 걷는 해수의 왼 다리 쪽으로. “크게 충격받으실 겁니다. 평생을 바쳐 도련님을 보살폈던 분이지 않습니까.” “아아.” 해수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유월의 떨리는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글쎄…….” 해수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말끝을 늘였다. 그러다 픽, 작은 웃음을 흘렸다. “달라지는 건 없죠.” 뭐 그런 사소한 질문을 던지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다리병신 되기 전부터 정유월은 제 거였으니까.” 그 순간, 해수가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유월과 눈을 마주친 해수가 빙긋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월아? *** 삑. 도어 록이 소리를 내며 잠겼다. 인기척을 인식한 현관등이 켜졌으나, 얼마 안 가 꺼졌다. 유월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탓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도망치듯 유월은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도망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학교, 권씨 저택 그리고 이 집뿐이었으니까. 돌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그래. 그녀는 단 한 번도 해수의 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처음엔 죄책감이라 이름 붙였으나, 점차 애정으로 번졌다.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아직 미숙하지만 분명 그와 비슷한 감정은 되었다. 그러니 해수가 그럴 리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던 해수의 말만은 진심이었다. 함께 나눴던 체온이, 감정이, 그 다정한 눈맞춤이 전부 거짓일 리 없었다. 그럼, 그렇다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거지? 다리가 나았는데도 왜 나를 계속 붙잡아 둔 거야? “욱…….” 문득 치민 토기에 유월은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역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떨자 현관등이 켜졌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간간이 들렸던 소음과 눈앞의 형상이 천천히 멀어졌다. 인기척을 인식하지 못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유월이 눈을 떴다. 몸을 돌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해수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던 조 비서가 현관에 서 있는 유월을 보고 놀란 듯 멈칫했다. “유월 양?” “아…….” “왜 현관에. 아, 방금 들어왔나요? 잘하면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혼자 상황을 유추한 조 비서가 작게 웃었다. 그녀가 이미 무엇을 봤는지도 모르고. “……네.” 유월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혼란스러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제가 본 것을 숨겨야만 했다. “본가 일로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오늘도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해수의 지팡이를 그녀에게 건넨 순간, 그녀의 몸은 저도 모르게 굳고 말았다. “……죄송해요. 잠시간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차린 유월이 지팡이를 건네받았다. 묵직한 지팡이를 쥔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그녀는 사탕을 숨긴 어린아이처럼 지팡이를 제 허리춤 뒤편에 숨겼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수와 유월에게 인사를 마친 조 비서가 집을 나섰다. 삑. 도어 록의 경쾌한 잠금 소리를 마지막으로, 집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돼. 지팡이를 쥔 채, 아래만 내려다보던 유월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잘 다녀왔어? 힘든 일은, 없었고?” 불안한 듯 떨리긴 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늘 똑같았지.” 힘겹게 내뱉은 제 말과 달리 해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나른하면서도 단정한 목소리. “재미없고…… 지루했어.” “귀찮아.” “‘귀찮아’였다더라. 지 생일날, 죽어 버린 어미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내뱉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고.” 해수의 목소리 위로 아버지의 말이 겹쳐졌다. 아니야. 생각하지 마. 해수가 그럴 리 없어. 모든 게 거짓말이야.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유월아.” 해수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깜빡. 꺼졌던 불이 다시 켜졌다. “그러는 너는?”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눈이 마주친 이후, 유월에게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시선이 그녀를 응시한다. “너는 다른 일 없었어?”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무감정한 눈동자로, 그가 묻고 있었다. “…….” 왜일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묻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저를 지그시 쳐다보는 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 같기도 했고, 묘하게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함정과 먹이를 함께 두고선, 사냥감이 과연 어디로 향할지를 지켜보는 사냥꾼처럼. “난…….” 유월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해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저 도망가는 대상을 관찰하듯 상체를 일으켜 세울 뿐이었다. “난, 나는.” 그러자 깜빡. 점멸했던 현관등이 다시금 두 사람을 비췄다. 유월이 홀린 듯 시선을 들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현관등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두 개로 나뉜다. 이윽고 저를 향해 돌진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으로 바뀐다. 이내 그녀를 집어삼킨다. 빠아앙― “유월아.” 이어진 낮은 부름에 유월이 흠칫 몸을 떨었다. “숨.” “……!” 그가 천천히 그녀의 목뒤를 쓸어내렸다. 유월은 제 숨이 멈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숨 쉬어야지, 유월아.” 그가 재차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먼저가 아님을 알면서도 유월의 몸은 착실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녀의 호흡이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천천히 들이쉬고…….” “흐윽……. 허억…….” “내뱉고. 응, 잘하고 있어.” 그가 느릿한 웃음과 함께 칭찬하듯 목뒤를 쓸었다. 분명 토닥이듯 주무르는 손길인데, 목덜미를 잡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은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미칠 듯이 뛰는 심장에 비해 모순된 고요였다. 유월의 숨이 진정되자, 해수가 그녀를 감싸안았다. “어두워서 잠깐 놀랐나 보다.” 가만가만 등을 쓸어내리고,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악몽에서 깬 그녀를 진정시킬 때마다 그가 해 주었던 손길은, 방금 전 그녀가 무엇을 보았고, 들었는지를 잊을 만큼 다정했다. 유월의 손이 해수의 허리를 감싸안으려 할 때였다. “그럼 이제 말해 볼래?”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말해 봐, 천천히.” 고요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 갇혀 홀로 힘겹게 숨을 내쉬는 유월을 무감히 응시했다. “나한테 할 말 있어?” 할 말. 유월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있지, 해수야. 나 1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어. 아버지가 그러더라. 네가 이상하대. 네 다리는 한참 전에 다 나았고,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었대. 나만 몰랐던 거래. 그럴 리 없잖아. 그렇지? 네가 왜…….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했겠어…….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초식 동물처럼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 순간, 머릿속 누군가가 물었다. 사실이면? 만약 사실이라면 넌 뭘 할 수 있는데? 해수 곁을 떠나기라도 할 거야? 정말, 그럴 수 있겠어? 빠아앙― 사라진 경적 소리가 다시금 커진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쿵. 쿵. 환청과도 같은 소리가 그녀를 찍어 내리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입술을 달싹인다. “……아니.” 그녀가 세차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 “아무 일도 없었어, 해수야…….” 확신을 주듯, 혹은 맹세하듯 그녀가 힘줘 말했다. 대상을 확인하지 못해 꺼졌던 현관등이 다시 들어오고, 온전히 그의 얼굴을 비췄다. 표정이 없던 그의 얼굴에 아주 천천히 감정이 어렸다. 인내심 있게 이어 온 오랜 내기의 결과를 확인한 자의 깊은 만족감이었다. “그래, 그러면 됐어.” 해수가 작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그래도 유월아.” 느릿하게 그녀의 체향을 들이쉬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너무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엔 신발 신고 나와.” “…….”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유월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슬리퍼. 벗을 생각조차, 아니 무엇을 신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응, 알았어.” 그러나 유월이 내뱉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해수가 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겨울바람을 닮은 해수의 체향이 몸을 옭아맸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시야가 또다시 빛으로 가득 찼으나, 환청과 환각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그거면 된 거야. 그거면……. 유월은 눈을 감았다. ***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유월이 창문을 닫자, 오늘 첫눈을 예고하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유월은 창문 너머의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인 듯, 벌써 창문에 뿌옇게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유월아.” 기상 캐스터의 음성이 뚝 끊김과 동시에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늘 눈 온대.” 해수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괸 채 말했다. “날씨가 추워진다 싶더니, 기어이 오려나 봐.” 배를 감싼 손 너머로 무언가 느껴졌다. 해수의 지팡이였다. 그는 여전히 지팡이를 썼고, 유월은 그런 해수를 부축했다. 먹을 필요도 없는 약을 삼킨 후엔 사탕 대신 유월의 가슴과 음부를 빨았다. 그녀가 기진맥진해질 때쯤이면 한참 전부터 크기를 세운 자지를 밀어 넣었다. 유월은 저항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처럼. “눈 와서 유월이가 졸업 전시 못 오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해수가 어리광 부리듯 유월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하얀 목덜미엔 그가 지난밤 새겼던 잇자국이 가득했다. 그날 이후,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이 좋다고 말한 적은 없었으나, 종종 흘리는 콧노래와 다정한 눈빛을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유월이 배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야지. 다른 날도 아니고 네 졸업 전시인데.” 그러자 해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로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지나칠 만큼 다정하게 느껴졌다. “언제쯤 올 거야? 출발하는 시간 맞춰서 기사들 대기시켜 놓을게.” 그러나 그날 이후, 유월은 제 발로 밖을 걷지 못했다. 그녀가 내려오면 기다렸다는 듯 운전수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 시간 맞춰서 대기시킨다는 말은 거짓일 터였다. 그들은 한시도 유월의 주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몰릴 수도 있으니까 저녁쯤 맞춰서 갈게. 너 편하도록.” 그러나 유월은 그 사실을 되짚지 않았다. 괜찮았으니까. 무엇이든. “그때 맞춰서 같이 저녁도 먹을까?” “응, 그러자.” 유월의 수긍에 해수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유월을 지금까지 살게 했던 미소였다. 그녀가 사랑했던 미소. 순순한 긍정이 기꺼운 듯, 해수가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쪽쪽, 애정이 느껴지는 키스가 점점 그녀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맥박이 뛰는 곳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듯, 목선을 누르던 입술이 곧 그녀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이어 방향을 바꿔 그녀의 입술로 다가왔다. “혀, 내밀어 봐.” 그의 낮은 명령에 따르듯 혀를 내밀었다. 살짝살짝 서로의 혀를 스치다, 곧 끈적하게 옭아맨다. 자신의 타액을 퍼 올리고 제 것으로 취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유월의 손이 튀어 오르려 하자, 해수가 손을 비틀어 강하게 깍지를 꼈다. “으응…….” “후…….” 그가 고개를 비틀자 침입이 깊어졌다.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등에 차가운 유리가 닿았다.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는 먹잇감을 궁지로 몰아넣은 맹수처럼 신음마저 앗아 갔다. 사탕이라도 먹듯 점막을 비비고 핥던 움직임이 떨어진 건 잠시 후였다. 할딱이며 숨을 몰아쉬는 유월의 이마에 해수가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이제 알아서 혀 잘 내미네.” “아, 하아…….” “입도 작아. 귀엽게.” 뒤에 선 채로 몸을 돌리느라, 머리카락에 타액이 묻어 엉망이었다. 그러나 해수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연신 키스를 남겼다. 꼭 짝에게 체취를 남기는 맹수처럼. “이, 일찍 가 봐야 한다면서.” “응, 그렇지.” 말로만 긍정할 뿐, 떨어질 기세가 아니었다. 그는 자꾸만 유월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집요하면서도 끈질긴 손길로. 그런 그를 떨어뜨린 건 작은 진동 소리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확인한 해수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메신저가 떠오른 것을 보니 전시에 관한 내용인 듯했다. “어, 얼른 가. 다른 사람들 기다리겠다.” 유월이 그의 어깨를 재차 밀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에 정욕이 뚝뚝 묻어나긴 했으나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유월은 해수를 부축해 현관까지 나섰다. 평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현관까지 그를 배웅하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것. 그건 균열을 인식하지 못했던 지난날과 얼추 비슷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봤던 것이 사실은, 전부 악몽 아니었을까. 이게 현실이고, 그때가 전부 허상인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예전과 비슷한 미소를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었다. “잘 다녀와. 이따가 다시 연락…….” “유월아.” “응?” 그때, 해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유월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자 그가 아래로 한 번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거.” 시선이 닿은 곳은 유월이 쥐고 있는 해수의 지팡이였다. “이걸 줘야 가지, 내가.” 그 순간 유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깜빡했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입에선 “아, 아.” 하는 당황스러운 신음만 나올 뿐이었다. 마치 이 연극의 치명적인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팡이만 꽉 쥐고 있던 유월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허겁지겁 지팡이를 해수에게 건넸다. “미,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 대사 실수를 만회하는 배우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유월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음엔 더 자연스럽게 굴겠노라고? 하지만……. 흔들리는 시야 속으로 그의 다리가 들어온다. 한 번도 다쳐 본 적 없는 것처럼 거리를 거닐던 다리가. “유월아.” 부르는 음성에 유월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해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잘하고 있어.” 다정한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제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지금처럼만 하면 돼.” 그러나 어두운 눈동자 속엔 오랜 집념과 집착이 깊게 얽혀 있었다. 순간 유월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지금처럼’이 뭔데? 내가 너를 부축하는 거? 아니면…… 네가 연기를 하고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너를 받아 주는 거? 그러고 나면 강박증 환자처럼 허겁지겁 너와 몸을 섞는 거? 잊으려고 노력했던 말들이 입안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러나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처럼만 지내면 모든 게 평화롭다. 그도, 그녀 자신도. 이게 맞아. 이게 옳은 거야……. 유월이 침묵하자, 해수가 반대편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가져갔다. 땀이 밸 만큼 강하게 쥐고 있던 지팡이가 너무도 쉽게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한 번 두드린 그가 그녀를 보며 다정히 웃었다.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그녀의 왼손 약지에 입 맞췄다. “오늘은 잊지 말고 튼튼한 신발 챙겨 신어. 알았지?” 이따 보자. 엄지로 약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마지막으로 그가 집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어스름한 저녁, 유월은 밖을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에 유월은 저항하지 않고 차에 탔다. “저, 기사님.” 조용한 차 안에 유월의 목소리가 울리자 백미러를 통해 기사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수의 두 다리가 멀쩡한 걸 목격한 그날 이후, 조 비서를 포함해 그녀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들은 유월에게 가벼운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마치 조금의 애정이라도 나눠선 안 된다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죄송하지만 꽃집에 잠깐 들러도 될까요? 그래도 졸업 전시회니까…… 꽃이라도 사고 싶어서요.” “…….” 기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꽃다발을 살 때도 허락이 필요한 걸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걱정과 달리 허락이 떨어졌다. 머지않아 차가 멈추고, 기사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유월은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꽃집 사장이 그녀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아, 예약은 안 했는데…….” “어머, 그러세요? 저희는 전부 예약제거든요. 전화만 주셔도 되는데.” “……제가 핸드폰이 고장 나서요.” 거짓말이었다. 진실을 목격하고도 그녀가 못 본 척 눈을 감아 버린 그날 이후, 유월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러나 이어지나 싶던 연결음은 얼마 안 가 뚝 끊겨 버렸다. 몇 번을 걸어도 똑같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유월이 집 전화를 막 들어 올렸을 때였다. 한 줄기의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해수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제일 가까이에 있던 어머니는? 어머니는 몰랐을까? 어머니가 별장으로 가게 된 게 언제부터였지? “……도련님께서 미술을 그만두겠다고 했다던데.” “다시 마음을 바꿨다고? 어떻게?” 그날, 그 대화 이후 어머니는 유월을 찾아왔다. 그러나 해수와의 정사 중이라 그가 ‘해수는 잠들었다’는 거짓말로 어머니를 돌려보내는데도 잠자코 있었다. 차마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만남은 무마되었고, 갑작스러운 근무처 이동으로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친밀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것조차 다른 이유가 있었더라면? 유월은 그대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눈을 감는 게 더 편하니까. 그래도 더는 해수가 제게 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해 드릴게요! 마침 한가하던 참이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뭘요. 이렇게 예쁜 손님이 오셨는데 빈손으로 보낼 순 없죠.” 꽃집 사장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잠깐 앉아 있으라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유월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잠시간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축축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흩뿌릴 것만 같았다. “자, 다 끝났어요.” 몇 분 후, 사장이 유월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풍성한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유월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꽃이 필요한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 친구한테 드릴 거죠?” 그녀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누구한테 주려고 그러냐 물어보면, 하나같이 그러더라고요. 남자 친구 생각나서 들어왔다. 여자 친구 줄 거다.” “아…….” “사랑하는 사람한테 선물할 땐 장미만큼 좋은 건 없어요. 이걸로 가져가세요. 싸게 해 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유월은 값을 치르고 차에 올랐다. 학교로 가는 동안 유월은 가만히 품속의 장미를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차는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동행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회장은 이 앞이니, 곧장 들어가면 됩니다.” 기사의 말에 유월은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내가 그래서…….” 때마침 차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음에도 여러 사람이 전시회장을 드나들고 있었다. “유월 양?” “……아, 죄, 죄송해요.” 유월은 고개를 저으며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유월은 닫힌 차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차 없이 다니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수의 공간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던 것이 이유였을까? 아니야. 학교는 늘 왔던 곳이잖아. 오랜만에 와서 그래. 괜찮을 거야. 유월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해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이 불안함도 사라질 것이다. 쿵. 쿵.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찍어 내리는 소리. 그것이 점점 커져, 주변 소리를 잡아먹었다. 서둘러. 어서, 빨리……. “저기요.” “……!” 그때, 누군가 유월의 팔을 붙잡았다. 부지불식간에 귀가 트이면서 주변 소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어느덧 도착한 전시회장 안, 여성 두 명이 유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월이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자 상대방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해요. 꽃다발 들고 계시길래, 혹시 제2전시관이 어딘지 아실까 싶어서.” “흐, 흐윽.” “저기……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유월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발목과 손목 그리고 목덜미까지 무언가로 결박당한 기분이었다. “저기요? 괜찮으신…….” “소, 손대지 마세요!” 유월이 버럭 내지르자 상대방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선이 몰리자, 그들이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걱정되어서 그런 건데 죄송해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 “야, 그냥 가자.” 친구로 보이는 일행이 그녀를 제지했다. 일행이 꺼림칙한 눈으로 유월을 훑어보았다. 그러곤 툭 내뱉었다.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같아.” 정상이 아니야. 작은 속삭임과 함께 그들은 멀어졌다. 저를 잡던 손길, 시선도 전부 멀어졌으나 유월은 움직일 수 없었다. 뇌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내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머리로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돌진하던 트럭. 불구가 된 해수. 모든 건 자신의 잘못이었고, 유월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수를 지켜 주겠노라 결심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해수의 다리는 다 나았다.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고를 잊을 정도는 되었다. 그럼……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망가진 거지? 난, 언제부터……. 세차게 떨리던 시야로 문득 품속 장미꽃이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꽃다발이라고 했다. 그 말에 유월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끌어안는 손길,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입술, 뜨겁게 살을 섞는 것은 얼추 사랑을 흉내 낼 만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이게 과연 사랑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이게 사랑일 리 없다. “글쎄……. 달라지는 건 없죠.” 날 이렇게 만든 건.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다리병신 되기 전부터 정유월은 제 거였으니까.” 나의 죄악. 나의 도련님. 회상 속 해수가 저를 향해 웃는다. 그 웃음을 유지한 채 어린 시절의 권해수로 돌아간다. 도련님이 천천히 웃음을 잃는다. 살아 있는 인형이 된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날 선 가위가 새 인형의 목을 자른다. 서걱. “흐읍……!” 유월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귀를 막은 것 같기도 했다. 툭, 꽃다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곧 천천히 멀어진다. 쿵. 익숙한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가득 메우고, 바닥이 춤을 추듯 출렁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려 주듯이. 쿵. 쿵. 쿵. 낙인찍는 소리가 거세진다. 그러나 유월은 발걸음을 돌렸다. 권해수가 없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도망쳤다. 유월은 곧장 후문으로 달려 나갔다. 정문엔 기사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도망치면 곧장 들킬 터였다. 그리고 해수 앞으로 끌려가겠지. 허겁지겁 밖을 나서는데, 때마침 하차하는 택시가 보였다. 문이 닫히기 전, 붙잡아 올라탔다. 택시 기사가 놀란 얼굴로 유월을 바라봤다. “어유, 깜짝이야. 급하신 손님인가 보네.” 유월은 대답 대신 몸을 낮췄다. 혹시라도 저를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 다행히 미심쩍은 눈으로 택시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로 가요, 아가씨?”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뿐이었다. 일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기사에게 집 주소를 읊었다. 연신 바깥을 살피는 유월이 의아한 듯했지만, 기사는 별다른 말 없이 출발시켰다. 학교가 멀어지고 나서야 유월은 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택시가 멈췄다.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려던 유월이 멈칫했다. 이 카드는 해수의 것이었다. 내역을 본다면 제가 어디서 내렸는지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그제야 유월은 제 물건들 중 자신의 명의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드도, 옷도, 핸드폰도, 전부 해수가 사 준 것이었다. 곁에서 보살펴 주는 데 보답하고 싶다며 이 정도는 자신이 부담하게 해 달라는 해수의 말에, 유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해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해했다. 그게 전부 그녀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모르고. “아가씨?” “……네, 여기요.” 유월은 카드 대신 현금을 내밀었다. 꽃집이 카드 대신 현금을 원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덕분에 기사에게 빌렸던 현금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게 산 그 꽃은 제게도, 해수에게도 가지 못했지만. 차에서 내린 유월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얼마 안 되는 돈과 짐을 챙겼다. 이제 이걸 챙겨서 나가면……. 쫓기듯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녀가 가 본 곳이라고는 권씨 저택, 이 집, 학교가 전부였다. 그 외 장소는 전부 해수와 동행했다. 아니, 가 보지 않은 곳이라도 그는 찾아낼 터였다. 정유월의 세상은, 전부 권해수의 새장 속이었다. 어머니에게도 갈 수 없다. 그럼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혼란한 머릿속에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어쩌면 해수가 모르는 유일한 것. 유월은 다급히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놓인 서랍, 제일 아래를 열었다. 깊은 곳에 손을 넣었다. 직사각형의 차가운 물체. 있다. 아직 있어. 유월은 더듬거리며 전원을 켰다. 환한 빛이 유월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빛마저 누군가에게 들킬까 싶어 유월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궁지에 몰렸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피식자차럼. 결국 최악일지도 모르는 차악을 택했다. 서늘한 한기에 유월은 몸을 움츠렸다. 간간이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쓰며 숨을 죽였다. 힘겨운 신음이 입김이 되어 어두운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갈 때였다. 트럭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세상에, 우리 딸!” 그녀의 아버지가 유월을 와락 끌어안았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는 유월의 연락이 무척이나 기쁜 듯 보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네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빨리. 빨리 가 주세요.” 유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해수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어서 가자 우리 딸. 많이 무서웠지?” 유월은 아버지의 트럭에 올라탔다. 차가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운전 내내 아버지는 역시 제 말이 사실이지 않았느냐며 떵떵거렸다. 대답 대신 자켓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월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밤거리를 물들인 네온사인들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어이 하늘이 첫눈을 내려 보낸 것이다. 순간 여러 기억이 스쳤다. 하얀 눈을 물들이던 피.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권해수. 평생 제 곁에 있어 줄 거냐며,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해맑게 웃던 권해수. 여러 장면이 머리를 어지럽혀 속이 울렁거렸다.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이 통증이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래서 유월은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 봤자 달라지지 않을 현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것뿐이기에. *** 전시회를 찾은 마지막 손님이 빠져나갔다. 행사를 마칠 시간이었으나, 직원은 문을 잠그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서요.” 직원의 말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대기실 안, 해수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은 무릎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밟혀 엉망이 된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사내들이 도망친 유월 대신 찾아낸 것이었다. 사내들이 입을 열기도 전, 해수가 느릿하게 내뱉었다. “안 오려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곧장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후문으로 빠져나갈 줄은…….” 사내의 사과에도 해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짓밟힌 꽃다발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 드러난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숨바꼭질은 졸업할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엉망이 된 꽃다발을 비스듬하게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뭐, 그것도 귀엽지만.” 작은 웃음을 흘린 해수가 시선을 들어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나가 보세요.” “……도련님. 몇 시간 안 되었으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쫓으면.” “나가라고 한 것 같은데…….” 해수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눈매를 조금 찌푸렸을 뿐인데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거세졌다. 문득 사내들의 시야 속으로 석고 용품이 들어왔다. 정과 망치. 깨뜨리고, 부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누군가 마른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나가. 당장.”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 해수가 낮게 명령했다. 고개를 깊게 숙인 그들이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탁. 조용히 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 완벽히 혼자가 된 해수가 느릿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몸에 새겨 줬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도망을 치다니. “정말 박제를 해야 하나…….” 이골 난 중얼거림과 함께 그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지팡이를 내리찍듯, 쿵, 쿵 무릎 위를 가볍게 때렸다. 그가 이러면 유월은 흠칫하며 몸을 떨곤 했다.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빛. 목이 졸리기 직전의, 눈물이 가득한 그 눈. 오직 저만을 담던 눈. 문득 해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기질적인 그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묵직해진 아래가 열심히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 하하.” 내내 무표정했던 그의 입가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어처구니없는 듯한 눈빛만 아니면 얼핏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깊게 기댔다. “내가 할 말이 아니었네.”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혼잣말과 함께 그가 바지춤으로 손을 들었다. 잘그락. 느릿하게 버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발기한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손이 망가진 장미꽃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뽑아들자, 으스러진 꽃잎이 손아귀에 달라붙었다. 붉은 꽃잎을 매단 채로, 씨근거리는 성기를 감싸 쥐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그녀를 떠올렸다. 아무리 넓혀 놔도 매번 진입할 때 빠듯하게 조이던 속살. 눈이 돌아 버릴 만큼 뜨거운 안쪽. 예민한 곳을 꾹꾹 눌러 줄 때마다 경련하며 제 좆을 씹어먹던 내벽. “아, 씹…….” 단정하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부드러운 꽃잎이 거친 손길과 쿠퍼액에 의해 마구 짓이겨진다. 제가 마구 좆물을 싸질렀던 정유월의 음부처럼. 정유월. 유월아.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단정한 가슴팍이 들썩인다. 귀두를 움켜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상상 속 자신이 울먹이는 정유월을 향해 손을 뻗는다. 목덜미를 지긋이 내리누르자 그녀가 눈물 젖은 속눈썹을 느릿하게 감는다. 연약한 생명이 다가올 죽음을, 그보다 더 강한 쾌감을 순응한다. 그 순간, 좆대가리가 울컥거리며 정액을 내뱉었다. 낮은 신음과 함께 들썩이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을 뜨자, 거친 손길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꽃잎이 시야에 들이찼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유월아.” 중얼거림과 함께 그가 엉망이 된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가볍게 벌리자, 장미 꽃잎을 옭아맨 하얀 액체가 끈적하게 벌어졌다. 꼭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은 모양새.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다음엔 네 발로 와야 해. 알았지?” 사랑을 뜻하는, 다 망가진 꽃다발을 음미하듯 들어 깊게 향기를 들이켰다. 정유월을 닮은 황홀한 향기가 폐부 가득히 들이찼다. 수음과 욕정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아버지의 집은 트럭으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겨우 나올 만큼, 아주 외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도착과 동시에 낡은 대문을 걸어 잠갔다. 그 미친놈이 무슨 수단을 쓸지 모른다는 말로 유월의 핸드폰과 제게 주었던 핸드폰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이따금씩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아니, 여기 있다니까?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못 믿냐고! 직접 와서 확인하면 되잖아! 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아버지와 달리 상대방의 반응은 평온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 것도 같았지만, 유월은 그저 당겨 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 무엇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흰 눈이 더러운 마당을 하얗게 물들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씹, 대체 돈은 언제 주는 거야. 이 새끼들 감히 날 물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자신만만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분노로, 이내 초조함으로 물들어 갈 무렵이었다. 또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던 아버지가 핸드폰을 거칠게 내던졌다. 유월이 흠칫 몸을 말았다. “이 씨발 새끼들…….” 그런 유월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게 술병을 손에 쥐었다.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유월이 옹송그리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분노는 항상 약자에게로 튀기 마련이었다. 충혈된 아버지의 눈동자가 유월에게 닿았다. “뭘 잘했다고 그러고 있어? 네 어미처럼 멍하니 손 놓고 있으라고 데려온 줄 알아?” 그의 윽박에 움찔 몸을 떤 유월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아버지를 비켜 지나가 허름한 부엌으로 향할 때였다. 눈앞이 핑 돈다 싶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욱…….” 휘청거리던 유월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가 더럽다며 또다시 욕을 내뱉을지도 몰랐으니까. “죄송해요, 속이 안 좋아서…….” 변명하려던 순간이었다. 두툼하고 질척거리는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너…….” 아버지의 퀭한 눈동자가 그녀의 배 위로 떨어졌다. “임신했냐?” “……네?” “애를 뱄어? 그 새끼 애야?” 유월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내뱉었다. “아니에요. 그냥, 요 며칠 잘 안 먹어서…….” “허.” 그녀의 해명에도 아버지는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아니라고? 그리 되묻는 듯한 눈빛에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수와 수없이 살을 섞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집착적일 만큼 꾸역꾸역 밀어 넣던 그의 정액 또한,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할 만큼 선명했다. “어미 닮아 발랑 까진 건 알고 있었는데. 그새 애새끼를……. 아니, 잠깐.” 신랄한 말을 내뱉던 아버지가 멈칫했다. 그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탁한 눈빛 속, 경멸은 사라지고 짙은 이채가 돌았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물건값을 매기는 것처럼 어머니와 저를 쳐다보던 눈빛. “……그래, 이쪽이 더 빠르겠군.”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확실치 않은, 배 속의 존재마저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유월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안 돼요. 아버지, 그건…….”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머리채가 붙잡혔다. “그 지옥에서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지.” “으, 아…….” “마음 같아서는 확, 니 애미랑 같이 싸잡아서 정신 교육 한번 해 주고 싶은데.” 두툼한 손이 벌겋게 부어오른 유월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애새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봐주는 거야. 운 좋은 줄 알아. 어?” 유월은 끅끅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 어린 눈동자엔 작은 저항마저 사라졌다. 순순한 수긍이 마음에 든다는 듯 아버지가 머리채를 놔주었다. 바닥에 넘어지다시피 주저앉은 유월은 배를 끌어안았다. 부디 아니기를. 아기가 이 안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는 유월을 끌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미약하게나마 저항해 보려 했지만, 이어진 아버지의 폭력으로 그녀의 반항은 허무하게 짓밟혔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연신 유월을 힐끔거렸다. 텅 빈 표정을 한 채, 뺨에 멍 자국을 단 여자. 아마 그들의 머릿속엔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을 터였다. 그것도 최대한 비극적이고 비참한 방향으로. 그러나 유월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빌었다. 신을 믿지는 않는다. 있다면 이렇게까지 제 인생을 망쳐 놓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부디 아버지의 착각이기를, 아기가 찾아온 게 아니기를. 그러나 하늘은 늘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임신이네요.” 선고와도 같은 말에 유월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기집이 많이 약해졌으니 조심해야 한다. 초기인 만큼 수면과 식사를 잘 신경 써라. 통상적인 진단이 이어졌지만 그 무엇도 유월의 귀에 들어오지 못했다. 배 속에 아기가 있다. 해수와 자신의 아이가.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이다음이 생각나질 않았다. “저, 산모님.” 그때 진찰하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담받아 보시겠어요?” “……네?” “아이요.” 구체적인 말을 덧붙이진 않았으나 숨은 의미를 이해했다. 멍 자국으로 가득한 뺨. 기쁨이 아닌 절망으로 물드는 눈동자. 떨리는 호흡. 원치 않은 임신임을 눈치채기에 어렵지 않았다. 의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같이 오신 분은 아버지이신가요?” “……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모르시겠네요. 다른 선생님 연결해 드릴게요. 안쪽에서 조금만 기다리시겠어요?” 유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들의 안내를 따라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임신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버지는 아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었다. 제 딸이 권성의 씨를 배었다며 돈을,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아이가 저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갈 때였다. “정민아 씨?” 부름과 함께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뿌리쳤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은 아버지도, 권해수도 아니었다. 저를 붙잡은 사내는 흰색 가운을 입은, 단정한 외모의 남자였다. 한데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상대 또한 어디서 봤다 싶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너 정유월 맞지?” 당황한 유월의 시선이 흔들렸다. “기억 못 하는구나. 나야. 윤준서. 왜, 그 너희 그때 사고 난 날 봤던…….” 유월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기억났다. 해수의 과거를 설명해 주었던, 윤선아의 오빠였다. 권씨 저택의 가정부 아주머니들이 지나가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해수 도련님 생일 때 왔던 준서 도련님이 의사가 되었노라고. “한번 봐야 하는 환자가 있다길래 온 건데. 넌 왜 여기 있어? 이름은 왜 다른…….” 질문을 내뱉던 윤준서가 곧 말끝을 흐렸다. 유월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눈빛에 짧은 깨달음이 스치고, 곧 안쓰러움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유월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윤준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 묻기도 뭐 하지만.” “…….” “권해수의 아이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오랜 시간 보지 않았던 윤준서가 단번에 상대를 눈치챌 만큼, 두 사람은 강하게 얽혀 있었다. 그걸 정유월만 몰랐다. 유월은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준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네 얼굴의 상처도 권해수 짓이야?” “그건……! 그건 아니에요.” “…….” “이건 아버지가……. 제가 해수에게서 도망쳤기 때문에…….” 강하게 반박할 땐 언제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잊고 있던 현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를 가진 채로 아버지에게도, 해수에게도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무리였다. 태어난 순간, 아이는 절망을 겪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지워야 한다. 그것이 서로를……. 아니, 아이를 위한 길이었다. 알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흐느끼자 윤준서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자세를 낮춘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선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알겠어. 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야? 어머니랑은 같이 안 왔니?” 어머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유월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임신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희영이 어머니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래, 일단은 알았어. 더는 묻지 않을게.” 상황이 복잡하다 생각한 것인지, 윤준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 날짜 잡아 놓을 테니까, 아버지껜 재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려. 다음 일은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자.” 그것이 꼭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예상대로 유월의 임신 사실에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번들번들 눈을 빛내며 아기집이 불안정해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도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엄마가 되어서는, 왜 몸을 험하게 굴리고 다니냐며 짐짓 걱정하는 척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다가 곧 얼마 안 가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그녀의 손에서 제일 먼저 낚아챈 것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탐욕스러운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연신 사진을 들여다보는 눈동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손에 틀어쥐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뒤로한 채 유월은 아무런 말 없이 아직 홀쭉한 배를 쓰다듬었다. 재검일이 밝았다. 유월보다 더 일찍 일어난 아버지는 분주히 트럭을 몰았다. 막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전벨트를 푸는데, 아버지의 전화가 돌연 울리기 시작했다.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 버럭 성을 내며 아버지가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퉁명스럽게 상대방을 묻던 아버지의 눈이 돌연 크게 뜨였다. “뭐? 세 배를 줘?!” 소리치던 아버지가 곧 목소리를 낮췄다. 상체를 웅크린 그가 창문 너머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 와중에도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는 듯, 신경은 핸드폰에 꽂혀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입가가 헤벌쭉 찢어졌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콧방귀 뀔 땐 언제고. 그래서 언제인데? 뭐? 지금?” 목소리를 높인 그가 힐끔 유월을 쳐다봤다. 의심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지금은 좀 곤란한…… 뭐?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겠다고!” 전화를 끊은 그가 유월에게 소리쳤다. “금방 올 테니 넌 얌전히 병원에서 기다려라!” “……아, 아버지?” “진찰받고 있어! 알았지?” 어서 내리라는 듯, 그가 유월의 벨트를 풀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얼결에 거기서 내린 유월은 멀어져가는 트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돌연 멈칫했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다. 그것도 저를 홀로 버려둔 채로. 생각을 마친 몸이 곧장 튀어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모르겠다. 제가 갈 수 있는 곳이 존재하기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유월은 다급히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속이 울렁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녀의 몸이 스러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어머, 괜찮으세요?” “괜찮…….” “세상에. 정신 좀 차려보세요. 저기요!” 누군가 사람 좀 불러오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자신은 괜찮으니 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안 돼.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러나 까매지는 시야를 막을 길은 없었다. *** 흐릿하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짐과 동시에 유월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여긴……. “어어, 벌써 움직이면 안 돼.” 그런 그녀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준서였다. 어떻게 된 거냐는 눈으로 묻자, 그가 말했다. “기절했더라, 너.” “……기절이요?” “영양실조였어. 수면 부족도 좀 있는 데다, 신경 쇠약은…… 말할 것도 없는 것 같고.” 그의 시선이 유월의 뺨에 닿았다. 짧은 기간 사이에 멍 자국이 늘어나 있었다. “산모로선 아주 최악인 몸 상태지.” 대꾸할 말이 없어서 유월은 고개만 숙였다. 병원이라는 건 즉, 아버지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리라. “저, 저희 아버지께선…….” “안 오셨어.” “……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윤준서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안 오셨어. 너를 찾는 사람도 없었고.” 믿을 수 없었다. 지금도 핏발 선 아버지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니. 그런 유월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준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찾아오시더라도 VIP 병동이니까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겠지.” “네? VIP요?” “무리 좀 했지. 위쪽에 알려지면 나도 좀 곤란해질 테고.”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유월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뒷덜미를 문지르던 윤준서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특별히 큰일은 아니야.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정말 곤란해지시면 어떡해요.” “환자를 보호하는 것도 의사의 의무야. 이런 몸 상태를 가진 환자를, 다시 궁지로 내몰 순 없어.” 신념까지 느껴지는 말에 유월이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제 상태가 최악이라는 뜻도 되었다. 유월이 입을 다물자, 윤준서가 차트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가 좀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네 생각이 궁금하거든.” “…….” “넌 아이를 지우고 싶어?” 유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 아이는…….” 아이를 지워야 한다. 그건 임신 사실을 깨달을 때부터 내린 결정이었다. “지워야 해요…….” “…….” “아, 아이를 위해서라면 지워야…….” 그러나 결단처럼 내뱉은 말과 달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지움으로써 자유를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약한 저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러자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윤준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 치료부터 하자.” “하, 하지만…….” “아이 문제는 몸부터 회복하고 난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일단 너부터 생각해. 알겠니?” 그의 다정한 어조에 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지났다. 윤준서의 말대로, 유월은 일단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아이를 지우더라도 일단 산모가 건강해야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적절한 처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몸 상태는 차차 회복되어 갔다. 물론 밤마다 악몽이 찾아와 창문을 두드린 순간도 있었다. 그 소리는 자동차의 클랙슨이 될 때도, 아버지의 고함이 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정신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해수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유월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항상 최악을 겪었다. 해수는 결국 자신을 속였고, 유월의 정신마저 망가뜨렸다. 반성했다던 아버지는 이제 배 속의 아이마저 값을 매겼다.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가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을 땐,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이불 속에 몸을 숨겼다.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찾는 악몽을 피해 숨죽이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배 속의 아이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노라면 까무룩 잠이 들거나, 아침이 밝았다. 그동안 아버지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유월은 그 점이 의아했다. 권씨 집안까지 저를 찾아온 아버지가, 정말 자신이 입원한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을까? 그러나 조심스럽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도 윤준서는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말 안 오셨나요?” “그렇다니까. 왜. 못 믿겠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아?” 그 말에 유월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허둥거리며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며 해명하자 윤준서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늘 슬픈 얼굴만 봤는데, 그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 “많이 웃어. 보기 좋다.” 부드러운 말에도 유월은 생경한 말을 듣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평소 잘 안 웃었던가? 웃는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아니, 윤준서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제가 웃을 때마다 해수는 꽃을 처음으로 선물받은 소년처럼 웃었으니까. 보는 사람마저 간질거리는 미소로. 그래서 유월은 그의 앞에서 되도록 자주 웃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있으면 웃음이 자주 나왔다. 해수와 함께 있으면 항상……. 기억을 더듬던 유월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또다. 또다시 권해수 생각을 하고 말았다. 더 이상 그를 떠올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 이거 한번 볼래?” 상념에 잠겼던 그녀를 깨운 건 윤준서였다. 그가 들고 있던 차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는 눈으로 묻자, 확인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입원 서류였다. 이걸 왜 제게. 찬찬히 확인하던 유월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이름 옆, 보호자 칸에 윤준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유월이 멈칫하자 그가 해명하듯 이유를 덧붙였다. “그, 다른 건 아니고, 네 진료 편하게 보려고 한 거야. 내가 임의로 진료를 보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공란으로 둘 순 없잖아. 네 아버지 이름을 넣을 수도 없고.” “…….” “그래도 네가 일단 확인은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준 건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조금 머쓱한 듯했다. 엄지로 눈썹을 긁적이던 그가 힐끔 유월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곧장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요 며칠 동안 느낀 거지만, 그는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의사라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그만큼 다정함을 주고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란 뜻이리라. 저와는 다르게. “싫지 않으면 이대로 둔다?”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자, 윤준서는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한층 밝아진 표정인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어쩐지 들뜬 듯했다. 왜 제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거냐고, 유월은 문득 묻고 싶었다. VIP 병동으로도 모자라 보호자까지 자처한 그였다. 남과 다를 바 없던 사이에 과분한 도움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가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리고선 말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제 가 봐야겠다. 갑자기 병원장 호출이 와서.” “설마 저 때문에 징계라도 받는 건…….” “그런 건 아닐 거야. 위쪽을 보느라 바쁘신 분이거든.” 너스레를 떤 그가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갔다. 손을 흔들던 유월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과 비슷했다. 사고가 났던 날과도 해수에게서 도망쳤던 날과도. 흐릿한 하늘. 천천히 내리는 눈. 그러나 전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는 않았다. 조금 낯선 고요함 속에서 유월은 조심스럽게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있지, 아기야. 엄마는 희망 같은 거 바란 적이 없거든.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너와 나, 둘이서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심조심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시야에 다 떨어져 가는 수액이 보였다. 호출을 누르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병실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해수나 아버지를 마주칠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젠 괜찮지 않을까. 사람을 만나는 건 아직 무서웠지만 간호사들을 만나는 것 정도라면, 잠깐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수액 걸이를 끌고 병실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열기 직전, 툭 튀어나온 길이 조절기에 링거 줄이 엉켰다. 고개 숙인 그녀가 링거 줄을 서툴게 풀어낼 때였다. 뚜벅. 살짝 열린 문 너머, 서두르지 않는 단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VIP 병실이라고 해도 간호사들이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저분께 수액을 부탁드려야겠다.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쿵.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익숙한 소리. 잊을 수도, 잊어서는 안 되는 소리. 쿵. 유월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움직여야 하는데 사지가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닐 거야. 내 착각이야. 아닐 거야……. 바라고 또 바랐으나, 발소리는 정확히 그녀의 병실 앞에 멈췄다. 드르륵. 이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병실 문이 열렸다. 굳어 버린 그녀의 시야에 단정한 구두가 들어왔다. 이어 오롯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선, 매끈한 다리가 그녀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소품이라도 되는 양, 허공에 들린 지팡이가 탁, 가볍게 바닥 위로 내려앉는다. 그녀가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세웠다. 선이 고운 얼굴.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콧날. 서늘하면서도 예민한, 금방 깨지기 쉬운 분위기를 가진 사내. “안녕, 유월아.” 나의 도련님, 권해수가 웃었다. “잘 지냈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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