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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


06. 여긴 왜. 어떻게. 달싹이는 입술이 힘겹게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이 악몽을 마주한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해수는 잠시 가벼운 외출을 끝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자신의 지팡이를 벽에 세워 둘 뿐이었다. 뻐근한 듯 가볍게 손목을 비틀던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흠칫하는 그녀의 몸짓 따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엄지로 볼을 살살 쓸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속상하게.” 서늘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다.” “…….” “나처럼.” 그러나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은 뒤틀리고, 또 뒤틀려 있었다. 그녀의 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당장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그러나 유일한 퇴로는 해수에게 막혀 있었다. 항상 상주해 있던 의료진들도 보이지 않았다. 유월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층에는 유월과 해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아니, 대체 어떻게. 조합되지 않은 언어들을 힘겹게 달싹인 유월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금야금 간격을 두고 잡아먹는 것처럼, 해수가 보폭을 맞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널 찾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어.” 한 걸음. “유월이가 왜 날 떠났을까. 왜 약속을 어겼을까. 이번엔 정말 무슨 벌을 줘야 하나…….” 또 한 걸음.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하나더라.” 이윽고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는 그녀 앞에 섰다. 조금 야윈 그녀의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역시 그 트럭엔 네가 치었어야 했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유월은 눈만 깜빡였다.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다쳤다면 난 평생 속죄를 이유로 네 옆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 “그랬다면 지금처럼 도망도 못 칠 테고. 응?” 해수의 손가락이 귀 아래, 맥박이 뛰는 곳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살살 어루만지는 것뿐인데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우리 지금이라도 되돌릴까?”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던 해수가 문득 속삭였다. “이번엔 네가 다치는 거야.” “……뭐?” “걱정하지 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옆에서 돌봐 줄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어때? 재차 되묻는 그는 정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투였다. 유월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모든 게 제가 알던 권해수였다. 그런데 왜 그가 내뱉는 말은 이토록 현실성이 없는 것인가. “……그게.” 숨이 모자란 붕어처럼 뻐끔거리던 유월의 입술이 이윽고 천천히 벌어졌다. 애써 연결했던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를 기점으로 제어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게 전부야?”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기어코 비집고 나온 눈물처럼, 수백 번, 수천 번 참아 왔던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그 사고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았잖아.” “…….”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해수 너잖아.” 괴로움. 절망. 해수를 망쳐 버렸다는 죄책감과 자괴감. 평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죄로 유월은 괴로워했다. 눈을 감아도, 떠도 트라우마는 그녀를 다시 사고 현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꿈속에서 그녀의 도련님은 몇 번이고 시체가 되었다. 눈 속에 피어난 붉은 꽃으로. 악몽에서 깨어나며, 유월은 차라리 자신이 다쳤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원망했고, 그녀는 그 날카로운 감정들을 제 몫으로 감내했다. 늘 그렇듯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고작 후회한다는 그 말이 전부야?” 차라리 변명이라도 하지. 죄책감과 어떤 책임감에 사로잡힌 제게, 진실을 말하는 게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이보다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권해수는 제가 트럭에 치이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금 간 유리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저는 무엇을 기대했나. 진실은 무엇이었나. 제가 알던 권해수는, 제게 봄을 안겨 주었던 도련님은 대체 누구였나. 그리고 나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나는. 망가진 내 인생은. 헐떡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핑글 분노가 고였다. “……날 속였어.” 힘없이 떨리던 입술을 앙다물곤 이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날 속였어. 모두가, 나를 속였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너, 너마저도……!” 그녀가 뿌리치듯 해수를 밀쳤다. 울분이 쌓인 듯 가슴을 내리치고 발로 걷어찼다. 감정이 실린 주먹에도 그는 밀리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그녀가 제풀에 지쳐, 힘이 빠질 때까지. 늘 그렇듯.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왜 나한테……!” “유월아.” 거친 몸짓으로 인해 링거 줄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도 반듯했던 미간에 미약한 금이 갔다. “흥분한 건 알겠는데, 말은 바로 해야지.” “이거 놔, 이거……!” “처음부터 널 속인 건 내가 아니라 네 어머니잖아.” “……뭐?” 단언하는 목소리에 유월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뺨이 차갑게 굳었다. 어긋나지 않은 링거 바늘을 먼저 확인한 그가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가 느리게 시선을 올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알고 있어. 어릴 때 네 어머니가 널 죽이려 했다는 거.” 유월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입이 힘겹게 벌어졌다. “그걸, 그걸 네가 어떻게…….” “우리 사모님께서 급하다고 해도 무작정 아무나 들이진 않지. 당신께서 그토록 들어오고 싶었던 권성인데, 제 손으로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까.” “…….” “그런 여자가 직접 들인 아이야, 넌.” 그 의미를 정말 모르겠어? 무감한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아니야. 그건, 그 일은……. 더듬거리던 유월이 뒷걸음질을 쳤다. 차갑고 딱딱한 벽이 등에 닿았다. 그 순간, 애써 감춰 두었던 기억이 펼쳐졌다. 그날은 아버지가 또다시 도박에 손을 댄 날이었다. 정신 차리며 살겠다던 아버지는, 고작 일주일 만에 다시 술을 입에 대었다. 건설업 일용직에서 만난 동료들 때문이었다. “그 새끼들이 뭐라는지 알아? 그리 잘나갔던 사람이 왜 여기 있냐더라. 그 잘난 마누라는 어디에 뒀냐면서!” “여, 여보…….” “보잘것없는 주제에 감히 나를 무시했다고!” 반성을 내뱉던 입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친 욕설과 함께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어린 유월은 익숙하게 벽에 몸을 붙였다. 눈앞에선 이미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었다. “네가 함부로 임신만 안 했으면, 그래서 내가 괜히 사업하겠답시고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아, 아악!” “저년이, 저년이 태어난 이후로 모든 게 망했다고!” 유월을 삿대질하는 손길을 따라 어머니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멍과 폭력으로 흐리게 뜨였던 어머니의 눈이 일순간 반짝이는 것 같아서. 너구나. 이 모든 게 너 때문이었어. 마치 오랜 시간 찾아 헤맸던 대답을 뒤늦게 찾은 것처럼. 그러나 곧 이어진 손길로 인해 어머니의 원망 어린 시선은 찰나로 끝났다. 그렇게 한참을 화풀이하던 아버지는 이미 무너진 가구를 몇 번이고 때리다,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항상 유월을 안아 주던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응시할 뿐이었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다가가기를 망설이던 유월은 그저 벽에 몸을 기댄 채 지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였다. 눈을 뜨고 싶은데 잘 떠지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전신에 열이 올랐다. 유월은 끅,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어머니였다. 이성을 잃은 듯한 까만 눈으로, 그녀가 유월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어, 엄마…….”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피딱지 내려앉은 입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이 커질수록 내리누르는 손길은 더욱 강해졌다.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처박은 원인을 직접 없애 버리겠다는 듯. 유월은 힘겹게 입술을 뻐끔거리며 속삭였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태어나서 죄송해요. 힘겹게 헐떡이던 말은 곧 줄어들었다. 눈앞이 희미해지기 전, 갑작스럽게 시야가 트였다. 막혔던 공기가 훅 들이찼다. 컥컥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유월을, 어머니가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유, 유월아.” “흐읍, 끅, 크윽…….”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어머니가 다급히 어린 유월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줘. 응? 사과들이 연이어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으나, 유월은 그날 이후 말을 잃었다.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어머니가 가정부 일을 시작한 건 그날 이후였다. 몇 없는 월급을 모아, 가정 폭력 피해자를 위해 나라에서 운영하는 상담소로 데려갔다. 트라우마. 함묵증……. 뜻을 알 수 없는 설명들이 이어졌다. “유월아. 어머니께서도 많이 힘드셨대. 정말 후회한다고 하셨어.” “…….” “어머니도 이렇게 반성하시는데, 유월이도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친절한 상담사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도 궁지에 몰려서 그런 거라고. 더 심한 일을 한 어른도 많다고.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모녀의 갈등을 해치우고 싶다는 듯, 작은 지루함까지 보였다. 그 말에 유월이 조용히 시선을 움직여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로,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없었을 상처를 매달고서. 유월의 말문이 다시 트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어른들 말이 맞아.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버리지 않았잖아. 날 안아 줬어. 다정하게……. 유월은 조금씩 말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안도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자주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유월이 완전히 나아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날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단순한 사고였던 것처럼.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이 그녀의 정신을 흩뜨렸다. 잘게 호흡을 몰아쉬던 그녀가 짓씹듯 말했다. “……아니야.” 유월이 부정하듯 재차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분명 사과했어. 잘못했다고, 미, 미안하다고.” 힘겹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어머니를 두둔하는 모습엔 어떤 신념까지 느껴졌다. 해수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새 인형 목이나 자르는 아이의 방에 딸아이를 밀어 넣은 게 사과가 될 수 있나?” “바,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우리를 언제 팔아넘겨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같이 도망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내 다리가 나은 걸 알면서도 묵인한 건?” 유월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힘겹게 일렁였다. “그건…… 내가 해수 너를 믿어서. 어머니는 날 걱정했기 때문에…….” “아아, 그래서 이야기를 못 했다는 거구나.” 뻔한 퀴즈의 정답이라도 들은 듯, 해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아. 내가 널 곱게 키우긴 했지만…….” 성가시다는 듯 작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 죄야. 넌 아직도 네 어머니를 믿고 싶어?”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울컥, 반박이 일었다. 어린 날에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어머니를 믿었던 건, 그래도 저를 버리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권해수의 다리를 망가뜨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표를 지니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트럭에 치인 그 순간, 저를 향해 달려와 준 유일한 사람. 어머니란 존재를 믿는 게 당연했다. “우리 유월이가 생각보다 고집이 세네.” 떼쓰는 아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작게 한숨을 내쉰 해수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위압적인 체격에 움찔하는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럼 확인해 볼까?” 무엇이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무성의하게 화면을 쓸어내리던 해수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빙긋 웃었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유월을 향해 돌렸다. 강제로 들이밀어진 화면을 발견한 유월의 얼굴이 굳었다. 유미선.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녀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유월을 관망하기라도 하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해수가 느릿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조용한 병실을 메웠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연결음이 이어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머니를 찾지 않았던 건, 혹시라도 제 임신 사실이 천희영에게 알려질까 봐서였다. 어머니께선 자신 때문에 이미 힘든 일을 여럿 겪었으니, 더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라도 제가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꺼이 찾아올 터였다. 딸이니까. 가족이니까. 해수의 다리를 망쳐버렸을 때도 어머니는 자신의 곁을 지켜 주었으니까……. 아니……. 정말 그럴까? “엄마랑 유월이는…… 이런 거 익숙하지?” 마음속 누군가가 물음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집에 돌아가는 건 더 싫잖아. 조금만 버티면 이렇게 좋은 게 잔뜩 있는데……. 우리 유월이는 잘 해낼 거야. 그렇지?” 해수를 보고 기절한 후, 무서워하는 저를 어떻게든 달래던 어머니. “……도련님께서 미술을 그만두겠다고 했다던데. 어떻게 돌렸니? 유월이 넌……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 다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듯 되묻던 어머니. “약은 잘 먹고 있는 거지?” 강박이라도 되는 양, 약을 손에 들려 줄 뿐, 아무것도 묻지 않던 어머니. 강제로 테이프를 되감듯, 기억이 거꾸로 돌아간다. 유월은 다시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가 돈 나올 구멍을 찾았다며 저와 어머니를 바라본 그날. 울리지 않던 어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래전, 발걸음을 끊은 상담소에서의 연락이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일을 찾고 있는 건 맞아요. 좀 급하긴 한데……. 네?”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던 어머니의 눈빛이 아주 천천히 유월에게 닿았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우리 유월이를 찾으신다고요?” 아, 그날과 같은 눈빛이었다. 제 목을 졸랐던 그날과 같은 눈빛. 돈 나올 구멍이 있는지 저를 보며 가늠하던 아버지와 같은 눈빛.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뒤이어 가장 사랑했던 목소리가 그녀의 뇌리를 집어삼켰다. ―여보세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퍼뜩 눈을 떴다. “아, 드디어 받으셨네요.” 반가운 상대라도 만나듯, 해수의 목소리가 가벼웠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여기가.”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유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낚아채듯 그의 전화를 빼앗았다. 그러곤 튀어 버린 불씨를 꺼뜨리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통화를 종료시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흐, 흐윽…….” 끊긴 통화를 확인하고서도 진정되지 않던 숨이 점차 울음으로 번졌다. 해수는 그런 유월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진실을 마주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거부했다. 확인하지 않으면, 버려질 일도 없을 테니까. 아직은 제 안에 어머니를 두어도 될 테니까. 그러나 이 또한 진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에 비로소 절망이 어렸다. 작은 희망마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린 해수가 작게 탄식했다. “그러게, 왜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들어.” 도리어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린 그가 핸드폰을 가져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둔탁한 파열음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가 품속 가득 유월을 끌어안았다. 깊이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신 그가 이제야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유월아.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녀의 목덜미에 높은 콧대를 비비던 해수가 문득 작은 웃음을 흘렸다. “어머니께 버림받은 것마저 똑같네, 우린.” 그렇게 속삭이는 권해수는 공통점을 찾아 그저 기쁘다는 투였다. “……왜.” 멍한 와중에도 말이 튀어나왔다. 유월이 허공을 응시한 채 물었다. “왜……?” 왜. 왜. 그녀는 고장 난 사람처럼 같은 질문만을 반복했다. 무엇을 향한 질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눈은 수차례 흘린 눈물 때문에 뜨거웠고 귀는 먹먹했다. 과거가 현실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권해수는 웃었다. 엉망인 그녀를 바라보며 명쾌하게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미소를 지으며. “널 사랑하니까, 유월아.”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랑이라니. 이런 것 따위가 감히 사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 사랑은 뭔데? 어긋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제 목을 졸랐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다. 아버지는 딸과 그 배 속의 아이를 더 높은 값에 팔기 위해 눈을 빛냈다. 부모에게서도 받은 적 없으면서, 사랑을 논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저항을 잃은 몸이 힘겹게 늘어졌다. 해수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가엾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어. 벌써 세 번째로 약속을 어긴 거니까.” 그가 침대로 걸어가며 속삭였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도망친 장소를, 그는 너무도 쉽게 짓밟고 있었다. 그녀가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그 두 다리로. “그래서 이번엔 정말 박제로 만들어 버려야겠다. 아무 데도 못 날아가도록. 그렇게 만들어야지, 결심했거든. 그런데…….” 침대에 그녀를 앉힌 해수가 느리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리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임신 사실에 놀라지도, 왜 숨겼냐고 채근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양. “아기도 많이 놀랐겠다. 엄마랑 아빠가 싸워서.” 쉬……. 무서웠지.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그가 집 나간 동물을 달래 주듯 유월의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를 달래는 것인지, 아니면 배 속의 아이를 달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졌으니까. 그렇게 되도록, 권해수가 길들였으니까. “뚝 그쳤네. 잘했어.” 칭찬하듯 뺨에 입을 맞춰 준 그가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앙상한 발목을 쓰다듬다, 부드럽게 감쌌다. “마음 같아서는 이걸 먼저 수정하고 싶긴 한데…….” 툭. 바닥으로 그가 들고 있던 서류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윤준서가 들고 있던, 환자 차트였다. 그의 구둣발이 다정함으로 채워졌던 글자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우리 아기한테 인사하는 게 먼저겠지?” 상냥한 미소와 함께 양 발목이 높이 들렸다. 손쉽게 바지가 벗겨지고, 번쩍 솟아오른 다리가 쩍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곧장 무릎 꿇은 해수가 고개를 숙였다. 고아한 얼굴이 그녀의 음부를 게걸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기울어진 시야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게 상관없었다. 이제는……. 유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기절한 유월을 안고 해수가 향한 곳은 오피스텔이 아니라 권씨 저택이었다. 그 많던 사용인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저택을 자신의 일부라 여겼던 천희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적 없는 저택은 마치 거대한 해수의 방을 확장해 놓은 것 같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새 인형의 목을 자르던 그 방을. 구석구석 살뜰히 돌보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늘 반짝이던 창문엔 얼룩덜룩한 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유월이 힘겹게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추워?” 해수가 유월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누르며, 허리를 깊게 밀어 넣었다. 묵직한 압박감에 저절로 발끝이 치켜 올라갔다. “환기한다고, 후, 열어 뒀는데 깜빡했나 봐.” “으읏…….” “응, 춥지. 미안해.” 유월을 대신해 창문을 닫아 준 그가 달래듯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러나 아래를 치받는 움직임은 점점 거세졌다. 바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뒤편으로 해수가 다가왔고, 배 속의 아이 이야기를 하며 배를 쓰다듬었다. 점점 짙어지던 손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물 흐르듯 당연한 흐름이었다. 다리도 자유로워졌으니, 섹스 또한 자유로웠다. 거실, 방, 부엌. 그간 다리가 불편한 척하느라 못 했던 섹스를 몰아서 하겠다는 듯, 그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유월과 몸을 섞었다. 유월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상관없었으니까. “그거 알아? 전에 비해 단내가 짙어진 거?” 땀에 젖은 목덜미를 핥아 올리던 그가 문득 속삭였다. “날이 갈수록 보지 냄새가 짙어지고 있어. 색깔도 마찬가지고.” “하으, 읏, 아아……!” “아기가 알려 주고 싶나 봐.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작은 웃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유월은 부정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기 무섭게 안쪽을 파고드는 성기 때문에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이렇게 단내를 질질 흘리는데, 나중에 젖까지 흘리면 얼마나 향기로울까.” “아, 아응, 아!” “아…… 생각만 해도 맛있을 것 같아.” 달콤한 미식을 기대하듯 해수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상상으로는 참을 수 없는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에게 수십 번이고 빨려 툭 튀어나온 유두가 허공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유두는 함몰 유두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빳빳하게 선 유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곧장 젖가슴을 아래부터 감싸 쥔 그가 유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 아아!” “후……. 씹…….” 젖먹이처럼 유두를 강하게 흡착하던 그가 탄성 같은 욕을 중얼거렸다. 꿀꺽. 꿀꺽. 아직 나오지 않는 젖을 삼키기라도 하듯, 땀에 젖은 사내의 탄탄한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벽을 치받는 움직임은 점점 거세졌다. 찰랑거리던 무언가 몸집을 부풀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꾸득거리며 헤쳐 들어온 선단이 자궁 입구를 단숨에 짓이겼다. “아, 히잇……!” 그 순간, 유월의 질이 확 조여들었다. 양 무릎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뜨거운 게 폭발하나 싶더니 눈앞이 하얘졌다. 젖은 살을 치대는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게 먹먹해졌다. 아주 느릿하게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린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딛고 선 바닥은 그녀가 흘린 보짓물과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이어 먹먹한 귓가로 해수의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혼자서 벌써 몇 번이나 가는 거야. 가슴 빨리는 게 그렇게 좋아?” “히, 히극.” “저런. 안 들리나 보네……. 눈까지 다 풀렸어.” 정신 차려야 할 텐데. 난감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던 해수가 문득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유월아, 저쪽 봐 볼래?”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라도 한 양, 그가 유월의 턱을 붙잡아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시야가 돌아갔다. 무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또렷해진 눈동자 속으로 형체가 들어왔다. 거울 속엔 붙어먹는 남녀가 있었다. 창틀을 힘겹게 붙잡은 여인은 완전히 벗는 것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상의만 치켜올린 채 사내에게 박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보라는 걸까. 절정에 젖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하는 머리 위로 낮은 웃음이 떨어졌다. “누군지 모르겠어?” 자. 봐 봐. 다정히 덧붙인 해수가 유월의 한쪽 다리를 제 팔에 걸쳤다. 개처럼 다리가 들림과 동시에 볼 수 없었던 것이 드러났다. 더 빨아 달라는 듯 빳빳하게 선 유두. 쾌감과 흥분으로 부푼 클리토리스와 흠뻑 젖은 음부. 그 안을 비집고 들어온 육중한 성기. 하얗게 말라붙은 포말……. 임신을 알면서도 달뜬 얼굴로 온몸을 붉힌 채 그에게 매달린 여자는, 자신이었다. 아. 아. 유월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창틀을 지탱한 손에 힘이 들어갈 때였다. 퍽! 기다렸다는 듯 그가 한계까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장미 꽃잎 같은 보지 안으로 굵은 살덩이가 밀려 들어왔다. 아기에게 입 맞추듯 끝까지 들어왔다가, 자지 핏줄로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쿵쿵거리며 치받는 강한 쾌감에 정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항하듯 고개를 저을수록 턱을 붙잡은 해수의 손아귀는 더욱 강해졌다. “눈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야지.” 타는 듯한 눈으로 거울 속 그녀를 응시한 채, 그가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지금 우리가 뭐 하고 있는지.” “흐아, 앗, 아아! 앙!” “네가 지금 얼마나 야한 얼굴인지 네 눈으로 직접 봐야 할 거 아니야. 응?” “아니, 아니야, 나, 아응!” 음란함을 버틸 수 없던 보지가 침입자를 밀어내기라도 하듯 좁아졌다. 그러나 오히려 자지를 꽉 조이는 꼴이었다. 그의 두꺼운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아, 씹. 하…….” 미간을 찌푸린 채 욕설을 짓씹은 그가 아래로 손을 내렸다. 단정하고 섬세한 손가락이 퉁퉁 부은 음핵을 털기 시작했다. 유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전 그녀를 휩쓸었던 감각이 순식간에 몸을 불리다 이내 한순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히윽……!” 동시에 그녀의 아래에서 분수가 터졌다. 핏, 피잇. 겨우 자지를 삼킨 보지 틈이 벌름거리며 물을 쏟아 냈다. 간신히 지탱한 것으로도 모자라, 안쓰러울 만큼 하얀 발끝 위로 툭 툭 떨어졌다. 그럼에도 권해수는 멈추지 않았다. 육욕과 정복욕으로 일렁이는 눈빛을 한 채 거칠게 허리를 털었다. 절정에 이어 더 큰 절정이 쌓인다. 해수야, 잘못했어. 용서해 줘.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해도 그의 커다란 좆기둥은 거세게 그녀의 안을 쑤셔 박았다. 이대로 뭉그러져, 영영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해수야, 나, 안 돼. 나, 더, 더 이상은, 아아……!” 보다 큰 감각이 또다시 몰려온다. 폭발한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간다고 생각할 때쯤. 쿵. 뜨거운 살기둥이 가장 안쪽까지 들이박혔다. 동시에 그가 깊은 사출을 시작했다. 굵은 선단이 정액을 토해 낼 때마다 거울 속 유월의 볼록한 배가 움찔거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해수가 낮은 신음과 함께 허리를 꾸욱 밀어 올렸다. 서로의 아래가 한 치의 빈틈없이 맞물렸다. 꿀럭, 꿀럭……. 정액이 스며드는 소리가 맞닿은 살갗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아, 흐아…….” 유월이 벗어나려는 듯 바르작거렸으나 그가 어림없다는 듯 그녀를 옭아맨 팔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선이 고운 눈매를 일그러뜨린 그가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만 더.” 완전히 스며들기를 바라듯 그가 뭉근히 허리를 움직였다. 흉흉한 자지 요철이 질 주름 사이사이마다 정액이 스며들도록 비벼 올렸다. 근육으로 꽉 짜인 복부가 꿈틀거릴 때마다 자잘한 절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만족할 때까지 자지를 밀어 넣은 해수가 문득 웃었다. “이거 봐, 유월아.” 그가 힘겹게 창틀을 부여잡은 손을 끌어, 그녀의 배 위로 올렸다. “아기가 배부른가 봐.”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며 그가 기쁜 얼굴로 웃었다. 그녀 자신을 말하는 건지, 배 속의 아이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권해수는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아프다는 말도, 걷지 못한다는 말도. “우리 아기는 누굴 닮았을까…….” 그런데 왜 저렇게 사랑으로 듬뿍 젖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사랑을 모르는 그녀조차 이게 사랑은 아닐까, 무심코 생각해 버릴 만큼……. 모든 게 모순이었다. 그러나 제일 큰 모순은 그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진정을 찾는 제 몸뚱어리였다. 생각이 끊긴 건 턱을 붙잡는 손길 때문이었다. 키스하자. 입 벌려 봐. 속삭임과 함께 해수가 곧장 깊게 입을 맞췄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하늘에선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 거친 섹스의 뒤처리는 전부 권해수의 몫이었다. 기절하듯 잠든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그녀와 함께 들어가 목욕을 하고,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목욕이 끝난 뒤로는 침대로 돌아와 곧장 유월의 가슴을 입에 물고 잠이 들었다. 덕분에 유월의 젖꼭지는 누가 봐도 젖먹이를 키우는 사람처럼 항상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일어난 후엔 곧장 식사를 했다. 유월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때가 되면 그가 그녀를 씻기고, 식탁 앞에 앉히는 것까지 전부 도맡아 했으므로. “먹어. 배고프겠다.” “…….” 즉, 그 무엇 하나, 유월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월은 제 앞에 차려진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성껏 준비된 음식들 가운데 자리 잡은 꽃병엔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바싹 메마른 꽃은 꽃잎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있었으나 마치 생기 있는 꽃을 관리하듯 해수는 매일매일 꽃의 물을 갈아 주었다. 마치 그 앞에 있는 저처럼. 그러나 여전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왜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식사가 그저 음식물을 밀어 넣는 행위로 느껴져, 거부감까지 일 정도였다. 가만히 음식을 바라보는 유월을 지켜보던 해수가 느릿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던 해수가 툭 내뱉었다. “이상하네. 난 인형을 앞에 앉혀 놓은 게 아닌데.” “…….” “왜 식사할 때만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어.” 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표정으로 타인을 파악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유월은 여전히 대답도, 식기를 들지도 않았다. 식기를 내려놓은 해수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슬린다는 듯 접시를 대충 밀쳤다. 밀려난 꽃병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결국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작은 파열음과 함께 완벽하게 차려진 식탁이 꽃잎과 물로 어지럽혀졌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 위로 손을 짚은 그가 반대 손으로 유월의 턱을 감싸 쥐었다. “정유월.” 고개가 들리고 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네 입을 억지로 벌리는 건 섹스 때면 족해.” “…….” “먹어. 직접 씹어서 넘겨 주기 전에.” 마주한 눈동자는 병원에서 다시 만났을 때보다도 더 깊고 어두웠다. 신랄한 말에도 유월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단정한 그의 미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한참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해수가 작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안 먹는 건 그러려니 할게. 그간 아무런 반항도 없었으니까.” “…….” “그런데 유월아.”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죽을 때 아이도 같이 데려가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신랄한 말에 무릎 위 올려 둔 유월의 손이 작게 움찔했다. 배 속의 아이를 입에 담자 눈동자에 작은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뚝. 뚝.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물줄기가 기어코 그녀의 옷자락을 적시기 시작한 것처럼. “지금 아기가 싫어서 다시 만들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하고.” “…….” “어떻게 할래?”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으며 유월을 응시했다. 이미 자라고 있는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바꿀 수 있노라 말하는 그의 태도에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해수를 응시하는 눈빛에 경멸이 일었다. 그러나 유월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자신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제가 먹지 않으면 결국, 아기 또한 목숨을 잃는 것과 같았으니. 입을 틀어막고 죽음을 종용하던 제 어머니와 다를 게 무엇일까. 공허로 가득했던 눈망울에 서서히 죄책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물들 때까지 기다린 해수가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다시 자리에 앉아 몸을 깊게 기댄 후, 그녀를 향해 말했다. “먹어.” 전과 같은 목소리였다. “먹어, 유월아.” 그저 한마디 말뿐이었다. 강제로 입을 벌리고, 쑤셔 넣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월은 떨리는 손으로 식기를 들었다. 거부감을 음식물과 함께 억지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한 숟갈까지 전부 떠먹고 나서야, 해수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잘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칭찬하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작 유월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는 한 숟가락도 뜨지 않은 채였다. ***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해수와 몸을 섞고, 강제에 가까운 식사를 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균열이 깨진 건 어느 날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뜨자, 평소와 달리 단정히 갖춰 입은 권해수가 보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문득 시계를 차던 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어?” 마저 시계를 착용한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올 거야. 잊지 말고 밥 챙겨 먹어.” “…….” “다 먹었는지 검사할 거니까 혹시라도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고.” 으름장과 달리 이마에 다정히 입 맞춰 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안 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혼자가 되었음에도 유월은 침대에서 나가지 않았다. 계속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침대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몽롱했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뭘 해야 하는지. 생명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가벼운 욕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어느 정도 기운 후에야 그녀는 처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혼내겠다는 해수의 으름장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해수가 없으니, 자신이 직접 먹어야 하는데……. 본능을 따라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이 천천히 뜨인 건 그때였다. 해수가 없다. 권해수가 없다. 이 집에. 생각이 스친 순간 잿더미처럼 꺼졌던 눈동자가 점점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유월은 뛰쳐나가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발을 내딛는 것이 생소해,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달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발을 신는 것도 망각한 채 문고리를 쥐었다. 찬 공기와 햇빛이 안으로 쏟아졌다. 문은 열렸고, 권해수는 없었다. 지금이다. 지금 나가면. “…….”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문고리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유월이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발을 응시했다. 발목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족쇄라도 걸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왜……. 왜…….” 더듬거리며 달싹였다. 분명 제 몸인데,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유라도 찾듯, 멍하니 주위를 더듬는 시야에 문득 현관의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유월이 숨을 멈췄다. 그 속엔 낯선 여인이 있었다. 텅 빈 눈동자. 창백한 피부. 권해수의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목덜미. 겉으로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툭 튀어나온 음란한 유두. 볼록한 배. 낯선 여인은 유월, 그녀 자신이었다. 제가 알았던 자신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권해수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권해수였다. 넌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제 목소리가 아니었다. 권해수의 목소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갈 수 없었다. 그제야 유월은 권해수가 아무런 구속 기구 없이 저를 두고 외출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정신도, 몸도 이미 자신이 지배한 후라는 것을. “흐…….” 결국 유월의 입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번졌다. 두 다리가 멀쩡히 있음에도 나갈 수 없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앞으로도 그녀는 이 저택에 있어야 했다. 권해수의 그늘 아래서, 저 혼자 외롭게. 눈물로 범벅인 채로 그녀의 호흡이 일순간 멈췄다. 젖은 손바닥에서 눈을 뗀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배 위로 올렸다. 그 순간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주 찰나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느껴졌다.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을 닮은 아기의 움직임이. 혼자가 아님을, 마치 위로라도 해 주듯.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왜 모든 걸 포기하려 했을까. 나도 사랑을 줄 수 있는데. 사랑을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사랑까지 전부 다 아기에게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럼 내 아기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내 아기. 환영받아야 할 존재를 곱씹자, 발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대로, 다시 해수에게 끌려갈 게 뻔했다. 그러니 더더욱 해수의 곁을 떠나야 했다. 타인의 감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그가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의 곁을 떠나야 했다. 아직은 체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의 의심을 덜 수 있는 방법일 터였다. 유월은 현관문을 닫았다. 침대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에게서 도망치려면, 일단 최소한의 감시부터 떨쳐 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유월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방법을 찾아 나간다고 해도, 권해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그때였다. 딱 한 가지의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있을지도 몰랐다. ……이 저택을 나갈 수 있으면서도, 권해수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분명 이쯤에 있었을 터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주변을 더듬는 손길에 무언가가 잡혔다. 물건을 확인한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혼자서 이 저택을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제가, 정말 권해수의 곁을 떠날 수 있을까. 이어지는 흐름이 깨진 건 적막을 가르는 도어 록 소리 때문이었다. 흠칫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유월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베개 뒤편에 숨겼다. 그러기 무섭게 탁, 방이 환해졌다. 유월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뭐 해.” “……아.” “방에 불도 안 켜고.” 해수가 팔에 재킷을 걸친 채, 문틀에 기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자 미처 생각지 못한 가설이 뒤늦게 떠올랐다. 집 안에도 보이지 않는 눈을 감춰 놨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작은 감시 카메라 같은. 혹시 봤을까? 내가 뭘 했는지?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해수는 그저 지그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유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추, 추워서 그냥 방에 있었어. 누워 있으니까 불도 안 켰고.” “밥은.” “밥은…….” “안 먹었어?” 방법을 고민하느라 미처 식사를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자 해수가 미간을 작게 좁혔다. “밥 안 먹으면 혼낸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유월이 너도 분명 고개 끄덕였었고.” 잘그락. 시계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천천히 제게로 다가왔다. 유월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너, 너랑……! 너랑 먹으려고 기다렸어.” 유월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시계를 풀던 손짓이 멈췄다. “저, 정말이야. 계속…… 해수 너만 기다렸어…….” “…….” “지, 진짜야…….”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되는대로 소리친 것이 들통날까 봐 유월은 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해수는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유월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그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을 한 그가 손을 뻗자, 유월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이 내려앉은 곳은 유월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었다. “씻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머리를 쓰다듬어 준 해수가 나지막한 말과 함께 다시 몸을 돌렸다. 더 묻지 않는 그가 의아해 눈만 깜빡이는 동안, 어느새 씻고 나온 그가 음식을 준비했다. 식사 내내 유월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정적이 그녀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유월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힐끔 쳐다본 것이 무섭게, 그의 입이 열렸다. “일단 밥부터 먹어, 유월아.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어?”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엇나갔다. 그대로 굳은 그녀와 달리, 해수는 여전히 기계적으로 식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생각 중이거든. 정리가 안 됐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해.” “……뭘 생각하는 중인데?” “글쎄…….”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포크가 그의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의미 없는 춤을 추었다. 끽. 끼긱. 신경을 긁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메웠다. “그냥, 궁금하잖아.”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문까지 열어 놓고 다시 들어온 네가, 날 기다렸다고 말하기까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지.”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제가 탈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묻지 않았다. 왜 나가려고 했느냐고. 그럼 제가 집에서 뭘 찾았는지도 알까? 알면서도 제가 털어놓을 때까지 묻지 않으려는 걸까?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힐끔 시선을 들어 올린 해수가 유월의 표정을 확인하곤 피식 웃었다. “혼내려는 거 아니야, 유월아.”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멈칫하자,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궁금했던 것뿐이야. 겁먹지 마.” “…….” “물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조금 슬프지만…….” 말끝을 늘인 그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고선 가볍게 턱을 괴었다. 정교하고 단정한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안 가고 다시 돌아왔잖아. 기특하게.” “…….” “그거면 됐어.” 그가 빙그레 웃으며 유월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했다. 다시 돌아온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는 듯.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절망을 기뻐하고 있었다.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절망을 더없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는…… 정말이지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층 누그러진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도 확인하지 않았나. 기회였다. 유월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부탁?” “……밖에 나가고 싶어.” 호선을 그렸던 해수의 입매가 천천히 굳기 시작했다. 다정했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유월이 다급히 덧붙였다. “도망치려는 게 아니야. 나는…….” “그럼.” “…….” “그럼 뭔데, 유월아.”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며 유월이 말했다. “호, 혼인 신고를 하고 싶어.” 그 말에 사납게 일렁이던 그의 냉기가 뚝 멈췄다. 그녀가 감시를 줄이면서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해수와 함께 나가는 것. 그러나 뻔한 말로는 해수를 설득할 수 없다. 그렇기에 떠올린 것이 혼인 신고였다. 그녀로서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아기가 태어났을 때 혼자인 건 싫어. 아기 이름 옆에 내, 내 이름만 혼자 올리고 싶지 않아. 그건 싫어.” “…….” “가, 같이 가서 신고하자. 너랑 나랑, 우리 아기까지 셋이서…….”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기까지 언급했음에도 해수는 미동조차 없었다. 어쩌면 저 냉철하고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제 수를 전부 읽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애써 식탁 밑으로 감춘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회장님이나 이사님…… 사모님께서 알게 되면 너무 늦어. 아기를, 아기를 지우라고 하실지도 몰라. 그건 싫어. 아, 아기를 지우는 건…….” “유월아.” 그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는 유월의 목소리를 잘랐다. 하. 굳게 달린 입매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개 숙인 그녀가 흠칫 몸을 떨 때였다. “계속 걱정한 게 고작 그거였어?” 예상치 못한 말에 유월이 고개를 들었다. 하. 하하…….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연거푸 웃음을 흘리는 그는 재밌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입가의 손을 내린 그가 툭,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유월아.” “…….” “어서. 착하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게 걱정이었어? 아기가 혼자가 될까 봐?” 유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수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월이 넌 내가 어떤 짓까지 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하긴.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거야.” “…….” “못 하지, 절대로.”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말투는 얼핏 권태로이 들렸다. 그녀를 책망하는 것 같기도, 서운하다 투정 부리는 것 같기도 한 어조. 그러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제 몸과 마음을 두려움으로 흠뻑 적셔 놨던 것과는 모순된 행동이었다. 어느 게 진짜 권해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더욱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부정하는 듯, 혹은 감추려는 듯. 유월은 몸을 웅크렸다. 동그란 이마가 해수의 가슴께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 꼴이 되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흩어졌다. “미안해서 애교 부리는 거야, 유월아?” “…….” “알았어, 봐줄게. 귀여우니까.”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내일 같이 가면 돼? 그럼 안심할 수 있겠어?” “……응. 같이 가.” “알았어. 너랑 나랑, 우리 아기랑 셋이서 가자.” 그가 달래듯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몇 번이나 입 맞추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품에 안은 것처럼 끌어안았다. 악몽에서 깬 뒤, 그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들었던 심장 박동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유월은 부디 이 소리를 아기가 듣지 않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건 저 하나로 족했으니까. *** 식사 후, 목욕까지 마친 그들은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있을 외출 때문이었다. 잠들기 전, 섹스를 하거나 음부를 빨리는 건 그와의 일상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니, 뒤늦게 걱정에 그와 몸을 섞는 게 꺼려졌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그저 그녀의 목덜미, 맥박이 뛰는 곳에 입술을 댄 채 조용히 잠을 청할 뿐이었다. 그녀의 볼록한 배를 보호하듯 감싼 채로. 째깍째깍. 흐르는 초침 속에서, 유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배를 감싼 팔이 스르륵 내려갔다. 여전히 그의 눈은 감긴 채였다. 유월은 조심스럽게 베개 뒤편으로 손을 넣었다. 꺼내 든 것은 수면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해수는 오랜 불면으로 괴로워했다. 웬만한 약들로도 소용이 없어서 의사와의 상담 끝에 강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서서히 약을 줄이기도 했고, 몇 차례 담당 의사를 바꾼 터라 약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약을 먹을 때마다 해수는 죽은 듯이 잠들곤 했다. 유월이 직접 먹였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약효는 천천히 나타나지만, 지속 기간이 길어 최대한 주의해서 먹어야 한다고 주치의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절대 한 알 이상은 복용하면 안 됩니다. 과다 복용 시, 블랙아웃 될 경우도 있습니다.” 블랙아웃. 의사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사항이었다. 길을 걷다가 저도 모르게 쓰러질 수도 있을 만큼 강한 약. 이게 있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해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월은 잔에 미지근한 물을 따랐다. 약 한 알을 떨어뜨리자, 작은 기포를 내며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조금 색이 흐려지긴 했으나 크게 티 나진 않았다. 이 정도라면 해수도 크게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확인을 마친 유월은 잔을 깊은 곳에 숨겼다. 해수가 눈을 뜬 순간부터, 그의 감시 아래 있을 테니 지금 미리 준비해 놓아야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유월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해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팔을 들어 올린 후, 품속에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배 위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월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어서 내일이 오기를. 그래서 모든 게 끝나기를. 내일이 오면. 내일이 오면……. *** 어젯밤 준비를 미리 마친 건 좋은 선택이었다. 예상한 대로 해수는 그녀를 씻기고, 입히는 것까지 직접 제 손으로 했다. 권해수 없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양. 외출 준비를 끝마쳤을 때였다. 해수가 시계를 차는 사이, 유월은 부엌으로 향했다. 간밤 준비했던 물컵은 아직 그대로였다. 다급히 컵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우욱, 역한 소리를 냈다. 곧장 발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몸이 돌아갔다. 유월의 손에 들린 컵을 보자 그의 단정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마신 거야?” “그냥 물이야. 갑자기 목이 말라서……. 그런데 속이 안 좋아졌어. 물맛이 이상한 것 같아.” “…….” “아니면 입덧이거나…….” 조심스럽게 덧붙이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입덧을 말할 때마다 해수는 그녀를 대신해 맛을 보곤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해수는 손에 들린 잔을 가져갈 뿐 입에 대지 않았다. 그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자, 물이 찰랑거리며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한참 동안 그 광경을 응시하던 해수가 툭 내뱉었다. “물이 미지근하네. 받은 지 오래된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월은 튀어 나가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이, 일부러 정수로 받았어. 차가운 물은 속에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럴듯한 변명에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가 비스듬히 유월을 내려다보았다. 잔을 쥐지 않은 반대 손이 엄지를 검지와 중지로 살짝 감싼 채, 가볍게 튕겼다. 어렸을 때의 버릇으로, 그는 깊게 생각에 잠겼을 때마다 이렇게 손가락을 튕기곤 했다. 탁. 탁. 일정한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이 떨리려는 것을 억눌렀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척해. 마음속으로 수천 번 되뇌었다. 탁. 그리고 마침내, 해수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를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응시한 채 물을 넘겼다. 꿀꺽. 꿀꺽. 탄탄한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잔이 떨어졌다. “아무 맛도 안 나.” “…….” “그래도 이건 그만 먹는 게 좋겠다.” 그 말과 함께 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다른 말은 없었다. 고작 단 두 모금이었다. 그러나 해수의 움직임을 늦추는 데엔 충분할 터였다. 마셨다. 들키지 않았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러나 성공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가슴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내려앉았다. 분명 복수를 한 것이 맞는데, 그가 제게 저지른 짓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이건 뭘까. 이 마음은……. “가자, 유월아.” 아무것도 모르는 해수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밖을 나섰다.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는데, 그와 함께 있으니 너무도 수월했다. 겁을 먹고 벌벌 떨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항상 대기하던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없이, 둘이서만 움직이고 싶다는 유월의 부탁 때문이었다. 며칠 눈을 흩뿌리며 어두웠던 하늘은 오늘따라 찬란한 태양이 떠 있었다. 해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월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모든 사실을 알기 전,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일이었다. 아무런 제재 없이 해수와 나란히 걷는 것. 그러나 기쁘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걷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문득 해수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들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그날도 이랬어.” 먼저 입을 연 건 해수였다. 그가 빠르게 돌진하는 차를 응시한 채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러니까 내가 다섯 살이 되던 날.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권해수를 닮은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너 같은 건 배 속에서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말에 유월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정작 해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체념도, 원망도, 슬픔도 없었다. “난 아버지의 강간으로 태어난 자식이거든.” 그러나 해수는 덤덤히 말을 맺었다. 이미 수백 번도 찔린 터라, 더는 찔릴 곳도 없다는 듯. 유월의 호흡이 멈췄다. 여전히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날씨에 맞지 않게 문을 연 가게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내를 저승에서 다시 데려오기 위해 하데스를 찾아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참을 수 없었나 봐. 내 생일 날,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돌진하는 차에 몸을 던질 정도였으니까.” 본능적으로 더는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해? 이제 와 소용없는 말이었다. 그는 저를 속였고, 저는 망가졌다. 망가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째서. “난 그걸 보고 자랐어.” 그 또한 망가진 것처럼 보일까.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어. 그게 내가 처음으로 배운 사랑이었으니까.” 해수가 고개를 돌려 유월을 바라본다. 그 순간 그들의 과거가 겹쳐진다. 동반 자살을 꿈꾸며 유월의 목을 조르던 어머니와 자신이.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차로 뛰어든 그의 어머니가. 이내 모든 형상이 하나로 바뀐다. 그가 자신이 되고 하나가 된다. 또렷해진 형상이 지금의 권해수가 된다. 한순간도 제게서 떨어진 적 없던 눈동자. 그 속에 제가 들어 있다. “사랑해, 유월아.” 그가 웃었다. 자신이, 아니, 그가……. 깜빡.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만 건너면 바로 구청이었다. 그들이 목표하던 곳이 바로 코앞이었다. 유월의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해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유월도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과 발맞춰 걷던 상대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영원히 맞물릴 것 같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걸 알면서도 유월은 멈추지 않았다. 풀썩. 몸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유월은 멈추지 않았다. 돌아보지 마. 앞으로 가. 앞으로. 더 앞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입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이 흘러나왔다.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죽일 수 없으니 벗어나려 했다. 망가진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딱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권해수가 미웠다. 자신을 속이고 제 죄책감을 이용한 권해수. 저를 가두고, 트라우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권해수. 세상에 더는 없을 것처럼 다정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권해수. 매번 ‘우리 아기’라는 말과 함께, 사랑스럽다는 듯 부른 배를 쓰다듬는 권해수가…… 저는 슬펐다. 안쓰러웠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 건 그때였다. 흐릿한 시야가 밝아짐과 동시에 쩡, 유리가 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유월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약효가 완전히 몸에 퍼지진 않았는지, 해수는 힘겹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해수가 흐리게 웃었다. 돌아볼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사랑했던 미소로. 그녀가 횡단보도를 향해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차가 해수를 향해 돌진했다. ***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웅성거리는 소리. 상황을 확인한 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점점 모여드는 발……. 그 속에서 유월은 말 그대로 휩쓸렸다. 더듬거리며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죽은 듯 눈을 감은 해수를 끌어안았다. 해수야. 해수야.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함께 차에 치였던 그날처럼. 그러고 나서는……. 유월은 특실 앞에 멈춰 섰다. 방금 전 들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수술은 잘 끝마쳤습니다. 환자도 회복이 끝나, 지금부터는 대면도 가능합니다. 다만…….” 의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다리 쪽은 이미 몇 차례 수술을 받았던 터라, 추가 수술은 불가능했습니다. 형태는 온전하지만 보조 기구 없이는 이동이 힘들 겁니다.” 의사가 유감이라는 듯 말을 끝마쳤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그녀의 복수가 조금은 성공했음을 알리는 선언. 그러나 유월은 웃지 못했다. 웃을 수 없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권성 측 대리인이었다. 그는 사고 이후, 유월과 함께 자리를 지키며 간간이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보고했다. “회장님은, 안 오시나요?” 통화를 끝마친 대리인을 향해 유월이 물었다. 그가 힐끗 유월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회장님이나 이사님…… 다른 분들은 안 오시나요?” “목격자가 많습니다. SNS에 사진을 올린 사람들도 꽤 되고요. 최대한 막아 보고는 있지만, 도련님의 사고 소식이 기사화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 “회장님과 이사님께선 최대한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는 게 맞습니다. 같은 사고라도 권성 이름이 붙는 순간 다른 음모론이 씌워질 테니까요.” 비서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사를 위해서. 덧붙이지 않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 속에, 해수를 향한 걱정은 없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유월 양은…….” “저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에 몸을 돌리려던 비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유월이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해수가 차에 치였어요.” 그녀는 해수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절대적인 잘못은 운전자에게 있었으나, 제가 약을 먹이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차를 피할 수 있었을 터였다. “제가 아니었다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 “전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해수를 또 저렇게 만들었다고요.” 어린 제 뺨을 때렸던 천희영의 분노를 기억한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에서 손쉽게 제 감정을 내뱉었다. 그녀의 분노에 다른 속셈이 있을지언정, 화를 내고 울분을 표출하는 그때의 천희영은 적어도 ‘사람’처럼 보였다. 감정 있는 사람. 그러나 이 사람들은, 권성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렇군요.” 그저 짤막한 한마디로 모든 매듭을 지어 버릴 뿐. 유월은 말을 잃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죄인이 눈앞에 있다. 그들의 손자이자 아들을 또다시 망쳐 버린 정유월이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비서는 입만 벙긋거리는 유월을 내버려둔 채 손목을 비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를 위해 쓴 시간은 이제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다시 힐긋 그녀를 응시한다. 며칠째 멍하니 자리를 지킨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심 쓰듯 내뱉었다. “권성은 이런 곳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감정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닮은 권해수. VIP 병실은 넓었고, 그렇기에 더욱 공허해 보였다. 그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 보려는 듯, 병실 안은 화려한 꽃들로 가득했다. 사고 소식을 입수한 사람들이 발 빠르게 쾌차를 바라며 보낸 것들이었다. 그러나 해수는 그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지겹게도 퍼붓는 하얀 눈을 응시할 뿐. 깨지기 쉬운, 그렇기에 더욱 날카로운 유리 같다 생각했던 눈동자는 붕대로 인해 왼쪽이 가려진 채였다. 그럼에도 그는 창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의 한쪽이 망가졌는지, 온전한지도 모르는 인형처럼. “……왜 그랬어?” 유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그 안에 약을 넣었다는 거.” “…….” “알면서도 먹은 거지?” 그가 그녀를 읽듯, 그녀 또한 그를 읽을 수 있었다. 권해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치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먹었다. 기꺼이 삼켜 주었다. 왜. 대체 왜. 거칠어지는 호흡을 참는 찰나, 아주 느릿하게 해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헌팅 트로피, 발치에 쌓였던 목 잘린 새 인형들. 그를 무심하게 쳐다보던 어린 날의 권해수가 겹쳐 보였다. “네가.” 그가 그녀를 응시했다. “유월이 네가 그걸 바라는 것 같았으니까.” “…….” “그런데도 돌아와 줄 걸 알았으니까.” 감정 없이 읊던 그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주 느릿하게. 자신의 미소를 상대방에게 새겨 주듯이. “그런 거라면 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유월아.” 그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붕대를 감은 채,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고장난 다리로, 고장 난 사람처럼 웃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눈치챘으면서도 기꺼이 약을 받아먹는 기분을. 차에 치이는 순간까지 저를 향해 웃던 미소를. 지금의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쳤어.” 유월이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그 말밖에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유월은 중얼거렸다. 목소리 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허망한 떨림은 분노가 되었다가 결국엔 힘없이 흐무러졌다. “미쳤어, 정말…… 미쳤다고.” 누구를 향한 외침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다는 사실뿐. “응, 미쳤어.” “…….” “많이 미쳤나 봐, 내가. 다리 하나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까.” 순순히 긍정한 해수가 남의 것을 보듯, 자신의 다리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내리깐 기다란 속눈썹은 얼핏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 또 망가져 버렸는데…….” 그가 다시 시선을 들어 유월을 바라본다. “날 버릴 거야?” “…….” “응? 나 버릴 거야, 유월아?” 해수가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태초부터 뒤틀린 사내가 기어이 한 사람을 고장 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라던 대로 망가져 주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가 살기를 바랐던 마음이, 숨 쉬고 있다는 안도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미움까지도 전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연민인가. 혹은 생의 절반을 한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애증인가. 나는 무엇을 원했나. 나는……. “사랑하니까.” 문득 권해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널 사랑하니까, 유월아.” 삐뚤어진 마음을 내뱉던 도련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아, 이것은 어쩌면. 유월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번도 제게서 눈을 떼지 않은 그를 향해 선언했다. “……그럼 살아.” 기어이 그녀의 뺨을 타고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바라는 건 전부 하겠다면서.” “…….” “망가진 채로, 고장 난 채로 그렇게 평생 살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이 분노가 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상관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감정은 권해수의 것이었으니까. 해수의 눈이 한번 깜빡였다. 거센 바람이 불던, 눈이 몰아치던 창고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눈물을 봤을 때처럼 끈질기게. 마침내 해수가 웃었다. “응, 살게.” 아주 천진난만한 미소로. “살게, 유월아. 네 옆에서.” 해수야. 처음으로 유월이 이름을 불러 주었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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